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찬양으로 쓰일 수 없는 음악도 있는가

찬양을 이야기 하자


찬양으로 쓰일 수 없는 음악도 있는가



사람이 거듭나면 문화조차도 구속되는가


지난 2000년 12월호와 2001년 1월호 이코스타에는 ‘오늘의 음악, 영원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CCM에 관한 하덕규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그중에서 2001년 1월호에 실린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80년대 이후로의 기독교 음악 발전상을 돌이켜 볼 때, 크리스천 뮤지션들에게는 자기들이 지키는 ‘어떤 선’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운드가 강력한 록(Rock) 음악도 ‘믹스다운(mix-down)’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반주보다는 노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도록 조절한다. 이것은 크리스천 음악이 메시지의 음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크리스천 록이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작업은 메시지 전달을 중시하는 복음 증거에 목적을 둔 기독교 예술가로서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리스천 음악들도 현대음악의 한 장르라고 볼 때,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힙합, R&B, 랩 등의 노래형식이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크리스천 음악이 이러한 주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식컬한 교회음악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식의 크리스천 음악이 더 관능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천 음악들은 이러한 형식들을 걸러내어 그들의 것으로 정착시켜왔음이 분명하다. 내 경우에도 그렇다. 나는 회심한 후 3년 정도는 그 동안 내가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던 많은 팝 음악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한 복음전도자로서 내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셨던 것은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전과는 달리 참으로 많이 기도하며 두렵고 떨리는 작업기간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라는 음반은 그 이전의 다른 음반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이전의 노래들은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하며 동화적인 노랫말에 어쿠스틱 악기를 주로 사용하여 서정적인 면을 많이 강조했었음에도, 내 노래를 좋아했었던 사람들이 이후의 음악과 확연하게 구분하듯이, 그 노래들은 전위적인 면을 포함한 형식으로 기존의 현실들을 냉소하는 메시지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그런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변화된 이후의 노래들은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신 영감으로 쓰여지고 걸러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된다.”


개인적으로 하덕규씨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솔직히 요즘 하덕규씨의 모습보다는 예전의 ‘시인과 촌장’에서 통기타를 치며 조용히 노래하던 음유시인의 모습이 훨씬 더 기억에 남곤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앨범 ‘숲’을 낸 이후 다음 앨범 ‘쉼’으로 거쳐가는 과정 중에 보여주었던, 한 사람의 ‘가수’에서 ‘기독교 문화사역자’로 변모되는 모습이 내게 여러 가지로 도전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길게 하덕규씨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윗글에서처럼 정말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되는가? 예를 들어서 하덕규씨가 말한 대로 심한 록음악이나 힙합, R&B, 랩 등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살게 되면, 그들이 활동하는 모든 작품 가운데 온전하게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가 말이다. 질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음악인들은 무슨 음악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아무 음악이나 다 괜찮나


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아더 홈즈의 책 제목처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라는 명제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덕규씨가 회심하고 난 뒤 처음 3년 동안은 전혀 팝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이후로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들”은 모두 헛되게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 안에서 핵심적인 일들을 담당하며 모든 공예배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내게는 하덕규씨가 다시 이전에 좋아하던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사명임을 깨닫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 말이 여전히 특별하게 들린다. 오늘 나의 이러한 고민은 주로 음악적인 장르에 대한 고민이다. 이렇게 글을 전개하려고 하는 이유에는 몇 달 전에 이코스타 ‘독자 오픈 포럼’에 한 분이 올렸던 질문에 미흡하나마 답을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지난 9월3일에는 ‘대일’님이 745번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런데 (개인의 취향을 일단 뒤로하고) 그런 생각 뒤에는 “every forms are neutral”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롹(rock)이든 hip-hop이든 뭣이든 그 자체는 중립적이며, 그걸 꼭 의심의 눈으로 볼께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이면 (즉, 음악의 주제선정을 잘하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입니다. 전, 이런 생각에도 그 뜻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subjects justify forms”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의문의 근원입니다. 연관되는 질문은, 과연 그렇다면 (if subjects indeed justify forms to use), 각 형식에서 (롹이든, 힙합이든, 메탈이든) 예배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멜로디, 박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질문이 째째해지나요?^^] 즉 주어진 장르 안에서, 어떤 멜로디가 다른 멜로디보다, 어떤 박자가 다른 박자보다, 어떤 악기구성이 다른 악기구성보다 더 좋은(??), 맞는(??) 멜로디, 박자, 악기구성이 있나요? 아님, 이것마저도, 어떤 박자든, 멜로디든 상관없나요? 즉 모든 음의 흐름이 다 가치 중립적인가요? 즉, ‘Hotel California’ 원판 그대로에다가 가사(주제)만 바꾸어 부른 것과, ‘부흥’ 찬양 두 곡을 놓고 볼 때, 음악만을 보고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나요?….”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와 ‘부흥’의 음악 자체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아마 똑같은 악기 구성에 하나는 미국의 록밴드 ‘이글스'(The Eagles)가 크게 히트시켰던 70년대의 대중음악이고, 하나는 고형원이라는 한국인 찬양사역자가 만들어서 크게 히트(?)했던 90년대의 찬양음악이란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아마 뚜렷한 구분을 짓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부흥’이 숱한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한 사람이 빚어낸 곡조있는 기도였다면 ‘호텔 캘리포니아’는 그 음악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팝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알고 있었는가? ‘호텔 캘리포니아’ 앨범이 처음 출반 되었을 때 나왔던 앨범의 자켓의 속지 그림을 보면 호텔 안 2층에 있는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최초로 ‘사탄 교회’를 창설한 안톤 라비라고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이러한 말들은 몇 년 전에 ‘록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상징’, 혹은 ‘백워드 매스킹'(Backwards Masking)에 관한 주제들이 한참 우리 주변에서 시끄러울 때 자주 듣던 사실이다.) <각주>


자, 만일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실제 록음악과 헤비 메탈을 하는 음악인들의 일부가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서 영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매를린 맨슨(Marilyn Manson)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은 사탄을 위해서 또 청소년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음악에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밖에 없다.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본다.


역사 속에 담긴 찬양에 대한 갈등들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가 탄생할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제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322년 요한 22세가 ‘아르스 노바’라는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에 의해 쓰여진 모테트에 반대하는 칙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새로운 학파의 제자들이 멘수라 음표를 억제하고 새로운 음표형식에 기울어서 잘 전해져온 옛 것 대신에 자신들이 새로 만든 것을 연주한다. 교회노래들이 짧은 음표로 연주되고 작은 음표로 넘쳐난다. 노래하는 이들이 멜로디를 호케투스로 잘라놓아 디스칸트들을 통해 성부를 많이 만들어서 가끔 천박한 제3성부와 모테투스 성부를 강요하여 안티포날레와 그라두알레의 원곡을 무시하여 자기 음악의 기본이 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교회선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 선법들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혼합시켜버린다. 이는 음표로 범벅시키는 것이 성가선율의 절제된 상승과 온건한 하강을 통해 교회선법이 구분되어야할 것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노래하는 이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경건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신에 청각을 마취시킨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으로 대신 표현하려고 한다. 그 결과, 본래의 목적인 경건심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책망 받아야할 경망함이 펼쳐진다. 그러나 축일 또는 축제적인 미사에서는 옥타브, 5도, 4도 등의 선율적 협화음 사용을 금하지는 않겠다.”


간단하게 말하면 14세기에서 15세기로 가면서 당시 종교음악에서 가장 큰 이슈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정통성이 점차 흔들리면서 단성부 음악에서 다성부 음악으로 가는 큰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멜로디만 있는 찬양이 몇 백년 이상 교회 안에서 불려져 오다가 점점 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화음이 찬양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깨버리는 반동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두 손으로 막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옛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나타났던 세대와 세대간의 갈등과 저항은 역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일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교회음악, 찬양이 늘 아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 가운데에서 탄생되었다고 보는 것도 사실은 착각이다. ‘종교 음악’하면 바하의 미사음악을 떠올리고 잘 갖추어진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을 생각하는 것이 사실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예를 들어서 고난주간에 많이 불리는 ‘오 거룩하신 주님'(찬송가 145장)의 경우 그 찬양의 원래 멜로디는 ‘내 마음에 안정이 없네, 그 처녀 때문일세’라는 중세 당시의 대표적인 유행가의 멜로디였다. 여기에 중세의 수사 끌레보의 버나드 수사가 쓴 성시(聖時)가 덧입혀져 바하의 편곡을 통해 아름다운 종교 음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뭐 이러한 역사가 있는 찬양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너무나 많이 담겨 있다. 당시에 유행하는 가요들의 멜로디를 따다가 가사를 붙이는 이른바 ‘노가바’를 통해서 거룩한 찬양으로 둔갑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빈번했던 것이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든지 ‘나같은 죄인 살리신’등의 찬양은 너무나 유명한 민요에다가 가사를 붙인 찬양들이다. 심지어는 ‘Battle Hymn of Republic’이라는 남북전쟁 당시의 유명한 군가는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놀라운 영적 전쟁의 찬양으로 바뀌지 않는가.


노가바만 잘 하면?


‘노가바’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된 것을 보면, 모든 시대마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들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모습들이 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찬양으로 드릴 곡조들이 없었으면 유행가 가요에서 멜로디를 따다가 그 찬양들을 곡조로 붙이겠는가. 처음 그 유행가 멜로디를 듣는 작사자의 참담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교회 안에서 얼마나 찬양이라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를 회중들에게 주지 못하고 훈련된 성가대에게만 국한시켰었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었음도 깨달을 수 있다. 마틴 루터가 했던 큰 일이 있다면 ’95개조 반박문’을 비튼베르그 성당에 내다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뿐만 아니라, 바로 이 찬양을 성가대의 몫에서 회중의 몫으로 돌려줌으로 인해서 엄청난 예배의 갱신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회중들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로 찬양을 예배시간에 직접 올려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종교개혁자들 가운데는 구교(舊敎)가 남겨 놓은 이 음악적인 악습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쯔빙글리처럼 ‘앞으로 모든 공예배에서는 찬양 음악을 금지하고 오직 말씀 듣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인해 오르간을 교회에서 내다 부수고 모든 음악을 금지시켰던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다. 칼빈도 처음에는 다성부 음악이 예배시간이 불려지는 것을 금지했고 오직 시편으로 된 찬송만을 단성부로 부를 것을 권장했고 처음에는 예배 시간에 악기 반주도 금지시키지 않았는가. 물론 나중에는 그 의견을 수정했지만.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 음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정신없는 랩음악이나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음악도 가사만 잘 전달하면 얼마든지 찬양으로 쓰일 수 있는가? 시끄러운 슬래시 메탈이나 헤비 메탈 음악도 그 세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니 더 뜨겁게 마음에 와닿게 찬양할 수 있으므로 한 20년쯤 지나면 교회의 주된 찬양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음악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프리카나 피지 같은 데서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지금 19-20세기 서구 기독교 음악에 푹 젖어 있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마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오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무슨 음악이건 찬양이 될 수 있는가? 음…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아마 많은 논란 끝에 결국은 그 세대의 찬양으로 자리잡게 되겠지? 그런데 잘 모르겠다. 필자도 이미 귀가 찢어지게 시끄러운 록음악이 거북스러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내게 한가지 드는 결심은 이것이다. 또 수많은 찬양들이 ‘노가바’로 때워져서 코메디처럼 되기 전에 미리 미리 좋은 찬양을 열심히 만들자는 결심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여, 좋은 찬양 시들 좀 많이 써달라. 곡을 쓰는 사람들이여, 제발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찬양들 좀 열심히 써달라. 무슨 일을 하건 주께 하듯, 믿음과 삶이 일치된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다. 가요계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그 사람들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로 잘 할지 몰라도 가요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걱정된다. ‘노가바’ 해도 은혜 안될 사람 많아 보인다.

[박성호]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

[박성호]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

[박성호] 김남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배와 찬양’?

찬양을 이야기 하자


김남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배와 찬양’?



김남일 열풍


요즘 인터넷 공간에서 검색어로 가장 인기를 많이 얻고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중에 하나는 분명히 ‘김남일’일 것이다. 지난 6월 한달 내내 월드컵 바람 때문에 TV에서 축구를 보느라 뜬눈을 새우기 일쑤였던 사람들에게 그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아마 상당한 실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 김남일이 완전히 떠버렸다. 다음카페에 등록된 김남일 팬클럽의 홈페이지 개수를 보아도 그렇고, 연예인의 인기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강남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 이름으로도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름이 바로 김남일이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 8월호 신동아에 실린 어느 기사를 보니 김남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팬들이 김남일에게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미국전에서 전반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문전을 쇄도하던 김남일이 미국선수들과 충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뱉은 육두문자가 생생하게 TV에 비쳐졌다. 9명의 미국선수들을 혼자 노려보는 눈빛에 광기가 흘렀다. 이름하여 ‘9대1 맞짱 사건’. 욱하는 성격만큼 말투도 거침이 없다. 4강진출 뒤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얘기해도 돼요?’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이트요’라고 답했다. 담백한 표정에 소년 같은 장난기가 귀엽다며 여성들은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서글서글한 외모에 터프하고 꾸밈없는 언행으로 여성 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깜짝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훈장을 받을 때 ‘나이트를 가고 싶은 김남일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순간 어떤 여학생팬들은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갔다는 후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수상식 행사에서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나이트를 가고 싶은 김남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노란 머리의 축구선수를! 이 노란 머리의 축구선수를 너무나 좋아하는 젊은이들로 세상은 뒤덮여 있는 듯하다. 이들은 왜 김남일에 열광하는가?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왜 김남일인가?


지난 7월24일자 ‘한겨레21’의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김남일, 날 것 그대로!’였다. 국내의 주요 주간지에 커버스토리로 실릴 정도인가 조금은 놀랍기도 한 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간다. 새로운 키치문화, 하위문화를 대표한다고 극찬하는 젊은 기자들의 기지가 번득인다. 그 기사를 썼던 김은형 기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김남일은 1990년대 말부터 남성 아이돌 스타의 주된 흐름이 된 ‘바른생활 꽃미남 소년’ 계보와는 한참 떨어져 있다. 지오디(god)는 어린 아기를 키우며 팬들의 사랑을 쌓아갔고, 유승준은 담배 피우는 청소년을 선도하면서 ‘아름다운 청년’의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월드컵 대표선수 가운데 대규모 여성팬 부대를 거느린 송종국 역시 고운 피부에 선량하고 겸손한 태도의 바른생활 소년과에 속한다…. 굳이 캐릭터로 범주화한다면 김남일은 마음도 순수한 꽃미남 주인공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조역인 ‘불량소년’에 가깝다. 고등학교 시절, 선배들의 지나친 체벌에 축구부를 뛰쳐나가 가출까지 한 그의 전력이 말해 주듯이 그는 착하고 말 잘 듣는 후배나 홍명보처럼 우직하고 듬직한 선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권위나 위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그의 태도는 ‘반항한다’기 보다는 ‘개긴다’는 속어가 어울린다. 결연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남일은 ‘고독한 반항아’가 아니라 ‘쿨한 양아치’ 계보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들을 읽으면서 내게 직감적으로 드는 느낌은 지금 세대는 ‘송종국 스타일의 범생이’보다는 ‘김남일 스타일의 양아치’에게 더 열광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을 정도이다.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믿음좋은 꽃미남들은 뒤로 물러가고 무례한 듯 자신있고 자기 주장이 분명한 ‘쿨 가이’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카페를 검색해 보아도 아름다운 크리스천 ‘꽃미남’ 송종국의 공식팬클럽의 회원수는 233,218명인데 비해 김남일의 홈페이지는 우선 그 숫자도 방대하고 한 카페의 회원수는 가볍게 479,000명을 넘는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씨는 “잘생기고 똑똑하고 상냥한 스타는 좋아할 수는 있지만 좀처럼 동일시되지는 않는 데 비해 평소에 자신들이 금지당한 것을 툭툭 내뱉고 저지르는 김남일에게는 쉽게 동일시되는 즐거움을 느낀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많은 젊은이들 중에 적어도 한 5분의 1은 기독교인들일텐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크리스찬 젊은이들은 어디 있는가.


다시 다음카페로 가서 ‘종교’란을 검색해 본다. 그중에 가장 많은 회원수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다. 이 카페의 이름은 ‘경배와 찬양 복스 자료실’이다. (http://cafe.daum.net/bocks) 회원수가 자그만치 53,936명에 달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가장 많은 회원과 방문을 자랑하는 카페는 바로 ‘찬양’에 대한 것이었다. 이 카페의 운영자는 ‘복스’라는 카페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부산에 사는 한 21세의 대학생이다. 학교 다니랴 교회생활 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텐데 언제 이렇게 멋진 사이트를 부지런히 관리하는지 궁금하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자료실의 그 방대한 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카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단 각종 국내외의 경배와 찬양집회와 CCM집회 실황을 동영상으로 보거나 다양한 앨범들의 전곡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이토록 많은 회원을 거느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CD 사서 듣기 좀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방문하지 않나 싶다. (근데, 이런 곡들을 동영상으로 올려놓는 행위는 불법 아닌감? 소리바다도 국내에서 문제가 된 판국인데?)


아무튼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기독교’하면 성경이나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교리나 뭐 이런 주제들이 제일 중요하고 사람들에게 제일 관심이 있을 것 같은데 그만 결과는 나의 뒤통수를 치고 만다. 물론 53,000명이란 숫자는 470,000명이란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이다. ‘인터넷의 바다를 여행하는 네티즌들이 고리타분한 종교에 관한 사이트를 얼마나 뒤적일지’ 의심이 드는 나의 마음을 집어 본다면 그나마 5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회원으로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기만 하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요즘 사회에서 얼마나 그늘에 가리워 소수의 집단으로 비쳐지는가. 세상에 비쳐지는 기독교인들은 기껏해야 각종 비리사건으로 헤드라인 뉴스에 오르는 사회적 거물들 아니면, 헌금이나 아들후계 문제로 문제가 되는 각종 지도자들, 아니면 그저 송종국이나 이영표처럼 큰 잔치의 한마당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높이 드러내는 운동선수들뿐이다.


나는 갑자기 걱정이 들기도 하고 마음에 큰 부담감이 생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음악인가? 찬양인가? 아닌 것 같은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나 그로 인한 결과들, 뭐 그런 것들일 것 같은데. 적어도 인터넷을 뒤져보면 아닌 것 같다.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하고 인기있는 사항은 ‘찬양’이다. 나는 이 젊은이들이 누구인지 깊게 생각하게 된다. 골치 아픈 교리보다는 신나는 음악에 열광하는 세대! 성경강해 시간보다 경배와 찬양을 훨씬 매우 더 좋아하는 세대!


지난 코스타에서 경배와 찬양을 인도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예배인도자 관심별 모임에 들어와서 자기 소개하는 시간에 ‘설교시간보다는 경배와 찬양에서 훨씬 더 은혜를 받는다. 말씀보다 찬양이 더 좋다’고 소개한 어떤 젊은 형제 생각이 많이 난다.


앞으로 쓰여질 ‘경배와 찬양’에 관한 글들은 그런 젊은 사람들을 위한 글들이 될 것이다. 함께 고민하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나누어 보도록 노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