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준]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하나님의 자녀에게 낯선 땅에서의 유학생활은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의 시간인 거 같습니다. 매일의 치열한 삶의 터전에서 지치고 상한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까지도, 어쩌면 평생 계속될 지도 모르는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심’ 이란 단어로 요약될 듯 합니다. 힘들고 바쁘다 보면 이 단어가 희미해 지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에 관계없이 항상 나를 향한 그 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부르심’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 같아요. 나를 향한 부르심이 어떠한지 깨닫는 것과 어떻게 그 부르심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에게 한결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Texas에서 이 곳 Virginia로 옮겨오는 가운데 있었던 작년 여름의 코스타는 새로운 곳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곳곳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제자의 삶’ 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도록 그 분께서는 코스타 기간 내내 역사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곧 내가 어떤 환경에 누구와 함께 있던지, 그 말씀에 내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이고, 이는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모습으로 표현됨을 그 분께서 다시 확인시키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보내신 캠퍼스의 현실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제가 처음 느꼈던 것은 당황스러움과 답답함 이었습니다. Texas의 제가 있던 곳은 전형적인 한국 대학원 유학생들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자연스레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로운 캠퍼스에서의 한국 대학원생 유학생들은 정말 소수였고, 함께 제자 삼는 비전을 품을 동역자는 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저를 향한 기대 (참 감사하지만..) 역시 ‘어, 이건 아닌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요.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부르심에 대한 회의’와 싸우는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바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의지할 그 무엇이나 누구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은 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셨고, ‘하나님.. 한 명만 주세요..’라는 절박함이 기도가 되어 지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 기도에 그 분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보내 주셔서 일단(?)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또 다른 ‘고민’ 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저와 살아온 문화나 현재의 고민들까지도 비슷한, 그래서 제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저와 ‘참 다르다’고 느낄 만한 지체들과 함께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여기 학부생들이고 어릴 때 이민 왔거나 미국에 온 지 최소한 몇년씩 된 지체들이었으며, 나이 차도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나는, 대부분이 자매들인 지체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한국에서 대학시절까지 보내고 미국 온 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된 대학원 유학생 형제인 저에게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임은 일단 은혜로 시작되었고 꾸준히 지속되는데, 저와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 속의 영적 갈증들을 파악하는 것은 참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나와 다르더라도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영혼이란 점은 나랑 똑같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의 영적 갈증은 무엇일까. 이런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참 오랫동안 씨름 했었습니다. 여러 동역자들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여러 접근법들도 시도하면서 나름대로는 몸부림을 쳤지요. 그러는 가운데 제 속에서 또 계속되는 영적 전쟁은 ‘거봐. 넌 여기에 적합지 않다니깐! 어떻게 저 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겠어?’하는 부르심에 대한 도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증가하는 박사 공부의 부담들도 저를 압박했지요. 이렇게 한 학기 정도를 제 안과 밖에서 씨름하면서 보냈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제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깨닫게 된 진리는 새삼스럽게도 ‘본질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나 이들 역시 똑같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죄인’ 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영적 본질이었습니다. 환경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지만,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죄인들이고, 그래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2:2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본질’ 은 저나 이들이나 동일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요한복음을 한장씩 보면서 집중하려고 몸부림쳤던 영적 부담감은 요한이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그 말씀 –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사람의 지혜’에 대한 유혹들도 참 집요(?)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5)’ 이 말씀은 ‘진짜’였습니다! 영적 본질에의 집중은 곧 영혼에 대한 담대함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한명 한명의 마음 깊숙한 상처와 눈물과 갈증들을 서서히 보게끔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이들을 향한 당신의 타는 듯한 사랑이 어떠한지, 한명 한명이 그분에게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 조금씩 느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이 한 명 한 명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타는 듯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질 때마다, 그런데 내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과 행동’ 들로 표현되는 죄성을 여전히 보게 되고 이런 죄와 연약함 속에 있는 ‘그 때에’ 이미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 값없이 누리도록 주셨음을 깨달을 때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이었던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한 응답 역시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사랑하면 되는구나’하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가 사실 그리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이것은 곧 적어도 4가지 –시간, 물질, 관심, 그리고 기도- 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자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 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내게 있는 것 –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과 관심과 기도로 사랑할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가 섬긴다고 했던) 이들을 통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고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만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제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거 같습니다. 시험 기간에 지쳐서 힘들어 할 때, 저희 그룹 한 지체가 여기서 차로 2시간 가량 떨어진 Washington D.C. 에서 한국 음식을 사서 제가 있는 곳 까지 직접 운전해 와서 힘내라면서 내미는 모습 속에서 저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서 동역하는 귀한 지체들의 섬김과 기도가 정말 큰 감사제목입니다. 제가 속한 KBS 라는 공동체는 지리적으로 Washington D.C. 를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 매번 D.C. 까지 오가며 교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한 없던 모임을 새로 시작하는 거라서 섬기는 저부터 쉽게 지치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정말 ‘아무도 없다’ 는 느낌이 가장 힘든 시험 중에 하나인데, 늘 기도와 격려로 함께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매주 기도제목을 업데이트 해 주는 지체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저희 그룹 지체들 이름을 매주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분들, 가끔씩 D.C.를 갈 때마다 저와 저희 그룹 지체들을 가족같이 반갑게 챙겨주고 섬기는 분들까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모두가 한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임을 너무나 귀한 동역자들로부터 참 많이 도전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이 곳으로, 제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들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제자의 삶’ 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삶은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 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신 현장에서 주신 사람들 속에서 ‘제자의 삶’ 으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제자 삼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어떻게 내가 순종할 것인가?’라는 말과 같은 뜻임을 이 곳에서 더 깊이 느낍니다. 매일 말씀 앞에 나를 죽이고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제자됨임을.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에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보내시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날마다 죽는 삶이라는 것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3:16 )


[김보경]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코스타 2003년 11월호

첫 학기



처음 미국에 유학 와서 짧은 여름방학동안 랭귀지 코스를 듣고 토플을 본뒤 가을학기에 파트타임으로 대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학기 첫 수업…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영어를 많이 안써도 되는 물리와 수학을 신청했는데 물리 첫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근심에 쌓였습니다. 교수의 강의가 거의 안 들렸기 때문입니다.  더운 여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대학에 들어왔는데 첫 수업을 받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F 받게 생겼군… 첫 학기부터 쫒겨날 것 같은데… 만약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다면 정말 그건 하나님이 내게 기적을 베푸신 때문일거야” 였습니다.



그 때 저보다 유학 2년 먼저 온 선배와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 선배는 2년 먼저 왔으니까 수업이 잘 들렸겠지… 저 선배랑 그룹스터디라도 해야지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선배에게 찾아가 학생회관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녁에 학생회관에 온 선배는 책가방을 열더니 교과서가 아닌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 때까지 성경은 교회에서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에겐 책가방에서 나오는 성경책이 참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가 있었나보지?’ 라고 생각하면서 “왠 성경책이에요?” 라고 묻는 제게 선배는 “같이 보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라면서 갈라디아서 2장을 폈습니다. 18절 부터 20절까지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자고 하는 선배의 말에 어색해 하면서 한절 한절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를 읽고 나서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해보니까 참 힘들고 특히 주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많이 방탕한 길로 빠지더라. 너는 이제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아직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유학생활 잘 시작하라고 이 말씀을 주고 싶었어”



산 앞에서



그렇게 시작한 저의 유학생활은 선배의 말처럼 한 학기도 맘 편히 시작한 적이 없던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매 학기 시작할 때마다 시편 121편을 떠올리며 “산처럼 느껴지는 이번 학기지만 또 그 산을 향해 눈을 듭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라고 금식기도로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공부의 어려움도 그랬지만 한창 청년의 때에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느끼는 외로움도 컸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들이 ‘미팅했다, 엠티갔다, 축제 기간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재밌다, 남자친구 생겼다, 남자친구 군대갔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 는 평범한 한국 대학생의 삶을 전해올 때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말 그대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았는데 언어의 벽 앞에 처절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김치 냄새가 나니까 주 중에는 김치 먹으면 안된다는 것도 처음엔 “왜 남의 나라 음식을 가지고 뭐라고 그러지” 라며 기분이 나빴지만 어느 날 부턴인가 수업을 받으러 갈 때 향수를 뿌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왜 내가 이 곳 남의 나라까지 와서 공부해야 하는가… 왜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주눅들어야 하는가.” 어쩌다 제가 이 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때면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안나오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귀에 들리게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은데 아무리 때를 쓰고 졸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성경공부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습관도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막상 말씀을 보고 싶어도 어디를 봐야할 지 몰라 대강 중간을 폈습니다. 그러면 늘 이사야나 시편이 나왔습니다. 처음엔 한 두 절 읽다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덮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인데도 그 말씀을 또 보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갈급함을 주셨습니다. 얼마 후에는 아무렇게나 편 말씀이 별 감동이 없으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생길 때 마다 손으로 직접 적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단어를 외우는데 쓰려고 구입했던 3×5 인덱스 카드에 한절 한절 적어나갔습니다.  처음엔 한 두장 되던 것이 시간이 갈 수록 고무줄로 묶어야 할 정도로 많이 쌓여갔습니다. 말씀이 조금씩 달게 느껴졌고 나중엔 성경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절 또는 한 장씩만 보던 말씀이 성경 한권 한권 보게 되고 나중엔 성경 전체를 읽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며 제가 왜 이 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 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원했던 “목소리”가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문둥병자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통해, 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들을 통해, 그리고 요한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쓴 것을 통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것처럼, 그래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던 것처럼 저도 본토 친척 아비의 집,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도 별 불편을 모르던 곳을 떠나 이 먼 미국까지 와서야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속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다 문득 문득 느끼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저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느낀 것처럼 제가 할 줄 알고 익숙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고 저는 아무에게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발견한 저의 정체성은 은혜 없이는 못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인치신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않으면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는 외로움과 열등감과 무기력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공허만이 가득한 세상의 것을 향해 허덕이며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자였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이제는 제가 선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교회 후배가 어느 날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후배가 전화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청년회 월례회에 못가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보였나?’ 싶어서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사정이 있으면 못 올 수도 있지” 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의외로 부드럽게 받아줘서 마음이 놓였는지 “언니, 고마워요” 라면서 조금 마음을 열고 고민을 얘기합니다.



“언니, 저는 사실요, 빨리 마치고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학기에 19학점 듣거든요. 3년 만에 마칠려고요. 저는 여기가 너무 싫어요. 교회봉사는 해도 청년회 활동 같은 것 하기 싫고요. 시간 낭비 같아서요.”



솔직하게 말을 해주니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그저 통과해야 할 관문,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이… 빨리 해치우려는 그 3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되고 훈련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에…



후배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학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복된 시간인지 얘기했습니다.



마치 첫 학기에 어떻게 하면 성적을 잘 받을까 생각하며 그룹스터디를 제안한 제게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유학생활을 하라고 했던 그 선배의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통화 이후 제 말 때문이 아니라 그 후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후배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었습니다.



복 있는 자



복 있는 사람, 성경에서 말하는 복된 자는 출세가도를 달리는 자도 아니요, 외모가 출중한 자도 아니요, 재주가 뛰어난 자도 아니요, 머리가 좋은 자도 아니요, 부유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송이 꿀보다 말씀이 더 달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며 혼자서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부르짖는 자,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 나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나그네의 삶을 고백하는 자,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며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유학생활은 내 삶의 성공을 위해, 남들도 다하니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치뤄야 할 관문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복되고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안 되서 열등감에 쌓인다 해도,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눈물이 난다 해도, 보이지 않는 미래로 인해 불안에 휩싸여 있다 해도,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도는 이방인의 삶이 서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9). 우리는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무시당하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실패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또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처한 고난의 자리는 사실 놀라운 복이 넘치는 감사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생활은 복된 것이고 힘들게 유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나는 복된 자입니다.



젊음을 주께 바치라



힘들고 지치는 유학생활



언어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환경 속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찬데 학업이라는 무거운 짐과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큰 벽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짓누르며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삶의 목적조차 불투명해져 방향을 잃고 헤메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겨워 하며 아파할 때 우리 마음 한 켠에서 애타게 우릴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당신과 저를 사랑한다고 애타게 외치시는 예수님



이제 귀를 열어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제 눈을 들어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당신의 삶의 목적과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재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을 이 분과의 만남에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대학 3학년 때 섬기는 교회에서 유학생을 위한 집회 “젊음을 주께 바치라”를 준비할 때 쓴 초대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