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이사야 60:1~3, 개역개정)
KOSTA/USA가 시작된 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KOSTA/USA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 안에 있었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무엇보다 KOSTA/USA를 이끌어왔던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모토가 한국 복음주의권에 시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을 감사드린다.
복음, 민족, 땅끝(삶과 신앙의 통합)은 지난 25년 전 KOSTA를 시작할 때부터 KOSTA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가치(core value)였다. KOSTA/USA가 시작되었던 1986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KOSTAN들은 유학생으로서 고된 삶 가운데 있었고, 암울했던 조국의 상황을 그저 멀리 타국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1980년대를 사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복음이 진정으로 한국 민족에게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선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엄숙한 소명이었다. 복음이 삶으로부터 괴리되고 신앙이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당시 기독교 현실의 이원론적인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KOSTA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KOSTAN들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런 고민과 결단은 지난 25년간 KOSTA/USA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복음, 민족, 땅끝’은 여전히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 처음 KOSTA를 시작했던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우리는 올해 KOSTA/USA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먼저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5년 전 복음이 우리 선배 KOSTAN들에게 소망이었듯,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소망임은 분명하다. 복음은 창조주의 선한 창조의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간성이 회복될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선포이자, 끊을 수 없는 죄의 악순환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구원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연, 사회, 문화, 학문 등 피조세계 전체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주적 선포인 동시에, 어그러진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하게 될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께서 세우셨다는 공동체적 선포이기도 하다. 즉,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 목표이자, 민족과 땅끝의 기초가 되는 포괄적인 가치인 것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특별히 일제 강점과 한국 전쟁, 가난과 독재 등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목적이 있음을 믿는다. 다만 25년 전 우리 선배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조국을 섬기는 일을 통해 발현시켰다면, 이제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폐쇄성에 빠지지 않고, 타국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탤런트와 성품을 사용해 우리 조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폐쇄적이거나 이기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섬김’의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끝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민족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복(blessing)을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나눌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끝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나 땅끝의 의미는 단지 선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놓은 경계(boundary)를 넘도록 요청한다. 예배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의 전부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에게, 복음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영역에서만 우리의 주(Lord)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가정, 사회, 문화,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전 영역(sphere)에서도 역시 우리의 주로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전 우리 선배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적용된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세속화 및 혼합주의(syncretism)의 도전 또한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명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 세속화나 혼합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이원론 및 혼합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피조세계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선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010년, KOSTA/USA 25주년을 맞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 민족, 땅끝의 세 단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또한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복음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 선교적인 의미로서의 땅끝의 가치, 또한 피조세계 각 영역의 복음으로서의 땅끝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뒤틀려진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과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신실하심을 표현하셨으며,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으로 부름받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많은 경우 결혼을 위한 준비는 결혼할 대상이 있고 결혼날짜를 잡으면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결혼준비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는 많은 돈을 들이고 계획을 세우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정작 진짜 해야 할 결혼준비에는 너무나 소홀 한 것을 본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결혼준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안정감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진실한 사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다. 반대로 안정감이 없는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대안이 없는 충동적인 일을 벌이며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 쉽다. 또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만약 남편이 안정감이 없어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쉽게 옮겨 다니거나 혹은 이 일 저 일을 마구 벌이고 수습하지 못한다면 가정은 매우 불안할 것이다. 또한 아내가 불안정하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경우 이는 교육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가장 좋지 않은 교육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깊이 있고 신중하게 사고하며 감정과 행동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감도 결혼준비를 위해 중요하다. 혼자 독신으로 산다면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고 즐기는 일만 선택하여도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하기 싫어도 힘이 들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이 버겁고 억울하게 생각된다면 결혼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러 책임감 중에서도 돈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혼하는 부부들의 실제 이혼 사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외도와 경제 문제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쪽이라도 돈을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규모 없이 함부로 쓰거나 원하는 것은 일단 카드로 긁고 보는 것이 습관이라면 결혼 후 얼마가지 못하여 가정경제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입과 분수에 맞는 씀씀이와 부족할 경우 일을 통한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수입원으로 하는 책임 있는 재정관리가 연습되어져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결혼을 앞두고 가계부를 기록하며 돈을 아껴 쓰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 당시 나는 급하면 택시 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었다. 결혼 후에도 가계부를 기록하며 수입 범위 안에서 각 항목 별 예산을 세워 그에 맞게 지출하였는데 20년 동안 그렇게 하였고 지금은 몸에 밴 습관으로 가계부 없이 생활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진실성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신뢰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거짓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를 대하며, 돈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속이지 아니하고,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오해가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실성을 믿지 못하게 될 때 몰래 반려자의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주머니를 뒤지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과 대화단절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두 가지가 부부갈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므로 정직한 언어와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은 결혼을 위해 평소에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외에 특별히 자매들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상냥함과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가 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밝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가족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가정에서 쉬고 에너지를 충전하도록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눈치 없고 둔한 남성들의 행동에 만족하기가 어렵다. 뭔가 부족하고 섭섭하며 아쉽고 속이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잘난 우리 여자들이 너그럽게 이해하고 참읍시다!” 희생정신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무리 남성들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여전히 가사 일은 여성의 부담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고 희생할 줄 알며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결혼생활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반려자가 없어도 결혼 준비는 가능하다. 오히려 행복한 결혼을 위해 더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좋은 준비 기간이 될 것이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상냥함,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 이러한 것들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진정한 결혼준비 내용들이다.
예전에 어떤 멘토가 좋은 멘토인지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될 수 있으면 가족이나 나를 잘 아는 사람보다는 제 3자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는 가족이면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엄마가 나의 멘토이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인데 가장 먼저 결혼한 막내가 선교사로 M국에 가있다. 사람들은 ‘오지’라고 말하는 곳이지만 동생말로는 그곳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교회에서 하는 선교에 열심히 동참하시고, 선교의 중요성도 잘 알지만 막상 자식들이 선교사가 된다고 하면
반대부터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조금 다르시다. 두 분 모두 평범한 평신도이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을 기뻐하시고,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삶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신다. 특히 엄마의 신앙은 말과 행동의 일치로 이어지면서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오랫동안 옷가게를 하신 엄마는 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신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상권이 주춤하고 있는 상태지만 항상 밝게 웃는 엄마를 보고
장사가 잘 된다고 생각하신 어떤 분이 ‘아줌마는 교회다니셔서 이렇게 잘 되시나봐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그 분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러게요. 참 감사한 일이지요’ 하셨단다.
그래서 내가 왜 교회에 나가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냐고 묻자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있겠니? 무조건 교회만 나가라고 하는 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기회와 상황을 열어주실 때가 있어. 그 때를 잘 알아야지.” 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전에는 교회말고 다른 곳에 선교헌금을 하고 싶다는 어떤 할머니가 소개를 받고
찾아오셨는데 동생 내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더란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보니 그 할머니가 평생 교회를 다니셨지만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선교헌금을 했다는 것을 알리고만 싶어하는 것 같아서
엄마는 과감하고 직선적으로 할머니께 복음을 전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렇게 교회만 다니시면 아무 소용없다며
일침을 가하셨다고…그리고 선교헌금은 반드시 교회에 하시라고 권면하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놀라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는데…
내가 그 할머니가 이상한 교회 다니신거 아니냐고 묻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큰 교회라고 하셨다. ㅡ.ㅡ;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을 모르는 사람.
교회가 뭔지, 복음이 뭔지, 들을 기회조차 없는 사람.
교회를 다닐 여건이 되지만 도대체 귀를 막고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어찌됐건 이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이 전해져야 할 곳이 많으니
예수님이 오실 날은 점점 미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나의 복음은 어떤 것일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알기에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러나 값싸지 않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복음의 능력은 잘먹고 잘사는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엄마의 일상은 늘 활기차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는 소망함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런즉 너희는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제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 글을 쓰거나 하는 형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거의 매일 들러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곤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 대학생으로부터 제 나이 정도 되는 사람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대부분은 공대생/공학자/엔지니어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미싱공’이라고 칭합니다. 그 논리는, 60-7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이 ‘미싱공 언니’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21세기 초반 한국의 경제 성장은 현대판 미싱공인 엔지니어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45세면 다니고 있던 회사 나와서 뭐 하며 살지 막막해지는 현실은 40년 전 미싱공 언니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푸념입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겨보겠다고, 동생들 학교 보내겠다고 시골집을 나와서 상경, 공장에 들어가 하루 15시간씩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예전의 ‘미싱공 언니’들에 비하면 물론 지금 엔지니어들은 여러 가지 처우가 훨씬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엔지니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랄까요 그런 것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저는 수년 전 KOSTA/USA 집회에서 손봉호 교수님께서 하셨던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씨름했던 학문/직업세계와 신앙의 통합에 관하여 가장 명쾌한 그림을 그려주는 말이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그분의 주권 아래 회복하시는 그때가 되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열심히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의 기쁨이 그때는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올 세상의 삶 (life to come)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삶과 사역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 새 창조가 이제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고 그 가치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월화수목금금금’을 하며,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21세기 초반의 엔지니어들에게, 예수께서 선언하신 이 새로운 세상, 새 창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고민을 가지고 실제 삶을 살아내는 일은 이론적으로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제가 대학생 때, 대학원생일 때 열심히 배웠던, 창조-타락-구속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의 틀은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 너무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긴 한 걸까 하는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 세계관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다들 교수님이 아니었던가. 정말 ‘세상’에서 뒹구는 공돌이-미싱공들의 현실에는 그저 맛있어 보이는 자린고비의 굴비는 아닐까.
제 나름대로 1980년대 후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게 뛰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가치를 끄집어내서 살다 보니 심하게 세속화되어버린 저 자신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빡센’ 세상을 접하면서 그 기독교 세계관(혹은 개혁주의 세계관)의 프레임워크가 정말 유효하긴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하였고요.
물론 제 나름대로 이에 대하여 정리해가는 생각이 있긴 합니다만, 그리고 기회가 되면 이곳 eKOSTA 에서도 그런 내용을 나누며 많은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합니다만, 오늘의 글은 이 정도에서 애매하게 맺어보려고 합니다. (혹시 댓글 등으로 제 생각에 ‘딴죽’을 거시거나 추가 설명을 요구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렇게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회복된 그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즐겁게 노동할 것이다.’라는 그 그림입니다.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어떤 분들이 제게 물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저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저 영원한 나라가 품는 가치 가운데에는 온전하게 회복된 노동도 있다고, 그리고 비록 여러 가지 현실이 여전히 어그러진 모습 속에 있지만, 나는 그 속에서 그 회복된 가치가 마치 지금 현재의 가치인 것 같이 살아내는 특권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게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