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현] 기독 청년의 인생관: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이코스타 2002년 5월호

기독 청년의 인생관: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요셉의 삶을 통해 조명해 본 기독 청년의 인생관


‘고지론’


1996년 여름, 미주 코스타를 갔다 온 한 지체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김동호 목사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다. 지금에야 설교 본문과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당시 나에게 목사님의 말씀은 참으로 신선하고 도전적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은혜가 되었던지 그 당시 학교와 교회를 오고가면서 이분의 설교 tape을 들으며 수도 없이 웃고, 울곤 했던 기억이 난다. 백원과 오백원의 가치를 몰랐던 목사님네 막내아들 이야기에서부터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던 한 고등부 학생 이야기, 진정한 겸손과 실력을 이야기하며 항상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대법원장을 꿈꾸는 한 고시 합격생의 이야기, 한 미친놈(?)과 한 미친 분의 자동차가 새벽에 나란히 빨간불 신호등에 멈추어 섰던 이야기 등… 삶에서 경험된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도 그 안에서 깊이 있는 의미들을 찾아내던 김동호 목사님의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에 나는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다. 물론 후에 코스타에 몇 번 참석하게 되면서 김동호 목사님의 세미나나 집회 말씀은 거의 다 같은 내용의 재탕(?)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깨닫게 된 후, 솔직히 좀 지겨워(?) 질만도 할텐데 그럼에도 매번 들을 때마다 새로운 은혜와 감격 속에 사로잡히는 나를 보게 된다.


이러한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 중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1990년대 초부터 학복협(학원 복음화 협의회)과 코스타 집회 등을 통해 유명해진 ‘고지론’ 설교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거의 코스타의 대표적인 표어가 될 만큼 이 ‘고지론’은 특히 전문적인 학업 연마를 위해 먼 이국 땅까지 와 공부하고 있는 많은 기독 유학생들의 학업관과 인생관에 큰 반향과 도전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는 대략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고지를 점령하면 최소 3배에서 5배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먼저 선두(고지)에 서야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신 것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실력을 높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을 위하여 고지를 정복하려고 힘쓰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하여 각자의 고지를 정복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 ‘고지론’ 주장은 여러 관점에서 상당히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인이 천만을 넘는다고 하는 현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속에서, 이 ‘고지론’은 상당히 도전적이고 실제적인 조언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게다가 이 설교의 주 대상이 코스타의 유학생들과 학복협의 대학생 이상의 고등 학력자들 이라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청중의 특수한 상황에 맞춘 타당하고 적합한 말씀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이 ‘고지론’에서 몇몇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고지론’의 주창자인 김동호 목사님의 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청중들의 ‘자기 해석’의 수준에 따라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고지론’이 지난 10여 년 간 나를 비롯한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귀한 도전과 은혜를 끼쳤음을 결코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고지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안한 요소들을 건설적으로 지적함으로서, 청중들이 ‘고지론’ 설교를 들으며 임의적으로 해석, 오해할 수 있는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사수하기 위해 ‘고지론’의 수정, 보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수정과 보완에 대해 묵상하던 중, 대안으로 떠오른 성경의 인물이 바로 요셉이었다. 창세기(37-50장: 38장 제외)에 나와 있는 요셉의 삶을 묵상하는 중에 난 강하게 ‘고지론’의 취약점과 중심을 잃은 편향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요셉의 삶을 조명함으로서 ‘고지론’의 수정과 보완을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기독 청년들이 요셉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이유


자신의 꿈(고지)을 까먹은 요셉?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때에 요셉은 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표준새번역)
“Although Joseph recognized his brothers, they did not recognize him. Then he remembered his dreams about them.” (N.I.V.)


유, 초등부 시절에 교회 생활을 한 사람들은 다들 한 두 번쯤 이 꿈꾸는 자(Dreamer), 요셉에 관해 공과 공부를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요셉이 17살 때 꾼 두 가지의 꿈 이야기(37:7-9)를 들으며 “요셉은 그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꿈을 바라보며 결국 하나님 안에서 이 꿈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꿈을 가집시다! 비전의 사람이 됩시다!”라는, 그런 가르침 말이다. 유, 초등부 시절에 하도 까불고 다녀서 도대체 공과 공부와 관련된 기억이 별로 없는 내게도 이 꿈의 사람, 요셉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근데 창세기 42:8-9a 말씀을 보면, 우리가 배운 공과 공부의 내용에 반하는 주장을 보게 된다. 꿈의 사람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곡식을 사러 온 그 상황에서야 자신이 20여 년 전에 꾼 꿈들을 기억했다는 점이다. 곧 그는 자신의 꿈(고지)만을 바라보고 산 사람이 아니라, 아무 목적이나 야망 없이 그냥(?) 삶을 살다 보니 어느 순간 20여 년 전에 꾼 꿈들이 자신의 삶에서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그의 꿈, 그의 고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점령되어지게 된 것일까? 우린 매일 박사 학위를 언제 받나 하며, 박사 자격 시험(qualification exam)이나 논문 심사(defense)에 매여 살아도 쉽게 고지 점령의 끝이 보이지 않는데, 요셉은 자신이 올라가야 될 구체적이고 분명한 고지에 대한 개념도 또한 목표 의식도 없는 가운데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이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일까? 혹 우리가 이해하는 목표 중심(goal-oriented)의 ‘고지론’을 뛰어넘는 그 어떤 고지 점령의 비밀이 요셉의 삶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지를 점령하고도 망가지지 않은 요셉의 말로(?)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내가 요셉의 삶에 관심을 갖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성경에 나오는 몇 안 되는 진정으로 성공한 ‘고지 점령자’이기 때문이다. 애굽의 총리라는 막강한 고지를 점령하고도 그는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만을 위해 자신의 고지를 온전하게 사용한 몇 안 되는 성경의 인물이다.


애굽의 총리가 된 후 곡식을 사러 온 그의 친형들을 대면할 때 그는 충분히 그가 가진 권력으로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의 고지를 개인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창 45:7)하며 그들을 환대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찬양했다. 또한 창세기 47장에 나오는 그의 토지개혁은 그의 부패성 없는 청렴결백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7년의 풍년으로 거둔 곡식을 효과적으로 보관, 사용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사리사욕을 위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주군 바로왕을 위해 충성되게 봉사하다가 나중에는 모여진 돈, 짐승, 전지들을 가지고 애굽의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47:20-26) 혹자는 창세기 47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가 반민주적이고 강압적인 폭거를 휘둘렀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의 정치 구조가 왕권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그는 분명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지혜로운 정치 지도자였음이 분명하다. (47:25)


무엇보다 그의 위대한 말로(?)를 증명하는 이야기는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다시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다가가 고백하는 그의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과 삶의 자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지의 이점(利點)을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섭리 안에서 이해하고 활용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그는 단순히 안심과 위로를 베푸는 선을 뛰어넘어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까지도 자신이 기르겠다며 대국의 총리답지 않은(?) 섬김과 헌신의 말로를 보여주었다.


그는 철저하게 ‘고지’를 ‘고지’로서만 이해한 성경의 인물이었다. 고지가 결국에는 자신의 발목을 잡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하는 올무가 아닌,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을 가지고 자신에게 허락된 고지를 통해 이웃과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는데 사용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지 중에 고지라고 할 수 있는 왕권(Kingship)을 손에 잡았던 사울왕과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 왕 역시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고지를 자신의 것으로 알고 방종과 간음, 살인과 불순종의 죄들을 저질렀다. 그러나 요셉은 오히려 올라갈수록 그에게 주어진 고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을 추구했던 사람인 것이다.


‘옷 로비 사건’ ‘교회 세습’ 등을 통해 기득권 층에 있는 많은 현대의 ‘고지 점령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추태와 실망감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고지론’에 대해 불안감과 경계심마저 갖게 한다. 그러나 고지에 올라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려와 섬길 생각은 안하고 그 위에서 안주하며 자신들의 만족과 유익만을 위해 산다고 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고지’ 점령하는 일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요셉의 삶을 통해 무엇이 우리의 궁극적인 ‘고지’여야 하며 또한 어떻게 올라가는 것이 성경적인 고지 점령인지를 제시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올라가면서도 쓸데없는 생각을 안하고 올라가서도 쓸데없는 행동으로 넘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요셉은 어떠한 인생관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고지론’은 요셉의 삶을 통해 어떻게 수정 보완될 수 있는 것일까.


1. 하나님이 나의 고지이다!: 고지를 점령하라는 Doing의 유혹 앞에 Being의 자세로만 나아갔던 요셉


요셉의 인생관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은 그가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으며, 그 분과 동행하고자 하는 존재론적(Being)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창 39: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 39:21)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창 39:23)


요셉과 관련된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 상의 전환점(turning point)은 바로 창세기 39장이다. 37장에서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하나님과 동행하는 요셉의 삶’이 39장의 중심 모토(motto)로 계속 강조되기 때문이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진 후부터 이스마엘 상인들에 의해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지는 기간 사이에 그 어떤 신앙적 변화와 성숙을 체험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39장의 초입 부분부터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간 순간부터 주변 사람들이 요셉의 하나님(God)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심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보디발의 수하에 있었을 때만 드러난 요셉의 특성이 아니었다. 그가 나중에 보디발의 아내의 계략에 의해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그는 전옥(典獄)에게서 똑같은 평을 듣게 된다.


곧 그에게는 하나님 그 분만이, 그리고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론적(Being) 삶이 비전이자, 고지였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이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이루고 성취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고지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분만을 바라는 삶(Being)이 곧 그의 궁극적인 고지였던 것이다.


내가 ‘고지론’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첫 번째 불안은 바로 하나님 당신보다 고지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인간의 야망 중심적(Ambition-oriented)인 경향이다. 곧 수단을 목적으로 순식간에 바꿔 버리면서도 이를 하나님을 위한 ‘고지’라며 계속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인간의 본질적 죄성을 경계한다. 세상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 올라가는 것은 좋은데, 그리고 이러한 점이 분명 세상의 엘리트주의(Elitism)와는 차별화된 기독교의 정신인 것 까진 좋은데, 과연 인간의 실체가 고지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이 고지 뒤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겸허하게 내려와 세상을 섬길 만큼의 양심적 존재냐는 점이다. 사실 많은 경우에는 이미 고지를 올라가는 도중에 ‘하나님을 위한 고지'(비전)를 ‘나를 위한 고지'(야망)로 자연스럽게 바꾸고 합리화하는 우리의 자기 중심적(Self-centered)인 현실을 바라볼 때, 어떻게 보면 목표 중심적 언어인 ‘고지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전달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굳이 ‘고지론’이라는 진취적이고 목표 중심적인 관점에서 성경적 인생관을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우리의 ‘고지’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아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닌, 바로 하나님 그 분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올바른 ‘고지론’이라 생각한다.


나는 요셉이 자신이 17살 때 꾸었던 그 꿈만을 바라보며 입을 악 물고 열심히 목표를 향해 살아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목표 중심적인(goal-oriented) ‘Doing’의 관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면, 그는 나중에 자신의 존재를 형들에게 드러낼 때 하나님의 주권을 자랑하며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는 위대한 고백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창 45:7) 오히려 자신의 목표에 큰 방해가 되었던 형들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밀거나 아니면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러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은근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고지’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매일 매일의 삶이 그의 ‘고지’이자 비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왕의 경호 대장 보디발이나 감옥의 전옥이나 이집트의 왕 바로 앞에서나 하나님만을 추구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기에, 그래서 그 분 만을 바라며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했기에, 그는 종살이도 감옥살이도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Doing’의 종교가 아니라 ‘Being’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이루겠다, 성취하겠다고 노력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존재론적인(Being)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분의 하나님 되심을, 그 분만이 나의 비전 되심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삶(Being)을 추구해 갈 때,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건강한 동기의 순종적 행위(Doing) 또한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그 분의 뜻대로 인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지금 잠깐 하나님 바라보는 일을 멈추거나 아니면 그 분과의 관계를 소홀히 여기고 일단 공부나, 연주회 그리고 전시회 준비에 집중하겠다는 자세는 그 발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 중심에서 ‘고지’ 중심의 자기 야망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고도의 자기 합리화인 것이다.


우리의 ‘고지’는 석·박사 학위, 성공적인 졸업 연주회나 전시회, 콩쿠르 입상, 그리고 그 후에 펼쳐지는 성공(sucess)과 인정(recognition)의 삶이 아니다. 무엇을 이루겠다는 ‘Doing’이 아니고 오직 그 분만을 추구하는 ‘Being’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되는 이 ‘Being’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고 그 뜻은 요셉과 같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a way)일수도 있고 아니면 스데반 집사와 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길(a way)이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성공한 인생이다. 왜냐하면 성공하는 ‘고지,’ 인정받는 ‘고지’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만이, 그분과 동행하는 친밀한 관계가 그들의 진정한 ‘고지’였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 본 원고는 뉴욕 맨하탄 헌터 College의 K.C.F.(Korean Christian Fellowship) 모임과 로체스터 연합 장로교회 청년부 수련회(2002년 4월 5-6일) 세미나 등을 통해 나누어졌던 생각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주님의 교회’를 개척, 사역하시고 몇 년 전 스위스에 교단(장로교 통합) 선교사로 헌신하시다가 귀국하신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비전의 사람'(장신대 신학대학원 사경회: 2000년 3월 29일-31)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은 원고임을 밝혀 둡니다.

[이시훈] 고백

이코스타 2002년 5월호


”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최 문자 “고백”


한 시인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자신을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의 향기를 남겨 주고 싶은 소망. 그러나 그렇게까지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반성하는 일은 원망하고 비난하는 일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 같습니다. 흔히 말하듯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공식이 만연한 시대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긁히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손해 보는 일도 절대 용납 할 수 없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자세로까지 비춰지기도 합니다. 친절함,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이 미덕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조금 어리숙하거나 힘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까지 전락되어 버리거나, 사회적으로 적응력이 부족한 태도로 보여지는 현실이니까요.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받은 상처나 모욕은 배로 갚아줄 때 속이 후련한 것이 보편적인 속성이 아닌지요.


우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난당하거나 손해를 입거나 배신을 당한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신감이나 냉정한 인간관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받은 아픔만큼 되돌려 주어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종류의 상처를 더할 뿐이지요. 역사를 돌아볼 때 보복으로 인한 결과는 인류에게 재앙과 반복되는 악의 근거를 제공했고, 승자는 없이 패자만을 남게 했습니다. 개인이건 한 사회건 누군가 보복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공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참고 양보해야하지 라는 질문이 내부에서 자신을 흔들겠지요.


향나무를 찍는 도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든든하고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잘리우는 것은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나무는 훌륭한 가구가 되어 쓰임을 받기도 하고 악기가 되어 영혼을 매혹시키는 소리를 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찍어 내리는 고난이 우리의 자아를 더욱 성숙시키고, 이 세상에 더욱 필요하고 유익한 인격의 존재로 단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였고, 잘못도 없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겨드는 사울로부터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액을 향해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고, 사울에게는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모습을 우리는 다윗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욕 당하셨고 의심 받으셨고 거듭거듭 배신 당하셨지만, 더 큰사랑을 되돌려 주셨고 자신을 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의 향이 흠뻑 묻혀져 있습니까?. 주님의 보혈의 흔적과 향이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어 있음을 믿는 것이 제 사랑의 고백입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마태 복음 6: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