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진] KOSTA/USA-2002 : 하나님이 보여준 사랑

이코스타 2002년 10월호

이번 2002년 코스타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인도해주신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작은 올 봄부터 시작된 저의 기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저희 교회(퍼듀 한인장로교회) 대학부에서 올 봄에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강사로 오신 캐나다 토론토의 안바울 목사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정말 전심을 다하셔서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늘 남편과 함께 성장하는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늘 하나님께 ‘남편과 함께 성장하고 남편과 함께 쓰임받는 가정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2002년 코스타 중부지역 지도자 모임으로 제 기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남편과 저는 열심으로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점점 더 많아져가는 교회 일에 조금씩 제어를 걸고 싶어하던 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중부지역에서 모임을 갖게 되는 이 코스타 모임이 하나님께서 주신 참 감사한 기회라는 걸 알면서도, ‘봄방학까지 교회 일에 이렇게 충성을 바쳐야 하나’라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안 가보려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핑계들을 모두 무색케 하시며 저희 부부를 ‘어쩔 수 없이’ 참석케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부부 조장’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맡기시면서 말입니다. 그 발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QT를 통해 주신 한 말씀이 그 분의 강하신 뜻을, 그리고 저희들이 그 뜻을 거역할 수 없음을 분명케 하였습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눅 10:2).”


저희 부부는 곧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종키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집회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타협치 않으며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또 저희 부부로 하여금 하나님께 붙잡히고 싶은 강한 마음을 주셨으며, 그 분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고 싶은 결단을 갖게 하셨습니다. 더욱 더 감사한 것은, 너무나 많은 믿음의 동역자, 그리고 선배들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남편과 함께 결단할 수 있었던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결혼한 저의 존재가 이제는 하나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1+1″로서의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반쪽만으로는 온전한 성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코스터 중부 지역 모임 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저희 부부는 2002년 코스타를 너무나 애타게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려 할수록 사탄의 방해도 심해진다고 하던가요. 2002년 코스타로 가는 길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토록 기대에 부풀어 기다리던 코스타였는데, 이상하게도 코스타가 앞으로 다가올수록 제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악한 속삭임과 논쟁이 생겼습니다. 우선, 제일 가까운 남편과의 자잘한 일상들로부터 짜증나기 시작했고 –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은혜의 증거겠죠 – 급기야는 ‘이런 마음으로 무슨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영이 꽉 막혀버렸네.’ 하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갑자기 학교 일로 코스타를 풀타임(full time)으로 참석할 수 없게 되어 혼자 시카고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몇년 동안 기다린 코스타인데, 이런 마음으로 가야하다니…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 그냥 갑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쇼.’ 남편을 집에 남겨 두고 저는 교회의 싱글들과 먼저 시카고의 위튼(Wheaton college)에 도착했습니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할까요.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 봐라, 조금 참고 기다려보니 내가 그 때 너에게 왜 그랬는지 보이지 않니?’ 라고 말씀하시는 듯, 하나님께서는 그 일주일 동안 너무나 많은 걸 깨닫게 하셨고 보여 주셨습니다. 정결치 못한 제 마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갔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씻어주셨고 또 그분의 품에 감싸주셨습니다. 너무나 소중했던, 그리고 저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던 저희 조원들과의 만남, 그리고 세미나와 집회를 통해 ‘가려운 곳을 긁어주신’ 말씀들, 무엇보다 2000여명의 믿음의 동역자들이 하나님께 뜨겁게 갈구하고 부르짖는 모습이 너무나 큰 감동이었고 또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많은 모습 중에 저는 오늘 저에게 정말 특별한 감동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저의 신앙 배경이 우선되어져야겠군요. 저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기억이 나는 한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놀이터 삼아 자라난 ‘자동(automatic) 신자’였습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일요일이면 당연히 교회에 갔고, 주일학교 시절부터 성가대며 찬양팀 등 무언가를 해오던 터라, 저에게 하나님은 자연스러운 존재였고, 또 의심없이 – 의심하면 큰일난다고 생각하면서 – 순종적으로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저는 늘 ‘선택받은’ 백성이었고, 가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삶을 살아갈 때에도 곧 회개하고 돌아가면 언제나 받아들여진다고 믿는 편리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신앙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아마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와서가 아닐까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나와 ‘교통’하며 교재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흥분되었고 또 감사했습니다. 신앙이 자라면서 교회에서 점점 섬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가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맡은 일이 많아지면서, 또 기도가 늘어나면서 언제부터인가 저에게는 제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던,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습니다. 바로 제 기도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 저에게는 어려서부터 너무나 당연한 이름이었고, 그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게 그로부터 천년도 더 뒤에 태어난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이성적으로 의심이 들 때에도, ‘아냐, 이런 마음은 사악한거야. 몇년 동안 믿음인데, 흔들리면 안돼.’ 하며 무시해버렸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 주님….’ 하고 외칠 때는 성령의 감동이, 또 그분과의 교통하심이 느껴지면서도, ‘예수님….’ 하고 기도할 때는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꼭, 입양된 아이가 양부모에게 처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런 어색한, 억지의 느낌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번 코스타에 남몰래 가지고 간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 예수님의 보혈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머리로, 이성으로 억지로 받아들인 보혈이 아니라, 제 심령으로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설상 가상으로, 코스타를 시작할 때 저의 영성이 거의 제로(zero) 상태에 있었기에 기도의 응답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답답하니까 하나님께 하소연해 보는게 전부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간증집을 보면, 하나님을만나고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고, 이성으로써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순간을 독자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느껴보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저에게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펑’ 꿈에 나타나셔서 뭔가 보여주신 것도 아니고, 어떤 분을 보내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시지도 않았습니다.


둘째날 저녁, 남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저 혼자 저녁 집회에 참석해 찬송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 분의 보혈을 믿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찬양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제 온 몸에 예수님의 보혈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느낌을 이후에 제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너 예수님의 보혈에 샤워해본 적 있니?” 그건 바로 샤워였습니다. 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그리고 저의 온 육체와 마음, 그리고 영을 씻어내리는 거룩한 샤워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찬양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냥 눈물이 났습니다. 저의 자각하지 못했던 죄성들과 그리고 인정하지 않았던 많은 죄들이 떠올랐고, 아직도 회개하지 않는 저의 죄 때문에 피흘리시며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심장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바로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샤워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육신의 그 어떤 쾌락과 즐거움도 줄 수 없는 짜릿함입니다. 몇년 동안 막혀 있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하수구가 하루 아침에 뚫려 생명수의 ‘콸콸한’ 운동이 느껴지는 상쾌함입니다. 전병욱 목사님의 ‘히스기야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로 구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구요. 저는 하나님이 정말 좋습니다. 저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제가 구하는 순간 늘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니까요. 2002년 코스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 속의 ‘예수’라는 이름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그리고 값진 선물입니다. 저는 요즘 참 좋은 친구를 두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저는 조용히 묻습니다.


“예수님, 지금 저와 함께 걷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