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기] 화목을 깨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기
이코스타 2001년 3월호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갈등이 있다. 거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욕구와 화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두 욕구 간의 갈등이다. 거룩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비판을 하여야만 하는데 비판은 분열을 가져오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싸우는 인상을 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화목하기 위하여서는 서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부정과 부조리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부패를 가져올 것은 같은 두려움이 있다. 이 두가지 갈등 안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하지 말라”는 계명(마7:1)과 “형제가 잘못하거든 바로 잡아주라”는 계명(갈6:1)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된다. 나도 목회하는 목사로서, 또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는 성도로서 이러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발견한 몇개의 커다란 해결원칙을 (편집자의 부탁을 받아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우리는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갈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숙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유대인과부와 이방인과부 사이에 구호문제로 인한 갈등이 생겼을 때에 이것을 계기로 ‘기도하고 말씀사역에 전념하는’ 사도들의 역할이 정립되었고 훌륭한 집사들을 선출하게도 되었다. 구약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사이에 생긴 안디옥교회의 갈등은 예루살렘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를 통하여 복음이 좀 더 분명하게 정의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가 ‘건강’하기 위하여서는 갈등이 필요하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문제를 쉬쉬하고 감추어서는 안된다. 갈등을 인정하고 노출하여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차원에서도 갈등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닮게 되는가? 이는 ‘갈등을 통하여서’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우리기 변화 받아야할 부분을 먼저 지적해 주신다. 그런데 이렇게 지적해 주시는 방법이 바로 갈등이다. 예를 들어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교만한 사람을 붙여주신다.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교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상대방의 모습을 통하여 교만이 얼마나 추한지를 보여주신다. 이 교만한 이웃과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우리는 비로소 교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교만한 이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아니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갈등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갈등의 대상이 믿음의 형제자매인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대부분의 갈등이 해결되기 보다 투쟁으로 확산되는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를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을 적으로 생각하면서 감정적인 요소가 개재(介在)되기 시작한다.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증오감으로 불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있는 한 갈등이 건설적으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자신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상대방이 비록 의견은 틀리더라도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이단시비가 붙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 쟁점이란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계에 잘 알려진 순복음교회의 C목사님이 이단시비에 몰릴 때에도 그랬다. 신앙적으로 그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 스스로가 보기에는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지엽적인 것이지 기독교 신앙 본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혹하게 이단으로 몰아치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만 인정했어도 아름다운 신학적 토론으로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이단으로 몰고보는 바람에 의미있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나의 형제요 자매이라는 것만 의식해도 노골적인 적대행위나 원색적인 비난을 삼갈 수가 있을 것이다. 갈등이 외부에까지 노출되어서 사단과 세상의 웃음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투쟁과 분열로 극대화되는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공격하는 수가 많은데, 이럴 때 억울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는 상대방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며 결과적으로 갈등은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요즈음 큰 교회 목사님의 대물림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대물림’이라는 용어 자체가 상당히 감정적인 단어가 아닌가. 목사의 아들이 목회자로서 자질도 없고 목회능력을 검증받지도 않았는데 당회장의 아들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후임목사로 추대받았다면 이것은 대물림이다. 그러나 담임목사의 아들이 신학훈련도 받았고 목회능력도 검증 받았으며 많은 후보 중의 하나로 고려되었다면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상투적인 문구를 사용하거나 비난을 퍼붓기 때문에 갈등이 건설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투쟁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부부끼리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않기 때문에 갈등이 확산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반찬이 왜 맨날 이 모양이야!” 저녁 늦게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저녁밥상을 내려다보며 불평을 한다. 자기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만든 반찬인데. 아내는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는 가져다 주는 쥐꼬리만한 생활비로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아요!” 아내는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 이에 남편은 곧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 정성들여 차린 음식은 외롭게 밥상 위에서 식어간다. 남편이 반찬을 갖고 투정을 했을 때에 아내가 이렇게만 물었어도 상황이 틀려졌을 지 모른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 남편은 과장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일을 쏟아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남편 신경질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과장에게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좋은 말로 위로하여 식탁에 마주 앉은 시간이, 위로와 격려의 시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넷째로 우리는 불완전한 해결 안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에서 겪는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대개는 복잡하다. 갈등을 겪을 때에 한사람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그른 법은 없다. 둘 다 옳은 점이 있고 그른 점이 있다. 그러므로 양쪽이 다 만족할 만한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고 보는 것이 낫다. 완전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소속되어있는 남침례회는 현재 보수파와 중도파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다. 보수파는 성경을 절대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침례교회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중도파는 양심에 기초한 개인신앙의 자유가 침례교회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수파인 보수진영에서 최근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여성목회자는 허락이 안된다’는 조항을 “침례교도의 믿음과 신조 (Baptist Faith and Message)”에 첨가하였다. 성경의 원칙에 벗어나 현실에 영합하는 사조를 막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파인 중도진영은 이러한 총회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 대한 특정해석일 뿐인데 이것을 신조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양심의 자유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두 주장이 다 일리가 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다보니 골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중도파들의 교단탈퇴는 이제 시간문제인 것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불완전한 해결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성숙했다는 의미이다. 어떤 분이 성숙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애매함 가운데 살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live with ambiguity). 멋진 정의라고 생각한다. 교회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하여서 갈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 가운데에서 애매한 상태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평안해 할 수 있는 능력을 또한 키워야만 한다. 흑백논리에 기초하여 ‘이것 아니면 저것’, ‘너 아니면 나’ 하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갈등의 해소는 결국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방법을 몰라서 갈등을 해소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해결방법을 지속성있게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도 에너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들은 음성에 절대 순종할 것을 결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주시는 힘과 사랑에 의지하여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없이 진정한 갈등해소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