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코스타 주제 – 복음, 민족, 땅끝

복음, 민족, 땅끝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이사야 60:1~3, 개역개정)

KOSTA/USA가 시작된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 안에 있었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KOSTA/USA를 이끌어왔던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모토가 한국 복음주의권에 시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감사드린다.

복음, 민족, 땅끝(삶과 신앙의 통합)은 지난 25년 전 KOSTA를 시작할 때부터 KOSTA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가치(core value)였다. KOSTA/USA가 시작되었던 1986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KOSTAN들은 유학생으로서 고된 삶 가운데 있었고,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을 그저 멀리 타국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사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복음이 진정으로 한국 민족에게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선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엄숙한 소명이었다. 복음이 삶으로부터 괴리되고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당시 기독교 현실의 이원론적인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KOSTA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KOSTAN들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런 고민과 결단은 지난 25년간 KOSTA/USA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복음, 민족, 땅끝’은 여전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처음 KOSTA를 시작했던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우리는 올해 KOSTA/USA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먼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5년 전 복음이 우리 선배 KOSTAN들에게 소망이었듯,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소망임은 분명하다. 복음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의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간성이 회복될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선포이자, 끊을 수 없는 죄의 악순환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연, 사회, 문화, 학문 등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주적 선포인 동시에, 어그러진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께서 세우셨다는 공동체적 선포이기도 하다. 즉,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목표이자, 민족과 땅끝의 기초가 되는 포괄적인 가치인 것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특별히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가난과 독재 등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다만 25년 전 우리 선배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국을 섬기는 일을 통해 발현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폐쇄성에 빠지지 않고, 타국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탤런트와 성품을 사용해 우리 조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폐쇄적이거나 이기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섬김’의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끝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민족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복(blessing)을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나눌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끝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나 땅끝의 의미는 단지 선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놓은 경계(boundary)를 넘도록 요청한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영역에서만 우리의 주(Lord)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가정, 사회, 문화,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전 영역(sphere)에서도 역시 우리의 주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전 우리 선배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속화 및 혼합주의(syncretism)의 도전 또한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세속화나 혼합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이원론 및 혼합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피조세계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선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10년, KOSTA/USA 25주년을 맞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 민족, 땅끝의 세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복음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 선교적인 의미로서의 땅끝의 가치, 또한 피조세계 각 영역의 복음으로서의 땅끝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뒤틀려진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과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신실하심을 표현하셨으며,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으로 부름받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2009년 코스타 주제 –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Shalom of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길을 걷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리 그 길이 가치 있고 소중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는 일은 우리를 쉽게 절망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밝은 결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더욱이 그 밝은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면, 지금 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는 그 두려움과 싸울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사는 일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바로 그 로마의 손에 잡혀 매 맞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되는 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일, 한 사람의 가치를 효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그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 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델이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가 선뜻 들어서기에 두렵고 좁은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두렵고 좁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고,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가신 그 길에 담대하게 들어서라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 끝에 밝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어둡고 험한 길을 가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길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명백한 증거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육체를 입고 다시 이 땅에서 부활하셨다. 생명이 사망을 이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만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 사셨다.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신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을 입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할 모든 육체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밝은 결과, 그때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Shalom)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평화(Shalom)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미래에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 완성된 하나님의 평화(Shalom)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속에서 어그러진 질서와 그릇된 세계관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절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혹시 있을 수 있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또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에 거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삶을 사는 가운데, 완성된 평화(Shalom)를 경험해 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KOSTA-2009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를 알기 원한다. 세상이 비웃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이 땅을 사신, 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 결국에는 이 땅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평화(Shalom)를 이루실 것이며,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 완성된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를 경험하기 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추스르고자 한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큰 불안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잃어버릴 것에 대한 또 다른 불안감으로 사람들을 노예 삼는 어그러진 풍조를 향해 진정하고도 유일한 대안을 우리가 삶으로 보여주기 원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꿈을 잃어버린 세대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Shalom)안에서 우리는 다시 꿈과 이상과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선포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