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 안에 수년에 걸쳐 뜨거운 감자와도 같이 논의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한다. Open Theism, 이른바 열린 신론으로 불리우는 신학적인 주장이다. Facebook에 존재하는 열린 신론을 논의하는 이들의 페이지에 가보면(http://www.facebook.com/group.php?gid=2257680371&v=wall) 다음과 같이 열린 신론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1) God and creatures enjoy mutually-influencing relations
2) the future is partly open and God does not fully know or settle it
3) love is uniquely exemplified by God and is the human ethical imperative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많은 이에게 논쟁의 물꼬를 터준 것은 2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

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시고 미래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사의 미래를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미래의 결과가 결정될 수 있도록 미래의 결과를 아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이제껏 이해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새로운 주장이었기에 많은 신학자들의 반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의 D.A. Carson 교수가 쓴 What does God know and When does He know it?이란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까지 열린 신론은 우리가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각도에서 편의를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주의와 경계를 띄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의 논쟁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각기 나름의 성경적 밑바탕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 각각의 주장과 성경적인 예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양쪽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교리적인 틀에 갇힌 하나님에 대해 암기하는 수준으로 살다가, 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저는 열린 신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난 311일에 일본 동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현장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은 거대한 재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열린 신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그렉 보이드라는 사람이 쓴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 저에게는 복음 전도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신학자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이 29번 동안 서신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http://www.yes24.com/24/goods/2142711?scode=032&OzSrank=1)

 

오늘은 그 책에서 한 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질문을 접근하는 아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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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 게냐?

 

그렉에게

 

너와 무슬림 학자와의 토론회가 잘 끝났다니 매우 기쁘구나. 할 수 있으면 테입을 하나 구해 보내주렴. 비디오테입을 보내주면 더 좋겠다. 꼭 보고 싶구나.

 

너의 지난번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여러번 읽어야 했단다.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톨릭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운 많은 것과 반대되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는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성경의 권위자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아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느냐? 네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인정하마. 그 전통적 견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너의 견해가 그저 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구나.

 

어쨌든 너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지 않도록 미리 보장할 수 없는지 상당히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자유에 대한 너의 견해로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견해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또다른 심각한 난점이 있다. 어떤 악들은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결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직접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왜 기근, 지진, 산사태, 에이즈, 기형아 등등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시지? 분명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에도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외하고는 비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라면, 자신의 피조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1989 511

너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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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께

 

지난번 편지에 늦게 답장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곳 베델대학에서 학기말을 지내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었답니다. 먼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께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결정하는 미래의 일과 행동에 대해 모르신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며,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사람들이 내릴 자유로운 결정들에 대해 미리 알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들에 의해서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해서건 미래의 어떤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자유로운 행동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공개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창조에는 감수해야 할 모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견해가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이 견해는 매우 성경적이에요. 세세한 것들을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따분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는 성경속에서 하나님이 미래를 어느 정도 개방적인 것으로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미래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심지어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합니다(32:14; 삼상 15:11;  18:7-10; 26:19를 보세요). 하나님이 미리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계셨다면 물론 이런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인 견해는 보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미래 전체를 알고 통제하는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제가 판단하기로는 성경적인 것이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재해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재앙들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세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첫째로,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과 고난은 자연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 인한 결과이며, 심지어 대부분의 자연 재해들로 인해 일어난 고통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최소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근에 대해 생각해 보지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굶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필요한 양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의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는 것뿐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인들은 세계 인구의 7%밖에 안되지만 세계 자원의 절반 이상을 소비합니다. 평균적으로 후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덜 소비하는 반면, 선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더 소비한다고 합니다.

 

또 정치적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연적 악이 예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세요(이디오피아의 비극은 분명 예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군비 경쟁이 없었다면, 세계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 돈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투자할 만큼 충분히 마음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방글라데시의 홍수들조차 환경과 복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저는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많은 것이 언제나 자연적인 악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악한 마음들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가지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어 보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를 받쳐주는 바위는 발끝이 채여 넘어질 정도로 단단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우리가 그것을 뚫고 떨어질 정도로 얇아야 하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물은 그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유지되게끔 되어있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그러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실로, 어떤 피조물의 긍정적인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실재가 지니는 한계들은 실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것을 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매사가 그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물의 제한되고 독특한 특성과도 아주 조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조된 세상의 제한적인 특징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게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듯이 보이는 몇몇 자연적 악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예를 들어, 기형아들은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유신론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제 세번째 사항을 살펴볼께요.

 

아버지!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될 거에요.

 

이런 존재들을 성경에서는 천사들 혹은 마귀들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흰옷을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날개 달린 존재나 붉은 뿔이 달리고 쇠스랑을 들고 있는 괴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에는 그런 바보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답니다. 그들은 또한 정사권세라고도 불리지요. 그 말은 구체적인 실체이기 보다는 영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어쨌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이해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자유로우며,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유를 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영적 세력들, 굳이 말한다면 마귀들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것에 대적하는 전쟁 상태에 있으며, 지구는(아마 다른 곳에서도 역시) 그들의 전쟁터입니다. 성경에는 이들의 사랑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인간의 잠재력을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여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 역시 훨씬 더 컸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사단은 한 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루시퍼였습니다. 그 말은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희석되지 않은 악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규모의 히틀러입니다! 그의 영향과 또다른 마귀들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견해로 보면, 세상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문자 그대로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셈이죠. 오늘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전한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더이상 창조주만이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한 편으로는 그처럼 아름답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점차 더 악몽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선과 악의 충돌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무관심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냥 아름다워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선한 계획을 좇는 한 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작전처럼 사탄의 일제공세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재적인 무기가 되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됩니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8).

 

저는 이러한 마귀적 세력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왜곡시키고 압박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진상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필연적인 한계들 또한 사람들이 악한 의지에 호소함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악은 이와 같은 존재들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인 셈이지요.

 

아마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 다소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저도 분명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에게는 성경이 참이라고 생각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영의 세력만 봐도 오직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자연적 악이 함께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저에게는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답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질문들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사항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할께요.

 

1989 529

소망을 가지고, 그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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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부흥의 전조는 예배회복

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예배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예배에 실패해서 망했다. 14세기 종교개혁은 그 핵인 예배개혁(returning worship to the people)을 통해 중세 암흑기에서 탈출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서구교회의 세속화와 더불어 예배의 강단을 무참히 훼파시켰지만 1960년대부터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예배갱신(worship renewal) 운동으로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았다. 한국교회도 지난 20여 년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찬양운동으로 예배갱신의 불이 점화되었다. 덕분에 화석화 된 예배에 생명이 흘러들어 역동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본질보다 형식과 트렌드에 매몰된 타락의 조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하기 힘든 것처럼 요즘 예배는 많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열정에 불붙는 예배가 부족하다. 예배의 위기는 좋은 악기, 최첨단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창한 설교, 뛰어난 성가대, 실력 있는 찬양팀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며, 성령의 감동이 살아있고,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며, 존재의 혁명을 가져오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결과 우리의 눈과 행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전쟁과 기근에 고통 받는 나라와 미전도 족속들을 향해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급한 때이다. 알렉산더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표현들이 궁극적 ‘준거’를 부여받고 그것들의 최고 깊은 의미가 계시되는 것은 다음 아닌 예배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이다. 예배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범의 위치이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질 때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엽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복음에 전율하며, 삶의 관점이 바뀌고, 차가운 지성이 불타오르며, 구체적인 결단이 일어나는 그런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에는 과거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던 현상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구 한 쪽에서 부르는 찬양이 지구 반대편에서 동시에 불리고 있다. 한 지역교회의 메시지가 인터넷과 글로벌 위성 시스템, 스마트폰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각 나라의 크리스천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았어도 예루살렘 회복의 열망이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이루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로컬(local)과 글로벌(global)의 경계가 사라진 글로컬(glocal)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말세에 일어날 대부흥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인프라일지도 모른다.
세기 마다 일어났던 과거의 부흥과는 차원이 다른 지속적이고 글로벌한 부흥, 역사상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대한 부흥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이다. 이 부흥의 쓰나미 현장에 쓰임 받으려면 김종필 목사의 언급처럼 “내가 서있는 그곳이 부흥의 진원지가 되어야 한다.” 대부흥은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을 깨뜨린 영적 거인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부흥을 꿈꾸고 준비하는 교회와 성도들마다 선행될 부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배 본질의 회복’이다.
이것은 전통예배, 현대예배, 열린예배(seeker service), 블렌디드(blended) 예배, 이머징(emerging) 예배와 같은 형식의 논쟁을 불식시킨다. 세대와 문화에 따라 형식이 중요한 매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형식이라도 본질의 중요성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 본질의 회복은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와 능력의 재발견이고, 예배의 우주적, 교회론적 차원과 내용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죽은 전통과 관습을 포기하되 그 안에 있는 참된 본질을 시시때때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예배 회복은 제2의 종교개혁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김진영] gpKOSTA에서 행복한 기억 (2011년 gpKOSTA-Atlanta를 다녀와서)

gpKOSTA에서 행복한 기억
 


먼저 다른 좋은 간증과 후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소한 후기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gpKOSTA에게 감사 드린다.


이곳 Atlanta에 온지도 6개월이 다 되어간다. 한국에서는 지체들과 함께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내게 익숙했고, 예배의 자리는 늘 찾기 쉬웠다. 오히려 많은 예배와 모임으로 인해 치여서 불평할 때도 있었다. 항상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서 난 하나님을 찬양했고, 반주했었다. 기대함은 있지만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은 없었다. 사실 몰랐었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그러나 gpKOSTA에서 처음으로,‘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이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고, 찬양 한 곡으로도 서로 모르는 지체들간의 마음을 열게 하였으며,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gpKOSTA를 기대하면서, 마음 속으로 바랬던 것 중 한 가지는 이곳에서 좋은 지체들,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주를 향한 열정을 가진 지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나의 조금은 피상적인 나의 기도를, 예배를 통해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 안의 고민들을 나눔으로써, 각 사람의‘고민과 갈등, 그리고 중심’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다. 늘 그렇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넘치게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럽게 섬기게 된 반주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갈망했었고, 그 감격과 열정이 너무 벅차서 찬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찬양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정말 중요한 보물을 되찾은 것 같아서 너무 감사했다.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도 주님을 찬양하는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간이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나를 향한 진실되고 값진 고백들이,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닌, 나의 영혼을 위로했고 그래서 더 감사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컨퍼런스와 다르게, 이곳에서 내가 가장 기억이 남는 이유 중 하나는‘혼란스러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기 전부터‘소명’ 책을 읽게 하시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셨던, 바로 내 인생의‘소명, 혹은 비전’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무역회사에서 일에 재미를 붙였던 나는, 영어공부를 더 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희망하는 바람과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반주자가 필요하다는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어떤 100%의 확실한 목적은 없었지만, 나름 괜찮은 이유를 가지고 왔는데, 역시나 그러한 나의 인간적인 생각들은 점점 거품이 되기 시작했고, 정말로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그때 주신 것에 감사하며,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지, 나 자신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하고 계획해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고민과 함께, 강동인 집사님의 말씀을 통해, 소명은 단순히 직업관이 아닌, 그것을 휠씬 뛰어넘는 예수그리스도만이 비전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세상에서의 숫자논리에 가려진 잘못된 세계관에 관해서 확실하게 꼬집어 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내 삶 가운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그 세계관 역시 조목조목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들을 하는 작업을 통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또한 그러한 잘못된 세계관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등등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졌고, 이곳에 괜히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첫째 날 들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사님께서는 그 혼란스러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옳다고 말씀해주셨고, 그 강의를 이어서 안상현 목사님을 통해서,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떠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다.‘에덴동산’그것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바로 하나님과의‘관계’의 회복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좇아 기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힘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질의응답 시간에, 정말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계신 문상호 교수님을 통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주 앞에서 서 있는 그 모습이, 내게 어떤 것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향력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 그 분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분과 같은 삶을 살고자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나의 중심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그 혼란스러움은 점점 정리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그 시간들을 통해서 나의 허상과 또한 미혹될 만한 것에서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다른 말씀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내 머릿속에 들어오셔서 하나하나씩 정리해나가시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주시고, 위로가 필요한 부분 또한 놓치지 않고 일하셨다. 

 지금까지 Atlanta에서의 시간들이, 어쩌면 세상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듯한 경험이었고, 앞으로의 예배에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 하는지도 돌아보게 되었으며, 이전에 몰랐던 예배의 더 깊은 가치를 알게 하셨고, 그럴 때에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는 지 또한 경험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없어 봐야, 그 마음이 가난해 봐야 늘 있던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또한 마지막으로 세심하게 프로그램과 광고, 무엇보다도 너무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주신 gpKOSTA 동안 섬겨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유정] 중국을 뒤덮은 복음의 발원지

1865년 런던의 여름은 무덥고 음습했다. 중국 선교에 전념하던 중 과중한 업무로 병을 얻은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6년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동안 의료 선교사 자격증도 획득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으로 편안한 영국에서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수만, 수십만의 중국 영혼이 죽어가는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급기야 건강에 다시 이상 신호가 왔다.
이를 알게 된 오랜 친구 죠지 피어스가 브라이턴에 있는 해변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는 바닷가를 거닐면서 하나님과의 단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 마침 그날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로 인해 감격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독하고 안타까웠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광활한 중국 대륙의 죽어가는 영혼들과 비교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아침을 이렇게 회상했다.
“1865년 6월 25일 주일, 상심하여 축 늘어진 영혼을 붙들고 모래사장으로 나가 이리저리 홀로 거닐고 있었다. 주님은 그 곳에 찾아 오사 나의 불신을 압도하셨다. 나는 중국선교를 위해 내 한 몸 온전히 드리겠노라고 주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께 모든 문제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내려놓겠다고 말씀 드렸다. 나의 몫은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것뿐이었다.
나와 나의 동역자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다. 수고로이 짐 지고 곤한 심령 속으로 평화가 밀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가 없는 11개 내륙 지방에 각각 선교사 2명과 몽고 선교사 2명, 모두 24명을 동역자로 달라고 기도했다.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 귀퉁이에 이 기도 제목을 적어 두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평안한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이 흘렀다.”

이 청년은 1849년 열일곱 살 나이에 중국선교사로 헌신한 허드슨 테일러이다. 투병 중이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를 통해 그는 중국에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다시 한 번 회복했다. 바로 그때 앞날에 대한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재헌신했다. 아울러 아직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내륙 지방에 대한 선교전략도 세웠다. 바로 이때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태동되는 순간이었고, 그 작은 사건이 그의 선교사역에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16명의 선교동역자들과 함께 중국선교 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를 통해 중국 내지에 100여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캠브리지 7인도 있고 그 중 한 명인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가 나중에 그를 대신해서 CIM을 섬기게 된다. 그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중국을 알리는 선교회를 조직하는 등 보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감당했고, 이후 중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허드슨 테일러, 그를 통해 중국을 뒤덮은 복음의 발원지는 바로 예배의 현장이었다. 테일러가 예배 중에 본 것은 회심에 대한 천국 잔치뿐 아니라 그 기쁨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잃어버린 영혼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는 현장이 있는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너무 집중하느라 이웃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틈이 없지는 않은가? 마크 래버튼이 말한 것처럼 “예배드리다가 이웃을 잊어버리는 것,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품지만 그 열정으로 자기만족이나 자기 유익을 구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이 참된 예배이다. 예배드리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무너진 가정과 사회, 국가를 품게 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땅, 족속과 방언들을 향한 비전을 갖고 위대한 꿈을 꾸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