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이코스타 2001년 11월호

소설가 서영은씨의 초기 작품 중에 한 여인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제목은 잊었지만 내용이나 서술이 기억에 남는 그런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별로 자신감이 없는 수수한 여인, 다른 이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며, 스스로를 가꾸지도 않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날 사랑에 빠집니다. 축복 받을 수 없는 형태의 사랑이었지만,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힘겹고 지고지순하게, 어쩌면 목숨을 건듯이 처절하게 그 사랑을 지켜 나갑니다. 자기를 이용만 하려 하는 남자에게 그토록 성실하게, 사회적 지탄도 외면하며 사랑에 매달립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자의 변화입니다. 평소처럼 부스스한 차림으로 시장에 가려던 그녀는 아, 우연히 그를 마주치면, 하는 생각에 다시 들어와 단장을 하고 나가지요. 장에서 물건 값을 깍으려다 그가 보면, 하면서 너그럽게 행상 노인에게 값을 치릅니다. 그녀의 모든 행동과 차림새에 그를 떠올리며 점점 나은 여인의 모습이 되어 갑니다. 언제나 그녀의 내부에는 그가 의식되어지기 때문에 그녀는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고, 그녀가 치르는 헌신적인 사랑이 기쁨이 됩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강한 구속이며, 삶을 지탱하는 끈이 되어 갑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욕의 원천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속성, 이기심 때문에 그 사랑은 짓밟히게 되어 버리지요. 소설에서는 표현되지 않은 뒷부분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사랑의 구속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직접적이지 않고 강제적이지도 않은 이 구속감! 사랑의 기대감 같은 것. 혼자 있을 때에도 수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며 자신을 되돌아 보게하는 이 구속감을 힘겹게 생각하거나 불행하게 받아 들이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생기찬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얼마 전 먼 곳을 여행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며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막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얌전하게 달리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마구 속도를 내며 이리 저리 주행선을 바꿔 댑니다. 바로 레이져 감시 탐지기를 전후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감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무심한 것일까 하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얼마나 자주 망각하고 있는지, 나를 사랑의 기대감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로운지. 보이지도 않는 그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그분의 현존을 그렇게도 확신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모순.


아무도 보는 이 없이 홀로 그와 대면하고 있는 고요한 순간, 나는 마치 벌거벗은 아이와 같은 데도 감추려 하는 것이 많고 심지어 속이려 하고…. 지금 이곳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다면, 나는 분명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더 온유하고 단정하고 밝아지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가 귀 기울이고 있다면, 성내고 비판하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겁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사악한 생각과 행위의 그릇됨이 부끄러워 차마 계속 죄를 저지를 수 없겠지요. 내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를 찾듯이 순간 순간 그를 발견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열망을 품어야 하겠지요. 나의 한 없는 사랑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며 그 또한 무한한 사랑을 내게 주기를 약속하였기에 나는 기쁨의 구속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이고 인위적인 감시망 보다 내 안에 있는 빛을 두려워 하며, 그 빛에 이끌려 밝은 곳으로 가는 아름다운 영혼. 바로 이 순간 나를 변화시키며 아름다운 우정을 쌓기를 바라시는 그분,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없는 고요함 속에서 내 존재의 중심이 되시는 그분, 내가 만난 그분을 나는 사모합니다. 그 사랑의 간절함으로 그를 찾고 부르며, 내가 나 아닌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 나길 간구합니다.

[안종혁] 양식을 예비하고, 용사는 무장하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양식을 예비하고, 용사는 무장하라


들어가는 말


본 칼럼은 유학을 마친 후에 장래의 진로로 고민하며, 이민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먼저 다시 지적해 두고 싶다.


지난 호까지 두 차례에 걸쳐 썼던 칼럼에서 강조하였던 점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첫째 새로운 이민 생활의 결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둘째 이미 이민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면, 하나님의 자녀요 또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당당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확실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막 유학 생활을 시작할 때 가지게 되는 문화와 언어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도, 몇 년 후에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가면 잊어지겠지라는 소망으로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민 생활이란 끊임 없는 긴장감 속에서 새로운 관습, 문화, 언어를 배우며 살아야 되는 고된 삶이요, 또 가까운 친지들을 떠나 살아야 되는 외로운 삶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 없는 이민 생활과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결여된 (주로 추후에 갖게 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민 생활은 승리를 장담하는 이민 생활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어렵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준비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또 응답하셨던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믿음의 사람이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두려움을 갖게된 듯 싶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는 말씀을 통하여 여호수아와의 동행을 약속하시므로, 그에게 담대히 맡은 소임을 감당하도록 하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으로 미지의 길을 가는 유학생 이민자들을 위로하시며 또 동행하심을 약속하고 있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하심을 약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태도와 준비를 해야 되는 가를 배울 수 있다.


특별히 전문성을 갖춘 지성인으로서, 감성과 지성의 균형있는 신앙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유학생들에게, 여호수아의 태도는 본 받아야 할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데 매우 격렬한 전투가 다가 올 것을 예견하고, 백성들을 잘 준비시키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승리는 오직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은 사람이었지만, 믿음만 의지하고 준비없이 맨손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런 신앙인이 아니었다. 믿음과 행동의 조화를 이루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였다.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 미지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인도 하에 네 가지의 중요한 준비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예비하고 또 용사는 무장하라고 요구한다(수1:11,14). 둘째는 정탐꾼을 보내어 여리고를 정탐한다(수2:1). 셋째는 온 백성에게 성결할 것을 부탁한다(수3:5). 그리고 넷째는 과감히 요단에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수3:8). 이제 미국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도, 마치 미지의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했던 네 가지 준비 과정들을 유학 생활 중에 실제로 적용함으로서, 다가올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도록 하자.


1. 양식을 예비하고, 용사는 무장하라(수1:11,14)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면 이방 족속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질 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리 하여 모든 백성에게 먹을 양식을 준비하라고 먼저 명령한다. 그리고 전투의 선두에 서게 될 루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의 용사들에겐 무장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며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는 군대는 필연코 군량미를 충분히 비축하고, 또 잘 훈련된 군사를 강한 마음과 좋은 무기로 무장시키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 아니겠는가?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이룩하고자 준비하는 유학생의 마음가짐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가짐과 비슷해야 될 줄로 생각한다.


2. 전문성은 양식


이제 조금 후면 배우고 훈련받는 유학 생활이라는 광야 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새로운 이민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야 될 형편에 곧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유학 생활 중에 양식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유학생이 유학 생활 중에 준비해야 될 양식은 바로 전문성에서 참 실력을 길러두는 것이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 두는 것이요, 담대하고 성결한 신앙을 길러두는 것이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진짜 실력을 갖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하면 미국 사회가 실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에 관하여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대학의 평가 기관에서 보고한 소위 미국의 일류 대학이란 곳에서 소정 기간 동안에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하면 저절로 실력이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좋은 대학에서 좋은 연구로 실력을 쌓으면 인정 받기가 유리하긴 하지만, 결코 한국처럼 소위 ‘학교의 등위’라는 것으로 개인의 능력을 일률적으로 평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여러분을 초청하게 될 대학이나 회사의 인사 위원회는 철저하게 여러분의 창의적인 연구력과 발표된 양질의 논문 또는 연구로만 평가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오직 전문가는 철저히 전문성으로 말해야 하고, 또 전문성으로만 평가될 따름이다.


3. 본토에서 고생하는 영어


영어는 미국 이민 생활에서 필수적인 무기이다. 대체적으로 한국 유학생들은 전문성에서는 좋은 실력을 갖추어서 상당히 두각을 나타내는 편이다. 그러나 영어 구사력에서는 거의가 자신이 없어하고, 이 부족한 의사 소통력이 마음을 항상 짓누르고 이민 생활을 고려하는데 겁을 먹게 하고 있다. 미국에서 수 년 동안 공부하고, 박사학위 논문최종 발표시에 머리 속에서 한국말이 영어로 통역되는 번역기를 거치지 않고 영어로 논문을 방어(defense)할 수 있는 유학생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솔직히 말해서, 인문사회 전공을 하는 극소수의 유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학위논문 심사 발표시에 영어로 논문 발표를 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너무 과장된 판단일까?


비록 언어의 구조가 다르고 또 한국에서 말하기와 듣기 훈련이 부족하였다고 하더라도, 한국 유학생의 영어가 본토에서 심히 고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면, 왜 한국 유학생들이 영어를 정복하지 못하고, 취득한 학위만 달랑 들고서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면서도, 한국 학생끼리만 모이고, 학교에서조차 서로 한국말만 쓰기로 철저히 단합이 된 탓이다. 어느 학교든 학생 식당에 가보라. 특히 점심 시간이면 유독 한국 유학생끼리만 모여서 떠드는 것을 보는 것은 다반사다. 점심 시간마다 자기 연구실의 미국 학생동료와 점심을 나누며 보낸다면 아마, 틀림없이 좀더 빠른 시간 안에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릴 것이다.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며 한국말로 담소하는 것을 나쁘다고야 할 수 없지만, 몇 년을 미국에서 공부하고서도 학생 식당 샌드위치 샵에서 샌드위치 하나도 제대로 시켜 먹을 수 없는 유학생이라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어차피 미국에 살면서 미국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삶이 이민 생활이다. 참석하는 한국 교회에서 맡은 직무에 소홀함이 없다면, 일주일에 한 번 쯤 인근 미국 교회의 수요 예배나 또 금요 성경공부에 참석해 볼 것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 미국 형제자매와 주안에서 좋은 교제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를 극복할 수 있는 참 좋은 대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추후에 선교 사역, 국제유학생 사역, 또는 Tent-maker 사역을 마음에 두고 있는 유학생에게는 영어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영성이 풍부한 미국 목사님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새롭게 도전받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유학 생활 중의 특권이요, 균형 있는 영적 양식을 먹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문성에서 참 실력의 양식으로 준비하고, 대화 소통에 자유로운 영어로 무장된다면, 이미 이민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는 양식과 무기는 일단 잘 준비된 셈이다.


4. 정탐하라(수2:1)


가나안 땅의 정탐은 여호수아에게는 만감이 교차되는 민감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믿음의 눈을 갖지 못했던 열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가나안 정탐 보고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훈련받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서 지금 요단강을 건널 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다시 정탐꾼을 먼저 여리고성에 보내어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가나안 땅의 동정을 파악하고자 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정탐 결정을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그 누가 비난할 것인가?


5. 정보시대


결국 가나안 땅의 첫 번째 정탐꾼은 실패하여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더하여 주었지만, 두 번째 정탐꾼이 라합을 통하여 가져온 보고는 “온 가나안 거민의 간담이 녹더이다”(수2:24)라는, 승리에 자신감을 더해 주는 정보였다. 결국 정확한 여리고성의 정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 그렇지”하는 믿음을 통한 승리의 확신으로 요단강을 건널 마음의 준비를 확신 시켜준 귀한 정보이다. 사실 “정보가 생명”이요, “정보의 시대”라는 말은 이미 여호수아 때부터 생긴 말인 셈이다.


이 시대는 정보의 시대이다. 더욱이 미국은 정보 활용의 첨단을 걷는 나라이다. 정보를 바로 얻지 못하고 또 활용할 줄 모르는 자는 결코 살아 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하면서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잘 정탐해 두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지름길은 역시 매일 TV News를 보고, 미국 일간 신문과 시사 주간지를 읽으며, 또 라디오의 Talk Show를 듣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잘 이해한다면 또한 (앞서 말한)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게도 된다. 수 년 전에 미국에서 학위를 갓 마치고 직장을 찾기 시작하는 형제와 함께 미국의 고급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되었는데, 무슨 미국 음식을 어떻게 주문할 지를 몰라 당황해 할 뿐만 아니라, 웨이터의 질문에 계속 동문서답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단순히 미국 식당의 문화와 관습을 모르는 탓이다. 대부분의 대학이나 회사에 Job 인터뷰를 가면, 대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사 위원들과 담소하는 시간을 꼭 갖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의 됨됨과 매너를 관찰하기 위함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미국의 관습과 매너는 꼭 배워 두어야 할 것이다.


과연 몇 퍼센트의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의 주요 일간 신문이나, 경제신문 또는 지방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중의 몇 명이 미국 주요 TV News를 매일 정기적으로 시청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한국 식품점에 갈 때마다 한 팔 가득히 빌려오는 한국 비디오를 날 새워 보고서, 벌건 눈으로 “한국 풍속도”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려도, 미국 정치, 경제 및 사회 이야기가 나오면 몇 몇 정치 및 경제학도를 제외하고는 꿀먹은 벙어리가 대부분이다. 학과 공부와 연구에 바쁜 탓에 그까짓 것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또 실제로 들어도 별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탓이라고 간주해 버린다면, 조만간에 앞에서 예를 든 유학생 형제처럼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 경제와 사회의 구조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 결국 승리하는 이민 생활을 누릴 수가 없다. 미대통령의 국회연설이나, 상하원의 법안 통과 정보 등을 놓쳐 버리면, 대학교수나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다가올 세대의 연구의 방향을 잃어 버리게 되고, 연방정부의 연구비 투자 방향과는 반대로 연구의 방향을 잡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는 대부분의 교수와 연구원들은 워싱턴의 연방정부와 자기가 살고있는 주정부의 행정과 경제 동향에 정통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자 하는 유학생은 지금부터라도 매일 읽던 한국 일간지를 미국 일간지와 겸하여 읽도록 하자. 끝 없이 짝짓고 헤어지고 또 당짓기에 신물 난 서울의 정치 이야기도 알아야 하지만, 왜 미국 흑인의 90%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또 부시 대통령은 최근에 미국을 방문한 멕시코 대통령을 국빈으로 예우하고, 환대하였는지를 바로 알아야, 다민족이 어울려 사는 미국의 역학 구조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남의 허물을 잡기 위하여 정탐하고, 회사의 정보를 빼내어 팔아 먹는 사기꾼 정탐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되지만, 미국을 알고 또 이해하며 이민 생활을 잘 정착하기 위한 정탐은 부지런히 할 수록 좋다.


6. “라합”같은 친구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물론 준비된 “라합”같은 믿음의 미국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도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전문학회 모임은 대개 관광을 겸하여 할 수 있는 관광 도시에서 갖게 된다. 학회와 학술 발표회(연주회)에 좋은 연구 논문(연주)을 가지고 가서 발표하는 것은 자기가 속한 전문학회의 유명한 석학이나 최고의 연구가(연주가)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나는 감히 전문학회의 발표장은 새로운 신인 배우들이 스타로 탄생되는 연회장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연회장에서는 연회를 베푸는 주인이 으뜸이다. 전문학회 발표장(연주회장)에서는 논문 발표자(연주자)가 주인이다. 전문학회 발표장에 모인 수 백명의 참석자는 논문을 발표하는 사람 즉 연회를 베푸는 주인에게 눈을 고정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 때가 모든 참석자를 당신을 인정하고, 지원해 주는 친구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논문 발표(연주 발표)가 끝나면, 부지런히 그 분야의 전문가 참석자들을 찾아 다니며 논문(연주)에 대해 다시 토론하고 또 조언을 들음으로써, 참 기억하기 힘든 여러분의 한국 이름과 연구 업적을 기억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친구로 사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취업을 하려면, 지도 교수를 포함한 다른 교수(특히 재학하는 학교 이외의 대학)들의 추천서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승진이나 직장의 이동 때마다 이 추천서의 역할은 계속 증대되어 간다는 것을 꼭 알아 두기 바란다. 논문발표가 끝나자 마자 학회는 뒤로해 두고, 관광에 열중하는 유학생은 결국 연회를 베풀어 놓고 연회장을 떠나 버리는 주인과 같은 꼴이다. 이러한 학생은 틀림 없이 이력서에 써야 되는 추천인으로 자기가 졸업한 학교의 논문 심사위원의 이름만 기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이런 이력소유의 지원자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대학 교수는 한국에서처럼 판에 박은 미사어구의 추천서를 결코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학생을 직접 평가한 사실대로 꼭 쓴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비록 자기 밑에서 학위를 받은 학생일지라도 말이다. 학위과정에 있을 때에 많은 명망있는 교수와 전문가들을 “라합”같은 좋은 친구로 만들어 두기 바란다.


결국 정탐을 잘하여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잘 이해하게 되면, 미국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자신감 때문에 여러분의 “간담은 더욱 강해진다”고 할 수 있다. 본 칼럼에서 지적한 것을 이미 잘 갖추고 새로운 미국의 이민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수 많은 유학생 출신 신이민 세대에게 갈채를 보낸다.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백성은 양식을 준비하고, 용사는 무장하고 또 여리고성의 정탐을 마쳤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백성을 성결케 하고, 요단강을 밟으라고 명령하셨다. 다음 회에서는 계속하여 여호수아의 요단을 건너기 위한 네 가지 준비 과정 중 셋째, “온 백성에게 성결을 부탁한다” 와 넷째, “과감히 요단에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를 유학생활 중의 준비 과정에 적용해 보기로 하겠다.

[함철훈] Give Thanks

eKOSTA 갤러리


Give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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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Vision에서는 부모를 잃고 버려진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계 곳곳에서 사랑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었고 또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비록 그 아이들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쓸만한 것을 찾아내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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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른들의 보살핌을 못 받고 본드를 흡입하며 길바닥에 뒹구는 아이들과, 보살핌을 받고 있는 이 아이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어른들의 아주 작은 사랑이었습니다
주신 것에 감사(Thanks giving)하는 오늘의 삶에 추수 감사절을 맞아 Give thanks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못다한 말.
제가 캄보디아를 취재하기 얼마 전 베트남 비행기가 푸놈펜 인근에 추락했습니다. 그 비행기에는 우리나라 등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언론들은 충격적인 현장 사진을 내보냈습니다.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는 비행기 잔해 위에서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무언가 줍고 있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시체 더미를 헤치고 지갑을 꺼내고 반지와 시계를 빼는 장면 이였습니다. 그 기억 위에 킬링 필드의 현장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만난 캄보디아 사람들의 선하고 맑은 눈동자를 사진에 담으며 겪었던 제 마음의 갈등과 혼란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내가 캄보디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양면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헤치고 다닌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위해 모든 선한 일을 계획하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두 장의 사진을 더 찍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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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느 곳보다 사랑이 더욱 필요한 곳을 두 손으로 포근히 보담아 주시는 보이지 않는 손의 형상을 캄보디아 바탕방 하늘 크게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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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머지 다른 사진도 얘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3)

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3)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이번 호에서는 이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어떻게 역학적으로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용어들과 개념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본적인 용어들을 독자들이 잘 익혀 두었으면 한다.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 구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정신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철학적이나 역사학적 세계관과 달리,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사회든지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지식들은 구태여 증명할 필요 없이 당연히 믿고 있는 지식들이며, 모든 종류의 사회적 삶은 이러한 지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곧,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는 세 가지 주요 내용들, 즉 믿음/전제(前提)들(beliefs/assumptions), 가치들(values), 그리고 충성/헌신(allegiance /commitment) 등이 세계관의 내용이 된다. 이 구분은 Fuller 대학의 Kraft 교수의 것인데 이러한 세 가지의 구분은 인간 “지, 정, 의”의 인격 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제들이 주로 문화적인 지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가치들의 부분은 사람의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성 내지 헌신은 인간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세계관의 요소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한 인격 속에서 서로 섞여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즉 “문화화”된 대로 믿는데, 이러한 믿음들을 우리는 “전제(assumption)”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전제들을 기초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에는 이성적인 앎과 감성적인 느낌이 함께 포함된다.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이 얻게 되는 지식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배우게 되는데, 이때 바람직한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갖게 되는 것까지도 배움, 즉 문화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이해는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그 나름대로 선과 악을 분류하고 대부분 선이라고 믿는 바들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신들이 믿는 중요한 가치들 혹은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동원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의 사고 역시 세계관 전제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Kraft 교수는 “충성” 혹은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충성의 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며, 그 대상들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인간의 내면 속에서 함께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분리하여 생각해 온 경향이 크다. 특별히 지성과 감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지난 약 이 백년 동안 서구 사회에 편만하였던 서구의 세계관의 영향에 기인한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한창 꽃을 피우고 20세기의 서구 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실증주의 내지 과학 지상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버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듯한 경향을 보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감성과 직관의 부분들을 소홀히 하고 인간의 이성을 현실 검증의 유일한 도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특별히 유럽의 여러 교회 전통들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권위 아래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19-20세기 서구인들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이성주의”의 세계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은근히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지식의 동반자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성으로 판단한 지식 곁에는 그 지식에 대한 느낌이, 자신이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함께 있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갑돌이라는 사람이 어떤 개를 바라보면서 이 짐승이 개라는 사실만을 알거나 그 개에 대한 실존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갑돌이는 개를 바라보면서 어떤 애정을 갖게 되는데, 그 특정한 개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 개에 대한 감정도 갖게 되고, 그 개에 대한 객체 인식과 함께 감정도 기억하게 된다. 반면, 무슬림들이나 아프리카의 유목인들에게 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들에게 개란 동물은 그리 애정을 줄 만한 존재가 아니다. 개는 매우 천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에 그들은 개를 들먹인다. 이것은 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른 것을 보여 준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갑돌이라는 사람의 문화권과 무슬림들의 문화권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름으로 해서 그 사물에 대한 감정도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주변 환경(자연 환경, 사회적 환경, 영적 환경)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갖는가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 역시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후세에게 전수된다. 즉, 어떻게 감정을 가져야 하는가 까지도 배우게 되며, 이것은 습관이 되어 자신의 감정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각 문화권의 유머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들과 같이 어려서부터 성장하지 (즉 문화화되지) 않았다면, 미국 백인들이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유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지만, 느낌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 공동체가 – 이 공동체는 거의 항상 혈연 공동체가 기본인데 – 공유하는 지식들과 느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것들,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기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식들과 가치들, 그리고 헌신의 대상들을 늘 전제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제들의 내용에 도전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거나 화를 내게 된다. 만일 외부인이 들어와서 그 동안 전통적으로 믿어온 전제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들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 외부인은 그 지역에서 추방 당하거나 형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에 외부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문화관 중심으로 행하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좀더 다른 차원이므로 “세계관의 변화”를 다룰 때에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 서구 세계와의 충돌은 전혀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이며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인간 관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선한 입장을 주입시키려는 행위는 평화를 가져오기가 매우 어렵다. 오늘날 일어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사실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의 싸움은 그 동안 누적된 세계관의 충돌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 호에서 좀더 다루어 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슬람의 세계관과 서구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 지에 대하여, 이번 호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

[주명수] 상담과 법률

복음과 법


상담과 법률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담한다. 그 내담자들 중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내담자들을 상대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그 내담자들이 자살 등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하였을 경우,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에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를 중심으로 상담에 얽힌 법률 문제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례는 이렇다. 1970년 초에 UCLA에 다니던 넬리(Nally)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원래 천주고 신자였는데 기독교로 개종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맥아더 목사님이 시무하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교회 대학생부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교회 부목사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기도 하였고 상담을 받기도 하였다. 그 부목사님은 넬리가 가끔 삶의 부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8년 후반 넬리는 그의 여자 친구와 교제를 끊은 후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또 다른 부목사와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넬리에게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넬리는 1979년 3월경 엘라빌이라는 약을 과도하게 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고 퇴원 후 다시 담임 목사인 존 맥아더 목사와 상담을 하였으며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담임 목사는 넬리로 하여금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 넬리는 다시 부목사와 상담을 하면서 자살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부목사는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빙자한 자살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후 넬리는 그의 새로운 여자 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거절 당한 후 자기 친구의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였다. 넬리의 부모는 그의 아들이 다녔던 그레이스 교회와 그 교회 목사 4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소장에서 성직자들이 그들의 아들이 자살하는 것을 방지해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긴 과오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손해를 배상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이 소위 캘리포니아 법정을 10여년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넬리 대(對) 그레이스 커뮤니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회 상담자들의 역할·의무·한계 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사용함에 있어 과오를 저지른 경우 그 전문가들의 과오를 소위 전문직 과오(malpractice)라고 한다. 예컨데, 의사들이 과오로 환자를 오진하여 손해를 입혔을 경우라든지, 또는 변호사들이 소송을 잘못 진행하여 손해를 끼쳤을 경우가 바로 전형적인 전문직 과오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상담 전문가들도 미국의 경우 국가로부터 상담 전문 자격을 받기 때문에 상담가들이 상담을 잘못하였을 경우에도 바로 이 전문직 과오(malpractice)에 해당된다. 넬리의 가족이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목회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주장하였던 법 이론이 바로 이 전문직 과오였다. 즉, 넬리의 가족은 상담자를 선출하고 훈련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과실을 범하였으며 나아가 교회 상담자들은 자기 아들인 넬리로 하여금 더 전문가적 보호를 받으라고 격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의 종교적 교리 교육이 넬리의 천주교적 양육을 무시하였고, 넬리의 선재하는 죄의식, 염려 그리고 우울증을 악화시켰으며, 넬리에게 자살을 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에서 주요한 쟁점은 “내담자인 넬리로 하여금 자살을 피하도록 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과연 교회에게 있는가”였다. 만약 교회에게 그런 법적인 의무가 있다면 그런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과실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런 법적인 의무가 없다고 하면 윤리적인 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법적 책임은 면한다 할 것이다. 법원은 어떻게 판결을 하였는가? 1심 판결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는 그런 법적인 의무가 존재치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넬리 가족이 항소를 제기하였고 2심에서도 같은 쟁점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원고인 넬리 부모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 법적인 의무가 있고 교회는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항소 법원은 교회에 법적주의 의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넬리의 교회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심리적 의존도는 전문 상담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교회내 비전문 상담가에게도 인정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교회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다시 교회의 편을 들어 주며 교회에는 책임이 없다고 항소심 판결을 뒤엎었다. 즉 교회 내 비전문 상담자와 그의 내담자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교회 내에서의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는 비상업적이고, 보호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발적 성질의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판결로 교회는 상담자 과오에 대한 짐을 덜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자살 위험성이 있는 교인들을 평가하여 병원에 가도록 하여야 할 법적 의무를 목회 상담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독교 상담 사역을 보호하여 주었다. 대법원은 만약 교회에 그런 법적 의무를 부여한다면 목회 상담자는 자살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기보다는 소송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역을 기피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수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그레이스 교회는 넬리에게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소수 의견도 경청하여야만 한다. 이유는 그 교회가 자기 자신들을 우울증과 자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한 전문가라고 넬리에게 소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자신들의 능력을 과장하여 넬리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다면 교회도 법적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10여년의 송사 끝에 결국 교회의 승소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교회는 많은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다. 이 사건은 또한 교회로 하여금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을 남겨 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스 교회는 스스로를 과대하여 자신들이 정신 심리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하다고 광고를 하였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능력을 솔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간질병 환자가 어느 교회를 찾아 갔다. 그는 간질병이 너무 심하여 가족들조차도 이제는 지쳐 관심을 갖지 않는 환자였다. 이 환자의 가족은 그를 교회로 안내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개척 교회로 안내를 하였다. 그 교회의 목사 부부는 그를 환영하였고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를 교회에 기거하게 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때로는 잠을 자지 못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목사 부부만 그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온 교인이 그 환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목사 부부 뿐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이제는 그로 인해 지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 이르도록 교회에 속한 누구도 치료를 위해 그 환자를 전문 기관에 보내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 오직 기도로 이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온 교인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새벽 그 환자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그 개척 교회의 목사는 그를 가볍게 때리면서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날 그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사체 부검 결과 직접 사인은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그 목사는 구속이 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선한 일을 하다 구속까지 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상담하는 도중 왜 그 환자를 전문 기관으로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 때는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예수님조차도 베데스타 연못가에 있는 많은 병자들 가운데 오직 38년된 병자만을 고치셨다. 그것도 그 치유라는 행동을 통해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교회나 교회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