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보이지 않았던 선물
F2 이야기
보이지 않았던 선물
2년 여 전, 결혼과 남편의 유학으로 인해 직장 생활을 포기하고 정든 사람들과 헤어져 타문화권으로 옮겨와 새롭게 삶을 시작하던 그 때. 모든 것이 낯설고 또한 타의에 의해 나의 것은 모두 버려진 듯한 생각으로 꽤나 눈물을 흘렸던 그 날들….
미국에 온 지 한 2개월 쯤 흘러 교회 청년부 모임을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청년부의 한 자매와 원투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자매는 박사과정 ‘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나와 공통점이 있다면 ‘주부’라는 점이었다. 우린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QT 나눔을 하고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눈 후 기도로 마치는 형태로 만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보낸 후 자매는 자신의 삶에서 기도 시간과 QT 시간을 따로 떼어서 하기가 힘들다는 어려움을 표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시간을 그날의 QT 시간으로 정하여 함께 성경을 보고 의문점이나 느낀 점을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이 더 흘렀을 때 이웃에 살며 인사하고 지내던 K주부를 그 만남에 초청했다. K자매는 집에 있으면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고 나면 그 당시엔 재미있는 것 같아도 헤어지면 허무함이 남는다면서 우리 모임을 자신도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 이제 모임 인원이 3명이 되었다. 한 명이 더 늘어난 모임이 되니, 궁금한 것도 많아져서 다른 참고 자료도 찾게 되었고, 의미 파악이 어려운 개역성경 대신에 영어성경(NIV)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늘어난 세 명의 인원은 곧 다섯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K주부를 통해서 P주부가, 나를 통해서는 E주부가 모임에 오게 된 것이다. 우리 모임에 두 명이 더 늘어나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사실 그동안은 처음 원투원했던 자매가 박사과정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 자매의 스케줄과 동선을 최대한 줄여주는 배려로 학교 식당에서 모임을 했었다. 그런데, 새로 모임을 같이 하게된 E주부는 한 살이 좀 넘은 딸 아이 하나가 있었고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 함께 학교까지 가자고 할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한 살 박이 아기가 식당에서 얌전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집으로 모임 장소를 변경하게 되었고 5명이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보다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그 대신 학생이었던 자매에게는 라이드(ride)를 해 주었다. 새로 모임을 같이 하게 된 E주부는 한국에서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아기 키우면서 아무런 사역을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져 내림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모임에 와서 신학적 견해나 성경배경 지식 등을 소개해 주는 역할을 맡음으로서 자신이 전공한 것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모임이 깊은 나눔과 성경공부로 채워져 가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다. 우리가 식당에서 모이고 있을 당시, 우리를 쳐다보며 몇 번 인사하고 지나가기만 하던 H자매에게서 우리 모임에 함께 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가졌던 그녀에 대한 선입관, 주로 그녀의 독특한 성격과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우리 모임에 함께 하기를 초청했을 때 놀랍게도 그녀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모임에 꼭 오고 싶었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난 무척 기뻤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 H주부도 교회 청년부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주로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대다수인 이 모임에서 쉽사리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어려웠고, 유학생의 아내로서만 사람들로부터 인식되는 것처럼 느꼈으며, 임원들은 모두 유학생인 그 모임에서 어쩐지 주부들은 소외 당하는 것처럼 보여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는 나를 ‘나’로 여겨주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같은 주부이기 때문에 관심사도 비슷하고 편하다고 했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던 이 자매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선택의 순간 앞에서 기도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모습이 생겨났다. 지난 청년부 수련회에서 중보기도 시간에 이 자매와 나 사이에 생긴 일이 하나 있다. “난 언니가 우리 모임에 온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라는 나의 말에 딱딱하게만 보였던 그 자매가 눈물을 흘리며, “고마와요. 하나님께서 자매를 귀하게 쓰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나같은 주부들을 위해 계속 섬겨 주세요”라고 했던 말을 난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성경공부 모임으로 굳혀진 우리 모임의 인원은 2년 정도의 주기로 새로 오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때문에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10명 내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간의 나눔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모임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재 인원을 2개조로 나누었다. 또한 2개조로 나누다 보니 리더십을 키워야 하는 문제도 함께 대두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모임을 같이해 온 우리들 중에서 추천을 받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임명할 수도 있었지만 모임을 같이 해 오면서 구성원들이 리더십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 조는 K주부가 맡기로 하고 다른 한 조는 내가 맡기로 했다.
우리 모임은 금요일 아침 11시부터 모여서 한 조는 거실에서, 다른 한 조는 방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한다 – 모임 인원이 적은 날은 함께 하기도 한다. 텍스트로는 영어성경을 사용하고, 관주와 표준새번역, 성경사전과 성경지도 등으로 정확한 뜻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을 함께 나눈다. 그 다음엔 기도 제목을 나누고 기도한다. 요즘에는 성경 말씀 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를 위해 책 나눔도 하고 있다. 한 장(chapter)씩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고 질문과 응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가정을 돌아보고 문제를 내놓고 함께 기도하면서 가정을 조금씩 회복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다. 앞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악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책 나눔을 통해서 공부할 예정이다.
2시간 정도의 모임 후에는 각자 싸 온 도시락을 한 식탁에 놓고 먹으며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다른 조에서는 어떤 나눔이 있었는지 자유롭게 얘기하는 교제 시간을 갖는다. 보통 3시 정도까지 두 시간 정도를 함께 나누다가 급한 일이 있거나 아이가 있는 자매들은 집으로 가고, 남는 사람들끼리 쇼핑을 하거나 커피숍에 가서 티타임(Tea-time)을 갖기도 한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 너무 오랫 동안 시간을 갖는 게 아닌가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부 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꼭 점심 시간을 포함해서 오랜 시간 동안 의미 있고 깊이 있는 나눔을 원한다. 이런 사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하고픈 말이 많으며 위로 받고, 또 위로하고픈 역동적인 시간의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있는 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임의 특이한 점은 주부들이 모였다는 점이다. 내 주위에 친하게 지내고 있는 싱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여드는 건 주부들 뿐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많은 위로 받음과 편안함으로 왔다가 점점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대부분 그들의 남편은 학생이거나 박사후 연구원이었기에 아침부터 밤까지 늘 학교 공부와 일에 바쁜 반면, 아내들은 한국에서는 그런대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자신 있게 살아왔다가 너무나 조용한 이곳에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삶을 살면서 정체성을 잃었던 것이었다. K주부는 1년을 울면서 한국에 가고 싶어 우울증 걸리는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남편들이 잘 해 주어도 이 자매들의 눈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임을 통해서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처음엔 자신들의 한풀이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구체적으로 이곳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만 2년이 되는 이 모임은 그들의 남편들과 다른 외부 사람들에게도 인식되어서,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 모임에 나오는 주부들의 남편들은 집에서 아내에게 잘 해야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서운하게 하거나 잘 못하면 곧바로 이 모임에 기도제목으로 나오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남편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
우리 모임은 왜 이렇게 자라게 되었을까? 처음 나의 의도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대학 시절 선교단체 활동을 통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에 시작한 원투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6개월 안에 모임의 크기가 커지고 내용도 성경공부로 변화하고 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임을 섬기려다 보니 성경도 여러 번 보게 되고, 기도도 더욱 하게 되고, 자료도 찾게 되고 모임의 필요에 더욱 민감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원하고 계셔서 우리를 모아 주신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난 주부 모임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니까. 난 단지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모임은 어디에 없을까’란 생각만 잠시 했을 따름이었다.
며칠 전 창세기에서 요셉의 삶을 공부했다. 그때 우리들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외국에서의 삶과 더욱이 감옥에서도 ‘성실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잃지 않았던 요셉처럼 F2의 삶을 살아가자고 기도했다. 타의건 자의건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옛것에 대한 미련을 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성실함’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요셉이 만 2년 이상을 감옥에 있었지만 그것도 요셉의 삶의 한 부분이듯이, 지금 집안 일로만 하루를 보내는 삶이건, 무언가 공부를 시작했건, 일을 하게 되었건 간에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들어 온 ‘삶’인 것이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다고 느껴서 안달하거나 속상해 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다시 보라. 정말 자신도 꽤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느낄 것이다.
나는 우리 모임에 대한 나눔이 부디 미국에 살고 있는 유학생 부인들에게 힘이 되길 원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이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기도할 수 있는 짝을 만날 수 있도록, 아니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사람을 찾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모여 당신을 알고자 힘쓴다면 그 모임을 결코 찢으시거나 망치실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난 결혼한 지 2년 반 정도 밖에 되질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주부 모임을 어떻게 만들어 갈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늘 주님이 함께 하셔서 만들어 가실 것을 믿는다. 처음에도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