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7, 2008 | 삶과 신앙/박길홍 성경이야기
미국으로 유학와서 공부하는 중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것과 참 다르다는 것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아무때나 자유롭게 질문하던 것을 보면서 일종의 “질문권”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것이 미국의 수업에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행위가 거의 없는 것도 색달랐습니다. 강의계획안(syllabus)이 그대로 지켜지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과제물을 제출할 때, 내용도 내용이지만 포맷과 스타일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멋진 형용사들을 늘어놓은 일반적인 진술(general statements)에 내려지는 혹독한 평가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멋있게 “썰을 풀어놓”으면 어느 정도 –경우에 따라서는 꽤 좋은–학점을 받고는 했으니까요.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겠지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 가운데 한 분은 학생들이 설교에서 전문용어(그분의 표현으로는 “Big Word”)를 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만약 설교 중에 “은혜”라든가 “경건”이라든가 “거룩”이라든가 “종말적” 같은 말들이 적절한 설명이 없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지적하곤 했습니다. 제 식으로 그 분의 뜻을 옮겨보자면 그런 말들은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listener-friendliness”라고나 할까요)가 부족해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설교자나 그와 많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지(심지어 그런 사람들끼리도 같은 말을 다른 내용으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날 처음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과는 거의 그 내용을 소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커다란 단어들은 많은 내용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빈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큰 것같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려하면 많은 것들을 살펴야 하고, 더 명료한 생각에 이르를 때까지 자신의 두뇌를 괴롭혀야 하고, 그러려면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설교학자로서 유명한 크래덕(Fred B Craddock)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경험을 가끔 소개합니다. 설교학 시간에 앞에 나와 설교하는 학생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설교한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만난 분은 정말 놀랍도록 경건하고 신실하며 사랑에 가득찬,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닮은 분이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반응은 이렇다는군요. “그만 입 다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말하게. 그 이가 얼마나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인지 느끼는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느낄 일이야.” 사실 신실, 경건, 그리스도를 닮음, 이런 것들은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중에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자연히 떠오르는 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부질없는 부사나 형용사를 될수록 삼가고 동사를 많이 사용할 일입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형용사는 빈약하고 동사가 압도적으로 풍부한 말이라는 것도 생각해 봄직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18장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모세는 그를 맞으러 나온 장인 이드로에게 “하나님이 모세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말합니다. 이드로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입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모세는 장인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 곧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하신 모든 일과, 그들이 오는 도중에 겪은 모든 고난과,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져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다 (8절).” 성경은 이드로의 반응도 전합니다. “그러자 이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려고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전하여 듣고서, 기뻐하였다. 이드로가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와 바로의 손아귀에서 자네와 자네의 백성을 건져 주시고, 이 백성을 이집트 사람의 억압으로부터 건져 주셨으니, 주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일세.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교만히 행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치신 것을 보니, 주님이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시다는 것을 이제 나는 똑똑히 알겠네.’ 그리고 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자세히” 말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언사는 오히려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이드로의 입에서 나왔습니다(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모세의 자세한 이야기는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도록 깊은 생각을 거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신 이야기를 대충 말하고는 온갖 형용사를 늘어놓으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드로로서는 사위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을망정, 왜 하나님이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인지 마음으로부터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공감은 강요하거나 쥐어짜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세가 공과 힘을 들인 것은 하나님에 대해 형용사를 동원하여 찬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일을 “자세히” 기억해내어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하나님의 위대함은 자연히 드러나게 마련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이 겪은 일에 대한 감동이 그 자신에게 먼저 생생했기 때문일 터이지만, 그 감동을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과 이스라엘을 위해 보존하려고 해도 사건 자체를 낱낱이 기억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 뿐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사건 자체에 대한 자세한 기록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일에 관한 기록일 것입니다. 얼마 안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을 복음서가 가장 공들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번화한 항구 도시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전도자로 도착했을 때 속으로 다짐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할 것, 멋들어진 말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애쓰지 말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에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세히 전하면 하나님이 왜 찬양받을 분인지 자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많은 형용사가 동원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자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 빈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려한 수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게으름과 안일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이야기는 많은 기적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출애굽 뿐이겠습니까? 한 영혼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빠져 나오는 데는 반드시 엄청나게 놀라운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꼭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생아를 돌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어느 대학병원에서 한 달동안 일할 때 한 교수가 강의 중에 한 말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치유될 수 없던 병이 나으면 기적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한 아기가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라고 느낍니다. 배우면 배울 수록 아기가 잘못 될 수 있는 단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정상아가 하나 태어나려면 그 모든 과정이 다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닌지요.” 아이 하나가 태어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가 그만큼 더 드러날 테지요. 한 영혼이 거듭 나는데 육신적인 출생보다 그 신비와 놀라움이 덜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말할 것 없이 우리 각자가 “출애굽”하는데도 틀림없이 많은 놀라운 손길이 개입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말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C S 루이스,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그리고 누구보다도 바울 사도 같은 이들은 많은 공을 들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중에 바울이나 어거스틴 같은 분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나 아이들이 놀면서 하는 말을 따라 로마서를 펼쳐보게 된 일같은 신비로운 일때문에 회심한 것처럼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훨씬 더 공을 들여 기록한 것은 그 이전의 긴 기간 동안 자신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특히 7장은 그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든가 로마서를 펼쳐보게 된 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지막 손질 같은 것입니다. 그들 주변과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간섭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이 마침내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때 행하신 마지막 손질(finishing touch)이지 그것들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도, 오직 그 사건들 때문에 그들이 돌아설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뿐 아닙니다. 로마서 11장 끝부분의 장엄한 송영 같은 것은 또 어떻습니까? 바울 사도가 로마서 1-11장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자세히” 살펴본 뒤에 그 속에서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온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세히” 살펴볼 때 하나님의 지혜, 그 분의 주권, 그 분의 은혜와 그 분의 자비가 드러났고, 그랬을 때 그는 바로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로마서 11:3-36) 바로 그 하나님께 바칠 제사(로마서 12:1)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위 신앙의 위인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베푸셨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오는데는 참으로 세밀하고도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업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9).” 이러한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되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업적을 자세히 선포할 때 하나님을 더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저는 앞서 말한 사람들이 위대한 신앙인이라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만한 것이 있었다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사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처럼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억해냈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빌려쓰는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큰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쓴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Everyone has a story to tell.”
May 6, 2008 | 기독교적 세계관/신선묵의 Christian Leadership
최근에 한 교수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그 전에 수업을 듣는데 달라스 월라드 교수가 특강 강사로 오셨는데 얼마나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편하게 하시는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월라드 교수의 글을 직접 읽어보니까 아마도 하나님 안에서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영성 훈련으로써 “고독”와 “침묵”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촞점을 맞추는 것이다. 월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독 하기란 장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취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손을 떼는 것이다. 고독 하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침묵하기를 배운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고요함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의 그분의 소유로 족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이 세상이 내 아버지의 세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그 시간 속에서 고독하고 침묵하는 것은 더 더욱 쉽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에서도 우리는 분주하게 무엇을 해야하고 또 무엇인가 말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촞점을 맟추기보다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침묵 속에 거하기 보다는 많은 말로 시간을 채우려는 때가 있다. 하나님 안에서 고독의 시간을 갖기보다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우리를 내려놓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의 임재 속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이 고독이요 침묵이다.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왜 사람들이 홀로 있기와 침묵 하기를 어렵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가 파스칼의 “팡세”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 조건으로 타고난 빈곤으로 너무 비참해서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위로가 안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대신에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끄럽고 바쁜 것을 지독히 좋아한다. 그래서 고독의 즐거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또 다른 은밀한 본능, 원래 좋았던 본성의 잔재가 있어서 실제로 행복이란 바쁜데 있지 않고 오직 안식에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본능이 앞에서 말한 분산 욕구와 충돌하고, 그로 인한 생각의 혼란 때문에 사람들은 흥분 속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닥쳐오는 난관을 모두 이겨냄으로써 안식의 문이 열려야만 지금 내게 없는 만족을 얻을 것이로 생각한다.”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안식을 구하면서도 안식을 주는 고독하고 침묵하기를 두려워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또 안식을 구하고 있기에 그 바쁜 일들을 빨리 극복하고 그 다음에 안식을 갖겟다고 생각하지만 또 시간이 있으면 다른 바쁜 일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고독의 시간을 갖고 또 침묵하고 있는 사람은 어찌 보면 공동체와 사람들과의관계를 피하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관계와 의사소통을 만든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고독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누릴수있고 침묵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첫째, 우리는 고독을 선택함을 통하여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있기를 배운다. 우리는 고독을 통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고독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모든 껍데기를 벋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하여 자신을 직면할 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게 되고 만나게 된다. 고독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갖고 그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다. 자신 안에 안식과 평안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 다른 사람의 참 모습을 대하고 만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고독 속에서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참 모습을 감당할 힘이 없기에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만 머문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다.
둘째, 우리는 침묵을 선택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한다.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말이 정리되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 대화로 나아갈수가잇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침묵을 통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알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나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 말의 표현 배후에 있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 침묵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와 마음이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 속에 품어진 그 뜻까지 아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대화란 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실천하였던 영적 훈련인데 우리 교회안에서 많이 잊혀진 훈련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영적 훈련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또 사람들과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란다.
May 3, 2008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달렌 첵이라는 여성 예배인도자를
소개합니다. 현재 전 세계 예배찬양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호주의 힐송쳐치의 예배 담당 목사입니다. 그녀가 작곡한 “내 구주
예수님(Shout to the Lord)”이란 곡은 1993년 처음 발표되어 전 세계 50여개 이상의 음반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녹음되었습니다. 그가 속한 힐송교회에서 해마다 제작되는 경배와 찬양 실황 음반은 순식간에 전 세계 교회에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그녀의 젊은 시절이 문득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책을 뒤져보았더니, 달렌의 시작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단지 주님을 알기 위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커피를 타고, 심부름하고, 무슨 일이든지 할 일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교회에 헌신한 한 자매에 불과했습니다. “내 구주 예수님”은 그런 그의 헌신의 여정에서 너무나 지쳐있던 상황에서 탄생한 곡이랍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곳에 자신의 시간과 관심, 에너지와 돈, 그리고 사랑과 헌신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달은 그녀는 결혼하고 2명의
자녀를 키우면서도 교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원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오토바이 판매점을 하며, 라디오, 텔레비전 광고,
배경음악 등 닥치는 대로 노래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런 삶에 지치고, 좌절을
느끼던 어느 날 아침, 은행에서 잔액 초과 고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드리기로 약속했지만, 내
꼴 좀 보세요. 하나님, 더 이상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어요, 하나님 당신의 약속은 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숨 막히는 좌절감 속에서 갈급한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시편 97~100편에서 강력한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20분 만에 흘러나와 완성된 곡이 바로 “내 구주 예수님” 입니다. 당시 이 곡을 들은 담임
목사는 이 곡이 전 세계에 불릴 것을 예언했고, 결국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비록 달렌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과정에서 고통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녀를 보석과 같이 연단하셨습니다. 결국 그녀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예배사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제가 한빛지구촌교회에서 풀타임
예배디렉터로 헌신한 지 벌써 6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배사역에 헌신한 봉사자들도 30명에서 160명으로 늘어났고, 팀도 30여 팀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역에 뛰어든
각 사람이 어떠한 헌신을 주님께 드렸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매주 남보다 일찍 나와서 남보다 늦게 교회 문을 나섭니까? 교회 사역을 위해 평일에도 시간과 땀을
흘려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 때문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헌신은 허공을 때리는 것입니다.
달렌이 보여 준 주님을 향한 그
순순한 사랑처럼, 각자의 헌신의 모양은 달라도 제각기 사랑의 분량을 담아 드리는 거룩한 지역교회 봉사 사역의 현장마다 눈물과 땀방울의 증거들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노동자 1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발을 닦아 드렸을 때,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예수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막 14:9)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할 것이라며 자랑하셨습니다.
이 처럼 매 주일마다 한 곡을
부르더라도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의 찬양, 주일학교 한 아이를 대할 때도 힘을 다한 사랑과 헌신의 봉사,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님께 드리는 자세로 임할 때, 그 상급이 하늘에 차곡차곡 쌓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헌신을 기뻐하신 예수께서 온 세상에 그 헌신을 자랑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화음이 아름답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훌륭한 교재를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질 좋은 음식을 준비했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헌신의 문제’입니다. ‘순종의 문제’입니다. ‘드림의 문제’입니다. 코스탄 여러분, 다시 한 번 기초로
돌아갑시다.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 목사, CCM 남성듀엣 좋은씨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