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성]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의 삶의 관심은 분명히 달라졌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았던 삶으로부터 돌이켜, 이제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고 섬기시기 원하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적지 않은 숫자의 Tele-Evangelist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 때문에 종종 비난을 받아왔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비판들 중의 하나는, 설교가들의 메시지들이 가끔 매우 치우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삶이란 많은 경우에 고통과 좌절일 수 있고 잘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지향적인 가치관과 그러한 삶의 태도를 비판하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비판적인 소리들이 나오게 된 뒷 배경에는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입장들이 충돌하고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 한 편의 소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편의 소리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지위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드러나므로 그 사람이 처한 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이다. 어찌 되었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서로 공감을 하지만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심각한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 조직 내에서 리더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상반되는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리더십은 그 사람의 조직 내에서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positional” leadership이며 둘째로는 지위에 상관 없이 영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influential” 혹은 “functional” leadership 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다른 견해의 충돌은 이 각각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의 정황을 둘러보면 리더십이 행사되는 데에 있어서 이 각 양상이 부정적으로 표출되는 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건전한 영향력은 고사하고 조직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치는 사람이 리더의 자리(position)에 앉아 있는 경우나, 혹은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단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위치(position)에 서지 못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소위 구조적인 모순이 극대화된 경우가 그 구체적인 예들이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이러한 “functional leader”가 그의 “positional leadership”의 위치에 서는 경우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은, 이 각각 다른 견해들의 기본 전제로서의 세속에서의 조직의 모습, 즉 “leader”들과 “leadee”들로 구성된 보편적인 공동체의 모습 자체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부터 매우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세속 조직의 사명의 기본 목표는 어떤 “목표”나 “일”을 성취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 조직의 사명을 가장 잘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을 리더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사람들의 역량을 비교와 경쟁을 통해 평가하여 리더를 결정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는 조직 내의 사람들의 ‘관계’보다는 ‘사명의 성취’를 극단적으로 중요시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현재의 조직의 사람들과는 전혀 친밀함의 관계가 없던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로 “모셔오기”도 서슴치 않는다. 이와 같은 행태들은 많은 경우 조직 내에 심각한 갈등들을 초래하게 된다.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사명의 성취’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나머지, 공동체 안의 ‘관계지향’적인 노력들이 무시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의 리더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신명기 17장 14절-2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권 국가의 기반을 닦을 때에 필요한 지침들을 지도자 모세를 통해 주신다. 주목할 것은, 그 “왕”을 세우려는 생각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의 조직을 보고 배운 것에 근거한다는 것이다(14절). 하나님은 정말로 백성에게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 오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세속 조직의 요구 대한 요청을 들어 주시리라는 허락과 함께, 주의할 일, 즉, 왕을 세우는 방법과 그 왕이 어떠한 삶의 기본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가에 대한 지침을 주고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십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리더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공동체 안에서의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관계는 마치 피를 나눈 가족 형제와 같은 “하나됨”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리더는 공동체 지체들의 모든 삶의 정황들, 고통과 아픔과 기쁨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즉, 네 형제 가운데에서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15절). 그렇다면 리더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결코 “저들을 위해….”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 대해 가졌던 기본 자세이며(예: 이사야53:6)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던 중보자의 자세인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리더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대한 기본 원리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된 자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16절). 이 말씀에는 다분히, 리더는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의지할 것이지 결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경계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끝에 굳이 병마를 많이 구하기 위해 애굽땅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강조하신다. 더불어서,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전에 이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 즉 애굽땅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결정들은 더 큰 기본 원리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리더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안목으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안목은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 절대적 가치 기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 가치 기준이란 말씀의 원리인 동시에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셋째로 볼 수 있는 원리는, 리더는 죄의 예방에 대한 전술이 탁월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미혹하는 요소들을 미리, 체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된 자는 “많은 아내를 두지 말 것”과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17절).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마음이 미혹되어진다고 경계하신다.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유혹의 자리를 피하고, 유혹의 시간을 갖지 않고, 유혹의 대상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어야한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도 이 예방의 전략에 철저하지 않을 때에 너무도 쉽게 넘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넷째 원리는, 리더는 말씀을 일생동안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왕이 된 자는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명령하신다(18-19절).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율법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제사장앞에서 왕은 자기 손으로 필사해야한다(18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손으로 한 자 한 자 필사해가는, 말씀앞에서 낮아진 리더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여주시는 원리는, 리더는 행동과 더불어 중심으로 섬기는 자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비록 겸손하게 되지 않더라도 그 겉으로 표현하는 태도가 겸손해야 한다는 정도의 겸손이 아니다. 그의 마음 자체가 그 형제위에 교만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that his “heart” may not be lifted up above his countrymen that his heart may not be lifted up above his countrymen 20절). 다시 말하면, 겉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속마음까지도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되려면 섬기는 리더의 내면에서 혁명이 일어나야한다. 바로 이 말씀이 지적하시듯이, 그 내적 혁명은 살아있는 말씀과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혁명으로서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9-20절).
우리 모두가 공감하다시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그의 공생애동안 섬기는 리더로서의 완전한 모범을 사시었다. 사실 주님의 세상에 오셔서 섬기신 모습은 “positional leadership”도, “influential leadership”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유력한 지도자의 “지위”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속적 조직력”을 갖고 섬기시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주님은 자신의 “비천한” 사회적 신분을 인정하시면서 단순히 “영향력”만을 행사하신 분도 아니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능욕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범죄한 세상을 위해 다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된 삶의 정황가운데에 들어오셨던, “leadership of living-together”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것은 세속의 어떠한 위치로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어떤 영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섬김의 모습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목숨까지 주시는 사랑, 즉 가장 낮아지신 섬김의 자리, 그 섬기셔야 할 사람들의 상황안에 오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섬김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주님은 더 낮은 자리에 서시는 그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주님의 그 수많은 섬김의 모습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마를 향한 섬김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주님을 보지 못했던 그는 나중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며칠후, 주님께서 이 도마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도마가 말한 그대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영광의 몸이 될 것을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다. 그러기에 모든 연약함과 눈물이 없는 영광의 몸이 될 것을 우리는 감격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몸은 다르다. 그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있다. 그 몸에 그 상처들을 그대로 갖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도마의 연약한 믿음을 세우시기 위해서였다고 믿는다.
험악하고 사랑이 식어진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가나안의 정복되지 않은 나라들속에 섞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같다. 그러나 오래 전, 한 백성공동체를 택하셔서 가나안 땅의 족속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죽음으로 내어주신 이 세상의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기위해 그리고 그들이 더 성숙한 자리로 들어가도록 하기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섬기는 리더들이 구름과같이 일어나기를 소원하며, 나 또한 그렇게 되기를 훈련하며 또한 행동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