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 2005 | 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이코스타 2005년 2월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의 책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평범한 크리스쳔 대학생입니다. 물질과 쾌락을 쫓는 이 세태 속에서도 꾸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 친구가 요즘 들어 큰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저도 신앙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이 많이 있어 이렇게 목사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친구는 교회에서 여러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로 음악사역을 하는데요. 주일엔 거의 종일 교회에서 지낸답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정말 열심을 다해 왔구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절친한 친구가 주일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금 먼 곳이어서 예배를 드리고 가거나 혹은 그곳을 다녀와서 오후예배를 드리는 것도 안될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날 그의 사역을 대신해줄 분이 계시다는 것인데….
여전히, 그래도 되는 것인지 정말 고민이 됩니다. 그는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는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친구를 마구 축하해 주고 싶어합니다. 목사님,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정말로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결정을 내려야 할텐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어느 방문자의 질문이다. 주일 성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진 미국 교회에서 씨름하는 나로서는 질문을 올린 청년과 그의 친구가 모두 귀해 보인다. 이렇게 뜨거운 열정이 있기에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어 보인다. 동시에, 이 질문은 주일 성수에 대한 한국 교회의 율법적 사고 방식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주일‘에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주일 성수의 ‘세 가지 조건‘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셋 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어기는 상황이 생기면 위에서 토로한 것과 같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것이 과연 필요한 고민인가? 이제 신약으로 눈을 돌려 이 문제를 더 논해 보도록 하자.
천하가 성전이요 만사가 제사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다! 그분의 어렸을 적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경건한 유대교 가정에서 유대교 교육을 받고 유대교인으로서의 영성 생활을 실천하며 성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는 확고한 증거가 없는 한, 이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나사렛 방문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4:16)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보듯, 유대교인으로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예수님은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유대교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달라도 매우 심하게! 복음서들은 이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중 하나가 ‘밀 추수에 관한 논쟁‘(마 12:1-8//막 2:23-28//눅 6:1-5)이다.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배를 위해 회당으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이 때 제자들은 허기를 면하기 위해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제거한 다음 씹어 먹었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이것은 추수와 탈곡에 해당하는, ‘금지된 노동‘이었다. 이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의 예로 답변을 하신다.
첫 번째 예는 다윗이 전투 중에 시장할 때 회막 지성소에 드려졌던 진설병을 가져다 병사들을 먹인 사건(삼상 21:1-6)이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은,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은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드려진 떡은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었다(레 24:5-9). 그렇다면 왜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가‘ 이것은 ‘그[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삼상 13:14) 다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안식일에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을 해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히브리어로 ‘메시야‘)로서 자신에게도 같은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으셨다.
두 번째로 그분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위해 분주히 일하는 것을 예로 드신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에 집에서 회당까지 오고가는 거리 이상을 걷지 못하도록 그리고 회당의 성경 두루마리를 나르는 정도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에 의한다면, 안식일에 성전 업무를 볼 차례가 된 제사장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민 28:9-10). 본질상 그들의 노동은 수고로운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처럼,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신다. 이 주장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지금의 시간을 안식일로, 지금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제사장으로, 당신이 일하고 계신 현장을 성전으로 그리고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사로 비유하고 계시다. 지금 걷고 있는 밀밭이 성전이며, 밀 이삭을 비벼 먹는 행동이 제사라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런 다음, 그분은 두 가지의 혁명적인 선언을 하신다. 하나는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느니라‘(마 12:6)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12:8)는 선언이다. 이 두 말씀에서 드러나듯,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권위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분명히 아셨다. 오히려 율법 규정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셨다. 그것은 제사장이나 예언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권한이다. 가장 위대한 계시자였던 모세도 꿈꾸지 못했던 엄청난 권한이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던 권한, 그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예수님은 믿었다. 이 발언은 유대교인들에게는 이단적이요 신성 모독적이요 악마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권한을 넘보는 사탄적 음모!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분에게는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한 결과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이 결국 유대교가 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거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적 율법 이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성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안식일 준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어 놓으신다. 성전도 안식일도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마가복음 저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2:27)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뒤이어 나오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8)는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바꿔 쓸 수도 있다. ‘인자‘에 해당하는 아람어 ‘바 에나쉬‘(bar enash)는 ‘사람‘, ‘그 사람,’ ‘나 같은 사람‘ 혹은 ‘나‘ 등의 의미로 사용되던 관용어였다. 이렇게 풀면, 이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들의 참된 삶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뜻이 된다. 성서학자들은 여기서 ‘바 에나쉬‘를 ‘인자‘로 번역해야 옳은지 아니면 ‘사람‘으로 번역해야 옳은지를 두고 논쟁해 왔지만, 나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회당 안에서 벌어진 연속된 사건에서 더 잘 드러난다. 밀밭을 지나 회당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이 손이 마비된 사람을 빌미로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다(마 12:9-14//막 3:1-6//눅 6:6-11).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두면 죽을지 모르는 심한 경우에만 치료를 허락했다. 따라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고 말씀하시면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다. 여기서 ‘선‘으로 번역된 말(‘칼로스‘)은 ‘이로운‘ 혹은 ‘도움이 되는‘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다른 말씀, ‘그러면 열 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안식일은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생명을 구속된 상태에서 풀어줌으로 이롭게 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모든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이로운 일을 하도록 마련된 날! 이 일화에 대한 분석 끝에 페르디난드 한(Ferdinand Hahn)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선의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전통에 직면하여 그분은 종말론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드러내셨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결과다 1)
네 하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일과 평일의 차이를 부정하셨는가? 예수님의 행동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분의 진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그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나누는 데서 희망을 보시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태도를 달리하고 삶의 목적을 달리하는 데서 희망을 찾았다. 예수께서 안식일 율법을 표면적으로 위반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뜻의 핵심을 다음의 유명한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유대교적인 배경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금새 알아차릴 것이다. 유대교에서 ‘멍에‘는 곧 율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지키느라 지친 사람들을 가리킨다. 율법은 참된 쉼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 셈인데, 그것이 왜곡되어 오히려 참된 쉼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잘못된 율법 준수는 외적으로는 인생사를 더 고단하게 만들고 내적으로는 영혼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법니다. 예수님은 그 멍에를 벗어놓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초청하신다.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벼워 참된 쉼을 제공해 줄 것이란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쉼은 일을 멈추는 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리킨다.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안식과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초청은 ‘안식일‘로의 부름이 아니라 ‘안식의 삶‘에로의 부름이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열망했던 그 메누하가 예수님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으로 요약하셨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가리키고, 믿음이란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율법 준수는 자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 그것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그것에 매어 있는 한, 하나님은 관심 밖에 있게 된다. 그것을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그 삶을 살아갈 때 종말에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메누하를 지금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있어 모든 날은 동일해진다. 그 사람은 ‘언제나‘ ‘모든 일‘을 ‘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행하면서 하루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간다. 그 삶은 결코 생명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일할수록 생명력이 더 충만해진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베자 사본 누가복음 6장 4절에 첨가되어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해 준다. 그 사본에는 다윗의 진설병 이야기 끝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날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어떤 사람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월터 윙크는 이 구절이 예수님이 실제로 한 말씀이 아닐 가능성은 높지만 그 사상만큼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2)
. 위의 논의의 빛에서 볼 때, 틀림없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보시고 새로운 태도로 인생을 사셨다. 안식일 즉 참된 안식의 날은 이미 와 있다! 천국이 이미 와 있는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천하가 모두 성전이고, 무슨 일이든 제사로 드려질 수 있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거룩한 장소와 거룩하지 않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 이 땅은 이미 천국이고, 이 삶은 메누하이며, 이생은 곧 영생이 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매일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셈이며, 어딜 가나 성소를 모독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던 ‘일벌레‘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외형은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오해할만한 말씀을 남기신 바도 있다. 그분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 가에서 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자,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반응(18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께 분노한 것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말씀에 담긴 뜻을 알아챘다. 한 인간으로서 김히 안식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니! 수고로운 노동을 하다가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감히 하나님의 메누하를 넘보다니!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치실 때 하신 말씀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분개한다. ‘네가 하나님이냐‘?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일이 고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칠일에 창조하셨다는 메누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설사 그분이 끊임없이 일했다 하더라도 그 일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소진시키는, 언젠가 멈추어야 할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일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거룩한 일,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여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안식 중에 하시는 그분의 일이다. 이 일에 예수님께서 참여하신 것이고, 그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를 염려하며 동분서주하는 일로부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마 6:33)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 일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전 1:2) 인생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하고 갈 수 있는 인생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를 위해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생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안식의 시간‘(‘사밧‘)은 필수 불가결의 요소다. 탈무드는 증언한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켜 준 것은 그들이 생명은 걸고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안식일의 정신을 지켰기 때문이다. 안식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의 외형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외적 활동을 멈추고 전혀 다른 일에 전념하는 것이 안식일의 외형이다. 이 외형이 정신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 정신을 지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안식일 준수가 십계명의 하나로써 천명되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세 개의 계명과 이웃에 관한 여섯 개의 계명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이웃과의 관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안식일 준수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안식일의 외형과 정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그분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대로 안식일 제도를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식의 시간을 지키고 안식의 정신을 지키는 일에는 누구보다 철저하고 진실하셨다.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분은 매 순간 그리고 매일 안식을 실천하셨다. 사람들이끊임없이 찾아와 그분을 뵈려 했고 그분도 요청이 있는 한 정성을 다해 그들을 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일상은 결코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그분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메누하(안식)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매일 매일의 사밧(안식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깊은 산으로 혹은 한적한 강변으로 가서 머무셨고, 이른 아침에도 그렇게 하셨다. 자고 나면 사라지고 없는 선생님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제자들의 매일의 첫 일과였다.
그분은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눈이 열리는 것을 볼 때마다 잔치를 베풀고 삶을 축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 3)
. 그분의 삶의 태도는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월을 죽이는‘ 한량처럼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소명으로 여기셨다. 축제를 모르는 세상에 축제를 회복하는 것! 마르바 던(Marva Dawn)은 ‘잠시 진행되고 마는 안식일 축제는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축제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4)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자주 베푸셨던 잔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단순하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사셨으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자주 잔치를 베푸심으로써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눈뜨게 하셨다. 그 잔치는 흥청망청 소비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분 자신이 폭식을 즐기는 분도 아니었고, 그분의 동류들이 그럴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조촐한 식탁에서 나누는 의미 깊은 교제가 그분의 잔치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잔치를 베푸는 그 시간이 곧 안식일이었고 그 잔치가 곧 안식일 예배였다. 실제로 그분은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릴리 회당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더 이상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분이 돌아다니며 베풀던 잔치는 안식의 정신을 거부하고 배척하던 회당의 안식일 예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거늘
기독교 세계 내에 안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큰 공헌을 한 마르바 던은 아주 의미 깊은 용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안식‘(social rest)이라는 말이다) 위의 책, p. 88. 이 책은 주일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안식일 정신과 실천을 부정적으로 취급해 오던 개신교 세계에 의미 심장한 변화를 일으켰다.
.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social unrest’라는 표현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social rest’라는 말은 거의 볼 수 없다. 마르바 던은 안식의 정신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의 모든 차원에 깊이 스며들어 질적인 변화를 일구어내도록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억지같이 보이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훌륭한 저자는 이렇듯 말 한마디로 독자들의 의식을 활짝 열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안식일 정신은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면으로, 위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로, 은밀한 곳으로부터 공개적인 장소로, 조용한 시간으로부터 분주한 시간으로 연장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들은 이 점을 잊지 않았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축일 제사를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고 대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5-17).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사 59:3-4).
아무리 자주 멈추어 메누하를 축하하고 나눈다 해도 개인의 내적 경험으로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사치일 뿐이며 하나님께는 가증한 일이다. 그런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바다. 아니, 개인적 경험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진정한 메누하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율법적으로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 말았다는 뜻이다. 안식일의 형식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뭔가 하고 싶은 열망에 이끌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모든 일을 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섬기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 섬김의 삶이 사회적인 안식을 끌어온다. 이 땅에 요순 시대에 있었다는 태평성대가 온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 땅에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지 권한이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이 옛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희년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공언하신다(눅 4:18-21). 당신의 사역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포로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눈 먼 사람들이 보게 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고 말씀하신다. 이것만을 두고 보면 사회 혁명을 하겠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시작하시는 사역이 개인의 변화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전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분의 사역 기간 동안 대대적인 사회–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 볼 때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상을 가장 의미 깊게 변화시켜 놓았음을 발견한다. 때로 그분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무력으로 사회를 개조시키려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그분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따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참된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공헌했다.
여기까지 가야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일에 대한 이 모든 논의는 한가한 탁상공론이 되고 안식일 정신을 진지하게 실천하려는 모든 노력은 여유 있고 한가한 사람이 누리는 사치가 되어 버린다. 안식일 정신은 인간 삶의 본질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그 본질에 늘 성실하도록 이끌려는 하나님의 배려다. 가난하든 부하든, 한가하든 분주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이 정신은 참된 인생을 일구는 데 있어 필요 불가결의 요소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어느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 하나를 소개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안식일의 정신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체적인 응답을 주기에 주저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그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 찬양 인도를 맡기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해도 주일 성수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친구 결혼식에 참여하는 일을 예배처럼 섬기려는 마음 자세가 준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되면 주일을 범하는 것이다. 물론, 찬양 인도를 선택했다 해도 공명심으로 혹은 제 잘난 맛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주일을 범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어떤 일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택한 그 일을 통해 메누하를 경험하도록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로서는 아래와 같이 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앙을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여 그대로 행하면 쉬울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성격에 반하는 것입니다.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다음 매일 매일의 상황 속에서 정직하게 선택하고 결단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일 성수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주일에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나누어 곧이곧대로 지키면 수월할 것 같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일 성수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는 결단을 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결단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충분히 상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편의대로 합리화시킬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번에 그 친구 분이 내린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번으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걸음마를 통해 온전한 걸음을 걷기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지, 한번 넘어졌다고 와서 때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번에 고민하고 결정을 하시면, 그 결정이 어떤 것이든 앞으로의 신앙적 결정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두 분의 신실한 마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두 분의 영혼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며 살얼음판 걷듯 행동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서 밝게 뛰어 노시기 바랍니다.
(1) Ferdinand Hahn,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p. 15.
(2) Walter Wink,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Fortress, 2002), p. 72.
(3)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은 어느 정도 사실을 담고 있는 동시에 거짓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별명이 다 그렇듯이! 이 별명에 담긴 진실은 잔치가 그분의 공적 사역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편, 이 별명은 그분이 폭식과 폭음을 즐겼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이 별명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의도했던 점이다.
(4) Marva Dawn, Keeping the Sabbath Wholly (Eerdmans, 1989), p. 153.
Oct 1, 2004 | 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이코스타 2004년 10월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 지방의 한인 교계에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교회 중 하나가 주일에 열리는 자선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기로 교회적인 방침을 세웠고, 담임 목사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동참하기로 했다. 담임 목사와 지원자들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일 예배 시간도 조정했다. 규모가 큰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의 참여는 그 모금 행사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한인교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도 좋은 변화를 줄 수 있었다. 한인 교회들이 한인들끼리 모이는 교계 행사에는 열심을 다하지만, 교회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지역 사회의 행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일반적인 경향을 고려해 본다면, 그 교회는 매우 의미 있는 결정을 했던 셈이다. 나는 영향력 있는 한인 교회들이 지역 사회 문제에 이렇듯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문 제는 교회 밖에서 터졌다. 그 지방의 목회자들이 그 교회의 결정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그 비판의 요점은 ‘주일 성수’의 원리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주일에 ‘세상적인’ 공적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그 결정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거세졌다. 그 주장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이 막강한 힘으로 그 교회와 담임 목사를 압박했다. 교계 신문마다 이 문제에 대한 찬반 토론을 게재했는데, 그것이 주일 성수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 교회는 계획대로 행사에 참여했고, 이로써 그 교회와 담임목사는 지역 교계에서 고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행사가 끝난 후, 교계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담임목사는 앞으로 교계에 미칠 영향을 좀 더 심사숙고 하겠다고 사과했고, 그 사과로써 몇 달 동안 교계를 뜨겁게 달군 논쟁은 일단 중지되었다.
이 논쟁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우리가 ‘주일 성수’라는 개념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는 쉽게 정리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천적인 면에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전개되는 글에서 보겠지만, 이 교회가 한 결정은 ‘주일 성수’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나는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결정을 비판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의 걱정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조건, 저런 사정을 고려하여 주일을 허물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고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주일을 소홀히 하는 잘못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일 ‘엄수’와 주일 ‘파괴’의 두 극단을 주기적으로 반복한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제, 이 오랜 논쟁의 뿌리를 더듬는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1.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구약의 안식일
안식: 천지창조의 정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부터 안식을 지켰는지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지만, 그들이 안식일을 천지창조의 빛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으므로, 피조물인 우리도 그분의 삶의 리듬을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안식일 성수의 신학적 바탕이었다. 창세기 2장 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 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즉,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되어 있을 것 같은데, 성경은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셨다고 되어 있다. 일곱째 날에도 무슨 일인가를 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곱째 날에 하신 마지막 창조는 무엇이었을까?
유대인 랍비들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창조하신 것은 ‘메누하'(안식, 쉼)였다’고 결론지었다.(1) 그렇다면 메누하는 무엇인가?’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의 설명에 의하면, 메누하는 ‘노동을 멈춘다’는 좁은 개념이 아니라 매우 넓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적인 사고에 의하면, 메누하는 행복, 평안, 평화, 조화 등의 의미를 가진다. 욥이 죽은 후에 얻을 것으로 동경했던 그 상태가 메누하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 표현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식은 인간이 평안히 거하는 상태, 악한 사람들이 문제를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상태, 피곤한 사람들이 평안히 쉬는 상태를 가리킨다. 안식은 갈등과 싸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과 불신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의 본질이 바로 안식이다.’2)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얻게 되는 행복을 메누하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 통찰은 진리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창조한 천지를 지금까지 운행하고 계신 분이요, 역사를 거쳐오면서 부단히 우리와 함께 일하신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활동하고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시 121:4) 분이시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막 12:27)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 모든 말씀에서 보듯,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 이신론자들이 생각했듯, 우주를 저절로 돌아가도록 만들어놓고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생명체와 함께 거하시며 함께 움직이시며 함께 활동하고 계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골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제 칠일에 안식을 창조하시고 일을 멈추신 그분은 지금까지 그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다. 안식 상태에서의 활동(사밧, 메누하, 안식)–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양식이다.
그 렇다면 창세기 2장 2절에서 말하는 ‘메누하’는 결코 일을 멈추는 쉼이 아니다.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활동을 뜻한다. 엿새 동안 구체적으로 무엇을 발생하게 했던 하나님의 노동과 일곱째 날에 안식 가운데 거하며 지속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창조는 여섯째 날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완성되었고, 일곱째 날에 지어진 ‘메누하’가 이 이전의 모든 창조의 꽃이요 정점이다. 여섯 날 동안 노력하고 수고하는 이유는 결국 ‘메누하’ 즉 온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함이요, ‘메누하’에 이르면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활동에 이른다.
창세기 2장 3절은 계속 말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
‘ 거룩하게 하다'(카도쉬)라는 말은 ‘구별해 내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摸?날로壙?구별해 내시고 그 날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궁극적인 목적 즉 ‘메누하’를 상기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삶을 재조정하도록 도우셨다. 이 땅에 사는 한 인간은 엿새의 창조 시기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메누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메누하’를 흉내내는 일 뿐이다.
그 래서 안식일마다 이스라엘은 일을 멈추고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참된 ‘메누하’를 갈망하며 그것을 흉내내며 그분을 찬양하고 인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렸다. 안식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의 궁극적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고 그 지향에 맞추어 인생의 걸음을 수정하게 하여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메누하’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다. 김용규는 이런 맥락에서 안식일의 존재론적 의미를 이렇게 갈파한다. ‘안식일은 우리의 관심이 무엇-됨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오로지 자신의 ‘있음(存在)’에 관심을 갖고,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물들의 ‘있음’에 대해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안식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이때만이 인간은 자신의 무엇-됨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걱정, 근심 그리고 불안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안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3)
안 식일과 관련하여, 7년마다 반복되었던 안식년 규정(출 23:10-11; 레 25:1-7; 신 15:1-11)과 7년의 7회 다음해(50년)에 지키도록 마련되었던 희년(레 25:8-55)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규정은 동일한 신학적 근거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의 ‘메누하’를 기억하고 축하하고 선포하기 위해 7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7년 중 한 해를 ‘안식년’으로, 50년마다 모든 것을 원상 복구시키는 ‘희년’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를 위해 시간을 구별해냈다. 안식년에는 안식일에 규정된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규모가 큰 일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희년는 안식년에 규정된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규모가 큰 일들이 요구되었다.
이 규정들을 관찰해 보면, 하나님의 ‘메누하’를 항상 기억하고 그것에 이르도록 인간을 이끌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게 규정을 마련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 모든 규정을 통해, 살아가면서 정기적으로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서서 참된 것을 갈망하고 축하하고 선포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참된 복을 찾아가도록 의도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24시간의 칠분의 일, 일 주일의 하루, 7년의 한 해, 일생의 칠분의 일을 구별해 내어 다른 노동을 멈추고 하나님의 ‘메누하’에 집중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관심은 정확히 칠분의 일을 채웠느냐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를 ‘무엇-됨’을 위한 노동으로 소비하지 말고, 상당한 정도의 시간을 구별하여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 앞에서 존재에 머물러 존재를 감사하고 축하하고 선포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은총과 명령
안 식일은 이처럼 은총으로서 주어진 선물이었다. 즉, 벌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행해야 하는 율법이 아니라 참된 인생을 위해 선택하도록 주어진 선물이었다. 인생이 무엇이며 인생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배려에 감격하여 정기적으로 일을 멈추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메누하’를 갈망하고 기도하며 삶의 길을 바로 잡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깨달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엿새 동안의 노동에만 함몰되어 ‘메누하’를 잊고, 인생을 즐기는 일에만 몰두하여 하나님을 잊고, 땅만 보느라 하늘을 잊고 살아가게 되었고, 이러한 타락을 되돌리기 위해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 3 계명으로 천명되었다. 식욕이 없어 음식을 먹지 않아 쇠약해지는 아이에게 부모는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도록 명령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건강이 회복될 것이고, 따라서 식욕도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언제까지나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을 훈련시키는 장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십 계명에서 안식일 ‘성수’를 규정한 세 번째 계명(출 20:8-11; 신 5:12-15)은 그 위치에 있어서나 그 내용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위치 면에서 본다면, 세 번째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1, 2 계명)과 인간에 대한 계명(4-10 계명)의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이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고 그분의 은총에 응답하는 의미를 가지는 한 편, 본인 자신과 타인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요청하는 계명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기억하게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 이어 세부적인 지침이 따라 나온다. 엿새 동안에는 정성을 다해 힘써 일하고 일곱째 날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메누하’를 기념하되, 자식과 노예와 가축과 손님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이끌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관심이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있음을 드러낸다. ‘메누하’의 복은 선택된 일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메누하’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생명이 그 은총을 깨닫고 그것을 갈망하도록 이끌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신 명기 본문은 출애굽기 본문과 약간 다르다. 제 3 계명을 말하면서 출애굽 사건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5:15). 이 말씀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된 역사를 하나님의 ‘메누하’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즉, 출애굽의 역사는 종국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하시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에 이르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인생의 광야 생활을 통과하여 영원한 ‘메누하’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안식일을 기념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은총을 입도록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메누하’에는 남자도 여자도, 주인도 종도, 사람도 동물도,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이용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은총을 입도록 배려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은총을 입은 자의 마땅한 태도다.
하 나님의 ‘메누하’를 기억하고 축하하고 열망하고 누리도록 이끌기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장치가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밧'(sabbat)의 동사형 ‘샤밧'(shavat)은 ‘중지하다’, ‘멈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밧'(안식일)은 일차적으로 ‘일하지 않는 날’이라는 뜻이다. 내 어릴 적 할머님께서는 일요일을 ‘공일'(空日)로, 토요일을 ‘반공일’로 부르셨다.(4) 매우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이 말을 통해 토요일과 주일이 어떤 날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밧’이라는 말이 주는 표면적 의미가 바로 ‘공일’과 같았다.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어있는 날이었다. 왜 그 날을 비어두도록 명하셨는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다. ‘다른 일’이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하신 ‘메누하’다.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메누하’에 대해 묵상하고 그것을 모방하고 그것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선포하는 것이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안식일을 이렇게 쉬고(즉, 일하고) 나면, 그 하루는 나머지 엿새의 삶 전체를 성화시키는 생명수의 샘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축일을 위한 공일
법은 한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규범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강제 규정’으로서의 법은 한 사회를 위한 안전 장치인 동시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지향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법을 최소한의 도덕으로 이해하고 도덕적인 삶을 추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법대로 산다’는 말은 좋은 뜻이지만, ‘법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으로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법대로 산다’는 말은 부정적인 뜻이 된다. 이처럼 법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위 에서 본 것처럼, 안식일 규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누하’를 늘 기억하게 도움으로써 지상에 살며 하늘을 보고, 노동하며 참된 쉼을 갈망하며,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도록 이끌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율법의 목적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는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여호와]의 율례'(겔 20:13)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안식일 규정을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의 ‘메누하’를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메누하’의 복이 선택된 일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마련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이웃에게 선포하고 나누도록 명령하셨다. 그러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공일’로 만드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었다. 축일을 만들기 위해 공일로 만들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십계명의 하나로 선포하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만들었다.
불 행하게도, 세월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을 오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두 종류의 전형적인 오용 사례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첫째의 오용은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자로 기록될만한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조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종교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의 종교 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은 안식일 성수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안식일 전날부터 만 하루 동안 예루살렘 성문을 닫아둠으로써(13:19) 안식일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사고 파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안식일 성수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유대 백성들에게 전하며, 하나님은 안식일 성수 여부에 따라 복을 주거나 화를 내리실 것이라고 말한다(렘 17:19-27). 에스겔 선지자도 안식일을 더럽힌 죄에 대해 신랄하게 책망한다(겔 20:10-26). 그만큼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고 분별 없이 노동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인 간의 마음이 한 번 탐심에 사로잡히면 눈이 어두워지고 판단력이 마비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영적 차원이 헛것처럼 느껴지고, 인생의 행복이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 결과,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공일’로 규정된 날을 노동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도 힘드는데 ‘안식’ 같은 한가한 얘기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면서 끊임없는 노동으로 자신을 타락시켰을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을 이해해 줄만도 하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탐심에 사로잡힌 소치였다. 참된 안식 없는 삶은 결국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고 불행으로 이끈다. 쉼이 없는 노동은 육신에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망각하고 이웃도 망각하고 결국 하나님까지 망각하는 심각한 잘못에 빠진다. 인간의 생명이 먹고사는 데 있을 뿐이라는 치명적 오해에 빠진다. 먹기 위해 사는 식충(食蟲)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생령'(生靈)이 식충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안식일 규정은 이 참혹스러운 타락을 막기 위해 주신 고귀한 명령이다.
두 번째의 오용 사례는 ‘법대로만 사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주일에 하루를 공일로 만들라는 명령은 단순히 일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었음에도 그 깊은 의미를 무시하고 단순히 일을 멈추는 일에만 몰두함으로 안식일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된 관심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가 있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착했다. 그 결과, 초기 유대교 시대에 이르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이 정리되었다. (5) 각각의 항목은 또한 세부적인 규정으로 보완되었다. ‘물건 나르는 일’의 항목에는 ‘어떤 물건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얼마까지 옮기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안식일에 제외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등의 세부 규정이 따랐다. 율법 교사들은 이 질문에 답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유대교인들은 이 규정에 걸리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그 결과, 안식일에 해야 할 ‘메누하’의 축하는 까캅?잊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 뿐 아니라, 노동을 멈추는 일에만 집착하느라 안식일 규정이 이끌려했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이사야 선지자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는 하나님의 책망을 전한다. 안식일 규정은 정확하게 지키지만, 그 안식일 준수가 그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의 ‘메누하’를 축하했다면, 그 ‘메누하’의 이상이 불완전하나마 그들의 삶에 나타나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하나의 율법으로 지키고는 ‘법을 지켰으니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는 제 방식대로 살아갔다. 그 모순적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역겨움이 되었다.
안 식일 규정에 담긴 하나님의 선의는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무시되었다. 그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매 주일 정확하게 규정을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상황을 목도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3-14).
여기서 드러나듯, 안식일 규정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지키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상을 주시는 식으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공일이기 이전에 ‘즐거운 날’이요 ‘존귀한 날’이다. 그 날을 즐거운 날이요 존귀한 날로 만들기 위해 노동을 멈추고 오락을 멈추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오락은 인간을 진정한 의미에서 즐겁게 할 수 없다. 참된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그 목적지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축하하고 선포하고 누릴 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김용규가 말하는 바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6)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보내지’ 않으셔도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된다.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련하신 것이다.
(1) Abraham Joshua Heschel, 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rn Man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s, 1951), p. 22.
(2) 위의 책 p. 23.
(3) 김용규, <데칼로그> (서울: 바다출판사, 2002), 137쪽.
(4) 충청도 사투리를 쓰셨던 할머님은 ‘굉일’ ‘반굉일’이라고 발음하셨다.
(5) 39가지 금지된 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파종, 경작, 추수, 추수단 묶기, 탈곡, 키질, 곡식을 씻는 일, 곡식을 빻는 일, 체질, 반죽하는 일, 빵 굽기, 양털 깍기, 양털 씻기, 양털 손질, 염색, 물레질, 뜨개질, 실 감기, 베에 실을 걸기, 베에서 실을 내려놓기, 고리 매는 일, 고리 푸는 일, 바느질, 허무는 일, 사냥, 도살, 가죽 벗기기, 소금 뿌리는 일, 건조시키는 일, 무두질, 가죽 자르는 일, 글을 쓰는 일, 글을 지우는 일, 집 짓는 일, 집 허무는 일, 불끄는 일, 불 피우는 일, 망치질, 물건 나르는 일.
(6) <데칼로그>, 148쪽.
Aug 1, 2004 | 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이코스타 2004년 8월
3. “영과 진리로”–예수님의 예배
예수님 시대로 오면 유대교는 훨씬 다양한 신학과 전통으로 분화된다. 제사장들로 형성된 사두개파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두 기둥 역할을 했다. 비교적 열성적이었던 바리새파의 신학과 실천도 부족하다 느낀 사람들은 광야로 나가 공동생활을 하며 수도 생활에 몰두했다. 이들을 에쎈파라 불렀다.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결의한 사람들도 있었다. 열심당으로 불렀던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로마의 통치를 뒤집어엎으려 했다. 물론, 신앙에 회의를 느껴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예수님 시대로 오면 일반 대중의 신앙적 대안들이 매우 다양해져 있었다.
하지만 성전 제사 제도는 유대인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누리고 있던 절대적 권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대인 대부분의 신앙은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마을 곳곳에 세워진 회당은 성전의 역할을 보완하고 있었다. 성전은 제사를 위해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성소였고, 회당은 예배와 교육과 치리를 위한 생활 공동체였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설교하고 가르치셨다.
앞 장에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제사 종교에 대해 선지자들보다 더 강한 어조로 비판하셨다. 복음서의 기록상으로 볼 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한 번도 성전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성전 제사 제도가 중단되어야 하며,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으셨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라는 비판은 성전 제사 제도에 적용해도 딱 들어맞는 말씀이었다.
반면, 예수님은 회당 예배1)에 자주 참석하셨다. 회당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의심을 품고 배척하기 전까지 예수님은 회당을 무대로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회당 안에 있던 예수님’은 마치 ‘낡은 가죽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마 9:17)처럼 ‘불안한 동거’였다. 그분의 신학과 삶은 회당 예배가 견디기에는 너무 혁신적이고 파격적이었다. 그분이 회당 예배에 참석한 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지 회당에서의 예배 자체를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회당의 지도자들이 배척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설교하고 기도하고 교제를 나눴다. 예배를 위한 지정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님을, 그분은 행동으로써 천명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영성 생활의 중심 도구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였다. 그들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의 금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알았다. 고의적으로 저지른 죄2)를 해결하기 위해 구제 활동에도 열심을 다했다. 유대교인들은, 한 사람의 영성은 그가 이 세 가지를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양한 규칙과 전통이 개발되었고, 이것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마 11:28; 23:4)으로 혹은 ‘멍에’로 작용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형식적 절차와 관습에 전혀 얽매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루에 세 번 형식적 기도를 드리는 것에서 초월하여 ‘항상’ 기도하셨다.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기도에 깊이 몰두하곤 하셨고, 항상 하나님과 사귐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셨는데, 이 호칭은 그분이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느끼고 계셨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바’는 당시에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독일의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현존하는 유대교 문서를 뒤져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선례가 있는지 찾아보고는 “‘아바’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의 어법 중 가장 특이한 것이었다”라고 결론지었다3). 즉, 예수님은 이 호칭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유대교 역사상 유사한 예가 없는 혁명적 인식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다정다감한 ‘아빠’로 경험하셨고, 그분과 애정 깊은 대화를 나누듯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형식을 통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 중에 항상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기도였고 예배였다.
예수님의 예배 신학은 마태복음 5장 23-24절(“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형제’를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넓은 의미의 ‘이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제사보다 이웃과의 화해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신다. 이웃과 화해하지 않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만 용서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유대 제사 종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제사 규정을 마련했다.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그분께 용서 받아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구체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제사를 이용해 윤리적 요청을 회피하는 빌미가 되고 만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셨다. 그분은 이웃에게 행한 잘못을 당사자에게 먼저 용서받고 그 다음 하나님께 용서를 빌도록 요청하신다. 종교적 행위를 빙자해 윤리적 요청을 회피할 어떤 언떡거리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같은 맥락에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보자. 그분은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용서받기 전에 먼저 당사자에게 용서를 받아내라고 말씀하신 분이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풂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유대교 예배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제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 없이도 용서받을 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삶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더 귀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앞 장에서, 병자를 고치면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전 제사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제사 없이도 용서받을 길은 있다!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다! 유대 제사 종교의 교권자들이 들을 때,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발언이었겠는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 종교에 대한 비판은 마태복음 23장에 수록된 말씀에서 매우 자극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예수님은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이중적이고 형식적이며 기만적인 종교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삶과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1-4), 종교적 신분을 이용해 높임을 받으려는 태도(5-12), 하나님을 이용해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태도(16-2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과정을 무시하고 제사에만 몰두하는 태도(23-24), 내면에 관심을 쏟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꾸미는 위선(25-28), 체제를 지키기 위해 진리의 사람들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태도(29-36) 등이다. 이러한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무효화 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멸망으로 인도한다(13-15). ‘종교 지도자’라는 허울을 달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참된 종교를 훼방하는 사람들이다. 제사는 화려했으나 하나님은 거기에 없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없다. 제사와 예배와 모든 경건 행위가 인간적인 욕심에서 비롯하여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 말씀 중에서 예배와 관계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이 23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이다. 여기서 십일조를 드리는 행동이 제사 혹은 예배를 가리키는 반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은 일상생활을 가리킨다.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말은 제사에 대한 율법 규정보다 일상생활에 대한 율법 규정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의롭게 살고 자비를 실천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적 예배 시의 우리의 마음 자세와 행동거지보다 일상생활에서의 마음 자세와 행동거지에 더 큰 관심을 두고 계신다.
삶의 예배에 대한 강조는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기독교는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두 민족4)은 서로 자신의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인 것을 알고는 두 성전 중에 어디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냐고 묻는다(요 4:20).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고 답하신다. 매우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대답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히브리말과 헬라말에서 ‘영’은 ‘바람’, ‘숨’, ‘공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 가두어둘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다. “영과 진리”라는 말은 “진리의 성령”이라는 뜻이다5).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 사귐을 나누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진리의 성령을 인식하고 그분과 함께 하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 삶 전체가 참된 예배가 된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다.
이 대화에 이르기 전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보면 예수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물로 물을 길러 온 그 여자에게 ‘생수’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여기서 ‘물’이 성령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연구자들의 오랜 합의다. 따라서 지속적인 종교 생활에도 불구하고 채울 수 없는 영적 갈증을 가지고 있던 그 여자에게 예수님은 제도적 종교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참된 영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성령을 만나면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생명수의 샘물을 터뜨려주신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영성의 사람들을 찾으신다(23절).
이 같은 설명에 대해 “그럼, 공적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무방합니까?”라고 질문하는 학생들을 나는 자주 만났다. 이것은 너무 성급한 비약이다. 예수님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그분은 열 두 제자를 당신 곁에 두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훈련시키셨다. 열둘을 따로 택해 세우신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킨다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은 그분과 공동생활을 한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가는 데마다 식탁을 여시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했다. 그 식탁이 곧 예배당이었고, 그 잔치가 곧 공적 예배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모임을 폐지 하셨다거나 부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왜곡이다. 그분은 기존의 종교적 모임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성격의 모임을 시작하셨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분이 가는 곳마다 베푸셨던 식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예수님의 식탁처럼 모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해방된 영성으로 일구어가는 삶의 예배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참된 예배는 진리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삶이다! 공적 예배는 이러한 삶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점에서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 진실한 영성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공적 예배는 무의미하며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오늘도 찾으신다!
4. “거룩한 산 제물”–바울의 예배
독일의 신약학자 페르니난드 한(Ferdinand Hahn)은 이미 오래 전에 제사와 관계된 구약적 용어들이 신약성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6). ‘예배’를 가리키는 ‘라트레이아’나 ‘제사’를 가리키는 ‘투시아, ’제물‘을 가리키는 ’프로스포라‘같은 것이 그 예다. 이 현상은 신약의 저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구약 제사의 맥락에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초대 교회가 제사 제도나 제사장 제도를 받아들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떡을 떼는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행 2:43-47).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모임이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 혹은 회당에서 드리던 예배와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았고 또한 그렇게 실천했다.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들에게 이루신 구원 행동을 확인하고 축하하고 찬양하는 것이었다. 존 버크하르트(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행해 오신 것, 행하고 계신 것 그리고 행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7)라 고 정의한 바 있는데, 실로 초대 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적 응답이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 방식을 창안해야 했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은 안식일 저녁에 함께 모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서로 권면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모임8)은 유대교인들만의 모임과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방인들 혹은 이방화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유대교인들의 모임과의 성격적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같은 전환기에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유대교에 속한 한 종파와 같던 그리스도교를 독립된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유대교의 편에서 본다면, 바울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야훼 신앙을 배반하고 사교(邪敎)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증오했고 배척했다. 이러한 상황이 바울을 이방인들에게로 내몰았고, 그가 전파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은 유대교와 더욱 멀어졌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유대교적 흔적을 지워내는 일에 부심했다. 바울이 성전의 의미를 우리 몸으로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앞장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바울의 예배 신학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은 로마서 12장 1절이다. 그는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구원의 원리를 설명한 다음, 12장부터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12장 1-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원리를 천명한 다음, 3절부터 16장까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한 문장에 농축되어 있다.
바울은 자주 ‘몸’(소마)과 ‘육’(싸르크스)을 구분해 사용한다. ‘몸’은 영과 혼과 육을 다 포함한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말하고, ‘육’은 육체만을 가리킨다. 따라서 “너희 몸을”이라는 말은 “너희의 전 존재를” 혹은 “너희 삶 전부를”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산 제물”이라는 말은 역설적 표현이다. 모든 제물은 죽여서 바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전 존재를 제물로 바치되, 죽여서 바치지 말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바치라고 요청한다. 그러니까 첫 번째의 명령문을 의미를 따라 풀어 쓴다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수 있도록 너희 전 존재를, 너희 삶 전체를 거룩하게 살아라. 너희 자신이 산채로 바쳐지는 제물이 되게 하라.” 그런 다음 바울은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덧붙인다. “영적 예배”라는 번역은 직역이 아니다. 헬라어의 뜻을 따라 달리 번역하자면 ‘합당한 예배’(표준새번역) 혹은 ‘이성적 예배’ 혹은 ‘제 정신이 든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번역은 <공동번역>에서 채택한 ‘진정한 예배’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상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과정을 진정한 제물이요 진정한 예배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권고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함으로 산제사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이와 함께 로마서 15장 16절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피력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울이 자신의 소명을 ‘제사장’이라는 말로 표현한 유일한 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제사장직은 무엇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거룩해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기는 역할이다. 제사 종교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려야만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결례나 제사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이 스스로를 제사장이라고 부른 이유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산 제물’로 바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을 ‘공적 예배 무용론자’로 보는 것은 오해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에서 공적 예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그는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11:2)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공적 예배에 대한 전통을 가리킨다. 바울은 로마 도시에 교회를 세우고 믿음의 전통과 예배의 전통을 가르쳐 주었다.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전해 준 예배 형식을 잘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공적 예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주의 만찬’을 먹을 때 자주 발생한 혼란(11:17-34)과 열광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혼란(14:1-25)이 대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바울은 이 문제들을 다루면서 ‘적실성’과 ‘유익성’을 예배 형식의 두 가지 기둥으로 제시한다. 그는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1:17)고 말하는가 하면,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14:26)고 권고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40)고 말하기도 한다. 이 모든 권면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은 공적 예배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법은 없으며, 모든 것을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는지?”(적실성)와 “예배 참여자들에게 신앙적으로 유익이 되는지?”(유익성)의 질문에 따라 창조적으로 고안하고 실행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셈이다.
예배의 적실성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므로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어울려야 한다. 이방 종교의 제사 관습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예배의 유익성도 마찬가지다.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기를 기대한다. 문제는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대해야 할 유익이 어떤 것인가?”의 질문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예배의 유익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가르침을 받고 새로워짐으로 “지혜에 장성한 사람”(14:20)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적 예배를 통해 일상생활을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변화 받고 성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적 예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 전체의 예배가 목적이며, 따라서 공적 예배는 이 목적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5.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브리서의 예배
앞에서도 언급했듯,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과거에 제사 종교의 관행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제사 종교를 떠났으나, 머지않아 다시금 제사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생각해 보라. 정기적으로 짐승을 잡아 바침으로 그 동안의 죄를 씻어내곤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은혜를 받아들여 한 순간에 제사를 중단했을 경우, 뭔가를 상실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 쉽지 않겠는가? 이것은 마치 한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던 우리가 미국에 와 사는 동안 매일 샤워를 하면서도 왠지 몸에 때가 남은 것 같아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편지를 통해 매일 샤워(영적 교제)하는 사람이 목욕(제사)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초보자에게는 지루하고 복잡하게 느껴지기에 충분한 전반부의 신학적 설명(1-7장)을 끝내면서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8:1-2). 이것이 히브리서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참된 대제사장이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다(9:11-14). 우리는 짐승의 피로 거룩함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10:10) 거룩함을 얻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성전 제사를 폐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금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을 무효화시키는 일이 된다. 결론은 분명하다. “이것들[죄와 불법]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0:18).
그리스도인들은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대제사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원하신 참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4:16)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19-20).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하늘 보좌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피 흘림이 필요 없다! 더 이상의 중재가 필요 없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살 길” 즉 참 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 활짝 열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예배가 필요 없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고 경고하는 한 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13:15)고 권고한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13:10)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제단’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말씀 즉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12:22-24)는 말씀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공적 예배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공적 예배는 마지막 날에 누리게 될 그 모든 축복을 미리 경험하는 장소다.
공적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부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은 약속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달으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12:28). 혹은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10:21-24). 공적 예배를 통해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변화는 ‘내면의 성화’와 ‘일상의 성화’다. 진리를 깨달으면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는 열심이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이런 열심이 성숙되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저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3:16)고 말함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선한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6. “예배드리듯 살기”–실천적 제안
구약과 신약을 통해 예배의 본질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공적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행해 오신 것, 행하고 계신 것 그리고 행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라고 정의했던 버크하르트는 그리스도교 예배가 가져야 할 세 가지 요소를 ‘깨달음’(acknowledgment), ‘재현‘(rehearsal) 그리고 ’선포‘(proclaim)로 정리했다9). 이 모든 요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다. 둘째, 진정한 예배는 일상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그분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공적 예배는 일상생활 전체를 예배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영적 훈련이다. 공적 예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예배가 목적이다. 셋째, 공적 예배의 형식은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려야 하고 참여자들의 영성을 깨우고 키우는 데 유익하면 된다.
이러한 예배 신학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예배적 삶을 위해 몇 가지 실천적인 제안을 해 보자. 첫째, 한국 교회의 예배를 지배하고 있는 제사적 용어와 상징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축제적 응답’으로서의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는 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혹은 물질적인 복을 구하기 위해 제사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게 된다. 이미 주어진 은혜와 복에 눈뜨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구한다. 삶의 예배를 소홀히 하고 공적 예배에 집착하게 되고, 공적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잘못에 빠진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로 오해하게 할만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배 시간에 자주 듣게 되는 ‘제물’, ‘제사’, ‘제단’ 등의 용어들을 가능한 한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초대 교회의 전통이다.
둘째, 공적 예배를 준비하고 집례 할 때 삶의 예배를 준비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에서 예배의 모든 순서와 내용을 정해야 하고, 이 사상이 명료하게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축도를 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참된 예배 현장으로 나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어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으로 인도한다.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의식이 너무나 깊이 제사적 패러다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없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발언을 반복하는 잘못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적 예배 시에 순서를 맡은 사람들은 바른 예배 신학에 기초하여 할 말을 미리 작성하여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흥적으로 말하더라도 바른 예배 신학이 반영될 정도로 의식이 변화될 때까지!
셋째, 목회자와 성도들은 영감이 충만한 감동적 (공적) 예배를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읽고 “어, 공적 예배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네?”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읽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적 예배보다 삶의 예배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생활 전체를 예배의 차원에서 산다는 것이 한편으로 얼마나 가슴 벅찬 삶이며 다른 한 편으로 얼마나 도전적인 일인지를 안다면, 그 가슴 벅찬 도전을 위해 공적 예배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열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그 열망을 더욱 심화시킨다.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을 갈구하던 우리 심령이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어진다. 그 열망과 갈증은 예배 시간을 넘어 한 주일 전체 안으로 스며든다”10)고 했다. 좋은 맛이 미각을 개발시키고 더 강화시키듯, 영감 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 하나님께 대한 열망이 더 강해지고 예민해진다. 그 열망이 한 주일 내내 하나님과의 사귐을 추구하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끈다.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공적 예배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목회자는 예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을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웬만한 영성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넷째, 예배 형식의 문제는 가변적이고 문화적인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열린 예배(contemporary worship)가 유행하면서 때로 교회가 이 문제로 인해 분열되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 교회가 분열할 정도로 어느 한 형식의 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배 형식은 회중의 문화와 전통과 기호에 관한 것이다. 다만, 그 예배 형식과 내용이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고 참여자들의 영성을 깨우는 것이면 된다. 현재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대표적 목회 성공 사례로 꼽히는 부활의 교회 아담 해밀턴(Adam Hamilton) 목사의 사례는 이 점에서 꽤 의미 있다. 그는 1990년에 캔사스 주의 한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주변 교회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모든 교회에서 열린 예배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해밀턴 목사는 자신도 열린 예배를 제공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고 전통적 형식의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창조적이고 영감 있는 목회를 시도한 결과 10여년만에 6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전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비종교인들이나 형식적인 종교인들(우리 교회에 등록한 사람의 70퍼센트 정도가 이런 사람들이다)이 전통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은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줌으로 쉽게 해결된다.”11)
다섯째,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성을 지도할 때 좀 더 멀리 보도록 힘써야 한다. 공적 예배 참석도가 그 사람의 영성과 언제나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교회에서 맴도는 사람들을 그 동안 많이 보아왔다. 반면, 공적 예배 참석률은 부진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목격해 왔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도들이 공적 예배를 드리는 태도와 함께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예배가 어떤지를 자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목회의 참된 성공은 주일 예배 참석자의 수보다는 교인들의 삶의 질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심방과 상담과 교육 등을 통해 각자가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과제다. ‘예배드리듯 사는 삶’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듭난 사람(Born-again Christian)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Made-again Christian)이 목회의 과제인 것이다.
여섯째, 성도의 입장에서는 공적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동시에 다른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영성 생활의 초점은 일상생활 전체를 예배로 만드는 것이다. 매사에 예배드리듯 행동하는 것이다. 먹는 일도, 자는 일도, 매매하는 일도, 가르치는 일도 모두 예배 드리듯 섬기는 것이 영성 생활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일치되도록 늘 경계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 일을 이루는 데 있어 영감 있는 공적 예배와 함께 다른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매일 충분한 시간 동안 경건 생활을 하고, 정기적으로 영적인 사람들과 영적 교제를 나누며, 정기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영적으로 항상 깨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그런 상태에서만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을 예배처럼 섬길 수 있다.
1) 회당 예배는 남성 10인 이상이 모일 때 성립되었다. 여성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예배 성립 조건에 기여하지 못했다. 회당 예배는 쉐마의 낭독, 18조 기도문 낭송, 율법 낭독, 예언서 낭독, 강해와 권면, 축도 순으로 이어졌다.
2) 유대 신학에 의하면, 과실로 범한 죄는 제사로 용서받을 수 있지만, 고의로 범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고의로 범한 죄는 선행으로 상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구제 활동은 상대방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3) 요아킴 예레미야스, <예수의 선포> (왜관, 분도출판사, 1995).
4) 엄밀하게 말하면 두 ‘민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두 민족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5) 영국 출신의 신약학자 C. H. Dodd가 이 해석을 제안한 이후, 이것은 신약학계의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6) Ferdinand Hahn,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1973), pp. 36-38.
7) John E. Burkhart, Worship: A Searching Examination of the Liturgical Experience (Philadelphia: Westminster, 1982), p. 17.
8) 그리스도인들만의 모임이 나중에 ‘에클레시아’(교회)로 불렸다. 이것은 ‘시나고게’라고 불렀던 유대교인들의 모임과 차별 짓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9) Burkhardt, Worship, p. 29.
10) Eugene Peterson,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Downers Grove: IVP, 2000), p. 56.
11) Adam Hamilton, Leading Beyond the Walls (Nashville: Abingdon, 2002), p. 70.
May 1, 2004 | 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이코스타 2004년 5월
1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다가 다시 목회 현장으로 나오니 새롭게 느껴지는 점들이 많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목회자가 처한 입장이 진실을 바로 인식하는 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자주 확인한다. 목회자의 입장에 오래 있다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현상에 대한 바른 시각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예배에 대한 시각이다. 목회자가 볼 때 예배는 성도들의 영성 생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정성을 다해야 하고, 예배에 대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예배에 이렇게 정성을 다하다 보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해 조바심이 생기는 반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믿음이 생긴다.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안전해. 잘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기 쉽고, 예배 참석에 부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상, 이 느낌은 어느 정도 사실과 일치한다. 확률적으로,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영성보다 더 성장하고 성숙될 가능성이 크다. 대단한 영적 수준에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예배 참석도가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반론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한 사람의 영성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자주 예배에 참석하느냐는 한 가지 기준에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된다. 꾸준한 예배 참여가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고, 예배 참여도가 일상생활의 질적인 변화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흔하지는 않지만, 사정상 예배 참여에 소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일상생활의 질은 예배 참석도가 높은 사람보다 나은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반복되는 예배에 항상 정성을 다함으로 감격적인 예배 경험이 일어나도록 하는 한 편, 성도들의 삶 전체를 보고 영성 지도를 하는 폭넓은 목회적 시야를 갖추어야 한다. 오랜 만에 목회를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고 있다. 문득문득, 내 눈에 자주 보이는 사람은 건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병들어 있다는 편견에 빠진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 편견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목회자는 예배와 교회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그 결과 성도들도 자신들의 교회 생활에 비례하여 자동적으로 영성이 성장해 간다는 오해에 빠지게 된다.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되고 그로 인해 성도들의 종교성은 강하지만 사회성은 갈수록 약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른 이해는 바른 삶의 출발점이다. 예배를 바로 알고 바로 실천할 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구약의 제사 규정
태초에는 예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태초에는 ‘형식적 예배’가 없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볼 때, 최초의 예배 혹은 제사(1)는 태초의 원형을 잃어버린 후, 즉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나온다(창 4:3-5). 그 이전 즉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분리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귐이 항상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 혹은 예배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중간 중간에 시간을 따로 내어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살아가는 동안 줄곧 사귐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간을 따로 구별하여 특별한 형식으로 감사를 올리는 제사 형식이 창안되었다. 특별히 짐승이나 곡식을 태우는 제사 의식은 ‘멀리 계신’ 하나님께 그 물질을 직접 드릴 수 없으니 연기로라도 전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련한 몸짓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공적 예배 혹은 제도적 예배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실존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상징하는 종교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르는 족장 시대에 제사는 사적이고 비형식적인 초보적 형태였음이 분명하다. 제사장도, 성전도 없었다. 어디서든 제단을 세우고 짐승을 잡아 바치면 그곳이 성전이 되었고 제사가 되었다. 가장(家長)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리 마련된 규칙이 없었으므로, 가장은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응용하여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섬기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었으나, 그분께 예(禮)를 드리는 제사 형식은 집집마다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집집마다 전해져 내려온 관습대로 드리던 제사가 확고하게 제도화된 것은 모세 시대의 일로 추정된다.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 그리고 레위기 전체에 걸쳐 상세한 제사 규정이 제시되어 있다. 공적 형태의 제사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한 모습으로 출현했을 리는 없다. 모세가 바로에게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5:3)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모세 시대 이전에도 공적 제사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부터 제사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사람에 의해 그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해야만 유효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스라엘의 제사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흠 없음’이다. 레위기를 읽어보면 ‘흠 없는’이라는 어구를 헤아릴 수 없이 자주 만나게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므로 모든 면에서 온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규정을 지배했다. 성막의 모양과 배치가 율법 규정에 정확히 일치해야만, 제사장이 규정된 모든 조건에 합해야만, 제물이 규정된 모든 조건에 합해야만, 제사 절차가 규정된 모든 조건을 갖추어야만 흠 없는 제사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은 흠이 없는 제사만을 받으신다고 믿었다. 레위기에 기록된 것은 원론적인 규정이었으므로 율법 전문가들은 성경의 규정에 바탕하여 새로운 시행 세칙을 꾸준히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흠 없는 제사를 위한 규정들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흠 없음에 대한 이 지독한 집착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에서 유래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 중 ‘거룩하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히브리어의 ‘거룩'(카도쉬)은 ‘구별됨’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리됨’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부정(不淨)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야 했다. 무엇이 부정한가? 흠 있는 것이다. 무엇이 흠인가? 흠은 율법이 정한다. 율법에서 흠으로 규정한 것은 모두 부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려면 율법을 연구하여 흠 있는 것을 철저히 가려내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켜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율법 규정의 발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흠 없는 사람들이 흠 없음에 이르기 위한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 버렸다. 장애인들은 육체적인 흠으로 인해 부정하게 취급되어 레위 가문에, 아론 혈통에, 사독 가문 출신(2)이 라 해도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성전 본체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여성이라는 것도 흠이었다. 그래서 여성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성전 본체 안에서도 여자들만을 위해 구별된 장소에만 머물러야 했다. 제물로 쓸 짐승이 병에 걸렸어도, 야위었어도, 장애가 있어도, 생김새가 좋지 않아도 부정하게 취급되었다. 그 결과, 제사 제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율법 규정에 의해 흠 있는 것으로 판정되면 그 사람은 영영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할 수 없는 ‘레 미저러블'(Les Miserables)이 되고 만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다. 흠이 없는 것으로 인정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흠이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특권 의식으로 연결되었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는 조건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들은 흠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고, 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택의식은 제사 의식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그들은 흠 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거룩해지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다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하나님의 관심사가 그들이 드리는 제사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는 것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 결과 제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는 경향에 빠지곤 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부정 타지 않기 위해 분별하고 구별하는 일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우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부정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항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려 했고, 거룩한 영역을 따로 확보하여 그 속에 안주하려 했다. 이러한 편향된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차원을 소홀히 하도록 이끌었다. 윤리적 요청을 회피하고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제사에 몰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종교적인 열심은 강한데 윤리적 차원에서는 파산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들 편에서 보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위선자이거나 속아 넘어간 맹신자다. 성전 안에서의 행동과 성전 밖에서의 행동이 전혀 다른 이중 인격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식은 그들에게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다. 어떤 면에서든 흠이 있다는 사실은 더 각별한 보살핌의 대상이라는 뜻이련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흠이 있다는 것을 ‘부정’ 혹은 ‘불결함’ 혹은 ‘불길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인식하고 나니, 흠이 있는 물건이나 짐승이나 사람은 동정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차별과 감시와 격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인간들에게도 버림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흠이 있는 물건이나 생명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주저됨 없이 차별하고 정죄하고 멸시하고 외면하였다.
후대의 제사 신학이 드러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제사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가인과 아벨의 첫 제사 이야기(창 4:3-5)와 노아의 제사 이야기(창 8:20-22)가 분명히 보여주듯, 제사 혹은 예배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고 감사드리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을 얻어내려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감사와 감격의 제사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거래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받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데 제사 제도는 마치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흠 없음’의 기준을 만족시키면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확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제사 의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기 바란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제사 의식은 본래 좋은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상실한 인간에게 있어 제사는 그 사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고 새로운 마음을 얻는 것은 제사의 가장 좋은 열매다. 모든 절차에 있어 흠이 없도록 요구하는 율법 규정도 본래는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라는 요청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예배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절차와 규정을 하나하나 따르면서 마음을 모아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흠 없는 제물을 바치라는 것도 가장 좋은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임을 인정하라는 뜻이니 탓할 것이 없다. 실제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이러한 태도로써 임했을 것이고, 그 결과 스스로를 속이거나 속아 넘어감으로 제사와 삶이 분리되는 잘못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제도화되고 교권화 되고 형식화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영성을 지키고 율법의 본래 정신을 지킬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절대 다수는 이 상황에서 영성을 잃어버리고 체제의 속임수에 스스로 영합하거나 속아 넘어가 거룩한 영역을 지키고 그 안에서 안주하는 데에 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2.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구약의 제사 비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선지자들의 예언 운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조직이 지나치게 거대해지고 그 이권이 너무 커진 나머지 내부적인 비판과 견제와 정화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 조직은 타락하기 시작한다. 중세 시대의 가톨릭교회가 대표적인 예다. 이스라엘의 제사 종교가 그랬다. 모든 것이 제사장들에 의해 규정되고 집행되고 처리되다 보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제사 종교는 더욱 타락하게 되었고, 그 타락으로 인해 일반 대중의 영성이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 암흑기의 절정에서 예언 운동이 시작되어 이스라엘의 영성을 깨워 일으켰다.
예언 운동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히 밝혀진 것이 없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기원전 721년)하기 얼마 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예언 운동은 제사장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던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에 새로운 정신을 제공해 주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성이 새롭게 도약했다. 기독교의 역사에 비교한다면, 예언 운동의 출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 운동에 비유할 만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 종교의 거의 모든 면을 비판했지만, 특히 일상생활과 구별된 제사 행위가 가장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선지자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의 종교성을 이렇게 비판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암 5:21-22). 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명령을 주신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23절)! 모든 제사 행위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어조로 남왕국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책망을 전한다. 이사야는 말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이어서 그는 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헛된 제물’이요, 하나님은 그들이 올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기신다! 매월 첫날에 모여 예배드리고 안식일마다 모이는 것도 ‘가증히’ 보신다(13절)!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 행사를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고 절규하신다. 그들이 드리는 모든 종교 행사들을 지켜보시기에 하나님은 “곤비해”(14절) 지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거부하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선지자 이사야가 그 대답을 준다. 그들이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고”(13절)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15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일상생활이 죄와 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사에는 전심을 다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죄악을 일삼기 때문이다. 종교적 행위를 통해 영성을 키우고 그 영성을 통해 일상생활 전체를 거룩하게 만들어야 했건만, 그들은 종교적 행위를 일상생활에서의 죄악에 대한 도피 수단으로 혹은 거기서 오는 가책을 모면하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랬기에 그들의 종교 행위는 날로 커지고 빈번해졌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의 질은 날로 타락해갔다. 제사생활과 사회생활, 종교생활과 일상생활 사이에 높고 두터운 장벽을 쌓고는 제사생활에 몰두함으로 그 위선과 모순을 외면하려 했다.
이러한 영적 타락을 회복하는 길은 제사 생활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더 관심을 기우리는 데 있다. 아모스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라고 말씀하신다. 일상생활, 사회생활에서 정직하고 의롭고 공정하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더욱 명료하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호세아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포괄적이지만 명쾌하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히브리어의 ‘알다'(야다)는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귀는 것’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과의 사귐에 들어가 그분의 영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것이다. 제사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활동들은 이러한 전일적(全一的) 영성을 키우는 데 이바지해야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
선지자들은 제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지적한다. 이 점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해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했다(렘 7:22)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담긴 그 모든 제사 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히브리적 어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반어적 병행법'(같은 내용을 한 번은 부정적으로 또 한 번은 긍정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어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런 경우 부정적인 표현을 액면 그대로 ‘절대 부정’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부정적 표현의 의도는 그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번제나 희생 제사에 대해 명령한 바 없다”는 말씀은 “내가 강조한 것이 번제나 희생 제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긍정문을 보자.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걸어가라’는 말은 일상생활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 규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일상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일상생활을 ‘비신화'(非神化)시켰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반쪽짜리 영성을 거부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려는 메시지는 제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이다.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다른 한 편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임을 알고,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사랑 가운데 살아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 51:17)이며 순결한 마음이며 의로운 삶이다. 제사 종교는 바로 이 점에서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제사장이나 일반 대중이나 모두 제사와 율법에 집착한 나머지 일상의 영성을 상실한 것이다. 제사를 일상에서 분리시킴으로 일상으로부터 제사를 몰아냈다. 그 결과, 제사는 제사대로 왜곡되었고 일상의 삶은 그것대로 물화(物化)되고 속화(俗化)되었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강도 높게 제사 신앙을 비판하고 영성의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이미 견고한 성을 쌓은 제사 종교는 변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제도권 밖에서 외로이 외치다가 거부와 박해와 순교를 당했고, 제사 종교의 교권자들은 ‘어용’ 선지자를 고용해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했다. 하지만 예언 운동의 존재는 일반 대중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제도권에서 나오는 ‘체제 옹호적’인 소리만 듣고 순종해야 했던 그들은 예언 운동 덕에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대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사 종교의 교권자들은 그들을 더욱 위협하고 옭아매려 했다. (계속)
(1) 구약성경에서 ‘제사’와 ‘예배’는 동의어로 쓰인다.
(2) 율법 규정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 가문 중에서도 아론 혈통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고, 아론 가문 중에서도 사독 계열에 속한 사람에게만 대제사장이 되는 특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로 오면 대제사장직이 정치적 결탁의 대상이 되었다.
Mar 1, 2004 | 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이코스타 2004년 3월
2. 신약에서의 성전
이제부터 나는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성전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한다. 예수님의 사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그분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세례 요한부터 생각해 보자.
1) “시온 산이 아니라 요단강으로!”–세례 요한
예수님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네 복음서가 우리에게 남겨준 전통이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역사를 거쳐오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나도 신약학자로서 이 문제를 두고 이런 저런 가설을 세워 보았는데, 지금으로서는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들어가실 때 모든 인류의 문제를 끌어 안으셨다”는 대답을 가지고 있다. 요단 강 안에서 그분은 그분 개인이 아니었다. 그분은 죄에 물들어 죽어 가는 인류의 대변자로서 세례를 받으셨고, 인류 전체의 문제를 붙들고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도 개인 예수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대변자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나의 표현 능력의 한계 때문에 말장난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분이 대변하셨던 인류 안에 ‘나’도 포함된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롬 5장). 이것은 논리로 납득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논리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논리로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분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의 밝혀주심을 받아 깨달아야 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요 20:28)라고 고백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께서 요한이 말하고 행동한 것을 다 인정하지야 않았겠지만, 그분이 볼 때 요한의 사상과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할만했다(마 21:25). 그분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든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마 11:14)는 말씀을 통해 그를 인정하셨다. 이런 연관성을 생각한다면, 성전에 대한 세례 요한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교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던 에쎈파 공동체에서 자랐을 가능이 크다. 단편적이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은 에쎈파의 일원이었다고 추정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 광야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율법을 엄격하게 실천했던 에쎈파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가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성전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동물을 죽여 바치는 제사를 받으시지 않는다고 믿고 그들은 매일 매일 율법을 따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 자체를 제사로 여겼다. 사실, 에쎈파의 성전 비판의 뿌리는 예언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전 7백년 경에 살았던 아모스는 이미 성전 제사 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암 5:21-27). 이 전통은 이사야를 비롯한 주요 선지자들에게로 이어진다.
성전에 대한 세례 요한의 태도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가 베푼 ‘회개의 세례’다. 이 의식을 통해 그가 요청한 것은 죄에 대한 회개다. 외면적으로 이루어지는 물세례는 내면에서 일어난 회개를 표현한 것이다. 물세례 자체가 어떤 마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회개’를 뜻하는 히브리어 ‘슈브’는 U-Turn을 의미한다) 그 방향 전환에 걸맞게 생활 방식을 고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임박한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당시 유대교는 오직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만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유대교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모든 죄는 비고의적인 죄와 고의적으로 범한 죄로 나뉜다. 고의적으로 범한 죄는 선행으로 상쇄할 수 있고, 실수로 범한 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받을 수 있었다.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야 효력이 있었다. 톰 라잇(Tom Wright)이 명료하게 지적하듯, “1세기 유대교 체제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성전과 제사장을 중심으로 마련된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해 주신다.” (1)
그렇다면 죄의 용서를 위해 시온 산이 아니라 요단강으로 오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회개의 세례’를 받고 생활 태도를 고치면(‘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렇지, 요한은 필경 성전과 제사장과 제사 제도를 비판하는 말과 행동을 자주 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비판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요한에게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증오심의 원인이었다. 그는 그들의 기득권에 대해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그를 체포하고 처형한 것은 헤롯 안티파스였지만, 예수님의 경우처럼 그 배후에는 성전 교권의 음모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2) “하늘이 열리다!”–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요단강으로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분이 성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입장에 공감하셨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체포당하자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났다가 얼마 후에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의 갈릴리 사역에서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은 “네 죄를 사하노라”는 권위적인 선언이었다. 예컨대,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그분은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선언하신다. 거기에 있던 서기관들이 이 말을 듣고 경악한다. 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9:3)라고 부르짖는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9:6)고 말함으로 더욱 자극하신다. 가끔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병을 치료해 주실 때 그분은 거의 예외 없이 먼저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 때마다 유대인들은 경악한다.
우리는 그 동안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에게만 있던 죄 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다는 뜻이다. 루이스(C. 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이 발언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가정에서만 납득된다. 죄를 통해 자신의 법이 무너졌고 자신의 사랑이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이런 선언을 할 수 없다”(2)고 지적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발언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기관들이 느낀 문제점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죄 용서를 선언한 것은 성전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조건으로 용서를 선언하던 요한 보다 더 무지막지한 것이 온 것이다! 이것은 성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3)
이 대목에서 열 명의 나병(4) 환자를 고친 이야기(눅 17:11-19)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던 어느 마을에서 전도하실 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찾아와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두고 예수께서 당시 성전 제사 제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의도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 규정에 의하면, 나병에 걸린 것으로 확인되면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다가 제사장에 의해 완치된 것으로 확인되면 정결 의식을 드리고 자기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14:1-32). 그러므로 열 명의 환자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제 너희 질병이 완치되었으니 성전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 절차를 밟아라”는 뜻이다. 그들의 몸이 아무리 완전해진다 해도 성전 제사장에 의해 인정되지 않으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한 시위와 성전에 대해 하신 말씀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미 ‘시작하는 말’에서 성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동(이해를 돕기 위해 ‘시위’라고 이름지었었다)의 의미를 설명한 바 있다. 그분은 성전 바깥 뜰(‘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렸다)에서 제사용으로 팔리던 짐승들을 풀어주고,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헌금용 동전으로 바꿔주던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고, 장사하던 사람들을 흩어 버리신다. 우리 시대의 가장 명망 있는 유대인 학자 중 하나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는 주목해야 할 하나의 논문(5)에 서, 당시 유대교 상황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에서 진행되는 제사 행위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당시로서는 성전 바깥뜰에서의 매매 행위가 사라지면 성전 제사를 모두 중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 제도의 수호자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비록 단발적인 시위로 끝났지만 그 ‘불순한’ 운동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시작했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위용에 대해 제자들이 감탄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한 번만 했다고 볼 수 없다. 가야바 법정에서 무리들이 그분을 고발할 때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고 증언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막 15:29)라고 조롱했다. 이 사실은 성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씀했다는 뜻이다. 다만,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성전을 당신의 손으로 무너뜨리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함으로써 그분의 혐의를 중하게 만들려 했다.
성전에 대해 하신 말씀은 두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성전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파괴될 것이다. 둘째, 내가 새로운 성전을 일으킬 것이다. 예수께서 일으킬 성전은 무엇인가? 우리는 <시작하는 말>에서 요한복음 저자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았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21). 여기서 사용된 ‘육체’는 헬라어로 ‘싸르크스'(육신)가 아니라 ‘소마'(사람의 존재 전체)다. 예수님의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그분의 존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고 하셨던 그분의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뵙는다.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면대면(面對面) 대하게 된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분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큰’이라는 말은 실상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풀어야 한다. 완전한 것이 왔다면 불완전한 것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 일어난 것이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마 3:16).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자주 선택했던 대용어다. 따라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막혔던 관계가 예수님께 활짝 열렸음을 뜻한다. 하나님과 인류가 맨 처음 누렸던 친밀한 관계가 이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상징적 사건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일어났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성소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킨다. 지성소는 두 겹의 휘장으로 성소와 분리되어 있었고,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1년에 한 차례만 이곳에 들어가 백성을 위해 중보 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성소의 휘장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두터운 장벽을 상징했다. 결국,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요단강에서 암시된 그 ‘개벽’의 사건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사역, 그분의 존재, 그분의 죽음–이 모두가 합하여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진리를 천명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끝났다! 제사도 끝났고 제사장도 끝났다! 이제 하나님에 이르는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하지 않는다! 그 길은 예수님으로 통한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이르고 그분과 사랑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첫 인류의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낙원이 이제 회복되었다! 눈을 떠서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댄스(dance)를 보라! 귀를 열어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어라! 그 옛날 시편 저자가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19:3-4)라고 했던 고백이 엄연한 진실임을 확인하라!
3) “보라, 새 세상을!”–바울
바울은 예수께서 남기신 성전 신학을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좀 더 상세하게 전개시킨다. 그는 회심한 이후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성전에서 활동했던 유대교 교권자들이 그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회심 이후 한 번도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로마 도시로 다니면서 성전 없는 종교, 제사 없는 종교, 율법 없는 종교, 할례 없는 종교, 안식일 없는 종교를 전파했다. 바울의 이 복음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신학은 역경의 상황에서 더욱 심화되는 법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행하는 바를 비판하고 박해할 때,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자신의 입장에 대해 궁구하게 되고, 그 결과 사상이 성숙하고 무르익는다. 이것이 바울의 상황이었다.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반대와 박해 앞에서 그는 자신이 믿고 행하는 바에 대해 목숨을 내 걸만한 확신에 이르러야 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가 남긴 편지들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은 성전의 개념을 부정하는 동시에 그 개념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전은 끝났다. 완전한 것이 왔으므로 불완전한 성전은 이제 폐지되어야 했다. 그가 율법에 대해 “초등 교사”(갈 3:24)요 “초등 학문”(갈 4:9)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성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롬 10:4)이듯, 성전도 예수에게서 종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성전은 없다! 반면, 바울은 성전의 개념을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성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대시켰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에서 그는 고린도교회의 분열 문제를 다루면서 중간에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3:16-17).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복수 2인칭 대명사다. 1장부터 4장까지 그의 관심은 오직 믿음의 공동체에 있다. 따라서 그는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에베소서에도 나온다. “그[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믿음의 공동체 안에 성령의 임재가 더욱 충만해지도록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교회가 성전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다. 교회를 예배당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어원적으로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불러냄’이라는 뜻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모임’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로 쓰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보고 교회 즉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지, 어떤 건물을 보고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사용될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별도의 건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가정에서 혹은 큰 건물을 빌려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전이다’라고 말할 때 절대로 건물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그는 창녀를 찾는 교인들에게 글을 쓰면서 몇 가지 중요한 발언을 한다. 그 중 하나가 성적 행위에 대한 정의다. 그에 의하면, 섹스(sex)는 단지 성기와 성기의 접촉이 아니라 한 인격과 한 인격의 합일이다(6:16).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말씀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6:19)는 말씀이다. 바울의 인간론에 의하면, 인간의 몸(‘소마’)은 영(‘프뉴마’)과 혼(‘프쉬케’)과 육(‘싸르크스’)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령은 영을 통해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와 사신다. 영과 혼과 육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으므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혼과 육에도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창녀와 성적인 접촉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훼손하는 일이 된다. 섹스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몸 전체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말씀으로써 성전과 우리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었는데 성전을 찾아 돌아다닐 이유가 무엇인가? 성전이 된 사람에게는 온 천하가 성전이 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없어 보이던 물질계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영적 세계로 변한다. 바울은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다. 의미를 고려하여 새로 번역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눈이 뜨입니다. 과거에 보이던 세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이 신비로운 변화를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만큼 명쾌하게 서술한 사람이 또 있을까? “믿음으로 우리가 변화된다 해도 세상의 모든 자연적인 현상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대신, 동일한 자연 세계 위에 하나의 원리가, 내적 궁극성이 혹은 또 하나의 영혼이 둘러 덮는다. 믿음의 영향 하에 사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외적인 모습을 변모하지 않은 채 생명력 있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6) 믿음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개안(開眼)의 은혜를 입으면 이 세상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이 우주 전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4) “완전한 성소에 계시는 분”–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성전 제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신학적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서도 여전히 성전 종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쓰여졌다. 그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 한번의 완전한 제사’의 효력을 완전히 믿지 못한 데 있었다. 과거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제사장들의 중재를 입어, 눈에 보이는 짐승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예수께서 바친 완전한 제사를 통해 자신들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했다.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기뻐했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도 믿고 제사도 드리는, 혼합 종교를 꿈꾸고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제사 제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인지를 논증하며 담대히 서도록 요청한다. 제사장과 제사에 관한 대목은 그 문제들을 다루는 장(章)에서 논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성전에 대한 논증에만 집중해 보자.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참되고 완전한 성소에 계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예수]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8:1-2)고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1-12)고도 한다. 같은 장에서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9:24)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헬라 철학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이원론적 도식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소와 지상의 성전의 차이를 설명한다. 참되고 영원한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지상의 성전은 하늘 성소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10:12)은 믿는 자들을 위해 영원히 중보 하신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제사 드릴 이유가 없다(10:18).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참되고 영원한’ 성소에서 당신이 단번에 드린 ‘완전한’ 제사를 통해 계속하여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데, 왜 다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불완전한’ 제사장의 도움으로 짐승의 피로 드리는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려 하는가?
5) 일상 속의 성전
이렇게 본다면, 신약성경의 성전 신학은 일관되고도 아주 명쾌하다. 성전은 폐기되어야 한다! 성전과 함께 제사도, 제사장 제도도 폐기되어야 한다.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현존에 눈멀게 하는 성전은 사라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이 메시지를 아주 분명하게 전달하셨다. 그 메시지를 알아차린 유대교 교권주의자들은 그분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요새가 제거 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승리했다.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분을 제거하고는 문제의 뿌리를 말끔히 뽑아냈다고 생각하고 자축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민들레는 뿌리를 뽑아 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뿌리뽑힌 것 같던 예수님은 어느 새 부활하여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결국 예수께서 예언한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성전 없는 새로운 종교를 형성해 갔다.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여기고 섬기며, 믿음의 공동체에 참여하여 성전을 완성해 가며, 천하를 성전으로 삼아 어디를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열어갔다. 일상 밖에 있던 성전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 일상 전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영성의 복음을 전파해 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교권 세력이 등장하여 성전을 다시 쌓고 제사 제도를 만들고 제사장이 되기를 자처했다(7). 예수께서 당신의 전부를 드려 허무셨던 것을 다시 쌓고 새로운 성전 종교로 변모시켰다. 일상 속에 끌어들였던 성전을 다시 일상 밖으로 끌어내어 견고한 요새로 만들어 버렸다. 새로운 성전 종교 체제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음하며 시들어갔다. 영성이 질식할 즈음에 이르러 개혁자들이 나타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고, 그럴 때마다 영성의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개혁 운동이 하나의 제도가 되고 기득권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성전 종교로 타락했다. 오늘날 개신교의 수많은 교파가 이 개혁과 타락의 순환을 증언한다. 지금 우리 한국 개신 교회는 교파를 막론하고 성전 종교의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으며, 따라서 성전 종교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영성 회복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3. 실천적 제안
위에서 설명한 성전 신학을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 건물에 대해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성전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내가 아는 어느 나라의 경우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회 건물을 성전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름은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특정한 이름은 특정한 해석을 반영하는 것이며, 일단 이름이 정해지면 그 이름에 담긴 해석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광주 사태’와 ‘광주 항쟁’과 ‘광주 의거’가 다 같은 사건을 가리키지만, 어느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의식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른 이름을 짓는 것은 바른 생각을 가지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런 점에서 ‘성전 건축’, ‘대 성전’, ‘지 성전’ 등의 용어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아울러, 교회 건물을 성전으로 칭하는 모든 찬송가와 찬양들을 경계해야 한다. 통일찬송가의 59장(“성전을 떠나가기 전”)이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찬양을 부르다 보면 무의식중에 그 사고에 지배당한다. ‘예배당’이라는 이름이 제일 바람직하다.
둘째, 예배당을 마련할 때 구약의 성전을 모델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교회를 위한 별도의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건물이 포화 상태인 경우, 기존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거나 다른 단체와 공유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성전은 없다’라는 입장이 교회 건물을 따로 짓는 것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의 규모나 일상적인 활동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독자 공간을 가지는 것은 반대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 지역 안에 지나치게 많은 예배당이 밀집되거나 혹은 예배당의 외관과 기능이 그 건물의 존재 이유를 뒷받침하지 못할 경우에 생긴다. 너무 사치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위화감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고, 정갈하고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 하나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보라!
미국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최근의 책에서 이탈리아 아씨시(Assisi)에 있는 프랜시스 성당(Basilica of St. Francis)을 방문한 경험을 회상한다. 적빈(赤貧)의 전도자 프랜시스가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그 장엄한 성당을 보면 “이것은 나와 상관없어!”라고 말할 것이라고, 보그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그 성당을 전적인 실수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성당은 우리에게 프랜시스를 생각나게 하며, 우리를 아씨시로 이끌고, 그가 품었던 비전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자신을 넘어 예수님과 하나님께 우리를 이끌어 더 큰 비전을 보게 한다.”(8) 나 개인적으로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당들을 ‘실수’로 여긴다. 오늘날 도심에서 목격하게 되는 많은 개신교 ‘실수들’처럼! 하지만 보그의 주장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과 친교를 위해 건물을 마련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되심'(“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공간적인 존재들이다. 따라서 공간을 어떻게 꾸미느냐는 우리의 정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존을 좀 더 즉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건물의 모든 요소에 상징성을 부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성전을 모델로 삼는 것만은 피할 일이다. 예배당의 비품들도 성전 비품을 모델로 삼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 안에는 성전 외에도 예배당 건축 디자인에 사용할 만한 상징들이 많다. 그런 것들을 창조적이고 예술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하면 충분하다. 우리의 눈을 건물로 고착시키는 디자인이 아니라 건물을 넘어 하나님을 보게 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셋째, 예배당이 성전이 아니라면, 믿음의 공동체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물을 개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때로, 거대한 예배당 건물들이 주중에 대부분 ‘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 비좁은 땅에서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마주치곤 한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임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비영리 단체의 활동을 적극 유치하고 장려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장소를 빌려 주고도 비판을 받는 경우를 당하지 않으려면, 장소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교회의 기득권을 지나치게 주장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넷째, 우리는 예배당의 실용적 차원과 신비적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장로님처럼 예배당을 신성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반대로 예배당의 신비적 차원을 전혀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로만 보이던 이 세상을 영적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꽃 한 송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지어진 건물에서도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빛은 ‘성전에서만 보는’ 빛이 아니라 열린 눈으로 볼 때 천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빛이다. 예배당은 그 용도와 특별한 디자인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직접적이고 용이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물론, 예배당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형제 자매들과의 참된 교제(‘코이노니아’)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그렇듯, 하나의 예술품으로서의 예배당은 우리의 영성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다 절실하게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영적 눈이 한층 밝아지고 영적 감각이 한층 예민해져야만 밖으로 나와 물질계 안에서 꿈틀거리는 영적 실체를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은 우리의 영적 순례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곳에서의 예배와 교육과 교제와 섬김을 통해 영적으로 충전된 후 삶의 현장으로 나와 동일한 영적 감각으로 일상의 일들을 섬겨야 한다. 다음 장에서 예배를 논할 때 보겠지만, 공적 예배는 참된 예배의 출발점일 뿐이다. 예배당에서의 그 자세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성전이 타락한 것은 그것이 영적 순례의 종착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섯째, 우리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믿음의 공동체)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또한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했던 히브리서 저자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성전은 없다!’라는 주장을 공적 예배를 폐하자는 뜻으로 곡해하지 말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함께 축하하고 기도하고 가르치셨고 다수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했었다. 바울도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eoffer)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전해주는 형제가 필요합니다.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형제의 말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보다 약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불확실하나, 형제의 말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확실합니다.”(9) 성전을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를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욱 귀중히 여기자는 뜻이다.
여섯째,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몸을 살피고 돌보는 것을 비신앙적인 것처럼 생각해 왔다. 영적 삶이란 육적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했다. 그래서 몸을 소홀히 하는 것 혹은 학대하는 것을 영적 삶의 한 방법처럼 오해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 몸을 섬기는 것이 영성 생활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스테파니 폴셀(Stephanie Paulsell)은 “몸을 섬기는 삶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적 요소다”(10)라 고 단언한다. 우리의 몸 섬김은 자기 숭배로 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섬기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최대한의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과 혼과 영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음을 기억하고, 몸의 모든 차원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째, 천하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다(렘 23:23-24; 시 139).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마 5:34-35)이다. 우리가 선 땅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창 28:17)이다. 하나님은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패트릭(Patrick)이 흉패에 새겨 넣었었다는 기도문이 우리의 신학(神學)이 되고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앞에 계신 하나님, 내 뒤에 계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내 밑에 계신 하나님, 내 위에 계신 하나님, 나의 우편에 계신 하나님, 나의 좌편에 계신 하나님, 내가 누운 곳에 계신 하나님, 내가 앉은 곳에 계신 하나님, 내가 일어선 곳에 계신 하나님!”(11) 시편 139편의 고백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피해 달아날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달아날 곳은 없지만 피할 방법은 하나 있다. 하나님의 현존에 눈을 감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 영적인 눈이 뜨여 있는 한, 하나님의 현존을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 기도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늘 살아가도록 우리 삶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 곁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또한 느낍니다. 하지만 저희 눈앞에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얼굴빛이 저희를 환하게 비추게 하소서. 주님의 그 깊은 광채가 저희가 빠져 있는 이 거대한 어둠의 가장 깊은 곳을 비추게 하소서.”(12) 눈을 떠 영적 세계를 환히 보고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므로, 다윗이 하나님께 늘 기도하던 단 하나의 소원, 즉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시 27:4)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주여, 이 일을 내게 이루소서!
(1) Tom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Minneapolis: Fortress, 1996), p. 435.
(2) C. S. Lewis, Mere Christianity (HarperSanFranscisco, 1952), p. 52.
(3) 신학도들을 위해 이 문제에 대한 참고서를 추천한다면 Sean Freyne, Galilee, Jesus and the Gospels: Literary Approaches and Historical Investigations (Philadelphia: Fortress, 1988)을 꼽겠다.
(4) 성경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병은 오늘날 의학 용어로 ‘한센 씨 병’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전염성이 있는 난치 피부병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한센 씨 병은 가장 무서운 종류의 피부병이었다.
(5) “Money-Changers in the Temple: The Mishnah’s Explanation”, NTS 35.
(6) Pierre Teilhard De Chardin, The Divine Milieu (HarperCollins, 1960), pp. 110-11.
(7) 지금의 문헌 증거로 볼 때, 대략 주후 150년 경부터 교회가 제도화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교권 체제는 구약의 성전 종교의 모델에 비추어 교리와 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주교는 대제사장이, 사제는 제사장이, 예배당은 성전이 그리고 예배는 제사가 되어 버렸다.
(8) Marcus J. Borg, The Heart of Christianity (HarperCollins, 2003), p. 98.
(9) 본 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기독교서회, 2000), 26쪽.
(10) Stephanie Paulsell, Honoring the Body (San Francisco: Jossey-Bass, 2002), p. 10.
(11) 패트릭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므로 글의 일관성을 위해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꿨다.
(12) Teilhard De Chardin, The Divine Milieu, p. 106. 마지막 한 문장은 생략했다.
Feb 1, 2004 | 삶과 신앙/김영봉의 일상 속의 성소
이코스타 2004년 2월
시작하는 말
내가 제일 거북하게 느끼는 묵도송(頌)이 있다. “주는 성전에 거하시니 주 앞에서 잠잠해.” 어느 교회에서든 흔히 들을 수 있는 묵도송이다. 한때 나는 이 묵도송을 좋아했다. 이 찬양을 들으면서 “주여, 제가 주 앞에 왔습니다. 저를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하곤 했다. 예배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찬양이 또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언젠가 문득 ‘이게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을 생각한다면, 믿는 자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인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더 충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배당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이고, 예배당을 나가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의식적으로 그렇게 믿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예배당에 앉아 기도 드릴 때마다 내 마음은 “일 주일 동안 세상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아버지 앞에 왔습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 무의식중에 하나님이 계신 예배당과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나누어 생각했던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그렇거니’하고 살다가 언젠가 문득 정신이 든 것이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 예배당 건물이 갇히실 리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시 121:4), “너의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며”(시 121:5),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씀이 옳다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우리 오른편에 계시어 지켜 주신다. 그렇다면 왜 나는 예배당 안에 들어가 기도할 때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바깥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엄마 품에 안기는 것 같은 느낌을 가져왔는가? 물론, 그 느낌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예배당에 들어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안식을 느끼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배당을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하나님 곁을 떠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 일 주일 동안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마치 주일에 하나님을 뵐 때까지 하나님 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내가 어릴 적부터 배우며 자라온 교회 전통에 의해 길러진 의식이다. 중학생 때 교회에서 잊혀지니 않는 일을 겪었다. 한 겨울 어느 날이었다. 추운 몸을 녹이려고 교회 벽에 있는 스팀(‘라디에이터’가 정식 이름일 것이다)에 걸터앉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장로님 한 분이 다가와 호통을 치셨다. 얼마나 심하게 혼이 났던지, 지금도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분의 논지는 이러했다. “이 건물은 성전이야. 다른 건물과 달라.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집이란 말이야. 성전 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성물(聖物)이야. 거룩한 물건이란 말이야. 거룩한 물건을 함부로 하면 되겠어? 하나 하나 귀하게 다뤄야 해. 성물에 걸터앉는 법이 어디 있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분의 논리대로 하면 ‘성전’ 안에 있던 우리는 ‘성인'(聖人)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그 장로님도 성인인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혼내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억지 논리를 펴자면, ‘속인’이 ‘성물’에 걸터앉으면 안되겠지만 ‘성인’이 ‘성물’에 걸터앉는 것이 뭐 잘못인가? 물론, 그것은 걸터앉으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니,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하지만 사춘기의 어린 영혼은 분명히 스팀보다 아니 예배당 건물 전체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그 장로님은 성물에만 생각이 갇히는 바람에 어린 영혼 하나가 얼마나 귀한지를 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거듭 겪으면서 ‘예배당’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깊이 내 안에 각인되었고, 나는 여러 해 동안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세상과 성전을 오가며 살았다. 그 인식이 잘못된 것을 깨달은 것은 부끄럽게도 목사가 된 지 한 참 후의 일이었다. 늦게라도 눈을 뜬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하지만 지금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성전을 뚜렷이 갈라놓고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오해를 제거하는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건만, 실상은 목회자들이 이 오해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교 교수 시절, 나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목회자 세미나에 초청을 받을 때마다 이 문제를 역설했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하고, 예배당을 성전으로 오해했을 경우 생기는 신앙적 문제들을 설명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목회자들에게 있으니, 교인들의 의식 변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과정 중에, 나는 내 호소가 외면당하는 것을 자주 느끼곤 했다. 목회자들의 반응은 대개 이러했다. ‘그렇게 가르치면 집회에 나오는 열심이 떨어집니다.’ ‘예배당을 짓자고 하면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짓자고 해야 헌금을 합니다.’ ‘성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정성을 다합니다. 예배당이라고 하면 마음이 소홀해집니다.’
이해할 만하다.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절박한 사정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주 원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감 때문에 고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실천적 고려 때문에 성전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이 무조건 정성을 다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정성을 바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정성이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대한 잘못된 사고는 마침내 각 사람의 영성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 시킨다. 그 치명적 해악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실천적인 유익’을 어느 정도 손해 보더라도 제대로 가르칠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문제의 심각성에 비례하여 성전에 대해 꽤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예수님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성전에 대해 어떻게 믿고 실천해 왔는지, 그 역사를 더듬어 볼 것이다. 배경에 따라, 이 역사 이야기를 지루하게 느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정도 참고 극복해 주기 바란다. 사안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1. 성전: 그 오해의 역사
“여기가 바로!”: 야곱의 성전
성전에 대한 오해의 역사는 매우 뿌리깊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처음으로 지었고, 솔로몬의 성전은 모세의 성막에 뿌리를 두고 있고, 모세의 성막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면, 가인과 아벨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린 것으로 나오지만(창 4:1-5), 제사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누리는 영예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관습은 대대손손 이어졌다. 노아는 홍수 후에 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창 8:20), 이 전통은 족장들에게도 이어졌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단을 쌓는 데 정해진 곳은 없었다. 하나님의 현존과 은혜를 느낄 때마다 그들은 즉시 돌을 쌓아 제사를 드렸다.
야곱의 벧엘 이야기가 전형적인 예다.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유랑을 떠난 야곱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막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했던 야곱. 그의 돌베개는 그의 실존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암시한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이 자신의 처지를 돌베개에 비유하곤 했던 것 아닌가? 야곱은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깜빡 잠에 빠지고, 그 짧은 순간에 꿈을 꾼다. 그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을 깨닫는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창 28:16-17). 마지막 부분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주 제사도 드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이 혹시 계시다면 우주 저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일상 생활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바꿔야 한다고 믿고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인생 역전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제 벧엘 광야에서 한 밤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난생 처음, 영적인 눈이 뜨였다.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행했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도 몰래, 혼자서 음흉한 흉계를 짜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다는 말이 아닌가? 이 세상에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곳은 아무 곳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아 두렵도다, 이 곳이여!”라고 탄식했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 통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 참 후, 마음을 수습한 야곱은 베고 자던 돌베개를 세워 제단을 만들어 부모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다.
애당초, 제사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곳에서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 제사 드리는 날도, 제사 드리는 곳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언제든, 어디서든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에 감복할 때, 즉석에서 단을 쌓아 경배를 드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말하자면, 천하 어디나 성전이 될 수 있었다. 어디든 멈추어 경배 드리면 그곳이 성전이 되었다. 아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어디나 성전인 셈이었다.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그들 중에 거할 성소”: 모세의 성막
모세는 이집트로부터 백성들을 인도하여 40년 동안 광야 여행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陣)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을 이끄신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신다(출 13:21-22). 그분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출 25:8)를 짓도록 명령하신 것은 한참 후 시내 산에서의 일이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무슨 뜻인가? 성소를 짓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목적은 성소가 아니라 백성들이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임재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하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내려 온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짓는다. 공사를 다 마치고 하나님께 봉헌했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고(출 40:34),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다”(40:38). 이로써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증거였다. 60만이라는 어마 어마한 무리가 광야 여행에서 하나의 무리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성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을 떠나가려 하지 않았다. 성막에서 멀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갔다. 사실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성막이 가는 곳으로 백성들이 따라 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백성들이 옮겨갔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이끄시는 방향으로 성막을 이동하게 했고, 성막이 가는 곳으로 백성들은 따라갔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어느 한 장소에 고정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이동성 성막’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성막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저 안에 계시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없었을 리 없다!) 그는 큰 오해를 한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성막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것이 성막을 짓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다윗의 갸륵한 열심
40년의 광야 방랑 이후 그리고 토착민과의 힘겨운 싸움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다. 그 이후로 ‘이동성 성막’은 한 장소에 머물러 있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백성들의 제사를 돕는다. 백성들은 지파에 따라 땅을 분배받아 널리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항상 성막을 보고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멀리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축제를 위해 성막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해야 했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늘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성막을 찾아가 제사를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함께 하는 성막을 바라보며 “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했는데, 그것이 한 곳에 고정되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기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막은 그들 자신을 제대로 보라는 상징이었다. 성막을 보고는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성막을 보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면 ‘여기’에도 계실 수 있는가? 원리상으로는 그렇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생각은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는 뜻으로 아주 쉽게 곡해되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막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고 자나깨나 그곳을 사모하고 그리워했다. 그와 같은 심정이 시편에 자주 표현되어 있다. 가령, 시편 84편은 성소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보여준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이동성 성막을 붙박이 성전으로 바꿀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엄청난 피를 대가로 치루고 영광의 제국을 이룩했을 때, 그는 갸륵한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호화로운 궁전과 이미 수 백 년 지난 낡은 성막을 생각하고는, 그것을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대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선지자 나단을 만나자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 7:2).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내 주 하나님은 저 허름한 장막 가운데 계시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주님께 좋은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뜻이다. 참, 갸륵한 말이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이렇게 답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 7:6-7). 처음부터 하나님의 관심은 호화로운 성전을 짓는 데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정도로 지어지면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값비싸게 지어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느냐에 있다.
다윗이 성소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면 이런 ‘갸륵한’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성막을 하나님의 거처로 오해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집을 지어 드리고 싶어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던”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자신의 궁전을 그렇게 호화롭게 짓지 않았을 것이다. 궁전은 그곳이 왕의 처소임을 드러내는 상징적 건물이면 충분했다. ‘백향목’은 당시로는 레바논에서 수입해 온 가장 값비싼 건축 자재였다. 오늘 우리 식으로 하자면 이탈리아제 대리석같은 것이다. 당시로서 최고의 자재로 지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궁전을 그렇게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지은 것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일이 아니다. 욕심의 소산이다. 그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따르는 사람이었다면, 왕으로서의 집무를 보는 데 편리한 실용적이고 검소한 궁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욕심껏 호화로운 궁을 지어 놓고는 양심에 가책이 되자 하나님께 호화로운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는 생각을 지어냈다. (1)
하나님은 보기 좋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신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호화로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7장의 후반부로 가면 더 흥미로운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1절). 말뜻은 이런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정말 집이 필요한 사람은 너 다윗이고, 그 집을 지을 사람은 바로 나 여호와다.’ 다윗에게는 이미 ‘백향목 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집이 필요한 사람은 너 다윗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로 ‘집’은 ‘나라’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이 정말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호화로운 궁전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였다는 뜻이다. 영원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로 불필요하게 국력을 낭비하지 말라. 너는 오직 영원한 나라를 이루는 데 관심을 가져라. 너로서는 그 일을 하지 못한다. 나의 뜻을 따르라. 내가 영원한 나라를 세울 것이다. 너는 나의 종으로서 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라.’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 솔로몬의 오해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답하시면서 “네 수한이 차셔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2-14)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이 예언이 자기를 두고 한 말씀인 줄로 착각한다. 때는 솔로몬이 태평 성대를 이루었을 시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영원한 나라’가 자신에게 이루어진 줄로 알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교만의 첫 번째 증상은 자기 착각이라 하지 않던가? 겸손은 자기를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리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왕상 5:5-6).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백향목 성전을 지을 셈이었다. 아버지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지을 셈이었다. 그는 칠년 동안의 대 공사를 통해 성전을 완성한다. 하나님께서는 내내 침묵하시다가 마지막에 솔로몬에서 나타나셔서 율법을 잘 지키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신다(왕상 6:11-13). 사후 추인 형식으로 그의 노력을 승인하신 것이다.
성전을 다 짓고 언약궤를 옮기면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왕상 8:12-13).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시면서 주신 애당초의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잊혀져 버리고,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로 굳어져 버린다. 이후에 성전을 봉헌하면서 솔로몬이 드린 기도(왕상 8;27-53)에서도 ‘여기 계신 하나님’ 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성소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30, 32, 36, 39, 43, 45, 49절) “그 이름을 성전에 두셨다”(29절)고 말할 뿐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지상에 오직 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만 그 이름을 두셨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뵐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기 계신 분’이지 더 이상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아니다!
솔로몬이 나단의 예언을 오해했다면, 그 예언이 말하는 ‘다윗의 자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다시 한 번 그 예언을 보자.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앞에서 말했듯이, 히브리어에서 ‘집’은 ‘나라’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한다’는 말씀은 실제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하나님을 위해 나라를 세울 것이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영원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의 나라는 영원하지 못했다. 다윗에게서 난 그 어떤 자손도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나라를 세우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영원하게 만들어 주셨다. 이렇게 보면, 이 예언은 누군가가 후에 성전을 지으리라는 예언이 아니다! 누군가가 후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데, 하나님이 그 나라를 영원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은 처음부터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모세 때에 지은 성막 형태로 그대로 두어도 되었다. 아니, 그렇게 두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었던 성막을 건물로 대치하고 한 장소에 붙박이로 세워둔 것, 그것은 인간의 오해와 욕심의 산물이요, 그 이후로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빚어낸 문제의 원천이 되었다. 생각해 보라. 이 거대한 성전 종교 체제를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했겠는가?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하면서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를 잡았음을 기억해 보라(왕상 8:63). 건물 유지 비용,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인건비, 끊임없이 이어졌던 제사에 따른 비용 등 몇 가지만 따져도 막대한 돈이 필요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성전에 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일찍이, 도시 예루살렘이 번영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연안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한 것은 이 거대한 성전 종교 때문이었음일 지적한 바 있다. 이 거대한 부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해 교권을 가진 자들은 온갖 부정을 동원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왕국 분열 이후
예루살렘에 붙박이 성전이 지어진 후,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남북으로 갈라진다. 그의 신하 중 하나였던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다. 솔로몬의 나라는 영원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왕상 11:9)고 설명한다. 솔로몬은 나단의 예언에서 말하는 그 ‘다윗 자손’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때로부터 두 왕국의 끊임없는 갈등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남북의 갈등을 이제 50년 동안 겪어 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200년 동안(두 왕국의 분열–주전 930년–으로부터 북왕국의 멸망–주전 721년–까지) 겪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갈등과 반목의 감정은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한 이후에도 수 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나라를 반으로 갈라 분리해 나간 여로보암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하나 발견한다. 자신의 백성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 남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자주 왕래한다는 사실이다. 여로보암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남왕국]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가리로다”(왕상 12:27).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북왕국 백성들은 제사 드리기 위해 그곳으로 가야한다고 믿었다. 그러는 와중에 자기 백성들이 남왕국 유다에게 더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을 여러보암은 우려했다. 그는 구테타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문제가 더욱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자기 영토의 남쪽 끝에 있는 벧엘과 북쪽 끝에 있는 단에 제단을 세우고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을 설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명령이 되었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는다.
이로써 북왕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이제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이다. 벧엘이나 단에 있는 제단에 하나님이 계실 리 없었다. 게다가, 여호와를 섬기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금송아지 앞에 제사를 드리겠는가? 그러니 이제 하나님을 뵐 희망을 모두 접고 포기할 밖에! 만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만일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만일 성전은 하나님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들은 하나님 만나기를 포기하고 살다가 결국 가나안 토속 신앙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 산당이 많이 지어졌던 것은 그들에게 우상 숭배의 속성이 특별히 강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곳에서는 언제나 우상 숭배가 무성히 자라나는 법이다.
남왕국 유다 백성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주전 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에도, 남왕국 유다 백성들은 한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문제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 남왕국 유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키고 많은 유다인들을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포로 생활을 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본토에 남겨진 사람들은 폐허가 된 성전터를 보면서 ‘하나님의 부재’를 목격했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멀어진만큼 하나님께로부터도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시편 137편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눈물 어린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이렇듯 간절하게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그리워했다. 그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었다.
539년, 새로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정책에 따라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한다. 그들이 귀환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솔로몬이 지었던 옛 성전의 위용을 회복할만한 국력이 없었다. 힘닿는 대로 정성을 다했으나, 그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북쪽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는 데 힘을 합침으로 신앙적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이 피가 이미 이방인들의 ‘더러운 피’와 섞였다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했다. 북쪽 사람들은 적개심에 불타 예루살렘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동시에, 사마리아에 있던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지어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시온 성전을 중심으로, 북쪽 사람들(2)은 그리심 산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3)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성전과 제도와 신조를 만들어 놓고는 자신의 종교에 더 정통성이 있다고 다투었다. 북쪽 사람들은 지역적 위치 때문에 그리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만 ‘혹시 하나님이 예루살렘 시온 성전에만 계시면 어떡하지?’라는 의구심에 자주 사로잡혔다. 남쪽 사람들은 시온 성전에 정통성이 있음을 믿었지만, 여전히 ‘혹시 하나님이 그리심 산에 계시다면?’이라는 의문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드리는 제사가 유효하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드려야 하는데, 어디에 하나님이 계신지 확신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불안함!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신앙적 고민이었다. 반면, 교권을 쥔 사람들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자기들의 성전에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고안을 해 냈고 다양한 방식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심하게 왜곡되고 진리는 외면 당했다. 이 같은 타락과 착취를 참다못해 성전 종교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갱신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4) 그러면 그럴수록 보통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당시는 가히 영적 암흑기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상태였다.
오해의 역사의 의미
이것이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온 성전과 성전 신학의 간단한 역사다. 신학(神學)은 삶의 문제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의 변천 과정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오해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독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것을 각오하고 장황하게 역사적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두렵도다 이곳이여!”라는 야곱의 깨달음처럼, 우리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께 경배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제단!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 상징으로 시작된 성막! 그러나 그것이 한 장소에 고정된 건물로 변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 성전! 이로 인해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 그들 중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하늘에 계시어 성전에 이름만 두신 하나님을 생각했던 백성들! 하나님 없는 세상에 살아야만 했던 그들의 방황과 갈증!
반면, 이러한 왜곡된 신앙을 더욱 강화시키며 종교적 착취를 자행하던 제사장들! 성전 제도를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그 많은 교리와 신조들! 나중에는 ‘보물 창고’로 여겨질 만큼 거대한 부를 축적한 성전! 그 부를 중심으로 기생했던 많은 종교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타락과 위선!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행되었던 은밀한 음모와 결탁! 그 결과로 일반 백성들이 당해야 했던 무거운 짐! 그 짐 아래에서 신음하며 시들어가던 그들의 영! 하나님께 이르는 안내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존재가 된 성전, 교리 그리고 교권! 그 모든 참상을 지켜보며 아파하시던 하나님!
이 총체적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살아 계신 여호와 신앙이 ‘성전 종교’로 고착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아,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로 그쳤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하게도, 이 타락의 역사는 그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선교 2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총체적인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교회의 사고와 행태에서 이 오류를 목격한다. 그렇다면, 이 성전 종교에 대해 예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이것 역시 간단히 설명할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중요성에서 보거나 복잡성에서 볼 때, 독자들은 또 한 번의 지루한 독서를 각오해야만 이 문제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계속)
(1) 사업가인 어느 교인이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면서 자신의 목사에게도 똑 같은 차를 사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이 경우, 목사는 그 차를 받아도 될까 아니면 사양하는 것이 옳을까? 다윗의 제안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해 보면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2) 어느 때부터인가 북쪽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평양사람들’이라고부르는것과 같은 셈이다. 남쪽 사람들은 남왕국 형성의 중심 세력이었던 유다 지파의 이름을 따서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3)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발전된 여호와 신앙을 ‘유대교’라고 부르고, 그리심 성전을 중심으로 발전된 여호와 신앙을 ‘사마리아교’라고 부른다. 남쪽 사람들은 계속 혈통과 전통을 지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세력의 유대 민족이 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 비해 혈통과 전통을 지키려는 열심이 부족했던지 지금 그 자취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해졌다. 아직도 그리심 산을 순례하는 사마리아교인들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4) 에쎈파라 불리는 광야 공동체가 대표적인 예였다. 이 파는 예루살렘 성전의 효력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창안을 부르짖었다. 에쎈파의 하나였던 쿰란 공동체의 문서(쿰란 문서 혹은 사해 문서)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자신들의 공동체가 참된 성전이라는 주장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