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준]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하나님의 자녀에게 낯선 땅에서의 유학생활은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의 시간인 거 같습니다. 매일의 치열한 삶의 터전에서 지치고 상한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까지도, 어쩌면 평생 계속될 지도 모르는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심’ 이란 단어로 요약될 듯 합니다. 힘들고 바쁘다 보면 이 단어가 희미해 지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에 관계없이 항상 나를 향한 그 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부르심’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 같아요. 나를 향한 부르심이 어떠한지 깨닫는 것과 어떻게 그 부르심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에게 한결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Texas에서 이 곳 Virginia로 옮겨오는 가운데 있었던 작년 여름의 코스타는 새로운 곳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곳곳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제자의 삶’ 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도록 그 분께서는 코스타 기간 내내 역사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곧 내가 어떤 환경에 누구와 함께 있던지, 그 말씀에 내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이고, 이는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모습으로 표현됨을 그 분께서 다시 확인시키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보내신 캠퍼스의 현실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제가 처음 느꼈던 것은 당황스러움과 답답함 이었습니다. Texas의 제가 있던 곳은 전형적인 한국 대학원 유학생들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자연스레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로운 캠퍼스에서의 한국 대학원생 유학생들은 정말 소수였고, 함께 제자 삼는 비전을 품을 동역자는 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저를 향한 기대 (참 감사하지만..) 역시 ‘어, 이건 아닌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요.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부르심에 대한 회의’와 싸우는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바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의지할 그 무엇이나 누구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은 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셨고, ‘하나님.. 한 명만 주세요..’라는 절박함이 기도가 되어 지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 기도에 그 분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보내 주셔서 일단(?)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또 다른 ‘고민’ 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저와 살아온 문화나 현재의 고민들까지도 비슷한, 그래서 제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저와 ‘참 다르다’고 느낄 만한 지체들과 함께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여기 학부생들이고 어릴 때 이민 왔거나 미국에 온 지 최소한 몇년씩 된 지체들이었으며, 나이 차도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나는, 대부분이 자매들인 지체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한국에서 대학시절까지 보내고 미국 온 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된 대학원 유학생 형제인 저에게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임은 일단 은혜로 시작되었고 꾸준히 지속되는데, 저와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 속의 영적 갈증들을 파악하는 것은 참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나와 다르더라도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영혼이란 점은 나랑 똑같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의 영적 갈증은 무엇일까. 이런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참 오랫동안 씨름 했었습니다. 여러 동역자들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여러 접근법들도 시도하면서 나름대로는 몸부림을 쳤지요. 그러는 가운데 제 속에서 또 계속되는 영적 전쟁은 ‘거봐. 넌 여기에 적합지 않다니깐! 어떻게 저 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겠어?’하는 부르심에 대한 도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증가하는 박사 공부의 부담들도 저를 압박했지요. 이렇게 한 학기 정도를 제 안과 밖에서 씨름하면서 보냈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제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깨닫게 된 진리는 새삼스럽게도 ‘본질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나 이들 역시 똑같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죄인’ 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영적 본질이었습니다. 환경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지만,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죄인들이고, 그래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2:2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본질’ 은 저나 이들이나 동일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요한복음을 한장씩 보면서 집중하려고 몸부림쳤던 영적 부담감은 요한이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그 말씀 –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사람의 지혜’에 대한 유혹들도 참 집요(?)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5)’ 이 말씀은 ‘진짜’였습니다! 영적 본질에의 집중은 곧 영혼에 대한 담대함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한명 한명의 마음 깊숙한 상처와 눈물과 갈증들을 서서히 보게끔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이들을 향한 당신의 타는 듯한 사랑이 어떠한지, 한명 한명이 그분에게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 조금씩 느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이 한 명 한 명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타는 듯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질 때마다, 그런데 내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과 행동’ 들로 표현되는 죄성을 여전히 보게 되고 이런 죄와 연약함 속에 있는 ‘그 때에’ 이미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 값없이 누리도록 주셨음을 깨달을 때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이었던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한 응답 역시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사랑하면 되는구나’하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가 사실 그리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이것은 곧 적어도 4가지 –시간, 물질, 관심, 그리고 기도- 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자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 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내게 있는 것 –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과 관심과 기도로 사랑할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가 섬긴다고 했던) 이들을 통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고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만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제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거 같습니다. 시험 기간에 지쳐서 힘들어 할 때, 저희 그룹 한 지체가 여기서 차로 2시간 가량 떨어진 Washington D.C. 에서 한국 음식을 사서 제가 있는 곳 까지 직접 운전해 와서 힘내라면서 내미는 모습 속에서 저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서 동역하는 귀한 지체들의 섬김과 기도가 정말 큰 감사제목입니다. 제가 속한 KBS 라는 공동체는 지리적으로 Washington D.C. 를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 매번 D.C. 까지 오가며 교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한 없던 모임을 새로 시작하는 거라서 섬기는 저부터 쉽게 지치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정말 ‘아무도 없다’ 는 느낌이 가장 힘든 시험 중에 하나인데, 늘 기도와 격려로 함께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매주 기도제목을 업데이트 해 주는 지체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저희 그룹 지체들 이름을 매주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분들, 가끔씩 D.C.를 갈 때마다 저와 저희 그룹 지체들을 가족같이 반갑게 챙겨주고 섬기는 분들까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모두가 한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임을 너무나 귀한 동역자들로부터 참 많이 도전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이 곳으로, 제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들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제자의 삶’ 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삶은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 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신 현장에서 주신 사람들 속에서 ‘제자의 삶’ 으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제자 삼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어떻게 내가 순종할 것인가?’라는 말과 같은 뜻임을 이 곳에서 더 깊이 느낍니다. 매일 말씀 앞에 나를 죽이고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제자됨임을.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에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보내시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날마다 죽는 삶이라는 것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