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백설 공주 이야기 1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백설 공주의 계모인 왕비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내를 잃은 왕이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워서 주변의 이목이나 만류를 물리치고 맞아들인 여인이었을 겁니다. 처음 그녀가 왕실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前) 왕비의 기품 있는 모습과 온화한 인품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공주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에게 모든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는 왕비에 대해서, 그녀에게 온통 빠져있는 왕의 지나친 사랑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떠도는 계모에 대한 온갖 속설과 선입견들, 나쁜 계모들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이 다 그녀의 몫이 되어 갔습니다. 왕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나 인격적인 불찰도 그녀의 탓으로 돌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그럴싸한 증거들과 부도덕한 루머들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무료함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과 위증의 폭력으로 그녀의 행복은 박살 나 버렸습니다. 왕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에겐 지켜야할 체면과 자존심이 한 여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을 통해서 은밀한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얼마나 배 아픈 일이었는지,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얼마나 큰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타인의 행복은 결코 나의 기쁨의 원천이 아닌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겠지만, 타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가엾음을 깨닫지는 못 했나봅니다.


왕비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밝고 쾌활하던 성격은 우울하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던 성품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조소하는 시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절망은 사랑 받지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각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자신, 누구의 관심과 염려스런 눈빛도 받지 못 하는 자신, 그리고 아무도 믿지 못 하는 자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달팽이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에는 증오와 분노, 슬픔의 깊은 웅덩이가 패였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은 또 하나의 자아, 그녀의 내면을 표출해 놓은 장치였을 겁니다. 거울조차도 이제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에게도 배반 당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할 능력조차 상실한 거지요.


어느새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공주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모든 증오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의 질투심과 사악한 마음이 바로 그녀 자신의 성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질투한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질투한 것처럼, 공주를 지켜야 할 자가 그를 치는 자로 변해 버렸습니다. 질투와 경쟁심에 눈이 멀어 버린 겁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정녕 죽이리라고 다짐했듯이 그녀도 총명하고 아름다운 존재, 모든 존귀와 사랑의 대상인 공주를 향해 광적인 분노를 품었습니다. 질투는 모든 죄악의 씨앗이 됩니다. 질투는 스스로를 찢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커다란 가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왕비는 공주를 질투했습니다. 사랑 받는 존재를 질투했고 아름다움이 인정받는 것을 무엇보다 더 질투했습니다. 카인은 인정받지 못함에 분노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망의 하나일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왕도 시민들도 거울조차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질투는 절망의 음습한 그늘에서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깨지고 절망한 그녀가 세상을 질투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며 결국 흉악한 마녀의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 안의 죄성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그다지 충분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을 붙잡고 아무리 수 없이 되물어도 거울은 흔한 위로의 말 한 마디도 건네주지 않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정녕 나는 나를 사랑하느냐, 정녕 나는 아름다우냐.” 이 물음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아무에게도 기댈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외로움과 절망의 부르짖음에 누군가 대답해 준다면 당신의 아픔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나를 비웃고 멸시해도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사랑한다면 자괴감에 시달리던 자아는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남들에게 인정 받을 만한 것이 많지 않아도, 무한히 쏟아지는 사랑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아름답다고 말하십니까 –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아가2:15)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합한 아름다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이 완전하지 못해도 이목구비가 바르지 못해도 그분은 우리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눈을 떼지 못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그의 사랑으로 나를 침묵하게 하시며 나로 인해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시는(스바냐3:17) 분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절박한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며 나를 찾겠다고(이사야 42:14)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움을 느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나는 것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바다의 모든 것들과 산천초목을 다 주시겠다고 누리고 정복하라고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짝사랑을 받아 들인다면, 무엇에 상처받고 무엇을 질투할까요.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 사랑받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 부서진 자아는 더 단단한 형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유일한 존재이며, 당연히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며 넘치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든든한 품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길….

[함철훈] Be Still

eKOSTA 갤러리


Be Still!
내 앞에 잠잠할 지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10월 느림과 11월 Give Thanks로 연결 시켜본 캄보디아의 영상을 이 사진으로 마감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두려움과 생소함 앞에 당황해 하는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가장 좋은 것들을 시간이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나와 만물들은 그분의 영광 아래 잠잠할 지어다. … Be Still! …


*1998년 5월 World Vision의 official photographer로서 오재식 회장님과 김혜자 대사님 그리고 SBS 팀들과 캄보디아 취재를 마치고 기아 대책 기구 팀들의 깜뽕솜 어촌 하기훈련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푸놈펜 중앙 시장 바닥에서 본드를 흡입하며 뒹구는 가여운 아이들, 아직도 킬링 필드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바탕방의 지뢰밭 위에서 논과 밭을 갈며 살아야 하는 농민들, 4바퀴 차길이 없어 3시간 오토바이 꽁지에 메달려 엉덩이 얼얼하도록 들어가본 농촌 축. 그곳 농촌 교장 선생님의 16살 짜리 아들 아바트낙이 어느날 지뢰로 두 눈을 실명한 후 일년 반 동안의 본인과 가족들의 얼굴과 마음의 상처. 정글 숲에 감춰져 있던 앙코르 와트의 유적들과 통네 호수의 수상 가옥을 본 후에, 캄보디아의 아픔은 전이 되어 깊은 숨이 쉬어질 때의 깜뽕솜 남지나 海(해)의 해(일)는 숙연함을 넘어선 큰 위로였습니다. 내 앞에 잠잠할 지어다.


Be still, ye inhabitants of the isle; …(Isaiah 23:2)

[김중안]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단점

유학생 사역


Big Ten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단점


* 지난 호에서는 중서부 지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장점들을 나누었다. 이번 호에서는 반대로 단점과 힘든 점들을 나누고자 한다. 문제점과 원인을 보는 시각에는 지역 교회의 사역자들과 거주자와 유학생들 사이에 공통된 의견과 동시에 이견들도 있다. 이 내용들은 현재의 유학생 사역과 사역자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여러 관점에서의 객관적 사실들을 언급함을 통해 유학생 사역의 문제점과 그 원인을 분석 진단하고 성경적이고 영향력 있는 유학생 사역을 위한 개선책과 대안을 찾는 데 기초자료로 사용되어지길 소망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를 기초로 바람직한 유학생 사역을 위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사역자의 문제

유학생 사역에 문제점 중의 하나는 유학생을 위한 사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캠퍼스에서 유학생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역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이 학원촌에서 지역교회의 목회자로서 유학생 사역을 하거나, 이민자들이 많은 대도시의 교회에서 하나의 부서를 맡은 부교역자로서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다. Big Ten 지역의 30 교회 중 부교역자가 있는 교회는 5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 대학촌 지역에는 부 교역자가 2명 밖에 없다. 이는 교회의 규모와 재정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재정이 확보되더라고 시골 지역으로 유학생 사역을 위해서 기꺼이 가고자 하는 헌신된 사역자들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따라서 대학촌 지역의 사역자들은 혼자서 다양한 계층의 교인들(거주자, 대학생(under), 미혼자(single), 기혼자(married), 교환 교수, 언어 연수 학생, 주일학교)을 상대해야 하고 행정과 관리 설교 양육 돌봄 등을 책임지고 있기에 사역의 집중성, 전문성,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소모(burn out)되기 십상이다.

사역자의 수 뿐만 아니라 질적인 문제도 있다. 이는 일반적인 전임 사역자로서의 자질보다는 유학생 사역에 적절성에 관한 것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반적인 한국 교회 사역이나 이민자 중심의 사역에 적절할 지는 모르나 유학생 사역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사역자들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청년 대학생 사역의 경험이나 소그룹과 양육과 제자훈련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사역자들은 유학생 사역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교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기본적인 관리만 하고 현재의 사역지를 더 큰 이민교회로 가기 위한 중간 역할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역자들의 자세에 대한 불만들도 토로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실정상 목회자 한 사람의 목회 철학은 교회의 방향과 사역의 구조와 내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전통적인 목회철학과 스타일을 가지고서는 출석 교인의 절대 다수인 유학생들의 영적 필요를 외면하고 소수의 이민자들의 기호에 맞추려는 사역으로 기울게 된다.

2. 교회의 문제

교회 안의 문제로는 무엇보다 재정의 문제를 지적한다. 재정적으로 자립을 하지 못하고 교단의 지원을 계속해서 받고 있거나 목회자의 사례비를 겨우 주고 다른 사역에는 여력이 없는 교회들이 다수이다. 재정의 부족으로 인해 필요한 사역에 사역자를 세우지 못하거나 지역 교회로서의 교육과 양육과 선교와 구제 등 균형잡힌 사역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직업을 갖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교민들 중에도 헌금을 유학생 수준으로 적게 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거나, 나는 학생이니까 하면서 거의 헌금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할 때 재정적인 문제가 심각해진다. 헌금에 대한 강조를 하다 보면 불신자와 초신자들이 많은 유학생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시험에 드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교회 안의 이민자와 유학생들 사이의 갈등도 있다. 이민자들은 유학생들이 헌금도 적게 하고 잠시 있다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목회자의 사역 중심이 자신들에 초점을 맞추어 주기를 요구한다. 유학생들은 자신들이 다수인데 교회 봉사자로만 전락되어지고 사역내용과 교회의 운영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있음에 불만을 토로한다. 이 문제는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의 존재 목적과 사역의 방향과 중심 내용에 대한 하나된 마음이 없을 때 더 심화된다. 그리고 목회자의 목회 철학과 방법론의 부재, 교민들의 선교의식 부재, 유학생들의 주인의식과 헌신의 부족 등이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역 교회들이 캠퍼스를 선교지로 보지 않고 학생들을 자기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좁은 지역 내에서 교회 간의 갈등과 경쟁을 심화시키고 개 교회 중심주의로 치우쳐 협력과 동반자 관계에서의 효과적인 학원 사역을 못하게 된다. 오히려 불신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되고 전도의 문을 막는 꼴이 되어진다. 자기 교회가 주체가 되어 자기 교회 안에서 하지 않는 한 다른 교회 청년들과의 연합이나 협력 사역은 지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도시의 교회들도 캠퍼스 내에서의 학생 사역을 거의 지원하지 않는다. 개 교회에 이름을 내고 교회 내에 수적인 성장의 유익이 있을 때에만 지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의 삶의 현장인 캠퍼스를 외면함으로써 유학생들을 위한 온전한 사역이 이루어 질 수 없게 된다. 이원론적 현상이 일어나 학생들의 신앙을 교회 안으로만 가두어 전공과 신앙, 학문에서의 주되심, 직업과 소명, 영적 전투와 선교적 책임, 캠퍼스와 세상 속에서의 영향력 있는 삶,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과 동역에 관한 도전과 훈련을 받지 못하게 한다. 이는 교회 출석과 봉사를 잘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기복 신앙과 이원론적인 신앙 생활을 부추기게 된다.

3. 사역의 구조와 내용의 문제

유학생 사역이 효과적으로 잘 되어지고 있는 교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목회자가 유학생 사역에 대한 뚜렷한 목회 철학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가 전통적인 한국 교회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역 구조와 내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교회들이 전통적인 한국 교회의 구조와 내용을 유학생 사역에 그대로 접목하고 있다. 주일 대예배가 제일 우선 순위에 있고 수요저녁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새벽 기도회, 금요 전교인 기도회, 주일 오후 예배, 구역 예배, 부활절 성탄절 등의 절기 행사로 바빠 평신도 리더 훈련과 체계적인 양육과 제자 훈련을 할 여력이 없다. 성가대가 주일 학교 교육보다 우선되고, 여 전도회와 구역모임은 주일날 전교인 식사 교제 준비가 제일 큰 사업이다. 싱글들은 청년회라는 부서로 묶어 놓고 기혼자들은 구역 모임으로 편성한다. 구역 모임은 깊은 나눔과 말씀을 통한 양육보다는 피상적 식사 교제와 형식적인 예배로 일관 되어지고 있다. 구역장들을 교육하고 돌아보지(care) 않고 책임만 주고 관리만 하게 하는 것이다. 소그룹을 통한 양육 구조가 아닌 관리 구조인 것이다. 청년회 모임도 훈련과 양육이 없고 지도 교사나 부장 집사가 전체로 모아서 가끔식 가르치는 수준이다. 그리고 청년회는 말씀을 통한 양육보다는 찬양 모임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청년회의 제일 큰 사명은 교회의 행사나 인력을 요구하는 일에 제 때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면 장로님과 제직들은 우리 청년회 잘 모이고 잘 된다고 평가한다.

제일 안타까운 사실은 출석인원 중 불신자와 초신자가 1/3이 넘는데 이들을 위한 전도 성경 공부나 초신자 교육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면 신자로 간주(assume)하여 기혼자는 구역으로 편성하고 미혼자는 청년회로 편성한다. 교회 출석과 봉사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이 자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복음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경험이 없고 아무런 양육도 못 받은 가운데서 유학 시절 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임원으로 직분자로 활동하다가 졸업하고 떠나는 사례들도 허다하다. 실제적으로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이 교회 내에서 전도와 양육을 위해서 열심을 내다가 전통에 따라 굳어진 교회의 구조의 벽에 부딛혀 좌절하고 있었다.

학기 초에 정착을 위해 교회의 도움을 받고 출석했던 학생들의 반 이상이 학기 중간에는 보이지 않는다. 말씀의 능력과 사랑과 치유와 나눔과 소망으로 가득한 건강한 공동체성이 없고 삶과 인격으로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흡입력이 있는 소그룹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신자들 중심의 구조와 내용을 지속하고 있기에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이 적응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 구조와 내용이 유학생 사역에 맞게끔 전도하고 양육하여 영적 지도자로 훈련하여 파송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유학생을 위한 온전한 사역을 기대할 수가 없다.



4. 사람의 문제

유학생 교회의 목회자들이 지적하는 제일 큰 어려움으로 공통적으로 뽑는 것은 일군이나 평신도 사역자가 없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한국 교회 스타일의 교회들은 항상 그 해에 새로 오는 신입생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런 교회에서는 평신도 사역자가의 개념이 아닌 교회를 운영하고 섬길 일군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사람이 오느냐에 따라 교회의 사역의 내용과 질이 바뀌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보다는 교회에 오랜 다린 베테랑 신자를 선호하고 꼭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이에 상처를 받고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아예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양육 중심의 교회들도 리더들을 세워 일할 만하면 떠나 버리게 되어 안정적으로 리더십을 이어 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리더로 서는데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실제로 사역할 수 있는 기간은 많지가 않다.

전체 유학생들의 숫자에 비해 한국에서부터 잘 양육되고 준비된 리더들의 숫자는 절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준비된 일군과 사역자는 소수이고 대부분이 불신자, 초신자, 교회만 출석하는 맹목상의 신자들이다. 일설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선교 단체나 교회 대학 청년부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던 학생 리더들은 유학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적게 유학을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으로서 가지는 시간적인 한계들이 있다. 학업과 학교 일에 쫓기다 보면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고 가정에서 책임이나 교회 출석도 간신히 있는 학생들이 대다수이다. 유학생 교회와 사역자들은 신앙의 성숙보다는 학위와 직장을 잡는데 최우선 순위가 있고, 단기간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주인의식이 부족하고,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신세대의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도전하여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 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일형]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신명기8: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한 후 만나를 먹게 하신 이유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기 위해서 중요한 필요 조건인 것 같습니다. 낮아지고 굶주릴 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이 결여되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시 여기던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세상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알게(믿게) 됩니다.


먼저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은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창조의 틀(framework) 안에서만이 설명될 수 있는 개념 입니다.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창조의 틀 안에서 원래 창조될 때 define된 기능을 발휘할 때 “생명이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원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인/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그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1:30; 2:7).


모든 생명체는 미리 규정된 범위 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사자는 하늘을 날수 없고 참새는 얼룩말을 잡아 먹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식물과 동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define) 하셨다고 설명하심으로 각각 창조 안에서의 주어진 활동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1장).


생명이 창조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있듯이 생명의 유지도 창조의 틀에 의존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창조 안에서 음식을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창조의 틀에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섭취하며 생존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면서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시고, 기본 틀을 잡으시고 (이사야48:13) 마지막으로 그 틀 안에서 생명체들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장). 이는 생명체가 창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조물의 제한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욥 38장).


창조의 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또 같은 말씀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공급하는 근원입니다 (요1:3-4). 그러므로 창조의 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자 곧 말씀의 작품입니다. 창조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즉 의지의 표현으로 지금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3).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의 계속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호흡하고 의식이 있다는 자체로 생명이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창조의 틀에서의 그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역할을 이행할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서 단순하게 호흡하고 의식이 있어도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생명이 의미하는 것은 원래의 생명의 뜻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 안에서 국한된 생명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신의 세계 안에서 만의 생활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세계는 창조의 틀의 subset 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창조의 틀에 맞게 규정된 인간이 subset에 국한되어 생활할 경우 창조의 틀의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 국한된 의식이 창조의 틀 안으로 팽창하고 그 창조의 틀에 의해 규정된 생활을 하게될 경우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11:1).


창조의 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있을 때 참 생명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세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육신의 세계에 육신이 제한을 받고 살고 있지만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은 육신의 세계가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뜻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교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전달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말씀을 통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거절했음으로 육신의 세계에 국한되어 버린 인간의 의식수준에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세상에 없어지고 사단이 제시해 주는 세상의 형상이 인간의 의식을 점령해 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인간의 육신의 세계 안에 표현되셨습니다 (요1:14). 그리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 이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진리”, 즉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빌3:9). 즉 육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identity를 이해하고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창조의 틀 안에서 자신의 참된 identity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의 세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음식을 계속 섭취함으로 우리의 육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제 원래의 창조의 틀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whole being이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바로 창조의 틀의 음식은 창조의 틀을 유지하는 근원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번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창조의 틀에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의 놀라운 보화를 질그릇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후4:7).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매일 나아가야 합니다 (히4:16).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의식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삶의 영역이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틀에 의하여 지배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까지도 온전히 지배하여 온전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안종혁] 유학생활 중 스스로 성결케하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활 중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이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와 정탐을 마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즉 내일이면 여호와께서 요단을 가르시는 기사를 이스라엘 백성 중에 행하실 텐데, 성결하게 하여서 이 기적을 체험하기에 합당한 백성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이요 부탁인 것이다. “성결”이라는 말은 “거룩하고 깨끗함”이라는 의미인데, 즉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며, 말씀에 따라 사는 행실로 말미암아 깨끗한 성도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실제적인 유학생활 중의 영성훈련에 관련된 성결한 삶에 대하여는 지난 몇회에 걸쳐 쓴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이라는 연재 칼럼에 이미 썼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유학생활 중의 성결한 삶은 유학생활 동안에 열심히 예배드리고, 주야로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세상 가운데에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자로 살며, 또 주님 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크리스천 유학생의 영성훈련에 관한 성결보다는, 미국이라는 이질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실제적인 크리스천 유학생의 삶을 성결하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겠다. 특별히 미국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보겠다고 신앙의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In God we trust”라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 유일한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기초위에 세워진 미국이, 케네디 대통령 당시인 1962-63년에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는 것을 금지한 이래, 이 나라는 1962년 이전에 비하여 몇십 배로 증가된 청소년 범죄, 이혼율, 마약중독, 동성연애 및 낙태의 합법화 등으로 타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비록 현재 미국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하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미국 문화와 관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한국문화에 깊은 뿌리를 둔 (나같은) 유학생 출신들은 이미 한국문화, 관습과 전통에 길들여진 눈으로 미국의 문화를 바라보려하기 때문에, 때론 당혹스런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게 되고, 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게도 된다. 최근 “The Korean Christian Journal”(2001년 11월 25일자)에서 일리노이주 인권국의 이윤모 박사가 조사 보고한 “한인교인들의 신앙관, 참여, 교회의 안정성”이라는 소수인종 신앙생활 조사-비교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인들은 교회와 의례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개인 윤리관에는 더욱 투철하지만, 신앙의 생활화와 실천면에 타인종들(특히 흑인과 히스패닉 신도)에게 뒤떨어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동보고서는 “교회출석이 신자생활에서 필수적이라는 데는 한인들이 단연 타민족 그룹보다 압도적이며, 또한 성경 읽기와 연구의 필수성에서도 한인들이 단연 앞선다. 신앙관을 가정, 학교, 일터에서 실천하거나, 사회정의 추구와 사회봉사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흑인, 히스패닉 신도들보다 한인들이 뒤떨어진다”고 결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이민자나 유학생들이 바른 신앙관을 가정, 학교나 일터에서 실천하거나 또 사회정의 추구와 사회봉사에 참여하며, 성결한 크리스천의 실제적인 삶을 사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요단을 건너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삶 속에서의 성결함을 유지하는 훈련을 유학생활 동안에 잘 해두어야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할 즈음에, 요단강이 다시 갈라지는 하나님의 기사를 보는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장래 미국의 이민을 고려하며, 유학생활 속에서 이루어야 할 성결한 삶의 각 부분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결한 학업성적 관리


미국에서 들을 수 있는 제일 “모욕적인 말”은 아마도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미국문화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진실을 감추고 위장하며 거짓말하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전임 닉슨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에서 상대의 정보를 몰래 수집했다는 범죄보다는, 그 범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좀 우습기는 하지만, 지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도, 성추문 자체보다는 성추문 사건을 감추려고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모든 조사와 논리의 핵심을 집중했다고 보면 옳다. 미국에서는 언제든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잘못을 시인하면 상응하는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또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저지른 잘못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용서가 안 된다고 보면 틀림없다. 정직을 생명처럼 여기며, 정직한 자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격언이 “정직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직하게 살면 바보로 취급하는 사회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꼭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하는 나라가 미국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의 성결의 덕목에 거짓 없는 정직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임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정상적인 미국 학생들에게 학과의 시험 중에 컨닝을 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잘못된 행위이다. 자기 자신들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하는 것도 결코 눈 감아 주지 않고, 컨닝하는 학생을 윤리위원회에 즉각 보고하는 정의감을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최근 수많은 동양계 유학생들의 시험 중 컨닝 노력은 미국교수들의 마음을 심란케 하고 있는데, 크리스천 한국유학생들은 컨닝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또 학교에서 퇴교 당하는 불명예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많은 동양계 학생들은 서로의 숙제(homework)를 보여주고, 또 심지어 답을 그대로 베껴서 내는 학생들이 종종 있어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담당교수가 서로 토론하라고 허락하면 토론을 할 수 있으나, 토론조차 하지 말라 하면, 서로 토론하는 것도 불법이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친한 친구가 “take-home exam”(집에 가지고 가서 치르는 시험)의 답을 보여 달라고 하여 답을 보여주고 (사실 부끄럽게도 나도 그럴 뻔한 경험이 있다), 또 답을 본 친구는 take-home exam의 답을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여 퇴교를 당하기도 한다. 이는 미국학교의 성적관리 원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따라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숙제나, take-home exam의 답을 보여 달라는 불법적인 요구를 결코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잠시 마음이 상할지라도 자기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결코 답안을 보여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 미국 학점관리의 기본 정의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함이 바로 크리스천의 성결이 아니겠는가? 결코 불의한 방법으로 취득한 학점으로는 요단을 가르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어렵다.


정직한 연구결과 보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수행하는 연구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바라며, 관련된 학계를 깜짝 놀랄게 할 만한 결과를 발표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연구조사한 자료의 분석이나 또는 실험한 연구 결과를 조작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유혹이다. 또한 직장을 잡기 위하여,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싶은 욕망에 실험결과를 확대해석하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는 자신의 연구결과에 부끄러움 없이 솔직해야만이, 세대를 넘어서 그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동양의 모나라로부터 유학오는 유학생들이 입학허가를 얻기 위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GRE나 GMAT, 또는 TOFLE 점수를 취득하며, 또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취업을 하기 위하여 연구결과를 조작하고 있다는 소문은, 미국 대학교수들을 염려케 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한 모고고학자가 일본의 고고학사를 뒤집는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수 십년 동안 발표하여 자신의 학파를 구성하고, 국제 고고학계를 주름 잡았지만, 연구결과를 조작하여 발표하였다는 덜미가 잡히면서, 또 한 번 그의 부도덕성과 사기성에 세상이 놀란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며, 처벌받아 마땅한 처사이다. 또한 최근 한국 모대학의 연구팀이 국제전문잡지에 외국연구자의 논문을 그대로 표절하여 게제된 사건이 발각되어서, 한국대학이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에 더불어 최근에 한국에서는 목회자들의 타목회자 설교표절로 논란이 한창인데, 성구 하나 또 문자 하나 바꿈 없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집을 베껴서 자기가 영감을 얻은 설교처럼(다른 목회자의 설교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설교하는 것도 부정직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자신의 연구결과를 해석하고 얻은 결과를 바로 해석하고 또 적극 방어할 수 있는 논쟁훈련은 전문가로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연구결과는 절대로 사실대로 보고하여야만 한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또 동서고금을 넘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의 학자적인 양심과 정직성을 생명과 같이 귀히 여겨야 될 덕목이며, 이에 관한한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처절함이 바로 학문의 세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끔 남의 연구논문 결과를 표절하여서 말썽이 되는 학위취득자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표절한 논문결과로는 결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기 어려우며, 언젠가 성결치 못한 행동 때문에 큰 댓가를 치를 날이 꼭 있게 된다. 연구결과의 보고에 부끄러움이 없이 정직하고 또 신실해야 할 것이다.


미국법 바로 지키기


미국 사람들의 준법정신은 참 놀랄 만큼 높다. 교통법규 준수, 줄서기의 습관화 및 기다림의 인내심은 우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미국민성이다. 금년 9월 11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는 미국 역사상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최대의 참상이다. 이미 미국은 9월 11일 이전의 미국이 아니며,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에게 관대했던 나라가 더 이상 아님을 알기 바란다. 내 앞마당에서, 외국의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수천명의 가족과 동료가 죽는 테러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생겨나고, 또 지금도 테러의 불안에 온 미국민이 떨고 있는 마당에, 법을 지키지 않는 유학생과 불법이민자들에게 자비를 보일 여력이 없다는 미국의 절박함을 모든 유학생이 피부로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내의 급변한 상황을 고려할 때, 추후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과 그 동반가족들은 미국의 이민법과 세법을 꼭 지켜야 될 줄로 안다. 실수로 이것들 중에 하나만 어겨도, 미국이민을 고려할 시에 바로 실격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취득한 유학 Visa의 종료일과 갱신여부를 바로 이해하고, 또 필요하면 종료전에 바로 갱신하여서 어떤 기간이라도 미국의 불법체류의 기록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이민법이 재정비되고 있는 중이니, 모든 유학생들은 각 학교의 외국유학생 담당자로부터 바뀌는 이민법의 바른 정보를 얻기 바란다. 또한 이민을 고려하는 경우에는 이민전문 변호사와 꼭 상의하면서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지, 결코 본인의 상식과 경험에만 의존하므로 자주 바뀌고 있는 이민 절차를 잘못 이해하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란다. 또 학위 취득 후에, 전문 분야에 따라 미국의 이민국에서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약 1년 정도의 practical training을 허용하고 있는데, 학위취득 날짜에 맞추어서, 미리 practical training을 신청하여서, H-1 Visa를 얻고, 이어서 Green Card를 신청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지혜롭게 계획하고 또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모든 미국인의 자발적이며 성실한 세금납부의무의 이행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듯하며, 또 그 방법을 교묘히 하여 속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납세청에 탈세로 걸리면 재수없이 망하게 되는 경우이고, 안 걸리면 수지 맞는 경우이다. 그러나 미국국민은 탈세를 죄악이요 수치로 여길 뿐더러, 또 탈세가 발각되면 형벌은 감당키 어려울 만큼 무겁다. 이곳에서 탈세는 사랑하는 국가의 재정을 도둑질하는 비열한 도둑질이요,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부의 재분배를 빨아먹는 더러운 사기행위요, 양심을 팔아먹는 부도덕한 행위로 분류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이민하여 사는 한인 이민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탈세함으로 돈을 벌었다고 회자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라면 걱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는 이곳에서, 탈세를 하거나 또 세금을 실제보다 줄여서 보고하여 이득을 취하는 경우는, 소속한 사회에 기여없는 기생충같은 인생으로 간주되고 있다.


장학금을 수혜하는 유학생들은 합법적인 세금납부 혹은 면제신청을 꼭 해야 할 것이며, 또 연말 세금보고 시에도 합당한 세금보고서식을 사용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 몇백불의 세금을 돌려 받겠다는 욕심과 유혹 때문에 미국 이민법과 세법을 어겨서, 결정적인 시기에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지금은 미국 이민법이 바뀌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미국에 세금을 내는 자만이 미국에 살 권리가 있으며, 또 불이익이 있을 시에 바르게 보호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을 바르게 또 자발적으로 낼 줄아는 일등 국민만이 그 나라를 일등국가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또 미국의 법을 바로 지키자.


부당한 뇌물은 죄악


교통법규의 위반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때론 부득이 경찰에게 교통법규 위반 티켓(ticket)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나는 많은 한인 유학생들이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은 경우, 경찰을 속이거나 또 어긴 사정을 왜곡 주장하여 벌금을 면제 받았다는 무용담을 수없이 들었다. 거기에 또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까지 덧붙여서 간증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자신의 과속으로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게 되는 경우, 경찰의 교통위반 단속이 특별히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은 한, 과속은 자신의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법을 어겨가며 과속하여 달려도, 경찰의 감시로부터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유학생들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이야 이해되긴 하지만, 과속해서 교통위반 티켓을 받았다면, 빨리 달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로 알고 감사하게 벌금 내면 그만이요, 끝내 억울하면 법정에 가서 싸우면 된다. 교통위반 티켓 발급시, 동양계 학생들의 이상한 억지변명에 이미 신물나며 이골이 났다는, 경찰관의 농담에도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에 더하여, 한국에서 옛날에 있었던 관행처럼(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교통법규를 위반한 후에, 교통경찰에게 거래하자고 뇌물을 건넸다가, 도리어 혹을 붙이고 감옥에 간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야 될 것이다. 교통법규를 어기고서, 교통경찰관에게 거짓말로 어필하고, 우기거나 간청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말자.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뇌물의 효용을 익히 배우고 자란 탓에 뇌물의 효용을 미국에 쓰려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미국에서 뇌물은 금물이요, 위법임을 알기 바란다. 물론 성경말씀에도 뇌물을 금하고 있다.


지난 수 년동안에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에 미 연방정부의 한 연구기관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수백만불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는 한국계 미국교수를 알고 있는데,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매년 한두번씩 연방공무원인 담당 프로그램 매니저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연구실적을 평가하곤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시에 함께 먹게 되는 단 몇 불의 점심값 조차도 연방공무원들이 꼭 지불하고 간다니 모두가 놀랄 일이다. 물론 그렇게 큰 연구비를 받거나 또 연구수행 중에도 뇌물로 단 1센트도 쓴 적이 없으며,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은 여러 유학생들이 실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준법정신과 정직성은 미국 문화가 크리스천 문화에 근거를 둔 때문이며, 이것이 미국을 움직이는 참 원동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뇌물이든 주고 받는 것이 크리스천의 성결함을 더럽히는 죄악임을 알고, 요단을 건너는 기적을 보기 전에 넘어 질 수 있는 거침돌이 된다는 것을 알자. 물론 서로에게 이권이 관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사랑으로 주고 받는 선물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며, 또 적절한 값의 선물은 서로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니 권장할 만한 일이다. 미국 사람들은 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작은 감사의 선물을 나누기를 진정으로 즐긴다.


성적으로 순결하기


십여년 전만해도 미국에서 싱글 유학생을 보기가 드물었는데, 이제는 유학생의 주류가 싱글들이 되어가고 있다. 유학생 중심의 도시마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 싱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따라서 이 젊은 싱글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고, 또 신앙 안에서 짝을 맺어주는 일은 이제 아주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으며, 매 KOSTA 년차 대회 때마다, 크리스천 남녀 싱글들 짝 지어주기 프로그램(예를 들면 “박수웅과 함께”)이 아주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고, 퍽 고무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할 수만 있다면, eKOSTA의 Webzine에 크리스천 싱글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여서, 서로 예수 안에서 장래의 배후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시도해 보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 칼럼을 통하여 과감히 제안하여 본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광을 위하여 크리스천 새가정의 탄생은 가장 축복할 만한 일이며,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에 바빠서 교제의 시간조차 충분치 않는 크리스천 남녀 싱글들이, 지역과 학교와 교회의 제한된 공간과 시간을 넘어, 만남의 장을 eKOSTA Webzine에 마련할 수 있다면, 일년에 한 번 뿐인 KOSTA 년차 대회시의 “박수웅과 함께” 프로그램을 연중무휴로 진행하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다소의 부작용도 예견될 것이나, 싱글들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 및 담당유학생 지도자와 잘 협력하여 운영한다면, 도처에서 적절한 크리스천 배후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민하는 수많은 결혼 적령기를 넘기며 안타까와하는 싱글 형제-자매들의 고민을 풀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하여 독자광장을 통하여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근에, 싱글들 중에서 결혼도 하기 전에 서로 혼전 동거하는 사례가 늘어간다는 충격적인 보고는 극히 염려되는 일이다. 크리스천 유학생 중에서도 이런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하니 아연할 따름이다. 물론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살면서, 결혼 적령기의 싱글 남녀가 서로 결혼하고픈 정도로 사랑하기에, 아예 돈도 절약할 겸 혼전 동거하고픈 유혹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최근 미국과 유럽의 특정지역에서 싱글 유학생들의 혼전 동거 생활은 이미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지역 목회자들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시편 119편 9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하리요,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말씀을 보면, 젊은이들을 어떻게 행실의 타락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까에 관한 시편기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즉,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만이, 그 행실을 깨끗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공부하면서 이루어지는 싱글 남녀의 교제는, 이 시편 말씀에 따라 삼가며 진행하는 최고의 싱글 남녀의 교제의 장이 될 법도하다.


한마디로 어떠한 구실과 변명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싱글 유학생 남녀의 혼전동거는 결코 성결치 못한 행동이요, 더욱 크리스천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속한 단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경고와 징벌은 언젠가 눈물 없인 받을 수 없는 쓴잔이 될 것이기에, 모든 싱글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이점에 더욱 유의하여 성적으로 성결하게 살라고 권하고 싶다. 정히 자신의 믿음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속히 결혼한 후에 계속 학업을 진행할 것을 권면하고 싶다. 또한 여러분의 주위에 그러한 동료와 친구들을 보거든, 사랑으로 권면하고 기도해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사는 성결한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물질의 성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물질과 돈을 합법적으로 벌어서 마음껏 쓰는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인 줄 믿는 크리스천은 돈과 물질의 취득과 관리에 성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것을 잠시 위임받아 누리며 쓰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에 따라 취득하고 또 사용해야 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성결의 부탁을 저버리고 물질의 탐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요단을 건너기 전 이스라엘에게 성결을 부탁하고 또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할례를 행하여 성결을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이라는 사람의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한 성결치 못한 행동으로 인한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인과 온 가족이 멸망받는 심판을 받았음을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수년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미국의 소도시의 가난한 타운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이민자 한 분이 있었다. 어느날 이분은 재정적으로 무리를 하면서, 꿈에도 갖고 싶던 고급 벤츠 승용차 하나를 사게 되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과 인종차별의 편견의 벽을 뚫고 넘어온 고달픈 이민 생활을 뒤돌아 보며, 한국에서는 타기 어려운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는 맛이란 마치 신분상승이라도 된 듯이, 그간에 당한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 보상해 주는 듯 싶었다. 알아 주는 이 없는 이민생활의 열등감도 다소 극복이 되는 듯 싶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가서 자신의 가게에서 일을 할 때에, 고객들 중에서 밖에 세워둔 벤츠 승용차가 당신의 차냐고 묻은 사람이 많았다. 좀 조심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후부터, 알아듣기 힘든 악센트를 고맙게도 잘 들어주며 친절하게 물건을 사주던 저들이, 이모 저모로 불평하기 시작하더니, 종내는 가게 앞에 세워 놓은 생명처럼 애지중지 여기던 고급 벤츠 승용차를 북북 긁어서 못 쓰게 해 놓고 말았다. 좀 과장이 섞인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돈이 있으면 미국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분수를 모르는 한인이민자의 안타까운 이야기이며, 무엇이 미국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요, “미국적인 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한국 이민자의 현주소를 담은 아픈 허상의 이야기이다.


특별히 미국 대도시에 거주하며 유학하는 유학생 중에 미국의 부호들도 나이가 들어서야 탈 수 있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많은 돈을 향락과 소비에 쓰는 귀공자 유학생들이 많다고 하니, 이또한 분수를 모르는 한국 유학생의 희극적인 허상의 이야기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의 왕자도 아닌 주제에, 분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한국 유학생에게 미국사람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탓이다. 한국의 부모가 부자이든 아니든 간에, 유학생 신분에 맞는 값싸고 실용적이며 튼튼한 승용차를 구입해서 타는 것이 바른 이치이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힘써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 또 밤낮으로 일하여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 건실한 유학생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껏 격려와 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물질에서 성결한 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이며, 가난한 자와 함께 가진 것을 나누며, 자신의 물질의 근원적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고 건실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오늘도 유학은 꿈에도 못 꾸고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는 고국의 동갑내기 동료들을 생각할 때에, 옷은 검소하게, 아파트는 안전하고 가급적 싼 곳에, 자동차는 분수에 맞는 실용적인 것으로 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빚더미 위에 앉아 있는 한국의 경제상황의 근본이유를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미국의 고등학생들조차, 분수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타는 한국유학생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는 것을 장래의 지도자들이 될 유학생들이 몰라서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미국에 전문 직장을 얻게되어도, 결코 유학생 때의 생활수준보다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미리미리 미국의 재정관리 방법과 “미국적 분수”를 배워둠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결하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요단이 마른 땅으로 열려지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와같이 모든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영적생활에 성결되고, 또 생활과 삶 속에서 성결을 이루어서, 학위취득 후에 고국에서나 또는 미국에서 전문직장에 종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행로에서 열게 될 요단강이 갈라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본 컬럼에서는 미국이라는 이질 문화 속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어떻게 실제적인 삶을 성결하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썼으나, 거의 대부분의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본 컬럼에서 지적한 성결치 못한 행위와는 관련이 없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나의 짧은 이민 생활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견해가 다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또 특정한 그룹이나 개인을 향하여 편향된 공박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음 회에서는 “요단에 들어서라”라는 제목으로 실제적인 미국 취업의 정보취득법, CV(이력서) 작성법, 강의 및 연구계획서 작성법 및 인터뷰 준비에 대하여 소개하고, 또 미국 취업의 문을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적극적이며 용기있는 크리스천 유학생의 취업 준비에 관하여 나누어 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