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성령이 오셨네

이코스타 2007년 3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작년 말, 예배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김도현 형제가 “성령이 오셨네”라는 2집 음반을 들고 버지니아를 방문했습니다.


그 의 프로필을 참고하면 80년대 주찬양 선교단원을 시작으로 주찬양 10집 ‘회복’, ‘송명희와 함께 하는 시편 23편’ 등 당시 복음성가에는 드물던 장르와 메시지를 선보이며 작곡, 편곡자로 왕성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4월 팔복의 김우현 감독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온 라인상에서 쉼을 주는 커뮤니티 버드나무(birdtree.net) 그늘 아래서 진실하고 소박한 풍경들을 노래하고, 작고 소박한 이들의 친구로 지내는 한편, 팔복 김우현 감독의 작품에 음악 프로듀서로 동역하는 과정에서 조용히 다가온 성령의 바람을 경험합니다. 도현 형제는 이미 고등학생 때 주님을 만났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이후 오랫동안 다시 화석화되어 가는 신앙 속에서 갈증 가운데 있었는데, 최근 말씀을 통한 깊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성령이 오셨네”라는 음반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개 인적으로 김도현 2집 앨범은 지난 여름 뉴욕 뉴저지 예배컨퍼런스를 마치고 박규태 목사 가족과 함께 머리를 식힐 겸 맨하탄을 다녀오는 러시아워 길에서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배 안의 성령의 역할에 대해 컨퍼런스 때 진지하게 나누었던 차라 “성령이 오셨네”, “예수는 나의 힘이요” 같은 곡들이 가슴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개 인적으로 몇 달 전부터 교회의 예배사역 안에 뭔지 모를 갈증을 느껴왔습니다. 사역을 시작한지 4년 만에 예배사역 시스템과 사역 원리, 그리고 사람들은 세워질만큼 세워졌고, 타 주로 확장되는 언투유 예배학교 사역과 600명 출석 성도에서 27개 팀, 40여명의 리더십, 150명의 평신도 예배 사역자라는 열매를 말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예배 안에서의 하나님의 깊은 임재와 성령의 역동적인 운행에 대한 갈증은 손에 잡힐 듯 말듯 했습니다. 사실 이 갈증이 작년 말 제 발목을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 내 안의 영적 부흥에 대한 목마름이 자라가고 있었는데 마침 성령님의 임재를 회복한 도현 형제가 저희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도 현 형제는 2004년 저희 교회에서 한 사랑나누기 집회 이후 해마다 한 두 번씩 자기 집처럼 1 2주씩 머물다 갔지요. 이른 아침마다 함께 산책하며 나눈 많은 대화를 통해 버드나무를 통한 그의 내적 외적 변화들을 감지했지만 이번 처럼 급격한 변화는 처음이라 처음에는 적응이 되질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변할 수 없는 그의 모습들에 와이프와 함께 놀라고 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5 일간 함께 지내면서 나눈 대화 가운데 선명하게 남는 것은 ‘성령에 대한 민감성’입니다. 그 이후 제 삶에 일어난 변화들은 작지만 소중합니다. 매말랐던 눈물이 회복됐고, 성령을 제한했던 사고 습관들, 관념 속에 쳐 박혀있던 복음과 성령에 대한 개념들이 하나 둘 회복되었습니다. 화석화 되었던 말씀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아울러 제안에 묶여 있던 사역, 미래, 관계의 짐들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 러한 내 안의 작은 변화들이 교회안의 예배 사역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습니다. 사역의 포커스가 관계 중심적으로 바뀌고 있고, 실재로 팀 안에 수 년 동안 쌓여왔던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변화들이지만 이러한 회복의 끝은 말씀 안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 ‘성령충만’과 ‘성령의 열매’에 이르겠지요. 성령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변화들… 도현형제를 통해 버지니아에 시작된 성령의 일하심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유정 목사 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디렉터, 좋은씨앗


P.S. 도현 형제가 쓴 2집 앨범의 서문…


“오 랜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15년가량을 전임 사역자라고 생각하고 지내온 시간들이 있었지만, 어쩌면 제 열정으로 제 욕망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발버둥쳤던 시절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름대로 진실한 풍경에 시선을 두려고 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믿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허무한 마음은 거둬지지 않더군요. 그 허무한 시절이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령님은 그러한 시절을 바라보시고 같이 탄식하시고 내버려두지 않으시더군요.


성 령님이 나의 삶에 강하게 임재 하셨을 때 제 안에 피상성은 날아가고 내 안에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를 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 보혈, 내 안에 화석화 되었던, 그저 그리워하기만 했지 한 번도 만지려고 노력도 안 했던 그 하나님 나라… 하나 하나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신.. 너무나 기본적이라 생각해서 건방지게 돌아보지도 않았던 너무나 귀한 단어들을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배우게 하셨고, 이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셨고, 노래로 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은 “부흥”이 되었습니다.”

[조한상] 2007년 1,2월에 읽은 책


2007/3
 


“이 책을 먹으라”, Eugene Peterson, IVP, 2006
2006년도 말,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보면, 유진피터슨의 책이 눈에 띈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의 두 번째 책 “이 책을 먹으라”를 올해의 첫번째 읽을 책으로 선택했다. “Eat this book”이라는 원제가 한국 번역 제목에 그대로 잘 드러난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 (Dr. Scott Dudley)의 2006년 여름 추천도서 목록에서였다. 아마 Scott Dudley목사도 유진 피터슨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다, 최근 ‘관상기도’나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많아진 걸 보면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 첫번 째 책인 ‘현실, 하나님의 세계’ 에서 유진은, 영성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령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영성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이 책을 먹으라”를 통해 성경을 피상적이 아닌, 몸에 소화될 수 있을 만큼 읽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나눈다.


“렉티오 디비나 (lectio divina)”


저 자는, 최근 성경읽기의 텍스트가 ‘자아’로 대치되어, 자신의 느낌대로 읽는 현실을 개탄한다. 특히,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있다. 다름이 아니라, ‘시장 헬라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약 5000개의 단어 중에 500단어는 신약성경에만 고유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단어들의 의미를 영해하려는 노력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다른 헬라어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였기에, 오리겐 같은 초대교부는 이 단어를 영해하여, ‘실체를 초월하는 떡’이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옥시린쿠스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문서를 분석한 결과, 이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일상 가운데 서민들이 사용한 헬라어로 문헌에는 남겨져 있지는 않은 저급한 헬라어였다고 한다. 그 의미는 그저 ‘신선한’ 또는 ‘오늘 먹을’의 의미였다고… 이렇게 실생활 속의 단어로 쓰여진 성경을 우리는 무엇인가로 덧입히면서,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경고한다. 모두들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고픈 책이다.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 송인규, 부흥과개혁사, 2006
“저희 젊었을 때는 송인규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송인규 목사의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 2003년 KOSTA/USA에서 ‘크리스천의 책읽기’라는 세미나를 통해, 당시 복음과상황의 편집장이었던 서재석 대표의 표현이다. 내가 지내온 대학 시절은, 송인규 목사의 그런 영향력의 막바지에 있었다고 할까…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라는 기독교 세계관 입문을 위한 소책자라던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QT관련 책들은, 나의 대학 시절에도 필독 도서로 꼽혔었으니까 말이다. 그 이후에도 ‘세마리 여우 길들이기’라던가,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 등의 책으로 청년들에게 꾸준한 도전을 주고 계신 송인규 목사의 최근 도서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맹목적인 신앙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성경을 기준으로 바른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 예를 들면, ‘십일조는 꼭 교회에다 내야하는가’, ‘고지 점령론과 낮아짐’과 같은 현실적인 주제부터, ‘가계의 저주’, ‘악의 문제’ 등 기본적인 기독 변증법에 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무려 40여 가지의 주제를 짧은 책에서 모두 다루다 보니, 깊이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분별력’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넘어 ‘왜 해야하는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으로 넘어가지 못한 점도 아쉽다.


 “내려놓음”, 이용규, 규장, 2005
2006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읽지 않을 수 없어서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고, 평이한 간증문이기에 쉽게 마칠 수 있었다. 나도 평탄치만은 않은 유학생활을 한터라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던 만큼, 답답한 면도 많았던 책. 그냥 많이 아쉽다.


 

“교회사를 통해 본 성령의 표적”, Howard Snyder, 나단, 1994
이 책의 일차적인 자료는 노르트담 대학에서의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며, 출판을 통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문에서>


하 워드 스나이더의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몬타나이즘을 시작으로 해서, 각 시대에 성령의 표적이 어떤 형식을 통해 나타났는지를 짚어가면서, 현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들을 이야기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 진센도르프 백작의 모라비안주의, 존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 등의 시작과 상호 관련성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 가면서, 만민제사장직의 중요성과 소그룹의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기존 조직을 인정하는 ‘교회 안의 교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책을 읽어보면서, 왜 하워드 스나이더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나 ‘참으로 해방된 교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교회 DNA’ 등에서, 교회의 갱신을 기존 조직을 강하게 부인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꼭 한번씩은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김영사, 2004
우리 둘째 아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현서와 함께 보던 책에는 세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서로 관련된 것을 연결하라고 했다. ‘꽃, 엄마, 나무’ 중에서 관련된 것을 고르라는 문제에 대해 현서는 ‘꽃’과 ‘엄마’를 골랐다. 이유는 엄마가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뭐… 딱히 틀린 접근은 아닌데, 문제를 채점한다면 분명 오답이다. 문제에서 요구한 것은 식물이라는 관련성 속에서 ‘꾳과 나무’를 연결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를, 동양과 서양의 사고차이를 통해 설명한 책이 바로 ‘생각의 지도이다.


오 랜만에 읽은 비기독교 서적.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성경공부 모임의 한 형제를 통해서였지만, 결국 책을 구입해 읽게 한 것은 작년 코스타에서 양희송 실장의 ‘기독교 세계관’강의를 듣고 나서였다. ‘원숭이-바나나-사자’ 중에서 관련된 두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동양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원숭이-바나나’를 고르는 반면, 서양사람은 ‘원숭이-사자’를 고른다고 한다. 이유는 동양사람은 ‘관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반면, 서양사람들은 ‘분류’의 차원으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란다. 또한 서양사람은 세상을 직선 구조로 이해하는 반면, 동양사람은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다나.


미 국에 나와 살면서, 경험하는, 동서양 사고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동서양의 차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철저하게 서양적이었으니, 동양적 사고를 바로 해석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폴 스티븐스, 죠이출판사, 2005
이 야곱의 이야기는 당신과 내가 하나님께 발견되고 생명으로 가득 차기 위하여, 어떤 다른 장소에 있거나, 다른 가정에서 성장하거나, 다른 특별한 관계를 가지거나, 다른 일터에 있거나, 다른 조직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영성은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 삶의 어떤 경계선 안으로 제한되?않는다. 영성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섦의 어떤 경계선 안에 있는 특정한 구역이 아니라 매일의 삶 한복판에서 우리는 찾으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 땅에 뿌리내린 영성을 지닐 때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며 온전한 인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야곱에게서 살펴본 것 처람) 일생에 걸려 일어나는 과정이다’ – 후기에서…


작 년에 폴 스티븐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복음과 상황에서는 그를 인터뷰해서 기사화했었다. 그 인터뷰 내용 중에 ‘평신도는 왜 설교할 수 없나’는 질문에 대해, 평신도 신학의 대가답게 ‘평신도도 당연히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던 내용이 기억난다. 그 인터뷰 중에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하필이면 야곱입니까’하고 물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는 ‘야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답했다.


폴 스티븐스는 이 책에서, 야곱의 인생을 통해 삶의 각 부분에 – 출생, 결혼, 섹스, 일, 죽음 –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구약의 인물을 중심으로 쓴 책에서 흔히 발견되는 실수라면, 그 사람이 했기에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하겠는데, 폴 스티븐스은 야곱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뒤에서 일하시는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놀라왔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지금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고 있지’라는 착각을 계속할 만큼 필체의 유사성을 느꼈다. 그 만큼 이전의 폴 스티븐스의 책 (예를 들어, ‘평신도신학’이나 ‘그 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의 필체와는 사뭇다르다고 할까.


 “부흥”, 마틴로이드 존스, 복있는사람, 2006
“다른 모든 책은 덮어두고 이 책부터 읽으라!” – 책의 표지에 적혀 있는, 조금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이 문구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나 자신의 표현이 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다른 모든 책을 덮어두고 이 책부터 읽’었으면 한다.


나 는 이상하리만큼 마틴로이드 존스의 책을 별로 읽은 것이 없다. 이유야 여럿있겠지만, 우선 로이드존스 목사의 책은 양이 많다. 강해 설교를 묶은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한 두 문장으로도 표현될 주제를 한편의 설교로 풀어 놓았으니 분량이 방대해 질 수 밖에… 하지만, 나의 신앙 성향을 잘아는 형제 한명이 내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권해주었다. 내가 가진 구원관 등이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주장과 비슷하다나.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장 눈에 띄는 책이 바로 ‘부흥’이라는 책이었다. 평양부흥 100주년인 2007년을 맞아, 모두들 ‘부흥, 부흥’하는 시점에 ‘부흥’이라는 책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척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부흥’이라는 관점을 바로 안다면, 내가 가진 ‘부흥’에 대한 선입견들이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 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른 접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정의한 ‘부흥’ – 하나님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 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런 부흥이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임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결국, 부흥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 부흥을 기대하며, 회개하고 경직된 교리에서 자유로와져야 하며, 부흥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절차를 거치면 부흥을 올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라는 로이드존스 목사의 목소리는 귀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철저하게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이 결여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말로 메마른 무엇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기대하며 엎드리련다.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배기찬, 위즈덤하우스, 2005
작년 어느날, 높은 뜻 숭의교회 웹 사이트에서 문희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설교를 마친 문희곤 목사는 뜻 밖의 책을 한권 소개했는데, 바로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였다. 담임 목사인 김동호 목사가 강력 추천하는 책이라고 하면서, 출판사와 계약해서 조금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로 했다고 까지 광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책은 결국 2006 성서한국 추천도서 목록에 조금은 생뚱맞게 올라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책 의 뒷면에 큼지막하게 나와있는 추천인 이름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말에서, 일단 현 정부의 통일 정책과 어느정도 일치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경공부 모임의 한 형제에게 빌려서 읽었는데, 컴퓨터를 전공하는 그 형제가 말하기를 ‘한국 근대사를 잘 몰라서, 책을 읽는데 상당히 어려웠어요’했다. 결국 이 책을 읽다보니, 그 형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한국 역사에 대해 무식했었던가. 한국 역사를 이스라엘 역사만큼만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어떤 책을 읽어도 자신이 가진 선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선지식의 부재에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역사에 대한 각 평가들을 평가할 어떤 명확한 기준도 가지고 있지 못한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런 평가가 옳은 것일까, 아닐까… 답답함을 꾹참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만큼 시간도 많이 걸렸고…


내 용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려고 한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그냥 놔두면 대륙세력인 중국으로 기울기 쉬우니, 의도적으로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 쪽과의 균형을 잡아 나가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아시아의 중립국의 형태로 나가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한다. 북한과의 문제에서도, 북한을 고립시키기 보다는 밖으로 나오게 하여 진화시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을 아직 잘 정립하지 못한 나였기에, 이 책의 주장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한민족’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네가지 사랑”, C.S. Lewis, 홍성사, 2005
C.S. 루이스의 또 다른 책 ‘네가지 사랑’. 작년에 ‘인간폐지’를 읽고 오랜만에 C.S. 루이스의 책을 접했다. 그냥 제목만 봐도 추측할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한 네가지 정의를 설명한 책이다.


선 물의 사랑이란 자신이 희생하면서 댓가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필요의 사랑이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듯이, 선물의 사랑은 고귀하고, 필요의 사람은 저급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필요의 사랑이 어찌 저급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한가지 사랑의 형태를 덧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감상의 사랑 (appreciative love)라는 것으로, “대상을 좋다고 판단하고, 일종의 의무감으로 그것에 주목하며, 설령 즐길 수 없다 해도 그것이 그대로 존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은, 단순히 사물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하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첫번째 종류는 ‘애정’인데, 이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아이의 동네 아저씨에 대한 사랑 등에서 나타난다. 애정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결점을 눈 감아 주며, 다툼 후에도 쉽게 되살아난다. 그런 면에서 자비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애정은 때로는 선물의 사랑을 위장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애정이 사용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은 그런 애정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선물의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하니까. 사랑의 두번째 종류는 ‘우정’으로, ‘뭐! 너도?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사랑이다. 주로 공통의 관심사와 목표를 가질 때 생겨나게 된다. 서로의 사적인 문제보다는, 공통점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좀 더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 소속 자체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독선으로 나타날 위험성이 많다는 내용은 무척 와 닿았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의견보다는, 그 모임의 친구 한명의 의견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니까. 그리고는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네가지 사랑’은, “역시 C.S. 루이스!!”라는 감탄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책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랑에 대한 오해와 위험성을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