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전하기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창조된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 지난 7년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가벼운 장애를 가진 학생들,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혹은 가정 환경으로 인해 생긴 정서적 불안을 가진 아이들, 주위가 산만해서 집중력이 떨어져 학습에 지장을 받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특색을 가진 학생들이 많다 보니 이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curriculum modification즉 현재 기존하는 커리킬럼을 장애의 특징과 유형에 맞게 변형 한 다음 지속적인 반복 교육을 통해서 지도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장애 학생들은 특히 정신적 (Intellectual disability혹은 발달 장애 (developmental disability))를 가진 학생들은 추상적인 개념(abstract concept)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제적이면서 구체적인 교육 방법(Concrete learning)이 효과적이다. 또한 여러 가지 감각 교육 (sensory learning) 프로그램과 주입식의 강의 내용보다는 게임이나 활동(activity)을 통해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 보면서 배우는 hands on learning도 교육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장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을까? 물론 장애의 유형과 특징에 따라 전달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주로 정신적 혹은 발달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전제로 해서 고민해 보기로 하자.


첫째, 어려운 단어 보다는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능 하신” 혹은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외 같은 단어나 숙어들 보다는 “사랑하는 “, “위대하신” 혹은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숙어, 혹은 문장들을 사용하는 것이 그들이 이해하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주제에 대해 열심히 말로 설명하기 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학습 활동들이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인다. 예를 들어, 천지 창조에 관해 학습한다고 하자. 천지 창조에 대해 설명 되어 있는 창세기 부분만 읽고 이야기 하기 보다는 학생들과 함께 야외로 나가서 하나님께서 만든것들을 찾아 보게 하거나 혹은 7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는 것 아나면 색종이나 constructional paper를 사용해서 직접 만들어 보는미술 활동들이 학생들의 수업효과를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감각적인 교육과 technology 특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과 영상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가 투입되지 않을 곳이 없고. 이제 컴퓨터 문화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그들울 돕는 보조 가구 (assistive technology)의 역할까지 해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 영상 (Multi media) 의 이론을 살리는 것 역시 학습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영상을 도입했을 때, 학생들은 영상과 음향으로 내용의 전달이 효과적일 수 있고 프레젠태이션이나 다큐맨타리를 이용해서 지루함을 달래주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 영상 기술을 도입하는 일이 전혀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그러면 이런 방법들을 잘 설명해 주는 교재는 어떻게 구입할 수 있을까? 특수 교육을 공부 하지 않은 분들에게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떤 교재를 사용하고 어디서 그 교재를 구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장애의 특징과 유형에 맞는 교재를 구입할 수 있는지 등등, 그럴 때마다 나의 질문은 언제나 “불행하게도 특수 교육에는 장애의 유형이나 특징에 맞게 만든 자료 혹은 교과서 라는 것이 없어요. 아이들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감성적인 상태가 장애의 유형이나 특징에 다르고 그 아이가 처한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존해 있는 curriculum을 가지고 아이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다시 Lesson plan 을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일반적인 성경 공부 교재를 가지고 장애 학생들의 능력에 맞게 앞에서 이야기한 방법들을 변형해서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장애 사역 교사들은 특수 교욱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이다 보니 꾸준한 교사 훈련 교육 프로그램 없이는 이 일이 이루어 지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겟다.


하지만 이런 훈련을 받아서 열심히 그들을 교육해도 많은 장애 사역자들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경우들을 여러번 볼 수 있다.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 했는데 아무런 발전이 없어 보이고 그러다 보니 사역의 보람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이들은 배우는 속도도 느리고 의사 표현의 부족해서 충분히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가 쉽다. 그러나 ,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의 은혜이고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문희] 장애 사역 컨퍼런스를 다녀와서

지난 3월 26일과 27일에는 조이 장애 선교 센터 (Joy Center)가 주관하고 남가주 사랑의 교회가 주최한 장애 사역 컨펀스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이 센터 (Joy center)는 장애 전문 연구 기관으로 매주 토요 학교를 운영하고 장애인과 가족을 돕고 사회 계몽 사역을 비롯해서 장애 선교 사역 및 사역자 양성, 장애 사역을 위한 전략 계발을 위한 연구 사역을 하고 있다. 해마다 조이센터에서는 컨퍼런스를 주관해서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 주고 전문 지식을 보급하는데 힘쓰고 있는데 올해로 4번째 컨퍼런스를 주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올해는 “장애인들을 위한 예배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라는 내용으로 주제 강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선택식 세미나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랑의 교회 사랑부의 예배와 분반공부를 참관하여 실질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예년과 달리 타주에서도 많은 참석자들이 눈에 뜨이게 있었고 강사진들도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있어서 미국내의 장애 사역 실태와 현황을 배우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참가자들은 장애 사역의 문제점과 실태, 효과적인 예배 인도 및 성경 공부를 비롯한 올바른 장애 사역의 준비 과정과 운영에 대해 다양한 전문 지식들을 얻고 사역의 비전과 도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다루어 졌던 장애 사역 관련 이슈들을 몇 차례에 걸쳐서 이코스타 독자들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우선 오늘은 장애 사역의 문제점과 실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다.


. 장애 사역의 문제점을 말하기전에 우선 과연 우리에게 왜 이 사역이 필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통계 자료에 의하면 14% 미만의 장애인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10%미만의 미국 교회들만이 통합된 장애인 사역을 하고 있으며 장애인 가족의 80% 이상이 종교를 갖고 있지 않거나 타종교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장애를 가진 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그 분의 계획안에서 창조 되었고 이들도 다른 사람들만큼 상하고 회복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골로새서 1장 16절에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디 그를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즉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 부터 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성경은 각 사람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 샛째, 교회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 , 빈궁한 자 그리고 상한 자를 돌보아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장애인들이 교회로부터 소외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장애인들과 가족들을 받아 드리는 교회의 분위기가 일반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남들보다 예민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상처가 많다는 것을 알고 더욱 따뜻하게 맞이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장애의 올바른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모르다 보니 교회로써는 부담감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장애인 사역이 잘 되어 있는 교회로 보내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은 또 한번 아품을 겪어야 한다. 샛째, 장애인 사역이 불쌍한 사람들 돕는 동정 사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역의 참 의甄?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장애인들의 독립심을 키우고 올바른 사회참여를 돕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교인들과의 대화 내용이 장애에 대한 문제로 제한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하다가 장애인이 되었는가?” “사고의 이유는?” , “장애의 원인은 무엇인가?” 등등 , 너무나 사적인 이야기들로 대화를 하다 보니 이미 상처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픔을 재연장 시키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아픔을 가져오는 것이다.


(Reference: 장애 사역 컨퍼런스 교재 중에서—)


다음 달에는 장애인을 위한 예베와 성경 공부 과정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하자.

[차문희] 특수 사역의 실태와 개선: 장애 사역

과학, 의학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사회는 점점 복잡해져 가고 있고 사람들의 생활 습관,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 또한 현대 문명의 발달에 뒤질세라 급변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더욱 더 복잡해져 가고 수많은 갈등과 대립 속에서 고민과 근심만 하다가 결국은 그것이 일종의 스트레스가 되어 몸과 마음의 병을 일으키게까지 하고 자신이 예측하지 않았던 삶을 창조해 나가면서 평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치료와 상담도 받고 자신의 문제를 치유 받으려고 애 쓰는가 하면 교회에 나와 신앙의 힘을 빌려 볼까 하는 경우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과연 이들의 필요를 잘 공급할 수 있을까? 주일 학교를 비롯해서 교회의 다른 여러 부서별로 각 부서의 사역 목표와 계획에 따라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어떤 특별한 필요를 요구 하는, 즉 치유 사역, Homeless 사역, 입양아 사역, 가정 사역, 그리고 장애인 사역 등등은 아직까지 모두 포용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수 사역들은 말 그 자체로 특별한 상황을 지닌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이기 때문에 그 만큼 교회마다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설령 섬기고 싶다 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지난 6 년 동안 미국 학교에서 장애 아동들을 섬기면서 특수 사역의 중요성 그리고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점들을 몸소 느낀 이야기들을 이코스타 독자들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나누고자 한다. 단 저자가 특수 교사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 사역의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섬기려 하나 역효과를 보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비 전문화된 사람들이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만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역을 하던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는 사역은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역이라면 더 할 말이 없을 만큼 하나님/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화 된 사역이란 “사역의 전문성”(skillfulness in ministry)을 의미 하는데, 장애 사역의 경우에는 장애 (disability)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특성, 섬기는 방법 등에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의학의 발달로 장애의 이름, 종류가 많이 세분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 역시 다른 장애 영역에 대해 조금씩 알고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학부 과정에서 받은 교사 자격증은 특수 교육 ‘정신 지체 (intellectual disability)’였지만 처음 직장을 잡아서 맡은 학급은 Resource classroom으로 통합 교육이 가능한 정서 및 학습 장애 아동들이 함께 공부 하는 학급이었다. 정서 및 학습 장애 라이센스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기간 안에 다시 학교에 가서 그 과목들을 이수하지 않으면 교사로 일할 수가 없고 아무리 특수 교사라 할지라도‘정신 지체’에 대한 자격증을 갖고 있는 교사가 어떻게 정서나 학습 장애 아동들을 효과적으로 지도 할 수 있냐는 학교 측의 지적에 따라 일 시작한지 일 년도 안 되어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올해 맡은 학급은 통합 교육이 불가능한 중복 장애 아이들인데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시각 장애 라이센스를 취득 하라고 해서 지금 통신 교육으로 이수 하고 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지능이 낮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장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점자와 시역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고 특수 교육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 만큼 장애가 심해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아이들에게는 특히 전문성이 있는 특수 교사를 임용해서 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주도록 교육부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학교만큼 교회에서는 전문화 된 사역 일군들을 찾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수 사역 (장애 사역)의 팀 리더는 사역 일군들에게 전문화의 중요성을 강조시킬 필요가 있고 각종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일군들을 계몽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역 팀장 역시 자신이 전문화 되지 않았다면 리더의 입장에서 당연히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이렇게 전문적인 지식의 필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질 (highly qualified) 이 높은 일군들을 발굴하는 일이다. 비록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이라고 해서 단지‘하나님의 사랑’만 갖고 섬기는 일군들은 섬김의 한계가 있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보다는 그냥 동정심에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감리교 고아원 (United Methodist Home)을 운영해 온 R이라는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If you would like to be a successful individual for your life, know A. B, C. A stands for attitude, B stands for behavior, and C stands for commitment. You can make your dream come true if you do well in all A, B, C. 아마도 질이 높은 즉 Highly qualified 가 된 일군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 가 싶다. 위의 R 목사님의 말씀처럼 A, B, C를 모두 잘 하는 사람의 생각은 긍정적이고 언제나 열정이 넘친다고 하는데, 특수 사역에 필요한 일군들이 바로 이런 성격들의 소유자이다. 그러다 보면 섬김을 받는 이들 역시 나름대로 도전적인 삶을 살 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기 마련이다.


이렇게 전문적인 훈련을 갖추고 A, B, C를 잘 하는 일군들로 구성된 사역팀장과 팀원들이 모여 있을 때 특수 사역(장애 사역)의 비전과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제, ‘불쌍하고 사정이 딱해서, 혹은 보기가 마음이 아파서’라는 이런 동정심에서 나오는 사역은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전파하고 이들이 교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비장애인들과 공존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이 바로 특수 사역의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겠다.


@다음 달에는 정신 지체인 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생활을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차문희] 하나님의 인격을 가르치는 주일 학교

잘 알고 지내는 미국 친구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예배 후 점심을 먹으려 한 restaurant 에 가게 되었다.  그 때 그 엄마는  초등학생들인 두 자녀들에게 이렇게 질문 했다. 



Mom: How was your Sunday school class? What did you learn?Anything special? 



Child 1: No, not really, I don’t know.  It was so boring. 



Mom: What do you mean? You didn’t do or learn anything?



Child 1:Well, you know Mom? I don’t know I was just bored…



하면서 말의 뒤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 때,



Child 2:Well, I learned that Jesus fed the 5000people.



Mom: Oh! What else, did you learn? 



Child 2: I don’t remember the rest of the lesson, but I heard the Bible story.



Mom: Listen Kids, when you go to the Sunday school class, you do not expect to play or do nothing.  I want you to learn the word of God.  You should be able to tell me the key point of the lesson. 



그렇게 아이들에게 훈계를 하는 그녀는 아이들은 교회 학교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놀이 공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의 기초를 어려서 부터 심어 주기 위해서는 주일 학교 교육 역시 일반 학교만큼 중요하다면서 주일 학교 학습 과정 내용을 자주 복습하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신앙적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주일 학교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갖는 성경적, 인격적 의미에 관하여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교회 안에 소속 되어 있는 주일 학교는 아이들이 다니는 일반 학교와 매우 다른 특색을 가졌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정식으로 자기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고 그 분야에 대한 자격증을 갖고 임금을 받아가면서 일하는 일반 학교 교사와는 달리 주일 학교 교사는 어떤 특별한 훈련과 보수 없이 단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그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일반 학교 교사에 비해 quality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무슨 내용을 배웠는지 관심도 없고 그냥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babysitting 시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인격 교육, 즉 예수님을 닮는 인격 교육은 그 중요성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언젠가 아이들을 위한 큐티 자료가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알아서 가져가라는 광고가 나간 적이 있다. 이 때 한 학부형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니 물론 큐티 자료 우리 아이가 할 수 있으면 좋지.  근데, 워낙 다른 공부하기가 바빠서… 매일 숙제도 많고 SAT 공부도 해야 하는데 큐티 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 시키지 뭐. ” 하면서 투덜거리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학교 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 교육은 무시하고 교회 학교만 중요시 하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학교 공부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 공부 역시 Ep어 놓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기의 아이들이 건전한 도덕(moral)관과 가치 (value)관을 갖고 성장해 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공립학교 보다는 기독교나 가톨릭 이념이 바탕이 되어 있는 사립학교를 선호하여 비싼 돈을 투자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열성을 쏟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이코스타를 통해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실태를 보고 한 바 있는데, 과연 기독교적인 도덕관과 가치관을 심어 주기 위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립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또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한 인간에게 올바른 기독교 사상이 확립될 수 있는지도 의문가는 점이다. 기독교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을 심어 주는 사립학교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고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성경을 배울 수 있으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들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성경만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정교 분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성경적 도덕관이나 가치관이 제대로 만들어 지지는 않는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립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가치관의 형성이 이루어진다고는 가정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극소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만을 전제로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흔히 모태 신앙 혹은 어려서부터 신앙 좋은 부모로부터 양육 받고 성장한다고 해도 그들이 과연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고는 볼 수 없듯이 올바른 기독교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주일 학교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하고 일반 교육 만큼 주일 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 학교 교사 역시 일반 학교 교사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비록 일반 학교 교사처럼 가르치는 분야에 대한 훈련을 받아서 자격증이 있지는 않지만 주일 학교 교사를 임명할 때 어느 정도 선발 기준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 주일 마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주일 학교 교육 시간,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시간이다.  학년별로 나누어서 하는 주일 학교 시간을 아이들은 학교 공부만큼 진지한 자세를 참여할 필요가 있고 교사들은 자신이 가르칠 분야를 미리 준비해 와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학교 공부만큼 주일 학교 공부 시간이 단지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동안 babysitting의 장소로만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이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학습했는지 나누고 그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에 대해 각자 갖고 있는 생각들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신앙적 대화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고 이렇게 어려서 부터 나눔의 시간(sharing)을 갖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야 말로 신앙에 대해 서로가 갖고 있는 다른 생각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좋은 훈련 과정이 될 수 있다. 이 곳 조지아 출신이면서 한 때 미국의 대통령 이였던 Jimmy Carter는 지금도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주일 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한 때의 직업이었지만 주일 학교 교사는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 고 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주일 학교의 중요성을 강조 한다고 한다. 학교 교육이 학부모, 교사, 학생 이렇게 모두 협력해서 효과적인 학습 능률을 올리듯이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 성립 역시 학부모, 학생, 그리고 주일 학교 교사의 끊임없는 협조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차문희] Spiritual eye VS Physical eye

약 두 달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먼저 소개 할 까 합니다. 가르치는 학생 중 시력이 전혀 없는 O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멕시코에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데, 시각 장애를 갖고 있어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먹고사는 일에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O라는 학생은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때때로 지나 칠 때로 말을 많이 해서 학교 생활, 특히 학급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  O: Ms. Cha, since you are a teacher, you know everything and you can helpme. right?
-  Ms. Cha: Ah! Maybe, but not always, just because I teach you, which do not mean that I know and can help you everything.
-  O: Well, Ms. Cha, do you know how can I get some vision? I mean, Can you give? No, help me to find some vision?
-  Ms. Cha: What? What do you mean?
-  O: Well, I think it is not fair that I can’t see anything. I want to see so I can play the computer like some other kids.
-  Ms. Cha: Well, you still can play the computer with speech output.
-  O: No, I just want to see and help me to get some vision.


한 참 이런 대화를 하는데, 함께 일 하는 보조 교사인 Mrs. W가 이런 말을 합니다.


-  Mrs. W: You know what? Maybe, God will give you some vision so you can see.
-  O: God? I can’t see him either.
-  Mrs. W: No one can see him. But if you believe in him, he will bring a vision for your life.
-  O: Oh! Then, I can see, right?
-  Mrs. W: physically, you still wont be able to see, but you will see and feel his guidance as you grow up.


시력, 흔히 비전 (vision)이라는 단어는 시야, 보이는 것, 광경, 환상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을 통하여 우리들은 사물을 보고 이해하며 배운다고 대부분의 교육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시력이 전혀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 성장 발달이 좀 늦어 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을 보고 따라 하거나 판단하여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의 옛 속담에도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데,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로 그 만큼 보는 힘, 시력의 효율성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육안이 생활하면서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들을 습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듯이 영적인 눈, 영안 역시 우리의 삶에서 특히,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인데, 첫째, 영안은 세상 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분리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의 일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영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 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간 것이니라. (로마서 8장 5-10절)


영적인 시력이 좋은 사람은 순간적인 기쁨과 쾌락 속에서 잠깐 동안의 행복과 만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좇아 즉,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계획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많은 성경적 인물들,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 선지자들과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획하시는 일들에 동참했고 순종하며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의 삶을 통해 평범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특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눈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잇겠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실천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을 바라보는 것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렵고 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꾸준하게, 가르치는 교사의 자세로 섬기셨던 만큼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헐벗고 힘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욥기 10장 4절 말씀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나이까? 주께서 사람이 보시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결국 하나님의 눈을 가진, 그러니까 영적인 시력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세속적인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O라는 학생은 지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 분의 부모님은 그가 갖고 있는 시각 장애에 대해 매우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고 그의 학교 생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보다는 무관심과 따뜻한 애정 없이 그를 양육하고 있는데, 새로운 학교에 가서라도 좋은 선생님 만나서 충실히 학교 생활을, 그리고 언젠가 사람은 육안으로 살지 않고 영안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많은 코스탄 여러분, 이제 2004년도 새해 새 아침이 밝아 오는데, 올해에는 20/20 (1.0) 보다 더 좋은 영적인 시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차문희] School Prayer: Do children need it?

오늘은 지난 반 년 동안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K라는 보조 교사 한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K는 나이도 많으시고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특수 교육 클래스 룸의 보조 교사로 8년 동안 일을 해 오고 있다. K는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제 클래스를 도와 주었는데, 어느 날 제가 잠깐 미팅을 갔다 돌아 와 보니 아이들과 무슨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지 그녀를 향해 아이들이 집중을 하고 경청하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뒷자리에 살며시 앉아 K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B어린이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외롭지 않나요? 어떻게 예수님을 믿나요? 안 보이는데…” 다른 E라는 남자 어린이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누가 그러는데, 예수님은 마귀의 친구라던 데… 난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교회에 잘 다니는 D라는 짓궂은 남자 어린이가 말했다. “You are so dumb. The church is a Lords house, and if you do not believe in Jesus, you will go to hell.” 결국 서로 으르렁거리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K는 예수님, 하나님, 그리고 교회에 대해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그려 가면서, 그리고 자기가 갖고 다니는 작은 성경책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창유리 밖으로 교감 혹은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혹시 들어 오셔서 참관 수업이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조지아에서는 교사의 경력에 따라 교사들이 일 년에 1-3번씩 불시에 교육 행정관들로부터 참관 수업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K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주위가 산만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 하는 아이들인데 K의 설교에는 경청을 하고 질문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기독교 적인 질문들이었다. K는 아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대답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이들은 평상시에 궁금해 오던 것들을 물어 보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집중을 사기 위해서 질문하는지는 몰라도 계속된 질의응답 때문에 다음 시간이 되어서야 그 이야기들을 마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다른 클래스로 가고 나서 난 K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I know you are very good Christian, but you know it is illegal to talk about religion at the public school. 그러자 K는 나를 보며 I know Ms. Cha. I know the school rule and the law. You know something? First, these children with special needs really need someone in their heart. They have been sexually abused and neglected at home. They have not been exposed to love. They don‘t know how to love others because their families have never loved them. They need to know that God loves them no matter what. Also, if I get fired because I talked about the religion at school, then, the Lord has better plan for me. Don’t you think?”



신앙적으로 보면 K의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K는 다른 교사들 처럼 교육학을 공부해 본 적도 없고 교사 자격증은 당연히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삐뚤어지고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녹이는데, 특별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Jesus loves you even though your mom and dad don‘t take care of you. Invite Jesus to come to your heart and pray, and he will live and take care of you.” 이야기를 해 주면서 기도도 같이 해 준다고 그녀는 말했다.



미국의 공립 학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의 출발은 기도가 폐지되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성과 성경 적인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대부분의 교사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존엄성, 그리고 성경적 가치관 상실은 급격 하는 이혼율, 가정 폭력으로 인한 불화를 가져 왔고 가정 불화는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정에서 배워야 할 교육들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이들은 discipline problem으로 학교 교육에 까지 악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기도’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와 아픔이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로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서적 불안으로 주위가 산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 (attention seeking)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들을 하게 되는데,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다. “I don‘t like anyone. I hate myself and don’t like anything at all.” 그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서 늘 걱정과 근심이 얼굴에 가득한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좀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언젠가 B 라는 4학년 초등학생이 한 이야기를 소개 한 적이 있다. “You know, my mom is an alcoholic, and she has done verbal and physical abuse to me, but I am going to pray God for my safety at home.”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기도는 아마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있고 어느 누군가를 신뢰하다 보니 자연히 그를 의지하게 되고 상처받은 아이들에게는 평안과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빌립보서 4장 6-7말씀에도 아무 것도 근심, 걱정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함으로 하나님께 구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한 것처럼 나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음의 위로가 되는 기도는 아이들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게 만든다. 흔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상처받은 이들은 낮은 자존감 (low self-esteem) 때문에 사회의 관심을 사기 위해 좋지 못 한 길로 탈선을 하게 되기 쉬우나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게 되니 탈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중요한 기도는 종교의 자유라는 미국 헌법 때문에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는 공립 학교에서는 폐지되었다, 물론 다 문화권인 미국공립학교에서 너무 기독교 적인 사상으로 강요하고 억압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 탄생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청교도 정신인데, 정교 분리는 참다운 청교도 정신을 서서히 사라지게 만들었고 도덕적 가치관 상실을 비롯해서 사회적 문제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회 문제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 하게 되었고 서로를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위 풍토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마음의 상처만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옛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정교 분리를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기독교 적인 가치관을 나눌 수 있게 하고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성탄절이 되면 교사들이 자유롭게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게 하고 부활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이들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도록 교육 과정 (curriculum)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