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과 지성, 그리고 학문하는 삶 2-장성준

이 글은 2006년 미주 코스타 장성준 교수의 ‘기독교 지성’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장성준 교수: 미국 올바니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사회학과 부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5여편의 논문을 미국사회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그리고 심리학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며, 현재 미국전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spirituality)과 영적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미국 대학생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Christian Leadership Ministries로 부터 2002년도 Erick Nilson Achievement Award and Grant를 수상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성적인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만든 인간도 지성적인 존재다. 그래서 지성적인 부분을 신앙생활에서 배척하거나 무시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별嚥【?너희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을 때 영어로 perfect인 단어가 원문에서는 balanced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전인격,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지성과 감정 등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 가정, 직장, 자녀를 키우는 일, 공부하는 일 등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절대로 반지성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지성적인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잘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thinking christian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신앙 생활은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자유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이 있게 됩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불안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서 교회 안으로 도망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지성은 물과 기름의 관계가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을 분리시킬 때는 불안전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관계가 아니라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성경을 먼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올바른 기초없이 기독교 세계관을 쌓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성경을 바탕으로 정리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관 공부를 했을 때 우리가 지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세계관 공부는 성경공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는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만 해서 전도하다가 크리스챤은 왜 저렇게 무식하지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자연계, 물질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때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관들도 일련의 가정을 내용으로 하는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그 믿음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인들만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믿음체계를 출발점으로 사물을 보고 관찰하고 설명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설명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그런 비기독교적인 믿음체계를 바탕으로 한 설명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풀어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적인 체계를 논리적으로 지성적으로 변호하는 것이 기독교 변증입니다. Christian apologetics가 성경적인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물어볼 때마다 잘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줄 수 있도록 예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러이러한 것이고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make sense한지 차근차근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에 훈련이 거의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으로 나가기 보다는 교회로 도망가는 경우가 많죠.


하나님은 무궁무진하게 풍성하신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음발이 신앙생활하느라 힘든 거에요. 전도하다가 싸우게 되죠. 삐딱하고 뺀질대니까 화를 내게 되지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온전한 모습을 다 훈련받지 못해서 그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번에는 학문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기독교 학문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합시다.
제가 이 세미나에서 기독교 학문이 아닌 것을 먼저 말합니다. 첫번째 것은 spiritualizing하는 것을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해하는 것이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성경적인 용어로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유럽 공동체가 유럽 연합으로 만들었잖아요? 그것을 성경의 계시적인 얘기로 열 마리의 짐승이 모여서 연합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해석해서 성경에서 미리 얘기하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부 맞는 해석은 아니지만 전부 틀린 것도 아니죠.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는 얘기는 그런 영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범죄학을 연구하는데, 범죄를 왜 저지르느냐 했을 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범죄학자로서 미국범죄학회에 가서 인간의 범죄는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라고 말하면 나가라고 얘기합니다. 신학적인 context에서 말하면 괜찮아요, 그러나 그 아이디어를 전하는 모습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됩니다. 영해가 틀린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학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simplistic fundamentalism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쓰신 편지에요. 일종의 글이란 말이에요. 글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비유로 쓰는 부분이 있죠. 그것을 구별을 못해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요 라고 하셨다고 독을 마시고 죽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영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어떤 부분은 비유로 해석해야하고 문자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요. 애들이 말 안 들으면 집 나가라고 말하죠. 그때 아들이 집을 나가면 안 되요. 거기서 집 나가라는 말은 속이 상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직역하면 좀 모자른 행동입니다. 성경도 직역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비유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Simplistic fundamentalism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부분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태도가 있어요. 그것은 기독교 학문이 아니에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미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미국 범죄학회같은데 크리스챤 미팅이 있어요. Prayer meeting도 있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격력합니다. 크리스챤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격력하는 크리스챤 활동이 아닙니다.


크리스챤 스쿨에서 가르치는 교육내용도 아닙니다. 성경 클래스가 있습니다. 진화론 같은 것을 가르칠 때 창조론을 바탕으로 비평하는 것을 가르치던지. 일종의 패러럴리즘입니다. 세상에서 가르치는대로 가르치고 교회가 가르치고 싶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학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신학적인 이론이 기독교 학문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기는 한데, 그것을 가르켜서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학문의 정의는 무엇인가? Working definition입니다. 각학문 분야의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성경의 기본 원리, 성경의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개념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주요 학술지에 발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연구의 부분과 교육의 부분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얘기하는 기독교 학문이라는 것은 성경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얘기하는 원리를 각자 공부하는 학문의 분야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원리 중에 하나가 인간관이 있습니다. 인간관에는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만들었죠. 성악설과 성선설이 있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Empirical investigation이 아닙니다. 성악설은 인간이 원래 이기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하고 그 위에 이론을 만듭니다. 범죄학 이론에서 성악설 이론에 바탕으로 한 것이 social control이론이 있습니다. 범죄는 사회 통제가 부재하거나 비효과적일 때 범죄가 결과로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성악설을 출발점으로 범죄를 설명하면 원래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악한 그런 동기를 갖고 태어났다면 인간을 통제하지 않으면 무슨 결과가 벌어지겠어요? 온갖 나쁜 일들이 벌어지겠죠. 그게 범죄입니다. 범죄가 많은 지역은 사회통제가 낮은 통제입니다. 싱글 패어런츠 가정의 청소년들이 비행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부모님이 혼자밖에 없을 때는 가정내에서 사회통제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이 예에서 보면 성악설이라는 가정에 기초해서 범죄를 설명했어요. 그러면 성선설, 루소 같은 사람의 주장,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다고 봅니다. 교육학에 큰 영향을 미쳤죠. 루소는 우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은 순수하고 퓨어하기 때문에 출발은 innocent했다고 합니다. 왜 범죄가 있냐는 것은 사회의 여러 제도나 문화적인 것이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다고 봅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루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회의 제도나 환경이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그 결과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해답입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수단으로서 제시한 것이 교육입니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이 현대 교육에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크리스챤 가운데 교육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루소의 철학을 비판한 위에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쪽이 성경적인 원리인가요? 둘다 성경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성악설이 맞는 것같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나는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행한다고 괴로와합니다. 성선설도 맞는 것도 같네요. 우리의 마음에 선한 일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성경적인 가정은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여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인간관은 인간이란 원래 선하게 만들어졌으나 built in flaw 삶 속에서 선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선하고자 하는 소원과 그 소원하는 것만큼 선하게 살지 못하는 딜레마에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실제 보면 인간이 사는 모습을 보면 성악설, 성선설보다는 성경적인 시각이 옳은 것같습니다. 기독교적인 학문의 기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지성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것. 실증적으로도 분석하고 인간의 영성을 실증적으로 측정한다는 말입니다. operationalize하고 empirically measure해서 analysis하면 relation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거부감을 가질 것이지만 성경적인 아이디어를 실증적인 이론체제와 개념 용어를 통해서 소개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을 왜 해야하는가 생각해봅니다. 고등학교까지 교회 잘 다니다가 대학가서 절반 이상의 크리스챤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경험적으로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르망디에서 상륙하는 군인들이 마치 고등학교까지 교회생활 잘 하던 학생들이 대학교 캠퍼스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캠퍼스에 발도 못딛고 죽은 숫자가 엄청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성경공부 시키고 여름 성경공부시키고 중고등학교 잘 해서 보내도 대학교에서 살아남는 숫자가 많지 않아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기독교 학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이유는 대학교 캠퍼스에 갔을 때 학문이 비기독교적인 학문들입니다. 그리고 비기독교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아주 그럴듯한 틀 속에서 그럴듯한 과학적인 실증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회에서 성경공부는 좀 했고 성경구절은 암송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 사고가 발달하는데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질문하면 미움받아요. 선생님이 대답하기 보다는 본인도 생각을 안 한 것을 물어보니까 당황스럽겠죠. 그런데 교회의 분위기가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슈에 관해서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훈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학교에 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거에요. 캠퍼스에 발을 대자마자 다 죽는거에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아이큐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게 맞는 얘기같습니다. 진화론을 가르치면 그게 절대적으로 맞는 것같습니다.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그렇게 젊은 지성들이 대학교에 가면서 신앙을 떠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 학문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같습니다.


미국의 교육계가 특히 대학이 완전히 세속 세계에 넘어갔어요. 그것의 근원이 60년대 70년대 문화적인 운동, 히피운동, 성혁명, 여권운동 등이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변동이 많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학문적인 비판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교회들이 학문적인 과학적인 지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교회, 크리스챤 스쿨 등으로 도망갔습니다. 과학자,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니까 그쪽으로 가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 70년대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비기독교인이었습니다. 크리스챤들은 학문을 반기독교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언론, 미디어, 연예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저널리즘에서도 후퇴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도망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뜨거운 예배와 찬양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을 완전히 놔두고 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 결과로 20, 30년 후에 대학 캠퍼스가 완전히 불신자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지성의 관점에서 학문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장터를 다 내준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당연합니다. 대학교뿐 아니라 문화의 주요 장에서 모두 빠져 나왔습니다. 이미 세상이 모든 영역을 장악했어요. 그래서 그 결과를 지금 맛보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이 교회를 나가기는 하지만 지성적으로 리버럴한 것이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과 편하게 볼 영화가 없는 것이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은 매우 의미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도 비슷합니다. 제가 답답한 것이 한국에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문화가 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미국의 문화의 주요 요소가 반기독교적이냐는 것입니다. Pure art보면 아주 황당한 것 많습니다. 예술과 문화 분야가 포스트 모던 분야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영화, 언론 등에 영향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학문에 소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교회에서 토론되고 어떤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는 다음 세대를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다음 세대를 결정하게 됩니다. Change the universitie, you change the world이런 말이 있습니다. 2차대전에 나찌 정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죠.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습니다. 빅터 프랭클린은 나찌의 죄악이 독일 나찌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대학교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다윈의 진화론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히틀러는 책을 많이 안 읽었는데, 다윈의 진화론과 니체의 책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정치적 사상을 형성하고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을 추구한 것입니다. 우월한 종이 있고 열등한 종이 있습니다. 열등한 종은 도태되어야 하고 우수한 종은 남습니다. 진화의 법칙을 써포트 하기 위해서 열등한 종을 없애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에 따르면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인간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권위체계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결정할 수 없어요. 인간 중에 파워를 갖고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리면 파워만 남아요. 진리를 중시하는 사회는 파워가 있어도 진리가 우선시됩니다. 진리, 기독교 학문을 다시 부활시켜야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학자들에게 있는 엄청난 소명입니다. 기독교 학문이 교수들이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여기에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적 대사명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잘 다스리라는 명령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나타내는데 노력을 해야합니다. 지금 미국교회에서는 문화적 대사명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많은 한국 교회에서도 큰 호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를 잘 연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이즈에 대해서 여러가지 얘기하지 않습니까?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성을 만들었을 때 그 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잘 누리면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요, 그 디자인을 어겼을 때 그것이 성병으로 나타나건 낙태로 나타나건 무질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하는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공예학자들이 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색깔의 조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자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 역사학자 한 분이 책을 썼는데요,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기독교 신앙을 얘기했는데, 앨럼나이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많은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뭔가 하나님을 대변하면 세상을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드러내는 것을 언제 해야하는가 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테뉴어를 받기 전에 할 것인가 테뉴어를 받기 후에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테뉴에를 받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루이지아나로 옮겼습니다. 테뉴어에서 짤렸습니다. (웃음) 그러나 그때 제가 speak up하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도 하고 있지 않았을 것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잘못된 이원론, 미국의 학계가 자연주의적 관점이 지배합니다. 자연주의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바로 낙제입니다. 자연과학 연구를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하지 않으면, intelligent design을 얘기하면 원서를 받지도 않습니다. 지성적으로 보아도 매우 폐쇄적입니다. Methodological naturalism이죠. Intellectual criticism입니다. 진리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 좋은 얘기를 하도록 합니다. Pluralism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가 잘못된 것은 multi-cultural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다 동등한 것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anti-intellectual하다는 것이에요. 다른 문화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을 할 때 중요한 것이 지성적인 이슈이고 영적인 이슈입니다. 도덕적, 문화적 상대주의가 큰 문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절대진리의 거부의 문화가 있습니다.


실제 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노르트 데임 대학의 철학자 애번 프랜티카 교수님, Christian theist이십니다. 데이빗 랄슨, 듀크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종교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고 프로이드의 종교는 나쁜 영향이 있다 것이 주류 견해였는데, 그러한 견해가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필립 존슨, 유씨 버클리 법과 교수였는데, intelligent design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논리적 주장을 듣고 진화론과 intelligent design에 대해서 연구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고 지적 설계를 적극 지지하고 계십니다. 마이클 힉, 과학적 시각에서 본 진화론의 문제점, irreducible complexity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학문적 과제에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독교적 개념적 모델을 설명하고 마칩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 물질론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어느 관점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자연주의적 이론, 기독교적 이론도 어떤 믿음 체계에서 출발한 것에서 동일합니다. 믿음체계에서 출발한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관찰의 결과들이 어떤 세계관이 더 일관성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과학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설명하기만 합니다.


어떤 정책을 토론하거나 지성적인 문제를 얘기를 할 때 성경책을 들고 토론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혼전 동거하면 결혼을 안정적으로 만드는가? 인본주의적, 자연주의적 견해에서는 동거해서 트라이해보고 결혼하면 더 안정적이지 않겠는가? 이혼율을 낮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커미트가 없는 동거는 사람들의 이혼율을 높이게 됩니다. 여기서 과학적 데이터를 동원해서 두 집단을 비교해보면 이혼율이 높게 나옵니다. 기독교적 설명이 맞다 라고 주장할 범위가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지성, 그리고 학문하는 삶 1-장성준

이 글은 2006년 미주 코스타 장성준 교수의 ‘기독교 지성’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장성준 교수: 미국 올바니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사회학과 부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5여편의 논문을 미국사회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그리고 심리학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며, 현재 미국전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spirituality)과 영적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미국 대학생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Christian Leadership Ministries로 부터 2002년도 Erick Nilson Achievement Award and Grant를 수상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 doubt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의심이 들 때가 있죠.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문제와 지성적인 문제, 과학적인 문제와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 두 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국 전쟁을 겪으셨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해서 치를 떠셨는데, 공산주의의 근원인 칼 막스의 말 중에서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 있었는데 종교는 아편이다는 것이었어요. 니체 같은 허무주의 철학자는 기독교는 노예의 근성을 양육하는 종교다, 기독교에 대한 비관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생물시간에 배운 진화론에 관한 것, 그래서 전도할 때 내가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배우니까 우리 인간의 근원이 싱글 셀 아메바이고 그것이 진화되어서 그렇고 과학적인 증거를 보여주는데,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데 과학적인 증거가 있냐, 거기에 대해서 저에게 속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럴 때 제가 주로 듣는 대답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을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미쳤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질문한 것에 대답하지 않고 전혀 다른 문제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에요. 저는 원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지 않았고 기독교를 참 싫어했어요.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갖는 첫번째 인상이 너무 반지성적이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원래 불교 신자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참 전도의 실강이를 하다가 그분이 저에게 너 성경책 읽어본 적 있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기드온 성경책을 받았는데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분의 지성적인 도전을 받으니까 한번도 읽어본 적도 없는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너무 비지성적인 것이잖아요? 그래서 성경을 읽고 성경이 뭐 잘못되었나 알려줄까 했는데,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 반지성적이고 이성을 억제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한다는 그런 인상과는 너무나 달리 성경을 읽어보니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이 너무나 지성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성경이 너무나 논리적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 성령님이 도움을 주셔서 제가 예수님을 81년에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측면을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지성적인 측면에 대해서 얘기를 잘 못 들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이큐가 높았던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진로를 위해서, 재정적인 문제로, 가정 문제로 기도를 많이 하죠. 그런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분석이 안 되서 막혔을 때 예수님에게 기도 하세요? 예수님이 땅 위에 계셨던 분 중에 가장 Intelligent한 분이에요. 우리가 그런 이미지를 안 갖고 있어요. 이것은 USC에 계시는 철학 교수인 달라스 윌라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지성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가 지성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강해를 할 때 속이 시원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성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모습으로 성경의 메시지가 와 닿기 때문에 아 그 참 이해가 된다, 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말이 된다, 이런 지성적인 필요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성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데 성경을 뛰어넘어서 지적인 문제를 고민할 때는 성경과 연결시키는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참 약합니다. 헌신과 열심에 대해서는 참 훈련이 잘 되어 있어요. 한국의 새벽기도 같은 것 얘기하면 다 놀라잖아요? 한국교회는 모이기에 힘쓰고 그런 노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성적인 측면이 그만큼 강화되어야 합니다.


지성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다. 개념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지성은 사물을 판단하고 논리를 사용해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표현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교회 사역뿐 말고도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족, 결혼, 진로, 성, 취미, 오락, 돈, 건강, 언어, 옷차림 기타 등등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은 전인격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는 우리의 삶 어느 부분도 성경과 상관이 없는 영역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오락을 하는가 하는 것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셔야 해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쓸 수 있는 데가 있고 돈을 써서는 안 되는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의 삶에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것이 안 될 때 우리의 신앙이 분리, 분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한 부분에 제한돼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 예수 믿는 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이 부분이 안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기 위해서 자식들을 제대로 키우지 않아서 자식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야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죠. 그래서 이런 다양한 내용을 세미나에서 들어야 해요. 자녀교육의 원리가 무엇이고 행복한 부부관계의 원리가 무엇인가 배워야 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무엇입니까?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말할 때 세 가지 속성을 이야기합니다. 지, 정, 의입니다. 이것을 갖고 있는 인격체입니다. 지는 논리적인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 비판하고 분석하는 것. 정은 여러 가지 감정적인 측면, 기쁨, 슬픔, 분노, 좌절감, 연민. 의는 우리의 의지의 부분입니다. 뭔가를 결정하고 의지력을 갖고 본능적으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동물들은 어때요? 동물들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동물이 감정도 있는 것 같고 아이큐도 있는 것 같고 심지어 의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동물은 인격체는 아닙니다. 동물은 본능이라는 메커니즘에서 내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이런 것을 응용해서 심리학에서 Stimulus-Response system 학습이론을 말했죠. Learning Theory를 어린이를 주면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과학자, 의학자, 교사 등을 만들 수 있다고 과감하게 말한 적도 있었죠. 인간을 기본적으로 동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동물과 인간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동물의 권리를 강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동물 연구를 하는 연구를 파괴하는 등의 접근을 하는데요, 그 사람들의 믿음은 인간과 동물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전제합니다. 인간은 좀더 진화한 것이지 진화해오는 동물들을 잘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동물을 실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만을 인격체라고 얘기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하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하나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 하나님께서 distressed되셨다. 감정적으로 속상하셨다는 말이에요.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든지. 성령님이 feel grieved하는 경우. 의지의 하나님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애요. 하나님은 무지 괴로웠을 거에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같은 정도의 괴로움이에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니까 세 분 모두 그것을 느꼈을 거에요. 끝까지 죽도록 내버려두셨어요. 쉽지 않은 의지적인 결정이에요. 여러분들 특히 자녀가 있는 분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하나님이 의지를 갖고 하셨던 일입니다. 괴로웠지만 올바를 일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의지로 밀어붙이신 거에요. 우리 하나님은 의지의 하나님입니다. 지성의 하나님입니다.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믿음과 지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소원은, 열심이라는 의미 Zeal이라는 단어인데요, 선하지 않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종종 봅니다. 열심이 많은데 성경에 대해서 무식해서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을 상처 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방언을 주셨는데, 방언 받은 후에 자신이 흡사 예수님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는데, 그 열심과 파워를 인도하는 가이드 라인이 올바르게 정리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 가운데서 해야 합니다. 열심만 갖고 하는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가 아니에요. ‘신령과 진정으로’ 진리로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내키는 대로 하는 예배는 잘못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우리 인간은 하늘에 나는 새보다 훨씬 중요하다. 인간보다 중요하지 않은 새도 하나님께서 보살피신다. 새보다 훨씬 중요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보살피신다는 말입니다. 논리적이시죠. 예수님께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논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올바로 사물을 분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성적인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지성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과 우리가 인격체로서 갖는 지성을 잘 조화시킨 그런 모습을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짐을 아나니, 믿음이 전제로서 나오고 어떤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비유인데 I believe that I may understand라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 위에 올바른 지식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인 시각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궁극적인 최고의 현실이라고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설명하려고 하는 그런 체계에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의 모든 바탕이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과 관련이 됩니다. 그게 잘 안되면 교회는 나가는데 기독교인답지 않은 신앙생활 혹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은 최고의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더니즘에서는 ultimate reality는 자연세계의 물질이 궁극적인 것이 되요. 자연주의 세계관에 의하면 물질만이 진짜입니다. 그래서 physical world을 뛰어 넘는 형이상학은 자연주의 세계관에서 볼 때 사실 헛소리에요. 왜냐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헛소리죠. 자연주의에서는 물질만이 현실이고 나머지는 만들어낸 이야기에요. 프로이드는 종교를 정신병이라고 그랬죠. 자연주의 세계관 안에서는 너무나 맞는 얘기에요. 그에게는 물질세계만이 진짜고 이외의 것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만든 거에요. 종교, 하나님이 그런거에요. 하나님은 material이 아니잖아요. Material이 아니면 다 illusion이에요.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보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 하신다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거에요.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 불쌍한 사람이에요. To see is to believe. 일반적으로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만을 현실로 믿는다. 예수님을 전도할 때 자주 받는 도전이 뭡니까? 네가 하나님을 보여주면 내가 믿을께. 왜요? 여러분의 친구들이 자연주의적 성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포스트 모던이즘은 어떻습니까? 극단의 주관주의입니다. 극단적 주관성이란 subjectivism, anti-realism이라고도 합니다. 뭐가 현실이고 뭐가 실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부정하고 내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곧 현실이다라는 것이에요.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많이 들어봤죠? social에는 culture 뿐 아니라 individual perception도 들어갑니다. 내가 믿고 내가 경험하고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리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무엇이 궁극적인 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기초로 이 세상을 설명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기독교를 이해할 때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분석하고 세상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든 근거가 되는 것이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철학이죠. 일종의 가정입니다. Assumption, presupposition이라고도 합니다. Empirical fact가 아니고 이렇다고 믿는다고 시작하는 부분이 세계관의 부분입니다. 일종의 믿음이에요. 세 개의 중요한 세계관이 있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을 믿는 세계관이 있고, 자연주의 철학, 물질주의, 무신론 등이 있죠. Pantheism 다신주의가 있습니다. 우주의 궁극적인 현실이 영이다. 힌두교, 불교, 도교, 뉴에이지 이런 것들이죠. Theism, naturalism, pantheism이 다른 것은 무엇이 궁극적인 것이 다른 거에요. 기독교만이 믿음 체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믿음인 만큼 비기독교 세계관도 믿음이에요. 믿음 대 믿음이란 말이죠. 세계관의 충돌, 세계관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얘기하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죠.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가 나쁜 열매에서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크리스챤이면 우리의 열매가 크리스챤 다운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열매가 탐스럽지 않으면 우리의 뿌리가 근원이 연약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고 하나님을 대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관의 충돌의 현실 속에서 매우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요. 지성적인 이슈가 대두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답을 하고 처리를 해야 하는지 우리가 마음에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변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훈련 중에 하나인데, 일반적인 교회를 볼 때 이 부분이 훈련이 안되어 있어요. 우리가 기도훈련 많이 받고 성경 그 자체를 공부하는 훈련 많이 받는데, 그런 기본적인 훈련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고 그것을 우리가 하는 삶의 모든 영역, 지성의 부분에 특히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교회에서 많이 못 배웁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그 부분에 대해서 적극성을 띄었으면 좋겠어요.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도 왜 성경이 진리냐, 왜 기독교가 진리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because Bible says so라고 말합니다. 우리끼리는 괜찮아요. 그러나 밖에 나가면 그게 안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전혀 틀린 얘기에요. 우리가 그런 부분이 약해요. 우리의 신앙과 지성과의 관계를 정리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미나를 뜨거운 마음으로 준비한 거죠.


베드로 전서 3장 15절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answer, defense, apologi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요. apologetics라고 하는 것입니다. 변명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말로서 defend하는 것입니다. 변명이 아니고 변론, 변증인데요.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defend하는 것입니다. 논문 defense하죠. 교수님들이 이것은 이런 거고 저것은 저런 거고 하면서 하나씩 defend해야 도장을 찍어주잖아요. 우리 신앙에도 똑 같은 부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가 얘기하고 있어요. 항상 예비하라고 합니다. 평소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를 해야 해요. Worldview missionary라는 말을 쉐퍼 박사는 말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증거에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그 자체를 공부 많이 했는데 성경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잘 안돼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을 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아무리 속으로는 화가 나도 웃으면서 인내심을 갖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증은 논쟁이 아닙니다. 전도하면서 논쟁이 되어서 마지막에 Go to hell이렇게 말하면 이것은 변증이 아니라 싸움이에요. 우리가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상대방을 설복해도 상대방이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완전히 논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맞아도 예수님이 싫으면 싫은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논쟁을 해서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전도도 아니고 체력낭비에요.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한 걸음 멀리하게 하는 노력입니다. 변증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관계 위에 그 대화가 건설되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력을 못줘요. 그래서 기독교 변증을 할 때에도 단순히 지식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갖고 상대방을 논리로 이기려고 하는 것이 변증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최대한 얘기를 해서 지성적인 갈등이 생기도록 하면 그것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갈등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의 원리로서 두 가지의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얘기인데요. 어떤 전제, 가정,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저쪽이나 이쪽이나 동의해야만 하는 공통부분 common denomination입니다. 전도가 싸움이 되는 이유가 우리가 공동으로 동의할 수 있는 원리바깥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전도가 나중에 감정이 상하면 누구 목소리가 크냐가 되는 것이죠. 누가 마지막에 얘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상대방도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면 우리가 도전 받는 질문을 지성적으로 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principle로 logic을 이야기 합니다. Law of noncontradiction입니다. 두 가지의 정반대의 생각이 동시에 진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진에 기둥이 몇 개있어요? 두 개 혹은 세 개, 위를 보면 두 개 아래를 보면 세 개이고. 이것을 보면서 기둥이 두 개이기도 하고 세 개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것을 illus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reality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그림에서 본 것을 기초로 내일까지 실제로 만들어오면 제가 백만불 드릴께요. 미술 전람회에 포스트모던 sculpture이라고 해서 공중에 떠있는 기둥을 만들어서 세워 놓았더라구요. 자연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나서 기둥이 공중에 떠있어요. 근데 위에 줄로 매달아 놓았더라고요. 포스트 모던의 주장이 현실적이라면 그 기둥이 줄없이 공중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Interesting thought 재미있는 발상이고 예술가로서 한번 장난해볼 수 있는 것인데, 현실은 아니라는 거에요. 이것을 보면서 어떤 하나의 물체가 두 개가 되고 세 개도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허상을 보면서 하는 얘기이고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뭐가 현실이냐 뭐가 진리이냐하는 것이잖아요. 이것은 진실이 아니에요. Reality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절대 진리는 없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이런 말을 많이 듣죠.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 진리가 어디있냐? 진리는 다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거야. 그게 너에게는 진리일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닐 수 있어. 이렇게 말하죠. 그러면 어떻게 말합니까? 그러면 지옥에나 가라 하고 집으로 가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주장이 논리적인 주장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ultimate statement가 있습니다. 모든 시각은 다 진리가 아니다. 이런 주장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요? 상대방에서 trying to have it in both way를 말할 때 이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명제는 논리적으로 틀린 얘기에요. 모든 시각이 진리가 아니라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문장은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진리가 아니죠. Self-defeating statement 한국말로는 누워서 침뱉기가 되겠죠. 뭔가 심각하고 의미가 있는 얘기를 한 것같은데, 결국 그 얘기가 자기 자신을 defeat하는 얘기에요. 논리적으로 틀린 얘기에요. All views are true라는 명제는 어떻습니까? 어떤 것을 보고 상반되게 판단하는 시각이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죠. 이것은 어린 아이들도 알 수 있는 얘기입니다. 다음에 시각은 다르다. 이것은 일단 말이 됩니다. 그 다른 시각과 문화와 도덕들이 동등하게 다 진리이다 하고 합니다. 그럴 수가 없죠. 예를 들어보면 식인종의 식습관과 우리 다른 사람들의 식습관이 둘 다 진리입니까? 둘 다 동등하게 morally right입니까? 그럴 수 없죠. 문화가 다른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다른 문화가 동등하게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적으로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또는 굉장히 나태한 것입니다. 소위 관용주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어떤 관점들은 다른 관점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이 다른 것보다 낫다는 것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갖고 잣대를 갖고 길다 짧다라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얘기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어떤 생각이 더 낫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논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실증적인 자료입니다. 그리고 실증적인 자료와 관련해서 과학에 관한 것입니다. causality라는 principle이고 다른 하나는 analogy principle이라는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는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고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하는 유한한 존재는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cause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이 유한한 존재에요. 왜냐면 우리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때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시는 하나님,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존재하기 시작하신 시점이 없기 때문에 cause가 필요없어요. 하나님은 계신거에요. Analogy에 관한 것은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하면 CSI를 많이 보시죠? CSI의 법의학을 보면 이런 원리입니다. 범죄 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상태를 조사하지 않습니까? 사진도 찍고 피가 있는 패턴도 보고 방향과 보고요. 구체적으로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이 희생자를 때렸고 어떤 도구로 때렸고 하는 것들을 찾아내지 않습니까? 과거에 일시적으로 있었던 범죄의 현상을 시간이 지나서 데이터를 놓고서 다시 스토리를 만드는 거에요. 그 스토리를 만드는 거의 기본적인 원리가 principle of analogy에요. 과거에 일어날 수 있었던 현상들의 원리와 현재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의 원리와 일관성이 있다는 얘기에요. 만약에 어떤 물건을 위로 던져서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과거의 어떤 현상이었다면 그것이 오늘날도 똑 같은 현상으로 나올 때 그 결과가 비롯되어 지는 원리가 동일한 원리에서 과거나 현재나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에요.


과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합니다. Second law of thermodynamics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usable energy가 running out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딪치는 우주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연주의 과학처럼 우주가 무한한 것인가. Natural world is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이에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했는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냐 하는 것이에요. 세 가지 중요한 과학적 자료가 그렇지 아니다라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첫번째 세계에 있는 usable한 에너지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것이 제2열역학 법칙인데요, 그것이 과학의 법칙 중에서 최고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위반하는 이론은 틀린 이론입니다. 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은 first principle에 가장 가까운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법칙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는 얘기를 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usable energy가 계속해서 감소되고 그것과 반대로 entropy는 계속 증가합니다. 이 현상이 계속 진행되면 결과적으로 이 우주가 커다란 머신이 연료가 다 떨어져서 스탑하는 것처럼 정지하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만약에 우주가 자연주의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가는 것이면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running down하면 안됩니다.


두번째는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니까 우주가 fixed되어 있지 않고 팽창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원리에 의해서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관찰로서 확인이 되었습니다. 우주가 계속해서 사방으로,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면 어느 한 시점에는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causality원리에서 anything that has beginning point is finite라고 했죠. 영원한 존재는 출발점과 끝나는 점이 없지요. 천문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보니까 이 우주가 어느 한 시점에서 출발을 해서 계속 팽창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이 과학적인 발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인슈타인은 크리스챤은 아니었어요. 그분은 theist, 유신론자였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어놓고 세상이 나름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둔 그런 신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어요. 자기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 우주가, 이 자연세계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있었다는 것을 뒤집는 과학적 이론을 제시하게 되니까 혼란스러운 것이죠. 관찰과 상대성 이론이 정확하게 들어맞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인공위성이 우주 전체의 size에 해당하는 background radiation의 사진을 찍었어요. 이 발견을 갖고 20세기의 가장 큰 과학적 발견이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었어요. 요새는 브라운관 티비 별로 없지요. 깜깜한 밤에서 보다가 끄면 화면이 환하게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radiation echo인데요, 어떤 파워가 있다가 그 파원의 잔상으로서 radiation echo가 생기는 것인데, 우주 전체의 사이즈와 동일한 규모의 radiation echo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종합할 때 창세기 펴지 않고 과학적인 사실만 갖고 볼 때 이 우주가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어느 한 출발점이 있었던 그런 존재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결론 내려집니다. 그런 존재는 유한한 존재이죠. 뭐든지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한한 존재는 아니에요. 무한한 존재라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big bang아닙니까. Big bang이론에 대해서 처음에 교회에서 반대했습니까? Big bang이 창세기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발견입니다. Big bang이 과학적으로 confirm된 사실이기 때문에 자연주의 과학자들이 우주는 원래부터 있었다고 얘기할 수 없어요. 어느 한 시점에 출발된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Big bang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실 것 같애요?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은 이것이 굉장히 불편한 과학적인 발견입니다. 이전에는 원래 우주는 있던 거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있던 것이라는 엄청난 대 전제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공립학교에서 big bang에 대해서 가르치더라도 그 implication에 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만. 우주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big bang의 의미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주가 유한한 존재이면 누가 우주를 존재케 했느냐 하는 질문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에 대한 설화는 많지만 잘 정리되고 established된 종교체계에서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은 theism밖에 없어요.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두번째 보려고 하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는데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자연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창조론, 요즘은 design model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다윈의 진화론을 말할 때 첫번째로 구별해야 하는 것은 미시적 진화와 거시적 진화입니다. 왜냐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미시적 진화는 문제가 없습니다. 공립학교에서 자녀들이 배우고 있는 진화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미시적 진화의 증거입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Adaptation, 변하는 환경에 대해서 생명 유기체가 적응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잘 정립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거시적인 진화입니다. Macro-evolution은 adaptation이 아니고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시적 진화라고 합니다. 물고기가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는 것이 macro-evolution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증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미시적 진화를 증거로 내놓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그 진화가 아주 오랜 기간을 통해서 지극히 미미한 변화를 보이면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옮겨가는데요, 우리가 갖고 있는 화석의 증거는 어떻습니까? 어류의 화석, 파충류의 화석, 양서류의 화석이 있는데, 그 중간에 종을 연결하는 화석이 없습니다. 가끔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는데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갈 때 그 변화가 매우 많은 과정을 통해서 오랜 기간을 통해서 가죠. 과학적인 증거로서 무수히 많은 변화, transitional fossil을 발견해야 되는데요, 실제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가끔 하나 둘을 발견하지만 무수히 많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 것을 발견해야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시적 진화에서는 인간이 어떤 design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random generic mutation, natural selection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요. 다윈의 blackbox라는 말 들어보셨죠? 다윈이 진화론을 쓸 때는 오늘날 사용하는 정밀한 현미경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생명체의 세포 안을 볼 수 없었어요. 세포가 일종의 blackbox였어요. 다윈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썼기 때문에 진화론이 나온 것이거든요. DNA가 발견되면서 이것이 design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support가 되고있어요. DNA의 정보를 쓰기 위해서 five million page에 달하는 종이가 필요해요. DNA의 발견이 믿지 않는 사람에 의해 되었고, DNA를 발견한 후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성경적인 시각에서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적인 자료에요. 왜냐면 DNA라고 하는 것이 generic code를 갖고 있거든요. 네 개의 조합에 의해서 language를 만들고 있거든요. Computer가 2개의 조합으로 언어를 만들듯이 4개이 조합을 갖고 언어를 갖고 있어요. 눈에 해당하는 세포는 그것에 해당하는 작용을 하고 세포를 만들수 있는 것은 그 정보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언어는 random한 것이 아니에요. A, C, G, T 네 가지를 randomly 섞어서 만들면 문학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죠? 어떤 designer가 그것을 만들어야 소설이 되고 문학작품이 되죠. Specified complex라고 하는데요, 굉장히 복잡한 조합을 갖고 만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자연도 복잡한 것들이 많아요. 자연도 complexity를 만들어내는데, 이런 것들은 random complexity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보면 계곡도 있고 멋있죠. 자연이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깎여서 자연이 random한 현상에 의해서 complicated한 것들이 만들어진 것이에요. 다른 사진을 보면 South Dakota에 가서 자연이 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겠죠. 대통령의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는데요, 이런 것들은 specified complexity에요. Random complexity는 natural law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지만 specified complexity는 어떤 intelligence를 요구합니다. 하늘의 구름이 떠있을 때 보면 구름이 어떤 모양처럼 보이는 것 같죠. 자연이 이런 모습을 만들어내요. Random한 현상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Random하고 repetitive합니다. Physical한 object가 반복됩니다. Specified complex는 고도의 복잡성입니다. Intelligent한 being이 아니면 무한한 시간을 준다고 해도 만들 수 없습니다. 단세포의 미세포에 들어있는 정보의 양이 얼마인 것 같습니까? Encyclopedia 30권에 담을 수 있는 정보입니다. 아메바는 어떨 것 같습니까? 아메바에 담긴 정보의 양은 1000권입니다.


칼 세이건은 DNA는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가 quite by accident, 원래대로 조합되는 것에서 잘못 조합되어서 mutation이 됩니다. 그 mutation에 의해서 다른 종이 진화적으로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람이 생기는 mutation은 우연히 생긴다고 하죠. 그 chance는 one of billion, 10억분의 일입니다. 그 mutation이 항상 good mutation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mutation은 harmful mutation입니다. 그러면 generic mutation이 한번 일어나는 것이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mutation의 probability가 얼마냐면 십의 사만 승의 일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atom 숫자의 500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거시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50명의 장님이 루빅 스큐브를 동시에 같은 색깔로 모아놓을 수 있는 확률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 가능성보다 적으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얼마냐면 십의 오십승 분의 일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물리학적인 기준을 놓고 보았을 때 거시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그것보다 엄청나게 적습니다. 거시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수학적인 확률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이론과 논리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굉장한 것이에요. 믿음이 매우 좋은 진화론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지정의 하나님에 대해서 봤습니다. 성경에서 어느 서기관이 예수님께 가장 계명이 뭡니까 하니까 두 계명을 얘기하시죠. 첫번째는 하나님 사랑, 두번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하는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어요. 그것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하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 많은 크리스챤에게서 부족한 부분이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마가복음의 말씀은 지성이 감성과 의지와 더불어 온전히 신앙을 위해 필수적인 부분이다. 지성을 소홀히 하는 신앙 생활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Perfect라는 말이 원어 상으로 balanced라고 합니다. 온전한 신앙인이라는 것은 지성도, 감정도, 의지도 균형있게 자라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구원을 받으셔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난 영혼이 되면 우리의 지성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지성이 transformed되어야 합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우리의 생각을 훈련하고 세상의 사고방식 대로 나가지 말고 우리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통한 지적 제자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공부 대신에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 공부와 아울러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흥분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준비를 하지 않고 개인의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흥분하는 것이죠.


두번째 시간에는 적용하는 강의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