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일방적 이스라엘 지지가 하나님의 뜻?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0. 들어가며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913일 뉴욕에서 개막한 제 66회 유엔총회에서, 194번째 회원국으로 승인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미국의 주도하에 여러 협상 시도가 있었지만, 1967년 이래 팔레스타인 인들이 살고 있는, 가자 지구(Gaza district)와 서안(West Bank)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식민지에 가까운 점령상태로 남아있고,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과 이스라엘의 군사공격이 계속 되어 왔는데, 예를 들어 2008년의 가자 공습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었던 138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스라엘측 사망자 13), 이스라엘은 민간인과 유엔학교, 유엔 구호트럭, 비무장 국제 구호선까지 무차별 공격함으로서, 미국을 제외한 국제 여론의 심각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세우고 정착촌을 늘려나감으로서, 평화 협상은 최근 1년여간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압바스 (좌), 오바마와 네탄야후 (우) 

결국,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진전이 없고, 미국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은 유엔에 직접 독립국 승인을 요청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언제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온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할것을 확고히 했으나, 팔레스타인 측은 유엔 회원 192개국 가운데 140여 개국에서 독립을 지지한다는 지지를 얻어냈다고 밝힐 정도로, 대다수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의 안보리 거부권으로 독립국가 자격은 얻지 못하겠지만, 만일 유엔 안보리 15개 회원국 중 최소 9개국이 승인하고, 유엔총회에서 193개 회원국 중 3분의2 찬성을 얻으면 팔레스타인은 `표결권 없는 비회원국 옵서버 단체(entity)’에서 `표결권 없는 비회원국 옵서버 국가(state)’ 지위로 승격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 산하 국제사법재판소(ICJ)등에 이스라엘 관련 문제를 제소할 권한을 갖게 되어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이렇게 팔레스타인 독립문제가 유엔에서 논의되고, 대다수의 국가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 만으로도, 중동 정세에는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i]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지난 5 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된 후, 19일에 있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대중동연설(Middle East Speech)과 이에 대한 반응입니다. 오바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해결과 평화 정착을 위해서 합의에 따른 일부 영토교환을 전제로 한 1967년 이전 경계(the 1967 lines with mutually agreed swaps)’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언급 했습니다. 사실 이 주장은 과거 조지 부시나 힐러리 클린턴 등 다른 정치인들도 언급한 바 있고,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울 것 없는 내용입니다. 사실 오바마의 개혁적 성향을 보고 뭔가 팔레스타인 문제의 진전을 위해 과감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기대했던 팔레스타인과 아랍국가들은, 내실없는 오바마의 발언에 큰 실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공화당 의원들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은 오바마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차기 공화당 대선주자인 미트 롬니(Mitt Romney)오바마가 이스라엘을 달리는 버스 아래 던져 넣었다(President Obama has thrown Israel under the bus)’고 했고, 역시 대선주자인 미셸 바크만은 오바마는 또 한번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배신했다(Once again, President Obama betrayed our friend and ally Isael)’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여론을 의식했는지, 오바마는22일에 유명한 이스라엘 로비단체인 AIPAC(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를 방문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철통같은 지지는 변함 없다며, 발언의 파장을 진화하기에 바빴습니다.[ii]

AIPAC을 방문하여 연설하고 있는 오바마

 

또한 미국을 방문한 벤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오바마 연설 바로 다음날인 20일 오바마와의 대담에서 거의 두시간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와 현실을 강의하듯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은 1967년 이전 경계로 돌아갈 수 없고 그것은 방어가 불가능하다(indepensible)’고 주장해, 그 전날 오바마의 발언을 대놓고 반박하기도 했으며, 오바마가 유럽을 방문중이었던 524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도 오바마의 발언을 거듭해서 비판했는데, 놀랍게도 공화당 민주당을 막론하고, ·하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하는 네타냐후의 발언이 끝날때마다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31번이나 보내서, 마치 선채로 연설을 듣는 듯 보였고, 마치 네타냐후 지지집회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결국 오바마의 발언으로 인한 파장은, 미국의 국내정치를 고려한 공화당의 오바마 때리기이기도 하지만, 전임자인 조지부시와 같이 이스라엘에 충성에 가까운 일방적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 즉시 이스라엘에 대한 배신자로 비난을 받는 이상한 미국 정치 상황을 통해, 공화당과 민주당 상관없이, 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강한 어조로 오바마의 중동연설을 반박하는 네탄야후 


그렇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1967년 이전 경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또한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이길래, 그 총리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에게 두시간동안 훈계하듯 이야기 할 수 있고, 미국의 국회의원들 조차 자신들의 대통령이 아닌 이스라엘 총리의 편을 들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게 만드는 것일까요?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지난 번 글에서는
, 빈 라덴의 죽음과 관련해 과거 미국의 대 중동정책의 문제점들을 소개했었는데, 글을 읽은 몇 분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하길래, 다른 중동국가들이나 이슬람 테러조직들이 언제나 그 문제로 미국을 비난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문제의 뿌리에는, 언제나 석유문제와 함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폭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의 뒤에는, AIPAC으로 대표되는 미국내 유대인들의 로비가 있고, 또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보수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미국과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팔레스타인의 역사나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글에서는 가능한 알기쉽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현실, 그리고 미국내 이스라엘의 로비와 그 문제점을 소개해 보고, 성경적 입장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슈를 생각하면, 먼저 기독인들은 우리에게 친근한 구약성경의 역사를 기억하고, 또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성경의 백성이라는 친근함, 그리고 안네프랑크의 일기나 쉰들러스리스트와 같은 영화를 통해 유대인들이 겪은 비참한 역사가 잘 알려져 있기에, 심정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과 그 이후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의 역사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바마가 언급한 ‘1967년 이전 경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iii]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중동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에 따라 영토와 경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붉은색은 이스라엘의 영토, 파란색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표시된 다음의 지도는 이스라엘 영토가 팔레스타인에서 지속적으로 확장되가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1948 5 14일 건국 되었는데, 이스라엘 건국 하면, 마치 빈 땅에 나라를 세운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거의 2천년 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고, 그 땅에서는 아랍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은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아랍인들의 군사협력이 필요했던 영국은 이들에게 맥마흔 선언을 통해 독립을 약속합니다. 동시에 전쟁을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시오니스트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영국은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또 다른 약속을 한 바 있었습니다. 지킬 수 없는 두가지 약속을 한 셈이고, 한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지요. 이후 유럽과 러시아로 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고, 결국 유엔은 1947 11월 팔레스타인의 약 56%를 유대 국가에, 43%를 아랍 국가에 할당하라고 결정했는데, 아랍인들은 분할안을 거부하고 유대인들은 받아들여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인들은 영토의 대부분인 87.5%를 소유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팔레스타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56대43으로 땅을 나누라는 유엔의 결정은 팔레스타인들의 땅을 떼어 유대인들에게 주라는 것과 같았다는 점입니다.

2천년간 세계 각지에서 수난을 당한 유대인들이 구약성서의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그 땅에는 이미 2천년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고,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살고 있던 자기들의 땅을 이스라엘과 나눠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이지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 갑자기 내일 일본이 임나일본부설(고대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정벌해 식민지를 세웠다는 주장)을 주장하면서 남한 영토의 절반을 요구하고 거기에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지금 고구려 역사를 근거로 중국에 만주땅을 요구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면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유엔의 결정에 분노한 주변의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해 이스라엘 건국 직후 1948년에 1차중동전쟁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엔에 의해서 할당된 영토보다도 훨씬 많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장악하게 되고, 나머지 22%는 가자(Gaza)와 서안(West Bank)으로 나눠져서, 각각가자’는 이집트의 통치하에, ‘서안과 동 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1967 64일까지 놓여있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양측에 이스라엘의 서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동예루살렘으로 분할됩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오바마가 언급한 ‘1967년 이전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는 가자와 서안(웨스트 뱅크)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궁금하셨다면 아래 지도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가자’지구는 우리가 잘 아는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의 배경이 된 성경의 ‘가사’이며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도 블레셋에서 기원합니다.
 

이 전쟁으로 약 75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전쟁을 패해 주변 아랍 국가들로 피신했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손쉽게 이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할 수 없게 해버립니다. 동시에 귀환법을 만들어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스라엘로 돌아올 권리를 가지고 시민권을 받는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주민의 상당수는 토지와 재산을 잃고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고, 반대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팔레스타인에서 시민권과 주거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그 결과로 2차중동전쟁이 발발하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 파병하고 이집트와 숙적이었던 이스라엘도 파병하는데, 이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집트의 주도하에 아랍 국가들이 단결해, 다시 1967 3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6일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또다시 승리하여, 이제는 가자와 서안 모두가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결과 약 43만 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추가로 쫓겨나고 남은 약 100만 명은 이스라엘의 군사점령하에 생활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이스라엘이 통제하게 된 것이지요. 유명한 아라파트는 1969년 이후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결성하여 투쟁을 하는데, 큰 진전이 없자, 이제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이스라엘을 내어 쫓고 팔레스타인만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상은 완전히 포기하고, 1967년 이전 경계, 즉 가자와 서안에서만이라도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도록 해 줄것을1976년 유엔총회에서 요구합니다. 이것이1967년 이전 경계를 기반으로 독립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상호 인정하자는 두 국가건설 해법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것 마저도 거부합니다. 이것이 오바마가 언급한 ‘1967년 이전 경계이며 유엔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지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973년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르는 4차 중동전쟁이 터지는데, 욤 키푸르(속죄날)을 맞아 이스라엘 군이 금식 등으로 병력 동원에 어려움이 있으리라 에상한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초반에 우세한 상황이 되는데,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겨우 아랍군을 몰아내게 됩니다.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이스라엘은 굳건한 애국심과 단결력으로 수많은 아랍국가들에 맞서 승리를 거둬왔다고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승리에는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충격으로 이스라엘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중동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1978년 지미카터가 주도하고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입니다. 이는 숙적이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 관계에 화해를 가져오고, 이집트는 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되돌려 받는 대신, 가자지구에 대한 개입을 중지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으며,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독립을 인정하고 점령지역에서 철군하기로 약속을 합니다. 나세르와 그 후임자인 사다트 같은 아랍민족주의 지도자들 하에서, 이집트는 아랍의 반이스라엘 진영 지도자 역할을 했으나, 사다트는 캠프 데이비드를 통해 전격적으로 이스라엘과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캠프 데이비드협정에서 좌로부터 사다트, 지미카터, 베긴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의 두 리더였던 사다트와 베긴 모두, 협정이후 자국의 강경파에게 암살되고 말았으니 팔레스타인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잘 보여줍니다. 이후 이집트는 평화협상의 대가로 미국으로 부터 매년 20억 달러를 받게 되며, 사다트가 암살된 후 권좌에 오른 무바라크는 미국의 지지를 업고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자그만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집트는 협상의 약속을 지켰으나, 이스라엘은 아직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묵인해,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통치를 인정한 셈이 되어 버렸고, 아랍국가들로 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결국 최근 민주혁명 초기에 무바라크가 축출 위기에 처했는데도, 미국이 쉽게 무바라크를 포기하지 못하고 민주시위를 지지하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던 전임자들(나세르와 사다트)과 달리, 그가 독재자이지만 이스라엘과 평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독재자 무바라크를 필요로 했던 것이지요.

최근 무바라크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후, 지난 9 9, 카이로 시민 수천명이 개혁 가속화 시위를 하다가 그중 수백명이 인근 이스라엘 대사관에 몰려가 방어벽을 부순 뒤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치외법권 지역인 대사관에 난입한 사건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근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아랍 시민들의 관점에서 같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무바라크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분노가 곪아터진 사건인 것이지요.

 

캠프데이비드와 유사하게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클린턴의 지원하에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조약을 맺는데, 이 결과로 요르단이 서안을 사실상 이스라엘의 영토로 승인하는 대신, 미국은 요르단의 부채탕감과 군사원조 2억달러를 포함 매년 5억달러의 원조를 약속합니다. 요르단도 후세인 국왕이 통치하는 친미 독재왕정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이 평화조약들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의 갈등을 어느 정도 방지하게 되었으나, 가자지구와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지상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을 하는 동시에, 가자와 서안, 그리고 동예루살렘에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이주시켜 영토를 확대해 나갑니다.

 

1982년에는 5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레바논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스라엘은 민간인 정착촌을 미사일로 폭격한 레바논 거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추격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하고, 그 결과 한달만에 2만명의 팔레스타인 인과 레바논 인들이 사망하게 됩니다. 특히, 82 9 16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의 학살은 이 전쟁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으로 오랜 기간 내전을 겪어온 나라이고,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군부는 수도 베이루트를 점령해, 레바논의 기독교도 수장인 바시르 제미엘을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앉히려 했는데, 그가 이슬람측의 폭탄테러로 살해당합니다. 그러자 광분한 레바논의 기독교 팔랑헤 민병대 150여명은 이스라엘 군이 포위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로 기습해, 사흘동안 절반이 부녀자와 어린이였던 3천여명의 난민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이스라엘 출신 감독인 아리 폴만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2008)’입니다. 학살을 다룬 이 영화는 기독교 민병대들의 학살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모호하게 다루었지만, 사실 그 배후에 이스라엘 군이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것이, 학살극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 군은 샤론의 명령에 따라 난민촌을 탱크로 둘러싸고 밤새도록 조명탄을 쏘아 올려 학살을 방조하거나 도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비난이 급증하자 샤론은 국방장관에서 물러나지만 20년 후 2001년에 이스라엘 총리에 당선되어 다시 팔레스타인의 탄압에 앞장섭니다. 그리고 이 결과로 레바논에서는 반 이스라엘 투쟁이 중심인 헤즈볼라(Hezbollah)가 결성됩니다. 역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Hamas)와 함께 이스라엘과 미국이 테러조직으로 비난해 마지않는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는 배후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학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006년 여름에도 레바논은 34일 동안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겪으면서 1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바 있습니다.[iv]



영화바시르와 왈츠를’ 포스터 (좌), 실제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 장면 (우)
 

특히 1987년 말의 1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의 참혹한 현실과 이스라엘의 억압정책을 폭로해,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1988 PLO의 부패와 무능에 신물이 난 팔레스타인 인들을 중심으로 보다 과격한 하마스가 창설되어 PLO와 경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92년 이후 PLO와 협상을 시작하는데, 8년여간의 협상기간 동안 예루살렘과 서안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두 배 이상 증가해서 40만명이 넘게 됩니다. , 협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늘려나가는 이중적인 정책을 쓴 것이지요.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되었을 뿐 더러, 미국의 관료들조차 비판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은척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2008년에는 제 6차 중동전쟁이라고도 불리는 가자전쟁(Gaza War) 발생했는데,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휴전이 종료되고 이스라엘 군이 하마스 무장대원 3명을 사살하자,  하마스가 그 보복으로 이스라엘 영토에 70발 이상의 로켓을 발사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공습과 침공을 시작해 1380명이 사망하고 (이스라엘측 사망자 13), 이스라엘은 민간인과 유엔학교, 유엔 구호트럭, 비무장 국제 구호선까지 무차별 공격함으로서, 미국을 제외한 국제 여론의 심각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 지구 한편에서 문명국가 군대의 공격으로 민간인이 대부분인 천명 이상이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실에 눈을 감거나, 알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8년 가자전쟁의 참혹한 희생장면.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던 1380여명의 사상자 발생 

이스라엘 군의 한 티셔츠 디자인. 과녁안에 팔레스타인 임산부 그림이 있고 “총 한발로 두명 사살”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다음의 지도는
, 녹색으로 표시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어떻게 축소되어 나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첫번째 지도는 이스라엘 정착 초기, 두번째 지도는 유엔의 분할 결정안, 그리고 왼쪽에서 세번째 지도가 1967년 이전 경계이고, 현재는 서안의 상당 지역을 이스라엘 정착지가 침식해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40만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0
년 최종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정착촌 제거, 1967년 경계 회복 등, 팔레스타인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거부하여 협상을 실패하고, 자살폭탄테러를 동반한 팔레스타인의 2차 민중봉기가 발생합니다. 테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서안 지역에 총 길이 800㎞이상 높이 8미터의 콘크리트 분리 장벽을 건설해,이스라엘 정착지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시켜 나가고,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분리시키며, 지역 전체에 검문소를 설치해, 팔레스타인 인들은 출근하기 위해서 매일 몇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분리장벽으로 인해 엄청난 거리를 돌아서 다녀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건설하고 있는 분리 장벽(좌), 서안 곳곳을 차단하고 있는 검문소 (우)

 

2004 7월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는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인 동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역은 국제법을 위반한 점령지이며 이스라엘이 이들 지역에 건설한 정착촌과 분리장벽도 국제법 위반이이라고 판결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의 22% 1967년 이전 경계에 기반한 서안과 가자, 그리고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민족국가를 설립하겠다는 요구마저 이스라엘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그것을 언급한 오바마의 연설조차 미국 내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팔레스타인은 결국 유엔에 독립국 승인을 신청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대로,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세계 여론을 생각할때, 대부분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팔레스타인 이슈에 대해 가진 생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주장이 얼마나 역사나 현실에 무지하고 단순한 생각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결국 위에서 살펴본 역사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입장을 살펴 보았을 때, 누가 강자이고 약자이며, 누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천년간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들은 이제 22%남은 땅에서 준 식민지 상태로 이스라엘 군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 지역에서만이라도 독립국가를 인정해달라는 주장을 이스라엘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1967년 라인마저도 인정할 수 없고,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세력이 테러공격을 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기에완전 비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고, 하마스 같은 조직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미 1948년에 국가를 수립하고, 핵무기를 포함한 중동 최고의 군사력을 갖추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준 식민지 군사점령상태에서 독립국가수립도 못하고, 인구 상당수는 해외에서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지 않으면 독립 승인은 물론 평화협상도 할 수 없다고 강요하는 현실입니다. 물론 하마스 같은 팔레스타인 강경파 중에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존재는 이미 기정사실이고, 협상 과정에서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협상하기도 전에 그걸 인정하는건 미련하다고 밖에 말할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먼저 그런 선결조건들에 굴복하지 않으면 협상은 불가능하고, 기본적으로 1967년 경계는 받아들일 없다고 말하며, 지속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불법적으로 이스라엘 정착지를 늘려나가 이스라엘 영토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테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안은 이해가 가지만, 양측의 갈등이 계속되고 이스라엘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사황에서 팔레스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완전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독립은 없다라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결국,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정책을 살펴보면, 과연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하거나, 궁극적으로 독립을 승인할 생각이 있는가 심각한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강경파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는 없다라고 여러번 언급한 바 있고, 과거 PLO가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던 시절에는 PLO를 테러조직이라고 협상을 거부해 오다가, 이제 PLO의 후신인 파타가 인기를 잃고 강경한 하마스가 등장하자,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 비난하면서 협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은,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상황을 생각했을 때, 이들의 독립요구나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등장을 단순히 테러리즘으로만 비난 할 수 있냐는 점입니다. 테러리즘과 관련해, “당신의 테러리스트는 나의 자유 투사일 수 있다(Your terrorist is my freedom fight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제 식민지 시대 독립투쟁을 보아도, 안중근 의사가 잡혔을 때 그는 자신을 독립군 중장이라고 주장했고, 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다는 것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한 리비아 인들의 투쟁을 다룬 영화 사막의 라이온(Lion Of The Desert, 1981)’이나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저항을 다룬 영화 알제리 전투(La Battaglia Di Algeri, 1965)’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배국이 독립을 향한피 식민지배 국의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진압해온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훨씬 강력한 군대를 가진 점령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과 살인에는 테러리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군사작전같은 용어를 사용하지요. 그래서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협상하는 것은 미국에게 알카에다와 타협하라는 것과 같다며, 하마스의 테러리즘을 근거로 평화협상과 독립승인을 거부하고 있습니다만, 하마스를 알카에다와 동일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먼저 알카에다는 특정국가와 상관없이 ‘반미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다국적 테러단체이지만, 하마스는 과격무장세력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이기도 합니다. 특히 하마스는 선거에서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교육과 의료 등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서 민심을 얻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마스는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해 62.6%의 득표율로 총 132석 중 74석을 장악하며,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파타를 제치고 제 1당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제는 하마스조차도 현재 22%안에서의 독립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압바스의 유엔독립국지위 신청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구체적인 평화협상과정이 진행된다면, 하마스 마저도 보다 현실적인 타협에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빌미로 협상에 나오지 않고 정착촌건설만 지속하는 이스라엘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력이나 사상자의 규모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많은 언론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폭력을 중단해야한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마치 양측이 똑같이 공격을 하고 비슷한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이스라엘측 피해를 더 과장해서 묘사를 하는데 (예를 들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보도의 정확성 :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사례 연구”라는 논문을 보면, 어린이와 청소년 사망 관련 언론기사를 비교해 볼 때, 팔레스타인 보다 이스라엘 어린이 사망에 대한 보도기사가 30배 정도 많다고 함), 실제로 사상자의 비율을 보면 대부분 팔레스타인 측이 수십배에서 수백배까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동 최강의 군사력으로 최첨단의 전투기, 탱크를 갖춘 이스라엘과, 피지배 상태에서 기껏해야 총과 로켓으로 무장한 팔레스타인이 비교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예를 들어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테러리즘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 팔레스타인 같이 절망적 상황에서 독립투쟁이 극단화 되는 것은 쉬운 일이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빌미로 협상을 거부하고, 다시 막강한 군사력으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노암 촘스키는 자신의 책 해적과 제왕에서, 똑같은 악랄한 살인과 약탈을 해도 그것을 배한척으로 소규모로 하면 해적이 되지만, 대함대를 거느리고 대규모로하면 제왕이자 영웅이이 되는상황을 지적하며, 한쪽만을 테러리즘으로 비난 하는 입장에 문제제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강경파는 팔레스타인 내부의 과격파를 문제삼아 분열시키는 동시에, 평화협상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독립을 무한정 지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정착촌을 확대하고 팔레스타인들을 학살하거나 해외로 쫓아내서, 결국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이스라엘화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50만명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먹어들어가고 있고, 이들은 법적으로 무장할 권리를 가지고 팔레스타인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영장없이 체포할 권한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 준 군사조직인 것이지요. 더불어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건설해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분리시키고, 이스라엘 정착촌들을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은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암 촘스키는, 자신의 책 숙명의 트라이앵글에서 이스라엘의 강경파는 PLO가 온건화 되고 평화협상에 나와서 이스라엘이 협상을 해야할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강경책을 써서 상대를 극렬화 하는 정책을 썼는데, 예를 들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여 팔레스타인 인들의 학살을 조장하여 갈등을 증폭시키고 피의 대결을 지속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PLO가 온건화하자, 1987년 이스라엘 정보부는 팔레스타인 사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종교적 색채가 강한 무슬림 형제단을 이끄는 야신을 지원했는데, 그가 창설한 단체가 바로 하마스입니다. 이스라엘이 현재 비난해 마지않는 테러단체 하마의 창설에 이스라엘이 어느정도 개입했다는 사실이지요.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제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관련 유엔표결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의견을 보이고 있으며, 이제 팔레스타인의 참상이나,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자행된 인권유린과 학살이 세계여론을 통해 잘 알려져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지지하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중동에서 독재정부를 지원하거나(사우디, 요르단, 쿠웨이트, 이집트 등등), 분열을 일으켜 약화시키는 방식(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이란에도 무기를 팔았음)으로 아랍국가들을 제어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해 왔으나, 이제 시민혁명의 확대와, 근본주의 이슬람의 발흥으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이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 온데 대한 결과가, 반미감정과 반 이스라엘 감정으로 폭발 직전에 이른 것이지요. 아래 표(출처: 매일경제 9월6일자 기사)에서 보듯이 중동은 이제 거대한 변화에 휩싸인 상태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요구도 더이상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중동에서 확산되어 가는 민주화의 물결을 적어도 원칙상 지지하는 오바마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독립권은 왜 인정할 수 없는가는 점점더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굳건한 지지 세력이 되고 있는 이들이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인데, 이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주장이 얼마나 역사나 현실에 무지하고 단순할 뿐더러, 성경적 근거도 빈약한 주장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번에 연재한 두개의 글들에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그에 기반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에,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현재 이스라엘의 폭압적인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급증하자, 오히려 보수 기독교인들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커녕,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고, 각국이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 지고 있다며, 더욱 이스라엘 지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과 역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을 바보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정의와 정반대에 서게 할 수 있는지, 처절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왜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주의 군사국가가 되었는가, 그리고 미국은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가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i]연합뉴스 914일자 기사, “카터,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승인 노력 지지

[ii] 다음 링크를 보시면 공화당 정치인들의 자세한 발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INSuFQhxLk

[iii] 이 글에서 설명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역사는 다음 자료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홍미정,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코리아 연구원 현안진단 25

[iv] 김재명, 2008 12 4일자 씨네21기사, 좌우갈등 속 모호해진 목소리: 학살현장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을 다녀와서 본 <바시르와 왈츠를>

 

[이인엽]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성경은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인지의 여부를 결정했으며, 언약의 땅에서의 생존과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결정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분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율법과 언약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의 영역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 공평과 정의와 자비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33:15]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 십일조법 등 종교적인 법 뿐 아니라, 정결법, 도덕법, 희년법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기25:8-10]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해야 했고, 칠년이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의 다음해인 오십년 째 해가 종이 해방되고 팔려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입니다. 가나안 입성 시 땅은 지파와 가족 별로 공정히 분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방과 달리 땅을 영구히 팔 수 없었고, 팔았더라도 오십년 째 해는 원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땅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신 것이며, 그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년법은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헨리 조지에 의해 토지경제학으로 연구되었는데,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가 발전함에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현상과 이 레위기 말씀을 연구하면서, 땅값의 상승이 이자나 임금의 상승보다 언제나 빠르고, 경제발전으로 창출되는 부가 대부분 지주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강화함으로서, 과거 레위기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고, 경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고 대천덕 신부님이나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의 활동으로 많이 알려진 바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대천덕,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www.landliberty.org)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언약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엄성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기 원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산수단, 생존의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영구히 잃어버리거나, 땅이 일부 부유층에 독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서, 생산수단과 생존의 기반을 영구히 잃어버린 백성의 일부는 경제적, 정치적 노예가 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된 소수의 부유층은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비극적 상황을 방지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정신은 신약에 들어와, 흔히 예수님의 취임사로 불리는 누가복음 4:18-19에서 ‘은혜의 해’로 언급되고 있고, 예수님 승천 후 성령의 강림을 통한 자원의 희년을 통해 계승됩니다(이 부분은 다음에 올릴 글들을 통해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이러한 희년의 원리가 실천 될 때 나타나는 평화와 축복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4:24-25]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 이쪽에 있는 모든 지역, 곧 딥사에서부터 가사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왕을 다스리며, 주위의 모든 민족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미가 4: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전도서 9:7-9]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성경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의 침략이 없는 것뿐 아니라, 사회 내에서도 경제적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져, 구성원들이 자기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안정적 생활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희년의 정신이 구현된 사회입니다. 극도의 빈곤을 방지하고, 또한 극도의 탐욕을 방지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필요가 채워지고 그분이 재어주신 구역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상태,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강력한 설계도를 우리는 율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실패합니다.


 


 [신명기 27:17]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하면, 모든 백성은아멘하여라.


[이사야 5:8]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열왕기상21:17-19] 주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위의 말씀들에서 보듯이
, 이스라엘의 극심한 타락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장치 없이 노예로 팔리게 되는 악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양극화, 백성의 노예화, 성의 상품화는 토지제도의 문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예나 오늘이나 기득권층들과 부유층은, 더 많은 부를 갈망했고, 욕심으로 인하여 희년을 지키기 싫어했으며, 오십년이 되어도 점차 땅을 돌려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부의 증대를 통해 정치적 사법적 권력까지 갖게된 이들은 더 큰 욕망을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공평과 정의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는 부의 집중과, 권력의 부패와 타락,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을 보면, 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끊임 없이 반복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단순히 돌에 절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을 통해 제시되는 이방의 사회, 경제적 문화와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바알 숭배 사상은 대토지소유와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그리고 아세라 숭배는 끝없는 성적 욕망을 합리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참고도서: 하웃즈바르트,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VP).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에서 살기 원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에 만족치 않고, 더 많은 소유와 토지, 쾌락을 원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와 이방의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이방의 공주로 시집온 이세벨에 의해 나봇의 포도원이 강탈당하는 사건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락과 율법의 파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과 공평을 집행해야 할 정치권력이,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해 하나님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의 정신,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할 뿐 아니라, 이방을 본받아 극도로 양극화 되어 백성의 일부가 노예화 되고 인권이 무시되며, 개인윤리, 경제적 정의, 사법적 정의, 정치적 정의가 모두 무너지는 타락한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땅에서 뽑아내시며, 땅은 그들을 토하여 냅니다.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이라는 것으로 언약의 땅에서 그들의 생존이 보장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무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짓밟은 이스라엘이 땅에서 뽑히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사야 1:21-23]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하나님은 망국이 임박한 상태에서도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고 종 된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권력층과 가진자들의 악을 질타하십니다(예레미야 34).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처절한 심판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인 강포와 패역이 심판으로 그치게 되고 그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자, 비로서 그들이 지키지 않았던 희년과 땅의 안식이 이루어 집니다 (역대하 3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로기 칠십년 이후 그 땅을 회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행위를 통해 계시 하십니다. (32)


 


[예레미야 34:13-1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너희가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또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각자의 남종과 여종들을 풀어 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나, 너희는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너희의 남종과 여종으로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예레미야32:14-15]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증서들, 곧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를 받아서, 옹기그릇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관하여라.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로 부터 새로운 왕조나 정부는 언제나 토지개혁을 가장 먼저 실시했고, 정권이 망할 때에 이르면, 토지제도가 지극히 문란해져, 소수 귀족층이 땅을 독식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소작인, 노예, 유랑민으로 전락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양극화와 백성의 노예화가 극단화 되면, 민란, 혁명, 전쟁등이 일어나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타락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하나님의 심판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과 재물이 그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룰 때 찾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사회의 붕괴와 외적의 침입은, 그 사회 내부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데 실패한 결과입니다. 안보의 문제에 대해, 세상의 권력은 그것이 오직 힘과 재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고, 안보를 위한 안보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안정과 생존은 언약의 순종 , 공평과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만드는가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외부의 위협을 부풀리고, 안보와 번영를 위해 공평과 정의를 희생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만들고,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가 우리 사회 속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22:3-5]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맹세하지만,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토지정의, 경제정의의 문제는 우리 삶과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헨리조지가 관찰했듯이 지대가 오르는 속도는 언제나 임금이나 이자의 상승 속도보다 빠르기에,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번 사람들 상당수가 부동산을 통해 불로소득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는데, 2006년 행정 자치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1% 인구가 전체 토지 57%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33.4%에 이르고 실제 비율은 더 높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약 54만가구가 월 20만원도 못 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의 편중과 중산층의 몰락,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견제장치를 약화시켜 부의 양극화를 가속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위 카지노 캐피탈리즘이라고 하는 투기형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서 돈 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지고 경제활동 전반이 투기화 되어 돈이 돈을 벌고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 됩니다. 현대에는 노예제가 없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되면, 하위계층은 낮은 임금으로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과 빚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채업자나 포주들이 피해자를 빚으로 얽어매어 노예처럼 부리는 것처럼, 개인의 기본적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권이 껍데기만 남아 무의미 해 집니다
     2009년의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약자의 경제권과 인권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임대인이나 피고용인의 권리 뿐 아니라, 토지소유자, 고용인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의 입장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법과 공권력은 언제나 가진자의 편이 되기 쉽고, 갈등이 있을 경우 강자에게는 그것이 ‘이익과 손실’의 문제인 반면, 약자에게는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공권력으로 무참히 진압하는 사회는 이미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사회도 희년의 정신에 나타난 기본적 경제권이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관심있는 분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의 심각성은 잘 알려져 있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중하위 계층에서 의료비용으로 고통받거나 파산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고, 최근의 경제위기로 집을 차압 당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비극을 합리화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라는 차원에서 현실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서 루즈벨트의 ‘제2권리장전’을 언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2 권리장전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명시된 ‘정치적 권리’가 모든 국민의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아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제적 권리’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특정한 경제적 진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2 권리장전 아래 새로운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신분과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마련될 것입니다그것은 합당한 임금의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복과 즐거움을 누릴 권리, 모든 농민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그와 가족이 걸맞게 생활을 영위할 권리, 모든 기업인이 사업을 함에 있어 불공정 경쟁과 국내외 독점체제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모든 가정이  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 적절한 의료보호와 좋은 건강을 누릴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훌륭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 이 모든 권리들이 말하는 건 사회보장입니다. 우리는 이들 권리의 이행을 통하여 인류 행복의 새로운 목표에 정진해야 합니다.. 자국에서 사회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즈벨트는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는 정치적 권리가 무의미해지기 쉽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정신에 상당히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네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차대전의 종전을 앞둔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경제적 권리를 법제화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후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사회의 경제권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더욱 더 약화되고, 감세정책으로 대변되는 가진자의 이익에 대한 철저한 옹호가 미국의 정책과 법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공평과 정의의 원칙 보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로 복음을 개인적 내세적 의미로 축소하고, 하나님 나라를 오늘 이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 죽은 후 가게될 천국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안에 자본주의 정신과 반공주의(엄밀히 말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에 대한 주장을 무조건 좌파로 매도하는 매카시즘)가 복음보다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강자의 횡포로 인한 약자의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분노를 듣지 못하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편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5:26-29]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가3:1-3] 그 때에 내가 말하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 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살려 달라고 주께 부르짖을 날이 그들에게 온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그렇듯 악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모스 2:6-8]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에스겔 22:29-31]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이 시대의 지배적인 우상은 맘몬으로 상징되는 물신주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우상을 분별하고 비판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맘몬의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 사회에 구현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우리 사회의 약자들)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물신주의 숭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이야기 하고, 교회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여부를 결정했듯이, 오늘날도, 기독인의 숫자나 교회의 숫자가 이 사회를 기독교 사회라고 보장해 주지 못하며,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방지해 주지 못합니다. 기독인과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기독교 국가가 된다거나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또 하나의 ‘선민의식’에 불과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억압과 고통을 받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줄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독인들과 교회는 바른 사회 윤리를 외치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희년의 원리를 살펴볼 때에, 우리에게는 ‘자선과 구제’를 통해 약자를 도와야 할 책임과 더불어,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도록 해야할 책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룻기는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발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구조적인 ‘희년제도와 기업무름제도’가 어떻게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먼저 자선과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대변합니다.


레위기19:9-10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신명기24:19-22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그래야만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명기23:24-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


신명기14:28-29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출애굽기23:10-11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위의 레위기19:9-10과 신명기24:19-22에 따르면, 추수할 때 지나치게 철저히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조금씩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는 어느때나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도둑으로 정죄당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신명기 14:28에 따르면, 매 삼년 째에는 십일조를 모아 사회적 약자들다른 직업이 없는 성직자, 외국인, 과부, 고아들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출애굽기23:10-11에 따르면 7년마다 휴경하는 것에는,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이 거기서 자라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룻기 2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남은 곡식을 줍게함으로서, 이러한 자선과 구제의 원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또한 4장을 보면 희년의 원칙에 따라 기업무름(가난한게 된 사람의 땅이나 자식없이 죽은 사람의 아내를 가까운 친척이 취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유업이 끊어지지 않고 가족들이 빈곤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와 롯은, 자신의 게으름이 아닌, 자연재해와 남편의 죽음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칫하면 빈민이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자 여성, 그리고 과부로서, 다중적 약자였던 롯이라는 한 여성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인 희년제도에 의해서, 보호받고 구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속에서도, 기독인들이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으로 복지제도와 경제정의, 토지공개념 등의 확립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형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애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실천된다면, 보다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고통과 악이 상당부분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원칙들을 명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정의와 공평과 인애가 넘치시는 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부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성경에서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인엽]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기독교의 역사속에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가 침투해 들어온 것에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격을 ‘민족적, 인종적 관점’으로 오해해온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구성원의 대부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열 두 아들의 혈연적 후손으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은 혈연 보다는 언약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였습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수차례 반복됩니다. 동시에 혈통적으로 비 이스라엘일 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를 사모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다말, 라합, ,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등 다수가 이방출신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누구나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36-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렘18:27-29]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개정개역)


[이사야 5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에스겔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아모스 9:7]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디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들을 보면, 출애굽 당시부터 다양한 족속들(이집트 내의 피압박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발했었고,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라기 보다 (그들중 다수가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일 지라도), 언약에 기반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 할 경우 백성중에서 끊쳐진다는 것은, 단순한 혈연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약의 땅(The Land of the Covenant)’, 즉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 땅이며,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앞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게 된 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극에 달해 땅에서 뽑힐 정도로 관영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시고, 그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십니다. 러므로 그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을 무조건 적으로 보장하신다는 ‘선민사상’과 정확히 충돌합니다. 심지어 성궤를 가지고 나가도 죄가 있으면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어떤 ‘상징, 명칭, 이름, 혈연’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가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원칙을 현재 국제관계의 상황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현재 민족국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는 눈을 감는, 미국과 한국 기독인들의 입장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세계 많은 민족 국가중 하나일 뿐인 국가 이스라엘을, 성경 예언의 성취로 확신하거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언약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였던 구약의 이스라엘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인종이 아닌 언약의 순종여부를 보고 심판하셨던 성경의 역사를 볼 때, 팔레스타인 땅이 무조건 인종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가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지원과 강력한 힘에 기반해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가는 이스라엘은, 다윗 보다는 골리앗에, 피해자 보다는 압박자와 가해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수천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적절한 재판도 없이 구금되어 있고, 지난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 전쟁때는 무방비 상태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400명 가량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8년동안 20명에 불과한 반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하루 공격으로 300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2010년 1월에는 모사드 요원으로 추청되는 암살자들이 유럽과 호주 등의 여권을 위조해 두바이의 호텔에서 하마스 간부를 암살하기도 했고, 2010년 5월 31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의 승선자들에게 발포해 10여명을 숨지게 하는 등, 이스라엘의 정책은 말 그대로 국제법과 인권을 무시하고 국가 테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의 기독인들은 반유대주의에 기반해
, 유대인들을 처절하게 차별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재 보수적 기독인들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반대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스라엘이 핍박과 차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역사상의 학살들보다 특별하고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이나 (실제로 북미와 남미의 원주만들에 대한 학살은 숫자나 처참함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에도,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무시되다 시피 한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문제제기도 곧 ‘반유대주의’로 취급되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라는 식의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팽배한 것도 상당히 기이한 현상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몇몇 국제정치 학자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스라엘의 로비에 의해 납치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예전에 한 유대인 친구와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웃으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유대인들보다도 오히려 이스라엘 문제에 열을 올리고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보이는 것이 자기도 신기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실제로 미국의 팻로버트슨 목사 같은 경우는, 팔레스타인의 완전 점령을 주장하는 이스라엘 극우파의 입장을 지지해 왔는데, 지난 1995년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개념 아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시도했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암살과 2006년 샤론 전 총리의 뇌출혈로 인한 사망을 하나님의 땅을 나눈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까지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조악하고,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상당수 미국 기독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이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마음과, 마지막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독인들에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과 현재 국가 이스라엘의 정책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식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에 비춰볼때,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상당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미국의 보수기독인들안에는 “God bless America”로 대표되는 자국중심주의와 기독교신앙의 결합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그렇기에 이며,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실 거라는 생각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먼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적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인구가 많다고 해서 그 국가가 기독교 국가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일개 국가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 등 의문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방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구약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오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궤를 가지고 나갔어도, 이스라엘 안에 죄가 있을 경우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느냐 였습니다. 언약을 지킨 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를것을 의미했는데, 하나님은 혈연이나 기독인들의 숫자가 아닌, ‘정의와 공평’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방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이 미국의 편일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에 따라 미국이나 그 어느나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링컨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편인가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기도하라고 했는데,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이 무슨 짓을 하든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고 자기들 편이어야 한다고 믿음으로서, 성경과 기독교의 정신을 왜곡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력을 상실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합리화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짐 월리스는 자신의 책 회심에서 진정한 회심은 우리가 섬기던 모든 죄와 우상에서 돌아서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 우상일 수 있고, 미국의 보수 기독인들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관찰한 보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결국 미국이 기독교화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미국화’ 된 것이, 오늘 미국 보수 기독교의 안타까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기독인들안에도 이런 민족중심적 사고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 예로, 한국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제사장 민족이요, 앞으로 공산권과 무슬림을 향한 복음의 서진을 위해 하나님이 크게 쓰실 민족이라는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은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저도 위의 바램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 이후제사장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경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안에 집단적 물질적 축복과 성공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닌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세계에 나간 일부 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처럼 예수 잘믿으면 경제가 발전하고 잘살게 된다는 것을 복음(?)으로 가르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이라면, 예를 들어 기독인과 교회가 적은 일본은 왜 잘 살고 있는걸까요? 축복이 아닌 핍박을 받은 순교자들의 삶은 또 어떻게 설명합니까?). 한국교회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면, 한국의 선교사들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동시에, 한민족이 대륙을 달리며 세계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는 식의 희망을 피력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담론에서는, 심지어 과거 제국주의 선교모델과의 유사성까지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론적 관점은 하나님의 윤리와 정의보다 성공과 부를 우선하게 하고, 그에 대한 욕망을 신앙적으로 합리화 해줄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독재정권시기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한 것, 많은 사회 이슈들에 있어서, 약자의 입장에 서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도, 교회안에 존재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사고의 악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편이라고 믿는 것은 세계 열방의 하나님을 일개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십자군이나, 이스라엘의 왜곡된 시오니즘, 그리스도인들안에 존재하는 인종주의, 민족주의, 패권주의, 선민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왜곡입니다


 


P.S. 미리 소개하는 결론


     이 시리즈의 결론이 되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기독인들 마저, 국제관계와 국내 정책에 있어 안보와 번영을 최 우선으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안보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잘먹고 잘살게 되는 것이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형적 부국강병의 논리이지요. 오늘이 한국에서는 지방선거일인데, 결국 선거를 좌우하는 메시지도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믿는 이들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인들마저 이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안보와 번영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화해와 평화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법도를 최우선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도입 질문에 소개했듯이, 이라크 파병과 같은 정당성이 부족한 정책에 있어, 저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국가 이익보다 정의를 우선하고 끝까지 반대할 사람들은 기독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가 이익을 좇을 때라도, 정의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승리를 믿는 자가, 당장의 이익이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외칠 힘을 갖게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보수 기독인들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인 ‘정의’ 보다도, ‘국익’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것 같아 의아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왜곡의 결과는 역시 국가의 기독교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국가주의화’겠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단기간의 국익보다 정의를 우선했을 때, 장기적인 측면에서 더큰 국익이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단기적 국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했을 때,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손실이 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시기를 얼만큼 잡느냐, 그리고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논의가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파병결정 당시, 정책담당자들은 이라크 파병과 부시정부의 대북정책 유연화를 놓고 일종의 ‘빅딜’을 기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이러한 현실주의적 정책결정이 어떠한 득실을 가져왔는지 분명한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9월 3일 연설에서 제 3위의 파병국인 한국의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대북 정책을 선회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가 아닌, 미국 국내 선거의 공화당 참패와 네오콘들의 퇴진,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내 비난이 고조된 2006년 말, 2007년 초에 일어났기 대문입니다. 
     많은 경우 안보와 번영을 추구하면서 평화와 정의가 파괴됩니다. 다른 말로세상의 권력자들은 ‘안보와 번영이라는 거짓된 약속’을 내세워 평화와 정의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그것을 절대화된 ‘우상’으로 섬길 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 즉 공평과 정의를 추구할 때 ‘따라’오는 것이라는 점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무너진 것은 외적의 위협도 있지만 그 안에 이미 정의와 공평이 파괴되고 극심한 빈부격차, 토지제도의 문란 등으로, 국민들이 그 나라의 체제를 지킬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외적의 침입과 나라의 상실은 이스라엘의 국내적 죄(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들이 삶에서 공평와 정의를 누리는 나라는 그 누구도 쉽게 침략할 수 없고, 그렇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의 원리를 따를 때, 진정한 안보와 번영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안보와 번영이 최고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라를 지킬것이고,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순진한 소리 말아라”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안보와 번영을 우상으로 섬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먼저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공평과 정의가 서면 하나님이 안보와 번영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이는 개인의 신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와 성공과 생존”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정의와 공평과 인애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에 굴복하기 쉽고 그럴때에 우리 삶에서 정의와 공평과 인애는 파괴됩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보다 부와 성공을 합리화하고 축복하는 왜곡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복음의 내용 자체도 물질주의, 성공주의, 승리주의로 교체되는 경향마져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비극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악’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고, 그분의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기독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성경구절을 몇구절 소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의’는 가급적 정의로 바꾸어 읽어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두 구절은 제가 개인적으로 바꾸어 읽은 것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5:10]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벧전3: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10:31]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이제 다시 내가 너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 내듯 너를 씻고, 너에게서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패망하고, 주를 버리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당할 것이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이인엽]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인엽이라고 합니다. 2009년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는데, TM 코스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때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었고, 강의안을 정리해서 올리기로 eKOSTA에 약속드렸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마무리를 못하던 중, 이번에 블로거로 초대해 주셔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강의안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며 전공인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고민 했던 것을 정리해 올리는 글이 될것 같네요.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공분야에서도 아직 기초를 다지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신앙과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시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딱딱하거나, 정치적인 견해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점 또한,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이런 류의 강의를 할때 제가 주로 시작하는 도입 질문중의 하나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이 당시 대한민국의 정책 결정권자라면 (파병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입니다. 이 질문에는 국가의 이익과, 윤리라는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할 텐데, 국가 이익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크게 세가지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파병을 통한 국익도 있고 이라크 전쟁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기에 찬성한다. 2.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찬성한다 3. 국익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기에 반대한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놀라는 것은 비기독인은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기독인들이 두번째, 즉 현실주의적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결국 국익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수나, 진보보다도 강력한 담론은, 현실주의 혹은 국익 우선주의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과,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정책들 뒤에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국가이익(경제와 안보에 있어서의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올바로, 정의롭게, 평화롭게 살아보세보다는 잘먹고 잘 살아보세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와도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이익이라는 강력한 이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신앙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이원론적 관점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일치한 다는 관점, 혹은 하나님 잘 믿으면 우리 나라가 잘 된다는 축복론적 입장 등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온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이런 관점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정치적 역할의 문제점들을 살펴봤을 때도,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대략 아래와 같고, 인용한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썼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약의 윤리와 선지자들의 비판 전통


(5) 신학의 문제: 이원론과 콘스탄틴 주의


(6) 국가의 기원과 그 속성. 권력의 악마성과 그 대안. 


(7)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왜곡된 생각 


(8) 국제관계에서의 정의: 제국의 정신과의 충돌


(9)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10) 성령의 역사와 해방적 함의


(11) 뒤틀려진 기독교


(1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요한계시록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국가주의가 정치 조직과 구조에 기초한다면, 민족주의는 인종과 문화에 기반한다고 하겠죠. 한국처럼 비교적 인종적으로 단일한 국가라면(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롯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두 개념이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는 형태를 띌 것이고, 미국처럼 다인종 사회 같은 경우, 인종보다는 문화와 정치조직이 더 중요시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가지의 공통점은, 자기 집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자기애와 자기 중심성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애국 애족을 넘어, 우리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는,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집단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러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부분을 성경의 관점에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역사 중,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난 이집트 심판과 가나안 정복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읽혀져 왔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흑인노예제 및 흑백차별제도하의 미국 남부 기독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일화를 이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기도 했고, 미국 역사 초기에 일어난 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의 기독인들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통해 합리화 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을 ‘이스마엘의 후손 대 이삭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위의 인종주의적 오류들과 얼마나 다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수호신으로 왜곡하고, 이를 넘어서 폭력이나 학살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성경의 가르침이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일순간에 쳐서 죽인이야기나,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모조리 없애라고 하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인들은,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하거나, 이를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오류들처럼, 이를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를 풀어주는 성경구절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 15: 13-16]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18:24-29]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정한 열방의 심판자로서 접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대를 걸쳐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그 땅에서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만큼 차고 넘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 정복 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관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극악한 죄악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거나, 하나님을 안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에서 그들의 악이 멸망과 땅에서 토함을 받을 정도에 이르렀기에 심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시기나 제국주의 시기에 주장된 것처럼, 단순히 원주민들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켜야 하셨어야 할텐데, 성경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에 어두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주민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주기 위해 없어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심판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같은 죄를 범하면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일하게 땅에서 토함을 당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점입니다. 이 경고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서, 가나안 못지않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처절한 심판과 포로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거주민이 하나님의 뜻과 언약에 따라 ‘살아갈 때’, 거주할 권리를 갖게 되는, ‘언약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무고하게 멸망시키시고, 이집트백성들을 죄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시기, 그는 가나안족속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창23장), 야곱과 요셉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창47:1-12). 그들이 인종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할 때 일어난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살펴보면,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이 당시 약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강제노동과 영아살해와 같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을 보내라는 하나님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전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남아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압박자와 피압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인종적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사야서 19장의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다음과 같은 회복과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9:21-25]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께 예배하고, 또 주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주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하실 것이다.


 


     결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민족적,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할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역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말씀을 모르고 범죄하는 이방인과 싸우시지만,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과도 처절하게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칼은 양날의 칼이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향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타락하고 나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고 포로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만,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타난 총체적 타락상 성적타락과 부정직이 만연하고, 희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노예로 부리고 팔아버리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과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방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을 살펴보면, 심판받을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 원주민이 보여준 타락과 포악의 정도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할 뿐더러, 오히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놀랍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한 민족의 수호신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사상은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과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인종차별과 학살, 전쟁등을 합리화 하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성경을 그에 맞춰 왜곡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분의 정의를 더럽히는 심각한 죄일 뿐더러, 정의와 공평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을 교회와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다음 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는 두가지 관점 (혈연적 공동체 vs. 언약적 공동체)을 소개하고 비교해 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