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규] 8월의 윌로우 크릭 스몰 그룹 코우치 이야기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Q: 나는 순수히 섬기는데 이웃이 날 이용해요! 그 사람이 싫어졌어요!
    어떡하지요?
A: 창조의 3가지 차원 Balance 저울을 Check up 하세요.


한 싱글 자매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 싫어 졌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 순수하게 이제까지 끊임없이 도와주고, 나누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끊임없이 저를 이용만 해요. 이제는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 자꾸 피하게 되요.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벌써 그렇게 되었는데 어떡하죠?”


전화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섬기다가 지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철면피같이 양심 없는 사람들에 질린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착해야 하고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감 때문에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려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가득 차 있었던 한 자매가 유학을 오게 되었다. 그 자매에게 있어서 이 유학은 공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선교사로의 파송 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유학을 와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어떤 이웃을 만나게 되면서 이 자매는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에 함께 나갈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2년이 지나도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자매에게서 미안해 하지도 않고 도움을 부탁하였고, 당연하다는 듯이 필요한 정보를 뺏어 갔다. 그러면서 항상 이 자매에게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간주했다. 반면에 그 자신의 것은 전혀 나누지도, 아니 나눌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점점 많이 흘러가면서 이 자매에게 결국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피하고 싶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우는 전화 통화를 한 그 자매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리스도인 들이 삶의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복음 선포의 열정을 잃고 오히려 상처 받아 무능력하게 그 자리에 주저 않게 된다. 이 자매의 경험과 비슷하게 심지어는 이러한 경우도 있었다.


결혼 한 한인 유학생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 살고있는 한 유학생 자매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면 같은 층에 사는 한인 이웃과 나누고 이웃의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놀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개방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부터는 늘 당연히 여기고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보내는 이웃들이 이 자매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공부에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제출해야 할 페이퍼도 정상적으로 끝내는데 어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도 공부하는 유학생인데 자기들은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공부도 못하고…”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웃이 더욱 불편한 존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 불고기’ 먹는 것도 부담되었다. 무엇을 하면 늘 나누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해서 냄새가 나는데 안 나눌 수도 없고, 나누자니 마음이 무겁고…


성격적으로 내성적인 그녀는 결국 말 못하고 답답한 상황가운데 스스로 억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이웃이 싫어지고, 이웃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 해도 기도가 안되고, 이웃을 만나도 반갑지 않게 되고… 결국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다가 사람에 실망하고 상처 입어 주저 앉게 되는 경우를 경험하거나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혹은 우리 주변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착하고 순진하게 섬기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할렐루야! 너무 좋다. 참 잘한다.’ 하는 칭찬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이용당하지 않아야 할 텐데’ 혹은 ‘지혜롭게 해야 할 텐데’, ‘너무 착해만 가지고도 안 돼’ 하는 염려인가? 아니면 칭찬 반 염려 반인가?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 모두가 이 두 자매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순진하게 사랑하고 섬기면서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이 자매들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편으론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칭찬과 염려가 교차해 가는가?


그것은 순진한 그리스도인이 접하게 되는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그러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했기에 예수님도 12 제자들을 양육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파송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마10:16a) 예수님은 세상을 ‘이리’로 표현하신 반면에 상대적으로 제자들을 양으로 표현 하셨다. 물론 ‘이리’의 이미지는 여러 방면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러한 곳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마 제자들이 접하게 되는 세상이 어떠한 지를 단 적으로 알려주신 말씀일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그 이리와 같은 세상을 접할 제자들은 양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이리’와 같은 모습을 만났을 때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전쟁에 있어서 적을 알면 그 싸움은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이 ‘이리’와 같다는 것을 알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세상이나 오늘의 세상이나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현실은 다를 바 없기에 아마도 그러한 양처럼 순진한 그리스도인 들이 접하는 세상의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 2003년 USA 코스타 (KOSTA) 주제도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 인’으로 선정되었으리라!


그러한 세상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어지는 제자들에게 2000여년 전에 이렇게 당부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b).


바로 예수님은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양’ 같은 제자들이 승리하는 전략 2가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것이다. 첫째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앞에 ‘지혜’가 먼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지혜를 먼저 가지고 난 다음에 순결한 모습으로 살아라 하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식당에서 음식이 손님에게 나올 때 음식과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이 하나가 되어 나온 것과 같다. 음식과 그릇을 떼어서 놓지 못하듯이 말이다. 음식을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비유한다면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은 ‘뱀처럼 지혜로움’ 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전략 2가지는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하나로 붙어있는 셈이다. ‘순결’이 그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지혜’는 승리로 이끄는 방법론인 것이다. 결국 이기는 전략은 하나! 야구공 던지듯이 지혜로 감싼 순결의 볼을 던지는 것. 이것이 양 같은 제자들이 바로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인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영적인 차원 (Spiritual Dimension), 육체적 차원 (Physical Dimension), 그리고 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의 균형(Balance)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 우리에게 영(Spirit)만 주시지 않았다. 영과 더불어 우리의 육체(Body)와 우리의 마음(Heart)도 만들어 주셨다. 영(Spirit)과 관계된 부분을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으로 본다면 육체(Body)는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이요,마음/감정(Heart)과 관계된 부분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 각자 각자가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이들은 또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먼저 영성 차원(Spiritual dimension) 을 보자 .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날아갈 것(up) 같은 아니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는 감정적 차원의 감격과 사랑, 용서와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주님과 동행의 확신으로 인해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육체적 차원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을 보자. 육체가 힘이 들어졌거나, 약해지거나, 혹은 병이 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감정적 차원이 처지게 된다(down). 교회에 가는 것도 그리스도인 들의 섬김의 자리에의 참여도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진다. 무엇이든지 귀찮고 일단 쉬고 싶어진다.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보자. 누군가와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상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면 어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 가는 길목에 그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돌아서 가고 만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진다. 더욱이 그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일 경우는 찬양과 기도가 막히게 됨을 경험한다. 부부가 싸워도 기도가 막힘을 경험한다. 애인과 싸워도 찬양이 막힘을 경험한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 차원과 육체적 차원, 그리고 감정적 차원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세 차원의 밸런스(balaence)가 잘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한 쪽으로 인해 다른 기능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웍샾(Workshop):

이 그림들에 자신의 현재 영적, 육체적, 감정적 저울을 확인해 보라.
셋 다 정상적 인가?어느 저울이 가장 떨어져 있는가?
왜 떨어졌는가?어떻게 그 떨어진 저울을 정상적으로 올릴 것인가?

자!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차원 (Three Dimension) 창조의 원리와 그 균형의 지혜를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할 때 제기된 자매들의 경우들을 다시 한번 첵업(Check up)하면서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찾아 보자.


첫 번째 싱글 자매의 경우를 첵업(check-up) 해 보자.


이 자매의 경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나눔을 통해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섬겨 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나 되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다. 이 자매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자매의 마음을 훨씬 전부터 읽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그 자매의 생각은 모른척하고 그 자매 이용하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를 위해 섬기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도 권면하기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갈 6:9a)했던 것 아닌가!.


결국 이 자매의 상태는 상대방의 인격적 관계 (I-Thou)가 아닌 이용의 관계(I-It) 에서 개인적으로 낙심하게 된 상태이다. 그 동안 쌓아 놓은 관계도 무너지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미움까지 생긴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이 자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전에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가 더 중요한 문제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까?


창조의 3가지 차원과 균형의 저울로 돌아가자. 이런 상태에서 이 자매는 무엇보다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에서 많이 다운(down)이 된 상태이다. 이 감정이 더 이상의 상대방에 대해서 물질적 나눔과 도움을 피곤하고 지치도록(육체적 차원) 그리고 무의미(meaningless)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선한 의도를 악용하는 것에 미움으로 반응(영적인 측면)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 자매는 현재 관계가 어그러졌다 할 지라도 관계회복을 위해 의무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감정적 쉼이 필요하다. 관계의 회복은 내가 회복이 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양적으로 다시 관계가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사람은 지극히 영적인 감각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내가 회복되지 않은 외양적 관계의 회복은 더 깊은 상처를 두 사람 관계에 가져오게 만든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성령의 거룩한 부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착해야 하고 관계가 좋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의무감을 자꾸 주어서 부담을 가지게 만들어 결국 깨지고 무너뜨리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것은 내적부터 우러나오는 근본적 자유 함과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이지 외양적 겉치레의 관계회복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상대방이 바로 느끼게 된다. 사람이 속으로는 “너 이놈 두고 보자, 잡아 먹을 꺼야” 하면서 겉으로는 웃으며 개에게 “누렁아 이리와” 해 봐라. 꼬리를 살랑거리며 오나. 으르렁 거릴 뿐이다. 하물며 사람이 그것을 모르겠는가?


내 마음이 먼저 회복될 때까지 어그러진 관계 그대로 놓고 쉬어라. 그러면 성령께서 내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기 시작할 것이다. 그 자매의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 주님이 얼마나 자매를 사랑하시겠는가! 만일 어느 제자가 스승의 영광과 그 영광의 나눔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느 스승이 그 제자를 미워하겠는가?


똑같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하는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기뻐하고 계신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까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침과 상함을 만지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쫀쫀하신 분이 아니다. 걱정 마라. 푹 쉬라. 그리고 아픈 가슴 상한 감정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울고 또 울라. 내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이때 성령님이 이 자매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한층 더 그리스도안에 성숙하도록 이끄신다. 이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님은 이 기회를 더 귀하게도 사용하신다. 이제껏 이 자매의 사랑과 섬김을 이용했던 상대방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돌이킬 수도 있게 만드신다. 혹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 자매에 대해서 조심하게도 만드신다. 이 자매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만드신다.


그런데 만약 그 불편한 사람과 피할 수 없는 자리에 할 수 없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친절한 관계만 유지를 하고, 말조심을 하라. 감정 표현에 있어서 조심을 하라. 그리고 내가 회복될 때 까지 가능하면 잠시 바쁜 것처럼 지혜롭게 일대일 자리를 피하라. 성경의 말씀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두 번째 결혼한 자매의 경우도 창조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그 균형을 첵업(Check up) 해 보자.


이 자매 역시 첫 번째 싱글 자매와 비슷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본이 된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원해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을 위해 집을 개방하였다. 기숙사의 누구에게도 좋은 이웃이 되었다. 영적 측면(spiritual dimension) 에서 잘 자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 자매 역시 이웃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 그런데 이 자매의 경우 잘 생각해 보면 감정적 차원의 상처를 받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자신의 학업의 관리 (management)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놀러 오는 이웃집 아이들에 대해서 내성적인 그녀의 성격이 오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차마 이웃집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움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시간을 조절(time manage)하는데 실패하게 되었고 이것은 자신의 학업의 불성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육체적 측면: physical dimension). 이러한 스트레스는 결국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과 감정적인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상처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웃이 보내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이웃들의 행위를 이기주의로 보도록 만들었고,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음식을 나누었던 것들이 이제는 의무감이 되어서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그녀의 내성적 성격은 더욱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표현하는 것을 억눌렀다. 이러한 억눌림은 영적 차원에까지 미쳐 기도가 막히고 결국 이웃이 싫어지게까지 되었다. 급기야는 이사까지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해 속에 갇히게 되어 우울증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자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 차원의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육체적 차원에서의 무너짐이 결국 감정적 차원과 영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인간 관계와 주변의 일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자신을 피해자의 인생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자매는 육체적 차원의 밸런스(Physical dimensional balance)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시간 관리를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녀들과 놀 시간, 공부 할 시간, 밥 먹을 시간, 등등 의 시간표를 짜라. 그리고는 이 스케줄에 맞추어서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 올 경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놀 수 있으니까 그때 오라고 이야기를 해서 자신의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학업이라고 하는 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라면 그녀에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어진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니 만큼 그에게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이것을 보완하려고 밤에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려 한다. 하지만 육신은 육신인지라 쉼이 필요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또 졸기까지 하게 만들어 보완이 안 되는 적도 많다. 입술을 악 물고 밤에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한다 할 지라도 역시 낮에 피곤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육신이다. 몸이 피곤하게 되면 만사가 귀찮게 된다. 이웃집 아이들 때문에 쉬지 못해 화가 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면 피곤한데 이야기해야 하니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교회 가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 강한 부담감 때문에 교회에도 가기 싫어지거나 가더라도 한 두 시간 섬기는 것을 굉장히 부담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잃어 버리면 영적, 감정적 차원의 균형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네 마음(감정적 차원: heart)을 다하고 정성(영적인 측면: soul) 을 다하고 뜻(육체적 차원: 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던 우리의 열정에 혹은 주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에 이상이 생겼는가?


첫째는 창조의 세 가지 차원, 즉 영적인 차원, 감정적 차원,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첵크 해 보라.


둘째는 어느 차원의 어떠한 원인 때문에 그 이상이 왔는지 그 근본적 원인을 진단하라.


셋째는 이상이 생긴 차원의 균형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라.


넷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아심을 기억하고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그리고 담대 하라.


다섯째는 하나님은 그렇게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한없이 넓고 사랑이 풍성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열정과 섬김에 문제가 생겼나요?


3 가지 창조 원칙 저울의 균형을 첵크 업 하세요.


p.s.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있거나 소그룹을 인도할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일 주세요. 이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름의 비밀은 보장합니다.

[반영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II: 줄이기 (Reduce)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들어가는 말

‘환경보호’ 또는 ‘생태적인 삶 살기’를 위해 가정은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되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해 주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을 얻어서, 주어진 생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는 기독교를 가정의 주된 중심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 가정은 말 그대로 사회의 소금과 빛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책임 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그 섬김과 사랑이 전도, 즉 영혼구원이라고 말할 지 모르나 이는 좀 치우친 표현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흔히 전도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는 영혼구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세주’라는 고백 속에 들어 있는 전 우주적인 내용을 간과한 채…

그리스도인 가정은 바로 구원의 전우주적인 보편성과 각 개인의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유기적인 인격적 관계의 총화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그리스도 예수로 인한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각 가정마다 구체적으로 구원받음에 합당한 모습을 요구하시고 계신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요구한 적은 없으나 성경의 정신에 비추어 본 상식적인 의미에서 자연을 (환경을) 돌보아야 할 이웃으로서, 우리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인식하고 그에 적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제일 먼저 가정에서 식구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인간에게 관리를 부탁하신 하나뿐인 지구’라는 인식이 함께 생겨나길 바란다. 그리스도인 가정에 오만이 아닌 사랑과 섬김에서 출발한 ‘환경보호’에 대한 동기부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호에서 제안한 대로 정기적인 가정예배에서는 판에 박힌 예배형태를 지양하고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변화를 주어 성경을 바탕으로 한 폭넓은 주제를 소화해 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가족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도 하면서 구체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토론과 그에 대한 가족 단위의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가족회의를 통하면 온 가족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단합심도 키우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여 해결책을 모색할 때도 온가족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부모들이 신앙을 빙자하여 자녀들에게 무분별한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모든 가족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서 살펴 본대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의 대안 중에서 먼저 ‘줄이기 (Reduce)’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줄이기는 안 쓰기와는 좀 차이가 있다. 필요한 것을 사용하되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양만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줄이기는 쓰레기 양과 독성을 줄인다든지, 자원 절약 등을 포함한다.

쓰레기의 양과 독성 줄이기

쓰레기란 인간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문명사회로부터 배출되는 폐물질(廢物質) 중에서 고체 형태로 버려지는 것으로서, 쓰레기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을 경우, 사람의 생활공간을 더럽히고 경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킴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의 보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 쓰레기는 생활폐기물과 각종 슬러지(sludge:汚泥)와·산업폐기물 등으로 분류한다. 이 중에서 가정과 연결된 폐기물은 생활폐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폐기물은 한국의 경우, 연탄재, 부엌찌꺼기, 일반쓰레기 등으로 구성되며, 도시의 규모와 계절에 따라서 다르다. 부엌 찌꺼기는 음식물의 준비과정에서 생기는 것과 식사 후 버려지는 것으로 플라스틱, 헝겊, 나무, 고무, 가죽, 유리, 금속 및 기타 물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도시 주변 등지에서는 쓰레기 종말처리 후 매립하여야 할 매립지의 확보 난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천연 매립지인 난지도가 1993년 2월 28일 폐쇄되고 김포 매립지로 이전하였지만, 매립지 확보가 새로운 도시문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소각장 설치 및 운영 등, 쓰레기 처리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각 사회 이익집단 간에 심각해지고 있다. 이로인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고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서나 환경보호와 공중보건의 면에서 상당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한 후 각 가정마다 생활 쓰레기의 양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첫째로 소비의 행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쓰레기를 줄이려면 원천적인 의미에서 쓰레기를 적게 소비하고 적게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쓰레기 양은 각 가정에서 소비한 물품의 양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의사를 결정하여 쓰레기의 양을 줄여갈 수 있다.

–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의 양을 결정하므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물건을 구매하여 쓰레기 양을 줄인다. o 물건을 구매하기 전에 물건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해 보고, 필요한 물건일 경우 그 양을 결정함에 있어 경제성을 고려하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양을 구매한다. o 오래가고 견고한 물품을 산다. o 물건을 구매할 때 산 물건을 담아 올 바구니를 미리 준비한다. o 과도한 포장이 되어있는 제품의 구매를 삼간다. o 재활용한 물품을 이용한 제품을 구매한다. o 사용 후 버리도록 되어 있는 일회용 물품의 구매를 삼간다. o 음식물을 살 때 포장을 줄이기 위해 대량으로 구매한다. o 구매 후 같은 용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물건을 구매한다. o 원 자재를 덜 사용하는 제품을 구매하도록 한다. o 음식물을 살 때 편리하게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오는 제품을 피하고 가능한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o 음식물에 포장을 적게 사용하는 물품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o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 선물이나 카드를 사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본다. o 가능한 만큼 필요한 채소를 재배해서 먹도록 시도해 본다 (주말 농장 이용).

–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실천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o 음식은 양보다는 질에 중점을 두고 반찬 가지 수를 줄인다. o 양도 꼭 먹을만큼만 만들어 먹고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o 냉동실, 냉장고만 믿고 식품을 방치하여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실천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o 쓰레기는 반드시 분리수거를 한다. 젖은 쓰레기와 마른 쓰레기,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와 불가능한 쓰레기 등. o 주방 싱크대에서 걸러진 음식물쓰레기는 체 등에서 담아 1차로 물기를 제거한 후 꼭 짜서 버린다. 물기가 남아 있으면 헌 신문지에 짜서 물기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한다. 젖은 음식물 쓰레기를 베란다나 정원에 펴 말린 다음 배출하거나, 과일껍질 등은 실내에서 어느 정도 말린 후 배출한다. 태울 수 있는 것은 소각장에서 태운다. o 썩는 쓰레기는 구덩이를 파고 모아 퇴비로 만드는 것이 좋다.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나 사료로 이용하는 것도 환경을 보호하는 한 방법이다. 가정에서 가정용 퇴비화 발효용기에 음식물쓰레기와 미생물 발효제를 넣어 퇴비원료를 만든다. 가정에서 퇴비화 발효용기를 사용하면 썩는 냄새가 나지 않으며, 음식물쓰레기를 매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만들어진 퇴비는 주말농장이나 텃밭, 정원에 유용한 거름으로 사용 가능하다. 가정에서 배출된 퇴비원료는 공동 수거용기로 수집. 운반하여 퇴비로 이용할 수 있다. 음식물쓰레기에 수분 조절제 (톱밥 등)와 발효제를 투입하여 하루 정도 혼합 발효한 후 부숙시키면 퇴비가 생산된다. 발효된 음식물쓰레기를 밭갈이할 때 혼합하여 1주일간 썩히면 토양에 유용한 거름이 된다.

둘째로 집안의 독성을 줄여야 한다. 집안의 독성을 줄이려면 먼저 유해 제품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 다음과 같은 제언을 따르면 독성이 적은 제품을 선택하고 가정에서 사용되는 유해한 물질을 줄일 수 있다.

– 물건을 구매할 때 가능하면 독성이 없는 포장과 물건을 사도록 해야 한다. 독성이 있는 포장에는 제조과정이나 분배과정에서 간혹 납, 카드뮴, 수은이나 6가 크로뮴 같은 독성물질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소비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포장지의 사용을 줄이거나 포장되어 있지 않은 제품을 구매할 필요가 있다. – 페인트를 사용할 때 유성페인트 보다는 수성페인트를 사용하여 페인트 세척제의 필요를 없앨 수 있다. – 수명이 다 된 수은 건전지는 반드시 따로 모아 두었다가 지정된 장소에 버린다. – 수질 오염을 막기 위해서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o 쓰고 남은 기름류는 절대로 하수구로 흘려 보내지 말고 모아서 비누를 만들어 쓴다. o 음식 찌꺼기는 반드시 걸러서 내보낸다. o 정화조는 1년에 1회 이상 보수 점검하고 청소한다. o 합성세제의 사용량을 최대한 줄이고 천연세제를 사용한다. 가정용 화학 세척제 대신에 베이킹 소다 (baking soda)나 식초, 쌀뜨물, 비누 등을 이용하여 독성을 줄일 수 있다. 이를 통해 물의 오염도 원천적으로 낮출 수 있다. o 쌀 뜨물이나 국수 삶은 물 등은 정원수로 사용한다.

자원 (Resources) 절약

사전적으로 자원이란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자연계의 일부라고 정의되는데 기초자원과 천연자원을 가공한 것을 1차 자원, 이것을 가공한 것을 2차 또는 3차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 자원에는 지하자원, 토지자원, 수자원 등이 포함되며 천연자원에는 산림자원, 동물자원, 수산자원 등이 포함된다. 식량자원과 공업원료 자원과 에너지 자원은 관계되는 기초자원과 천연자원을 가공하여서 얻게 되는 1차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보호를 위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자원 절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취사용 연료 및 전기, 수돗물, 종이, 금속 등의 에너지 자원의 절약이 단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실천적인 방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취사용 연료 절약 취사용 연료, 즉 전기와 도시가스를 절약하려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것과 조리기의 불꽃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과, 열 흡수가 잘되는 밑바닥이 넓은 조리기를 사용하거나 압력밥솥 (냄비)을 사용하는 경우로 할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위와 같이 함으로써 상당한 양의 전기와 도시가스를 절약할 수 있다. 가스용 압력솥은 전기용 압력솥보다 열 효율 면에서 훨씬 우수하므로 밥을 지을 때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

– 수돗물 절약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씻고 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한데 수돗물을 아껴쓰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물부족 현상을 다소간 줄일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주의하여 점검하고 실천하면 좋겠다.

o 물이 흐르고 있는 수도꼭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반드시 잠그는 습관을 기른다. o 매번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기보다는 가능한 짧은 시간 동안 샤워를 한다. o 한 번 쓴 물은 다시 이용하는 습관을 기른다. 쌀뜨물을 국을 끓일 때 이용한다든지 기름제거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한 번 세탁한 물이나 세수한 물 등은 바닥 청소용이나 화장실 변기 세척용 등의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o 물을 틀어놓은 채로 음식이나 그릇을 씻지 않도록 한다. o 세차는 호스로 하지 말고 물을 받아서 사용한다. o 화장실 물탱크에 벽돌을 넣는다. o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지하탱크나 기타 용기에 모아 두었다가 화장실 변기 세정 용수나 공조용 냉각수나 나무 물주기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관리 사무소에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도록 건의할 수 있으며 개인 주택의 경우에도 큰 통을 몇 개 준비하면 시도해 볼 수 있다.

– 종이 절약 가정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그 양이 많지 않지만 포장용지의 사용이나 가정으로 배달되는 불필요한 광고지 등을 고려하면 상당한 양이 된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가정에서의 종이 절약을 실천해 보면 좋겠다.

o 선물할 때나 물건을 구매할 때 가급적 포장용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o 불필요한 광고지나 메일이 배달되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가령 문 앞에 ‘광고지 사절’이라든지 인터넷이나 회사를 통해 물품을 구입할 때 불필요한 뉴스나 광고지의 배달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o 컴퓨터나 여타의 인쇄, 복사기를 이용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만 인쇄하거나 복사한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중에서 ‘줄이기’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런데 위에서 제시된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인 환경보호 방법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인간의 이성에 맞는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인간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을 활용하여 적합한 방법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든지 각종 학문을 하는 행위도 다 이러한 이성을 이용한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환경보호를 위한 방법 중 ‘줄이기’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중 절제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인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천적으로 환경 파괴는 인간의 소비행위와 연결되기 때문에 인간의 소비를 줄이면 소비와 연결된 각종 환경문제가 줄어들게 된다. 자연의 정화능력 또는 지지력 (Carrying Capacity)를 고려한 소비 조절이 환경보호의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환경보호 노력은 곧 바로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자 문화명령과 지상명령의 실천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걸작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자연은 서로 사랑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숙명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책임을 하나님은 인간에게 맡기셨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니 감사한 마음으로, 보다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이 책임을 감당하길 소망해 본다. 나 한 사람부터,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조근상] 영어찬양과 한국어 찬양사이에서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1970년대 당시에 인기 있었던 통기타 그룹은 단연 ‘트윈폴리오’였다. 아직도 이 분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송창식, 김세환, 그리고 윤형주로 구성되었던 이 팀은 당시에 미국의 인기 있던 팝송들을 번역해 불러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을 불렀었다. 전통 트로트가 아닌 통기타의 선율을 가지고, 더군다나 번역된 곡을 노래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아시겠지만 한국의 찬양은 대 부분 번역 곡이 많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부르던 노래를 종합해보면, 거의 70-80퍼센트이상이 번역된 곡들, 특히 미국에서 불려지던 찬양이 한국에 들어와서 번역되어 진 것이 많다. 예수 전도단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던 1990년도 당시에 호산나 인티그리티 앨범을 한국에서 구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종로2가와 교보문고를 지나, 새 문안교회옆에 있던 ‘카리스’ 라는 크리스천 수입전문 음반판매점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때 쉽게 구하지 못했던 미국의 앨범들을 그 곳에서 비싼 값을 주면서 흥분해 하던 기억들이 생생하리라 생각된다. 당시 한국의 테잎들이 1500원정도 하던 시절, 카리스에서는 수입 음반이고, 게다가 크롬테잎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4000원씩 주고 그것을 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 나는 하나님에 미쳐 있었고, 예배와 찬양 곡이라면 없는 돈이라도 아낌없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100여 개의 테잎을(복사본을 포함해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셔서 다른 형제에게 줄 때는 마음이 꽤 아팠었다.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곡들을 외우다시피 해서 내게 테잎을 듣는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다만 외국 곡을 어떻게 번역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게는 큰 관심이었다.


결국 훈련을 마치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예수 전도단에서 찬양인도를 오랫동안 했었던 나에게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생겼다. 92년도 겨울 3개월동안 사무실에서 처 박혀서 ‘예수전도단 송북3집’을 만들었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유월절 어린 양의 보혈’을 번역할 때, 한 곡을 번역하기 위해서 한 달여 동안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난 후 결국 송북에 집어넣을 수 있었고, 또 ‘우리 함께 기뻐해’라는 찬양은 악보를 받은 지 10분만에 번역을 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같이 있던 간사들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번역문제로 복잡하던 90년도 중반에 영국의 그레함 켄드릭목사님의 비서와 우연하게 연락이 되어서 몇 곡의 번역을 의뢰 받았었다. 그 때 그레함 켄드릭목사님께서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의 조건을 팩스로 보내주셨는데. 첫 번째는 번역하는 사람이 번역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즉 영어를 능통하게 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번역하는 사람이 뮤지션인가, 즉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과,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사람이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96년도에 ‘You are my all in all’, ‘주 나의 모든 것’도 처음 번역할 때는 약할 때 ‘강함 되시네’ 가 아니라, ‘강함 주시네’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중에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공식적으로 모든 분들에게 사과하고 ‘강함 되시네’ 로 바꿔야 했다. 한 글자의 표현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느냐가 달라지기 때문에 번역을 잘못했다는 창피함에도 불구하고, 바꿔야 했다. 이 각 각의 기능을 가진 사람이 함께 모여서 번역을 하기를 원하셨다. 사실 그 전까지 번역할 때, 주로 혼자서 성경의 구절을 짜 맞추기 해 왔는데, 팩스를 받고 보니 번역하는 것이 더욱 구체적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기고 나중에 번역할 대는 혼자서 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같이 나누어서 번역을 함께 했다. 결국 처음에 번역했던 것들과 나중에 번역했던 곡들, ‘로마서 16:19’,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를 보면 후에 번역한 것들이 음악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서 더 깨끗하게 정리됨을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 오면서 사실 나는 번역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을 떠나면서 다시는 번역을 안 하겠다고 말한 이유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번역이 가지는 한계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요즘 한국에서 번역한 곡들을 보게 되면 많은 오류를 보게 된다. 내가 오류를 안 범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은 오류를 범했기에 더 더욱 번역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꺼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정말, 번역된 한국 찬양은 내 나름대로의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번역한 곡들을 보면 표현이나 내용면에서 열심히 하고 수고를 한다는 것은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음반을 내는 제작자들이 먼저 음반을 내려고 빨리 번역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 나 역시 번역을 안 하는 상태이기에 그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번역 곡들 사이에서 정말 중요한 가사의 내용은 사라진 채,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이려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단체가 번역한 곡들을 몇 글자만 바꾸어서 새로 곡을 출판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바이링글로 진행되는 코스타에는 특히나, 올해 처음 LA에서 열린 CKOSTA에서는 번역된 곡들보다는 원래 영어 곡들을 많이 부르게 되었다. 물론 깊이 있는 예배로 들어갈 때는 역시 우리 말로 지어진 찬양이 힘이 있고, 또한 우리의 정서에 맞기 때문에, 한국말로 된 찬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설프게 번역된 영어 찬양을 부를 때는, 이미 원곡을 듣고 알고 있는 학생들에게 부르라고 하기에는 나 역시 적응하기 힘든 것을 인정하게 된다.


최근 몇 년간 코스타의 모임에서 찬양 안에 기름 부으신 ‘shout to the Lord’, ‘Above all’이라든지, ‘Here I am to worship’의 번역 곡들은 아무래도 회중에게 같이 하자고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트윈폴리오의 노래들이 히트 된 이후로 가요계에서는 한국인들이 부른 가요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단지 번역 곡만이 아닌, 창조적인 노력으로 말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바람이 있다면, 한국인들 스스로 지은 찬양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되도록이면 영어의 원곡들은 억지로 번역하지 말고, 그대로 부르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2001년도 코스타 주제 찬양이었던 박성호 목사님이 지으신 ‘낮아지신 예수’라는 곡을 좋아한다. 가사를 보면, 끊임없는 묵상이 흘러나오고 깊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곡들이 우리 한국인들 안에서 많이 발견되어지면 좋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다.

[박총] 아내의 안식년을 챙겨주는 유학을 꿈꾸며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저희는 지금 유학(留學) 중입니다. ‘유학’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지요? 1990년대 들어 조기유학, 단기유학 같은 말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유학이라는 말이 담아내고 있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학’ 하면 대개는 한 남자가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기 위해 학위를 따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지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이름 있는 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 공부해야 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남편이 거의 모든 시간을 책과 씨름하는 동안 여성 배우자 역시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면서 나름의 고생을 하게 됩니다.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유학 기간 내내 돈에 쪼들리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유학 기간을 즐기기보다는 할 수 있는 한 빨리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덕이 되고 말지요. 대충 이러한 몇 컷의 스틸 사진들이 유학 생활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기에 유학의 빛깔도 가지각색일 겝니다. 아무리 각박하고 버거운 유학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나름의 여유와 멋이 없을 리 없지요. 하지만 유학에 대한 전체적인 틀은 확고 불변하며 좀체 끄덕하지 않습니다. 저희 가족의 유학 역시 다른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같은 틀에서 나온 변주(變奏)가 아니라 다른 틀을 지닌, 어찌 보면 약간은 파격적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희 가정의 조금은 다른 유학 생활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제 지인(知人)들이 제가 공부하러 토론토에 온 것까지는 아는데 재미있게도 제가 무얼 공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더라구요. 저는 지금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서 철학적 미학(Philosophical Aesthetics) 석사과정을 밟으러 왔다가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아귀가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어서 신학에 토대를 둔 학제학적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전공을 변경해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학부시절부터 저의 일관된 관심사가 세계관(또는 종교, 혹은 신학) 및 문화(‘대중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양식 전체를 가리킬 때의 ‘문화’)의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학(종교학, religious studies)과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그리고 철학이 버무려진 비빔밥식 공부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오늘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신학’하는 실비아 키이스맛(Sylvia Keesmaat)과 브라이언 월쉬(Brian Walsh) 부부를 저의 멘토(mentor)로 삼아 공부하는 것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입니다.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일반학교로 적을 옮기거나 우리 학교를 포함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 또는 신학교에서 문화와 관련된 공부(문화이론, 문화철학, 혹은 문화신학)를 하거나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영성신학이나 가정상담학도 상당히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학부부터 시작해 석사과정,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따로국밥식 전공을 하려는 것에 대해 저를 아끼시는 몇몇 분들은 공부를 마친 다음의 일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전공의 변경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름이지요.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더구나 박사 실업자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전공을 바꾸는 것은 장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다소 무모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략에서라면 모를까 지위나 생계를 위해서 어떤 자리에 연연하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무슨 공부를 하든지 앞으로 이어질 학문의 모든 여정을 그 분께 내맡기는 유목민적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저는 더디 가고 에둘러 가더라도 이미 주어진 레디메이드 학문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유목민적인 공부를 해서, 인문학다운 인문학(人文學), 즉 사람(人)과 문화(文)를 살리는 학문(學)을 하고 싶습니다.


소제목에 사용한 유학(幼學)이란 한자는 본디 고려 및 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인데 저도 이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내키는 대로 공부하고 있으니 저의 유학 생활을 지칭하는 말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는가 싶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나가자면,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전부 다 강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식적인 생각’이 얼마나 지식인들과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를 지식인들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폭력으로 봅니다. 물론 교수라는 폼나는 자리에만 연연하는 대부분의 박사 학위 소지자 자신들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유학 갔다 오면 당연히 교수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패배자로 간주하는 집단무의식적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학위를 받고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지천으로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부담감이 현장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을 빚어내고 있는 실정이지요.


대학 주위에는 강단의 빈자리를 뚫으려는 사람들이 ‘박사실업자’라는 호칭을 달고 버글거리는 반면 ‘현장’에는 전문가가 부족하다며 볼멘 소리들을 하더군요. 박사님들 역시 “내가 이걸 따느라 얼마나 많은 돈과 정력을 들였는데…”하는 ‘본전생각’만 버린다면 창조적인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제 취향이긴 하지만 학위를 받고 학자연(然)입네 하는 것보다 시민단체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폼나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월드컵 4강을 이루었던 히딩크 사단의 체력담당관이 박사 출신임은 내남이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까지 공부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저를 심으신 이 땅과 이 시대에 사람과 문화를 살리는 데 한몫 거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기실 공부를 마친 다음에 제가 가장 하고픈 일은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농사입니다. 4시간 밭을 일구고(피조계와의 사귐) 4시간 공부하고(삶과 문화를 배움) 4시간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이웃을 섬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훗날 이곳 캐나다에 머물지 고국으로 돌아올지 그 역시 님의 뜻을 따르겠지만, 만약 한국에 돌아온다면 갯살림, 들살림, 산살림이 고루 가능한 천혜의 공간인 변산(邊山) 같은 곳에 가서 태평농법(泰平農法)으로 태평하게 농사지으며 농촌과 지역 사회를 기름지게 할 하며 살 수 있다면 대만족이겠고, 외국에 남는다면 켄터키(Kentucky)에서 농사짓는 괴짜 노인이자 기독교 작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와 버몬트(Vermont)의 숲 속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다 간 니어링 부부를 따라 캐나다의 대평원(prairie)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북미에 사는 이들 및 이곳의 기독인들, 그리고 이민 온 한인들을 소박하게 섬기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흡족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지난 가을학기는 공부만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버거운 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의 문제도 큰데, 전공 변경이라는 이중고까지 겹쳐서 호락호락하지 않더군요. 게다가 아무리 질박하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에 얽혀서 살다보니 토론토 정착과 관련된 굵고 자지레한 일들이 첫 학기와 두 학기 내내 적지 않은 시간을 뺏어갔습니다. 더구나 작년 6월 편도선 수술로 인한 몸의 변화와 뒤따른 세 차례의 출혈로 인한 체력 저하로 인해 두 세 시간만 앉아서 공부를 해도 더 이상 집중을 못할 정도로 눈이 아프고 지치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제가 한 학기 내내 한숨만 푹푹 쉬며 살았으리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만만치는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특유의 여유와 낙관으로 늘 웃으며 지냈더니 군대 동료들이 그랬듯이 여기 와서도 학교 사람들이 저를 해피맨(happy man)이라고 부르더군요.


가족에게로 눈을 돌려보자면, 제가 늘 보살펴야 할 사랑하는 두 사람 역시 꽤 많은 시간을 가져갔습니다. 저 역시 유학 첫 학기인지라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두 사람 역시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첫 발을 내디딘지라 말은 꺼내지 않아도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달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공부만 놓고 보자면(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그렇게 분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안팎으로 우환이 겹친 격인데, 다행히도 제게는 크게 고민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고민이라는 것이 대개는 확고불변하지 못한 원칙에서 비롯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철저하게 학업보다 가정을 앞에 두는 것을 제 유학 생활 전체를 관통할 몇 가지 원칙 중 하나로 삼았거든요. 물론 당장 내야 할 과제물이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평소에는 상당한 시간을 가족과 더불어 보냈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찍 귀가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기회가 닿는 대로 장도 같이 보고 세탁소도 같이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유학 와서 공부에 전무하기 보다 가족을 먼저 챙겼다고 하니 어찌 보면 자랑은 아니지만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울 아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토론토 지역 소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주었고, 학교 친구 에이미와 상호한미교습(서로 한국말과 영어를 가르쳐 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해민이 난날(生日)도 아내랑 더불어 지성으로 챙겨주고, 집에만 있는 해민이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귀갓길에 중고가게를 헌팅하여 장난감도 자주 안겨주고 관심 있어 하는 책과 비디오도 검색해서 끊어지지 않게 대어주었습니다. 동네도서관과 지역문화센터에서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찾아 데려가고, 가족과의 나들이를 꿈꾸며 매월 토론토의 가족관련 소식지를 챙기고, 해민이와 아내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토론토의 가볼 만한 곳과 먹을 만한 곳이 담긴 책–Toronto: The Family-Tasted Guide to Fun Places 또는 Toronto with Kids와 같은 책들–은 동네 도서관에서 죄다 가져다가 읽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관계’가 ‘성취’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가족은 항상 공부보다 한 발 앞서 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제출해야 할 과제를 어떻게 마쳐야 할지 캄캄한 지경이라도 해민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그림책과 성서이야기책을 읽어주지 않고 잠자리 뽀뽀(goodnight kiss)를 한 적이 없습니다.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지칠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밥 먹고 설거지는 했습니다. 아내가 그냥 두라고 하면 “밤에 10분만 늦게 자면 되는 걸, 뭘.”하며 고무장갑을 끼곤 했지요.


이번 소제목에 달린 단어 ‘유학'(有學)은 원래 불교 용어로서 불가에 귀의하여 진리를 인식하였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하여 항상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닦는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저 역시 공부에 전념하러 여기 왔으나 가족에 대한 번뇌를 끊지 못하여 늘 가족에게 마음을 두고(有) 공부(學)를 하니 유학(有學)이라 한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닌 듯 합니다.


생활을 즐기며 삶을 통해 배우는 유학(遊學)


유학(遊學)이란 타향에서 공부한다는 뜻으로 우리 어릴 적 시골 출신 선생님이 우스개로 “이래봬도 내가 도시에 유학 다녀 온 사람이여”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이 “하하, 선생님. 도시에서 공부하는 것도 유학입니까?”라고 웃을 때의 그 유학입니다(실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유학과는 한자가 다르지요). 그런데 하필 배울 학(學)자 앞에 정반대의 의미인 다닐/놀 유(遊)자를 썼을까요? 읍내에만 가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시골 출신의 학생에게는 장안을 다니며 보고 겪는 모든 것도 다 공부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처럼 보고 겪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겨우 하루에 8시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자는 것이 목표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유엔에서 무려 다섯 해나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cosmopolitan) 도시로 선정한 이곳 토론토에서 오만가지 문화를 겪으며 배우는 인생 공부를 더 즐기는 사람에게는, 외국에 유학 갔다고 할 때의 ‘유학'(留學)보다는 ‘유학'(遊學)이 더 맞을 겁니다.


작년 여름 토론토에 닿자마자 이 도시를 사랑하고자 기도하였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처럼 진실로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면 알고 싶어진다고 이곳을 알아가기 위해 늘 잡스러운 노력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토론토의 역사와 개관에 관한 책을 읽어가면서 토론토의 과거의 현재, 미래에 관한 전체적인 모양새도 슬슬 머리에 담겨지고, 길과 동네 이름의 유래도 차차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도 모르는 것들, 이를테면 1792년 온타리오의 수도로 지명되었을 당시 단지 12채의 집이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토론토란 지명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 유래한 것인데 그 뜻이 만남의 장소(the place of meeting)라는 것 등을 저보다 더 오래 사신 분들에게 문제로 내기도 합니다.


학교와 집을 오갈 때에도 가능하면 낯선 길로 다니면서 이곳 저곳 눈요기를 하고,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국에는 없는 가게가 있으면 일부러 들어가 한 번 들러봐도 되냐고 묻고는 낯설고 진기한 것들을 살펴보고 구경합니다. 전세계 장신구들을 모아놓은 가게,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문화상품을 취급하는 가게, 인도산(産) 선물용품으로 가득 채워진 가게, 겉보기에도 묘한 기분이 드는 오컬트샵(occult shop), 네덜란드식 아이스크림과 얼린 요구르트를 파는 가게, 카리브해 먹거리만 전담하는 수퍼마켓, 캔디와 생일용품 등을 파는 캔디스토어가 바로 그런 곳들이지요.


제가 워낙에 풀꽃나무를 사랑했기에 토론토의 자연과 벗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 『토론토의 계곡』(Torontos Ravines: Walking the Hidden Country)이라든지 『토론토 주변을 산책하기 위한 온타리오 하이킹 가이드』(The Hike Ontario Guide to Walks around Toronto) 같은 책을 들여다보며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랑 해민이와 함께 하루여행객(daytripper)이 되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갈 만 한 곳의 목록을 뽑아놓기도 합니다.


저는 의식주를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더해 정치 사회, 자녀 양육, 학교 교육, 지역 사회, 가정의 제도와 의료 체계, 여가 및 놀이, 뒤뜰 가꾸기, 자전거 타기, 거라지 세일(garage sale) 등 이곳 생활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부터 ‘삶’을 배우고 ‘신학’하기를 원합니다. 제 컴퓨터에 ‘삶과 글’이라는 디렉토리 아래에 ‘토론토 생활 잡동사니’라는 꾸러미를 만들어놓고는 토론토에 사랑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스크랩한 것도 이미 적지 않은 분량이 되어 갑니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 한 몇 년 지나면 “토론토 100배 즐기면서 영어 배우기” 뭐 이런 제목의 책이라도 쓰게 될지 모를 일이지요.


저는 늘 기도하기를, 학교 수업과 제 전공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이러한 성향을 통해 타국 생활의 전 기간 동안 삶 전체로 배우고 공부하며 그것을 글로 녹여낼 수 있기를 빕니다. 말 그대로 살림을 통해 ‘신학’하며 ‘문화 연구’를 하는 이가 되기를 빕니다.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저는 오래 전부터 이번 유학이 저만의 유학이 아닌 저희 가족 모두의 유학이 되도록 기도해왔습니다. 흔히 볼 수 있듯이 남편은 죽어라고 공부하느라 집을 하숙집처럼 여기는 사이에, 아내는 유모와 가정부로 전락하여 영어 한 마디 못하게 되는 그런 비인간적인 유학이 의외로 많습니다. 게다가 어린애들이 둘 셋 있는 집은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오죠. 하루 하루가 얼마나 정신 없고 피곤할지 환합니다.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죠. 애들한테 매달리다보면 하루는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데가 있다고 해도 갈 엄두가 나질 않고 외국 친구를 만드는 건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주변에 한국사람이 없으면 말벗조차 없어 외로움과 답답함은 점점 깊어가지요. 이민 온 사람들처럼 상대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가끔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국처럼 대중교통도 여의치 않은 곳에서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간다는 건 좀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요.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빨리 학위 따서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보니, 유학생 부인들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분노는 풀릴 길이 없어 마침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마는 뻔한 시나리오가 의외로 자주 현실화된다는 것은 염연한 사실입니다. 애들은 애들대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함을 안게 되고, 정체성의 문제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가난에 대한 스트레스 등을 부모 발음을 놀리는 재미로 해소하는 식이 되고 말지요. 그러다 보니 가정은 무너지고 어찌 어찌 해서 겨우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이는 만약 배우자와 자녀들의 한결 같은 동의가 있을 리도 없겠거니와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담보로 한, 좀 심하게 말하면 가족의 삶을 착취하면서 이뤄진 학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학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첫 번째 시기는 제가 먼저 시작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일단 준비가 되어 있는 제가 3년 간 ICS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저의 소명을 위해 전념하는 ‘유학 1기’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내는 살림과 육아를 감당하면서 영어를 익히는 등 자신의 소명을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준비할 것입니다. 또 하나 이 기간에 주님이 허락하시면 해민이 동생을 가질 생각입니다. 이어 ‘유학 2기’인 이후 3년 간은 제가 집으로 들어와 살림을 하고 아내가 간호사로서 공부하고 일을 하든지 혹은 다른 소명을 품게 된다면 그에 맞는 공부나 일을 할 계획입니다. 아내 자신의 소명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이 세 해 동안 저는 아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애들을 키우고 공부하며 글을 쓸 것입니다. 다음 ‘유학 3기’ 시기는 두 사람이 다 자신의 소명터에서 전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민이도 즐겁게 학교에 다닐 것이고 둘째 아이 역시 제 형 또는 제 옵바 손을 잡고 유치원에 나가겠지요. 적어놓고 보니 그야말로 장밋빛 계획에 다름 아니군요. 말이야 쉽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그의 나라에서는 ‘성취’보다는 ‘관계’가 항시 먼저임을 늘 되새기면서 조금 더 힘들고 시간이 들더라도 가족과 더불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착취하면서 얻어진 공부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영향력이 없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론토에 오고나서 계획이 좀 변경되었습니다. 사실 아내가 한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따기는 했지만, 병원 근무 경험이 전무한데다가 전공을 살릴지 다른 공부나 일을 할지 아무 것도 결정한 것이 없이 왔고, 따라서 온타리오 간호사 자격 취득 관련 정보 같은 것은 전혀 알아보지도 않고 왔는데, 저희가 이곳 변두리 아파트에 둥지를 틀기도 전에, 아니 시차 적응도 채 되기 전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아내 역시 몇 년간의 직장 생활 후에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됐지만, 해민이 키우느라 배운 것을 묻어두기만 했는지라, 이 참에 온타리오 간호사로 일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여름날 해민이를 데리고 RN(Registerd Nurse, 정규간호사) 준비 학원이니 취업설명회니 온타리오 간호협회니 해서 여기저기 다리품 좀 팔고 다닌 결과 본디 계획을 조금 수정하여 온타리오 간호사 준비에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놓기로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온갖 서류를 준비하여 온타리오 간호협회에 RN 등록을 위한 자격 조회를 했더니 간호사 등록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시험과 영어만 해결되면 되는데 그게 한 2-3년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군요. 혼자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비용이 6,750불이나 하는 학원은 엄두를 못 내고 대신 RN Prep Guide 책을 구입해서 혼자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은 저한테 영어 못한다고 구박을 받아가며 꿋꿋하게 혼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첫 학기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아내가 간호사 준비를 안 한다고 해도 영어 배우러 다니는 시간 정도는 내주려고 전부터 맘을 먹고 있었으니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 솔직히 3년 뒤에 할 일을 당겨서 준비한다고 하니 제 코가 석자인 입장에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뜨기 전 지난 1년 반 동안 저의 유학 준비를 위해 아내가 처갓집에 들어가 식모살이에 준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까짓 거 정말 필요하다면 제가 파트타임 학생으로 등록해서 아내를 팍팍 밀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회가 되어 유학 2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내가 시간을 먼저 갖기 위해 나랑 자리바꿈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요즘 여성들이 조선시대처럼 합의되지 않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할 리도 없거니와–그것이 옳지도 않으니 당연히 반대해야 하겠지만–자녀들 역시 아빠의 학위 취득을 위해 평생을 위한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볼모로 잡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학위가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가정 불화, 자녀 가출, 주부 우울증, 파경, 이혼 등에 이르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ICS에서 함께 공부하는 한 형으로부터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유학왔던 한 가정이 있었는데, 남편은 죽어라고 10년을 공부만 해서 신학박사가 됐지만 부인은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는 얘길 들으니 속이 어찌나 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내는 교수님 사모님 소리 듣는 걸로 치유가 될까요?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한국 유학생 가정 뿐 아니라 북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군요. 그리하여 수많은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관계지향적이기보다는 성취지향적인 오늘날의 문화에 편승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가정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몰고가는 오늘날의 대학의 시스템에 있을 겁니다. 겉보기에는 폼나고 멋져 보이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알고 보면 학술지 기고, 무슨 학회발표, 각종 강연, 수업 평가 등 데드라인으로 거미줄 쳐져 꼼짝도 못하는 자리라고 하는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료 교수들에 비해 승진이 느려지고 그러면 자존심을 구기게 되니 슬슬 놀아가며 할 수도 없고요. 그러나 간혹 일부 교수들은 가정이나 다른 더 큰 가치를 위해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바로 그런 사람들이 희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유학(留學)이라는 것이 원래 거할 류(留)자를 써서 외국에 머무르며 공부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곳에 오래 거하더라도 더디 가도 함께 가면서 하는 저희의 유학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유학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아내의 안식년은 남편이 챙겨주자


불행인지 다행이지 몰라도 아내는 지금 당장은 제게 계획을 다시 세우자는 얘기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살림과 육아를 해가면서 영어공부에다가 간호사 시험 준비를 하나 더 병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2004년 5월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이 달은 아내가 결혼해서 전업주부 생활을 한 지 만 6년이 되기 때문에 안식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시기가 딱 떨어지는 것은 제가 2004년 4월이면 2년 간에 걸쳐 수업과정(coursework)을 다 마치기 때문에 아내가 안식년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1년 365일 일하는 전업주부는 어떻게 안식년을 가질까 하는 문제였는데, 저희는 시쳇말로 ‘아다리’가 딱 맞아떨어져서 뜻을 이루게 됐으니 아주 고마운 일이지요. 보통 안식년이 그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 미래를 위한 준비에 투자되듯이 아내 역시 지금으로는 자신의 안식년 기간을 이곳 대학에서 간호사가 되기 위한 4-6개월 과정의 재교육(refresh)을 밟을 생각입니다. 토플 성적표를 제출해도 되지만 아내가 워낙 시험에 약한 데다가(^^) 재교육을 수료하는 것이 버겁긴 해도 영어 실력 증대나 실습을 통한 현장능력 배양 등 모든 면에서 더 이롭다 게 저희들 판단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업주부(專業主婦가 아니라 專業主夫, househusband) 자리를 꿰차고 집에 들어앉아 공부하느라 스트레스 받을 아내를 착실히 내조하며 애들 키우고 살림하고 텃밭 가꾸면서 틈틈이 논문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물론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더디 가도 같이 가면 되지요. 집에서 애들이랑 놀면서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할 아내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저를 즐겁게 합니다.


이상은 물론 저희의 계획일 뿐이지요. 실상 우리는 한치 앞도 못 보는 근시안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제 공부만 10년은 잡는다고 하고, 더디 가도 가족과 함께 갈 것이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또다시 우라질 놈의 돈 문제를 꺼내듭니다. 1년도 쓸 돈을 갖고 와서 10년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을 하겠다고 하면, 언뜻 봤을 땐 어불성설일지 몰라도 그 분을 따르는 이들의 삶은, 제가 늘 감탄하며 읽는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표현을 빌자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네 삶이란 불가능성에 뿌리내리는(Life is rooted in impossibility)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저희 가족의 유학이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삶 전체로 공부하는 유학(遊學), 천천히 머물면서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거기에다가 할 수 있다면 아내의 안식년을 챙겨줄 수 있는 유학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간곡히 기도했듯이 유학에 대한 저희들의 진리 실험이 성공을 거두어서 하나만을 위한 유학이 아닌 모두를 위한 유학의 오솔길을 낼 수 있기를 오롯이 빌 따름입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

[이시훈] 천사와 씨름하는 사람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키 크고 잎새 무성한 나무들이 무척 많아서 여름이 되면 곳곳에 울창한 숲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너편의 집들이 사라진 아침을 맞으며 드디어 초록의 시절이 왔구나하는 감각적인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이른 아침 나무들 속을 산책하는 기분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숲 속엔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나름대로의 질서 있는 살림을 사는 존재들이 느껴집니다. 나무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식량을 구하는 작은 동물들,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노루 가족, 나무 밑둥에 기거하는 버섯이나 이끼류와 거기에 서식하는 곤충류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생물체들의 공동체를 목격하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경이로운 세계를 바라보곤 합니다.


들 토끼, 오소리, 고슴도치등의 작은 동물들을 아주 흔하게 보곤 하지만 가장 흔하고 가깝게 대하는 것은 다람쥐들입니다. 저희 아파트 주차장과 뜰에는 늘 다람쥐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마치 이웃의 한몫을 차지하려는 듯 행동합니다. 하루에도 두어 번 아파트 테라스에 올라와서 집안을 기웃거리는 당돌한 모습이 애완견 같습니다. 끼니를 손쉽게 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이들은 숫제 단골을 정해 놓고 내 집처럼 찾아와 먹이를 청합니다. 바구니 따위를 내놓으면 새끼를 치고 아가들이 자랄 때까지 기식하는 영리한 어미들도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그런 다람쥐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이 땅콩을 가장 좋아하고 콘칩과 초코렛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늘 창가에 준비를 해두고 있습니다. 지난봄에 저희 집 테라스에서 새끼 세 마리를 출산한 어미와 아기 다람쥐들이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함께 여름을 맞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다 자란 아기 다람쥐들은 한 둘씩 어미를 떠나기 시작했고 어미도 다른 처소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그 친구들은 끼니를 챙기러 거의 매일 저희에게 찾아옵니다. 어쩌다 오지 않는 날은 무슨 일인가 걱정도 되고 기다릴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야생해야할 그들이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면서 몇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주차장이나 차도에서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그들의 주검을 볼 때마다, 그들이 적응하기에 인간의 세계는 복잡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머물러야할 곳은 역시 안온한 숲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걱정은 그들이 그렇게 쉽게 주어진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들게 구한 열매 보다 사람들이 주는 고소하고 달콤한 먹이에 익숙해지고 나면, 거칠고 딱딱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애쓰려는 마음이 사라질까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자신이 속한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 늘 낯선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몸은 다람쥐인데 생각은 자신이 사람인줄로 착각하는 돌연변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시카고에서 타올랐을 열기가 그리습니다. 뜨거운 가슴과 정화된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들, 가슴 벅차게 밀려오는 소명감과 결의들… 지금쯤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었을 코스탄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지니고 있을 감격과 열의를 부러워합니다. 제 자신 신앙적인 나태에 빠질 때면 코스타 집회에서 보낸 시간들과 그 때의 영적 각성을 떠올리며 힘을 얻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코스타에 다녀와서 그 감동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내 삶에 영향을 주었고 신앙적인 결의를 지속시켰는가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고 냉소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각종 부흥회, 찬양집회, 간증회, 중보기도 모임등에 참여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곤 했습니다. 영적인 충만감과 다시 눈뜨는 듯한 기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상황에 스스로 자문하며, 신앙적 자립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곤 합니다. 혹시 제 자신이 스스로 찾고 구하는 신앙적 진리보다는 쉽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는 신앙의 열매에 익숙해져있는 것은 아닌가,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는 신앙보다는 피상적이고 달콤한 감정에 더 매료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서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르며 얻어낸 말씀의 의미만이 내가 겪는 절망과 상처를 극복하게 해주며, 세상을 향한 힘과 비젼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단단한 신앙적 자아를 갖게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순간순간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다진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으며 생활의 원동력을 얻듯 습관화된 큐티는 영적인 능력을 키워주며 늘 열려있는 마음과 감동을 줍니다.


초코렛에 길들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구하기 위해 벌판과 나무 위를 오르는 일을 게을리 한 다면 그것은 자연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의 향내와 풀잎의 감촉에서 느끼는 기쁨을 잊은 다람쥐는 비록 벌판에 살고 있지만 이미 작은 틀 속에 갇혀서 사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겠지요.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들판을 달리고 높은 산을 오르며 자신 안에 있는 소리를 들을 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깨달은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벌판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새로운 이름과 삶을 얻은 야곱을 생각하며 숲을 바라봅니다. 그가 끈질긴 씨름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과 대면한 사건이 우리 모두의 삶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