[장평훈]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기쁨과 소망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기쁨과 소망
빌립보서 3:1-4:1



편집 주
지난 8월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 강해를 연재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빌립보서 2장 읽기
빌립보서 3장 읽기
빌립보서 4장 읽기


여는 말


한강에 국회의원과 수녀가 빠졌는데 119구조대원이 오더니 국회의원만 건져내더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니, 거기 수녀님도 빠졌는데 어떻게 국회의원만 건져냅니까?” 하고 물었더니 구조대원은 “국회의원을 그대로 놔 두면 한강 물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사회 전반에서 국민으로부터 그 인격을 존경받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우리 시대에 사표(師表)가 드물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좀더 기대를 가지고 기독교계를 보면 어떨까? 애석하게도, 스캔들은 무성하지만 참된 귀감이 되는 지도자들이 너무 드문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죄성과 부패한 심성을 보면서, 이제는 좀 더 현실적으로 사람들을 보게 된 결과, 사람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하게 되었다. ‘위를 향해 꾸준히 나아지는 사람들’과 ‘밑으로 향해 점점 더 나빠지는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위로 향해 가는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기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빌립보서 3장 말씀에서 그 방법론을 찾을 수 있다.


지난 2개월에 걸쳐 우리가 나눈 말씀을 종합해 보면, 바울은 자기가 당한 세 가지 어려움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실천해 보인 다음(1장),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됨과 겸손에 대한 권면의 말씀(2장)을 전하였다. 이제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신앙 인격의 성장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내가 받는 느낌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바울 서신 중에 자기 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본문이라는 점인데, 그는 자기 속을 완전히 내어놓고 자기의 믿음의 여정을 공개하고 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자기의 애끓는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과 그를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 그리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열정과 집념이 물씬 풍겨 나오는 곳이 바로 3장의 본문인 것이다.


본문의 구조


이 본문의 뼈대를 알기 위해서 먼저 3장 1절과 4장 1절을 주목하자. 3장 1절에서 바울은 “끝으로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라며 먼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주 안에서’란 말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와 같이 ‘주님과 한 몸이 된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과 한 몸이 된 관계에서, 그분이 나의 주인되신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라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요, 역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빌립보서 1장에서 세 가지 어려움을 당하여 바울이 보였던 태도가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태도인 것이다.


4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라고 빌립보 교인들을 부른 다음,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That is how 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때 ‘이와 같이’는 앞의 3장에서 한 말을 받고 있다. 따라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한 내용은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 안에 서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님과의 한 몸된 관계를 기반으로 든든히 서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주님과 한 몸이 된 관계에서 ‘역동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라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과 ‘주 안에 든든히 서라’는 말은 동의어가 된다. 결국 빌립보서 3장은 어떻게 하면 주 안에서 든든히 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1) 단기적으로는 살아있어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위한 방법론과 (2) 장기적으로 신앙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한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1절부터 4장 1절까지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좀더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레오(Oreo) 쿠키를 보면 앞뒤에 샌드위치처럼 있는 까만 쿠키는 서로 구별이 없고 가운데에 하얀 크림이 들어 있다. 곧, 앞뒤의 쿠키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든든히 서라’는 권면이고 가운데의 크림이 바로 ‘굳게 서는 방법, 주 안에서 인격이 성장하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굳게 서는 데는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다. 포도나무를 괴롭히는 병충들은 항상 있다. 열매가 맺을 때 쯤, 강한 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다. 빌립보 교회에도 그런 장애 요인들이 있었다. 2절에서 나타나는 할례주의자와 18절-19절에 나타나는 세속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훼방꾼들이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 두 부류의 역풍과 걸림돌이 있는 상황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어떻게 하면 영적인 활력을 가지고, 신앙 인격을 성장시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적인 활력과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바울은 다음의 세 가지 자세를 취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가 빌 게이츠(Bill Gates) 같은 장사꾼 혹은 사업가(businessman)로서의 자세요, 둘째는 이봉주씨 같은 마라토너로서의 자세이며, 셋째가 여러분과 같은 유학생으로서의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를 자세히 소개하기 전에 먼저 약간의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바울의 배경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면,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라는 거친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온다. 마치 우아하고 품위 그 자체로 보이는 여인의 입에서 갑자기 육두문자가 튀어 나오면 당황스럽듯이, 이 구절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사실 ‘개’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이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써 왔던 표현이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강한 분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1장에서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것을 악용해서 그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에게조차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바울은 자기가 받는 피해에 대해서는 원칙과 관대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가?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대로 두면, 그들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생명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을 위험성을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사도로서의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딸 가진 부모들이 인신매매단에 대해서 가지는 분노와 비슷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엄청난 영적인 피해를 끼치는가? 2절과 3절을 종합해 보면, 유대주의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든지,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등의 억지 주장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훼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말 시시한 것을 내세워서 진짜 중요한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지면상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도록 하고, 나중에 7-9절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이 point를 되짚어 보도록 하자.


그러면서, 바울은 4절에서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그 할례 받은 육체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고? 율법 좀 지킨 것 가지고 자랑하고 있다고? 그러면 정말 자랑할 만한 것 한 번 보여 줄까?” 라고 맞받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의 영적 이력서(spiritual resume)를 공개한다.


5절과 6절을 같이 보자.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나도 할례를 받았다. 7일도 아니고 9일도 아닌 정확하게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몸이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나는 이스라엘 사람일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이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명망있는(prestigious) 지파로 사람들이 서슴지 않고 선택하는 베냐민 지파인 것이다. 내가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알겠느냐?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내 부모 양쪽이 모두 유대인이다.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경건한 유대인, 이것이 바로 나 바울이 타고난 신분인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TK니 PK, 진골이니 성골이니 했던 적이 있었다. 유대인 사이에 이 정도면 바울의 타고난 신분은 진골 정도가 아니라 성골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러한 신분 뿐 아니라, 그의 열심과 성취 수준을 보여주는 이력이 나온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우리는 흔히 바리새인하면 ‘독사의 자식’, ‘외식하는 자’를 연상한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이지만,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믿음의 순수성과 열심을 가졌던 영적인 엘리트(elite) 그룹이었으며, 특히 바울은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의 제자였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소위 신흥 이단종교였는데, 바울은 그 세력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씨를 말리겠다고 나섰던 열성분자였다.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요구하는 각종 규칙과 규례들을 흠없이 지켰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신분은 최고 중의 최고(The best of best)였던 것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할아버지는 순교하셨고 아버지는 장로요 어머니는 권사이며,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착실하게 신앙 생활을 해 왔고 그 동안 청년부와 성가대에서 봉사했다. 이제까지 드렸던 각종 헌금을 잘 펴가지고 차곡 차곡 쌓으면, 아마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것이다. 십년 경력의 성경 공부에, 일대일 양육과 전도 폭발, 프리셉트 교사까지 맡아하고 있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바울은 바로 7절에서 그 화려한 배경도 그 무엇에 비교하면, 비교조차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장사꾼같은 집념으로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What was to my profit, I now consider loss)”(7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가 그렇게 자랑과 영광으로 여기던 것들이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증권하는 사람들의 주식이 회사가 부도 나면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9절에서는, 더 나아가 이를 오물로 여긴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비교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할례주의자들의 경력과 바울의 화려한 경력을 저울에 다루면서 비교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반딧불빛과 달빛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바울의 그 경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게를 비교하고 있는데, 마치 달빛과 햇빛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반딧불과 달, 달과 태양. 바울은 이 두번의 저울질을 통하여, 할례주의자들의 자랑이 그리스도만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2절에서 바울이 분노했던 이유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저들이 화장실에 가서 뭘 한 덩어리 가져다 그걸 잘 포장해서 그럴 듯하게 속이는 것만으로도 괘씸한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 귀한 지식을 가로막고 있으니 정말 분개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유익'(profit)이나 ‘해'(loss)라는 단어는 ‘이문이 남는다’, ‘손해를 봤다’고 할 때 쓰는 장사 용어이다. 여기서 바울은 명백하게 빌 게이츠같은 사업가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밑지고 판다’고 할 때 이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익을 남기는 데 있어서는 악착같은 사람들이 바로 사업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 ‘장사꾼같은’ 무서운 집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 8절-11절을 읽어 보자.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3:8-11)


이 본문의 주제어(keyword)들은 ‘지식’과 ‘얻는다'(8절), ‘안다’와 ‘본받는다'(10절)는 네 단어이다. 그 중 핵심은 ‘안다’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안다’고 할 때, 이는 머리로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까지 포함하는 말로, 그리스도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아내와 26년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내가 이것 저것 막 칭찬을 하면, “당신, 시방 나를 우롱하는거냐”고 말하곤 한다. 아내를 잘 모를 때는 ‘무슨 이런 여자가 있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말이 “칭찬하다니 참 기특도 해라. 또 해 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 것을 안다. 내가 이렇게 체험을 통해서 아내를 알 듯이, 가장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으면 하는 것이 바울의 간절한 바램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했던 것 세 가지가 10절과 11절에 잘 나타있다. 첫째로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었다.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발 아래 둔 능력(빌2:9-11), 그 능력을 자기 삶 속에 강하게 체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둘째는, 바로 그 능력으로 자기도 주님이 받으셨던 ‘고난’을 받고 싶어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다. 그리고 셋째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 몸으로 직접 체험하기 원하고 있었다.


빌립보서 2장 5절-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되시는 우리 주 예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말했었다(9월호) . 그런데 이제 바울은 자기도 고난을 받고 자기도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삶이 보여 주는 특징이다. 이런 소원이 (지난 8월호의) 빌립보서 1장에서 봤듯이 환경의 문제와 인간 관계의 문제, 그리고 삶과 죽음 앞에서 그가 취했던 태도와, (사도행전 16장의)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바울의 내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가 평소에 갈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여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이제 믿는 신랑감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부탁은 가려서 듣기로 했다. 누군가가 내게 말하기를, 장로님 딸이 있는데 잘 믿는 신랑감을 찾는다고, 그러니 신앙이 좋아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순진하게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정말 잘 믿는 학생을 찾아서 한 번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전화가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키는 얼마나 되느냐고. 한 165(cm) 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다시는 전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사실 약과가 아닌가? 키 뿐 아니라, 학벌에다 경제력과 집안까지 요구하는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는 사주까지 보는 해괴한 모습을 보곤 한다. 이 정도면 ‘그 밖의 모든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중 어떤 것이 오물 취급을 받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야 할 배우자는 어떤 배우자여야 할까? 나와 함께 매일 매일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체험할 배우자여야 하지 않을까?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만 여러분의 격에 맞는 배우자는 그런 높은 수준의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이 이문을 추구하듯 이렇게 악착같이 주님 알기를 추구하고 주님을 알아 가는 것.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첫 번째 방법이다.


달려가는 것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두 번째 방법은 빌립보서 3장 12절-14절에 나타난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 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봉주 선수가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했던 감격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더 닮아 가는 일을 바울은 마라톤 경주에 비유하고 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건강에 관한 한 별로 할 말이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 인기 스포츠였던 마라톤만큼은 좋아했고, 또 잘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라톤 주자의 심리까지도 제대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미 한 번 한 말을 13절과 14절에서 다시 반복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문장을 잘 살펴 보면 신앙 경주의 중요한 태도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보는 자세’, 곧 ‘자기 분수를 아는 태도’이다 –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12절).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13절). 사람들은 믿음의 수준을 비교할 때 항상 자기보다 약간 모자란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실 바울 정도라면, 자랑할 만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도취하지 않은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정확하게 자기를 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센서(sensor)를 가졌다는 말이다.


둘째는 ‘뚜렷한 목표 의식’이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1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14절). 이 두 구절은 모두 목표에 관한 말인데,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다.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목표란 오로지 예수님을 더 잘 아는 일, 우리 주님을 더 닮아가는 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 곧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분명히 보고,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오는 태도가 바로 ‘흔들리지 않은 집중력’과 ‘일사불란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이다 –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13절). 사실 마라톤으로 말한다면, 바울은 42Km를 거의 다 달리고 지금은 이미 주경기장(stadium)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만 거의 다 왔다는 안이함을 버리고, 한 발 한 발에 전(全)생명이 걸린 것처럼 마지막 역주(spurt)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과거의 실패를 넘어서, 바울은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1970년대, 펜실베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열린 육상 대회에 당시 모든 사람의 기대와 촉망을 받던 주자가 참가했다. 그 이전까지 깨지지 않았던 기록을 바로 그곳에서 그가 깨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전망이었다. 그래서 도처에서 이 역사적인 장면을 취재하려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단 영점 영 몇(0.0*)초 차이로 그는 기록 경신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하며 경주 모습를 담은 필름을 살폈는데,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의 앵글(angle)에 좀 더 잘 잡히도록 코너를 돌 때마다 몇 발짝씩 멀리 도는 주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트랙의 중앙에서 바깥으로 떨어진 몇 발짝. 그것이 쌓여서 그런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 많은 세월 우리가 보였던 태도와 얼마나 비슷한가!


믿음의 목표를 선명하게 바라보고 자만함 없이 최선을 다하여 뛰는 태도.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두 번째 방법이다.


천국 시민으로서 기다리는 것


이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든든히 서게 하는 세 번째 방법이 나온다. 15절-17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도 자기처럼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는 자세, 그리고 경주자로서 목표를 향해 달리는 자세를 가지라고 촉구한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3:15-17).


그러면서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는 한 부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8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투로 봐서 아마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좀 더 자세한 것이 19절에 나타난다 –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神)은 배(belly)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shame)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은 바로 먹고 마시는 일이 삶의 목적이었던 향락주의자였으며, 세상의 가치(=땅의 일)에만 마음이 가 있던 세속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들은 바로 내가 맨 처음에서 말한, ‘밑으로 향해 더 나빠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가? 교회 권사님이 옷 로비한 사건은 이제 진부한 것 같아서 그만 하겠다. 직장에서만 해도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세속적인지! 이해 관계가 오가는 회의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조금도 양보가 없다. QT 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것 같다. 승진에 관한 화제만 나오면 주체할 수 없는 관심과 집착을 드러내고, 누가 몇 억 짜리 프로젝트(project)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자기도 그런 것 한 번 해 보겠다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줄이나 대 보려고 골프장에 왔다 갔다 하거나 여기 저기 쫓아다니고는 한다. 남의 말 할 것이 아니다. 나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일생의 직업(career)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동기는 무엇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전공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쌓아, 보수도 괜찮고 사회적으로 대접도 받는 직장을 얻고 싶은가? 이런 것도 물론 다 중요하다. 그러나 전공 분야나 사회적인 위치나 봉급 수준에만 집착하여 욕심을 낸다면, 위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 될 것이다. 향락을 추구하며 세상 가치에 휘둘리는 그런 모습이 바로 가까운 미래에 보이게 될 여러분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여기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주 안에 굳게 설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이 나온다. 바로 여러분들, 유학생들과 같은 자세를 갖는 것이다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절). 우리는 한국 유학생들로서 미국에 살고는 있지만, 여권은 초록색이다. (물론 이곳에 남게 될 분들도 계시지만) 언젠가는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 갈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시민권이 또 하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이다.


나는 바로 이렇게 천국 시민된 권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쪽지를 한 장 받았다. 2001년 코스타의 둘째날 저녁, 예수님을 새로 영접하게 된 어떤 형제가 내게 전해 준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 그제는 제 25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내 생일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끝에 나를 버리고 하늘나라 시민됨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영혼의 생일입니다. 하나님 감사 드립니다. 2001년 7월 3일.”


이것이 우리가 시민되었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 갈 사람들이며, 거기서 만날 분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얼굴을 마주하고 그 분을 뵙는 것도 마음이 두근거리는데, 그 분은 더 기막힌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썩을 몸을 그 분의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돌아 갈 날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 주님 만날 것을 기다리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죽음 앞에서의 바울이 보였던 참된 능력의 원천인 것이다(1장). 그리고 그 기다림은 우리에게도 큰 능력의 원천이 된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된 우리들이 주님 만날 날을,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 바로 주 안에서 든든히 서는 세 번째 방법이다. 중요한 이해 관계가 걸린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항상 기도하는 것이 있다.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해 달라고. 나는 내일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주님 앞으로 갈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놀랍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체험한다.


빌립보서 특강을 맺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주님만을 기뻐하는 방법들을 살펴 봤다. 먼저 우리는 장사꾼이, 사업가가 집요하게 이윤을 추구하듯이 주님을 알고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처음 주님을 알았을 때부터,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며 가졌던 마음이었다. 즉, 이런 마음은 뒤에서 앞으로 우리를 밀어주는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나를 앞으로 끌어 당겨주는 미래로부터의 힘이 된다. 이처럼 뒤로부터 밀리고 앞으로부터 당겨지며 열심히 뛰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바로 목표를 향해서 마지막 역주를 하는 경주자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영적 생명력의 비밀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일 영적으로 힘 있는 삶을 살게 할 뿐 아니라, 세월이 지나가면서 더욱 예수님 닮은 인격으로 자라가는 성경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하나 하나가 이런 자세를 가질 때, 한국 교회는 다시 소금과 빛의 직분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빌립보서를 마치면서, 마음에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 한국 교회가 고난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와 여러분이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 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주님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 곧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날이 올 것이다. 아마 우리 세대가 먼저 가고, 곧 여러분들이 따라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을 함께 받는 기쁨을 누려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빌립보서 특강을 맺는다.

[장평훈] 예수 그리스도, 종으로 오신 하나님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종으로 오신 하나님
빌립보서 1:27-2:16



편집 주
지난 8월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 강해를 연재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빌립보서 2장 읽기


여는 말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어느 날 자기의 스튜디오에서 새 작품을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캔바스(Canvas)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그림의 대상을 선택하고 구도를 잡고 윤곽을 그려 넣어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열심히 그리다가, 아직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멈추고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불러 “이 그림을 완성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제자는 “저는 이런 걸작에 손을 대서 완성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대로 끝낼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다 빈치는 이 한 마디로 그 제자를 완전히 침묵시켰다. “그래도, 내가 시작한 이 그림을 보면, 넌 이 그림의 완성을 위해 네가 지닌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갖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다 빈치가 그림을 시작했듯이,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어떤 작품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고난을 통해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 더러 완성하라고 하신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본보기를 보여 주는데,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빌립보 교회의 배경


지난 8월호에서도 말한 것 같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교회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이 교회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이끌던 두 명의 리더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그 주위에 파당이 조성될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자세한 내막을 에바브로디도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두면 이 교회가 파국에 처할 수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빌4:2). 바울은 유오디아에게 권하고, 순두게에게 무언가 호소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예 이름을 들어가며 호소할 정도로 이 불화는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직접적으로 대놓고 호소하기 전에, 그는 2장에서 먼저 그 기초가 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보면, 1장 27절-2장 16절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첫번째의 권면을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1) 1장 27절-1장 30절, (2) 2장 1절-11절, (3) 2장 12절-18절. 이 세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려면 먼저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살펴야 한다. 1장 2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2장 12절에서도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다.















1장 27절 2장 12절
(1) 하나되는 삶 (1) 화합하는 삶
(2) 각자가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것 (2)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삶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즉, 서로 사랑하며, 신앙 인격이 예수님을 닳아 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로 결국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두 번째 부분인 2장 1절-11절이 나타나는데, 이런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은 먼저 ‘하나 됨’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신앙 인격의 성장’은 3장에서 다루어진다. 하나 됨과 신앙 인격의 성장, 이 두 가지가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보았던)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먼저 안부를 통하여 자연스레 실례를 보여줬고 이제는 그 원리를 가르치고 호소하고 있다. 마치 당대의 피아니스트 Arthur Rubinstein이 제자들 앞에서 기막힌 연주를 한 다음, 그 원리와 방법을 가르치고, 그대로 실행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호에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세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그런 사랑을 가지게 되느냐’고 궁금해할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빌립보서 2장에서 여러분은 그 단서를 얻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절-11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4절은 하나 됨(Oneness)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이고, 5절-11절은 하나되는 데 꼭 필요한 자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 됨(Oneness)


이제 하나 됨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을 살펴 보자. 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이라며 그들에게 주어진 네 가지의 엄청난 특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무슨 말인가? 첫째로 ‘그리스도 안의 격려’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받는 큰 격려와 용기’를 말한다. 둘째로 ‘사랑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에서 확증된(demonstrate)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셋째로 ‘성령의 교제’란 일차적으로는 ‘성령님과 나와의 교제’를 말하고 나아가 ‘성령님을 통한 우리들 사이의 교제’를 일컫는다. 넷째로 ‘긍휼이나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가지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 네 가지는 정말 엄청난 것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 중에는 빌립보 교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루디아와 간수장이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거듭난 사람들만이 보이는 이 특징을 그들 가운데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그때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의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이나 자비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 말한다. “여러분,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완전해 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로 2절의 내용인 것이다.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보자. 신혼 부부들을 보고 있자면 (낯간지러운 소리를 대담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자기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주로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이야기들이다. 즉, “정말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벗은 양말은 반드시 빨래통 안에 넣어줘요” 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대해 행동을, 어떤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2절을 보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 등의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빌립보 교회가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되라’는 바울의 요구는 좀 더 “delicate”한 차원에서 받아 들여야 한다. 먼저 ‘아닌’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떠벌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교회를 간다면서 넌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느냐?” 그 친구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나야 물론 우리 교회가 믿는 것들을 믿지.” 그는 다시 묻는다. “그래, 그러면,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냐?” 교회 다니는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거야, 우리 교회는 내가 믿는 것을 믿는다.” 그러자 또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와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교회 다니는 친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뚜렷한 대상이 없는, 일치를 위한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찬성률 100%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개성도 다르고, 의견도 다를 수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성가대가 합창을 할 때,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멜로디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소리를 내더라도 그것이 기막힌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이때 각자가 멜로디에 맞추려는 최선의 ‘자세’와 최선의 ‘태도’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에 해당한다. 결국 바울은 2장 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풍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일깨워 주고는, 2절에서, 서로 생각과 개성은 다르더라도 어떤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공유하라, 그래서 하나됨을 이루라고 호소한다. 4장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했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도 바로 이런 자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3절에서 나타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 중 하나인 ‘겸손’이다. 바울은 그런 겸손의 최상의 예를 5절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빌2:3-5).


겸손


‘겸손’이란 교회 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다. 그런데도 사실 가장 발견하기 힘든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평균 5분마다 한 번 꼴로 섬긴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섬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보기를 원하시는 덕목이지만 어쩐 이유 때문인지 가장 안 되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교만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잘못된 시각의 문제, 곧 ‘허영’인데, 영어로 “I am somebody” 라고 말하는 태도를 말한다. 소위 말하는 공주병이나 왕자병의 증상과 비슷하다. 둘째는 그런 허영의 시각으로 자기 권리나 주장을 내세우는 자세, 곧 ‘다툼’인데, 영어로 “Me first!” 라고 소리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요즘 들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당신, 어째 기도가 좀 부족한 것 같아” 라는 말을 한다면, 대부분은 언짢게 생각할 것이다. 왜 그런가? 나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존 의식이 누군가에 의해 손상 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허영의 문제이다. “그래 좋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 하느냐? 당신 QT 해? 나는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다툼의 문제가 된다. 이런 다툼이 더 진행되면, “너 나이 몇 살이냐?” 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문화는 호칭에 민감한 문화로 교수, 교수님, 박사, 박사님이 서로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좋아한다. 만일 제자가 나보고 Mr. 장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싸우자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건 격식(protocol)이라는 것을 유난히 따지는 문화가 아닌가.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지 혹은 교만한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리트머스 시험을 해 보라. 첫째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했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하는가’하는 시험으로, 이를 통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곧 이 시험을 통해 내가 스스로에 대한 ‘허영’에 빠져 있는지 아닌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장기(長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며 화제를 독점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시험이다. 이때 만일 속으로 부글부글 한다면, 나도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 시험 결과는 곧 허영심을 못 이겨 이제 ‘다툼’을 하고자 하는 나의 본질을 드러낸다. 교회가 분열되는 곳을 잘 보라. 그곳에는 반드시 허영과 다툼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속한 성경 공부 그룹 안에 긴장과 불화가 있는가? 틀림 없이 허영과 다툼이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겸손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2:3-4) 이 구절은 겸손도 (교만과 비슷하게) 두 가지 자세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는 것이 첫째 자세이고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둘째 자세이다.


명백하게,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허영심(“I am somebody”)과는 대조되는 자세이며,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다툼(“What is best for me”)과 대조되는 “What is best for you”의 자세다. 결국 ‘겸손’이란 (허영 대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내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툼 대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자세는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른 사람보다 (물리적인 힘이든, 권력이든) 더 강해지는 것, 무지막지하게라도 지배하는 것이었다. 소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가졌던 유일한 부류는 ‘노예’들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세를 최상의 미덕으로 들고 나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도 힘의 논리가 앞서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앞에 돈키호테 같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종’의 논리로 낮아져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 됨을 누리고 싶은가? 개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천국의 하모니를 이루고 싶은가? 겸손하라. 물론 겸손이 힘들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 최상의 예를 보인 분을 보면서 겸손하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최상의 예로 들고 있다(빌2:5-11). 아브라함을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모세를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다윗을 예로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시는 그 분이 어디까지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준다 –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본문은 초대 교회의 찬송가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리스어에 능통한 사람들의 말을 빌면, 원문은 라임(rhyme)과 미터(meter)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산문이 아니라 운문, 운문 중에도 노래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초대 교회들이 불렀던 찬송가이고, 빌립보 교인들도 잘 아는, 어쩌면 그들이 바울과 함께 불렀을 지도 모르는 찬송가라면, 서로 잘 아는 찬송가의 가사를 가지고 그들에게 호소를 하는 셈이 된다. 두 번째 특징은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말할 수 없이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높아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때 ‘낮아짐’과 ‘높아짐’의 하나 하나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자.


7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분을 하나님 자신이었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 곧 ‘Three persons in one Godhead’이다.) 그리고는 그분의 낮아지심을 소위 점층법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비워 종이 되셨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죽기까지 섬기셨다·죽임을 당하셨다.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20년 전, 12·12 사태 후에 있었던 일로 육군 참모총장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 아마 우리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고 사령관이 다시 머리 깎고 훈련소에 입대해서 군가 부르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그것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으로 오시되, 왕이나 장군이나 학자로 오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분은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 그분이 태어난 곳은 쥐나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외양간이었다. 목수로 출발해서 한때 랍비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분의 삶을 돌이켜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종(servant)이었고, 인간들의 종이었다. 그분의 삶은 인간들의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부분을 씻어 주려고 자신을 바친 종의 삶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몸을 던져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반역자들이나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사형 도구로, 곧 ‘치욕’의 상징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었다 –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마디로 ‘치욕’과 ‘저주’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치욕과 저주를 한 몸에 지닌 채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아예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고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유대인 꼬마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남자아이로 아주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두뇌로 그 학교 사상 전무후무한 문제아가 되었는데, 갖은 기합을 다 받고 벌이란 벌은 다 받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학교 생긴 이래, 3학년으로서 최초로 퇴학을 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꼬마가 원래 다니던 학교는 유대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였는데, 부모들이 공립학교로 전학을 시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3개월을 못 버티고 또 퇴학을 당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는 유대인들이 잘 안 다니는 카톨릭 사립학교로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를 옮긴 그 다음 날부터 그 꼬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해도 180도로 변한 것이다. 그 부모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그 꼬마에게 묻는다. 도대체 너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그 꼬마가 실토를 하기를, 등교 첫날 신부님 방에 인사하러 갔다가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꼬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 신부님이 이제는 장난을 그만 치라고 타이르는데 말 같지도 않아서 대답도 잘 안 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뒤를 썩 돌아보더란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봤더니 벽에 십자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잘 보니까 어떤 아저씨가 매달려서 벌을 서고 있는데 반쯤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 머리털 나고 그렇게 몰상식한 기합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신부님이 다시 자기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짓는데 소름이 확 끼치더라며, 그리고는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어떤가? 철 없는 아이지만, 십자가의 본질을 제대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 십자가에 자기가 매달릴 것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와 치욕을 당해야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와 여러분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이 그곳에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가? 바로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오신 그 거리만큼이나 크고 크신 사랑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저 저주의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마땅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기 자존심 내세워서 형제들에게 상처나 주고 있지는 않은가? 자존심 좀 상했다고 형제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이 종이 되어 죽음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뭐가 되어야 마땅한가? 우리가 포기 못할 다툼이 어디에 있으며, 포기 못할 허영심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용납 못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제는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가는 길에는 이미 먼저 간 발자국이 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낮은 곳에 가서 형제들의 더러운 곳을 씻어 주며, 그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랑을 알았던 바울은 그 주님을 평생 사랑하며 따랐다. 그 사랑으로 환경의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죽음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먼저 돌아보셨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본이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도저히 주님이 갔던 길을 갈 수 없다. 정말 두렵고 힘들 것 같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존심에, 내 성깔에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분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9절부터 나타난다. 이제 9절부터 그리스도의 높아짐이 나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께서 는 그분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시고 스스로 낮아지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그 영적인 원리는 구약에서부터 많이 보아온 것이며, 주님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좀더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보좌는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이며, 이제 그분 앞에서 만물이 무릎을 꿇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8-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만물을 발 아래 두신 이가 바로 우리 주님이실진대, 그 어찌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이제 우리로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분의 능력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낮아짐을 감당하게 하신다. 우리는 도저히 스스로는 낮아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 고난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이 부활의 능력으로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2:12)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하나됨을 이루고, 주님 닮은 모습으로 자라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위에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


맺는 말


이번 호의 본문, 빌1:27-2:16절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 혹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인 ‘하나되어 서로 사랑하는 삶’에 관해서 함께 살펴봤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서, 우리도 낮아져서 섬길 때,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고,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초대교회 시절 어떤 믿지 않는 역사학자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반드시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결국 실현되었다. 주님 십자가 때문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그들의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폭발했을 때, 결국엔 전 로마 제국을 뒤집어 놓지 않았는가!


우리가 이런 섬김과 사랑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해야만 한다. 이 일에 KOSTAN들이 앞장서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끓어서 밖으로 폭발하여, 한국을 뒤집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주님께서 2000년 전에 먼저 시작하신 낮아지심과 섬김, 그것은 우리 대에, 우리가 감당할 몫을 남기고 있다. 이 일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는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