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10, 2003 | 삶과 신앙/한국인과 예수인
한
국인의 하나 되는 정서는 한 솥 밥을 먹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구한말 보부상들이 다닐 때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더라도 솥만큼은
따로 가지고 다녔고, 손님은 따로 솥에 밥을 지어주었던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빔밥, 그것도 모듬 비빔밥은 이런
하나됨을 한 차원 더 올리게 한다. 어릴 적 자랐던 교회에서는 여름마다 산 집회를 갔었다. 일주일간 천막을 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각 천막 별로 공동식사가 이루어진다. 야외인지라 식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여분의 숟가락만 있으면 걱정하지 않았다.
깊숙하게 파진 큰 양푼 그릇에 남은 밥과 반찬을 넣고 휘 젓 거리면 훌륭한 비빔밥이 만들어졌다. 킬킬거리며 머리들을 맞대고 입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 지도 모를 정도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즉흥 모듬 비빔밥이었다. 이런 모듬 비빔밥이 한 솥 밥을
먹는 식구의 의미를 피부로 미각으로 체감하게 한다. 현란하게 오가던 스텐 숟가락의 공중곡예들, 먹으랴, 말하랴, 튀기던 침과
다시 양푼 속으로 낙하하던 밥알들, 그리고 흔들거리는 머리칼에서 반짝거리며 떨어지던 하얀 가루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 먹고
소화시켜야 했었다. 한 식구(食口)가 될 때 비로소 한 가족(家族)이 되었다. 그래서 가족이란 모름지기 식구여야 하는 것이다.
요즘 생각하면 B형 간염의 주요 감염경로라고 펄쩍 뛰겠지만, 위생의 이해 득실을 넘어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그 때 이루어
졌다. 물론 디즈니의 만화영화 건달과 숙녀(Lady and Tramp)에도 두 마리의 남녀 개가 달빛과 아코디언의 생음악을
배경으로, 한 가닥의 스파게티를 나누는 진한(?)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모듬 비빔밥과 스파게티 국수 한 가닥과는 그
농도와 풍성함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분명 한 그릇에서 너와 내가 같이 떠서 먹지만, 한국인의 모듬 비빔밥은 먹을 때마다
숟가락에 무엇이 건져질 지 모른다. 바다에서 낚시하듯, 다양한 종류가 걸려서 올라온다. 친구의 침 속에 무엇이 섞여 있을까
걱정하면 절대로 못 먹을 밥이다. 신뢰의 농도가 진한 만치 다양한 반찬이 섞인 모듬 비빔밥을 먹게 된다. 흩어졌던 다양함이
신뢰로 모일 때, 우리네 삶이 당장 풍성하여 지는 것이 한국인의 잠재적인 비빔밥 파워다. 오늘도 한 양푼에 재료를 넣고 친구끼리
먹는 모듬 비빔밥은 서울의 한 복판에서 버젓이 팔린다.
조화로 먹는 비빔밥; 융화를 부추기는 비빔밥
기
왕 비빔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우리의 먹거리 이야기를 하여보자. 서양의 먹거리는, 쪼개고 구별해서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선택을
통해서 음식의 맛을 찾는다. 한국인의 음식은 다른 음식과 융합과 조화의 맛을 느끼게 조리한다. 내친 김에 한식 이야기를 좀
더해보자. 비빔밥이 문헌에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18세기 말엽 시의 전서라고 하며, 골동반(汨董飯)으로도 불린다. 어지러울
골(汨)자에 비빌 동(董)자가 아우러져서 나온 음식이다. 주식에 곁들여 먹는 서양의 샐러드와는 달리, 비빔밥은 주식이다. 그리고
각 재료들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반찬이다. 그렇지만 각각으로 섭취하면 온전한 미각의 기준에 아쉬운 감이 드는 음식이기는 밥과
고추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함께 섞어지면 모두의 맛이 살아난다. 이런 비빔밥의 유래는 다양하게 설명된다. 임금의 가벼운
점심상으로, 또는 섣달 그믐날 새날을 맞기 전 묵은 음식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시작되었다고도 하며, 그릇이 여의치 못한 야외에서,
편리하게 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분주한 농번기에 농부들의 식탁에서, 성묘 시 차례를 마치고 제물을
골고루 음복하기 위한 신인공식(神人共食)에서, 심지어는 동학 혁명군의 야전 음식에서,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가진 한국인에게
통일된 미각과 음식을 공유하게 하는 길이 비빔밥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점심 시간, 자리 지키고 열심히 제 도시락 파먹는 얌전
파와 도시락을 들고 교실 안팎을 방황하는 배회 파가 있었다. 무말랭이 같은 메마른 짠지 종류를 반찬으로 싸오던 급우들도, 교실
한 바퀴 돌면 각 양 고급(?)반찬으로 도시락 통이 채워지고, 그 양철 도시락 통을 들고, 김치 국물 배어 나오기까지 한참
흔들고 나면, 비빔 도시락이 만들어졌다. 당장은 어지럽게 보여도 비비고 부대끼다 보면 함께 어울리는 상생의 길이 열린다.
한국인은 비빔밥으로 이 진리를 체득한다.
찜 닭 속에 계셨던 예수님
이
와 유사한 음식문화는 중동인 들에게서도 보았다. 세인트루이스에서 공부할 때였다. 이란 유학생들의 초대를 받아서 여러 나라
유학생들, 그리고 지도 교수들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인 식탁은 아예 치워놓았고, 아파트의 거실 중앙에 큰
신문지들이 겹겹이 펼쳐 져있었고, 가운데 큰 대접을 놓은 것이 영 판 소풍 가서 점심 시간 먹는 모양새였다. 향긋하게 찐 쌀밥과
짭짤한 배추절이가 수북하니 담겨져서 나왔다. 그리고 금방 돌아가신 듯, 아직도 눈을 지그시 감은 요염한(?) 자태의 발가벗은
치킨들이 가지런히 대접의 원을 따라서 누워있었다. 우리는 먼저 오른 손을 씻었고, 둥그렇게 앉아서 손바닥에 고기와 야채와 밥을
오므려 싸서 먹었다. 한국인은 그래도 숟가락이라도 쓰지만, 원색적 손가락들! 힘껏 쭉쭉 빨던 그 손가락으로 덥석 고기도 밥도
주물럭거렸다. 미국인 교수들이 엉거주춤하니 당황해 하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왼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먹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손으로 직접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역겨울 정도로 버거운 요구이었음에 분명하다. 대부분이 곧 포크를
요청해서 식사를 마쳤다. 그들은 포크를 사용함으로 자기 침을 남들에게 줄 기회는 놓치고, 남의 침 튀긴 쌀과 고기, 반찬을 먹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제 3세계 국가에 속한 자유로움을 만끽하였다.
비빔밥에서 화목 제물로
그
래서 중동의 식사 문화는 밀접한 신체적 접촉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한 집단에 소속함을 의미한다.
손을 씻는 결례 (潔禮)의 전통에 무지한 무례한 사람들이나,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타 그룹을 제외하는 용도로 쓰였던 식탁이 예수를 통해서 포용의 자리로 변화되었다. 각 양의 사람들이
초청되고 포용되었다. 예수가 그 당시 기득권자들에게 드러나게 눈 밖에 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식사와 관련된 이슈였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마태 9:10-11). 그 분이 한국인으로 태어나셨다면 아마도 천민들과 함께 모듬 비빔밥에 숟가락 꽂고
잡수시다가 양반들에게 심한 핀잔과 질책을 받다가 가문의 호적 명부에서 이름이 파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성경의 화목제물을
먹는 장면도 이와 흡사하게 실용적인 의도를 참석자에게 유도한다. 기름은 제단에 불태우고, 갈비 살과 오른쪽 넓적 다리는 성전에
남겨두고, 나머지 고기들은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식구들과 친지들을 불러 함께 먹는다 (레위기 3장). 굳이 신학적 이유를 몰라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손에 침 발라가며 같은 밥그릇을 주물럭거리며 먹는 것은 급체의 원인이 될 것이다. 화목제의 밥상
위로 오가던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이웃과 마음을 주고받아야 비로소 화목제의 온전한 모습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레위기의
혁명적 시도는 이런 밀접한 만남이 일어나도록 디자인 된 의식이다. 출애굽의 가장 드라마틱 한 모습은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라암셋에서 가나안을 향한 진군을 시작하는 해방의 장면이다. 보행하는 장정만 60만, 무수한 무리 들 가운데, 중대한 잡족이 함께
섞여서 출발한다 (출애굽기 12:37).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그들을 출애굽의 신민으로 묶어준 상징적인 식사가
유월절 식사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 솥 밥을 먹는 식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출애굽기 12: 48-9).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도 음식 정서 상은 이런 것이었을 것 같다. 성찬은 중동식 레위기 비빔밥의 완성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손가락
빨아가며 양고기와 반찬을 무교병에 상추 쌈 먹듯이 그렇게 먹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침을 사람이 먹고, 사람의 침을 하나님이
먹었다. 침 한 방울에 우리의 모든 유전자를 다 추적해 낼 수 있는데, B형 간염 같은 죄성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우리로 인해서 거룩하게 망가지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초(超)인이 아니라 초(初)인이다
세
상이 목말라 기다리는 사람들, 세상이 기대하는 사람은 여기에 있다. 이 육사가 목말라하던 초인은 백마를 타고 인간을 건너뛰는
초(超)인이 아니라 인간의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주느라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을 지니고 사는 초(初)인이어야 한다. 천년 후에 오실
기약 없는 바람만 주는 분이 아니라 과거에도 오셨고 현재도 오시면 미래에도 오시는 분이어야 한다. 이 분이 오시면 과거의 원한과
상처로 눈을 흘기고 부라리며 살기가 등등한 얼은 밥상이 한 솥 밥으로 묶어주고 먹게 하는 모듬 비빔밥으로 바꾸어진다.
출신학교도, 소속 교회도, 지방과 풍속도, 억양과 사투리도, 집 평수와 학군도, 세대차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애찬을 먹는
사람은 천국에 사는 사람이다. 꼭 청포를 입고 오지 않아도 된다. 예수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비빔밥이 가진 복음적 가능성을
경험하며 살게 한다. 그래서 세상을 예수께로 이끄는 화평의 한국인은 예수 만난 한국인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한국인의 모듬 비빔밥을 예수인이 먹을 때 산나물도 고추장도 화목제물 성찬이 된다. 세상의 화평과 인류의 평화는 구호와 현수막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요란한 선전무대 위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평화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평화가 곧 길이다. 젖은
청포도 몇 알만 있어도 즙 묻은 손 닦을 하얀 모시 수건 준비하는 육사의 정성이라면 예수는 우리 가운데서 섬김을 받는다. 사람과
사람이 살갑게 꾸밈없이 만나는 먹거리의 현장에서부터 예수 보듯이 사람과 만물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Oct 9, 2003 | 삶과 신앙/한국인과 예수인
한
번은 어른 목사님들과 같이 미 동부 필라델피아의 한국 식당을 갔다. 어르신 목사님께서 주문하셨다. “여기 식당에 회 덮밥, 빨리
나오지요?” 말 떨어지자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회 덮밥이다. 먼저 와서 멋모르고 다른 것을 시킨 사람들도 슬금슬금 회
덮밥으로 바꾼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었다. 난 그 날 정말 회 덮밥 무드가 아니었다. 아랫배에 살짝 힘을 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냉면 곱빼기! 주문하는 순간, 방안의 체감 온도가 냉랭하게 내려감을 느꼈다. 그 날 냉면은 무척 춥게 먹었다. 미국에서 찍히던
순간이었다.
그
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제는 아무도 음식점에서 어른의 눈치를 보면서 주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있으면 고지식하고 주체성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자기 구미 당기는 대로 주문을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다양성의 강요도 또 다른 종류의 획일성일 뿐이다.
미
국에 와서 산 지 20여 년이 되지만 지금도 어색한 것은 미국 식당에서 음식 주문이다. 계란 하나를 주문해도 유정란, 노
콜레스테롤 일반계란, 익히는 것도 반숙, 완숙, 노른자 그대로, 노른자 뒤집기, 스크램블드,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는 수도 있다.
후추를 넣어, 말아? 치즈 얹어 줘, 그냥 줘? 토스트는 어떻게, 잼은 어떤 잼, 시럽은 무슨 시럽, 감자는 어떻게, 마치
취조관에게 심문 당하듯 진땀을 뻘뻘 흘린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소소한(?) 것까지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은 세월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색하고, 때로는 귀찮기까지 하다. 산술적인 선택의 증가가 자유의 확장이 아님을 체득한 셈이다.
만
약 한국 식당에서, 비빔밥 위에 얹어주는 계란을 미국 식당 주문하듯이 각 손님마다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방장 아줌마에게 뺨
맞고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식당의 경험이 미국 식당에 뒤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자유는 주로 식당과 음식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국한된다. 그 이상은 식당의 재량에 맡긴다. 알아서 잘 해 달라는 것이다. 식당과
주방을 믿고 자신의 식탁을 맡기는 것이다. 미국인으로선 대단한 믿음의 결단일 수가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못 믿을
바에야 왜 식당을 가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자유의 과실
그래서 한국인은 강요된 선택의 확장만으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선택의 확장까지도, 자유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선택의 자유보다 신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자유에 선행할 때 자유가 자유스럽게 다가온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선택을 존중하여 줘야 할 이유는 그런 임의의 자유를 누리게끔 창조부터 설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영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교감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창
조의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처음 당부는 동산 안의 각종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준 자유의 선택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자유는 열외로 두셨다. 만들어진 사람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을 거부하고 하나님같이 살고자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전락된 모습들이 인간사에 질펀하게 어질러져 있다.
자유가 오염될 때 증가하는 것은 고통의 선택이었다. 한가지 금령은 만가지 자유를 누리기 위한 함축된 경고문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가장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입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신 사람의 입장에 설 때라는 것을 최소단위의 금령이 상기시켜 준다. .
Sep 9, 2003 | 삶과 신앙/한국인과 예수인
나
의 관심은 한국인이 신앙, 인생, 세계와 사람들을 접근할 때에 어떤 특색이 있느냐는 데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의 신앙 형태가 한국인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움직인다는 자 인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어떻게 제자리를 잡아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특정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숙제이다.
우
리는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는 다민족, 또 우리가 찾아가서 섬겨야 할 다민족에게 한민족은 어떤 특징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하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오염된 민족의 모습들을 정화시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언약의
천국백성의 모습으로 승화시켜 가는지 담담히 정리 해 볼 이유가 있다. 그 과정적 어색함과 초라함까지라도 말이다. 복음은 겉치레로
감싸왔던 선비의 도포자락을 세마포 흰옷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수가 그 일을 한다. 진짜 백의 민족이 탄생하는 것이다.
씨는 땅을 먹고 자란다
어
릴 적 출옥성도 손 양원 목사님의 옥중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 재판관이 손 양원 목사님께 ‘어째서 내선일체로 다른
기독교인들과 같이 일본적 기독교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손 양원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일본은 조그만
간장 그릇 같은데, 기독교는 천지 만한 바윗돌이다. 그런데 이 간장 종지 같은 그릇에 바윗돌을 담으려 한다면 어떤 것이
깨어지겠는가? 그래서 일본의 노력은 풍비박산으로 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복음이 씨앗이라면, 민족성과 문화는 그
씨가 먹어야 할 토양이다. 씨는 땅 속에 들어가도록 심겨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씨는 씨고 땅은 땅이다. 그 씨가 토양을 먹으면
생명이 자라난다. 반대로 토양이 씨를 먹을 때에는 토양만 커졌을 뿐이다.
한
국인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받아들인지도 구교 200년, 신교 100년의 역사가 지났다. 세계 선교사의 유례 없는 성공사례로
자찬하지만, 너와 남의 집을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한국 교회의 오염된 문화, 지도자, 교인들이 쏟아낸 오물도 세계에 그득하다.
그리고 그 배설되는 오염에도 한국인 적인 공통점이 있다. 대단한 저력이다.
우
리의 방심을 타고, 한국적 기독교가 부정적인 줄기를 타고 형성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반만년 민족을 괴롭혀왔고
병들게 했던, 독특한 한국적 병폐가 교회 안팎을 둘러싸고 옴짝달싹도 못하게 얽어 매고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소리에 선지자적 권위도, 지혜자적 혜안도 상실하게 되었다. 장독 안을 맴도는 메아리처럼 그런 하릴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유기농장 대한민국
그
렇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누가 8장). 하나님의 밭도 유기농업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풍성한 유기농 거름을 자체 생산하는 민족이다.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가 한국인의 문화와 민족성을 거름처럼
먹어야 한다. 토양은 한국인의 토질인데, 피어나는 것은 예수의 꽃이 되어야 하고, 맺히는 것도 예수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
그래야 세계교회와 역사에 누(累)가 되지 않고, 보탬과 유익이 되는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다.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세계역사가 조용한 주목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민족을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면, 이보다 더 이상 귀한 대우가 어디
있겠는가?
내
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사모님은 자신을 예수 향기로 소개한다. 그 분과 목사님은 성년이 되어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와는 무관하게 지어졌을 수향이라는 이름을 예수 향기로 전환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름의 본뜻을 예수가 살려준다.
예수의 마음이 한 민족의 심성을 먹어서 예수의 향기가 나는 인격과 공동체로 민족이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주의
창조물로서 주어진 우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아 가는 잣대와 시각을 성경 속의 복음에서 찾아야 한다. 민족혼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시는 예수의 복음 이야기를 캐내어야 한다. 수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 향기는 전달자의 인격과 삶을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성경기록도 전달자가 기계적으로 책을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런 와중에 일어난 깨달음과
계시들이다. 그래서 기록자들을 알면 성경이 보이고, 성경이 보이면 기록자의 세상이 느껴진다.
성경도 유기농을 한다
성
경이 다른 경전들과 다른 특징은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듯이 전면에 내세워서 미화하는 인물들이 없다. 성경은 그들을 미화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지극히 사적이라 할 수 있는 치부와 오점들을 가릴 것 없이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다. 일반 세속의
기준으로 따지면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다. 안면이 뜨거워서 감히 다루기가 힘든 주제들을 성경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놀라운
기독교의 진리는 그런 흠을 가진 인물들을 가지고 역사와 나라를 펼쳐나가는 신의 고집이다.
십
자가가 십자가인 것은 예수의 몸이라는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는 사형장의 형틀에 불과할 뿐이다. 혐오스러운
부패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일그러진 고통의 현장이다. 예수는 여기에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씨앗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벽의 중압감에서 개인 뿐 아니라 민족정기를 해방시킨다. 낮은 땅에 처하는 자는 그만큼 높고 큰 하늘을 머리 위에 지고 살아 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개인이 모자란 점이 있듯이 민족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척 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완성은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복음은 개인뿐 아니라, 무리도 민족도 인류도 온전한 회복을 하여주시는 명약이다. 그게 신약과 구약이
아니겠는가!
이
제 한민족은 십자가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로마병정도, 철새처럼 바뀌지만 있는 동안에는 한껏 폼을 잡는 권력자들,
비아냥거리는 구경꾼의 무리, 이들을 부추기며 군중 뒤에 숨어있는 종교 기득권자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무기력한 제자들, 통곡하는
여자들, 그리고 예수 흉내를 내어서 같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인물들, 그리고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라는 장소까지 이제 한편의 대
드라마가 펼쳐질 준비가 다 갖추어 졌다. 각본도 완성되어 있고, 연출과 감독까지 준비가 되었다. 이제 그 십자가에 예수 마냥
자신의 생애를 던져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질 주인공의 자리만 비어있다. 한 민족이 그 주인공이 될 자격을 성경은 이렇게
알려준다:
하
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25-31)
Aug 11, 2003 | 삶과 신앙/한국인과 예수인
2003년의 4월이었다. 개혁을 표방하던 의원이
패션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의원 선서식에 흰색 면 바지, 라운드 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날 고성과 퇴장으로 국회가 정회
되었다. ‘튀는’ 패션의 그 캐주얼 의원은 기존 국회의원 들이 문화 수용의 폭이 좁고 옹졸하다고 지적했고, 양복정장의 기성의원
들은 문화의 품위와 격이 떨어졌음을 한탄했다.
그
기사를 읽으며, 20년 전 80년도 중반 한국에서 어색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만해도, 한국 남자의 양말은 흰색이어야 만
했다. 미국에서 좀 있었던 영향이었을까? 난 그것을 몰랐었던 것이 문제였다. 적어도 나의 상식에는 검은 색 양복에는 짙은 색
양말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장례식이 아닌가? 그런데 방안 모든 남자들 옆의 검은 가죽 성경책, 검은 양복 바지 밑으로
하얀 색 이빨처럼 흰색 목양말들이 가지런히 나와있었다. 그 시위행렬 속에서 새까맣게 반질거리던 나의 외로운 나일론 검정 양말은
영 판 썩은 이빨 빠진 자리였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힐끔 나를 보던 눈들… 그때 난 처음으로 소리없이 쏘아대는 ‘눈총’이
그렇게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줄 처음 알았었다.
사
실, 양말과 셔츠 둘 다 서양에서 수입된 복장이 아닌가? 웬만한 일에는 감정 표현이 덤덤한 한국인의 정서가 이렇게 민감히 자극된
이유가 무엇일까? 유니폼이 주는 장점은 전체의 공통 분모 속에 개인의 변수가 함몰될 수 있는 편리함이다. 물론 개인주의적 사고
방식에서는 자기 표현을 막는 장애요 구속이겠지만, 전체의 고양된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도회의
중심가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각 종의 상표를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놓고 다니는 것도, 이런 네임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에 자신이 동반승차 되어있다는 착각 때문 일 것이다.
청교도도 옷가지고 싸웠다
한
국인만 옷가지고 옥신각신 하는 것이 아니다. 청교도가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성복논쟁(Vestiarian
Controversy,1563) 이었다. 이미 1550년에 존 호퍼 (John Hopper)가 주교 임명 시 성복 입기를 거부한
것은 단순한 복장의 문제가 아니라,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포함한 다양한 이슈들이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것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을 걸친 사색과 논쟁의 결과로 정립된 것은, 청교도 사상과 신학적 이념들이었다. 복식논쟁은 그런
사상의 표현 방식에 따른 당연한 귀결에 불과하였다. 물론 청교도의 성복 논쟁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왕권 강화 정책과 맞물린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정권 쟁취를 위해서 가외의 의미가 부여되었던 조선의
상복 논쟁 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
래서 한국인의 동질성은 의복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단 피부에 와 닿게 하나가 된다는 자극 점이 있어야 된다. 한국인에게 의복은
동질성의 소산, 열매가 아니라, 동질성의 시작이요, 씨앗이다. 동일한 복장은 소속 집단에 귀속하는 의사표시이자 신고식이다.
동질성은 그 다음 하나씩 배워갈 생활의 문제로 남게 될 뿐이다. 목사님 중에 신부님과 같은 복식을 입는 것이 나 개인적으로는
넥타이와 와이셔츠 색깔 고르는 고민을 안 해도 되는 이점이 있을 것이란 이기적인 생각도 하여보지만,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이
불편함을 가지는 것도 복식이 단순한 유니폼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이
런 한국인의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올림픽의 붉은 열풍이었다. 붉은 색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이 선호하는 색이다. 한국의
단풍이 그렇게 붉어도, 한국인의 감각에는 조심스러운 색깔이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로 통하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공산주의와 더불어 붉은 색은 사회적 금기 조항이었다. 그렇던 한국에 붉은 색의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국의 거리가 붉은
색으로 도배되다시피 하였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한국계 2세들까지도,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붉은 악마의 휘장과 셔츠를 입고
다녔다. 지방색도, 배경도, 세대도, 이념도, 종교도, 언어까지도 더 이상 갈등의 요소가 아니었다. 복장 통일은 한국인이
선호하는 화합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