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길] John과의 만남

John [가명] 칼빈대학 학생이다. 칼빈대학에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어서 학교에서 나에게 학생하나를 멘토하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여 최소한 한해 한명은 기도하면서 성실히 섬길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고 허락하여 만난 학생이 John이다. 나와 John은 격주에 한번씩 만난다. 보통 두시간, 어떨땐 조금 넘을때도 있고 또 모자랄때도 있지만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난다.

지난 가을 학기 부터 시작하여 이번 봄 학기 까지 꾸준히 만났다. 만남 초기의 대화는 삶의 문제를 꺼내 놓고 그 해결을 위한 상담이었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과 지혜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이다. 주로 만남이 있기전 우리의 만남 앞두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또 우리의 만남을 의탁드린다. 이렇게 우리들은 만난다.

John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의 상담에서도 나는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그냥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좀 세련된 방법은 아니고, 좀 무식해 보일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이같은 접근을 아주 좋아한다. 그동안 여러 학생들과 교제하고 상담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귀한 통찰이 하나 있었다. 엄청나게 멋있게 들려지는 그런 통찰이 아니고 이미 성경에 수없이 많이 제시된 보편적이며 단순한 진리이다. ,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떠남, 혹은 하나님 보다 나와 사람을 더 의지함에 있다는 것, 그러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돌아감 혹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에 기인한다는 성경적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기도하며 John을 만났다. John은 교회도 다니고 있었고, 또 칼빈대학 같은 크리스쳔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하나님을 잠시 떠난 상태이거나 자기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두번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John의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것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도와 주셨다. 즉 기도중 그같은 의심이 생겨 났고, 구원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는 강열한 생각이 솟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우리의 대화는 복음제시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 John은 좀 놀라는듯 했지만,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매우 솔직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내게 분명히 대답하는 매사 분명한 아이였다. 나는 대화식으로 구약과 신약을 이야기 하며 교제 하였다. 그렇게 몇번을 만나다가, 학기말 시험이후 John과 그의 여자친구를 함께 우리집으로 점심 초대 하였다. John의 신앙상태를 알기 시작하면서, 또 집으로 초대해 놓고 나와 우리 가족은 매일 저녁 John의 구원문제를 위해 기도하였다. John에게 나의 가족도 소개하고, 또 점심을 함께 먹으며 많은 이야기 하다가 기회를 내어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제시하였다. 놀랍게도 John은 여자친구가 지켜 보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그날 처음 만났던 John의 여자친구였지만, 그녀는 내게 이 순간을 위해 제법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이 순간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함께 고백하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된 이후 봄학기에 가진 우리의 첫 만남에서 John은 삶의 여러 문제를 더 이상 가져 오지 않고 신앙성숙과 관련된 질문들을 하였다. 어떤 질문에는 스스로가 묻고 대답하기도 하는데 그 대답들은 John의 신앙 고백으로 들려 졌다. 전에 나누었던 삶의 혼돈 및 장래에 일어날 염려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의 대화에 조금도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 없는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 예수님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임을 다시 실감한 복음전도 였고, 또 멘토링이였던 것이다.

크리스쳔 교수의 참 맛은 학생이 좋은 직장으로 좋은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되어서가 아니다. 또 한학기를 잘 가르쳤다고 학생들이 감사로 스타벅스 카드나 책을  선물로 가져다 주어서도 아니다. 학기말에 주로 행해지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아서 또한 아니다. 크리스쳔 교수로서 가장 신나는 일은 강의실과 강의실 밖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되는 일이다. 영원이라는 차원의 엄청난 사역을 보잘것 없는 나에게 맡긴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 하시다. 나는 그같은 하나님이 너무 좋아 오늘도 혹 내게 맡기신 영혼이 없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옅보게 된다. 할렐루야!

[이유정]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여행가 한비야가 그의 책《그건 사랑이었네》2)에서 고교시절 미국인 선교사에게 받은 시를 소개했다.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때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3)

나도 짧은 인생이지만 여러 번 낭떠러지를 경험했다. 17년 교회 생활의 끝에 나는 자살을 생각하는 대학 2년생 젊은이로 무너지고 있었다. 인생의 도피처로 들어간 군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셨다. 군 생활 2년 동안 기타하나 메고 3사단 전역을 돌아다니며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찬양 군종조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미국에 건너올 때도 10여년의 기독교대중음악(CCM) 사역의 끝에서 영적 침체를 경험하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예배회복’의 부르심으로 날개를 달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유학 와서 1년 지나니 한국에서 가져온 재정이 바닥났다. 빈털터리 일보직전, 4시간 반 떨어진 이민교회에서 주말 사역 요청이 들어왔다. 분쟁의 어려움을 찬양으로 극복하려는 염원이 있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에서 찬양사역 전문가로써 10년 넘게 사역했던 내 마음이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다루셨다.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사역하면서 나도 모르게 높아져 있던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은혜를 누렸다.

미국생활 10년의 마지막 3년 간 나는 다시 한 번 낭떠러지로 나를 밀어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왜 영광스런 주의 몸 된 교회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불평도 많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광야 같은 기간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를 정금처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광야 학교 레슨 기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광야의 헬라어 ‘에레모스’의 의미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 물과 식물이 없어 살 수 없는 ’황무지’, 황폐하여 주민이 떠나버린 유기된 땅이다. 한홍은 《거인들의 발자국》에서 이 광야를 자신의 자아가 부서지는 곳, 교만과 독선이 녹아내리는 곳,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한 공격을 당하는 곳, 끝없는 방황 속에 탈진되는 곳,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생각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 한없이 외롭고 한없이 서러운 곳, 서글픈 마음이 드는 힘든 곳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엘리트는 고급 시설을 갖춘 명문 학교에서 나올지 몰라도 리더는 반드시 광야라는 학교를 통해서 빚어진다고 했다.

사무치게 동감이 되는 말이다. 성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그 광야학교를 통과했다. 40년 동안 광야에 도피해 있던 모세, 10년 넘게 엔게디 광야를 도망 다닌 다윗, 애굽의 밑바닥을 죄다 경험한 요셉이 그랬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30세까지는 야전경험을 하시지 않았는가? 

이 광야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셨다. 겸손하게 만드셨다. 전경일은 그의 책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에서 한 산악인 친구가 한 말을 소개했다. “넘어져 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낭떠러지를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광야 같은 10년의 끝자락에 허락된 안식월 4달 동안, 나에게 새로운 날개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깨달음의 산물이 바로 곧 출간될 책 《존재를 살리는 예배의 힘》(가제)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떨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고통에는 뜻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고통에는 뜻이 있다》에서 이를 ‘변장된 축복’이라 말했다. 고난  자체의 문제를 보지 말고 고난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핵심이다. 때때로 우리를 낭떠러지로 몰아가시지만, 결국에는 창공을 날도록 날개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한다.            

–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


<주>
1) 오스트리아 여류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그의 시 ‘유희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에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표현을 썼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추락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날개가 있었다는 의미로 본다. 이문열은 동명의 제목으로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썼는데 젊은 날의 광기어린 사랑을 그린다. 이 책에서는 ‘추락하는 것에 있는 날개’를 끝 모를 추락, 즉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풀었다. 나는 바하만의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다.

2)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 p. 89. 한비야는 그녀의 나이 35세에 배낭하나 달랑 메고 7년간 세계여행을 한 여행가이자 작가이고, 월드비전 긴급 구호팀장으로 뛰기도 한 독특한 분이다.

3) 한비야가 이십대 초반, 자신에게만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노력해도 세상이 합심해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들어 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여고시절 영어성경반을 가르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던 글, 일기장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맨 앞장에 써 놓았던 시. 이 순간 정신없이 담금질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다고 소개한 시이다.

[김운학] 2010 NC-gpKOSTA를 참석하고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분께

 

벌써 3주가 지났네요.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있었던 NC-gpKOSTA에 참석한 것이 말입니다.  2004년부터 코스타에 참석했으니 벌써 여섯 번이나 다녀왔네요.  매년 코스타에서 돌아오면 변화되지 않은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하지만, 그때마다 저를 변화시키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저를 사랑하시기를 멈추지 않는 당신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수난일입니다.  2000년 전 당신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당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당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제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며 그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를 결단하는 마음으로 제가 2박 3일 동안 집회에서 받았던 은혜들을, 그중에서 제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의들을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의였던 섬김의 리더십과 성경적 세계관이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신명기 17장 14절부터 20절 말씀을 배경으로 이루어 졌는데 요점은 Leadership Transformation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본 리더십은 to do good이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리더십은 to be well 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to do good 에서 to be well 로 가는 것이 Leadership Transformation 이고 그것은 4가지 단계로 나누어진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Innovation 이고 두 번째는 Integrity 이며 세 번째는 Influence 그리고 네 번째는 Incarnation 입니다. 

 

Innovation

이것은 내면의 끊임없는 변화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말한 인식/초점의 변화가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에서 정녕 죽으리라.  인식의 틀이 회복되는 것, 더 이상 육의 제한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대하게 버리고 온전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리더로 거듭나는데 절대로 필요한 변화가 아닐까요?

 

Integrity

이것은 치우침 없는 양심입니다. 현혹된 인식이 회복되면 이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욕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치우침 없는 양심은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내가 참으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것입니다.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언제나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Influence

이것은 지시보다 마음의 감동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인간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려고 하고 이웃을 사랑할 대상이 아닌 경쟁해야 할 상대, 즉 내가 밟고 일어나야만 하는 상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속적인 리더들은 권력을 사용하여 명령으로 사람들의 몸 움직이려고 하지만 성경적인 리더는 사랑으로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저는 언제쯤 세계관이 회복되어 사람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력이 아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Incarnation

이것은 완전한 자기부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마음이 진정한 자기부인입니다. 

이렇게까지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의 참 의미가 아닐까요?

 

변화는 기도, 양심은 순종, 영향은 겸손, 그리고 자기부인은 섬김입니다.

 

Leadership and world view transformation이라는 과정은 말씀으로 시작되어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변화의 시작도 말씀이고, 내 양심을 지켜 주는 것도 말씀이며, 내 마음의 감동을 주는 것도 말씀이고, 섬김의 본질도 말씀이라는 것을 이번 집회를 통해 알게 되어서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제 이것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만 남았군요.

 

6년 전 무더운 한여름 밤 자정에 아무도 없는 제 방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다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 자신을 Spiritual Cinderella라고 부릅니다.  12시 전에는 세상의 화려한 자녀였지만 12시 후에는 초라한 당신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저를 사랑하시기에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된 그날을 돌아보면 지난 6년을 돌아봅니다.  그동안 걱정도 많이 시켰고 불효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는 당신.  이번 코스타에서 내린 결단은 이 과정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당신이 제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한 저도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호적에서 파버리시고 아들이 아니라 부인을 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이 글을 맞추고 나면 저는 벚꽃 놀이를 하고 있겠죠. ^^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와 지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가고 꽃 피는 봄이 왔듯이

D.C.에 벚꽃이 피듯 N.C.에 하나님의 나라가 피기를

차가운 마음의 겨울도 가고 따뜻한 봄이 오기를

떨어지는 꽃입처럼 제가 낮아지기를

 

아들됨과 채찍질하심을 같이 받기를 사모하는 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