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정] 인디애나 블루밍턴 지역 인디애나 대학 한인 기독학생회

유학생 사역 리포트


인디애나 블루밍턴 지역 인디애나 대학 한인 기독학생회
Indiana University Korean Christian Fellowship (IUKCF)


지난 3월 중서부 지역 리더 수련회에 이어, 다시 eKOSTA를 통해 인디애나 대학 한인 기독학생회(IUKCF)를 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소개의 글을 통해서. 캠퍼스에서의 삶 가운데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기를 원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작지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U한인 기독학생회는 1998년 3월, 5명의 음대 형제 자매들이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기 원함으로 음대연습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1주일에 한번씩 모여 예배를 드렸고, 기도하는 가운데 더 많은 지체들이 모일 수 있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해 9월부터 이 모임이 IU 음대 한인 기독학생회(Indiana University Korean Christian Musicians’ Fellowship)로 공식화되어 International Center에서 첫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99년 11월 guest speaker로 오셨던 이영길 교수님(이미영 사모님)을 12월에 모임의 초대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고, 인디애나 대학 Student Organization에 IUKCMF (IU 음대 한인 기독학생회)로 공식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음대생이 아닌 타단과대 학생들이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모임을 섬기는 지체들을 중심으로 음대생들 뿐만이 아닌, 캠퍼스 전체로 이 모임이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2001년 4월 총회에서 IU음대 한인 기독학생회(IUKCMF)를 IU 한인 기독학생회(IUKCF)로 그 공식 명칭을 변경하고, 그 해 가을학기부터 캠퍼스 전체모임으로 오픈하였습니다.


IU 한인 기독학생회는 처음 시작부터 그랬듯이 예배를 드리는 모임입니다. 즉, 한 주간 캠퍼스에서 바삐 공부하다가 잠시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고, 영적으로 회복되어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이 모임의 목적입니다. 이 모임은 예배와 삶을 이원화 시켜 보지 아니하고, 공부, 쉼, 및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 예배라고 간주하며, 목요일 저녁의 예배는 맥락만 바뀐 것이지, 예배의 연장으로써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지도록 훈련합니다. 따라서 모임 이후에 우리는 다시 캠퍼스의 일터로 돌아감으로 그 예배가 계속 이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선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블루밍턴으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발견하도록 노력합니다. 따라서 단지 학위를 우리의 목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8시 30분이면, 20여명의 형제 자매들이 인디애나 대학 내의 International Center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먼저 찬양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 후에 이영길 교수님께서 매 학기 특별한 주제를 선정하여 말씀을 준비해 오십니다. 2001년 가을 학기의 경우 ‘하나님과 영원한 친구되자’, 2002년 봄학기는 ‘ 은혜 안에 강건히 서 있는 자’ 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어 주셨고, 여름 학기 동안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계획입니다. 주로 교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지만 가끔씩은 Guest Speakers를 모임에 모시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지역 한인 교회 목사님들께서 오셔서 설교를 해주셨는데, 최근에는 평신도 사역자들께서 오셔서 그 분들의 삶과 그분들이 만났던 하나님을 간증하시고 도전을 주십니다. 지난 학기에는 필리핀 선교사로 계신 Michael Boado선교사님, 블루밍턴 Evangelical Community Church의 지휘자로 계신 David Bowden형제님, 10여년 동안 한국 선교사로 계셨던 Sam Toney 집사님, 그리고 인디애나 폴리스 한인 장로교회의 Elder Herbert Spann 교육 전도사님께서 Guest Speakers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예배 중 서너 사람씩 소그룹으로 나뉘어 기도제목을 나누고, 모두가 함께 각 한 사람씩을 놓고 중보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밖에도 매주 IU캠퍼스와 지역교회, 그리고 이웃 학교인 UC(신시내티 대학) 경배와 찬양 모임을 위해 기도합니다. UC 경배와 찬양 모임은 IUKCF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신시내티 대학에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IUKCF의 초기 멤버였던 형제가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학교를 옮기면서 기도로 세운 모임입니다. 이렇게 예배와 기도가 모두 끝나면 함께 교제의 시간을 갖습니다.


모임 시간 이외에 임원들이 IU내에 있는 천 여명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모임에 초청하는 이메일을 말씀과 함께 매주 보내고 있으며, 웹 페이지 (http://php.Indiana.edu/~iukcmf) 를 통해서 온라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게시판에서는 주로 서로의 삶을 나누며,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체들의 기도 제목을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매주 한 주분의 큐티가 게시되는데, 큐티 말씀은 코스타 강사이기도 하신 이일형 권사님께서 섬기시는 KBS(Korean Bible Studies)에서 제공해 주시고 계십니다. 웹 페이지에 ‘겟세마네’라는 중보 기도 게시판에서는 매주 모임에서 나누었던 각자의 기도 제목들과 긴급 기도 제목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의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2000년도부터 방학마다 수양회를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임 안에 소망과 기도 제목들을 나눔으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먼저, 현재 20여명의 지체들이 매주 꾸준히 모이고 있지만, 이외에도1000여명의 한인 유학생들 중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모임의 임원들이 밀알이 되어 하나의 마음으로 모임을 위해 중보하고, 온전히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작은 모임을 통해, 먼저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고, 우리들의 우상들을 태우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캠퍼스 가운데 영원토록 선포되길 소망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리며…


[고창현] 학력과 학벌

고독의 세상 읽기


학력과 학벌


글을 시작하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알아야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적인 세계에만 국한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굳이 이 세상을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우리에게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보전하라고 명령하셨기에 우리는 결코 방관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과 공간 속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그냥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이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서울대생은 단결하자!”


얼마전 한 네티즌이 서울대 생활정보사이트(www.snulife.com)의 구인/구직게시판에 ‘서울대생은 단결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가 해당 사이트가 폐쇄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문제의 글에서 자신을 서울대 재학생(실제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밝힌 이 학생은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과외비는 10년 전보다 낮아진다”며 “일주일 2번 2시간에 40 이하라면 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 “혹시 중.고생이 이 글을 본다면, 더 싼 가격에 배우고 싶으면 차라리 학원에 다니는 게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월 2일 올려진 이 글은 12일 오후까지는 15개 정도의 건설적인 비판글들이 게재되며 좋은 방향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12일 저녁부터 13일 오후 사이에 5284개의 답글과 코멘트(comment)가 폭주하면서 글의 조회수만 2만 7천번에 이르는 등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결국 서버의 과다접속으로 사이트가 잠정 폐쇄된 것이다.


거세게 분노한 다수 네티즌들의 주장들을 요약 나열하자면,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냐, 극빈 계층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돈타령이냐, 서울대생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건 학력차별사회를 조장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에서 대기업 같은 담합주장이 나온 것이 경악스럽다, 우리는 서울대생의 우월감에 반감을 가진다, 사교육비 과다지출이 사회 문제화된 마당에 서울대생의 의식수준이 고작 이 정도냐… 등등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소수의 반론적인 의견 또한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왜 가난한 사람들과[만] 비교하느냐, 이 동료학생의 주장을 일반인이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우리[서울대생]에겐 충분히 토론할 가치가 있다, 40만원이 고액과외는 아니지 않느냐, 능력에 따라 대우받자는데 왜 난리냐 등등의 의견을 표했다.


이 사건을 기사화한 하니리포터(www.hanireporter.hani.co.kr)의 지용민 기자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밤을 새며 글을 남겼던 수천 네티즌들의 열기가 대단했다”고 말하며, 이는 “우리 사회의 자본에 대한 종속성과 원죄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학벌중심주의를 여실히 보여준 한 현상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몇몇 서울대생들은 한 학생의 원색적인 주장이 결코 서울대생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인터넷 공간의 파괴적이고 진지하지 못한 토론문화를 비판했다.


2. 시티은행의 학력차별 이율


서울대생의 과외비 담합 기사가 논란이 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번에는 은행대출과 관련된 기사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기사의 요지는 한국 시티은행이 무담보 신용대출에 있어 ‘학력차별 이율’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신문인 ‘서울경제’의 7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시티은행이 직장인 신용대출을 주는데 있어 서울지역의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외국어대, 중앙대, 한양대와 지방의 부산대 등 9개 대학 졸업자들에게만 0.5%포인트의 금리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반 무담보 대출 이율은 9%이지만 위 대학의 출신들이라면 특별히 0.5%의 이율을 면제받아 8.5%에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은행의 이러한 대출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교적 조용했다. 이는 무엇보다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사금융기관의 특성 상, 신용평가를 위한 그들만의 기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티은행의 관계자는 이 기사와 관련해서 “한국의 특수상황으로 인해 학력이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평가기준이 될 수 있다”면서 “담보가 없는 신용대출에서 개인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곧 한국의 그 ‘특수상황’이란, 학력이 사람의 신용을 평가할 만큼 중요한 요소가 되는 한국의 사회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시티은행이 그런 평가기준을 내린 게 한국의 특수상황 때문이라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계은행이 그런 상황을 더욱더 부채질하는데 한 몫 한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들아 명문대 또는 이름 있는 학교에 가야 한다. 적성은 필요 없어. 무조건 가야 해. 왜냐하면 말이지 나중에 돈 빌려 쓸 때도 이자가 적게 붙거든.” – 언론고시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학벌에 따라 이자가 다르네요. 국내의 아홉 개 대학에만 이자감면 혜택을 준대나. 그런데 그 아홉개 학교 중에 우리 학교가 들어가네요. 어이없는 학력차별이라고 분개해야 할까. 우리 학교도 잘 나간다고 기뻐해야 할까?” – 9개 대학 중 한 대학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요한 건 이대가 빠진 게 아니라 외국인의 시각이 우리 사회에 학벌주의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이 사회 분위기가 정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대가 빠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 언론고시 게시판에 올라온 글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위의 두 기사를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이 시대(특히 한국사회)의 조류는 무엇인가? 먼저는 바로 학력(교육을 통하여 획득한 능력)과 학벌(같은 학교 출신)이,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필요조건(necessary or demanding condition)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능력(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신용)이 ‘내가’ 어느 학교에서, 어느 정도를 공부했나에 따라 평가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새삼스럽지 않을 만큼, 이미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흐름이다. 우리 모두는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학력, 학벌 중심적 구조에 의해 이익과 편리를 누렸거나, 아니면 피해와 손해를 경험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상황들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사회는 어떠한 세계관(worldview)의 주도적 지배를 받기에, 학력과 학벌이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는가? 먼저 위의 서울대생과 시티은행 기사가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인식의 틀'(perceptual frameworks)은 “인간은 자신이 획득한 학력과 학벌에 맞는 합당한 물질적(material) 대우와 형편을 요구하고, 또한 요구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가늠하는데 절대적 기준으로 사용되는 부(wealth)를 획득함에 있어, 학력과 학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13세기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이 요즘 시대에는 ‘아는 것이 곧 돈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기에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이 우리 사회 안에서는 전혀 낯설거나 이상한 말이 아니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나라의 수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부모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입학에 모든 것을 내걸고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인 배금주의가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 안에까지 스며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좋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의 가치와 능력을 높임으로 더 좋은 물질적 대우를 받으려는 이기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금주의적 자본주의와 대가 지향적 학문관의 만남으로 인해 아래와 같은 공식이 성립될 수 있다.


인간의 가치와 능력 = 물질(돈) = 학력과 학벌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이 자신의 삶 속에 보편화된 사람들은, 출신학교의 명성이 바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상징해 준다는 학벌주의적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명문대 출신이면 명문대 출신 대로, 소위 이름 없는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그런 사람 대로, 각자의 편협한 관점에서 서로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가치와 능력을 그 사람의 됨됨이와 삶의 내용이 아닌 학력과 학벌로 평가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기준에 의해 상대방을 인정하거나 홀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두 기사를 통해서도, 단순히 인간의 가치와 능력이 학력과 학벌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는 사회현실 못지 않게 한국사회 안에는 학벌주의에 의거한 파벌들이 조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독의 세상 읽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세상과 벽을 쌓아서는 안되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조류에 어떻게 역류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구별된 기독교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백성임을 이 세상에 선포할까?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 나는 학력과 학벌에 의해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가치관으로 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더 당당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창피하게 여기지는 않는가?


“나는 지금 왜 공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학업의 궁극적인 목적(학업 이후의 삶)은 무엇인가?” – 나는 졸업 후,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나는 대가지향적인 학문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누린 학문의 정도가(또는 능력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진지한 고민과 답변을 한 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현재 자리잡혀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해 보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 조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알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셨는지를 아는 것처럼 더 명확하게,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설명해주는 성경 상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통해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좀더 실제적이고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학력, 학벌 중심적 흐름에 역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창조 이야기만을 통해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제품은 제조자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그 가치와 능력을 다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기에는 멋지고 잘 나가는(?) 최신기종의 휴대폰이라 하더라도, 제조자의 기본적 제조목적인 통화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휴대폰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우리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다. 아무리 명문대에, 경쟁률 높은 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도 모르는 체 살아가는 인생은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 학교에서 소정의 학문을 이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왜 이 땅에 보내셨고, 또 나를 어떤 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사용하기 원하시는지, 그 소명의식이 분명한 인생은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창조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두 개의 창조 이야기(창1:1-2:3과 2:4-2:25)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에서,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첫번째 이야기이다. 두번째 창조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도 인간창조와 에덴동산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에 집약된 것에 비해, 첫번째 이야기는 거시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하며 창조사역의 전반적인 배경과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창조목적, 곧 인간의 가치평가기준(존재목적)을 이야기하며 주로 창세기 1장 26절에서 29절의 말씀에 집중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26절에서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인간의 존재목적보다는, 존재목적을 위한 삶의 일반적 방식과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좀더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창조의 목적을 1장 31절의 말씀에서 찾게 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표현은 사실 첫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거듭 강조되는 핵심어이다. 총 7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창조의 배경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목적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곧 우리의 존재가치와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시각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와 능력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존재목적을 구약의 스바냐 선지자의 고백과 예수님의 세례(공생애의 시작)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beloved Son, and I am fully pleased with him” (마태복음 3:17, NLT)


그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가? 역설적이지만 나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규정적인(prescriptive) 성경해석을 거부한다. 오히려 단순 명료하면서도 무한한 의미를 가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서술적(descriptive)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하기 원한다. 명제적이고 획일적인 방법론이 아닌 피조물의 창조적인 삶을 통해 다변화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직업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이성상대와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여러 가지 창조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개발, 행동에 옮기듯,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이어야 한다.


내가 규정적 성경해석을 경계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많은 경우에 한국교회가 성경이 쓰여진 그 시대만의 문화적, 사회적 특징을 현대상황에 맞게 재해석, 적용하지 않고 그대로 일괄 적용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첫번째 이유와는 반대로) 현대상황에만 지나치게 민감한 나머지 성경을 세상적 사고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주로 사용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자들은 왕(영적 지도자의 개념), 총리, 사사, 선지자 등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교회에서도 목회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회문화와 관련된 헌신을 하는 자, 그리고 세상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위치에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치 있게 쓰임 받는다는 식의 무리한 해석들을 남발하고 있다.


가치와 능력 =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 = 목회자 및 소위 성공한 사람들


하나님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 약한 자나 강한 자, 학문이 뛰어난 자나 문외한 자나, 모든 부류의 인생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보기에 심히 좋다”는 기쁨을 누리기 원하신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용모나 외모가 아니다(사무엘상 16:7). 그분은 우리 마음의 중심, 곧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보신다. 그런데 우리가 위와 같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직업에 국한된 성경해석을 시도한다면,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의 학력, 학벌과 같은 또 다른 종류의 파벌주의적 집단을 신앙 공동체 안에 들여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드려져야 하는 존재론적인 것이기에 정의되거나 규정화 되어서는 안 된다. 단 한번의 명문대 입학과 영광의 졸업장이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 되듯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일시적인 그 어떤 행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 창조이야기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대로 창조되었을 때, 그 자체(being)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냥 좋았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또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결국 위의 설명을 종합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곧 진정으로 가치 있고 능력 있는 삶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자신들의 존재목적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들의 다양한 직업을 통해 창조적으로 드려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냥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듯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기쁨’은 일회성적인 헌신이 아닌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꾸준히 추구되어야 하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앙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 안에 당신의 기쁘신 뜻을 보여주시고 또한 이를 소명으로 믿고 행하게 인도하신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말씀 그대로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능력 있게 채워가기 원한다.


[박성호] 김남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배와 찬양’?

찬양을 이야기 하자


김남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배와 찬양’?



김남일 열풍


요즘 인터넷 공간에서 검색어로 가장 인기를 많이 얻고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중에 하나는 분명히 ‘김남일’일 것이다. 지난 6월 한달 내내 월드컵 바람 때문에 TV에서 축구를 보느라 뜬눈을 새우기 일쑤였던 사람들에게 그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아마 상당한 실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 김남일이 완전히 떠버렸다. 다음카페에 등록된 김남일 팬클럽의 홈페이지 개수를 보아도 그렇고, 연예인의 인기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강남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 이름으로도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름이 바로 김남일이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 8월호 신동아에 실린 어느 기사를 보니 김남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팬들이 김남일에게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미국전에서 전반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문전을 쇄도하던 김남일이 미국선수들과 충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뱉은 육두문자가 생생하게 TV에 비쳐졌다. 9명의 미국선수들을 혼자 노려보는 눈빛에 광기가 흘렀다. 이름하여 ‘9대1 맞짱 사건’. 욱하는 성격만큼 말투도 거침이 없다. 4강진출 뒤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얘기해도 돼요?’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이트요’라고 답했다. 담백한 표정에 소년 같은 장난기가 귀엽다며 여성들은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서글서글한 외모에 터프하고 꾸밈없는 언행으로 여성 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깜짝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훈장을 받을 때 ‘나이트를 가고 싶은 김남일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순간 어떤 여학생팬들은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갔다는 후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수상식 행사에서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나이트를 가고 싶은 김남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노란 머리의 축구선수를! 이 노란 머리의 축구선수를 너무나 좋아하는 젊은이들로 세상은 뒤덮여 있는 듯하다. 이들은 왜 김남일에 열광하는가?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왜 김남일인가?


지난 7월24일자 ‘한겨레21’의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김남일, 날 것 그대로!’였다. 국내의 주요 주간지에 커버스토리로 실릴 정도인가 조금은 놀랍기도 한 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간다. 새로운 키치문화, 하위문화를 대표한다고 극찬하는 젊은 기자들의 기지가 번득인다. 그 기사를 썼던 김은형 기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김남일은 1990년대 말부터 남성 아이돌 스타의 주된 흐름이 된 ‘바른생활 꽃미남 소년’ 계보와는 한참 떨어져 있다. 지오디(god)는 어린 아기를 키우며 팬들의 사랑을 쌓아갔고, 유승준은 담배 피우는 청소년을 선도하면서 ‘아름다운 청년’의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월드컵 대표선수 가운데 대규모 여성팬 부대를 거느린 송종국 역시 고운 피부에 선량하고 겸손한 태도의 바른생활 소년과에 속한다…. 굳이 캐릭터로 범주화한다면 김남일은 마음도 순수한 꽃미남 주인공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조역인 ‘불량소년’에 가깝다. 고등학교 시절, 선배들의 지나친 체벌에 축구부를 뛰쳐나가 가출까지 한 그의 전력이 말해 주듯이 그는 착하고 말 잘 듣는 후배나 홍명보처럼 우직하고 듬직한 선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권위나 위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그의 태도는 ‘반항한다’기 보다는 ‘개긴다’는 속어가 어울린다. 결연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남일은 ‘고독한 반항아’가 아니라 ‘쿨한 양아치’ 계보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들을 읽으면서 내게 직감적으로 드는 느낌은 지금 세대는 ‘송종국 스타일의 범생이’보다는 ‘김남일 스타일의 양아치’에게 더 열광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을 정도이다.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믿음좋은 꽃미남들은 뒤로 물러가고 무례한 듯 자신있고 자기 주장이 분명한 ‘쿨 가이’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카페를 검색해 보아도 아름다운 크리스천 ‘꽃미남’ 송종국의 공식팬클럽의 회원수는 233,218명인데 비해 김남일의 홈페이지는 우선 그 숫자도 방대하고 한 카페의 회원수는 가볍게 479,000명을 넘는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씨는 “잘생기고 똑똑하고 상냥한 스타는 좋아할 수는 있지만 좀처럼 동일시되지는 않는 데 비해 평소에 자신들이 금지당한 것을 툭툭 내뱉고 저지르는 김남일에게는 쉽게 동일시되는 즐거움을 느낀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많은 젊은이들 중에 적어도 한 5분의 1은 기독교인들일텐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크리스찬 젊은이들은 어디 있는가.


다시 다음카페로 가서 ‘종교’란을 검색해 본다. 그중에 가장 많은 회원수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다. 이 카페의 이름은 ‘경배와 찬양 복스 자료실’이다. (http://cafe.daum.net/bocks) 회원수가 자그만치 53,936명에 달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가장 많은 회원과 방문을 자랑하는 카페는 바로 ‘찬양’에 대한 것이었다. 이 카페의 운영자는 ‘복스’라는 카페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부산에 사는 한 21세의 대학생이다. 학교 다니랴 교회생활 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텐데 언제 이렇게 멋진 사이트를 부지런히 관리하는지 궁금하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자료실의 그 방대한 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카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단 각종 국내외의 경배와 찬양집회와 CCM집회 실황을 동영상으로 보거나 다양한 앨범들의 전곡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이토록 많은 회원을 거느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CD 사서 듣기 좀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방문하지 않나 싶다. (근데, 이런 곡들을 동영상으로 올려놓는 행위는 불법 아닌감? 소리바다도 국내에서 문제가 된 판국인데?)


아무튼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기독교’하면 성경이나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교리나 뭐 이런 주제들이 제일 중요하고 사람들에게 제일 관심이 있을 것 같은데 그만 결과는 나의 뒤통수를 치고 만다. 물론 53,000명이란 숫자는 470,000명이란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이다. ‘인터넷의 바다를 여행하는 네티즌들이 고리타분한 종교에 관한 사이트를 얼마나 뒤적일지’ 의심이 드는 나의 마음을 집어 본다면 그나마 5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회원으로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기만 하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요즘 사회에서 얼마나 그늘에 가리워 소수의 집단으로 비쳐지는가. 세상에 비쳐지는 기독교인들은 기껏해야 각종 비리사건으로 헤드라인 뉴스에 오르는 사회적 거물들 아니면, 헌금이나 아들후계 문제로 문제가 되는 각종 지도자들, 아니면 그저 송종국이나 이영표처럼 큰 잔치의 한마당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높이 드러내는 운동선수들뿐이다.


나는 갑자기 걱정이 들기도 하고 마음에 큰 부담감이 생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음악인가? 찬양인가? 아닌 것 같은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나 그로 인한 결과들, 뭐 그런 것들일 것 같은데. 적어도 인터넷을 뒤져보면 아닌 것 같다.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하고 인기있는 사항은 ‘찬양’이다. 나는 이 젊은이들이 누구인지 깊게 생각하게 된다. 골치 아픈 교리보다는 신나는 음악에 열광하는 세대! 성경강해 시간보다 경배와 찬양을 훨씬 매우 더 좋아하는 세대!


지난 코스타에서 경배와 찬양을 인도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예배인도자 관심별 모임에 들어와서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설교시간보다는 경배와 찬양에서 훨씬 더 은혜를 받는다. 말씀보다 찬양이 더 좋다’고 소개한 어떤 젊은 형제 생각이 많이 난다.


앞으로 쓰여질 ‘경배와 찬양’에 관한 글들은 그런 젊은 사람들을 위한 글들이 될 것이다. 함께 고민하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나누어 보도록 노력하고 싶다.

[좌담회] post KOSTA 사역의 방향과 비전 / 김경수, 김정숙, 차문희, 최재범

이코스타 2002년 8월호


eKOSTA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독자와 함께 하게 될 eKOSTA 좌담회, 오늘 그 처음 시간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KOSTA 좌담회에서는 2002년 미주 코스타를 뒤돌아보고 정리하면서, 받으셨던 은혜들을 나누고, 아쉽고 부족했던 부분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특별히 오늘 좌담회에서는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라는 주제를 가지고 앞으로 일년을 살아가게 될 우리 코스탄들의 각 지역에서의 역할과 비전 등을 살펴보고, 아울러 코스타 이후 연중 지속되는 코스타로서의 postKOSTA 사역의 비전과 그 방향성에도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그러자면 물론 postKOSTA 사역의 각 지역사회 및 지역교회와의 동역에 대한 논의도 빠져서는 안되겠지요. 먼저 자기 소개를 해 주시되, 코스타에서 하셨던 역할 혹은 코스타와의 인연과 함께 짧게 말씀해 주세요.


차문희 저는 조지아주에서 교직에 종사하고 있고 Family Service를 공부하고 있는 차문희입니다. 이번에 처음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용기를 내어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저하고 비슷한 환경에 처한 형제, 자매들을 짧은 시간에 섬기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라는 체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최재범 저는 최재범입니다. 컬럼비아에서 재료공학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이번에 미주지역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여하면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더군다나 기혼조의 조장이라 싱글일 때와는 기분이 다르더라구요. 작년에 뉴욕/뉴저지 지역의 gpKOSTA에 참석을 하면서 코스타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김정숙 저는 현재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에서 살고 있고요, 코스타는 93년 미시간에서 대학원재학 중 처음 참석하였고, 96년부터 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맡았던일은 코스타 수양회 시작 전에는 오퍼레이션 부문에서 준비과정을 섬겼구요, 기간 중에는 프로그램 진행을 도왔습니다.


김경수 저는 1993년부터 코스타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했고, 지금은 비영리단체경영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번코스타에서는 조장 멘토로서 작년에 이어 2년째 조장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eKOSTA 예, 다들 반갑습니다. 이번 2002년 코스타를 통해 개인적으로 받았던은혜들과 코스타 이후 변화된 부분이 있었다면, 짧게 각각 한, 두가지씩만 나눠 주시죠.

최재범 전 제가 속한 공동체의 어려움으로 인해 힘들었던것들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던것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구요. 조모임을 통해서 우리 세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나 가정 그리고 학교나 회사에서…. 예전과는 달리 많은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지요.

차문희 미국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언어와, 다른 문화적인 차이등을 비롯해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미국에서 친구의 전도를 통해 만났는데요, 그다지 믿음이 뜨겁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코스타에서 제일 은혜받은 부분이 있다면 나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비전을 갖게된 것입니다. 신앙과 학문적인 비전 말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말씀과 기도로 치유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불평보다는 하나님 측면에서 문제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내 자신의 치유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김경수 우리 가족들이 모두 함께 코스타에 참여한 것은 작년에 이어 올해가 두번째로, 코스타에 참여하면서, 가족관계의 변화와 가족들 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내의 신앙이 말씀 안에서 견고해져가고 있다는 것이고, 저 자신도 말씀과 가족공동체를 이끌어갈 힘과 지도력을 코스타를 통해서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정숙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간의 저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반추해 볼 수 있었던것이 가장 감사할 부분입니다. 아침 강해 설교에서 다루었던비전에 관련된 메시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저의 삶을 통해서 손수 이루어가시는 비전을 다시 한번확인하게 되었습니다.

eKOSTA 예, 다들 굉장히 많은 은혜들을 받으셨군요. 그럼 이제 다음 주제로 넘어가 볼까요. 이번코스타의 주제가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였는데 코스타 전체 진행을 놓고 볼 때 주제의 충실도는 어떻다고 개인적으로 느끼셨나요? (편집자 주 : 올해 KOSTA의 주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과 KOSTA 집회에 있어 주제가 갖는 의미에 대한 재평가는 eKOSTA 9월호의 좌담을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기대를 바랍니다.)

차문희 세미나의 대부분과 새벽기도, 성경강해, 저녁설교와 일터의 현장의 메시지가 코스타 주제와 많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 유학생들의 삶에 많이 중점을 두고 있어서 제 자신의 삶에 많이 비추어 보았습니다.

김경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모든 프로그램들이 주제에 충실했다고 보여집니다.

최재범 전 수련회기간 동안에 새벽예배가 가장 일관되게 주제를 맞추어가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eKOSTA 저희가 관심있는 부분은. 두가지 주제를 조금 나누어서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치유되는 자아를 구분한다면 (물론 궁극적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것이겠지만) 두 부분 다 충실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치유되는 자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충분히 다루어졌나요?

김경수 다분히 개인적인 치유 쪽에 더 치우쳤다고 봅니다.

차문희 예 그렇습니다.

최재범 제 생각도 개인적인 회복에 많이 치우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김정숙 전체적인 메시지의 비중을 따지자면 하나님나라의 회복보다는 개인의 치유에 관련된 메시지가 많았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취지문에 명시된 것처럼 하나님나라의 회복이 바로 “나”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나라/공동체의 회복은 코스타 후의 개인의 삶을 통해서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eKOSTA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에 대한 부분들을 어떻게 하면 코스타 이후에 개인의 삶에 실현시킬 수 있을 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겠군요. 이에 대한 의견들을 좀 주시죠. 이제는 딱딱한 질문과 대화체에서 벗어나 좀더 메신저 컨퍼런스의 생동감을 살릴 수 있는 토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문희 글쎄요, 아마 내 자신의 신앙상태를 수시로 정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매일 아침 하나님과 큐티를 하면서 큐티에서 얻은 말씀을 가지고 하루를 살며 하나님과 기도로써 교재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지요.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교회나, 학교나, 직장에서 하나님께 떳떳한 삶을 살고 있는 가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겠지요. 나의 영적 상태가 건강하지 않다면, 결국 치유받기가 어렵겠지요.

최재범 저희 조에서 가장 많이 오고간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가정을 만들고 아이가 생긴 부부로서 어떻게 교회와 직장 그리고 가정을 섬기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교회와 직장에 대해서는 결혼 전 그리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많이 고민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별 문제가 없다가도, 아이가 생기면서 고민을 시작하더군요…. 그 세가지 측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잘 섬기는 모습…. 그것에 대한 소망은 있으면서도 주위에서 힘든 것을 인정해 주시지 않고 교회의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시는 현실 앞에서 많이 힘들어 했지요.

차문희 아직도 많은 한국 교회들 특히 이민 교회들은 기본적인 영적 치유보다는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 주기 바라는 게 현실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김정숙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단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게 되면 주변사람들과의 관계회복이 자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차문희 건강한 자아상, 정말 중요한 부분이지만 건강한 자아상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불평만 하는 마음을 갖고 사시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경수 자아상, 이성(결혼한 사람은 가정), 진로문제 이 세가지가 현실적인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최재범 아마도 아직까지 회복된 자아가 나타나는 모습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차문희 맞아요.

김경수 최근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심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하는데요.

eKOSTA 문희자매님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정숙간사님은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서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으로, 그리고 재범형제님은 결혼에 관련해 교회와 직장과 가정으로까지의 하나님의 확대를 말씀하셨군요. 그렇다면 우리 코스타에 참석하는 유학생과 eKOSTA 독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의 범위 혹은 개념은 어떻게 잡아야 하나요?

김경수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이웃과의 회복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이 나의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에 확장될 때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오는 것이지요.

김정숙 저도 동감 합니다. 그리고 “이웃”이라는 개념을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가정, 교회, 삶의 터전의 영역도 포함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차문희 일단은 학생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어떤 목적으로 와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이 왜 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교회만 나가서 구하기만 하고 봉사활동만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그 나라의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신앙도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그의 나라에 일군으로 쓰시니까요. 즉 실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지요. 학문과 신앙에서 모두.

eKOSTA 예, 그렇군요. 문희자매님께서는 자아의 치유를 통해서 자신의 삶과 내부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되어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연장선 상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것이 교회와 직장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나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고 보시는군요.

차문희 네.

eKOSTA 그런 의미에서 postKOSTA의 역할이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김경수 진정한 의미에서 코스타는 지금이 시작 아닌가요?

차문희 예.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어떻게 우리 삶이 변화하느냐가.

eKOSTA 올해의 아주 큰 특징 중 하나는 코스타 이후로 웹을 통해 아주 진지한 나눔과 교제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참여하고 계시고 어떤 영향들을 받고 계시고, 이를 통해서 우리 유학생들과 지역 교회나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김경수 코스타 이후 공식적인 웹사이트 이외에 이미 있던유학생 모임 웹사이트나 코스타 이후에 생긴 사이버 클럽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김정숙 간사님 중의 한 분이 코스타 직후 함께 평가회를 하면서 코스타 마지막 날의 폐회예배의 명칭을 개회예배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는데, 다들 생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코스타는 그후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최재범 저는 지역 게시판에 종종 들어갑니다. 비록 글은 많이 남기지 않지만, 그래도 서로가 고민하고 힘쓰는 모습을 나누면서 힘을 얻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동역자”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기에,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문희 저는 jjKOSTA, eKOSTA, tmKOSTA 보드에서 활동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하려고 하는데, 기도 부탁합니다.

김경수 저희 유펜(UPenn) 성경공부 모임의 예를 들면 기존에 잠자던웹사이트가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자면 오프라인과 온라인 모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정숙 코스타 이후에 개인이 들어가서 참여할 수 있는 게시판들이 영역별로 다 활성화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jjKOSTA, tmKOSTA, 각 조별 게시판, 전체 게시판 등

차문희 그런데, 아직도 많은 tmKOSTA의 전공별 모임들 중 활동을 개시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eKOSTA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postKOSTA를 힘써 이루어갈 수 있고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어떤 부분들까지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한계와 또는 주의할 점들은요?

최재범 저희 지역에서는 jjKOSTA와 gpKOSTA를 합쳐서 운영하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차문희 제가 있는 동남부 지역 jjKOSTA는 다른 지역에 비해 참여율이 별로입니다.

최재범 지금은 아무래도 지역적인 상황이 가장 좋은 매개체인것 같습니다. 지역에 있는 코스탄을 묶어줄 수 있는 방법이 postKOSTA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김정숙 저는 개인적으로 tmKOSTA 게시판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같은 전공을 가진분들과 전공과 신앙에 관련된 진지한 대화를 하기란 지역교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KOSTA 그렇군요. 지역 매개체와 전공매개체 둘 다 중요한 부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gpKOSTA와 jjKOSTA 둘 다 중요하겠지요. 그렇지만 접근 방법에 있어서 지역별 혹은 전공관심별로 약간의 차이들이 있군요.

김경수 아마도 지역별로 묶여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다들 지역별로 활동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더군요.

eKOSTA 그렇다면 올해 jjKOSTA가 지역을 타겟으로 하고 사역한 것이 아주 중요하고 유효했다는 이야기인데요.

최재범 그런데 tmKOSTA의 경우 공통 관심사를 갖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같은 전공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좀 약하지 않을까 싶네요. 같은 전공내에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서 전공보다는 “하는 일” 또는 “연구분야” 중심으로 재편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면, 반도체를 하는 사람의 전공에도 재료, 전자공학, 물리 등 많은 것이 있으니까 반도체를 하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모이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이 하는 연구와 직장에서의 문제점들을 나누는 거지요. 제 경험상,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을 때, 전공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좋은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의 관점만 고집하다가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러한 문제가 생길 때 전공별 모임을 통해 나눈 지식이나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또한, 그런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를 자세가 어떤 것일까 고민하면서 성장해 갈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김경수 재범 형제 의견에 공감하면서, 앞으로는 미국에 남는 영프로페셔날들과 대학원생들 간의 교류가 필요해지리라고 봅니다. 이번 KOSTA에 젊은 교수님들의 약진이 두드러졌거든요.

김정숙 최형제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실제로 전공자체가 공동의 관심사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일하는 환경이 더 친밀한 공통점이 될 수 있으니까요

eKOSTA tmKOSTA는 더 세부화된 전공혹은 관심(하는 일)들로 묶여서 아주 적은 인원이나마 전공혹은 일속에서 동역자를 찾을 수 있다고 볼 수 있군요. 그리고, 김총무님이 아주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이번KOSTA에서의 젊은 교수님들과 더불어 젊은 목사님들의 약진도 느껴졌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젊은 교수님 혹은 전문직 종사하시는 분들과 대학원생들의 네트워크가 앞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재범 교수님과 직장인님(?)과 학생들 간의 네트워크가 필요하지요..

eKOSTA 그리고 지역별 사역들이 언급되었었는데요, 어떤 방향으로 지역별 네트워크가 진행되면 좋을지 의견들을 주세요. 지역이 캠퍼스 사역일 수도 있고, 또 지역 교회의 갱신과 연합 등일 수도 있고 한데요….

김경수 소위 말하는 Social Capital 개념인 네트워크가 KOSTA 운동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으면 합니다. 즉, 일년에 한번하는 수련회가 KOSTA가 아니라 네트워크가 KOSTA가 되는 것이지요

차문희 그런 네트워크를 하게 되면 학생들에게는 좀 더 비전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겠네요.

김경수 재범형제가 생각하는 네트워크를 모델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단 대도시 중심으로 말이지요.

차문희 네트워크 KOSTA, 상상만 해도 기대가 큽니다.

최재범 저희 지역에서는 지역 내에 있는 학교에서 일단은 찬양집회를 시작 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찬양집회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 집회는 그 지역의 교회와 성경공부그룹이 협력을 하는 형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지역의 캠퍼스사역에 동역하는 거지요. 어느 교회나 단체의 이름을 드러내기 보다는 그냥 학생들의 모임으로 말입니다.

eKOSTA 와! 벌써 구체적인 모임들이 시작되고 있군요! 정말로 그런 실제적인 네트워크와 사역들이 미국 각 지역으로 확산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는군요.

김경수 제 견해로는 찬양집회만으로는 약하다고 봅니다. 연합모임의 경우 말씀에 기초한 기도운동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재범 네 동의합니다.

차문희 저도 동의 합니다.

김정숙 구체적으로 그런 모임들을 주선하려면 어떻게 시작을 하시나요? KOSTA에 참석한 분들과 연락망을 사용해서 일단 모이게 되나요?

최재범 글세요, 그냥 일단은 시작을 하면서,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모임 등으로 모임을 서서히 키워 나갈 예정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차문희 그런데…, 그런 모임이 큰 지역은 가능하지만….

김경수 저희 필라에서도 UDT(Upenn, Drexel, Temple) Network Zone(가칭)이라는 모임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교회는 아니지만, 남아 있는 유학생 출신들과 영프로페셔날, 유학생 이상의 세그룹이 만나는 네트워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재범 저희는 일단, 지역 내의 공동체에 대한 파악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학교 내에 장소를 섭외할 곳, 찬양을 인도해 주실 분, 설교말씀을 주실 분을 분담했습니다.

차문희 저 역시 제가 속한 교회에 얼마 되지 않는 유학생들과 힘을 모으는 중인데, 기도해 주세요.

eKOSTA 그러한 연합모임이 지향해야 할 구체적 사역과 방향의 범위 등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차문희 교회나 지역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그렇겠지요. 작은 지역과 큰 도시를 함께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역의 목표와 미래의 방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최재범 사역의 목적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저희는 저희 학교나 맨하탄 지역의 학생들에 대한 전도와 성장이 주목적이라고 정했습니다. 문제는 각 유학생이 지역교회의 활동과 캠퍼스 내에서의 활동을 어떻게 조율하는가 하는 거구요.

김경수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이 시작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유학생 연합운동은 이제 그 시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eKOSTA 예, 최형제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역교회와 양립될 수 있는지, 혹은 자칫하다가는 지역교회의 반대에도 부딪힐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김경수 지역교회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봅니다. 유학생사역으로 지역교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역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김정숙 제가 있는 지역같은 경우에는 4-5개 되는 교회들 간의 교류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연합모임을 시작하는 것이 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할때 아주 리스키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문희 (김경수총무의 발언에 대하여) 지역 교회 특히 이민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이란? (김정숙간사의 발언에 대하여) 지역이 작고 교회 수가 작다 보면 단합은 힘들 것 같은데요.

최재범 아직 저희는 활동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별 문제는 없지만 충분히 예견되는 문제 입니다. 저도 김총무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희가 지역교회를 바꿀 수는 없지요. 단지, 그 쪽에서 감당할 수 있는 부분만 부탁하고 저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저희가 하는 거지요.

김경수 문희자매님의 질문에 먼저 답하자면, 지역 교회 특히 이민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이란 바로 불신 유학생들에게 전도하는 일이구요. 기본적인 제자훈련도 포함됩니다. 더 나아가서 아시아권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외에도 더 많습니다.

최재범 이에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지역교회가 하지 못하는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저희 학교 예를 들면, 학교 내에서 집회를 하는 겁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단체 이외에는 절대로 건물을 빌려 주지 않거든요.

차문희 김총무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지역교회의 이민자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유학생들이 돈이 많아서 돈 쓰러 왔다고 편견의식을 갖고 있기도 하거든요.

최재범 사실 유학생들에 대한 그런 편견은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유학생들 간의 신앙훈련이 더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 부분도 지역교회에서는 감당하기 좀 힘든 부분이 아닐까 생각이 되구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KOSTA 김경수 총무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때로는 한국 유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할 때 지역교회와 그 연계성이나 결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부분들도 있는데 (예를 들면 전도한 사람들이 속하게 되는 개교회), 아시아권 유학생들이나 외국 유학생들에 대한 선교의 개념으로 간다면 지역교회들이 함께 해 나가야 될 큰 명분이 생길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정숙 저는 개인적으로 지역교회와 캠퍼스 모임 등과 같은 다른 사역들의 협력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는데요, 중서부 지역같은 경우는 대도시들과는 달리 지역교회와 캠퍼스를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eKOSTA 저희도 정숙 간사님 말씀을 십분 이해하며, 그래서 한가지 생각을 갖게된 것이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선교차원의 사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경수 정숙간사님이 계신 곳의 상황은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지역적인 한계라고나 할까요. 제가 주장하는 연합은 대도시 중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으로 소수의 교회들은 지도자들의 결정이 연합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해야 일은 유학생(KOSTA) 출신 중에서 사역자가 나오도록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숙 김경수총무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중서부 지역 같은 경우에는 목회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김총무님 말씀대로 목회자들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설득할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김경수 지역별 네트워크를 통해서는 전도와 제자화에 힘쓰고, 영프로페셔날 네트워크를 통해서는 사역자화에 힘쓰는 것이 개념화가 가능할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차문희 네 동의합니다.

최재범 이런 학생 운동에 대한 경험이 없으신 교역자분들은 이해하시기가 상당히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분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경험상 이해를 못하시는 것이지요….

김정숙 최형제님과 eKOSTA의 말씀대로 단시간에 교역자들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시도는 해야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경수 “설득”이라는 말보다는 “동역”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고 봅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인정하면서 그 분들과 동역한다고 생각하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요?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봅니다.

최재범 동의합니다.

차문희 저도 동의합니다

eKOSTA 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KOSTA집회가 끝난 바로 순간부터 KOSTA는 시작된다”는 사고의 전환과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로운 사역으로의 발돋움이 시작된 것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벅차오는군요.

차문희 저도 기대가 아주 큽니다.

최재범 요즘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지역교회와 학생운동 간의 괴리에는 학생들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KOSTA 같은 모임에서 지역교회에 문제점이 많은 것처럼 느끼고 가서 지혜롭게 해결하기 보다는 젊은 혈기에 부딪힌 분들이 많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도 어렸을 땐 그랬던거 같구요.

김정숙 최형제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KOSTA사역을 하면서 KOSTA에 참석하고 각자의 지역교회로 돌아온 분들을 볼 때 가슴이 “조마 조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김경수 KOSTA 운동 즉 유학생운동이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믿어왔고 또 앞으로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그런 의미에서 정말 더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더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죽고 삶으로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최재범 동의합니다

차문희 저도 동의합니다

eKOSTA 유학생운동을 통한 교회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 더 나아가 이 사회와 조국의 갱신을 꿈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문희 앞으로 우리들의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eKOSTA 시간이 많이 되어서 이제 정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eKOSTA와 eKOSTA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들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차문희 eKOSTA의 독자광장코너에 유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서로의 신앙과 삶을 나누면서 생각을 나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요.

최재범 유학생활을 통해 느낀 기분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나그네” 입니다. 나그네 동안 잃을 것도 없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잘 준비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차문희 좋은 말씀해 주셔서 저도 오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KOSTA 그래요.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유익한 말씀들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명선] 어느 코스탄의 편지

이코스타 2002년 8월호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헌신과 사랑으로 이번 2002년 미주 코스타에서 큰 은혜 받았습니다.


제 이름은 한명선이구요, 뉴저지에 살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 나는 몇 가지가 있어서 적어 봤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몇 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혹, 제가 하는 말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코스타에 헌신하고 계신 여러분들의 열정에 찬물을 뿌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하지만 저도 코스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두 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이번 코스타가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라는 주제에 얼마나 집중했나 생각해봅니다. 이번 주제가 하나님 나라와 그 안에 치유되고 회복될 자아라는 생각을 하고는 참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이지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세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서 현세적 하나님 나라,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찬양할 것을 크게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집회가 내내 진행되는 동안 이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 치유되는 자아”라는 주제는 얼마나 언급되어졌고 또 얼마나 생각되어졌는지 생각해봅니다. 아마 새벽 시간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믿기로는 코스타는 매 해 밖으로 걸리는 주제보다 더 강한 주제가 그 저변에 이미 깔려 있습니다.


“Tentmaker”.


코스타에 참석할 때마다 저는 이것이 코스타가 가지고 있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코스타 저변에 아주 처음부터 깔려 있는, 확고한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학문 공동체 혹은 직업 공동체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기도로 코스타에 찾아오고 또 코스타는 그들을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tentmaker들로 길러내는 중요한 산실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해 코스타의 주제가 “순결”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년 코스타에서 얼마나 그 주제가 강조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매년 코스타의 주제를 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의미한 주제로 집중력을 흐리게 하는 것보다 이미 코스타의 저변에 깔려있는 “tentmaker”라는 주제를 전면에 부각시켜 그 하나로 신앙적 역량을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신도 사역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길러 내자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미 그 주제가 코스타와 코스타에 참석하는 사람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매년 또 다른 주제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또 다른 하나는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내내 이 코스타가 이제는 “transition”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참여하시는 강사님들이 바뀌어 가고 참여하는 학생들도 바뀌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아직 그 70년대 80년대 폭발적인 부흥 성장을 뒷받쳐 줄 마땅한 후계자를 찾고 있지 못하듯, 코스타도 처음의 그 열정과 그 헌신을 뒷받쳐 줄 다음 지도자를 찾는 일에 이제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저녁 남서울 교회와 지구촌 교회에서 부목사님들을 지내셨던 목사님들께서 설교를 하시고 그 뒤에 코스타의 원조격이신 이동원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마무리 하시는 것을 보고는 지금 코스타가 겪고 있는 transition의 어려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면서 내내 이동원 목사님께서 앞에 나서신 두 목사님의 지원(back up)을 해주고 계시며 그 무게를 더 해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코스타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제 코스타에 변화가! 필요하고 transition이 필요하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의 열정이 식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코스타가 소위 인기있는 강사들을 찾기 보다 신실한 강사들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느 한 단체든지 소위 처음의 인기를 의식해서 아주 중요한 transition의 시기에 내용보다는 그 인기 유지에 힘을 더 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처음의 뜻과 취지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오직 사람들, 그 인기만 남게 되지요. 하지만 나는 코스타의 힘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코스타의 힘은 하나님께로 향한 천 오백 영혼들의 헌신과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스태프, 그리고 강사님의 마음이 여기까지 코스타를 오게 한 힘이라 믿습니다.


이제 이 transition의 시기에 코스타가 더 신실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숫자나 규모에 휩싸이지 말고 인기나 소문에 휩싸이지 않고 신실한 마음으로, 신실한 사람으로 다시 코스타가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고민하고 기도하고 계신 것들을 제가 다시 이야기한 것이라면 괜한 사족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 코스타를 위해서 늘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