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실] 소그룹의 힘 3: 변화 (Big Impact)

목사님이시면서도 농사를 
좋아하시던 아버님께서는 어릴적 살던 
양옥집 옥상에 흙을 퍼다 올리셔서 
밭을 만드셨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옥상부터 올라가서 딸기와 참외, 토마토를 
따서 먹고, 저녁 반찬거리로 고추와 
가지 등을 따서 내려오곤 했다. 뿐만 
아니라 식구들이 겨우내 먹을 김장배추까지 
옥상 농장에서 재배했다. 교인들이 키우다가 
병이 들어 가져온 각종 실내 화초와 나무들이 입원해
있는 공간도 있었다. 

새벽 등산길에서 농사를
지으며 목회를 배운다
며 농부의 마음과 수고에 대해 설명해
주시던 아버님의 말씀을 그때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굳은 땅에 식물과 과실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땅을 경작해야 한다. 굳은 땅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개경(改耕)해야 할 뿐 아니라, 거름을
주어 마르고 굳은 땅을 옥토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긴 시간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아름다운 푸른 싹을 보게 된다.
이런 생명의 경이로움에 박수를 보내며 기뻐하는 농부의
심정, 그 수고와 사랑이 곧 영혼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함을 열심히 설명해 주시던 아버님의 말씀을
이제는 그림자만큼이나마 깨달아 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변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설교말씀을 들을 때도, 성경공부를 할 
때도 이 말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생각난다. 어떤 분은 
큐티를 할 때도 오늘 하신 말씀이 꼭
필요한 사람이 생각나면, 그 날은 그 사람이 이 말씀을
받고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조금 일찍 큐티를
끝내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큐티를 하라고 당부하고 오후에
다시 전화해 큐티를 했는지 확인하고 무슨 감동을 받았는지
물어보기까지 한다고 한다. 가정의 리더인 부모님이나
교회의 영적 리더들도 따르는 이들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사역을 하신다.  

목사님과 소그룹 리더들을 
만나면 많은 분이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말씀하신다. 이런 말도 해보고 저런 말도 해보고, 얼러도
보고 협박도 해보지만, 사람들을 변화시키기가 너무도
힘들다고 하신다.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인 듯하다. 내 경우에는 늘 내가
변화시키려고 애쓴 사람들보다 나를 먼저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자주 경험했다.  

가정과 교회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힘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영적 리더들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투자한 후에 지치고 
절박한 심정으로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역할과 다른 이의 역할을 구분하지 못할
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고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배소서 2장 말씀과 
로마서 12장 말씀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은혜로 살리시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여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지만, 육신도 영혼도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영혼이 변화하고 새로워지게 
하는 힘도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부드러운 땅으로 만들기
위해 사랑과 이해로 후원해 주고 따뜻이 대해주어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 함께 학습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안내하는 일이다. 말씀의 씨앗에
물을 주고 햇볕과 폭우를 막아주는 그런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신다. 이런 역할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모두 골고루 행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소그룹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그룹에만 존재하는 
네 가지 기능이 있다. 그것은 함께 
있기, 함께 배우기, 함께 돌보기, 함께 일하기이다.
소그룹의 아름다움은 함께하는 것이다. 

함께 
있기
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우리들에게 올
유익함을 계산하는 마음과 우리가 정해둔 타이밍(timing)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자 님이 쓰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두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자들이 준 사과 하나조차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형이 배고픔에 쓰러져
있는 동생에게 사과 반쪽을 들고 간다. 죽은 듯 누워
있던 동생은 형이 씹어서 넣어주는 사과를 받아먹는다.
그들은 이렇게 연명해 온 것이다. 두 소년을 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형이 늘 자신과 함께 있음을 믿고 지내온
동생은 기력을 회복한 반면, 형은 끝내 살릴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도종환 시인의 
산문집에 나오는 「그 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에 등장하는 
도마뱀은 3년 전 목수들의 실수로 몸에 
못이 박힌 채 죽어가는 친구 도마뱀을 
위해 끼니 때마다 먹이를 물고 나타난다.
그리고 해가 지면 함께 얼굴을 맞대고 함께 두려움을
견뎌낸다. 그 도마뱀의 사랑으로 못이 박힌 도마뱀은
3년의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난다. 그 도마뱀들이 어떤
관계인지 무척 궁금했다. 단순한 친구인지, 모자간인지,
부부인지……. 아줌마들에게 물어보면 남편은 절대로
아니라고 확신하셨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어쩌면 어느 부분엔가 
못이 박힌 채 살아가는 것 같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재물이, 병약한 사람에게는 
아픈 몸이 못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공부 자체가 순순한 배움으로 여겨지기보다
자신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 못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죄의 못이 그들을
늘 누르고 있을 수 있다. 가정에서나 소그룹에서 우리는
모두 못박혀 사는 서로를 위해 필요를 채워주고, 두렵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에 함께 있어 주어야 한다. 서로가
그 못에서 자유롭게 될 때까지 격려해 주고,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게 해주며, 위로와 기쁨을 주어 소망을
주는 것이 함께 있기이다. 이때 이미 박혀 있는 못을
더욱 두들겨서 더 깊이 박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독촉하며 협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해둔 타이밍에
그들의 못이 떨어지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타이밍은 그들의 시간과,
아니 하나님의 타이밍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빨리빨리
못에서 나와서 살아나고 변화되어서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하고 싶은 욕심이 모든 리더에게 있는데, 많은
경우 그것이 못을 더욱 깊이 박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함께 
배우기
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sins of power 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강의식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발견한 것을
스스로 삶에 적용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가장 효과적인 배움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배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을 인도하는 리더나
구성원들이 나눔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로 함께 배울
수 있도록 진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데다가 
리더라는 위치가 주어지면 그 욕구에 
힘이 실리게 되어 열심히 강의하고 
주입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시간보다 자신이 말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항상 진리인 
것처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빈 공간을 자신이 
채워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sins of power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나눔을 위해서는
일단 리더가 힘을 빼고 본문에 근거한 개방식 질문을
통해 그룹원들에게 발견의 창을 열어주어야 한다.  

5년 전, 교회에서 유년 
주일학교 사역을 맡았다. 미국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발견학습법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설교도 되도록이면 각자가 관찰하고 
해석하고 발견하도록 준비했다. 어느 주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며 대학생들에게 간단한 
연극을 하게 하여 읽은 본문의 내용을
눈으로 보며 관찰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은 작은아들 그룹, 한 그룹은
큰아들 그룹, 나머지는 아버지 그룹이었다. 각 그룹들에게
만약 그 사람이라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냐고 질문했다.
작은아들 그룹의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하고, 목욕을
안 해서 몸이 가려울 거라고 하고, 부끄러울 것 같다고
했다. 큰아들 그룹 아이들은 질투와 분노와 억울함을
얘기했다. 아버지 그룹은 용서의 기쁨과 아들들에 대한
사랑을 얘기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니?
그러자 아버지 그룹에 있던 3학년
남자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나님께 늘 거짓말하는 우리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세요.
어떤 여자아이는 하나님께 늘 고함을 질러대는 우리
엄마를 용서하라고 하세요.
몇 가지 질문들을 더 던져보니 아이들
집안 사정이 다 쏟아져 나왔다. 내가 만약 그 본문으로
강의식 설교를 준비했다면 감히 부모님께 품은 마음을
쏟아 놓게 하고, 그 아이들의 가장 아픈 부분이 부모들이라는
사실을 과연 알 수 있었을까? 그 아이들은 그날 자신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준 부모님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아주
진지하게 드리고 돌아갔다.  

질문으로 그룹을 인도하는 
것은 성령님께 각 사람의 마음을 
열고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드리는 것이다. 질문은 마음의 
밭을 경작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함께 
돌보기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한 관계 형성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어린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과
소망을 소유하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 잘 심겨진 씨앗과 새싹들이 된서리를
맞고 폭우를 맞아 다시 긴 시간이 흐르도록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몇 년 전, 세미나 
인도를 위해 하와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행사가 끝나면 바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라 몇 시간 정도 빨리 
도착해서 택시로 하와이 섬의 힐로(Hilo)를 
혼자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만난 택시 운전사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내가 미국
장로교단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절박한
삶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린 아내가 도박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주 가산을 탕진하고도
헤어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아내를 데리고 교회를
찾아 말씀으로 희망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도움을 바라고 나눈 얘기들이 온 동네에 돌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상처를 받아 이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눈시울을 적시며 내게 부탁했다. 병원처럼
자신들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좋은 교회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빌 하이버스(Bill Hybus) 목사님은 
『진정한 크리스천(Authentic Christian)』이라는 
책을 통해 관계 형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품성으로 진실함(Authenticity)과 긍휼(Compassionate),
희생(Sacrifice)을 꼽았다. 많은 사람이 진실치 
못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주님께서 그러하듯
긍휼한 마음으로 돌보고,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며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뜻이 돌보는
힘은 정죄하고 교육하는 말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에,
깊이 안아주는 넓은 팔에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일하기
의 단계는 말씀의 씨앗이 새싹이 되어 돋아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주어 더욱 깊은 변화와 성장을 줄 수 있는 단계인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기존 리더들이 리더십 개발을 위한
열린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기회를
주고,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상관없이 칭찬해 주어
자신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동참하게 하면, 건강하고
유능한 새로운 리더를 개발할 수 있다. 많은 리더가
이 단계에서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거나 경쟁하려고
하여 새로운 리더들을 개발할 기회를 잃곤 하는데,
무척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하려는 
리더보다 연약함을 나누고, 도움을 구하고,
함께 일을 하자고 초대하는 리더들을 
따르게 마련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나누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모든 소그룹은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유기체이다. 모든 유기체가 
그렇듯 소그룹도 생명주기를 거치게 된다. 탄생하고,
성장하며, 침체되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때가
되면 분리되기도 한다. 위에서 소개한 소그룹의 아름다운
네 가지 기능들이 소그룹이 생명주기를 지날 때마다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인해 잘 활용되었을 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소그룹
가운데 고요하지만 확실하게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빌어 돌 같은 마음의 땅을 부드럽게 
개경시키시고, 때에 맞춰 사랑의 비로 적셔주고, 햇볕이
너무 셀 때는 그늘도 만들어 주고, 잡초도 뽑아주게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짓는 농사는 늘 풍년가를 부르게
한다.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3)

올 봄에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소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며 여러 책들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명에 대한 책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씌여진 책인데, 왜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게 답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좀 찬찬히,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아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책의 2부에서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비해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 내용들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와 닿는 점이 좋았다. 저자는 소명이라는 화두를 꺼내면서 가장 먼저 직업과 소명을 구분하고 있다. 




첫째,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을 섬기는 삶이며 특별한 헌신과 에너지와 방향으로 투자되는 것이다.”…
둘째, 소명이 결코 직업으로 격하돼서는 안되지만 종종 소명에는 직업이 사용된다. 인근 의대 레지던트 프로그램에서 병리학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직업 의사지만 그의 소명은 직업보다 크다. 의사라는 직업을 사용해 그는 세상 의사들이 대부분 간과하는 목표들을 이루고 있다. …

셋째, 소명은 전통적 직업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보낼 수 있다. 최근 나는 친자녀 여섯에 입양 자녀 열 네명, 도합 스무 명의 자녀를 둔 분을 만났다. 집안이 난장판이 돼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기는 커녕 그녀의 말에는 침착함과 기쁨과 활력이 배어있다.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무희처럼 말이다. 스무 자녀의 어머니 노릇은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녀에겐 전통적 의미의 직업은 없었음에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 있었다.

끝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 단어의 사용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소명은 단일 직무인 경우가 드물다. 그 직무가 수사의 직분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의 소명-경우에 따라 단수든 복수든-을 발견하는 길과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이루는 길은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 여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pp. 90-92)


그리고나서도 부족함이 느껴졌던지, 저자는 다시 독자들이 소명과 직업을 분명히 구분하도록 돕기 위해 직업에 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직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동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 … 보람이나 소명의식을 별로 못 느끼는 일을 평생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여 살릴 가족들과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있기 때문이다. …

둘째,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소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

셋째, 어떤 소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때로 자신이 ‘한지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대 사회가 직업 특히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지위와 수입에 집착하다 보니 무직을 택하는 이들은 그만 주변으로 밀려나고 만다. (pp.98-101)


저자는 소명이 직업 이상이며 우리의 존재와 세계관과 인생 목표의 연장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소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규정하고 그 인간에게 소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로이 직업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룰 수 있다. (p. 104)

저자가 말하는 소명은 이런 것이다.

소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뭔가 긍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분을 높인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려 일하고 계시고,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그 나라를 세우실 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 소명이란 유독 종교적 직업을 가진 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 불신자 할 것 없이 의, 진, 선, 미를 창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분은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서 유익한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일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 – 미를 창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의미있는 일을 제공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깨어진 세상을 고치는 것-을 이루어 가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소명의 자리는 독특하다. 소명이 있는 이들은 더 높은 목표 의식을 갖고 더 큰 그림을 본다. (pp.102-103)

저자가 제안하는 대로 직업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세상의 필요를 보는 내 마음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갈 때 나의 소명이 발견되어지리라 기대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 자체가 소명의 필수 부분이라고 강조한 저자 덕분에 나는 용기와 위로를 많이 얻었다.



5장에서 소명을 직업으로부터 구별해내는 데 애썼던 저자는 6장에서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을 여정에 비유한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 경험은 우리를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단련시켜 다가올 미래를 잘 맞이하게 해준다. 이 현 순간에 하나님께 귀기울일 때 그 영광스런 발견의 과정은 시작된다. 우리는 여정 중에 배워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간다. 성품과 신앙이 자라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며, 전체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러다 때가 되면 소명의식이 싹튼다. (p. 110)


…우리는 10년 전에 미리 인생을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순간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명을 발견해 간다. 산길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점차 경치가 펼쳐지듯,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소명의식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앞에 뻗은 등산로를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로는 다음 발을 내딛을 만큼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 틀림없이 도중에 아리송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런 상황에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가야한다. 계속 가면서 계속 찾아야 한다. (pp.114-117)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 중에 많은 시도와 숱한 실험들을 해보면서 실패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상황에도 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런 소명찾기의 일부이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소명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격려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저자는 그 다음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소명을 분별함에 있어 우리가 귀기울여할 하나님의 음성이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신호들이지 공식처럼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길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소명에 대해 또 다른 별개의 장을 할애하여 우리 인생에 단 하나의 소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명이 있기 때문에 그 소명들 간의 충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그의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이를 돌보는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고 여겼고 아내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세 아이와 함께 남겨진 그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야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야심이 많았던 자신이 차츰 변하여 이젠 하루종일 아이들과 가정을 마음에 품고 다니며 아이들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 바탕에는 실패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했던 기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면서 그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현재 교수이면서 작가이기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정주부의 소명까지 감당하는 것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분주함과 압박 속에서도 소명의 복수성에 잘 대처하기 위해 단순성, 균형, 유연성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첫째 것을 첫째로 삼고 인생에 하나의 최고의 관심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를 잃지 말고 그 하나의 초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내면의 단순성을 연습하고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질 때, 가장 중요한 일을 구분해내고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것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연습에 힘씀으로써 선한 우선순위에 바탕을 둔 삶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균형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끝으로, 자신의 통제권 밖의 상황에 대해 유연하고 홀가분한 자세로 임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인생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 실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그가 소명의 복수성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긴장과 충돌이 오히려 건강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깊었다. 그때 야기되는 불안이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종과 청지기의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끝)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1)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2)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1)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 김현회


서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삶을 계속 사실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 진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바른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락방 설교’ 혹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장소가 다락방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요14:16).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인데, ‘우리 옆에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comforter(위로자)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original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original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을 때 육체를 입고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셨고, 그 때문에 오직 제자들과만 함께 있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영’이시기 언제, 어디서나 계실 수 있고 모든 믿는 자 옆에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을 생각할 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1)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2)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알고, (3)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체험입니다. 성경과 체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오직 성경’을 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령파’ 교회는 체험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체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성경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관해 배울 때 일단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체험 속에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체험은 매우 다양하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방언, 입신, 신유 등의 체험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보고 “이것이 진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읽은 힌두교 신자의 글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명상’, ‘참선’의 기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명상을 깊이 하다보면 내면 깊이 샘 솟듯이 기쁨이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제가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은혜 받을 때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힌두교 신자라는 이유로, 우리가 ‘당신의 체험은 가짜야’라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체험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 사람도 기쁨이나, 내적인 평화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성령님으로부터 온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고, 체험은 기준이 아닙니다. 체험은 성경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그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이 어떤 체험이 있다고 가르치면 우리는 그 체험을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체험에 관계를 여러분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체험으로 인해서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성경에 비추어서 그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중생, 성령세례, 인치심

[1] 첫째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역은 중생입니다.

중생, 거듭남, 영어로는 re-generation인데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만일 오늘날 교회에 찾아온다면 교회에서 굉장히 환영할 것 같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니고데모 정도의 background를 가졌다면 교회에서 금방 장로도 되고 높은 직책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네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  또는 ‘네가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구나’. 이렇게 칭찬하시는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볼 수 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고 율법에 통달했다. 하지만 너는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너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질문을 합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니고데모의 말 자체가 영적인 것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과거에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하여 물은 물 세례, 성령은 성령 세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물 즉 성령’ 물과 성령은 같은 것으로 혹은 물은 말씀, 성령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에스겔서 36:25-27에 있습니다.

(겔 36:25-27)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상태에 있는데, 이들을 본토로 돌려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본토로 돌아와도 포로가 되기 전의 영적 상태,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한 그대로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본토로 돌아가는 외적인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물이 나옵니다. “내가 물로 모든 더러운 것을 씻겠다. 그리고 새 영을 주고, 나의 신을 –성령님을-주겠다.”  다시 말하면 속에서부터 새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 너희가 성령님에 의하여 내면으로 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영으로 죽었었기에, 죽은 영을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영으로 분리되어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며,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맞지 않습니까? 이제 니고데모의 현대판 인물을 생각해봅시다.  Richard Dawkins을 아십니까?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입니다.  ‘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얼마나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best seller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도덕이 어디서 오는지, 인간에게 있는 옳고 그름의 의식이 어디서 오는지 그런 부분을 관심있게 봤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고, first class 책이 아니라 삼류 책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학자, 지식인들은 그 책이 무신론에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환영합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은 점은 역시 영적인 것은 육신의 눈으로 분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계속)

[이유정] 개독교를 위한 변명

브라질에서 음악으로 복음을 전하는 김민주 선교사가 최근 내 페이스북(facebook.com/moreahead) 남긴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 사역 갔을 때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존중과 섬김,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들이 앉을만한 의자는 없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열심인 한국 교회.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 그러면 우리가 주는 옷을 입고, 우리가 하는 말을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서 들어와’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정말 전도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문화(복음이 아닌)”를 지키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도는 강조하지만 실재로 비교인들이 앉을만한 의자를 마련하지 않는 자만… 부끄럽지만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실체가 아닐까? 불과 90년 전 한국 사회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 존경받는 리더십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인구 25%가 넘는 사회에서 오히려 그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도서 베스트셀러는 당연히 크리스천들끼리만 이해하고, 크리스천 저자들도 천만 크리스천을 타깃으로 책을 쓰는 것이 당연한 문화이다.

우리끼리 만든 게토 속에서 영적 슈퍼맨을 세워놓고 우리끼리 존경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축적한 재산으로 거대한 교회 건축물들을 구축하고 있다.

건강한 대형교회들을 무조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중산층이 무너진 한국사회의 기저인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종교적인 부, 그 안에서 간간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결과물들은 세상의 도덕기준보다 못하며, 차마 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선의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결국 세상은 우리들만의 언어와 우리 끼리만의 은혜로 만들어진 교회라는 도그마를 점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가장 최근 종교기관의 여론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3분의 2가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가지 않는 미국 성인들의 72%가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답변한 반면, “교회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참 모습이 결코 아니다. 그저 일그러진 교회의 일면일 뿐이다.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럽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직면하려고 한다. 왜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이곳이 좋사오니’(누가복음 9:33) 의식 속에 게토 화 되었다. 기독교의 본질인 희생적인 사랑이 그 게토 안에 갇혀 썩어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가 트렌드가 되면서 한 사람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배출하기보다 처치고어(church goer)만 양산하고 있다.

《개독교를 위한 변명》이란 책을 쓴 숭실대 기독교학과 동문들은 말한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단끼리도 서로 귀를 막고 삽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꼬집기 위해 개독교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개독교를 열린 개(開)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석학들도 감히 다루지 못하는 교회의 치부에 대해 저 변방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이 솔직한 고백을 토해냈다. 세속화, 대형화, 물량주의, 권력욕, 파벌, 고속성장, 성 스캔들의 유혹에 무릎 꿇은 한국교회는 다음세대의 주역인 이 젊은이들의 정직한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개(開)독교가 되기 위해 자성하고 사회의 질타소리를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

무릎 꿇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운동을 시작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운동을 시작하자. 무너진 교회성벽을 다시 일으키는 재건운동을 시작하자. 훼파된 예배를 살리는 예배회복운동을 일으키자. 한국교계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이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최주희] 성 관리와 돈 관리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혼 사유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배우자의 부정행위, 경제적인 문제, 성격차이로 표현되는 대화단절 및 거짓말 등 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다보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외도, 낭비벽, 너무나 많은 부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다. 믿는 가정이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가대원 끼리 눈이 맞아서, 혹은 목사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들다시피 하는 여성도와 목회자가, 대학부 담당 장로와 대학생이 불륜관계에 있기도 하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규모가 없이 새로 나온 기계는 일단 사고 보고, 타고 다니는 차가 고장 나지 않았음에도 몇 년 되면 다른 차로 바꾼다. 자녀 사교육비 과다 지출, 분수에 넘는 비싼 옷, 습관적인 외식도 사소한 것 같지만 가정 경제를 뒤흔드는 요인들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는 요인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남편과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 불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도덕성을 지키며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성(性) 관리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과 단 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직장에서 야근 한다며 이성과 단 둘이 있거나, ride 를 준다고 이성끼리 차 안에 단 둘이 있지 않는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 가 반문할지 모르나 이는 회색지대여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죄’가운데 빠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다. 실제로 이성끼리 단 둘이 있는 환경에 자주 접하게 되면 정들게 되어 있다. 실례로, B 집사님이 새벽에 교통사고 났는데 그 옆에 여직원이 타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불륜이 들통 나 회사를 사직하였다. 반면 미국에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A 목사님은 “혹 비가 올 때 내가 빈차로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우리 교회 여자 성도를 만나도 태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단에서 선포하셨다고 한다.

둘째, 이성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 혹은 친밀감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도에 넘는 개인적인 친절이나 관심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에 언급된 교회 안에서의 다양한 불륜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들이 과다한 노출패션을 삼가야 한다. 패션은 자신의 취향과 유행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 특히 남성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성충동을 느끼게 하여 어려움을 준다면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몸가짐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가슴이 많이 드러나도록 패인 옷,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한 짧은 치마, 진한 향수, 야한 눈짓과 몸짓은 남성들이 유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동성폭력은 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와 발찌를 채움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여성들의 노출패션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과다 노출 패션으로 인해 받은 성적 자극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과 거리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취향과 만족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여성으로 인해 유혹을 느끼는 남성들이 불륜행각을 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아내는 반려자의 성적 필요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인 태도로 아름답고 즐거운 성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반려자가 잘해줄 때만 상 주듯이, 귀찮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니까 반응해서는 안 된다. 부부 안에서야 말로 최대한 야하고 매력적으로 꾸며야 한다. 은은한 향수와 sexy한 속옷, 다양한 방법, 구체적이고도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부부간의 사랑과 성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도울 것이다.

성 관리 뿐 아니라 돈 관리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돈 관리를 위해서는 다음의 원칙을 가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족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딤전6:6-10). 안타깝게도 수입이 적은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주어진 재정에 대해 감사하고 자족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좀 더’라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끝도 없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자족과 감사의 마음은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

둘째, 분수에 맞는 생활 규모를 가진다. 수입이 적으면 우선순위에 따라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만 덜 좋은 것을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고차면 어떻고, 냉장고가 좀 적은 용량의 크기면 어떤가? 비싼 옷이 아니어도 내 스타일에 맞는 깔끔한 것이면 어떤가?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만약 지금의 수입이 생활하는데 어려울 만큼 부족하면 일을 더 해야 한다. 계속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속상해 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시간 당 액수가 적다고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적은 액수라도 노력하고 땀 흘려 번 돈은 가장 신성하고 보람 있는 일이다.

넷째, 한 단계 낮추는 삶을 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자신들만 돈 문제 안 일으키고 잘 살면 되는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물질을 사람들과 나누며 사랑의 섬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십일조만 했다고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구약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합치면 결국 십의 3조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려면 돈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단계 낮추는 삶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우리 부부는 한심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바로 우리가 가장 잘 살게 될 때의 상한선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 상한선은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수준으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수준에서 한 단계 낮추는 것으로 했다. 결론은 30여 평의 아파트, 중고차로 소형, 수입의 30%는 헌금을 비롯해 선교 및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 온지 18년째 되었다. 집은 32평 아파트, 차는 중고 소형차이었는데 3년 전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대전에서 고속도로를 오가는 기회가 많아 중고 중형차를 사용한다. 수입의 30%는 아직은 지켜지고 있으나 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학비와 생활 및 주거비가 만만치 않아 힘이 든다. 용돈은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번다고 해도 버겁다. 어쩌면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에는 잘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절제를 가져다주는 돈에 대한 우리의 원칙이고, 그 원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대로 순종하며 살고픈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분들은 ‘당신들은 돈을 잘 버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연습을 가난할 때부터 해왔다. 2만원 있을 때 만원을 어려운 형제 성경책에 몰래 넣기도 하고, 유학 시 한 달에 식생활비로 120$ 지출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매달 60$을 지출했다. 돈이 없을 때, 가난할 때가 나눔의 연습을 할 절호의 기회이다.

마지막으로 재산 증식을 위해 불법이나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남들 다 하기에, 아니면 법을 지키다가는 너무 세금이 많아서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다고들 말한다. 또한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이 본다. 특별히 부동산이나 주식거래가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정 경제의 뿌리를 크게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본능과 욕구를 철저히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가정을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성 관리와 돈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성 관리와 돈 관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