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 교회 봉사는 꼭 해야 합니까?

캠퍼스 사역 Q&A


교회 봉사는 꼭 해야 합니까?


교회 봉사를 해야 하느냐의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봉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요점만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복음서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곳에서 처음 언급됩니다(마16:18). 여기서 사용되는 헬라어는 ekklesia로서 ek(a primary preposition denoting origin, i.e., the point whence action or motion proceeds)와 kaleo(to “call”, i.e., properly, aloud, but used in a variety of applications, dir. or otherwise)의 복합어인데, 이 단어는 a calling out, i.e. a popular meeting, especially a religious congregation(Jewish synagogue, or Christian community of members on earth or saints in heaven or both)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Source: Biblesoft’s New Exhaustive Strong’s Numbers and Concordance with Expanded Greek-Hebrew Dictionary. Copyright (c) 1994, Biblesoft and International Bible Translators, Inc.).


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1:20; 3:10-21; 5:23-32).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모든 자들의 집합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약에서 교회에 대한 언급은 많이 나오고 있으며 특히 사도행전에는 지역 교회를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 교회는 이런 그리스도의 몸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표현된 하나의 subse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은 교회는 그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으며 또한 지킬 때만 그 머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명령은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 입니다.


교회가 맡고 있는 책임은 바로 제자 삼는 일 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여기서 제자들의 모임은 교회입니다) 하신 명령은 바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명령을 이해하는 과정 가운데 각 지체의 회복으로 말미암은 참된 교제와 나눔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나눔 가운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일과 교회 밖의 사회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감당하게 됩니다. 이런 교회의 역할은 각 지체들이 말씀 가운데 설 때 이루어지는 자연적 결과들입니다. 물론 각 지체의 불완전함(죄성)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교회의 성장의 자연적인 부분입니다. 각 지체의 성화는 곧 교회의 성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팽창은 지체들이 증가할 때, 즉 제자의 수가 더할 때, 이루어집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서 현존하고 있는 한 현재 지역 교회와 para-church의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지역 교회는 지역 중심으로 몇 사람들이 모여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도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함으로 그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이 있는 사회와 문화 등등 많은 요소들에 의하여 지역 교회의 특성들이 형성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을 통해 국가적 차원의 중요한 일에도 한 목소리를 냄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일반 지역에 국한된 전도보다는 특수 지역, 혹은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형성된 신앙의 공동체인 para-church도 포함 합니다. 캠퍼스 미니스트리나 선교 단체들이 모두 이런 para-church에 속합니다.


교회(지역 교회 및 para-church)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질서가 필요합니다. 이런 질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각 지체들의 역할들을 규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 질서는 규모가 작을 때는 informal한 이해 관계에 의존할 수 있지만 규모가 커지면 질서를 체계화시킬 필요가 생깁니다. 즉 하나의 체제(institution)를 형성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효율성을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필요하고,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원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형식에 따라 또 그 신앙의 공동체의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 지체들이 의견을 조율하여 하나의 체제를 만들 필요는 있습니다.


교회 봉사는 교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각자가 맡은 책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사(service)라는 단어에는 보수(return)가 없는 노동(labor)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헌신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봉사는 헌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일 부분 입니다. 교회 봉사는 궁극적으로 제자 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받은 은사가 다른 만큼 맡은 직책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에 따라 자신이 직책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의 선배 분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책은 지역 교회 안에 국한된 일일 수도 있고 para-church를 통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봉사는 궁극적으로 제자 삼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 입니다.


올바른 교회 봉사를 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굳게 서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직접적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지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신앙이 어릴 때는 선배 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는 구약시대처럼 우리들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중계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봉사를 할 때 교회의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질서한 행위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질서는 인간 사회의 가치관에 의한 위계 질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직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동역하는 자들과의 화목과 협동, 그리고 서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질서입니다.


말씀의 묵상과 성령님에 대한 민감성이 없이는 참된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자연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체제를 형성하려는 성향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각 지체들의 타락된 마음의 성향이 반영되어 사랑과 섬김의 체제보다는 명예와 다스림의 체제를 이루어 갑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보다는 인간의 정치적 감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경우가 많고 참된 제자 삼는 목적보다는 종교 집단을 만들려 하는 강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각자가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봉사가 강요될 때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각 지체들이 아직은 모두 불완전한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참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인식도 없는 상태이며 교회의 참된 목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부는 교회 운영을 ‘멋있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고, 또한 활동을 많이 하여 지역 교회의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게 하는 것이 교회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섬김과 겸손에 근거한 질서가 아닌 인간의 권력 중심의 위계 질서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자신들을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통하여 순종하게 합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가치가 없는활동을 다수의 의견들을 모아 한 사람들에게 무언중 강요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한 참된 제자는 이런 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 주는 것이 그들의 잘못된 의견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더라도 끝까지 사랑하며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일형]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에 순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캠퍼스 사역 Q&A


제자 삼으라는 지상 명령에 순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지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자도의 입문이 세례받는 것이라면 제자의 훈련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배우며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키는 자가 없기 때문에(롬3:10) 우리 누구도 참된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온전하신 스승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자 삼으라는 말씀은 곧 온전하신 스승이신 예수님께 제자도를 배울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인도해 주는 일 그 자체도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을 배우는 것과 지키는 것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운다는 뜻은 곧 그 말씀을 지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행동을 요구하는 진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말씀을 이해했다면 행위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삶이 말씀의 지배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말씀 공부와 묵상의 시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28절에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면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고 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에게 직접 말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올바로 이해시켜 주시고 또 말씀이 삶 가운데에서 올바로 체험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즉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 이해할 수 있게 하시므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시고 또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 혹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의 열매가 인간의 응답과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응답함으로 이루어지며 전도의 미련한 도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 삼는 일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빗나간 인간의 의식 속에 성령님께서는 먼저 된 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듣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마치 빌립이 에티오피아 대신에게 말씀을 설명해 줌으로 말씀이 그 대신의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던 것처럼(행8:26-40), 제자 삼는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한 사람 내에서 이루시려는 일을 우리가 한 팀이 되어 외부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함께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시켜 주는 일과 그 말씀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인간의 고정된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그 변화가 삶의 구석 구석에서의 실질적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지속적인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의식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리고 생각의 가장 가는 줄기까지 들어가 말씀으로 정복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히4:12-13)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3년 동안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같이 생활하시면서 그 생활 속에서 말씀을 이해시켜 주신 바로 그 작업입니다. 그 죄성 때문에 계속적으로 타락하려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역행하여 말씀을 올바로 이해시켜 어느 정도 자리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일은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베풀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을 모아 성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며 그들에게 말씀의 이해를 돕는 일입니다. 그리고 공부하며 함께 나누어지는 교제와 대화 속에서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 하나 잡아 주고 교정시켜 주는 일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인간의 잘못된 마음의 세계를 말씀으로 정복해 가는 행위입니다. 사람들마다 사단에게 잡혀 있는 부분들이 다 다르지만 (과거의 아픈 상처에서 비롯되었든지 욕심에 붙들려 잡혀있든지) 모두가 잡혀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이런 부분들부터 치유하고 해방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간의 교만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어져야 합니다. 이런 교만이 깨어질 때야 비로소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공부를 할 때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함께 할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어떤 캠퍼스를, 혹은 청년회나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을 놓고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방향성이나 성경 공부의 분위기가 불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적은 숫자의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장기적 계획으로 말씀을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비슷한 신앙의 깊이가 있는 사람들끼리는 모여서 성경 공부를 시작한다면 약 열 번 정도 공부한 후 흩어져서 제자 양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해주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을 읽고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 기본이 없는 자일 경우 간단한 교재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을 직접 공부해야 합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말씀 공부를 준비할 때 자신이 먼저 확실하게 묵상하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 은혜 받는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이 자신에게 크게 감동이나 괴로움으로 와 닿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인도한다면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성경 공부에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제자 훈련의 기회를 상실시켜 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또 어떻게 이해되어져야 하는지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자신의 간증이 될 때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 공부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다른 일들을 이유로 자주 빠지거나 시간을 변경하면 참석하는 자들이 성경 공부에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시간을 지키고자 하는 헌신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제자 삼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된 제자 훈련은 그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자신의 친 형제와 같아질 때, 그들의 고통과 기쁨이 자신의 일과 같이 될 때 시작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랑의 역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일형] 어떻게 하면 침체되어 있는 청년부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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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침체되어 있는 청년부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까?


청년부의 목적을 확실히 정립해야 합니다. 먼저 청년회가 왜 존재하는지 또 그 목적에 비추어 보아 “활성화” 시킨다는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물론 각 교단에 따라 혹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청년부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중에 하나로서 젊은 사람들이 모인 신앙의 공동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 땅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구체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 교회”를 포함한 para-church들, 즉 campus ministry과 또한 여러 선교 단체들의 종합체라고 개념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개념 안에서 청년부는 일반적으로 한 지 교회 안의 청년들의 신앙 공동체, 즉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부의 목적을 정립하려면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또 신앙 생활에 관련되어 왜 모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모임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하나의 지체로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청년부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우선적으로 제자를 양육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은 그의 나라, 즉 제자들의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키우는 일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부라는 지체로 조금 좁혀서 생각해 보면 제자를 키우는 일이란 청년들의 삶 가운데 깊이 파고 들어 그들을 온전히 주님께 순종시켜 평생을 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의 삶 가운데 깊이 파고들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과 호흡을 같이 맞추고 그들의 생각의 수준으로 눈 높이를 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 높이의 조절이란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 들인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이 무엇인지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그들의 눈 높이로 전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은 말씀을 전하고 지키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청년부 모임에서 설교 말씀 듣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한 지체가 독립적으로 성경을 대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시는 생동력 있는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는 작업을 말합니다. 직접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 그 말씀을 또한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뛰어난 의지보다는 생동력 있는 말씀이 그 지체 안에서 움직이시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 입니다. 이런 작업은 한 인도자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보통 한 인도자가 5명 정도 이상을 동시에 제자 훈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명의 지체를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세우기 위해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데는 (경험으로 보아) 약 3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되어 있는 인도자 없이 숫자적 부흥을 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 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지키게 하는 일은 완전한 헌신과 말씀의 붙들림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청년부를 인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완전히 헌신되어 있다는 뜻은 그것이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관계 없이 제자 삼는 것에 초점이 항상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점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뜻은 첫째로 자기의 계획하는 모든 바가 한 영혼 영혼에 대한 관심과 훈련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어느 프로그램이나 혹은 교회의 다른 일들을 위하여 일군이 필요하기 때문에 청년부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자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수성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삶 자체가 제자 삼는 일에 우선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 훈련은 삶을 통하여 말씀이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삶 자체가 제자로서의 삶에 미치지 못 하면서 가르치면 위선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에 온전히 붙들린 자라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먼저 말씀에 깊이 빠져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깊은 묵상과 이해가 없으면 말씀 대신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년부를 활성화시킨다는 뜻은 제자 삼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제자 삼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청년부는 활성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제자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헌신된 한 사람만 있으면 청년부가 활성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한 인도자가 있으면 청년부는 활성화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도자가 한 명이면 그 청년부는 5명만 모여도 활성화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3년의 공생애 동안에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선포 하셨지만 그의 삶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던 것은 자신이 선택한 12제자들을 훈련하시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 함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가장 핵심적 표현은 다른 사람을 또한 제자 삼는 일 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전도, 양육, 돌봄과 사귐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 영접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일을 곧 시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돌봄, 그 다음은 양육입니다. 사귐은 이 모든 과정 가운데 끝임 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귐이 없이는 다른 제자 훈련의 과정들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부가 소속되어 있는 환경, 즉 소속되어 있는 지 교회 안의 특별한 사정이나 다른 para-church와 연관된 관계 등등에 의하여 조금 융통성 있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소속되어 있는 지 교회 안에서 한 지체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일들에 동참하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차세대를 양육하는 교사, 예배를 인도할 찬양 등을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것들이 일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잘 분배함으로 직접적으로 제자 삼는 일에 “해”를 입히는 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