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열망

이코스타 2002년 8월호

월드컵 잔치가 끝난 지 벌써 3주 째 접어들고 있지만 그 열기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아직도 길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고, 각종 매스컴에서 감격의 순간들을 반복하여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잊을 수 없는 감격과 희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사회에 흔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사회상을 반추해 볼 때,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왔는지 가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를 통해 우리가 가슴 속 깊이 묻고 있던 회한과 상처들의 많은 부분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각, 모든 이해 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로 일치하는 마음과 정신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오랫동안 우리를 불행하게 하던 패배의식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작은 힘들이 모여 커다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체험. 그 어느 때 공권력을 동원하여도 모을 수 없었던 단결된 모습이 자율적인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더욱 값지게 느껴집니다. 시청 앞거리와 온 거리를 가득 메운 거리 응원의 물결과 각 가정에서 직장에서 열렬한 응원을 보내던 마음들. 저는 그것이 바로 하나로 모아진 기도의 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룹 중보기도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지요. 온전히 하나로 마음을 모아 진정한 열망을 표현하는 것. 모든 상처와 아픔을 다 드러내고 이제 무언가를 위해 진지하게 나아가길 원하고 구할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를 경험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외세의 침략과 민족 간의 전쟁으로 찢기고 상처받은 척박한 작은 땅의 슬픈 역사를 돌이켜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민족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들에겐 꿀과 젖이 흐르는 땅에 대한 꿈이 있었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고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겠지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과연 온 민족이 한 마음으로 지향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가 이룩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푯대를 가슴 속에 담아 본 적이 있었는지, 타오르는 열망으로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져 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거리를 메운 인파들의 함성이 찬양과 기도로 바뀌는 날이 오기를 꿈꿉니다. 우리 사회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정직하고 성실한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신의를 지키는 관계를 맺기를, 아프고 지친 이웃이 내 가족이 되는 열린 사회가 되기를, 주님이 주신 계명이 실천되는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날을 꿈꾸며 기다립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전도의 열망이, 복음의 육화(肉化)에 대한 사명의 열망이 뿌리내리길 기도합니다. 우리 사회와 역사를 향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의 강에서 모두가 생수를 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계를 향해 넘치는 축복을 되돌리는 샘물 같은 역할을 우리가 감히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견딜 수 없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가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열광처럼 우리를 사로잡기를 기도합니다.

[차문희] 섬기는 기독교사

이코스타 2002년 8월호

글로리아,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때? 많이 힘들지 않아? 요즘 애들이 워낙 말을 안 들어. 정상인 아이들도 그런데, 장애 아이들이야 오죽하겠어? 쯧쯧…. 이렇게 어떤 분들은 혀를 차신다. 사실 이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요즘은 교사의 권위가 몇년 전에 비해서 많이 상실되었다. 교육대학을 지원하는 학생수가 해마다 주는 실태이고 여름방학 동안에 빈 학급의 교사를 채용하느라 교육청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심지어,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교사를 찾지 못한 학급에서는 교육경험이 전혀 없는, 소위 임시교사라 불리는 Substitute 밑에서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교사의 이직률은 해마다 늘고 있고 – 보통 5년에서 7년이 한계라고 한다 –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돈이 비싼 사립학교만을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조지아주의 한 공립학교에서 내가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5 년째 들어간다. 나는 학습장애, 정서장애,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서 장애가 심한 아이들은 특수 학급에서만 수업을 받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비장애 학생들과 통합교육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일반교사들과의 접촉이 많은 편이다. 아이들의 장애와는 상관 없이 미국의 학교는 심한 장애를 갖고 있다는 점을 나는 그 동안의 교사생활을 통해서 발견했다. 교사의 이직률이 많은 이유와 많은 부모님들이 사립학교를 선호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 친엄마 친아빠와 함께 한 집에서 사는 학생을 거의 찾아 보기가 힘들다. 계부(Step father), 계모(Step mother) 혹은 조부모님들과 함께 사는 아이들, 그리고 편부모(single parent) 밑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가정에서 마땅히 배워야 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늘 정서불안으로 행동에 문제가 있게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환경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회의 중심인 가정의 무너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분이 가정 속에서 점점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주 월요일 수업 시간 전에 아이들이 주말을 어떻게 지냈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주일에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거나 주일학교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은 1달에 2-3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이의 취침시간 전에 베드타임 스토리(bed time story)로 성경을 읽어 주는 부모님들도 찾아 보기가 힘들고 취침시간 전에 축복기도를 해주는 부모님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을 이유로, 개인기도는 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기도는 할 수가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부활절과 성탄절에 대해서 가르칠 때도 종교적인 내용들을 다룰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탄절에 대해 가르친다면, 산타클로스와 루돌프는 가르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고, 또 부활절에 대해 가르친다면 이스터 버니(Easter Bunny)에 대해서는 가르쳐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진정한 성탄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진정한 성탄과 부활의 의미도 모른 채 우리 아이들은 이 날만 되면 공휴일로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인 교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성경을 가르칠 수는 없지만, “teaching”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간 한 시간 영어, 산수, 사회, 과학 등을 가르칠 때 정성껏 수업계획(lesson plan)을 세우고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즉, 전문성을 갖고 지도하는 일이다. 둘째, 아이들의 문제점을 귀 담아 들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 자신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학생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다른 사람들을 섬겼던 것처럼 기독교적인 교사 역시 겸손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