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 “평신도 사역의 진정한 의미”

              요사이 우리 기독교 교회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평신도 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주로 전문 기독교 사역자에 반하여 종교를 직업으로 갖지 않은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 쓰는 말인것 같다.  현대 교회에서 이들 평신도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재평가 하는 일과 더불어서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많은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평신도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역에 관여하게 하고 또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경향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적극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삶과 사역 그리고 지도력에 대하여 좀 더 깊은 본질적인 의미의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 이 글을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평신도들의 참다운 가치는 소위 말해서 교회 안과 종교적인 일들 속에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 그 참다운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김진홍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식당을 운영하는 성도님을 심방하러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큰 식당을 잘 운영하시는 분이신데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잡고 하는 말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 일이년만 더 식당하고 그 다음에는 다 접고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지금 하고 계시는 이 식당 일, 이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여 주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라고 반문 하였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언어 중에 바로 이 성도와 같은 것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종교적인 일이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한 선교 단체의 사역자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들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각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 교수, 그리고 전문가들이었다. 그 분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 공부를 시키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정말로 이중으로 탁월한 분들이셨다. 그런데 수업 중에 그 분들에게 자신들의 사명과 사역과 은사를 정리하게 하는 숙제를 드렸는데 그 분들이 (엄격하게 말하면 사이드로 하는) 종교 사역만을 쓰고는 자신들의 직업 분야에 관하여서는 별로 영적인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은사가 탁월한 분야이고 그들의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쓰는 분야이고 상당히 가치가 있는 일들이지만 그 일들 속에서 영적인 사명 의식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사역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는데 반드시 건강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물론 세상 속에서 자기 분야에서 탁월하던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문 종교인도 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신학적 선교학적으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자체에 영적이고 선교적인 의미를 충분히 부여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라면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일만이 영적인 가치가 있고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는 종교적인 일과 상응하는 영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신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그들을 사역으로 이끌려는 많은 노력들이 현대 교회에 있다. 그런데 그 경향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주로 종교 전문인들이 교회 사역을 독점하던 것에서 평신도들도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옹되는 것 같다. 주로 평신도들이 종교 전문 사역자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있는 일들로 봉사하는데 이런 평신도 사역은 평신도들의 인력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더욱 끌어들리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종교 활동에 끌여 들인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세상 속에서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쓰는 그들의 직업 (비종교적인 일)은 교회와 종교적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평신도의 회복은 교회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 동원이라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온전한 평신도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이라고 볼 수 는 없다.

 

            둘째로 좀 더 열려진 자세로는 평신도 사역이라고 했을 때에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 나아가서 역할을 하도록 가르친다. 즉 선교적인 삶을 살 것을 도전한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가능하면 종교적인 일들을 하도록 훈련시키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사업체를 하지만 그 속에서 손님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야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직장 속에서 예배를 보고 신우회를 만들고 교회가 아닌 세상, 즉 직장 속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동료들에게 전도한다. 앞에 것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태도는 평신도를 새로이 평가하고 또 그들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그 자체를 종교적인 활동과 동일한 선상 위에서 보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에 비하여 나는 평신도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일, 그 자체가 교회 안에서 혹은 밖에서 하는 종교적인 일과 동일한 영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을 종교적인 역할과 활동에 더 많이 끌여들이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 속으로 더 많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은 종교적인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 속에서 담당한 역할 자체에 충실한 것이 선교적인 삶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 오해 말 것은 앞의 두 가지 의미에서의 평신도 사역을 가치가없다거나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가치가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평신도들의 중요한 가치는 가치는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속에서 주워져야 하는 것이다. 선교란 종교적인 일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일들을 바른 영적인 자세를 가지고 감당할 때에 선교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세상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들을 진실되게 감당할 때에 그들이 도리어 기독교의 진리에 매료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영적으로 세상 속에서 기능하는가가 중요한 선교적인 이슈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을 갖게 하고 세상 속에서 하는 일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의 삶을 드린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의식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평신도의 삶과 일에 대하여 이런 의미를 부여할 때에 평신도는 더 이상 덜 헌신된 그리고 앞으로 진짜 헌신해야 할 (다시 말해서 전문 종교인이 되어야 할) 이등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아니라 전문 종교인과 동등한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전문 기독교 사역자와 평신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역할과 기능의 차이이지 가치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꼭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또 힘을 얻지만 교회 속에만 머물러있는 나약한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고 세상 속에서도 종겨적인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야와 일터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적어본다. (lead2serve.tistory.com)

 

 

[이유정] 커피전문점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

지난 3월 말,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영주권 분실로 귀국 일정이 한 두주 늦춰진 붕뜬 상황에서
사랑하는 교회와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10년의 세월이 주는 단절감에 어디를 가나 낮선 건물과 도로,
새로운 시설들이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방문 2주째 화요일, 대사관에서 기대했던 출국 일자 답변을 듣지 못해 낙망해 있던
날…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2주 만에 저녁 약속 전 두 시간 넘는 여유가 있었고
허탈한 제 발걸음은 인근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 제목들이 눈에 띄었으나 다 바람 같았습니다.
 
무엇을 볼까 10여 분간 씨름하다가 표사는 줄에도 섰지만
결국 마음이 내키질 않아
포기하고 바로 옆에 있는 영풍문고로 향했습니다.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아주 작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인재연습”이라는 고전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수 많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로렌스 형제의 편지 내용입니다.
이 책을 들고 서점 안에 있는 작은 커피전문점 구석에 앉아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보통 삶이 최고조에 있을 때나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분주한 집안 일, 지친 사회 활동,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심지어는 교회 사역이라는 종교적 활동 속에서도
일에
파뭍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 한구석에 있는 허접한 주방일을 십 수년 하면서
바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르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나 일상의 모든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읽어 내려가다 제 마음을 때린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을 시작할 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살피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모든 멸시를 받아 마땅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도 없으며
온갖 불행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는 건강을 잃고 내적, 외적으로 몹시
괴롭겠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차후에 사람들로부터 괴로운 일이나 유혹, 반대

그리고 반박을 당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오히려 순수하게 그 일들을 감수하고 감당해야
한다.” (p. 52,53)
 
허탈감에 정신줄 놓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한 영화관람 발걸음…
한국 오면
영어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편하게 한국 영화 하나 보고 싶었던 작은 바램…
그것 마저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제 영혼에 맺혔던 앙금
하나를 풀어주셨습니다.
 
지난 10여일간 한국 땅의 예배회복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 드러난 열매들을 보면서

제 안에 의로운 삶, 거룩한 삶에 대한 일종의 영적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주께 헌신하는 나름 ‘의인’의 간절한 바램을
외면하시고
왜 이런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로렌스 형제의 이 평범한 문구 하나에 제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높아졌던 제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성령의 깊은 터치를 경험했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추구처럼, 소란스럽고 복잡한 일상의
한 커피전문점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채워진 눈물의 은혜를 겸험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바쁘고 급한 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색다른 은혜의 시간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CCM 듀엣 좋은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