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진]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 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유학생의 삶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시작할 때, 일년을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마감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매달 마감일에 쫓겨서 편집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냈는데, 이번 달에는 유난히 늦어졌다. 한국으로 여행을 한 이유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쓴다는 생각이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던 탓이다. 수도 없이 글을 썼다가 지우곤 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나의 생각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내와 함께 이민가방 7개에 짐을 싣고 매릴랜드에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이 1992년 여름,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와 아내는 학위를 받고, 직장을 구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얼마 전에 부교수로 승진을 하면서 Chaired Professor의 자리를 받기도 하였다. 유학 와서 온 첫 주, 이곳으로 오기 일주일 전에 이태원 가게에서 산 신발을 신고, 학생 아파트로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지름길로 가려고 하다가 시궁창에 빠져서 새 신발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기억, 학생 아파트의 열쇠를 받아서 들어간 첫 날, 아내하고 둘이서 집안에 있는 유일한 등이었던 부엌의 등 밑에서 담요 두 장과 수건을 둘둘 말아서 잠을 청하였던 그 장소, 그곳에 도착한 이틀 째에 만난 지도교수가 만나자 마자 엄청난 양의 일을 넘겨줄 때 가졌던 황당한 부담감, 그렇게 열심히 도왔던 지도교수가 박사과정 일년차가 지날 무렵에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던 때, 일주일에 50불을 가지고 생활을 하기 위해서 먹어본 과일은 세일을 하는 사과와 바나나 외에는 없었던 박사과정 시절, 첫 째를 가진 아내가 좋아하는 사과를 잔뜩 담았다가, 가지고 갔던 돈이 모자라서 몽땅 그곳에 놓고 떠나야 했던 때의 아픔–그 아픔을 차마 나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직장을 구한 다음에야 말을 해야 했던 아내의 고생, 난 지 이제 한 달이 된 아이를 한 손에 안고, 다른 한 손에 첼로를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해야 했던 아내의 모습 등등…


이런 삶의 과정 속에서 나의 마음을 지켜준 한 성경구절이 있다면, 바로 에베소서 1장 17-19절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를 유학생으로 이곳에 부르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 대하여 소망을 품고 계시다. 그 소망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모든 일에 엄청난 능력으로 나를 공급하신다는 바로 그 말씀이었다.


나의 고통에 의미가 있고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그 약속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지금도 힘이 된다. 나를 내 보내려고 생각하는 지도교수에게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를 넘어서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사과정 2년차는 정말로 힘들었다. 지도교수가 나를 내 보냈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나를 4명의 교수들에게 나누어서 시간을 배정했다. 모든 교수는 나를 full-time으로 이용하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4배의 시간을 들여서 조교의 일을 해야 했었다. 그 중의 한 중국교수는 매주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려고 학교에 올 때면, 나에게 학장실에 가서 임시 주차 증을 받아서 자기를 주차장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날이 좋을 적은 상관이 없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서서 그 교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때도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2년차 말에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5년 동안 보장 되어있는 줄로 알았던 장학금이 2년 말로 없어지고, 그 이후는 지도교수가 알아서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막막했다. 나를 돌봐줘야 하는 지도교수는 나를 쫓아내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나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에게 힘을 준 말씀이 바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는 말씀이다. 그 힘은 바로 죽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 힘이라고 사도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그 힘은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그 힘이 내 속에 있는 힘이라는 것을 기도할 때 깨닫게 되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힘이 나의 지도교수보다 더 뛰어나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믿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그 믿음에 한번도 실망을 시키신 적이 없었다. 나를 내 보려던 지도교수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다시 받아들였고, 그 프로젝트로 인해서 그야말로 스타교수가 되었다. 곧 그는 학과 장이 되었고, 그는 나의 배후에서 나를 돕는 최고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하나 하나 세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학생활 내내 나의 삶을 주장해 온 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의 소망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그것이 나의 직장을 구하는 일에, 그 이후의 삶에, 그리고 각종 사역에 참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1995년 가을 나는 박사과정 4년차였다. 논문은 거의 마감이 되었고,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학교에 일년 더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일년동안 프로젝트를 더해서 논문을 몇 개 더 실으면 외국인으로서 미국대학에서 직장을 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둘째를 곧 낳게 되는 데, 그러면 도저히 박사과정 월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면서 학장과 약속을 내 앞에서 하였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 안되면, 4년차 말에 job market으로 나가서 아무 학교나 직장을 잡겠다고 말하였다. 10월 31일이 그 날이었다. 내 생일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오후 3시에 학장실로 내려간 지도교수가 오후 5시 30분이 되어야 나타났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고는 “일년동안 Visiting Professor로 너를 쓰기로 했다. 월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두 배 이상 되겠지” 하면서 “Happy birthday to you!”라고 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미 학교의 예산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학장이 자신의 비상예산에서 나를 고용했다고 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visiting faculty가 필요한 상태도 아니었고, 설상 필요했다고 해도 나를 그 자리에서 쓸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듯했다. 일년동안 내가 그곳에 더 머무르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은 40일 연속 새벽기도와 아침 금식으로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기드온의 이야기가 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기드온 당시의 추수할 곡식이 바로 미국의 이민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국 교회와 우리들의 1.5세 2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하나님이 쓰실 만 하니까, 사단이 그들을 빼앗아 간다는 말씀으로 기드온 시대의 이야기가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 해 여름 JAMA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셋째 날인가, Sammy Tippit이 인도하는 저녁 기도회였다. 미국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입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 저 지도 속에 있는 캠퍼스로 나를 보내소서. 저곳에 있는 한국계 학생들에게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나왔다. 그 날 이후, 그 기도가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1997년 이곳 클리브랜드에 오자마자, 한국에서 모교를 비롯해서 많은 학교에서 귀국하라는 초청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정말로 한국에 귀국하고 싶었다. 기회도 무척 좋았고, 그때가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던 적도 있었다. 내가 지원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들에게 귀국해서 하나뿐인 아들로 떳떳하게 아들노릇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모교의 강단에 서서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는 그런 꿈을 쉽게 버릴 수 도 없었다. 하나님께 사정도 해봤다. 그리고, 내가 귀국을 하면, 그 캠퍼스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가 되겠다고 기도도 해봤다. 그때 마다 하나님은 1996년 JAMA에서 기도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시곤 했다. 아무 말씀 없이, 그 모습이 비디오처럼 나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한국에서의 초청에 응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런 미련 없이 모교의 자리에 지원하는 친구를 위해서 정말로 축복하면서 추천서를 써 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아마도 앞으로 또 좋은 기회가 한국에서 생기면 마음이 싱숭생숭해 질 듯하다. 이번에도 한국에 짧게 방문하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참 할 수 있는 일이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로 다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또 똑같은 비디오를 내 마음속에 틀어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무슨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대답하여 보라. 유학생활을 향한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을 유학생의 자리 (아니면 유학생 배우자의 자리)로 부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당신은 궁금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부르심 의 소망을 붙잡고 고민해 봤는가? 그 부르심의 소망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묵상해 보았는가?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그 소망에 붙잡히라. 그 소망이 당신의 삶을 주관케 하라.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하라. 유학생의 자리가 바로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는 그 자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유영진]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이 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1-2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땅의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눈에 보이는 날씨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권의 변화로 인함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히터와 전등도 결국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전자력의 영향이다. 온 우주가 유지되는 것도 온갖 힘의 작용이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영학이든,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의 상호역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시장에서의 가격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변수는 결국 수요와 공급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배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냐 하지 못하는 냐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삶, 한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그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리더들을 가까이서 만나면 남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 시각의 매력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한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였던 DoCoMo의 회장으로부터 직접 그의 경영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1세기의 지식경제 시대의 일본사회경제를 놀라운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의 혜안에 큰 감동을 받았다. Cisco의 회장 John Chamber도 그와 같은 인물이다. 시대의 경제, 사회, 기술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데에서 나오는 탁월한 시각이 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그 quality가 역사의 맥을 보고 사는 삶에 비하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어지는 삶의 패턴을 보면서도 그것에 대한 거시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때 그때 삶에 사건이 터질 적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쁜 삶이다. 이번주는 시험으로, 다음주는 가족일로, 그 다음주는 교수와 세미나준비로 정신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고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곳에 내가 왜 있는지, 뭘하면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다. 어제 동료교수가 집에 가다가, 자신의 수첩에 그다음날 아침 8:30분에 약속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서 비서에게 “What am I doing here at 8:30 tomorrow morning?”이라고 말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That’s what happen, when you let others control your life”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불행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많은 기도를 한다. 병이 나면, 병을 고쳐달라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채워달라고, 직장이 없어지면 직장을 구해달라고, 마음이 불안하면 평안을 달라고, 교회가 어지러우면 교회가 평안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인생의 나가는 방향은 마치 안개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두렵고, 답답하다.


역사의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떤 시각에 역사를 보는가 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나는 유학생들이 역대상하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개인의 역사와 그 속해있는 국가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열왕기서가 솔로몬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유대왕조의 멸망의 시점까지를 기록한 책인데 반하여, 역대상과 역대하는 정통 유대왕조를 중심으로 창세기부터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를 왕실에 있던 기록을 중심으로 적은 책이다. 열왕기가 왕들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건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받은 장면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매우 담담한 어투로 유대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역대상은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 지루한 족보를 줄줄이 엮어가고 있다. 왜 하나님은 역대상과 역대하를 쓰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구약성경 한 가운데 그 책들을 넣도록 하셨을까? 이미 다른 성경책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인 이스라엘과 인류의 역사를 왜 두 권의 책에 다시금 기록하게 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역대기는 에스라에 의해서 포로귀환시기에 쓰여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에스라는 고레스왕의 칙명으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지는 상황에서 이 책들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국가는 없어지고, 왕실은 산산이 분해되었으며, 그들이 믿던 하나님의 성전은 돌부리하나 남지 않고 부숴졌다. 찬란했던 솔로몬의 궁전은 시랑의 굴혈이 되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영화를 누리던 그들의 왕은 눈알이 뽑혀서 적들의 손에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그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방 신들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역대기를 통해서, 이제까지 놀랍게 자신들의 민족을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선택받은 다윗의 후손이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여주었던 것을 일깨워 준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오늘 바로 이와 같은 황무지의 돌무더기 가운에서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우리 조상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역대기의 주제이다.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이 용맹한 왕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왕도 없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역대하 마지막에 고레스왕의 성전재건축 명령이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였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고 단 하나의 실수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들의 눈을 돌려준다. 그리고 역대기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역대기를 읽고 나서 이후의 예언서를 읽으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오늘 역대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의 삶, 조국 한국, 그리고 이 땅 썩어져가는 미국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 한계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한다. 더 이상은 어떻게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보고 포기를 선언하며 환자의 상처부위를 덮어버리는 외과의사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고 이 사회를 포기하고나 있지는 않은가? 이제까지 나를 지키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손길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분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는지 모르나,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신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유학의 삶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지금 성공하고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은 가장 영화스러웠던 솔로몬왕의 시대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아니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가? 예루살렘의 멸망도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더 이상,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살지 말자. 비롯 유학을 오는 결정은 기회가 있어서, 남들이 다와서, 직장이 지겨워져서, 아무 생각없이 왔다 할 지언정, 앞으로의 남은 유학의 삶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아보도록 몸부림쳐보라.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한번 살아보자. 당신을 이곳을 끌고 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놓고 역대기를 쓴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뭐라고 기록하겠는가?


한국의 사회와 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과 경제인을 욕하기 전에, 반미 혹은 친미를 논하기 전에, 북한의 핵위협을 논하기 전에, 그 뒤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자. 전세계에 가장 큰 교회가 있는 나라, 가장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자랑하는 나라, 가장 뜨겁게 기도하는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자랑하기 전에, 썩어가는 한국의 교계와 정치와 문화를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하나님의 손이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시는 지를 주목하여 살펴보자.


미국을 생각할 때, 이락과의 전쟁이 옳고 그르고를 논하기 전에, 부시의 외교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미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하자. 역사상 유례없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초강국이 된 미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6개월을 토론하며서 세운 나라 미국, 그 미국의 역사 뒤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여 보자. 그 마음을 품으려고 몸부림쳐 보자. 인류역사상 유례없이 청교도의 신앙의 고백을 근거로 세워지고, 그들의 지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쓰는 나라인 미국.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한 이라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위스키, 섹스!” 전세계의 포르노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타락과 향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할리우드가 문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리고, 하루에 3000명이 넘는 unborn child가 낙태로 살인되어지는 이땅 미국을 하나님의 심장으로 한번 바라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미국에게 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90년대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으나, 하루아침에 그 부는 다시 천문학적인 숫자의 재정적자로 돌아섰고, 그 엄청난 부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찟는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미국이 좋아서, 친미를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오늘 미국의 역사를 가지고 역대기를 기록한다면 무슨 말을 기록할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대기를 읽으면서, 내 자신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한국과 미국 교회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유영진] 부활을 생각하며

유학생의 삶 (7)


부활을 생각하며



“More than that, I count all things to be loss in view of the surpassing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but rubbish so that I may gain Christ …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irmed to His death; in order that I may 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빌립보서 3:8, 10-11)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광현과 동현을 학교에 내려놓았다. 동현이는 언제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어제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서, 자랑을 하기 위해서 바지를 두 번 접어 입고는 학교로 갔다. 그 뒤를 광현이는 천천히 따라 걸어 들어간다. 나를 쳐다보고는 씩- 웃는다. 창문너머로 “I love you”라고 말해주고는 학교를 향해서 떠났다. 학교에 오니 봄방학이라 6층이 조용하다. 이번 방학에는 밀린 paper를 반드시 끝낼 결심을 하고는 office로 들어섰다. 얼마 전 새로 산 Power Book을 켜고, 커피를 옆에 놓고서, 브라암스의 음악을 켜놓고 부탁 받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데, 선배교수 Fred가 들어와서 다음주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약속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파랗다.


삶이 아름답다. 순간 순간 지나칠 적마다, 다시 보지 못할 찰라가 아쉽다. 사진에도 담아보고, 비디오도 찍어보고, 일기로도 적어보고,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보기도 하지만, 너무나 빨리 달려만 가는 시간이 안타깝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계산을 해보면 평생에 가질 수 있는 주말의 숫자가 4160이다. 그 중에 이미 1800여 번을 사용하고 이제 약 2300여 번이 남았다. 아쉽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아쉬움은 더욱 커가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삶과 그 속의 만남과 경험이 소중한 만큼, 그리고 인생의 끝과 그로 인한 헤어짐이 아쉬운 만큼, 부활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커짐을 느낀다. 얼마 전 읽은 C. S. Lewis의 글이 생각난다. 죽음에 대한 철저한 경험과 인식이 없이는 부활의 감격과 감사를 느낄 수 없다고 했던 말.


2000년 전, 목숨을 걸고, 가족과 온 재산을 버리고 따르던 예수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사건은 현실이었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게 부활한 예수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자신의 모든 credential을 버리고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평생을 투자한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 오직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협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사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분의 부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의 삶을 붙잡았다. 그 부활의 현실이 그들을 흥분케 했다. 그 부활의 현실이 이 땅 위에서의 기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그 부활의 소망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하고 가치 있는 투자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활을 해왔으나, 부활은 나에게서 관념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삶의 소중함을 깨닫지도 못했고, 죽음의 현실성을 피부로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로 인한 나의 한계성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활의 약속은 그저 하나의 신학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부활은 나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활은 그저 부활절 설교와 성경공부의 주제에 불과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의 죄 사함과 축복 받고 능력 있는 삶의 약속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인 약속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이 부활절뿐만 아니라 365일의 나의 생활 속에서 소망이 되고, 그 부활이 단지 신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관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삶에 활력과 의미를 주는 현실이 되었다. 삶의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구석들이 부활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볼 때, 나의 이 땅위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다. 붙잡고만 싶었던 것들을 이제는 지나가는 흐름 안에서 아름답게 볼 수 있고, 피하고 싶었던 것들을 담담하게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전에는 생각 없이 스치던 대상들이 부활의 렌즈를 통해서 볼 때, 새롭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이제 어렴풋이 나마, 사도바울이 그토록 알기 원하고 동참하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삶과 부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유학생활, 무척 바쁘다. 힘들고 정신이 없다. 당장 눈앞에 와 있는 시험과 논문, 세미나 발표와 교수와의 만남이 삶의 모든 것인 양 다가오기 쉽다. 내가 현재 하고있는 일이 나의 삶을 사로잡기 쉽다. 그럴 때, 부활의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보기 바란다. 전쟁의 소문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 때에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가 기다려진다.

[유영진] 성공한 소수 (小數)

유학생의 삶


성공한 소수 (小數)



예 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막 10:17-22)


마 가는 자신이 적은 복음서 10장에 한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관하여 적고 있다. 예수님께 찿아온 이 사람을 다른 복음서에는 부자 청년 관원이라고 했다. 그는 젊고, 관원이고, 부자이며,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으며, 또한 예수님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배경을 조금 생각해 보면, 그는 모순 투성이의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젊어서 부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관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원은 많은 돈을 벌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율법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하여 저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의 질문을 던지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관원의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의 삶속의 모순은 바로 성공을 지향하는 그의 삶의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이다. 세상 속에서는 로마의 관원으로, 그 동네에서는 부자청년으로, 회당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청년으로 살았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의 “성공”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물어본 영생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정으로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위한 잘 준비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유학생들의 모습을 또한 본다. 지극히 성공지향적이다.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그곳이 학교이든 교회이든,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주변에 힘있는 자를 위해서 살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은 바로 나보다 힘있는 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로마정부, 율법주의자, 사업가,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내가 “인정받아야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교수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친구의 가장 친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야 하고, 집에서는 부모님들께 가장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님 앞에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나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다. 나의 삶의 내면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부자청년에게 로마정부와 율법주의자와 예수님이 각각 상충된 삶의 모습을 요구했었던 것 처럼, 나의 삶속에서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와 같은 모순을 덮어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렇게 성공한 젊은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성공을 추구하고, 강한 자들을 만족시키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성 공한 자들의 주변에는 반드시 실패한 자들이 있기에 마련이다. 이세상의 법은 한사람의 최후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배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그와 같은 생존경쟁을 통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강한자는 약한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혁명적인 권유를 하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의 성공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성공은 아름다운 성공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유 학생들은 성공하려고 온 자들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공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소원은 품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유학을 오지 못하고 그 꿈을 접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유학에 성공하면, 그 유학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우리과에서는 박사과정 신입생들을 매년 50%이상 걸러내곤 한다. 2년차로 진급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뒤에는 실패한 자들의 아픔이 깔려있기에 마련이다. 학위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분야에서 교수 한명을 뽑는데 150명 정도의 지원자가 들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예이다. 한 사람이 교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149명의 실패자가 생겨야 한다. 학회지에 논문을 보내면 평균 선택율이 5%를 못미친다. 5편의 성공한 논문을 위해서 95편의 논문이 rejection의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의 환경속에서 살다보면,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나의 삶의 DNA 속에 박혀있는 것 같은 느끼게 된다.


그 런 나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내가 그 부자 관원이라는 것이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네 주변에 너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자들을 섬기라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다. 참으로 힘든 적이 많다. 그러나 주님이 그 부자관원을 보실적에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셨다는 말씀이 힘이 된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의 눈을 내가 자연적으로 보지 않는 곳으로 돌리는 훈련을 한다.


교 수라고 하는 직업은 참으로 묘한 자리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 비서, 학생, 심지어 가족들까지, 자신이 하는 연구와 강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자리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한 기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게 만든다. 내가 6년전 Case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학회를 가려고 준비하는 때였다.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는데 비서가 물어본다. “Do you have any preference?” 그래서 아무자리나 괜챦다고 말했다. 그 비서가 웃으면서 하는말이, “Youngjin, you have a long way to go to become a faculty member. As a faculty member, you should say, ‘I will never fly unless I get seat number 4C on that flight.'” 물론 그때는 웃고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그와 같은 대접을 기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수들의 삶은 deadline으로 이루어져 있다. Deadline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교수들 같다. 그래서 연구제안서나 강의안 제출 마감일이 되면 학교가 마치 동물원 같다. 마감 시간 직전까지 자신의 제안서를 붙잡고 이렇게 저렇게 고치다가, 마감 직전에 비서나 학생들이 기타 다른 모든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놨다가, 제출시간에 맞추어서 제출하기를 원한다. 모든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삶, 그것이 교수들의 삶의 모습이다.


학 교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럴수록 대접받기를 바라는 나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짜증이나고 분노가 생긴다. 그들이 나의 일을 잘 도와줬을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게 된다. 내가 늦어서 일이 지연되는 것은 아무 일없는 것처럼 지나가게 된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때, 주님은 나에게 젊은 부자 관원을 기억나게 하신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섬기기 위해서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음을 주님은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신다.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임을 주님이 생각게 해 주신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해야 할 나의 섬김의 대상임을 다시한번 기억케 해 주신다. 문득, 나의 비서의 책상에 붙어있는 그의 딸이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도 보이지 않던 그림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첫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그 그림은 최근 자주 아픈 그의 둘째딸이 그린 토끼 가족 4마리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그 딸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면서 웃어보았다.


학 교에서 있다가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몹시 피곤하다. 저녁강의를 마치고 집에 간 날은 특히 더 피곤하다. 밤 늦도록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저녁을 준비해놓고 졸린 눈으로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얼른 허기를 채우고, TV를 켜고 CNN 뉴스를 보면서 강의하느라고 긴장해 있는 나의 태옆을 풀기를 원한다. 그때 주님이 다시 한번 나에게 부자 청년관원을 생각나게 하신다. 나는 나의 가족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신다. 대부분의 유학생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내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너무나 많은 순간, 단순히 내가 남편이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위한 아내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 해야지라고… 주님은 나에게 나의 아내는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신다. 오히려, 내가 아내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함을 생각하게 하신다.


우 리집에는 두아들이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첼로 레슨을 하는 목요일과 토요일은 이 두아이들이 내차지이다. 목요일은 저녁 6시경에 학교에 가서 after school care에서 두녀석을 pick-up해서 집에 온다. 집에 오면, 나도 배가 고프고 그 녀석들도 배가 고프고, 모두다 cranky해져 있기에 마련이다.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녀석들은 가방과 겉옷을 사방으로 집어 던지면서 저희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집에서 오후내 혼자있던 강아지 Freddie는 정신없이 날뛰면서 밖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서 오줌을 뉘여달라고 성화를 한다. 둘째놈은 배가 고파서 뛰어내려와 냉장고를 열고는 먹을 것을 찾는다. 학교에서 피곤한 미팅이라도 있던 날, 신경질부터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문득 주님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자녀들이 더 이상 집안에 TV 리모콘이 보이지 않을 때, 리모콘 대신 내가 원하는 채녈로 바꿔주는 “인간 리모콘”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할 섬김의 대상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오는 생각은 아니다. 내속의 싸움이 있다. “나도 피곤한데…” 밥먹으로 식탁에 앉은 두 녁석에게 “Tonight, I am your servant. What can I do for you?”라고 물었다. 생각없는 둘째 동현이는 “Water, please!”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자 마음 좋은 큰아들 광현이가 “I will do it.”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항상 이렇게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에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은 평안한 저녁이었다.


섬 기는 삶. 나누는 삶.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짐이 된다. 나 때문에 희생하고 나를 돕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훈련, 이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오지를 않는다. 나는 평생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살아왔고 그렇게 훈련받아왔다. 내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는 훈련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남을 돌아보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오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을 돕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깨우치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주시는 민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웃사람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그사람들을 먼저 바라보는 훈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부자관원처럼, 근심하고 떠나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주 변의 많은 유학생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한다. 많은 부자관원들을 본다. 아니면 부자관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본다. 그들에게 질문해 보고 싶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훈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인간의 역사의 발전은 소수의 천재들의 탁월한 능력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소수의 리더들이 자신을 죽이는 헌신과 섬김으로 주변을 사람들을 보다 낳게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희생적 리더들을 찾고 계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수많은 사사와 선지자, 그리고 왕들의 순교적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나가셨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소수의 헌신적 섬김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 한 교회, 그리고 한 가정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은 수의 자들, 자신이 받은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자, 자신의 성공을 사명으로 발견한 적은 수의 리더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계획을 이끌어나가고 계신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려서 평등을 이루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것을 사명으로 삼고, 주변의 자들을 섬길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오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성공한 소수이다. 자신의 성공으로 자신의 주변을 섬기는 소수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부자관원을 찾고 계신 예수님의 찾음에 대답하고 나오는 자들이 필요한 때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성공한 소수를 소망해 본다.

[유영진]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유학생의 삶


탁월함, 게으름, 그리고 신앙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 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 1:19-20)


우리들의 인생의 가치와 질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구별되어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또한 “청지기”라고 불리운다. ‘무엇인가를 위탁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가 또한 “사도”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사도라함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사”(Ambassdors for Christ)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흐르는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뚜렷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위탁받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세상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지기로서의 삶은 타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한 성도로서 타국으로 보내심을 받은 유학생의 삶의 가치와 질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유학생으로의 삶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삶이다. 이유없는 고국을 향한 향수와 이질적인 문화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고독 속에 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내심”을 받은 그 학교,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다니엘은 타의에 의해서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바벨론에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다니엘서 전체에서 보여지는 그의 삶의 모습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도교수(1장에 나오는 환관장)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그의 유학의 생활을 보냈다. 그러한 그의 삶의 가치와 질은 “탁월함”이라는 단어로 요약이 되어진다. 성경은 그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가 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섬겼던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왕이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다니엘서 1장에 기록하고 있는 그의 탁월함은 어떤 종교적인 분야가 아님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왕에게 남달리 탁월한 조언을 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탁월함은 “세상”과 “신앙”의 경계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그의 탁월함은 그와 같은 이분론적인 세계관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이였다. 그의 “세상적”인 탁월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의 “신앙”의 결과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패배적인 타협의 결과도 아니다. 그의 탁월함은 바로 그의 신앙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모든 것을 100% 바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세상은 탁월함의 “결과”에 주목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탁월한 삶의 “과정”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탁월함의 반대는 게으름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 받은 달란트를 100% 활용한 두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부르신다. 그 두 종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탁월함의 모델이다. 그들은 탁월한 경영으로 배가 하는 성공적인 투자를 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의 초점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원래 양과 관계없이 그것을 100% 총 사용하는 삶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탁월함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100% 활용하는 삶인 것이다. 그와 같은 탁월한 삶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내가 보내어진 그 삶의 터전에까지 적용이 되어진다. 다니엘의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그가 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깨닫음으로 연결되어지고, 그것이 바로 그가 보내심을 받은 삶의 영역에서의 탁월함으로 연장되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보내시는 자와의 관계가 없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왜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않고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지극히 관계 중심적이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탁월함은 결코 이원론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하도록 기대되어지기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사는 유학생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학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도록 나의 전문영역에 보내심을 받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탁월하여야 한다. 그것은 나의 학문에 100% 나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오늘날 유학생들의 문화가운데 탁월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특별히 신앙이 좋다는 유학생들 가운데 탁월한 유학생이 부족함이 안타깝다. 많은 신앙이 좋은 유학생들이 자신의 학문의 길을 “대충”한다. 학문의 길이 마치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한 “필요악”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는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싶으나, “부르심”(calling)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학문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제자 양육과 기도에 전념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학의 학문의 길은 보다 많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렇지만 매우 불편한, 중간 단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음악을 하는 유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갈등을 겪는 경우를 자주 봤다. 신앙에 대하여는 아무런 생각없이 유학을 왔는데, 막상 은혜를 받고 보니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교수님이 주는 연습곡은 재미가 없고 지겹기만 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연주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전문 목회자, 선교자로 혹은 전문 CCM 사역자로 부르신 형제, 자매가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른바 “평신도”로 평생을 살아갈 형제, 자매들이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필요악”으로서의 직장과 “신앙”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유학생활에 성과가 더디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학생활 속에서의 공부는 점점 더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탁월함의 원리는 이와 같은 갈등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전문음악가로, 미술가로, 학자로, 경영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탁월한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따라서 탁월함과 소명의 발견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 소명의 삶 가운데 있는 탁월함에는 더 이상 “신앙”과 “세상”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소명을 발견치 못한 이는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게으름은 소명 의식의 결핍에서 나온다. 게으른 유학생들을 많이 봤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생각이 게으르고, 삶이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유학을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공부해야 하는 유학생들에게 생각의 게으름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아이디어를 철저히 분석하고 준비하고 발전시키는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생각이 게으르다. 치밀하게 생각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를 아직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 소명의 결핍은 게으름을 가져오고, 게으름은 탁월함의 반대임을 명심하자. 나는 보내심의 소명의식이 없는 유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결코 탁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단지 유학을 왔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탁월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와 같은 지도자들은 결코 탁월한 자들을 참고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 가운데 이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다. 금요일 철야기도에서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위한 중보기도를 많이 한다. 그러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그들의 삶 전체의 영역이 영적인 전쟁이다. 결코 그들의 영적 전쟁은 금요 철야기도에서 끝날 수가 없다.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연구 논문을 쓰고 제안서를 쓰는 과정이 치열한 영적인 전쟁의 과정이다. 그래서 게으를 수가 없다. 마귀는 우리가 대충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우리가 주어진 일을 하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면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만일 C. S. Lewis가 그의 소설 작품을 대충 썼다면 오늘날의 C. S. Lewis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날 모든 학문과 예술의 분야에 탁월한 기독교인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란다.


미국 CBS 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Touched by An Angel”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수년 동안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많은 광고수익을 가져다 준 프로그램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작품 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성경적인 진리의 흐름이 있다. 매회 작품을 준비할 때 제작진이 기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아는 방송국에서는 여러번 그 프로그램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작품의 탁월함 때문이다. 악한 느부가넷살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이 특별히 좋아서 옆에 데리고 있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언제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십배가 능가했다고 한다. 방송국 측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성실한 삶은 탁월함을 가져온다. 그러한 거룩한 탁월함에는 세상이 범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나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연구자들이 그들의 탁월함으로 무기로 하여 무신론과 진화론 숭상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NIH나 NSF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오게 되길 기도한다. 창조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과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보내심을 받은 그곳에서 탁월함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서 나오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영적인 전쟁은 우리들의 연구실에 치열하게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과학을 하는 유학생들로부터 무신론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지도교수와 학문의 조류가운데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의 탁월함이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장래의 사회 지도자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서 탁월함의 운동을 일으키기를 소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는 “대충”(mediocrity)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예배도, 음악도, 교육도 대충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할 일은 많은데 자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탁월하지 못할 바에 차라리 안 하는 용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소수의 적은 프로그램에 최선의 준비를 하여 탁월함을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교회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음악예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있다. 교회의 제직들 자녀들의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그램이다. 물론 귀여운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곳에는 탁월함이 없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세상의 권력자 앞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는 이른바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용납되어진다. 신앙서적 혹은 신앙영화를 보게 되면 그 질(quality)의 조악함에 실망을 하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만화영화와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보는 크리스천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그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남을 볼 수 있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웹사이트와 그곳에 실리는 글들의 수준은 어떤 기업체의 웹사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수준인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탁월함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대충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탁월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빌1:10).


교회 안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코 비싼 것, 예쁜 것,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회안에 있을 때 취해야 하는 당연한 자세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시대의 학문, 문화, 과학을 주도해 왔다.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살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교회의 문화 가운데 탁월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의 상실은 바로 우리의 자존감과 소명감의 상실에서 비롯한다. 나를 보내심을 받은 자로 보고 사는 자, 그래서 그 소명감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자의 삶 속에는 언제나 거룩한 탁월함이 있다. 그리고 그 탁월함 속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유학생들의 문화 가운데 이와 같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게으름을 배격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