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산 위에 있는 동네 – 선구자의 땅 (1)

코스탄 현장 이야기


산 위에 있는 동네 – 선구자의 땅


(1)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연길시 가장 북쪽의 북산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앞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나지막이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시원한 들판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학교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연길 시에서는 시내 중심의 좋은 땅을 주려고 하였으나 김진경 총장이 당시 공동 묘지였던 이 언덕바지 땅을 극구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묘지 터를 요구하는 김 총장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내 저었지만, 이제 학교가 완성되고 나서 이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과연 이곳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며 김총장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에 감탄을 하곤 한다. 더구나 오목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연길 시는 여름에는 먼지와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겨울에는 굴뚝에서 내뿜는 매캐한 석탄 연기 때문에 온 도시가 안개 속에 잠겨버리기 때문에 학교에 올라와야만 비로소 숨통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학교를 단장하는 분들이 학교 안팎에 온통 꽃길을 만들어 놓아서 계절마다 화사한 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나무로 일체 조경을 이루어 학교를 처음 찾는 분들도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이곳은 중국 속의 섬처럼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교정 바로 앞에는 푸른 잔디로 카페트를 깔아 놓았고 그 위에 멀리 두만강에서 옮겨다 놓은 큰 바위가 카메라를 의식하며 점잖게 놓여 있다. 연길시 어디에서도 아직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녹색 공간이기에 휴일에는 산책을 위해 학교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이 학교를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잡게 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 기적과 같이 세워진 학교—,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의 물결을 타고 최초의 중외 합작 대학으로서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세운 이 학교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는지, 이 곳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앞으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는지 중국 사람들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 봉사하러 온 외국인들이 모두 크리스천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의 판단들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학교를 중국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학교로 키워나가야만 한다. 이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리, 평화, 사랑의 교육이 실천되고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중국 다른 어떤 대학의 졸업생들과는 다르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길만이 이 학교가 세워진 참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 될 것이다.


만주 벌판의 강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학교 내의 모든 건물을 연결통로로 길게 이어놓았다. 이름하여 연변과기대의 만리장성이다. 그 복도마다 온통 조선의 정취와 풍습을 느끼게 하는 골동품과 장식류가 진열되어 있다. 장소도 절약할 겸 방문자 누구나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열린 박물관인 셈이다. 미술을 전공하신 총장 사모님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분의 본업(?)은 식당 앞 슈퍼마켓 점원 아줌마이다. 총장 사모가 슈퍼에서 일하는 것을 미처 몰랐던 방문자들이 종종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일손이 부족한 대학의 구석구석마다 자원봉사자로 돕는 사모님들의 손길들이 이 대학을 만지고 있다.


아직은 도서관다운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임시 도서관의 열람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밤에는 식당을 자습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녁 식사만 끝나면 학생들이 식당의 빈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밤 열두 시까지 조용히 공부하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기만 하다. 중국의 사회주의 교육 체제 내에서는 일단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졸업 후에 국가에서 책임지고 학생에게 직장을 분배시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은 중국 대학에서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북산가 언덕에 높다랗게 세워진 학교—,
깜깜한 밤중에 환하게 불을 밝힌 도서관—,


갑자기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언젠가 활빈 교회의 김진홍 목사님이 조선족 사기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하여 우리학교를 방문하신 차에 교직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당신이 찾아오신 곳이 바로 선구자의 땅임을 의식한 그 분이 자기가 바로 선구자라고 하시며, 선구자의 뜻은 “선천성 구제불능성 자아도취증” 환자를 뜻한다고 하여 한바탕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와보니 김진경 총장님을 비롯하여 모두 자기보다 중증(重症)인 선구자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다시 한번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북산가 언덕의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며 바로 이곳이 과거 우리 민족의 한과 쓰라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만주 벌판임을 실감하곤 한다.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역사적인 배경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라를 빼앗겼던 근대사의 뼈를 에는 아픔들이 스며있는 땅이 바로 이곳이다. 그 시절 일본의 학정을 피해 개나리 봇짐을 지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개간했던 땅들이 지금의 만주 곡창을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에 항거하여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고향산천의 부모 형제를 내버려둔 채 일신의 고초를 무릅쓰고 찾아 나선 독립투사들은 또 어떠하였던가?


그 시절을 향한 역사적 향수감에 젖어 한번씩 시간을 내어 찾게 되는 곳이 또한 인접해 있는 용정시(龍井市)이다. 연길에서 시골길을 삼십 분 남짓 차를 타고 가다보면 거대한 사과배 농장을 지나게 되고 올망졸망한 용정시 한 복판에 옛 대성 중학(지금은 용정 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터를 찾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아로새겨진 시비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한 의미를 한참 묵상하다가 발길을 돌려 오르는 곳이 일송정(一松亭)이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뽑아버리기 위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미 제거되고 말았다는 역사 속의 소나무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산꼭대기에 솟아있는 초라한 정자 옆에는 어느덧 새로 심은 작은 소나무가 한 그루 미래의 소망을 키워가며 자라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송정에서 사방으로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는 만주 평야와 그 속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란강을 굽어다보고 있노라면,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장을 요동쳐 흐르는 한줄기 감개를 억제치 못하여 선구자라는 노래, “일송정 푸른 솔은—” 을 한바탕 외쳐 불러야 속이 후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와 같은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만주 벌판에 대한 옛 향수를 자꾸 느끼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작 중국인들은 만주(滿洲)라는 말 자체를 과거 자신들이 일본에 의해 겪었던 치욕의 역사를 돌이키는 말로서 생각하여 듣기 싫어하며 쓰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인들이 이곳이 바로 우리 조상 고구려 사람들의 영토였다는 것을 내세워 “만주도 우리 땅”이라는 등의 눈치 없는 소리를 하게 되면 비록 우리는 그것을 반 농담 삼아 하는 말일지라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다민족 국가로서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이 국가의 존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강 위구르족과 티벳족을 위시한 정치적 독립을 꾀하는 소수민족과 더불어 역사적 배경 속에서 향수를 느끼는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족들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는 것이다. 비록 소수 민족의 인구 비율은 한족에 비해 10% 미만이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중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학교로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조선족 학생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세운 목적 자체가 민족 운동을 하여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자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승화시켜 재해석하게 된다.


중국 지도를 보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우리 졸업생 중 하나가 중국과 한반도 지도를 보여주며 닭이 젖통을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닭에게 복음의 젖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이 물려주신 젖통이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닭 주둥이에 매달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한반도가 조금은 처량하게 보이던 나는 기발한 설명에 귀가 번쩍 뜨이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실로 이곳은 선구자와 독립투사의 땅이다. 어찌하여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사람들만이 선구자이겠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보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 미래의 대륙에 먼저 들어와 새 시대의 일꾼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 학교의 교직원들이야말로 선구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하여 지난날 일제 치하에서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만이 독립투사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묵묵히 일하고 있는 우리 교직원들이 바로 독립투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위시한 지난날의 선구자와 독립투사가 모두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들의 가슴속에도 고향 땅을 떠나올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야했던 손가락질과 조롱의 남모르는 아픔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땀과 피에 의해 나라가 회복되었듯이 그리고 그 후에야 그들을 회고하는 시비가 세워진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그날 천국에서 이들을 위한 기념비가 찬란하게 세워질 것을 믿는다.

[안종혁] 유학생 이민자의 여리고성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 이민자의 여리고성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6:20)”


여호수아서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그곳 거민과 가축까지 진멸하고서, 여리고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랍기도 하지만, 때론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서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따라 타국에 정착해야 하는 유학생 이민자들은 그곳 거민을 여호수아에서처럼 진멸해야 될 것인가? 물론 그런 말씀은 아니다.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나게될 여리고성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될 것인지를 본 컬럼을 통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여리고성은 어디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에서 새삶 일구기는, 새로운 간척지로 이주해간 철거민의 새삶 일구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이방 족속과의 수 없는 전투를 감내하며, 새삶의 터전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앞에 둔 두려운 삶이었던 것이다.


10여년전에 나와 함께 공부하던 유학생동료들은 거의 모두가 고국에서 직장을 얻고 돌아가버렸는데, 나만 홀로 미국에 이민자로 남게되었다고 생각이 되었을 때 가졌던 그 불안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학위를 끝내고, 아직 영어로 말하고 듣기도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대학의 조교수로서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학부 Senior 강의를 첫강의로 맡았다. 그 첫 강의 시간에 나 자신이 들어도 잘 이해가 안되는 영어로 횡설수설 한시간을 떠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미국이라는 새땅에서 가족과 함께 새 삶의 터전을 잘 일궈야된다고 굳게 다짐하며 나아갈 때마다, 언어의 장벽, 문화와 관습의 이해부족 및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의 결여는 나를 가장 괴롭히던 장벽이요 넘기 힘든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뿐만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이 장벽과 견고한 성들은 틈만나면 나를 공격하여 낙심하게 만들곤 하였다. 오늘날 이민생활을 시작하는 유학생들이 넘고, 극복해야 할 첫 번째의 여리고성이란 바로 새땅에서 새삶을 일굴때에 우리를 낙심케하는 이런 문화와 환경의 장벽이 아니겠는가? 미국땅에서 새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있어서, 생업 속에서 극복하고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성은 지금도 수없이 존재하는 셈이다.


뿐만아니라, 뉴에이지 운동과 종교의 다원화 현상으로 여리고성에 살던 거민들이 보여주었던 영적 혼탁함이 이민자들이 사는 곳마다 넘쳐나고 있으며,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사회가 불문율처럼 받아드리고 있는 동성연애의 합법화, 이혼의 범람, 마약의 홍수, 성적타락, 종교의 다원화 및 뉴에이지 운동으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지키며, 어떻게 저 혼탁한 것들로부터 이땅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파해야 할 견고한 두 번째 여리고성은 바로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부터 멀어지게 할 수있는 이런 영적인 혼탁함이다. 신명기 20장 16-18 말씀에서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신20:18)”라고 하셨다.


우리의 실제적인 절망감은 이러한 외적인 영적 타락함을 우리가 쉽게 고칠 수도 또 극복할 수도 없다는데 있다. 물론 끊임없이 이 세상이 이러한 타락함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되며, 하나님이 언젠가는 꼭 회복시켜주시리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영적 혼탁함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지킬것인가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여리고성과 달리, 이 두 번째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은 결국 우리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의 혼탁함에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여리고성의 모든 거민을 진멸하시도록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영적 혼탁함과 죄악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들을 진멸하기까지 내몰아야 할 것이다.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서 여리고성의 모든 것을 네 손에 붙였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군사는 여리고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세동안 돌았다. 제 칠일에는 성읍을 일곱번 돌고,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며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만반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을 여리고성의 거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이적이 무엇인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크신 권능으로 드러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식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여리고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의 무너짐을 위하여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싸웠던 병기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었다(고후10:4-5). 즉 모든 이론과 세상의 지식을 파하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새로운 이민생활 속에서 만나게되는 문화와 환경의 외부 변화에서 오는 두려운 여리고성과 외적 영적 혼돈과 혼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성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이민생활속에서 참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을 소유하는 길은 오직 유학생활과 이민생활 중에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에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갖게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며, 주님의 말씀안에서 내면세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 질서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여리고성의 진을 파하는 우리의 강력이요, 꿈(vision)이시기 때문이다.


아간의 Integrity의 부재


여리고성 함락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유다 지파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한 여리고성의 함락과 함께 바친 물건을 취하는 범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된다. 이는 곧 쉽게여겼던 아이성의 첫 공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고, 삼십육인이 죽는 징벌을 받게된다. 이 패배는 단순한 것 같으나, 앞으로 다가올 수 없는 이방족속의 도전을 생각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낙심케하고 근심스럽게 하기에 족한 돌발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였다.


아간은 외투한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내어서 그 물건을 장막에 가져다 감추었다. 광야를 지나며 입었던 옷들은 비록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맵시나 모양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멋있게 장식된 아름다운 외투 한벌을 보는 순간 너무도 입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은덩이와 금덩이를 보는 순간에, 가나안 땅이라는 새로운 이민처에서 새 삶을 일구며, 자녀를 길러야될 가장으로서 아간은 새 출발을 좀더 넉넉하게 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몰래 가져다가 자신의 장막안에 숨겨둔 그 귀한것들을 누가 알 것인가? 장막에 머물때마다 수없이 가나안 이민생활의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허물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간은 하나님의 베푸시는 기적의 역사를 광야를 건너며 몇번 보긴 하였지만, 다 그건 우연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또 멸시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지파와 족속을 찾기위하여, 지파를 뽑고 또 족속을 뽑을 때도, 아간은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를 뽑으리라고 끝내 생각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파 뽑기가 시작될 때에 선뜻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자복하고 나섰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끝내 아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탐욕의 죄로 양심의 눈이 멀어버린 탓이었을까? 아간은 끝까지 하나님의 실패를 기다렸다. 하나님이 실수하시기를 말이다. 그러나, 결코 실수하거나 실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 아간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숨겨둔 것들과 그의 아들과 딸 모든 가족 및 그의 장막의 모든 것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서 불사름과 함께 돌무더기 속에 가나안 이민의 꿈을 허망하게 묻어야 했던 것이다.


탐욕은 죄악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다. 미국 직장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해진 법과 규범을 준수하며,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을 얻는 것이든지 승진이든지,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이루어가야 하는 사회이다. 복권에 당첨됨이 없이는,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는 일확천금을 얻기가 어려운 사회이다. 아무리 능률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역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법칙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동일하다. 특별히, 미국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제일 중요한 성품이 있는데 바로 “integrity”이다. Integrity라는 의미에 꼭 부합되는 한국말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 의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성품으로서 지, 정, 의가 조화를 이룬 성품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는 미국 땅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세상에서의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틀림없이 그들이 일하는 직장과 사회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불법과 편법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권모술수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분명히 미국직장에서 결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정직하지 않으며, 진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며, 바닥이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대학에서도 자기이득에 부합하면 어제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는 미국 교수를 여럿 보았다. 모두가 우둔하며 속아주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integrity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주위의 동료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그런 사람은 언젠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쓸리움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아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삶속에서 신앙의 integrity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뽑힐때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ntegrity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온 가족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평가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해서이지 결코 크리스천의 신앙심을 통하여서가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자는 다짐은, 즉 세상의 삶속에서도 integrity를 갖자는 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믿지 않는 자들이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 아니겠는가? Integrity는 미국 직장과 이민생활에서 필요한 크리스천의 빛과 소금이요, 균형있는 예배와 삶의 열매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에 더하여, 유학생은 학업에 충실해야하고, 이민자는 이민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이민목회자는 이민자의 영혼을 돌보는데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 integrity의 결여 때문에, 이민사회와 이민교회,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마도 이 시대에 한국이민 크리스천에게 가장 요구되는 삶은 바로 integrity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까지 단창을 잡아라


이스라엘의 회개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아이로 올라가라 하시며, 아이성에서의 승리를 보장하여 주신다(수8:1).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이성의 교훈은 아무리 우세한 힘과 전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땅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수한 실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이민하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 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또 아이성 정복의 전략을 다시 세운다. 전략은 성공하였고, 이스라엘이 거짓 패하여 광야길로 도망할새, 성문을 열어놓고 모든 아이와 벧엘족속이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 내가 이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수8:18)”하신 말씀에 따라, 단창을 든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일어나 성읍을 점령하고 불을 놓았다. 이에 놀란 아이성 사람들이 돌이켜 왔으나,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수8:26)”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는 말씀은 복병이 일어나도록 하라는 신호일수 있기에, 여호수아는 그저 한번의 신호로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켰어도 무방할뻔 하였다. 이미 복병은 일어나 아이를 공격 할테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는 약속해주신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거민을 진멸하기 까지 단창을 잡아든 손을 거두지 않고 아이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출애굽 후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때와 비슷하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때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말렉을 쳐서 파할때까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한후, 그 둘이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려서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였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17:14)”라고 하셨으니, 지금 아이성을 공격하며 여호수아는 그 때 모세에게 보여주었던 “여호와 닛시” 와 끝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모세가 보여주었던 “최선의 노력”의 신앙의 모범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씀에 따라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이 성취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민생활과 직장생활의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며, 여호수아처럼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에 있다고 하겠다. 육신적으로는 아프게 저려오는 단창을 든 손을 거두고 싶었을 여호수아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편안함과 안일함에 안주할 수 없었던 여호수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일을 조금만 하다가도 안되면,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버리며, 쉽게 포기해 버리는 크리스천의 태도는 여호수아가 보여주었던 진지한 삶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여기서 예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꼭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는 식의 “성공의 공식”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의 삶에서도 유익한 결과를 언젠가는 얻는다는 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장담할 수 있다(히11:6).


이민자로서 주어진 직장의 업무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예배생활에만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있다면,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해야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중심과 최우선의 위치에 주님을 모시고 또 인정하는 것이야 필수적인 크리스천의 기본신앙이다. 어떠한 상황과 여건하에서도 최선을 다한 후에 얻어진 일의 결과와 응답에 대하여는, 만족할 만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주님의 결정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이미 선포되었는데도, 이의 성취를 위한 전략도 없고, 최선을 다함이 없이 게으르고, 또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런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은 무슨 일이든 주어진 사명에 끝까지 단창을 잡았던 여호수아처럼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어진 결과가 무엇이든간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충고는 아무리 권면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기


심지 않으면 거둘수가 없다. 생명의 씨앗 뿌리기가 그렇고, 세상의 삶이 그렇다. 미국은 다민족이 함께 모여사는 melting_pot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도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이민와서 개척정신을 주장하며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흑인은 노예로 팔려온 선조들의 눈물과 회한과 땀으로 얼룩진 곳에서, 끝내는 인권운동을 통하여 쟁취한 자유와 번영을 주장하며 살고 있다. 중국인은 미국의 동서를 잇는 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예처럼 팔려온 선조들의 기득권 속에서 곳곳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거의 모든 미국의 이민자의 삶속에는 그들만이 주장하는 기득권이 있고,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민자는 무엇을 가지고 미국의 번영을 누리고 나누며 살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기득권이나 권리가 있는가? 백년전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은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긍지요 자랑일 따름이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목사 주도하에 일어난 인권운동의 결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유색인종 분리정책은 많은 동양계 이민자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에 사는 minority들이 그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희생하며 싸울때에, 우리 한국이민자는 거의 참여함이 없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미국땅에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득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굳건한 신앙외에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별로 심은 것이 없는 곳에서 지금 당장 우리가 풍성함으로 거두길 원하는가? 모든 언론은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고 쓰고 있으며, 또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극단적인 발언은 어느 곳에서든지 생존을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폭탄과 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안계 이민 유학생들이 직장에서,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인종차별의 벽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유학생 이민 가정들이 넘어야하고 정복해야할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수없이 산재해 있음을 본다. 진급에 누락되어 분노하고, 열심히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너무 쉽게 해고되어서 낙망하는 동양계 유학생 이민자를 지금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여호수아처럼 끝까지 단창을 잡고 최선을 다하여 살기로 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는 이민자 가 깊게 생각해야할 선택이다. 심지 않은데서는 결코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형민] 미시간 앤아버 지역 Unity Praiser and Prayer (UPP) Meeting 소개

유학생 사역


미시간 앤아버 지역
Unity Praiser and Prayer (UPP) Meeting 소개


지난 eKOSTA 11월호의 배헌석 목사님의 글 “Beauty of Oneness, Beauty of Unity” 에서 미시간 앤아버 지역의 연합기도모임이 소개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모임의 시작과 지금까지 3년여간의 과정, 앞으로의 방향등을 모임에 함께했던 유학생, 코디네이터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함께 나누고자 한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모임


1999년 봄, 지금은 A국에 선교사로 가있는 부부를 비롯한 몇몇 청년 및 집사님들이 모여 앤아버 지역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중보기도 찬양 모임을 시작하자는 제안을 했다. 준비모임이 한번, 두번 계속 되면서 이러한 연합모임이 생기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계셨던 분들이 있으셨다는 사실에 다들 놀랐고, 목사님을 모시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각자의 마음에 흥분과 열심을 주심을 서로 확인했었다. 당시 모였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 모임이 코스타에까지 소개될 줄은 몰랐을 것 같지만, 각자 마음 한쪽에서는 우리가 뭔가 이 작은 커뮤니티에 변화를 가져오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다는 막연한 느낌은 있었던 것 같다.


또 한가지 우리에게 연합모임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주셨던 부분은 이 작은 커뮤니티에 있는 한인 교회들의 분열의 역사를 우리세대, 우리 다음세대 부터는 이를 반복하지 않고, 이전의 아픔과 죄악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올해로 백년을 맞는 한국 이민의 역사가운데, 이곳 미시간 앤아버지역에도 한인들이 정착을 하셨고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었다. 처음 시작되었던 한 교회로부터 현재의 10여개의 교회까지는 서로간의 분열과 다툼이 그 배후의 한 부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감사했던점은 이런 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품안고 기도할수 있는 마음들을 주셨다는 점이었다.


앤아버 지역에서는 다섯 한인교회 목사님들께서 정기적으로 한달에 한번씩 모이시는데, 목사님들께서도 연합기도 모임에 대해서 전적인 지지를 보여주셨고, 각 교회를 돌아가면서 격주로 한번씩 모이기로 결정하고 기도모임은 시작되었다.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 모임


어떠한 모임이든지 모임이 처음에 시작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부분이지만, 더 중요한점은 모임의 방향성을 잃지 않으면서 꾸준하게 연속되야 하고 그 안에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과 실라가 사역중에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와 찬미를 드리기를 감옥안에서도 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착고가 풀린 후에도 간수에게 복음을 전한 점은 이 연합 기도모임이 결국 크리스챤 라이프의 핵심인 기도와 찬미, 전도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알수 있다. 우리 연합모임에도 up and down 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기도와 찬양에 얼만큼 포커스 되어있었는가가 당시 모임의 집중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최근 이 연합모임에 좋은 영향을 받아서 근접한 디트로이트, 랜싱 지역에서도 연합 찬양 집회등 연합 모임이 생겨나고 있는점은 너무도 감사할 일이다. 이전에도 이러한 연합회 성격의 모임은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이들 모임이 하나의 모임 (organization) 으로서만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앤아버 지역의 연합기도모임은 organization 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유기체 (organism) 로서 존재해 왔던 것 같다. 기도와 찬양이 주된 모임, 다른 다섯 교회 형제 자매들이 모인 다이나믹한 모임이면서, 그안에 경쟁보다는 나눔과 격려가 있는 모임이 되고자 했던것이다.


또한 꾸준이 이어졌던 기도모임 이외에도 매학기 한번정도 연합으로 준비하는 찬양집회가 각 교회별로 순서를 정해서 또는 주변의 대학들인 University of Michigan,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캠퍼스 강당을 빌려서 행해져 왔다. 처음 캠퍼스 생활을 하게되는 신입생들, 타지로 오게된 유학생들이, “아, 이곳에도 크리스챤들이 이렇게 함께 하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구나.” 느끼며 함께 참여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지난 두번의 찬양집회는 캠퍼스 강당에서 행해졌는데, 학생들이 직접 생활하고 공부하는 곳에서 울려퍼지는 찬양소리와 말씀에 이 캠퍼스 또한 주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기도모임이 계속되는 가운데, 자칫 작은 모임으로 안주하기 쉬운데, 이런 식의 찬양, 전도 집회를 통해서 각 교회별로 달란트가 있는 부분들이 함께 연합해서 더욱 강하고 하나일 때 더 아름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하나됨


각 교회별로 획일적인 하나됨, 즉 우리가 똑같은 색깔과 모양의 다섯 모임을 단순히 하나로 묶어놓고자 했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서로 다른 섬기는 부분이 있는 한 유기체로서의 하나됨과는 정반대의 모습일 것이다. 앤아버 지역의 10여개의 교회중에서 먼저 목회자 정기 연합회의 다섯교회가 모였는데, 서로다른 역사와 배경의 교회들이다 보니, 각 교회 청년부 크기와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교회들이었다. 이중에는 청년부가 최근 몇 년동안 숫적으로 급격히 증가한 교회도 있었고, 또 그 반대의 교회도 있었는데, 이런 다른 상황들이 자랑이나 부끄러움이 아닌 현재 각 교회의 상황 있는그대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그런 성숙한 모습이 우리 모임에는 절대적이었다. 어느 한 교회라도 연합기도모임에 나왔는데, “우리가 여기에 있을 모임이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이런 모습은 정말로 그 모임에서 서로 무릎꿇고 회개하고 고쳐나가야 할 모습인 것이다.


실제 지난 몇 년간 청년부 회원들의 급격한 숫적 감소와 교회내 사정으로 힘들어 했던 한 교회가 우리 연합모임 가운데 있었다. 각 교회별로 서로 소식을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에 그 교회 형제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모임안에서 전할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교회의 기도제목과 소식을 나누었는데, 서로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기도했고, 이것이 약점을 잡히는 순간이 아닌, 어려움을 나눔으로서 그 무게가 덜어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감사한 일은 그 교회가 최근 청년부의 부흥의 싹이 보이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된 것들을 풀어놓으시는 것들을 다들 목격했다는 점이다. 만일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들이 아름다운 다양성 가운데 나누어지지 못한다면, 연합모임은 비슷한 색깔을 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밋밋한 모임이 되고 말 것이다.


한인사회를 넘어서는, 1세와 2세가 함께 모이는 연합


작년 4월 앤아버가 속해있는 와시테나 카운티에서는 정말 가슴 벅찬 이벤트가 있었다. 60여개 지역 교회들이 Eastern Michigan University 체육관에 모여서 종려주일을 함께 기념하는 자리였다. 인종과 배경, 언어가 각기 다른,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이름아래 하나가 된 2천 5백여명이 무대를 중심으로 반으로 나누어진 체육관의 절반을 채우고 함께 주를 찬양하면 말씀을 나누는 자리였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룹으로 모여서 손을 잡고 커뮤니티가 그리스도 앞에 돌아올것과 미국 전역을 놓고 함께 기도하는 순간 넘치는 감격으로 전율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연합가운데 분명히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이 커뮤니티에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미 전역에서 대학 축구 경기장으로는 제일 큰 미시간 대학 스태디엄에서 열리는 크리스챤 대회를 꿈꾸고 있다. 대학이 바뀌면, 그 사회를 이끌 지성인들이 바뀌고, 결국 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데, 미국내의 이런 대학타운들이 바뀌고 그 안의 크리스챤들이 힘차고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분명히 그리스도 앞으로 무릎꿇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곳 앤아버 지역은 학교타운이기 때문에 한인 유학생 및 교포의 숫자가 약 2천 5백여명 되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서 한인들의 숫자가 어느정도 있는 지역이다. 한인 학생들도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으로 유학온 학생 및 가족들, 한국에서 대학으로 유학온 학생들, 교포 대학생, 교포 대학원생등, 다양한 부류의 한인학생들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결코 작지 않은 학생 그룹이지만, 실제로 학교내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함께 모아 내었던 적은 거의 없는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런 집단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한인 커뮤니티에 최근 3-4년간 음주와 관련된 한인 학생들의 죽음이 대여섯 차례 있었다. 한인 사회에는 충격이었고, 우리 연합기도모임에서도 이제는 우리도 이들을 품고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어렵고 힘들어 하는 그들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게 되었다. 그들중에 몇몇은 교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었던 학생들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고 순응하는 한인사회가 아닌,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더 이상의 안타까운 생명을 잃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교회 목사님들을 비롯한 커뮤니티 리더들이 한인사회의 우려를 학교에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대응에 고심하던 학교측은 마침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받은 한인 P 선생님에게 학교안에 포지션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관련된 일, 특히 한인 및 소수민족 유학생들에게 관련된 사안들이 있으면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 9월에는 한인 학생들 환영의 밤 행사가 학교측 후원으로 학교 부총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교포, 유학생 할 것 없이 다양한 한인학생들이 모여 서로에게 이러이러한 한인 단체들이 있고, 도움이 필요하면 줄 수 있는 여러가지 모양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행사 자체도 중요하고 아주 성공적으로 치뤄졌지만, 이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포와 유학생, 학교간에 서로 준비모임들을 통해서, 우리안에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소득이었다. 연합기도모임에서도 참석해서 우리의 의견을 반영하고 함께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커뮤니티에 관련된 모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도울 수 있음을 알리고, 각 교회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전달하는 것이다.


연합안에서의 성장


지난 3년여를 돌아보면서 이곳에서 10년넘게 신앙생활을 한 어느 자매는 우리 커뮤니티, 즉 한인 사회가 많이 바뀌었음을 몸소 느낀다고 하였다. 특히 한인 교회들간에 서로 부흥회나 세미나같은 행사가 있으면, 서로 가능한 범위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찬양팀 같은 경우에 몇몇 교회가 연합하여 한 팀을 이루어서 준비하는등, 눈에띄게 서로 협조하고 돕는 모습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나누어 졌지만, 그간에 많이 어려워졌던 한 청년부가 연합모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서로 중보하는 가운데, 회복해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연합, 어려울때 돕는 연합을 몸소 보게 된것에 너무 감사하다.


코스타 형제 자매들께도 각자의 속한 커뮤니티를 바꾸는 이러한 연합운동을 시작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단순히 보기 좋은 연합 단체가 아닌, 그안에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으며, 다양성이 존중되면서, 1세와 2세가 하나되는 연합, 한인사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커뮤니티내의 전 그룹을 품는 연합. 그래서 미국 전역에서 또 대륙을 넘어서 기도로 연결되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넷트웍이 탄생되기를 소망한다.

김형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후, University of Michigan에서 기계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현재 한국에 귀국하여 회사생활을 하고있다.

[주명수] 기독교 교도소운영, 우리 모두의 책임

법과 복음


기독교 교도소운영, 우리 모두의 책임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한 민간교도소 설치를 위한 법률 제정 필요성 강조와 정부 당국자들의 인식 전환으로 말미암아 2000. 1. 28. 법률 제6206호로 민영교도소등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1. 7. 1.부터 이 법은 시행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축이되어 기독교 민영교도소 운영을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고 이 법인은 법무부에 민영교도소 수탁신청을 하였다. 법무부는 지난달 이 법인을 민영교도소 수탁자로 최종 승인하였다고 한다.


이제 기독교가 교도소를 운영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이 법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택한 운영모델은 민간위탁형 모델이다. 그러니까 어느 민간 단체가 민간교도소 운영수탁자로 지정이 되면 그 단체는 격리 뿐만 아니라 격리를 위한 시설까지 건축하여야 하고 물론 교화도 책임을 져야한다. 이제 기독교 교계는 교도소 시설을 지어야하고 격리에 필요한 물적, 인적자원을 갖추어야 한다.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델은 많은 재정적 부담을 져야한다. 약 300억원의 자금이 소요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시설 설치 비용일 것이다.


앞으로 인건비도 조달하여야 하는데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기독인들이 자원봉사를 하면 되겠지만 그러나 필수요원들에게 까지 자원봉사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법무부장관과의 구체적인 위탁계약을 통해서 수탁자에게 지급되는 위탁비용등이 정해 지겠지만 국가예산 절감의 차원에서도 민영 교도소 설치를 법으로 통과시켰는데 국가로부터 충분한 위탁대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면에서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민간교도소와는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탁자로 지정된 기독교계에서 충분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공은 우리 믿는자들에게 넘어왔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은 교도소를 믿음으로 운영할 수 있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을 관리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만약 처음으로 시행되는 이 기독교 교도소 운영이 우리의 관심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민영교도소운영에 관심을 갖는 다음 세대는 참으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 교도소 운영문제를 놓고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시험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한국교인들이 얼마나 연합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연합 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기독교 교도소 운영 문제는 어느 특정인이(사람이든 교단이든 교회든) 주도권을 잡고 힘 자랑의 방편으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한국교회 전체의 연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물질적으로도 연합되어야한다. 인적자원으로도 연합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처럼 연합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몇몇 대형교회, 교단만 참여하도록 하면 안된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작은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모든 교인, 교회들을 설득하여야 한다. 단지 몇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거두는 것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은 것을 거두는 것이 훨씬 좋다. 범기독교인 모금운동이라도 펼쳐야 한다. 인적자원을 쓰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교회, 특정교단에 소속된 사람들로 편중되면 안된다. 범교단적으로 인물을 골라야한다. 그렇게해야 교정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균형잡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보수니 자유니 따지면 안된다. 참으로 준비된 전문가라면 교단에 상관없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동안 기독교계 인사들이 기독교 교도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소리쳐 왔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미 수탁자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인들이 옳은 일에 단합된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교회건물 하나 건축하는데 몇 백억 씩 들이는 실력이 있다면 우리가 단합하여 교도소 한 동 지어 많은 죄수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주는 일인들 왜 못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단합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기독교 교도소운영의 문제는 어느 개인, 어느 단체의 일로 끝나서는 아니된다.


[이은정] Special Issue of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Christian Faith and the Choice of Research Topic in the Natural and Applied Sciences

eKOSTA 서평


Special Issue of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Christian Faith and the Choice of Research Topic in the Natural and Applied Sciences


The Special Issue of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Journal of the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volume 53, number 4, December 2001, reports on the presentations from the conference, “Christian Faith and the Choice of Research Topic in the Natural and Applied Sciences,” organized by InterVarsity Graduate and Faculty Ministries, held October, 2000, at the University of St. Mary’s of the Lake, Illinois (asa@asa3.org).


It starts with the call, “Jesus, the Lord of science, invites you to reflect his grace and to build God’s Kingdom through your research“. Then it takes readers to several thought-provoking issues.



“Does God Care About Our Research?”
“How Can I Make Jesus The Lord Of My Research And Teaching?”
“How Does God Guide Our Decision?”
“How Does God Lead Us To Our Calling?”
“What Discipline Perspectives Guide Us: Bioscience, Physical Science And Applied Science?”

“What Is The Role Of Worship?” “What Are The Christian Foundations For Doing Science?”
“What Lessons From The Past Aid Our Choice?”
“What Are The Research Needs In Science?”


These issues are addressed by leading scientists. The presenters include John Suppe (Princeton University professor and authority on structural geology and plate tectonics), Brad Keister (National Science Foundation program director), Colin Russel (United Kingdom Open University professor and interpreter of science history), William Demski (Baylor University philosopher, mathematician and spokesperson of intelligent design), and Calvin Dewitt (University of Michigan professor and advocate of environmental ethics). The vibrant discussions with participants including graduate students, postdoctoral fellows and professors follow through discussion columns. The discussion session shares how to play wisely as a Christian within the system of the science profession. It also gives very practical advice on how to choose advisors and research topics. It can take you beyond graduate school to your profession of calling.


Christian graduate students will find many kindred spirits in this book and can obtain better understanding of their own struggles as Christians in the science profession as they watch these sincere Christian participants pray together, ponder and discuss issues, debate critical points, and listen to testimonies. Their thoughtful presentations will make readers gain new understanding, enlarge their perspectives and strengthen their faith in God who delights in us as we study science.


I was most touched by the testimony, “How does God lead us to our calling,” by Charles Harper who is executive director and senior vice president of the John Templeton Foundation. He shares his spiritual and intellectual turmoil as God blocked his way to what he perceived to be his calling:


I thought that I had made a mistake in my calling, that I had been stubborn and foolish and stupid, and that God had just decided to let it crash for me.


Oh, that is precisely what I screamed when He led me into unimaginably difficult paths! The only difference was that I screamed in Korean. Do you feel as if you are left alone and isolated in the vast and secular field of science? Do you hear the small but clear voice that you may find friends who can share your love of God and science but in a different language? This book invites again, “Be aware of the larger community that carries many of the same concerns and passions that you do in your science work.


Open your heart to this challenge. Share their insights and enlarge your dialogue in the Christian community. You will be blessed.


* (편집주) 영어로 받은 원고의 원래 의도와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영어 원문 그대로를 싣습니다.


이은정
University Of Texas at San Antonio 기계공학과 교수. Northwestern Universtiy와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