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유학생 사역과 말씀 묵상

(2004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씀을 통해서만 그 길을 갈 수 있다. 말씀 묵상이라는 주제는 두 가지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을 왜 묵상해야 하는가?’ 라는 말씀의 중요성의 차원과 둘째는 ‘어떻게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론적인 차원으로의 접근이다.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히브리서 11:3).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우리가 이 말씀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이 태초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 히브리서 1;3).


말씀 묵상이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고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묵상함으로, 즉 우리의 온 생각에 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누릴 수 있고, 어둠 가운데에 있는 삶에서 빛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참된 의미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던 눈이 띄어지며, 영적인 죽음에서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곧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생명의 말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채움으로, 즉 말씀을 묵상함으로 가능하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유익을 준다.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형통하게 하신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며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였던 여호수아가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편 기자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런 복이나 형통이 비단 한 개인에게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시 1:3) 한 사람의 형통은 또한 그 열매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도 형통을 가져올 수 있다. 여호수아의 형통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듯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얻는 삶의 형통은 우리 주변의 많은 영혼들에게도 함께 할 것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없을 때, 우리의 모습을 디모데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디모데전서 6:3 5). 우리가 말씀에 붙들리지 아니하면 타락한 죄의 본성에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우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할 때 (히 4 :12), 우리는 육신에 노예된 자가 아니라 온전히 말씀에 붙들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묵상 가운데로 들어가며 그리고 온전히 그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고전 1:21)는 것이다. 어떻게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요한복음 3장 5 6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듭나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거듭날 때에 비로서 영이신 말씀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묵상에는 반드시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 말씀과 성령님은 함께 하신다.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을 할 때는 먼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해서 깨닫게 해주신다. 말씀을 사모함은 곧 성령을 사모하는 것이다.


말씀이 궁금해서 처음 보기 시작한 성경책에서, 나는 끊임없이 발견하는 보물 같은 말씀을 만나며..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는 다른 분들의 말씀에 깊이 공감을 하게 된다. 기도 가운데, 묵상 가운데, 그리고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려주심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으로 충만한 것이, 예수님을 내 안에 가득채우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경험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한다. 말씀을 사랑하게 하심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


특별히 유학생 사역 중에서 말씀 묵상의 중요성은 더 없이 크다. 우리가 미국 유학을 오게 되면 배울 것이 많고 해야 될 일들이 상대적으로 많게 느껴지기 때문에 딴 짓(?)은 되도록 하지 않고 영어 공부나 다른 학위 공부에 더 열중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보다 학위를 따고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처럼 (빌3:8) 말씀 속에는 세상의 어떤 지식이 줄 수 없는 귀한 보배가 숨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선묵]당신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 당신 자신에게 적절한 관심을 주고 있는가?

옛날 어느 마을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가진 농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 하루 낳아주는 황금알로 그 농부와 가족들은 비교적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그 농부의 마음에 욕심과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저 거위를 잡아 그 속에 든 황금 알들을 팔아 사업을 시작하면 한꺼번에 큰 돈을 벌 수가 있을 거야!” 하고는 그 거위의 목을 비틀고 배를 갈랐다. 하지만 거위의 배속에 황금 알은 없었다. 이제는 황금 알을 낳아주던 거위가 없어져 그 농부는 전보다도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우리는 일과 사역에서 성공을 원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리석은 농부처럼 일의 성취에만 집중하는 마음이 앞서 일에 비정상적으로 매달리게 되어 일의 주체가 되는 자신을 바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바로 잘 관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은 우리의 존재(Being)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의 열매가 마치 거위가 난 황금알과 같다면 우리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즉각적인 결과만을 위하여 자신을 바로 돌보는데 소흘히 한다면 이 우화 속의 농부와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의 주체가 되는 자신을 바로 건강하게 보존하는 일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일의 성취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결과(열매)는 나무, 자신이 모든 면에서 건강하지 않으면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지도자들은 일에 관하여 많은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돌보는 일을 할 여유가 없어 소홀히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존재를 잘 가꾸는 것이 지도자에게 요구된다. 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는가가 좋은 지도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조급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도자 자신이 건강하고 늘 발전하면서 성장해간다면 그 열매는 반드시 맺혀지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 자신을 건강하게 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한 지도자의 존재(BEING)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고 관리해야 한다.


첫째, 지도자는 자신의 인격(Character)을 계속하여 다듬고 성숙시켜야 한다. 성령의 열매들을 우리의 인격 속에 맺어갈 때 하나님의 선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맺어질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도자 자신이 성령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인격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첫걸음이자 종착역이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남에게 전하고 나는 멸망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간구가 우리 크리스찬 지도자들 모두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 지도자는 자신의 개성/기질(Personality)을 건강하게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독특하게 지으셨다. 우리는 각 사람이 지닌 개성을 크게 분류할 때 어떤 타입들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 개성들을 조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사역을 보면 때로는 좋은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개성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오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개성은 타고난 성격으로서 어떤 Type이 더 좋고 나쁘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개성을 잘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지도자는 가치관(Value)을 정립해 가야 한다. 소위 말해서 철학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를 정립하고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사역에 있어서 “나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확실히 철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지도력이란 남을 다루는 기술 이전에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다.


넷째,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혹은 은사를 바로 이해하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지를 헤아리는 지혜로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또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일에서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은사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지도력은 지도자의 존재로부터 나온다(Leadership flows out of being.)”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스러운 일들을 이루신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 당신 자신에게 적절한 관심을 주고 있는가? 지도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장이규]소그룹 수양회

건강한 소그룹을 만드는 것은 소그룹 리더의 핵심적인 관심 중 하나이다. 그러기에 소그룹이 잘 성장하면 리더는 기뻐한다.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도 기쁘고 소그룹을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기쁘다. 자신의 물질을 나누면서도 기쁘다. 또한 섬기는 소그룹이 잘 자라나면 리더에게 내적으로 자신감도 생긴다. 하나님의 다른 일들도 감당할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일을 더욱 많이 창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섬기는 소그룹 모임이 역동성이 줄어들고 잘 자라지 않으면, 리더는 육신적으로 맥이 쭉 빠지고 내적으로 근심이 찾아온다. 이번 주 모임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염려가 앞서고, 모든 것에 부담이 자꾸 겹쳐짐을 느끼게 된다. 자신감도 점점 잃어간다. 신비한 것은 그러한 와중에 한 멤버라도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것을 보면, 리더는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고 기쁨과 보람이 찾아옴을 느낀다. 왜 그럴까? 소그룹의 건강이 리더의 주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신앙 공동체의 리더는 그룹원들이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도록 돕는 이(a spiritual care-giver)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건강한 소그룹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이것은 조화와 공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조화의 측면에서 건강한 소그룹의 영적 분위기는 ‘믿음 (believing) + 지식(knowing) +생활(doing)’의 균형(balance)잡힌 소그룹 생활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건강 상태를 이야기 할 때 흔히 이용되는 평가기준 중 하나가 그 사람의 육체적 몸과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건강의 조화이다. 마찬가지로 소그룹에서의 영적 분위기 건강진단은 소그룹 구성원들의 ‘믿음 (believing) + 지식(knowing) +생활(doing)’이 소그룹 모임 가운데, 얼마나 조화롭게 나누어지고 있는가를 실제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의 소그룹 모임 가운데 구성원들이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의 믿음과 앎을 얼마나 공동체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그룹 구성원들의 믿음과 지식, 그리고 생활화의 조화와 균형은 한편으로 리더의 영적 양분의 충분한 ‘공급(supply)’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의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는 충분한 영양분과 수분을 균형있게 외부에서 공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소그룹의 영적 분위기 창출을 위해서는 리더 측면에서의 충분한 영적 영양분들을 균형 있게 공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믿음을 성숙시키는 차원의 커리큘럼 지원, 믿음의 체계화를 위한 지식 차원에서의 커리큘럼 지원, 공동체 가운데 펼치고 적용시킬 능력의 커리큘럼 등이 균형있게 공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소그룹 구성원들은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는 가운데 건강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믿음의 적절한 조화와 믿음의 능력을 위한 공급을 위해 리더들은 소그룹내에서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이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매 주 혹은 2 주에 한 번 씩 만나는 몇 시간의 짧은 시간을 통하여 이 조화와 공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주로 리더는 어느 한 쪽으로 – 성경공부 중심이냐 사역 중심이냐 혹은 친교 중심이냐 등등- 자신의 소그룹 방향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소그룹의 균형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실은 공급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개인 영성 측면, 재생산 영성 측면, 개인 인격적인 측면, 대인 관계적인 측면, 갈등 문제를 다루는 측면, 공동체를 위한 헌신의 측면 등의 다양한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시간은 주로 영적인 측면-개인 기도와 성경공부-의 공급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공급적 영양결핍 현상은, 단기간에 병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그룹원들로 하여금 영향력 없는 ‘무능한 그리스도인 병’에 걸리기 쉽게 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표현할 때 일명 종교인이라 부르는 형식상의 생명력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소그룹의 영양결핍 현상에 대해 소그룹 리더는 의도적인 영양 보충의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1. 소그룹 수양회의 중요성


그러면 무엇이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소그룹 모임의 영양결핍 현상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는 비타민이 될 수 있는가?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교회를 떠난 house meeting time 혹은, 그룹 대외봉사 활동, 등등 –. 이 중 한 가지는 소그룹 수양회이다. 이 수양회는 그동안 부족했던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 된다. 생각보다 많은 소그룹이 이 소그룹 수양회를 잘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그룹이기 때문에 수양회 자체를 생각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평상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의 모임으로 1년간의 소그룹 모임을 끝내는 경우가 많다. 이 소그룹 수양회를 잘 이용하라. 이 소그룹 수양회를 잘 이용하면 필요 영양분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영양분들을 소그룹 가운데 공급하여 기대 이상으로 그룹 역동성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소그룹 수양회의 긍정적 영향은 많은 것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의 심리적, 인격적 관계 측면에서 소그룹 모임의 강화를 가져다준다.


  1. 그룹원들이 그 그룹에 대한 소속감을 갖는 점.
  2. 그룹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점.
  3. 그룹원들과 함께 있기를 기대하는 점.
  4. 모든 모임에 참여하려 노력 한다는 점
  5. 그 그룹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는 점.
평상시 소그룹의 모임을 통하여서 성경공부와 기도를 통해 영적인 공급이 주로 이루어졌다면 소그룹 수양회는 그룹원들이 심리적, 인격적 관계 측면에서 소그룹 공동체를 그리고 그룹원들을 만나게 만드는 것이다. 평상시 소그룹의 시간 운영에 있어서 깊숙한 인격적 만남의 시간은 사실상 부족하기에, 이러한 별도의 수련회 시간은 그룹원들로 하여금 마음의 대화가 열리게 하고, 겉돌던 관계성을 부수게 된다. 더 나아가 서로가 섬기고 함께 즐기는 가운데 공동체의 친근감을 경험하게 되고 삶의 소중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평상시 소그룹 모임에서 시간의 제약성으로 인해 단편적인 대답이나 이야기로 자신을 충분하게 표현하지도,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정황과 상황, 이야기보따리들이 수련회를 통하여 열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전에 단절되었던 이야기들이 종합이 되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 오해도 풀리게 된다.


둘째로, 소그룹 수양회는 그룹원들로 하여금 영적인 믿음(believing)과 앎(knowing)의 차원에서 재생산의 영적능력 강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평상시 짧은 소그룹 모임에서는 주로 성경 공부와 나눔 차원에서 멈추게 된다. 이 제한된 소그룹 모임 시간에 성경공부의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훈련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면에서 소그룹 리더의 능력 차원에 있어서도 그룹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칠 수 있도록 효과적인 교수법을 공급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문제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소그룹 수양회는 교회의 목회자를 초청하거나 강사를 초빙하여 그룹원들의 영적 재생산을 위해 그동안 부족하였던 별도의 커리큘럼을 공급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점에서 좋은 도구이다..


셋째로, 소그룹 수양회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개인적 믿음의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능력있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훈련을 통하여 양육된다. 반면에 약하고 그 자리에 늘 서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 자신의 희생 훈련이 되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배우기는 많이 배워도 자신이 그 앎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믿음은 결국 기형의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소그룹 수양회에서의 공동체를 위한 개인적 섬김의 훈련과 앎의 적용의 훈련(workshop)은 평상시 일방적으로 받아만 먹던 신앙인의 모습에서 행동(doing)하는 그리고 일하는(working) 그리스도인으로의 전환을 일으키는 출발점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소그룹 수양회는 심리적, 인격적 관계 측면에서, 그리고 영적인 재생산의 측면에서, 더 나아가 개인적 믿음의 적용과 훈련의 차원에서 약점을 보완하는 좋은 도구이다.


(계속: 2. 소그룹 수양회의 운영의 전략. 3. 소그룹 수양회 프로그램. 4. 수련회 운영 시 주의 할 점)

[김재석] 유학기간: 성경적 가치관 형성 기간

이코스타 2005년 1월호

성경적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KOSTA나 eKOSTA에서 여러 강사님들이 많이 다루는 내용이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 역시 이 문제를 한번은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이 문제로 직장생활 중 심각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고, 유학기간중 중요한 핵심을 파악하고 나서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이슈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학시절이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느라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다양한(?)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오히려 simple한 생활 패턴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가치관의 문제를 생각하고 새로운 시각의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대학시절 예수님을 영접한 후 철저한 제자훈련 과정을 받고,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늘 나의 주업은 복음 전도이고 직장 생활은 생계 유지를 위한 부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졸업후 나의 첫 직장이 경북 구미에 있던 정부 연구소였는데, 나름대로 주어진 일은 성실히 하였지만 늘 내 마음은 복음 전도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 관계에서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복음 전도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일하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 수행 정도가 되었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정도까지가 한계선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내 직장이 점점 복음화되어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직장과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 내 직장은 점점 발전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일하는 사람들만 많아져서 점점 퇴보할 것이고, 종국에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해 직장 문을 닫는 경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일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 가야 할 방향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중에도 직장생활과 유학 준비중이라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다룰 시간은 없었다.


유학을 와서 2년 정도 지나면서 내 생활이 simple life 상태에서 틀이 잡혀가자 이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에 “Your work matters to God (D. Sherman & W. Hendricks)”, Why work?”이란 책들을 접하면서, 내 마음에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점을 찾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직업과 소명”,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젼“ 등의 국내서적들과 또한 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당시 KOSTA 강사 목사님들을 통해 새로운 성경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실제로 그 이후에 있어서의 나의 직장의 생활과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갖게된 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요소를 정리하면 다음 3가지 정도라 하겠다.


첫째, 인생의 방향과 삶의 자세에서 성경적 비젼과 성공관을 갖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인생에 대한 꿈을 계획한다. 목표가 늘 내가 최고가 되어 섬김 받는 것이고, 내가 남에게 드러나는 것이고, 나의 만족과 영광을 좇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이라 생각하다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가 중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에서 발동하여, 주님의 인생 목표(막10:45), 즉 섬기는 것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는 사람이다. 즉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을 인생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평가하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온전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모든 일을 수행하고자 해야 한다. “못가도 좋으니 바로 가자”가 삶의 모토이어야 한다. 성공의 잣대는 남에게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얼마나 섬기는 삶으로 살아왔는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성경적 노동관/직업관을 갖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노동이나 직업을 생계 유지의 수단이나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이요(창1:26-28, 엡2:10),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6일동안 하셨던 천지창조도 일(노동)이였고, 이것은 기쁨이였다. 인간 삶에서 노동은 삶의 핵심 요소이고, 이웃을 섬기는 방법이며, 기쁨의 근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이 힘든 고통으로 바뀌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노동은 다시 새로운 사명으로 회복되었다. 우리의 모든 일상 업무를 주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골3:22-24절에 보면, 당시의 종(노예)들에게 상전을 섬기는 일상의 하찮고 허드레 같은 일들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유업의 상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 업무와 직장의 일들을 주께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직장을 나갈 때 예배드리러 가는 것도 동일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매일의 삶의 현장이 곧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신령한 산 예배의 장소인 것이다.


로마시대 노예들이 주인에게 예수의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모든 일상 일에서 주를 섬기듯 주인을 섬기는 노예들의 삶의 모습이 결국에는 주인들을 감동시켰고,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공인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지금 이 시대는 온갖 말들로만 전달되는 복음보다는 우리들 삶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향기가 전달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본다.


셋째로, 부와 보상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의 노력의 결과로 또는 행운으로 얻어진 보상에 대해 당연히 자신이 누리고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부를 자신만의 만족과 축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성공의 결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부를 이루는 과정이 중요하며, 또한 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재물은 자신의 필요와 더불어 이웃의 필요를 함께 채우는데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원리라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 대해, 주님은 유업의 상을 주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보상과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며, 바울도 이러한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유학기간은 시간적으로 매우 바쁜 일정이면서도, 자기 인생의 방향과 삶의 원칙/가치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결단할 수 있는 좋은 기간이다. 우리 코스탄들이 이 세상 가치관과 풍조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가치관 정립을 통해 새로운 풍성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