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2, 2002 | 기독교적 세계관/복음과 법
법과 복음
사역이냐 고역이냐
1980년대만 해도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목회할 곳을 찾는 일이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를 찾는 일이 더 어렵다.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 소위 목회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무임목회자는 약 2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마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이 1년에 약 3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앞으로 목회지를 구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교 졸업자들이 이처럼 많은 것을 두고 부정적으로 말하며 웃지 못할 대안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떤 분은 신학교를 10년간 일시적으로 문을 닫아버리면 목회자의 수급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군소 신학교나 무인가 신학교를 정리하라, 농촌 목회지로 가라, 신학교에 간 저의가 의심스럽다, 통일이 되면 해결된다 조금만 기다려라,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는 등 참으로 뼈있는 대안들도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분들도 많다. 사고의 틀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역할 곳이 왜 꼭 교회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신학교 졸업한 후 병들어 가는 이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한 10여년 일을 한 후 다시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훈련을 하고 전담 사역자로 목회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나이드신 목회자들은 이제 물러나신 후 다시 세상에 들어가서 일하시고 젊은 분들에게 사역을 맡기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다. 평신도들로부터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성도들의 의식도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회지도자들로 이런 평신도들의 의식의 변화에 맞추어 변해야 겠다.
신학교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결국 목사들이 넘쳐서 무임 목회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학교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야 어찌되었든 간에 믿음을 전파할 수 있는 잠재력 역량이 그만 큼 많아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결코 손해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부모들의 강요에 의해 들어갔던지 일반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없어서 들어갔던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쌓이는 것은 신앙과 신학지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손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사역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고 본다.
보통 그렇게 이해 하듯이, 사역이라는 개념을 교회안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교회 행정을 보고, 심방하는 그런 것에만 국한하고 세속 사회에서 땀을려 일하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일해 돈버는 일은 사역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3000명 신학생 배출시대에, 그들 중에는 세상에서도 일하지 못하고 교회안에서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이와같은 사역에 대한 개념을 바꾸라는 것이다. 사역은 교회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사회에서도 훌륭하게 사역을 할 수 있다. 세속사회에서 전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땀흘려 일하는 것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역이라는 것을 교회안에서의 일로 국한시켜 버리고, 세속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며 이 또한 훌륭한 사역이라는 생각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역에 대한 반쪽의 진리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일하는 것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이다. 사역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다. 현대교회도 사역에 대한 개념이 교회안에서 일하는 것 또는 좀 더 넓게는 세상에서 전도하는 것 쯤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사역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조금 남아있는 곳은 그래도 군대 뿐이다. 군대에서는 노동할 사람을 선발할 때 “사역병” 선발이라고 한다.
폴 스티븐스 교수의 사역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사역이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모두 교회안에서 일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일하는 것도 사역이 될 수 있다. 교회안에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역(使役)이 아니라 사역(死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속가운데 땀흘려 일하는 그리스도인도 참으로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믿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사역(死役)이 아니라 사역(使役)이다. 성경에 나오는 텐트 메이커인 바울 사도는 칭찬하면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사역자로 여겨주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다. 무임 목회자들이여! 신학교 나온 사람이 세상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소명감이 좀 부족한 사람으로 여길 것 같아 세상에서 일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사역할 목회지도 없어서 고민하는가. 그것은 고역자(苦役者)들의 몫이라고 여겨라. 만약 자신을 사역자로 여기거든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흩어져라.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그렇게 하라. 신학교 졸업하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말아라. 그곳에서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사역하라. 교회가 재정적 보조를 하여 줄 수 없다면 그렇게 흩어져 일하면서 자립하라. 이제 현대교회는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사역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존경해 주어야한다.
May 2, 2002 | 기독교적 세계관/복음과 법
법과 복음
기독교 교도소운영, 우리 모두의 책임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한 민간교도소 설치를 위한 법률 제정 필요성 강조와 정부 당국자들의 인식 전환으로 말미암아 2000. 1. 28. 법률 제6206호로 민영교도소등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1. 7. 1.부터 이 법은 시행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축이되어 기독교 민영교도소 운영을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고 이 법인은 법무부에 민영교도소 수탁신청을 하였다. 법무부는 지난달 이 법인을 민영교도소 수탁자로 최종 승인하였다고 한다.
이제 기독교가 교도소를 운영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이 법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택한 운영모델은 민간위탁형 모델이다. 그러니까 어느 민간 단체가 민간교도소 운영수탁자로 지정이 되면 그 단체는 격리 뿐만 아니라 격리를 위한 시설까지 건축하여야 하고 물론 교화도 책임을 져야한다. 이제 기독교 교계는 교도소 시설을 지어야하고 격리에 필요한 물적, 인적자원을 갖추어야 한다.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델은 많은 재정적 부담을 져야한다. 약 300억원의 자금이 소요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시설 설치 비용일 것이다.
앞으로 인건비도 조달하여야 하는데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기독인들이 자원봉사를 하면 되겠지만 그러나 필수요원들에게 까지 자원봉사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법무부장관과의 구체적인 위탁계약을 통해서 수탁자에게 지급되는 위탁비용등이 정해 지겠지만 국가예산 절감의 차원에서도 민영 교도소 설치를 법으로 통과시켰는데 국가로부터 충분한 위탁대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런면에서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민간교도소와는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탁자로 지정된 기독교계에서 충분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공은 우리 믿는자들에게 넘어왔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은 교도소를 믿음으로 운영할 수 있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을 관리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만약 처음으로 시행되는 이 기독교 교도소 운영이 우리의 관심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민영교도소운영에 관심을 갖는 다음 세대는 참으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 교도소 운영문제를 놓고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시험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한국교인들이 얼마나 연합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연합 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고 계신다. 기독교 교도소 운영 문제는 어느 특정인이(사람이든 교단이든 교회든) 주도권을 잡고 힘 자랑의 방편으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한국교회 전체의 연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물질적으로도 연합되어야한다. 인적자원으로도 연합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처럼 연합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몇몇 대형교회, 교단만 참여하도록 하면 안된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작은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모든 교인, 교회들을 설득하여야 한다. 단지 몇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거두는 것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은 것을 거두는 것이 훨씬 좋다. 범기독교인 모금운동이라도 펼쳐야 한다. 인적자원을 쓰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특정교회, 특정교단에 소속된 사람들로 편중되면 안된다. 범교단적으로 인물을 골라야한다. 그렇게해야 교정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균형잡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보수니 자유니 따지면 안된다. 참으로 준비된 전문가라면 교단에 상관없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동안 기독교계 인사들이 기독교 교도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소리쳐 왔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미 수탁자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인들이 옳은 일에 단합된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교회건물 하나 건축하는데 몇 백억 씩 들이는 실력이 있다면 우리가 단합하여 교도소 한 동 지어 많은 죄수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주는 일인들 왜 못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단합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기독교 교도소운영의 문제는 어느 개인, 어느 단체의 일로 끝나서는 아니된다.
Apr 2, 2002 | 기독교적 세계관/복음과 법
법과 복음
양심적 병역거부
최근 특정종교인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의 당부문제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KNCC에서 개최한 종교.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 관련 토론회에서 찬반양론의 열띤공방이 벌어졌다고 한다. 특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이다보니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여기는 기성교회에서 이를 반대하면 합리적인 연구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쳐질 우려도 있다.
주로 기독교계 인사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도외시하고 이를 빙자한 병역기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특히 이단을 비호하고 양성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어 막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여호와의 증인교리를 반박하면서 국가를 마귀로 보고 병역을 포함, 수혈과 학업조차 거부하는 교리에 협조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경우 이는 병역 거부의 기피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에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되지 아니한 나라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종교간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을 따르는 소수자의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공론화 될 수 조차도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닫혀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그 주장 자체가 터부시 될 정도의 폐쇠된 시대에 우리가 살았던 것을 고려하여 보면,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고 자유롭게 찬.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되어 있고 또 그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어 필자가 어느 편을 든다하더라도 양편의 무게는 그리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어느 편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도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문제점들을 짚어 보는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는 우리 헌법상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 19조에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는 내면적인 사상과 양심을 외부에 표현하도록 강제되지 아니할 자유와 자기의 사상 및 양심에 반하여 어떤 행위를 강제 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와 함께 인간내심의 자유로서 정신적 자유의 근본으로 인정된다. 이 양심의 자유에는 양심의 형성의 자유와 양심의 유지의 자유가 포함된다. 예컨데, 국가가 어떤 특정한 사상과 도덕만의 홍보에 노력한다면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강제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로운 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이는 양심의 형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유지의 자유에는 어떤 사상 및 양심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는데 만약 직접적으로 양심을 표명하도록 강제하는 것도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충성선서나 십자가 밟기등 행위를 통해 내면의 양심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행위도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당하지 않는 자유도 이 침묵의 자유에 포함이 된다.
바로 우리의 주제인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이 침묵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심의 양심이 형성되어 있고 만약 그들에게 법으로 병역의무를 지운다면 총을 드는 행위는 필수적이 되고 바로 이 법으로 부과된 의무행위가 바로 자신들의 침묵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서 특히 양심형성이 진실이냐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는 이미 법원의 도마위에 올라온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1969.7경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신도들의 양심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행위는 응당 병역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판시하면서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었다. 이제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종전 결정과 반드시 함께 갈 필요는 없으므로 이제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 보아야한다. 대법원에서 합헌결정을 한 것을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으로 결정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Mar 2, 2002 | 기독교적 세계관/복음과 법
법과 복음
우리와 다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을 보여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죄인들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우리와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팔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조건없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저들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배반한자들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서도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하여야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사랑하기 쉬운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종교가 다르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타 종교 중에도 가장 기독교를 핍박하는 회교도인을 향하여는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테러사건 이후에는 더욱 회교도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최근에 경험하였던 작은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회교도인 한 여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 남편이 강도상해죄로 교도소에 갇혀있는데 변론을 맡아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외국근로자들입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회교도인들을 위해 크리스챤이 변론을 하여준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제 생각이 단견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회교지역에서 핍박받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들이라도 잘 대해주면 귀국해서 최소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론을 해주겠노라고 승낙하고 교도소에 찾아가 그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남편은 부인보다 더 열렬한 회교도인이었습니다. 교도소내에서도 하루 5번씩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친절하게 법적인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를 신뢰한다는 태도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를 위해서 변론을 하여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다니는 이슬람사원의 지도자가 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만나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공통의 장 (commom ground)이 있으면 누구와도 만나서 함께 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공통의 장은 섬김과 정의와 사랑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그를 위하여 변론하였습니다. 그가 구속되어 있는 중에 그의 아내는 출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돌보아 줄 크리스챤 자매를 붙여주었습니다. 통역도 하여 주고 병원도 데려가 주었습니다. 병원비가 없는 것 같아 회사에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사랑의 헌금도 전달하였습니다. 지금은 잘생긴 아들을 순산하였습니다. 마지막 선고하는날 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판사가 남편을 불쌍히 여겨서 석방을 하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목사님, 감사합니다”라며 울먹이면서 말합니다. 그의 알라신이 도와 주셨는지 우리 하나님이 도와 주셨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는 기독인도 회교도인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부는 아들을 안고 자기 나라 특산물인 선물을 손에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도 기뻣습니다. 그 즈음에 한국에서 상연하고 있던 영화 한편을 감상하였습니다. 천국의 아이들이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역시 회교국가에서 만든 영화입니다. 가난한 어느 회교도인의 가정에 어린 남매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의 신발도 사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오빠의 걸레같이 생긴 운동화 하나로 여동생과 함께 나누어 신게 됩니다. 오전에 여동생이 오빠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오면 오후에 오빠는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닙니다. 이어 달리기에서 바톤체인지 하듯이 운동화를 나누어 신다 보니 오빠가 학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여동생도 뛰어서 집에 와야하고 오빠도 뛰어서 학교에 가야합니다. 이 달리기가 반복이 되다보니 오빠는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날 운동화가 부상으로 걸린 어린이 마라톤에 출전하여 일등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는 영화였습니다. 우리에게 공통의 장이 있으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공통의 장, 사람과 인간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Feb 2, 2002 | 기독교적 세계관/복음과 법
복음과 법
크리스천과 선거
올해는 대통령선거를 비롯해 중요한 선거들을 치루게 되는데, 벌써부터 예상후보자들이 자신이 적격자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대체로 부정적이다.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소리만 크고 실천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은 입법과 법의 집행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를 일이다. 정치가 잘 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선출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정치가가 뽑히도록 노력하는 행위는 애국하는 일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정치가들이 선출되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자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정당만 보고 사람을 택하는 것도 반드시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모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후보자의 됨됨이를 알아보자.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가 보자. 땀 흘린 흔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기에 부족하다. 고통 가운데 있어 본 사람들이야말로 서민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가 제시하는 정책과 비전을 살펴보자.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내용인가. 전혀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개혁자가 아니다.
이것 이외에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자. 이것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것은 사람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정당에서 미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을 공천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자. 우선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보자.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부족하다. 그가 정말 거듭난 사람인지 보자. 거듭난 후에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였는가 보자. 그가 그 직업을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자.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자.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의 정치적 지도자로 세우기에 흠이 있는 사람이다.
정당과 후보자들은 미사여구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려하지 말고 진실과 정직함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거짓으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만약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선거운동을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업무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보라. 유권자들은 움직일 것이다. 상투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책제시로 유권자들을 속이려 하지 말고 유권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만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 가면서 선거운동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당선된 후에도 반드시 법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
특히 크리스천 후보자들은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믿는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앙인인지 점검하여 보고 만약 당선이 된다면 어떻게 그 직을 하나님께 드리겠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상위의 법(the higher law)인 하나님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신앙이 있는가. 그 상위의 법에 합당한 법을 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 준비되었는지 점검하여 보라. 그 상위의 법이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어떻게 이 세상의 법을 집행하겠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런 비전을 믿는 유권자들에게 제시한다면 믿는 자들은 그들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좋은 지도자들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 무망하며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많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때다. 하나님은 이 땅의 정치제도, 법제도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라면 믿는 사람들도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켜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좋은 일꾼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날을 기대하여 보자.
Jan 2, 2002 | 기독교적 세계관/복음과 법
복음과 법
종교 NGO
얼마전 기독 시민사회연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참여불교 재가연대 등 종교단체들이 연합하여 개혁을 위한 종교NGO 네트워크 발족식을 갖고 종교 바로 세우기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종교가 황금의 노예가 되어 물량주의와 기복주의를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받들고 있으며 종교지도자들의 부정부폐와 신자들의 근시안적 신앙행위로 말미암아 대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5대 목표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교단재정의 투명성 확보와 바른 목적에의 사용, 성직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구성원이 함께 진리의 삶을 사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교역자의 헌신, 가부장적/반생명적 종교문화를 척결하기 위한 활동전개, 약한 자와 소수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교단내 법제도 개선, 교단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대안 모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 등 종교단체들이 스스로 자신을 개혁하는 자정능력을 잃게 되자 이제 시민단체들이 그 동안 성역시 되었던 종교문제에까지 바른 소리, 쓴 소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대 목표실현 중 눈에 띄는 것은 돈에 관한 것과 성직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와도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종교 단체들이 헌금을 잘 거두어 들이기는 하였으나 헌금의 사용이 투명치 못해 내외적으로 비난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또 헌금이 인재를 길러 내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 보다는 경쟁적으로 더 큰 건물을 짓는데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성전건축을 교회목표로 삼았다고 하면서 교회 주보에까지 실어 홍보를 하기도 하였다. 성전건축은 교회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목표는 사람을 데려다 예수님 믿게 하고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다시 이 세속사회에 들어가 거룩한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헌금은 올바른 방법으로 거두어야 한다. 헌금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헌금사용은 투명해야 한다. 앞으로 성도들은 목사의 헌금하라는 설교를 듣고 헌금하기 보다는 연말 결산보고서를 보고 헌금을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성도들은 연말 결산보고서를 볼 것이다. 연말 결산보고서를 통해 헌금이 옳게 사용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데 헌금이 사용된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헌금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기부한 헌금이 이렇게 잘 쓰여졌으니 왜 더 많은 헌금을 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연말 결산보고서가 헌금이 올바르게 사용되었다는 흔적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더 이상 그곳에 헌금하지 않을 것이다.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반협박조의 설교를 듣고 헌금하는 성도들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을 확신한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설교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제 한편의 설교로써 헌금을 거두어 들이는 시대는 지났다. 헌금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가르쳤으면 이제 예산 결산보고서를 성도들에게 보여 줌으로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하여야 한다.
다음으로는 성직주의의 타파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띈다. 성직자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직자는 평신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주입시켜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성도들은 성직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었다. 성직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게 되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고 그들에게 바른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성직자들의 말에는 감히 의문을 달지 못했다. 성직자에게는 감히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전인적 회복을 이룬 바른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직자는 목자이고 평신도들은 양이므로 양이 새끼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양으로서 모두 성장해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직자는 양무리 가운데 조금 성숙한 양으로서 미성숙한 양들을 돌보기 위해 보냄 받은 선물에 불과하다. 성직자와 평신도 간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모두 하나님 앞에 양이다. 모두 함께 고민하며 성장해야 할 양들이다. 모두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될 양들이다. 선한 목자는 한 분 뿐이시다.
종교 내부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 건강한 평가를 받게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종교 NGO 네트워크의 발족, 그 자체가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