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제 1 떡, 돌을 떡으로… 전쟁의 시작 – 존재냐 소유냐?(1)

떡?


떡은 쌀 또는 다른 곡식을 곱게 빻아 반죽하여 굽거나 쪄서 만든 가공식품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관혼상제의 예식이나 명절에 빠지지 않고 상위에 등장해온 주식의 일종이다. 찹쌀떡, 인절미, 절편, 시루떡, 가래떡, 송편, 무지개떡, 쑥떡, 흰떡, 술떡, 개떡, 감떡 등, 떡의 종류도 다양하다. 일상적 주식인 밥보다는 특별한 맛과 품격을 지니고 있기에 잔치와 기쁨을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어 옛날 한양 북쪽에는 문관 출신의 고관들이 살아 주로 떡을 많이 먹었고 남산어귀에는 무관들이 살아 술을 많이 마신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떡은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주로 해 먹는 부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음식이기도 했다.


얼마 전 추석을 맞이하여 이곳 중국 연변에서도 송편을 빚어먹었다. 고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으로 전국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의 추석은 의외로 단촐하고 형식만 남아있는 느낌이다. 추석 당일도 휴일이 아니어서 학교에서는 정상 근무와 강의를 계속하였다. 중국인들은 추석이면 팥이나 여러 가지 속이 들어있는 월병이라는 둥근 떡을 서로 선물로 주고받으며 먹는다.


성경에는 떡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떡은 서양인들의 주식인 빵(bread)을 대신하여 쓰였기에 단순히 우리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먹을 양식, 즉 밥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 그러나, 더러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드는 유월절 음식 무교병이나 성막 안의 성소에 올리는 진설병을 생각하면 특별한 목적으로 만든 떡이 밥보다 더 적합한 번역일 수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떡을 좋아하여 별명이 떡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성경을 읽으면 떡이 먼저 눈에 뜨인다. 성경은 온통 떡 이야기로 가득 찬 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 이야기인데….. 예수가 곧 자신을 떡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삼단 논법에 의하여 성경은 떡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제 성경에 나타난 떡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난 떡들 중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12개의 떡을 골라내어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

세상은 전쟁터이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역사(historia)라는 어원을 만들어낸 희랍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네스가 쓴 역사서가 각기 페르샤와 펠레폰네소스의 전쟁사(戰爭史)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시사한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은 한번도 전쟁이 없는 세상을 누려보지 못했다. 지금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려지는 이스라엘 땅에는 지난 4,000년 동안 평균 44년마다 한번씩 전쟁이 일어났다고 역사학자들은 진술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전쟁, 민족과 민족 사이의 전쟁,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저항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인해 피흘려 왔다. 인간은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 어느 한 순간에도 시대적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 일이 없었다. 전쟁과 기근, 끝없이 지속되는 자연 재해, 그리고 사회적 모순과 폭력, 독재와 압정에 시달리며 역사는 흘러왔다. 결국 세계의 역사란 자신들만의 정치 경제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웃을 갈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인간들이 연출해 낸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전쟁마당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말이다.
창조 직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되었던 피조계……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무엇하나 서로 가릴 것이 없는 육적, 영적인 투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 환경 사이에서도 서로 친화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묘사된 창세기 2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해 보라. 그곳은 완벽한 평화의 나라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 즉 샬롬(shalom)으로 통치되는 세계였다. 그 아름다운 에덴 동산이 어째서 파괴되었는가? 그리고 온 세상이 전쟁 상황으로 돌변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결국 우리는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선악과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또 그 지겨운 선악과 이야기? 하고 고개를 내저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싫더라도 할 수 없다. 당신의 인내심을 잠시만 빌려달라. 선악과 문제를 다시 복습할 수 있도록…… 만일 전쟁의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선악과의 현장에 당신은 다시 서야만 한다. 선악과는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요 이 전쟁 상황을 일으킨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마침내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부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temptation)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가 받았던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마귀는 이 문제를 던졌을까?


굶주림…
그것은 나에게 조금은 생소한 개념이다.
배가 고파서 눈물 흘렸던 기억이 없는 세대들에게는 추상적인 단어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날마다 세끼의 식탁을 마주하며 필요 이상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그 행위를 덧없이 반복하고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떡을 소외시키고 단순히 소유해버린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무수히 존재하며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 비록 추상적일지라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 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가정해보면 곧 깨닫게 된다. 그들에게는 떡 자체가 존재양식(存在樣式)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먹을 양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존재의 법칙이다. 설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먹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 설정 자체가 인간을 자기 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로서 인식하도록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억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꺠닫게 하는 은혜와 자비의 계획이다. (실상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에덴 동산을 통해 먹을 양식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고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에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이 넘치도록 충분히 많았다는 것이다. [2] 따라서 처음에는 물질이 소유 가치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써 주어진 것이었다. 그 시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존재 자체의 의미를 생동감 있게 지니고 있었다. 물질이 소유 가치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발생한 퇴보(degradation)일 뿐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가 떡을 부분적이나마 존재 가치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더 에덴에, 아니 천국에 가깝다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은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있도록 풍성한 자유도 함께 주었다. 문제는 그곳에 금단의 열매, 선악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직 선악과만이 인간에게 먹을 수 없도록 금지된 과일이었다. 따라서 선악과의 문제는 결코 육신의 양식의 필요에서 비롯된 배고픔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선악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시금석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배고픔으로 굶주린 탓에 선악과를 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육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영적인 문제요,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


이 대목에서 사탄이 등장한다. 사탄은 피조물로서 최초로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을 깨뜨리고 튀어나간 타락한 천사였다. 사탄의 존재는 하나님의 위치를 탐하고자하는 데에서 그 속성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모든 관심사의 초점이다. 따라서 사탄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위치를 빼앗고자 총력전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존재 법칙을 정해놓은 삶의 이정표였다. 마땅히 인정해야할 하나님의 위치를 깨닫고 시인하는 표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은 사탄에게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탄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다. 사탄은 지혜롭다. 그러나 사탄의 지혜는 악하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를 악하게 사용했다는 뜻이다.


사탄이 처음 시도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깊은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사탄은 아름다운(?) 뱀의 모습으로 다가선다. 뱀이 아름답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탄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는 뱀은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첫 미끼를 던진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은 공교하게 계산된 절묘한 질문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불합리하고 인간에게 억압적인 존재로 비추어질 수 있도록 살짝 그 느낌을 뿌리는 것이다. 최음제처럼…… 사실은 정반대다. 하나님은 대단히 합리적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 너그럽고 풍요로운 분이셨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모두 인간에게 맡기며 마음껏 그것을 취하고 가꾸고 다스리도록 백지 수표를 끊어주신 분이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사탄의 그 술수에 넘어가고 만다.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시킨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대신 사탄이 집어넣은 불신앙이 들어가 뒤틀린 말이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과만을 금하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이 순서와 내용이 바뀌어있다. 풍요롭게 주어졌던 자유는 제한적으로 표현되었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확언은 약화되었다. 그 과일을 먹을 경우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설정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 내용이 삽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지지도 말라…… 이 말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고 싶어하는 여자의 의중을 드러낸 첨언이었다. 이미 여자의 마음은 선악과에 빼앗겨 그 손이 절반 이상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가 미끼에 걸려든 것을 확인한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제는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거짓말을 하고 나선다. 그럴듯한 거짓말로 마지막 미끼를 던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마지막 문장이다.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시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선악과는 먹음직하였고, 보암직하였으며 정말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에 손을 대고 만다. 선악과 앞에서 하와가 느꼈던 이 세 가지 유혹이 결국 모든 인간에게 끊임없이 미치고 있는 본질적인 유혹이요 시험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원죄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못난 조상 아담과 하와 탓에 문제 덩어리를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 그 범죄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었으며 하와가 손을 뻗어 선악과를 따는 그 순간 우리도 함께 죄를 범했다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침내 불순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그 행위 이면에는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불신앙과 교만과 탐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완벽했던 평화는 깨지고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 예고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깨어진 평화…… 그것은 기다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네 가지 측면의 분리(Separation)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시작된 깨어진 관계는 곧바로 자기 내면과의 분리를 일으켰으며, 사람들 사이의 분리, 그리고 자연과의 분리로 확장되었다.


◆ 전쟁(The War)
= Broken Peace (with God → with Self → with people → with nature)


이 모든 전쟁의 이면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죄 (Sin) : 불신앙 → 교만 → 탐심 → 불순종 → 전쟁
▼ 치유(Healing) : 믿음 → 회개 → 자유함 → 순종 → 평화


따라서 이 전쟁은 인간의 행위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근본 뿌리의 출발점인 불신앙의 문제가 믿음으로 다시 회복되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악성 질환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왜 십자가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십자가는 불신앙의 늪으로 떨어진 인간을 구원키 위해 하나님이 다시 한번 설정해 놓은 제 2의 선악과 문제인 것이다. 그 십자가를 붙들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교만으로부터 다시 내려올 수 있으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껴졌던 그 탐심의 우상 숭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처음부터 원하셨던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선악과에서 나타났던 세 가지 유혹이 있다. (창세기 3장 6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이 세 가지 유혹이야말로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유혹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덫에 빠져드는 순간 사탄은 항상 이 세 가지 무기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예수가 광야에서 받았던 세 가지 시험 또한 같은 내용이었다.(마태복음 4장 1-11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엎드려 절하라. 내가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마.


이 세가지 유혹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다시 요약하고 있다. (요한 1서 2장 16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잘 알려진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이 주제를 (돈, 섹스, 권력)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3] 더러는 육신의 정욕은 식욕 또는 성욕을 포함한 원초적 본능적 물질욕을 의미하고, 안목의 정욕은 남의 눈에 더 좋게 보이고자 하는 지위, 학위 같은 명예욕을 의미하며, 이생의 자랑은 최종적으로 세상의 영광을 차지하고자 하는 권력욕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돈, 성, 명예, 권력) 어느 하나 인간에게 뿌리치기 쉬운 만만한 상대는 없다. 한번 그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탐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철저한 우상으로 바뀌고 만다. 그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이 모든 유혹이 그 첫 출발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은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그 말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다름 아닌 존재의 문제를 소유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사단의 간교한 계략에서 시작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선악과를 교묘히 소유의 대상으로 환원해버린 사단은 동일한 수법으로 예수께 다가와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라.”


에덴의 풍요로움 속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보다도 예수는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있었다. 40일 간의 금식 가운데 찾아온 굶주림의 고통…,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처한 전쟁터의 비극적 상황이다. 그 속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은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만일 예수처럼 우리가 돌을 떡으로 바꿀 수 있을만한 능력과 위치에 놓여 있다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부정 행위, 청탁, 업무 사기, 배임, 뇌물 수수, 비자금, 횡령, 불의와 착취, 자원 남용, 생태계 파괴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은 절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돌은 돌이고 떡은 떡이다.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듯이 돌이 떡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돌을 떡으로 바꾸는 행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을 깨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겠다는 대단한 월권 행위다. 금지된 것을 행함으로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결국 하나님 위에 자신을 두고 인생의 의사 결정권을 스스로 취하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왕으로, 주인으로 등극한 것이다. 하나님 위에 다른 어떤 것도 두지 말라는 제 1 계명을 어긴 것이다.


제 1 계명을 어기고 나면 곧바로 인간은 우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제 2 계명을 범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반드시 섬겨야할 다른 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형상화해서 나타난 것들이 바로 물신(物神)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모셔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풍요와 안녕을 빈다. 주식 시세 앞에서 기원하며 예배를 드리는 현대인들과 금송아지 앞에서 절하는 고대인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신을 섬기기 시작한 인간들은 이제 거침없이 다른 계명들을 어기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든지 안식일을 범하든지 떡을 더 쥐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결국 돈 때문에 부모를 무자비하게 대하고 더러는 살해까지 하고, 돈으로 성을 사고 팔며 간음을 자행한다. 남의 재물을 보이지 않게 횡령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거짓 증거를 댄다. 그의 눈에는 탐심으로 가득하여 이웃의 재물이 모두 이제 자기 소유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떡의 문제가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인 까닭은 바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십계명의 율법을 주어야만 했던 당위성을 거꾸로 유추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 풍성한 에덴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핍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비록 타락한 인간 사회이지만,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그들을 돌보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과 이기심은 끊임없이 빈부의 격차를 벌려놓으며 가난을 확대 재생산한다. 자신의 배만 불리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회에서는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자살로 인생을 마감케 한다. 빈곤에 의한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살인이다. 존재를 소유로 바꾸고 나면 그 소유가 존재를 소멸시키고 만다.


타락… 실락원의 순간, 인간은 에덴의 풍요를 상실하고 가난하게 되었다. 존재보다 소유를 선택하였지만 그 결과는 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이 직면하게 된 가난은 단순한 육체적 물질적 가난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단절에서 비롯된 영적 가난, 그리고 인간 사회의 소외 현상에서 비롯된 억압과 핍박의 사회적 가난, 자연과의 불화에서 자초한 생태학적 가난으로까지 이어졌다. 총체적 가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다시 천국으로 부르신다. 예수를 통한 복음, 곧 천국으로의 초대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와 풍성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누린 우리들에게도 그 일을 위한 동역자로 함께 일하도록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으로 인생 후반기 자신의 사상을 종합한 에리히 프롬이란 유태인 사회 심리학자가 있다. 그는 소유의 문제보다는 존재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며 중요하다는 결론에는 이르렀던 사람이다. 그러나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고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에서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소유의 나라>도 <신의 나라>도 아닌 <존재의 나라>로 스스로 돌아갈 것을 철저한 인본주의적 사고를 통해 권면하는 그는 놀랍게도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는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과 떡을 내세운 소유의 문제로 도전하는 사탄을 일성(一聲)으로 물리치며 예수가 맞받아친 말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 : 4)”


예수에게는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해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떡이었다.










Footnotes :

[1] 히브리인의 떡은 우리의 밥, 서구인의 빵과 마찬가지의 주식을 의미한다. 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헴](lechem)은, [양식], [식물], [음식]등으로도 많이 사용된 말이고, 그리스어 [아르토스](artos)는 [양식]으로 많이 번역된 말이다.


[2] 이 사실은 60억이 넘는 인구로 늘어난 현재의 지구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굶주림과 기아의 문제는 절대 양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물질의 분배가 잘못된 데에서 비롯된 사회구조적 문제이다.


[3] Money, Sex & Power, R. Foster, Edward England Books, 1985

[정진호] 프롤로그 – 마흔 다섯의 헌신


is deck same as chapo?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출한 후 승리감에 도취된 채 돌아오는 아브라함……
자신이 빼앗긴 부하와 재물을 되찾기 위한 계략을 품고 아브라함을 기다리는 사악한 소돔왕 베라…… 그들 사이를 가르고 떡과 포도주를 들고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 멜기세댁……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은 표지 그림이라고 할까?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는 죽음 가운데 놓인 우리들의 조카 롯을 구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쟁의 전리품을 가득안고 기쁨에 가득 차서 승전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고 계략이 뛰어난 사악한 소돔왕이 우리와 한판 승부를 걸고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창과 칼의 전쟁은 아니다. 21세기는 경제 전쟁의 시대다. 오히려 떡을 사이에 둔 비즈니스의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터 안에서 살아간다. 국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분쟁과 전쟁 상황도 그 이면에는 냉혹한 떡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순간 순간 선택해야할 수많은 떡들이 협상 테이블에 놓여있다. 소돔왕 베라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겉으로 멋들어지게 보이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내가 너에게 내 떡을 주마. 그리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그리고 나에게 절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마. 우리는 결코 그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 않다. 항상 그 유혹에 넘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떡을 취하고 소돔왕과 더불어 화친하고 마침내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떡의 문제는 불신자뿐 아니라 크리스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떡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떡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도승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가꾸고 변화시켜야할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한, 내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떡의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거꾸로 영향받아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형 부정부패 사건마다 연루된 크리스천의 부끄러운 모습이 연일 보도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라. 떡의 문제에는 목사든 선교사든 평신도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떡이란 돈, 명예, 권력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물질을 지칭한다.)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끝없는 전쟁…… 떡의 전쟁……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떡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전쟁의 발생 원인과 진행 상황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대처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제 포탄이 빗발치고 화염이 넘실거리는 그 전쟁터 안으로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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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8월 9일, 나는 그토록 밟고 싶었던 북녘 땅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과기대 건립을 위한 협의를 위해 김진경 연변과기대 총장, 김동호 높은뜻 숭의 교회 목사를 앞세운 방문단이 평양 순안 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수년 간 네 차례의 방북 시도 끝에 얻은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넘쳤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경발 고려항공에 우리와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이념과 대립으로 막혀있던 그 땅도 마침내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서서히 휩싸이며 문을 열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들에게도 결국 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기 위해 시작하는 평양과기대 프로젝트…… 그러나 그것을 철저히 경제적 떡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맞이하는 북측의 당국자들…… 그것은 실로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이 맞부딪치는 첨예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평양 방문은 나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방북 전날, 갑상선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종합검진 결과를 전해 듣고 급히 조직검사를 받았다. 혹시 악성종양일수도 있으니 받고 떠나라는 의사의 충고 때문이었다. 비록 갑상선 암은 손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병원 침상에 들어 누워 검사를 받는 순간부터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생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고, 지나온 시간들과 남기고 온 가족을 깊이 생각하며 평양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평양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런 일을 통해 인생에 대하여 반성토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여섯 살 짜리 어린 데이빗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공연한 상상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만일 정말 암이라면……?
그리고 내가 죽게 된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깝거나 후회되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지난 10여 년을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그 추억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두고 갈 가족에게 상처를 안길 것을 상상하니 그것이 가장 아팠다. 그것도 어린 아들 데이빗에게 어떻게……?
귀국 길에 인천 공항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친구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양성으로 판정났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홍성사 발행인인 이재철 목사께서 앞서 출간한 나의 책 <예수는 평신도였다>와 곧 출간케 될 <루카스 이야기>의 원고를 읽고 난 후, 칭찬과 격려의 메일을 보내주셨다. 평양 방문 후 잠시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점심 식사 초청을 해 주셨다. 자장면 한 그릇씩 하자고…… 아마 내게 무슨 해주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하여 집 마당에서 소박한 오찬을 나눈 후 목사님은 내게 근처의 양화진과 절두산 묘역을 산책하자고 제의했다.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머나먼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죽어 이국 땅에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인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하여 조선인과 더불어 살다가 이 땅에 묻힌 사람들…… 한국 기독교와 카톨릭의 성지가 바로 한 동네에 100m 남짓 거리를 두고 이웃하고 있는 것이다.



양화진 묘역에는 교회에서 단체로 방문한 관람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였다. 10년 전 중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무렵 휑하니 쓸쓸한 빈 무덤 사이를 홀로 거닐던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목사님은 언더우드, 베델, 홀 선교사 등 한 분 한 분의 묘소에 이를 때마다 그분들의 삶의 뒷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양화진 묘소가 최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한국 교회들이 그곳에 불필요한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헛된 흔적의 모습들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이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었다. 우리 신앙인들조차 빠지기 쉬운 허위적 모습들……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 욕심들…… 절두산 묘역 안에 있던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교황의 방문을 맞아 강대상과 단상을 만들기 위해 설치해 놓은 콘크리트에 갇혀 까맣게 타죽은 모습을 보았다. 인간들의 명예욕의 굴레에 휘감겨 훼손되는 역사 유적지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날, 내 마음을 가장 흔들어놓은 것은 아펜셀러 목사 묘역 앞에서 그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한창 무르익어 일하던 나이에 목포 앞 바다에서 배가 충돌하여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익사함으로 일생을 마친 아펜셀러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자리에 서면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린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낍니다. 20-30대의 젊은 혈기라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노년의 나이를 지닌 분이었다면 또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사십대는 한창 자신의 사역과 일에 바쁘고 욕심이 생길 나이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그 나이에 어떻게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었는지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마흔 다섯의 헌신……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올해가 마침 내가 마흔 다섯의 나이를 통과하는 시점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창 일에 대한 욕심이 불타오르고 가정적으로는 자녀들을 교육하고 뒷바라지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절정에 이른 시절, 가장 경제적으로 쫓기고 흔들리기 쉬운 이 시기에 나를 다시 불러 재헌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와 음성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음성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네 생명을 내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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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와 이재철……
나는 이 두 분을 함께 존경한다.
두 분과 개인적으로 나누었던 따뜻한 교제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펴내어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한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댄 김동호 목사…… 그의 유명한 <고지론>과 함께 이 책 역시 자칫 나약해지기 쉬운 많은 기독 청년들에게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승리할 수 있는 영감과 동기부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부유한 교회와 교인들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타락한 인간에게는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며, 새로운 기복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정신여고 강당에서 깨끗하고 성공적인 목회의 표본을 보이며 <주님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던 이재철 목사…… 10년 목회 후 사임하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지켜 교회 안팎의 놀라움을 자아냈던 분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혹자에게는 자기 의의 표출로서 비추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내가 이 두 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론이나 행동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떡의 유혹 앞에 노출된 부족한 인간들, 죄악에 깊이 물든 세상 속에서 그 어두움의 권세, 떡의 권세를 꺽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행동으로 결단하는 그 모습 속에서 배워야할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총체적 부패와 부정직 속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크리스천의 바른 물질관을 세우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며 과감히 앞서나가는 용기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몸부림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판하는 분들의 말도 더러 일리가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 두 분 같은 크리스천만 되었어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에게는 이들처럼 떡의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크리스천 리더들의 영성과 지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소돔 왕은 결국에는 심판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왕이다. 하지만 소돔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은 그의 책략에 쉽사리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 때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신비스런 인물……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그분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그가 들고 있는 떡과 포도주는 전장의 탈취물이 아니다. 모든 전쟁 상황을 끝내기 위해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떡과 긍휼의 포도주인 것이다. 그것을 받아먹은 아브라함은 비로소 이 전쟁의 주재가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리고 담대하게 소돔왕 앞에 나아가 담판을 벌이는 것이다. —–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해 어떤 이론을 제시하고자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떡의 유혹에 초연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언제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앞에 당면한 이 본질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독자와 함께 고민하며 해결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성경은 한 마디로 떡 이야기이다. 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이야기가 성경 안에는 가득 차 있다. 이제 그 피흘림의 현장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찾아서…… 말씀 안에서 열 두 덩이의 떡을 골라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 평화의 떡을 또한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2003년 8월, 평양 북경 그리고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