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신앙생활의 본질

2008년 후반기부터 써온 ‘최주희의 사랑이야기’를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코스타 홈페이지 담당자로부터 ‘사랑’에 대한 글을 요청받은 후 처음에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혼전 성관계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불륜과 욕심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심각한 현실 앞에서,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과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 강조하였다. 이제 마지막 글을 쓰려고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며 주님 나라 위해 이 땅에서 선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균형이 많이 깨어진 것 같다. 기도만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만 하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된다. 삶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넉넉함도, 섬김도 없는데 기도는 몇 시간 한다. 기도의 내용은 고난 극복, 물질 채움, 욕심(비전 혹은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성취가 주를 이룬다. 우리는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 되셔서 부지런히 우리를 섬기셔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과 은혜가 넘치셔서 우리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 주셔야만 하고 이 일에 급급한 분이라고만 생각한다. 기도는 하는데 삶은 이기적이고 얌체 같다. 그런데도 믿음은 좋아 보인다.

신앙 좋다고 간주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 즉 ‘거룩과 사랑’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구체적인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인 거룩과 사랑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희생을 요구하지만, 개인적인 삶의 선택 기로에서는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면 안전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종종 확신에 차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 음성 듣기’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fear & respect)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하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되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신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는 공경해야 한다(사40:26). 그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셔도 마땅한데, 인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시고 친히 우리 죄악을 담당하신 그 큰 사랑을 공경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진 고난 다 겪으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엄청난 희생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단순화시키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애써 늘 기억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구원받은 우리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놓고 하나님과 반드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인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고 권면하셨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숨김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전12:13-14, 눅12:2-5; 롬14:11-12, 고후5:9-10, 벧전1:1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눅12:5)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장 중요하고 기본 되는 본질임은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다(창22:12). 행함 있는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에 선 모세에게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신4:10).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시편 103편 말씀의 내용을 보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심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적용되기 위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어야만 한다(13, 13, 17절).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에는 관심이 없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뉘우치고 돌이킴)라는 조건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받으신다(행9:31, 10:2, 22, 35).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만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엡5:21).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신다(말4:2).

지금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많이 찾고 존경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막7:6). 오히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고 수단으로 삼으며 우습게 본다. 그저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성격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신앙생활 할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세계는 이중생활 속에서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우울증, 강박증, 망상, 불안증을 겪고 있다. 온갖 성적인 범죄와 투명하지 않은 돈 문제 그리고 욕심이 그리스도인들을 침몰시킨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되었고,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우리의 모든 삶과 생각을 드러내어 점검 받는 것부터 시작하자. 두려움 가운데 이 일을 이루자. 그리고 그분을 마음으로 공경하며 말씀하시는 교훈에 순종하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 본질 위에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고 사역이 있다.


[최주희] 자녀교육의 목표


자녀가 생기는 순간부터 부모들은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자녀양육에 둔다. 잘 키우고 싶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그 노력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실수나 실패 혹은 방황이나 혼돈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둔다. 하나는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바로 ‘거룩’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녀들의 교육목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볼 때 이 두 가지 목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교육 목표인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즉 ‘거룩함’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수년 전 출강하는 학교에서 ‘현대사회가정’이라는 과목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강의준비를 위해 연구하면서 발견한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살도록 자극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며(제1특징), 다른 하나는 그렇게 본능적 충동에 의해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힘들게 만드는 신용 및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제2특징)라는 것이다.

제1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거리에서나 TV에서나 맛있는 먹을거리를 쉽게 접한다. 입고 싶은 예쁜 옷들도 엄청 많다. 핸드폰, 스마트 폰 정신이 없다. 세련되고 성능 좋은 멋진 차들도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Sexy 한 몸매와 차림으로 다니는 여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법만 없다면 마음껏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다.

문제는 제2특징이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상황에 대책 없이 일단 반응부터 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규모 없이 돈 쓰다가는 신용불량자 되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덕적 하자가 생기면 추락하게 되어 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불륜은 그 사람의 힘이었고 부정한 돈은 능력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냥 추락이다. 특별히 지금은 비밀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돈의 흐름은 통장와 카드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어떤 대화도 핸드폰에 녹음시킬 수 있다. 움직임과 행동은 손안의 핸드폰과 곳곳의 CCTV에 그대로 살아있다. 네티즌의 고발도 한몫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이다(마10:26, 눅12:3).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도덕과 윤리의식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는 것은 이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 되었다. 사회질서와 인간관계에 대해 너무나 짧고 간단명료하게 명령하신 십계명의 내용이 우리 자녀들을 살리게 한다. ‘부모를 학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으로 폭행하거나 성적인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않으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부모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생활가운데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설명해주어야 할 것이다.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요즘 부모들은 그들이 태산을 넘을까 험곡에 갈까 노심초사하며 앞길을 평탄케 해 주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보다 ‘빛 가운데 걸어가라’고 강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들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진호야, 엄마 아빠가 인생을 살아보니 태산도 험곡도 피할 길이 없더라. 정말 중요한 것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삶이야. 그리고 세상에 비밀이 없음을 기억해야 해. 네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네 행동, 네 말 심지어 네 생각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훤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편하단다. 너 자신을 누구 앞에서든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테니”

두 번째 교육목표를 보자.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은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학습이란 관점과 현대사회의 흐름 가운데 살펴본다면 얼마나 현실적이고 중요한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 학습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학습의욕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동기 부여가 바로 ‘세상의 필요’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웃과 세상의 어려운 점을 보고 내가 무언가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보며 후에 사업가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 공부하고, 장애우 친구를 도와주다가 특수교사의 꿈을 가진다.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의 아들이 안과의사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우리 아들은 건축설계를 전공하는데, 십여 년 전 침례교단 선교훈련센터를 짓다가 건설회사가 부도나 고생하던 아빠를 옆에서 보고 건축사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학교들 중 실력과 인격 면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한동대학의 교육목표는 ‘Why not change the World?'(세상을 한번 변화시켜 보지 않겠습니까?)이고,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는 ‘Not for Self'(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말라)이다.

현대사회의 흐름이란 관점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대가 강조하는 리더십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많은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섬김이다. CEO 들이 사내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거나 손수 화장실 청소하는 모습들은 이런 면에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이다. 또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실력, 영어, 창의성 뿐 아니라 ‘인성’이 추가되었다. 아무리 실력과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겸손하고 섬김의 성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것을 대기업들이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반장을 뽑는데 어느 학생이 똑똑하고 말 잘하고 비전 있고 열정 있어도, 만약 잘난 척하거나 친구를 무시한다면 결코 반장에 선출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실력과 의욕이 있어도 그 아이가 영향 미칠 수 있는 대상은 한 반의 20여명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세상의 필요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섬김의 자세를 가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도와야 할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도덕과 윤리의식’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에 공헌하려는 사명감’, 이것은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늘 바라보고 향해 가야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육목표이다. 또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도 잘 살게 하는 귀중한 푯대가 된다.

 

[최주희] 자녀는 하나님의 것

자녀는 하나님의 것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도는 머리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삶 가운데 “하나님, 이 아이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경우는 몇몇 상황일 뿐이다. 자녀가 심각한 병에 걸려 많이 아파할 때 “이 아이는 당신의 것이오니 고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수능을 앞두고 새벽기도하며 “이 아이는 당신의 것이오니 머리가 되게 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옵시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당신의 귀한 종 되게 하옵소서.” 외친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에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녀가 나의 소유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분이 아이를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두기를 원하시든 그대로 내어드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향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양육하겠다는 결단과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결단한다고 해도 저절로 순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의 소유권에 대한 인식과 자녀를 향한 욕심으로 인한 끊임없는 갈등을 경험하면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필요하다(고후10장5절).
나의 경우 이런 결단을 연습하는데 도움을 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아들 진호를 출산할 때의 일이다. 분만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듯한 통증과 의사선생님의 수고에도 아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님들도 숨 가쁘게 움직이다 결국 과장 선생님을 부르게 되었다. 다행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이는 출산하였으나 도무지 울지 않는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여러 생각이 오갔다. 한참 만에 아이가 겨우 숨을 쉬기는 했다. 그러나 동생이 중증 뇌성마비였고 특수교육을 전공했고 특수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의 뇌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길지 가늠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낙심이나 절망감이 아닌 이상한 소명감이 생기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저에게는 동생을 돌보며 겪었던 경험과 특수교육을 전공한 지식이 있습니다. 또 특수학교 교사로서의 경력도 있습니다.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다만 또다시 아픔을 겪게 되는 불쌍한 저의 친정 부모님은 당신이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 당시 내 판단과는 달리 아이는 다행히도 건강하게 자랐다.
이런 적도 있었다. 아이가 5살 쯤 되었을 때다. 그 당시 우리는 Southwestern 침례신학교에 유학중이었는데 학교 기숙사에 아들 또래가 많이 있었다. 한번은 최 목사님 딸 효영이가 나에게 다가와 “사모님,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할 수 있어요. 사랑은 오래참고…” 너무나 기특하고 부러웠다. 그날 밤 성경책을 들고 진호에게 말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한 너무너무 좋은 구절들이 있는데 우리 한번 읽어볼까?” “싫어싫어 너무 어려워, 그냥 그림 성경 읽을래~” 그런데 그 순간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 아들이 기술고등학교 제복을 입고 씩씩한 얼굴로 땀을 흘리며 기계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속으로 ‘이 녀석은 그리 똑똑한 것 같지도 않은데 책도 잘 안 읽고… 게다가 친구와 놀 때도 남자로서의 리더십도 없이 그저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하는 편이고 욕심도 없으니, 어디 대학이라도 가겠어?’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그림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성격 착한 마음이어도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같은 기술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가치를 일깨워 주며 새로운 소망과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면 너무나 의미 있고 귀한 일이었다. 물론 좋은 대학 나와 남들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에 있으면서 영향 미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과 같은 지독히 경쟁적이고 사람을 학벌로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이 또한 너무나 중요한 사역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그것 참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기 원하신다면 마음껏 진호를 사용하시옵소서. 그러면 저는 진호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나요?’ 그때부터 성경적인 자녀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 가지게 되었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결혼 문제, 직장 및 장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 및 건강 문제 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여러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며 그 응답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신앙 좋은 사람하면 먼저 떠오르는 특징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물론 기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기도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자녀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가치로 돈을 평가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장래와 직장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치관의 변화, 관점의 변화, 그리고 변화된 가치관과 관점이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중에서 가장 어렵지만 기본적인 것이 바로 ‘자녀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최주희] 성 관리와 돈 관리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혼 사유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배우자의 부정행위, 경제적인 문제, 성격차이로 표현되는 대화단절 및 거짓말 등 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다보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외도, 낭비벽, 너무나 많은 부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다. 믿는 가정이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가대원 끼리 눈이 맞아서, 혹은 목사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들다시피 하는 여성도와 목회자가, 대학부 담당 장로와 대학생이 불륜관계에 있기도 하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규모가 없이 새로 나온 기계는 일단 사고 보고, 타고 다니는 차가 고장 나지 않았음에도 몇 년 되면 다른 차로 바꾼다. 자녀 사교육비 과다 지출, 분수에 넘는 비싼 옷, 습관적인 외식도 사소한 것 같지만 가정 경제를 뒤흔드는 요인들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는 요인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남편과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 불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도덕성을 지키며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성(性) 관리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과 단 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직장에서 야근 한다며 이성과 단 둘이 있거나, ride 를 준다고 이성끼리 차 안에 단 둘이 있지 않는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 가 반문할지 모르나 이는 회색지대여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죄’가운데 빠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다. 실제로 이성끼리 단 둘이 있는 환경에 자주 접하게 되면 정들게 되어 있다. 실례로, B 집사님이 새벽에 교통사고 났는데 그 옆에 여직원이 타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불륜이 들통 나 회사를 사직하였다. 반면 미국에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A 목사님은 “혹 비가 올 때 내가 빈차로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우리 교회 여자 성도를 만나도 태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단에서 선포하셨다고 한다.

둘째, 이성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 혹은 친밀감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도에 넘는 개인적인 친절이나 관심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에 언급된 교회 안에서의 다양한 불륜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들이 과다한 노출패션을 삼가야 한다. 패션은 자신의 취향과 유행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 특히 남성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성충동을 느끼게 하여 어려움을 준다면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몸가짐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가슴이 많이 드러나도록 패인 옷,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한 짧은 치마, 진한 향수, 야한 눈짓과 몸짓은 남성들이 유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동성폭력은 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와 발찌를 채움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여성들의 노출패션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과다 노출 패션으로 인해 받은 성적 자극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과 거리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취향과 만족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여성으로 인해 유혹을 느끼는 남성들이 불륜행각을 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아내는 반려자의 성적 필요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인 태도로 아름답고 즐거운 성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반려자가 잘해줄 때만 상 주듯이, 귀찮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니까 반응해서는 안 된다. 부부 안에서야 말로 최대한 야하고 매력적으로 꾸며야 한다. 은은한 향수와 sexy한 속옷, 다양한 방법, 구체적이고도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부부간의 사랑과 성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도울 것이다.

성 관리 뿐 아니라 돈 관리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돈 관리를 위해서는 다음의 원칙을 가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족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딤전6:6-10). 안타깝게도 수입이 적은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주어진 재정에 대해 감사하고 자족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좀 더’라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끝도 없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자족과 감사의 마음은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

둘째, 분수에 맞는 생활 규모를 가진다. 수입이 적으면 우선순위에 따라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만 덜 좋은 것을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고차면 어떻고, 냉장고가 좀 적은 용량의 크기면 어떤가? 비싼 옷이 아니어도 내 스타일에 맞는 깔끔한 것이면 어떤가?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만약 지금의 수입이 생활하는데 어려울 만큼 부족하면 일을 더 해야 한다. 계속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속상해 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시간 당 액수가 적다고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적은 액수라도 노력하고 땀 흘려 번 돈은 가장 신성하고 보람 있는 일이다.

넷째, 한 단계 낮추는 삶을 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자신들만 돈 문제 안 일으키고 잘 살면 되는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물질을 사람들과 나누며 사랑의 섬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십일조만 했다고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구약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합치면 결국 십의 3조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려면 돈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단계 낮추는 삶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우리 부부는 한심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바로 우리가 가장 잘 살게 될 때의 상한선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 상한선은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수준으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수준에서 한 단계 낮추는 것으로 했다. 결론은 30여 평의 아파트, 중고차로 소형, 수입의 30%는 헌금을 비롯해 선교 및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 온지 18년째 되었다. 집은 32평 아파트, 차는 중고 소형차이었는데 3년 전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대전에서 고속도로를 오가는 기회가 많아 중고 중형차를 사용한다. 수입의 30%는 아직은 지켜지고 있으나 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학비와 생활 및 주거비가 만만치 않아 힘이 든다. 용돈은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번다고 해도 버겁다. 어쩌면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에는 잘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절제를 가져다주는 돈에 대한 우리의 원칙이고, 그 원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대로 순종하며 살고픈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분들은 ‘당신들은 돈을 잘 버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연습을 가난할 때부터 해왔다. 2만원 있을 때 만원을 어려운 형제 성경책에 몰래 넣기도 하고, 유학 시 한 달에 식생활비로 120$ 지출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매달 60$을 지출했다. 돈이 없을 때, 가난할 때가 나눔의 연습을 할 절호의 기회이다.

마지막으로 재산 증식을 위해 불법이나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남들 다 하기에, 아니면 법을 지키다가는 너무 세금이 많아서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다고들 말한다. 또한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이 본다. 특별히 부동산이나 주식거래가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정 경제의 뿌리를 크게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본능과 욕구를 철저히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가정을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성 관리와 돈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성 관리와 돈 관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주희] 결혼 그리고 가정의 기초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마19:4-6; 고후6:14-16). 그런데 너무나 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정의를 마음먹고 깊이 묵상해 보면 결코 그냥 단순하게 언급할 내용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 안에서”라는 의미는 교회에 다니거나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상의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라는 의미이다. 가정에 대한 구체적인 축복이나 교훈을 언급하는 성경구절을 보면 그 앞에 반드시 조건이 있는데 “경외”라는 단어이다(시128:1, 4; 엡5:21). 사실 이 “경외”라는 단어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중요한 기대이자 명령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 됨”이라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부부가 저절로 완벽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셨으니 부부가 전 인격적으로 100%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데 헌신하겠다는 의미임을 이해해야 한다. 가정생활 전문가들은 부부가 서로 깊이 있게 하나 됨을 느끼며 친밀해지는데 약 27년이 걸린다고 한다. 즉 이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심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데 헌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결혼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 됨을 만들어 가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 됨을 위한 헌신”은 바로 가정의 기초이기도 하다. 기초가 든든하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너끈히 견딘다. 하지만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리 모양이 멋있고 화려하며 비싸게 보여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쉽게 무너질 뿐이다. 이제 결혼의 의미이자 가정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 됨을 위한 헌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고(fear) 공경한다는(respect)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그분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쓰던 달던 상관없이 말씀대로 순종하려 애쓴다. 또한 말씀을 읽는 목적은 은혜 받고 응답 받고 위로 받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순종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취사선택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런 취사선택적인 태도는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한다할지라도 결코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본인은 믿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믿음으로 착각할 뿐 제멋대로 종교생활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가치관을 교정하며, 숨겨져 있는 내면의 욕심을 드러내 회개한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교훈과 명령은 자기 몸을 쳐서라고 복종코자 노력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삶이 그들에게 분명한 목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해 가는데 필요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대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재정적으로 다른 통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비밀리에 물건을 사지 않는다. 하루의 일과나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거짓말 하지 않는다. 더욱이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이성과의 만남을 개인적으로 가지지 않는다. 다른 이성과 유혹이 될 수도 있는 회색지대 조차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가정에 대한 재정적 책임과 가사 일에 대한 책임을 기쁨으로 감당한다. 반려자의 욕구 충족에도 성실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주님께 의지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늘 힘쓴다. 또한 그분을 경외함으로 서로에게 복종하고 사랑한다.

가정의 기초가 되는 두 번째 요소는 하나 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려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에게 적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기쁘게 해주려 노력하며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 희생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결혼하면 반려자가 자신을 위해 정성껏 맛있게 만든 요리를 식탁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그 요리를 즐기면서 맛있게 먹게 되리라 예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남편과 아내가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지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고, 어느 마트에 가서 장을 볼지 또한 어떤 재료들을 구입할지 정하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다듬고 씻으며 양념을 적당하게 넣고 요리를 마친 후, 멋있는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 두고 함께 즐기며 맛있게 먹는 이 전 과정이 결혼 생활이다.

이 과정에서 양보와 의견의 조율과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는 노력들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어렵기도 하다.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 말이 없음, 냉정함, 자기중심적인 태도… 아내의 예민함, 좁은 마음, 오해… 이런 것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며 시시비비를 따지고 논쟁할 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반려자를 용납하고 받아줄 때 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죄가 아니라면 반려자에게 나 자신을 맞추고 무조건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런 노력을 할 때 세월이 흘러 어느 새 긍정적으로 변해 있는 반려자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 됨을 만들어 가는데 반려자의 좋은 점을 의도적으로 찾아 칭찬해 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큰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데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성숙한 관계는 성숙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반려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로 만들어져 갈 때 깎이고 부러지고 다듬어지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인격적 결함 때문에 생기기도 하지만 반려자를 위해 희생할 때 생기기도 한다. 때로 사람들은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훌륭한 전문가가 되었을 텐데…’, ‘내가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텐데…’라며 억울해 한다. 하지만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런 하나 됨의 과정을 겸손하고 즐겁게 거치는 사람들은 가정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껏 누린다. 서로에게서 누리는 편안한 쉼, 재미있고 즐거운 웃음, 사랑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는 든든한 울타리,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 교회와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는 사랑과 섬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결혼한 부부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축복이 아닐까?

[최주희] 회개와 회복

이번 달 칼럼은 지난 달 칼럼 “혼전 성관계에 대한 오해와 진실” 후속 편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진실을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이제는 이미 혼전 성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는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즉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사랑하기에… 유혹적인 환경에서 실수로… 잘못인지 알지만 그 사람의 요구가 너무 강하고 거절하면 떠날 것 같아서… 결혼을 약속하였기에 조금 일찍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서… 몸을 함께 했습니다”가 아니다. 단순하지만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범했습니다”라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십계명을 비롯하여 구약과 신약 구석구석에서 죄로 선포하고 있다.

간음죄를 비롯하여 여러 죄악들을 행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엡4:18-19)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대로 자기 성격대로 말씀을 해석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믿는다. 다음 단계는 마음이 굳어진다. 이렇게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만들며 영적인 감각을 잃게 한다.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fear and respect)하지 않았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대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음을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악한 길, 불의한 생각 가운데 있지 말고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사55:7, 시103, 요일1:9)

두 번째는 혼전 성관계를 가지게 된 원인을 분석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약점을 고치고 보완하여 또다시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원인으로 내실 있는 이성교제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부족했는지(이성교제가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며 건전하고 성숙한 관계가 되도록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자의 지나친 노출 패션이 남자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는지, 만나는 장소가 은밀하거나 고립되어 있어 유혹적이지는 않았는지,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한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다시는 제공하지 않도록 한다.

세 번째는 성 에너지 관리를 위해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며 야한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하에 폭력적이고 음란한 게임을 즐기며 심지어 사이버 섹스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만드는 일이다. 운동과 자연을 많이 접하는 산책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좋게 하며 성 에너지도 건전하게 관리해 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영적 싸움으로 단정하고 그저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 소리만 높이 부르짖고 돌아서면 다시 음란물을 접한다. 그러고는 사단이 너무 강하여 자신은 무기력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며 자포자기이다. 혹은 자기 조상의 죄 때문에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다며 묶는 기도, 끊는 기도에 몰두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접근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옳지 않은 행위를 사단이나 조상에게 책임전가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교리이다.

창조주, 만왕의 왕,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으며 사단에게 전혀 영향 받지 않으신다.(욥1:6-7; 엡1:10-13, 20-22, 6:10-20; 야4:6-8; 벧전5:8-9…) 또한 아들이 부모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다.(렘31:29-30, 겔18:20) 오히려 사단은 우리가 자기관리에 소홀하여 실수할 때 그 실수를 가지고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 덤벼든다.(벧전5:8 ‘근신하라’는 영어로 ‘Be self-controlled’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통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또한 믿음을 가지고 진리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이다.(엡6:14-17)

야하고 음란한 것들을 피하고 운동과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는 자기관리가 성적인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네 번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의 약점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기를 관리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물론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리기 위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인내해야 하는 우리의 몫이 있으나(히12장),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대하16:9) 더욱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넉넉하리라 믿는다.(고후7:1, 롬8:37)

하나님의 법도대로 결혼을 통한 부부관계 속에서 떳떳하고 자유롭게 성관계를 즐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매우 놀라운 축복이다. 하지만 혼전 성관계를 이미 가진 사람들도 철저한 회개와 위에 언급된 회복의 과정들을 온전히 거침으로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구세주(Savior)이시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인생의 주인(Lord)이 되신다. Praise the L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