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기독 유학생의 엘리트 주의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이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황지성] 순종으로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이코스타 2002년 3월호

구원받은 삶 이후에 나의 삶은 분명히 달라졌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 눈을 뜨고 나서는 주님이 원하시는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를 고민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나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기만 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나를 괴롭게 한다. 주님을 믿은 다음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 이 이런 것이었던가? 깊은 회의에 잠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 밖’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 같은 나… 때로 이러한 삶의 정황들이 가져다주는 절망감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시 일어나기 위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있는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오늘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 극적으로 구원받은 한 여인, 기생 라합에 얽힌 사건들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라합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여호수아서의 문맥을 끊어버리듯이 시작된다(수2:1). 성경은 그녀의 ‘기생(harlot or prostitute)’이라는 신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끄러운 과거의 삶의 모습들을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갑작스럽게 그녀의 인생의 대 전환점을 극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그 극적인 전환점에서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표현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부모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한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그처럼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그 고백이 지난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에 행하신 기적 같은 승리들, 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수2:10). 더구나, 그 고백의 마지막에서 보여지듯이, 그녀는 역사 속에서 이해된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굳이 변론하지 않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방인이라도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라합의 삶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거기에 이미,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 역사는 이미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는 과정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2:9에 있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하는 라합의 고백도 어쩌면 그녀의, 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통찰력에 근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을 탐구할 때 그 탐구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 중의 하나는 ‘현재를 이해하는 안목과 미래에 대한 합리적 예견’ 이다. 이는 매우 값진 열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자체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역사적 안목은 인간의 어떤 다른 사관(史觀)으로도 제공할 수 없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라합의 구원에 대한 요청과 고백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에 근거하듯이 우리의 구원도 오로지 십자가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어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또한, 라합의 경우와 같이, 주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으실 때에 나의 과거의 더러운 죄악과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은혜로 받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의 절망적인 정황에서 다시 힘있게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어떻게 절망적인 죄악의 상황가운데에서 은혜를 입었던 자임을 기억해 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다시 감격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앞에 용서 받은 나는, 비록 구원받은 이후 현재의 모습 속에서 잠시 넘어져 있더라도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일어선 후에 같은 죄악에 습관적으로 빠지지 않게 되는 삶의 동력도 이 감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솟아나게 된다.


라합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 구원의 감격을 그의 평생동안 유지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은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경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라합이 경험한 구원의 첫 번째 신비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경험한 것이었다. 여리고 정복전쟁 직전에 라합이 두 정탐꾼을 자기 집에서 도피시킬 때에 성경은,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수2:15).” 라고 기록한다. 또한 정탐꾼들은 그 집에서 떠나면서,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위하여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2:18).”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 때에, 그 지시대로 라합은 자기 집안에, 그 무너져 내리는 성벽 위에 있는 자기 집안에 가족들과 함께 모여있었다! 비록 공포의 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집을 신실하게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붙드시는 손’을 경험했던 것이다. 성벽이 모두 무너져 내린 폐허의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라합의 집이 있는 성벽의 한 부분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그것은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보다 더 놀라운 신비의 현장이다! 라합이 체험한 두 번째 신비는 “하나님의 한 사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다. 라합을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은 마치 그 한 여인만을 생각하시는 관심으로 그 성벽의 한 부분을 붙들고 계셨다. 하나님은 인간 모두를 다 사랑하신다. 그러나 한 사람의 구원의 순간에는 매우 개별적이며 특별한 아버지의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부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의 무한성에 근거한다. 이 라합의 경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가운데에서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경험을 하면서 이 사랑을 실제로 느끼게 된다. 설령, 짧은 시간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 감격의 정도가 미약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구원의 사건이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민감하게 되면 그 구원이 경이로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느끼게 되어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적 섭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 그 집에서 구출된 후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영(陣營)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수6:23).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갔지만 (수6:25) 그들은 아직은, 전쟁이 끝나고 정해진 규례의 절차를 마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진밖에 거할 수 밖에없는 이방인들이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같은 정황이 펼쳐진다. 이 땅에서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여전히, 아직은 이 세상 가운데에 살도록 남겨두신다.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좌절과 갈등을 겪기도 하며 치열한 싸움속에 던져지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가까운 미래에 확실히 무너져버릴 어떤 조직이나 상황속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경우에 처하기도 한다. 그 때에는 진실로, 라합의 경험과 같은, 주위의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 자녀들을 보호하신다는 믿음을 견고히 붙들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이 상황에도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단단히 붙잡자.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갖고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진(陣) 밖에 노출되어서, 마치 노획물처럼 취급될 수도 있는 그 자리에 있던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처럼 우리도 세상속에 노출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노출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하기에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켜야 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세상사람들이 다 좇는 것들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경험을 감격적으로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때로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이 순종이 요구되는 삶 가운데에서 여유있는 웃음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여호수아의 군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들이 보인다. 거짓과 어두움 (참소,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지배하는 도성들이 보인다(롬8:33-35).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귀로는 이 도시들의 성벽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자. 그리고 그 어둠의 도성들이 무너지면서 회복되는 라합과 같은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모습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내게 맡겨주신 전쟁의 몫이 끝나기까지는 여기 이 상황 속에 있으라고 하시며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게 하는 일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리고는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의 그 크신 팔에 안기는 그 날을 바라보고 기뻐하자! 핍박과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주님과 다시 만날 날을 그리며 그 소망으로 끈질지게 견디어 냈던 초대교회 형제들을 생각나게 하는 한 시인의 노래처럼…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허형만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티끌보다 연약한 삶 하나
떠나시온 그 순간부터
이어진 끈으로 지탱하고 서서
애오라지 견고한 만남을 위하여
젖어드는 비바람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깨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부터
감사 찬송으로 끝맺는 밤중까지
때로는 고달프고 때로는 서러우나
오실 날짜 그 순간 기다리면서
휘날리는 흙먼지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배헌석]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이코스타 2002년 2월호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노아시대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방주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살고, 방주를 거부한 자는 다 죽었다. 중간은 없었다. 죽음 아니면 삶 뿐이었다. 그런 절대절명의 장소가 바로 방주였다. 그런데 “이 방주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교회”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올바른 답을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고 답했을 때 그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함께 나누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교회라는 답이 틀린 답이 될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는, 그렇게 목숨이 달린 중요한 곳이라면, 그리고 그 방주가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정확하게” 파악되어야만 한다.


교회라고 대답했을때 그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교회(individual church)주의자들은 매 주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생각하며 답했을 것이고, 개인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몸이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각자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로마 카톨릭의 신도들은 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당들의 전체 모임 자체라는 의미로 교회라 답했을 것이고,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 전체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방주로 이끌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방주의 의미와 동일한 교회의 참된 의미는 분명히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나, 교파주의, 혹은 교회가 갖는 지엽적인 제한성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갖는 많은 의미 가운데 한 두 가지의 지엽적 의미로 방주의 의미를 국한시킨다면,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는 교회의 개념은 정확하게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교회 의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방주 밖으로 끌어내어 물에 처 넣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시 답해 볼 필요가 있다. “방주”는 “교회”라는 답은 개교회주의, 교단주의, 교파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지상교회시대에서는 오해되기가 쉬운 표현이다. 오히려 방주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깊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쉽게 생각해도 될 문제를 내가 이렇게 걸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교회의 참다운 의미, 사명을 다시 한번 더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오늘날 전도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교회이다”(The biggest obstacle for evangelism today is church). 부인하고도 싶고, 받아 들이고 싶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실제로 현 상황이 그러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오기를 거부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많이 있다. 이런 씁쓸한 유머가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한인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노인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중 두 노인이 싸우게 되었다. 아무리 말려도 싸움을 멈추지 않자 한 노인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가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느냐고…”


교회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성장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부흥이 아니다 – 물론 교회부흥은 원리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의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부흥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개교회 부흥이 교회의 참된 목표인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개교회가 약해지고, 심지어 “없어지게 되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과연 소금과 빛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소금은 그저 소금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음식 속에서 자신이 없어짐으로 그 음식을 싱싱하게 유지시킬 때 “소금다운” 것이다. 빛도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써 어둠을 밝힐 때 빛답다고 할 수 있다. 환한 대낮의 양초불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불은 아무리 작은 양초라도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내적 성장으로 인해 그 모습이 건재하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아픔과 어두움에 별 영향을 못 미치는 성장이라면 그 교회를 참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감당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지역사회를 향해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본질적 의미의 교회,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주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을 매고, 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16:19). 즉 천국의 상황을 가장 잘 소개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소개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혹은 성도)가 잘못하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마태23:13). 또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향하여 엄숙한 사명을 주고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이 구절을 분석해 보면 맨 위에 머리되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몸 역할로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의 발 아래 만물, 즉 세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결코 세상의 정치가, 경제가, 학자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 정치가들이 운영하는 세상에 왜 이렇게 죄가 만연한가? 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이 진정한 소망과 가치관을 주는가? 왜 세상은 이토록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 다원주의로 흘러 가는가? 경제가들이 섬기는 세상에 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라고.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상을 높여 주는 것 같아서 신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어야 할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실까? 바로 교회라고 생각하는 우리 개개인(개인이 성전이므로-고전 3:16), 성도들의 모임(마18:20), 개교회, 교단, 교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보편교회 등이 공동적으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일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 훼퍼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교회를 정의하였다 –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 교회가 된다.”(The church is only the church when it is for others)


나는 개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이다. 많은 회개를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목회를 하는 순간 마다, 수 없이도 많이 “내 교회”, “내 교회” 하면서 지내왔다. 이웃교회의 성장이나 부흥, 혹은 침체에 남 몰래 이기적인 생각, 냉소적인 마음을 가져온 적이 수 없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교회의 목표가 교회의 성장”이라는 잘못된 교회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웃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때 내가 섬기는 교회가 같이 기뻐할 수 없다면 그곳에 무슨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는 말인가? 교회의 목표가 분명히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면 개교회는 교회 안의 성도 간에, 개교회 간에, 보편교회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그 개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2001년 연말에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기도를 계속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계속 내 영혼을 울렸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8년 정도의 부교역자 생활과 7년 정도의 담임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내 눈으로 생생하게 체험한 것이 있다.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어느 일정 기간 성공하게 보이고, 외적으로 훌륭하고 인기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조차 결코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평가를 받는 것을 보았다 –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평범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 듯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적인 복을 주시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의 내면은 영적 성숙과 평강, 기쁨으로 넘쳐 흐르고, 그들이 섬김는 삶의 영역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많은 영혼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능력을 소개해 주고는 하였다.


마태복음 16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진정으로 우리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그 날에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는 날이다. 그 평가는 결코 세상적 기준으로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학력, 재력, 지위 등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영역에서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했느냐 안 했느냐에 하나님은 평가의 기준을 삼으실 것이다.


그 때 받을 상급을 신약성경에서는 면류관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약에 모두 몇 개의 면류관이 등장하는지 아는가? 그리고 그 면류관은 어떤 자들에게 주는 것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까지 포함하면 모두 6개의 면류관이 나온다.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영광의 면류관(벧전5:2-4), 의의 면류관(딤후4:8), 그리고 가시 면류관(요19:2). 이 면류관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면류관은 “인내”와 “절제”로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나머지 네 개는 “전도”와 “양육”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미국 전역에 목회자와 개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 있다. “Prayer Summit”이라고 한다.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에도 이 Prayer Summit 모임이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도하며, 일 년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기도만 하는(?) 이상한 수련회를 한다. 이 때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올해 이 모임을 참석하면서 한 번 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각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물론 서로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회자가 이 Prayer Summit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coordinate한 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사역이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의 연합(unity)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열성적으로 뛰신 분이시다. 정말로 열심히 헌신한 분이셨기에 누구나 다 그 분의 마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 분의 열정을 알고 있었다.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나와서 그 분의 머리에,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가장 뜨겁고, 가장 열정적인 중보기도, 감사기도의 순간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 건설은 누구에게나 감사한 일, 감격적인 일이다. 반면 내 나라 건설은 나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다. 교회가 그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최선을 다할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세상에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개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유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진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로의 결정마저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맡긴다면 그는 참다운 의미의 방주를 이룩한 것이다. 학사에서 석사, 석사에서 박사과정에로의 진급을 학문과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계속하려고 한다면 그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상급학교로 진급하려고 하는 나의 동기 속에는 내 인생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평강과 기쁨 속에 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학비 때문에 진로결정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성적 때문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어느 정도 고난에 대한 인내가 따른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 속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성도 간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다른 성도가 잘 할 때 그 성도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성도 간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된 것이다. 이웃 교회를 위하여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섬기려는 노력을 할 때 교회는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 건설 목표는 단지 지역교회, 한인교회 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에는 4-5천여개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한다. 수많은 이 한인교회에는 미국교회는 없는 커다란 영적 장점이 있다. 곧, 기도의 열정, 봉사의 열정, 그리고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열정 등은 여느 미국교회가 따라오기 힘든 큰 장점이 된다. 물론 미국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도 많다. 그들은 좀 더 오랜 역사 속에서 정립된 성숙함, 합리성, 경험 등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한인교회들이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인교회들은 보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안 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와 흑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 간에 그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전통과 문화가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융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아시안 교회가 들어가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아시안 교인들은 백인들과도 관계를 가질 수 있고, 흑인들과도 동감의 면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문제도 아니고, 정치 문제도 아니다. 그 깊은 내면 속에는 날로 다양하게 되어가는 인종들을 어떻게 융화로 이끌어 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숨어있다. 진정한 의미의 “United States”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이코스타(eKOSTA)에 게재하려고 쓰고 있다. 유학생이 주 대상인 코스탄들에게 내가 왜 이민교회, 미국교회를 이야기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코스탄들이 코스타를 잘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목표설정이다. 코스탄의 목표는 코스타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이 목표가 동감이 된다면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앞으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하나님 나라 건설 자체에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탄들은 이민교회, 이민성도, 2세, 영어권, 아시안 교회, 미국교회 등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모여서 3박 4일동안 기도만(?)하는 Prayer Summit 수련회 장소이다. 오늘 아침 마지막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나는 이런 헌신의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제가 섬기고 있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하기를 헌신합니다. 학교를 지날 때는 그 학교를 위해서, 교회를 지날 때는 그 교회를 위해서, 식당을 지날 때는 그 식당을 위해서, 병원을 지날 때는 그 병원의 직원들과 환자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될 때까지 먼저 기도로 헌신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구체적 지혜, 용기, 능력, 실천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다음 해 Prayer Summit을 할 때까지, 일 년 동안 나는 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기도를 계속, 간절히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없어지는” 한 줌의 소금, 한 개의 촛불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이보다 더 귀한 생이 어디 있겠는가?

[무명의 형제] 정직훈련

이코스타 2002년 1월호

하나님은 ‘정직훈련’으로 나를 초대하시는데, 두 분의 신앙선배들을 사용하셨다.

그 당시 신학 대학원을 다니고 계셨던 한 전도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나는 이 ‘정직훈련’에 대한 첫 초청장을 받은 셈이다. 그 분이 한 대기업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예수님을 영접한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던 중에 정직할 것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얼마나 거짓말을 자주 하고 정직하지 못한지를 생각해 본 후에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즉, 다음날부터 어떤 상황에서든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건 간에, 거짓말을 한 바로 그 순간 말을 멈추고 기도하기로 결심을 했다. 거기에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거짓말, 소위 말하는 하얀 거짓말, 그리고 필요치 않은데도 심히 과장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기로 했다. 여러분 같으면 하루에 얼마나 멈추어야만 할 것 같은가? 그 분은 자기가 순간적으로 거짓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다음날 25 번 대화를 중단하고 기도했어야만 했다고 한다. 수치감과 당혹감,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인해, 때로는 대화 중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어야 했고, 때로는 북받쳐 오는 분노와 절망으로 인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화장실로 도망쳐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 다음날도 동일하게 하기로 했다. 여러분 같으면 그 다음날에 몇 번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는 그 다음날에도 23번이나 대화를 멈추고 기도했어야만 했다고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첫날의 25번의 거짓말이 아니라 바로 두 번째 날에 겨우 2번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순수하게 기도하며 순종하기로 결심을 했다면, 그리고 그런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단을 했다면, 나는 그 다음날에는 거짓말 하는 횟수를 최소한 반 이하로 줄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2번을 줄였다니 ! 지금도 그렇지만 그 얘기를 들었던 당시 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한 죄성에 대해 참으로 피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에 2번 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충격을 받았던 것 갔다. 지금은 나라도 그렇게 많이 줄이지는 못했을 것을 인정한다. 어쨌든 그 분이 자연스럽게(?) 정직할 수 있게 된 데는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습관적으로, 상습적으로 해 오던 거짓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죄성이 우리 자신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일례라고 생각한다.

그 분의 간증과 나눔을 통해서, 나 자신의 본성인 죄를 이기고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이든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나도 “정직훈련”을 시작했다. 뭐 그 분처럼 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고 나름대로 가능하면 정직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내가 자주 거짓말을 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직접 하루동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분에 조금도 뒤지지 않게 거짓이 몸에 베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의 도전은 비슷한 시기에 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였다. 그 목사님이 신학공부를 하면서 성품 훈련을 할 때,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의 못된 성품이 표출될 때마다 한끼씩 굶기로 했었는데, 처음에는 수도 없이 굶어야만 했었다고 설교 말씀 중에 본인의 경험을 나누며 청년들에게 도전을 하셨다. 그리고 최근의 예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불법으로 복사해서 쓰고 있었는데, 매번 등록하라는 창을 읽다가는 요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삭제했다는 경험을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는 충격이었던 것이 문제 의식이나 죄책감 없이 누구나 책 복사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복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분들을 통해서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두 분의 경험과 도전을 통해서 “정직훈련”으로 초대되어 훈련받기 시작한지가 지금은 벌써 8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다시 한번 이 훈련을 받게 되었고 -물론 평생을 거쳐 받을 훈련이지만- 이 경험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나는 의공학용 초음파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지난해 여름에 예상치도 기대치도 못하고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좋은 초음파 장비를 빌려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몇 사람이 주어진 예산안에서 그보다 훨씬 못한 장비라도 빌리려고 2년 동안 시도하다가 경비와 안전규율 등의 문제로 작년 봄 이후로 포기하고 있었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지도교수를 통해 35만불이나 되는 아주 좋은 장비를 무료로 2주 동안 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했다. 장학생(長學生 not 奬學生)을 졸업시키고, 부족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인도하심이라고 본인은 확신한다. 어쨌든 촉박하게 결정된 일이라 급하게 실험준비를 하고는 그 장비를 2주 동안 최대한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보통은 돼지 피를 사용해서 실험을 하는데, 실험 결과가 아주 예상한 것 이상으로 좋았다. 몇 년 전에 우리 실험실 석사 학생이 관찰을 했었으나 아직 학회에 보고되지도 않았고, 그때도 역시 짧은 기간에 비교적 좋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때 한번 관찰한 이후로 장비의 한계로 관찰할 수 없었던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변수를 바꿔가며 실험을 해서 그 현상을 어느정도 까지는 해석하고 그 원인까지도 분석할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혹시나 하면서 본인의 목 부근의 동맥을 관찰을 해 보았는데, 아주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흥분이 되었고,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과 실험실 몇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받아 두었다. 그리고 나서 한 달 동안 기초 자료 분석을 한 후에 학술 발표에 요약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지도교수가 갑자기 사람 관련된 실험을 학회에 발표하려면 학교 쪽에 안전 허가를 받아야 될 것 같으니 알아보라는 것이다. 의공학용 초음파 장비는 이미 안전규율에 따라 제작되고 있고 일반 병원에서도 진단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장 안전한 방법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기에,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비서류들을 준비하여 허가를 받으려고 자료를 찾아 읽어보니, 모든 사람 관련된 실험은 심지어 설문조사까지도 “반드시” 실험 전에 학교측에서 안전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몇몇 실험실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서 그냥 실험 날짜만 바꾸어 앞으로 할 실험인양 꾸며서 허가를 받고, 그 후에 학회발표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서류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낌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워낙 안전한 방법이기에 아무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와 실험실 사람들은 상관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생각과 계획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그것을 깨달았는지 그 과정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그 주에 영국에서 유학온 한 크리스찬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자신의 삶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전 주 토요일 교회의 한 집회에서 도전을 받아서 운전을 할 때 속도 위반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도 분명 안전을 생각하면 통상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다른 차들을 따라서 대략 최고 속도보다 시속 5마일 정도 빨리 달려야 되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이것은 안전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비록 덜 안전하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를 하였다. 참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결심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생각이나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날 하루 종일 그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운전과는 상관 없는 내 자신의 안전허가 계획과 연관이 지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그 연관성을 억지로 부인하며 합리화시키고 그냥 묻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더불어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정직훈련’이 다시 생각나는 것이다. 전에 말씀드렸던 그 두 분의 도전을 받은 얼마 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거나, 책을 읽을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정직’이라는 단어가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어 피할 수 없이 직면했어야 되었다. 그 때 당시 성경에는 온통 ‘정직’이란 말만 가득 써 있는 듯이 느꼈었는데, 최근에 한번 서치 엔진을 사용해서 세어 보았었는데, 실제로는 170여 번에 걸쳐 정직이란 단어가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내가 처음으로 통과해야 했던 정직 훈련의 큰 관문은 바로 인생을 건 일이었다. 그때 다니던 대기업 회사에 사표를 내고 미국의 한 명문 사립대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었는데, 비자 신청을 준비하던 중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무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여러 가지 사인을 통해서 결국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방법대로 통장에 돈을 빌려서 잔고 증명서를 준비해서 제출하는 임시방편이 거짓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래서 부모님과 형제들만이 최악의 경우에 보태줄 수 있는 최대한도의 약속된 액수만큼 만을 잔고 증명에 넣어서 서류준비를 했다. 그때 당시 총 마련할 수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통장에 있는 액수를 다 합쳐 보니 충분치는 않았지만 1년 학비와 생활비 정도가 되었고 그러면 될 줄 알았었는데, 여지없이 재정부족으로 비자 거부를 받았다. 그래서 결국은 1년을 기다렸어야 되었는데, 경제적으로 나아진 상황은 없고, 또 회사는 이미 그만둔 상태여서 돌아갈 수도 없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던 상황처럼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서, 다른 소망없이 유학갈 것에 대한 분명한 사인을 보내 주셨던 주님만을 기대하며 마치 홍해가 갈라졌던 것처럼 유학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1년이 늦춰지기는 했지만 다시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이렇게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다리던 1년 동안 하나님이 참으로 많은 축복을 해 주셨다. 철저히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고, 어머님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고, 두 분 형님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는데 함께 옆에 있어줄 수 있었고, 그리고 또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국비 장학금까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유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을 걸었던 ‘정직 훈련’을 거쳤던 기억과 그리고 그 과정이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얼마나 큰 유익들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복들이 있었는지를 다시 아주 생생하게 기억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한편으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때는 그때고 이번에는 다른 상황이며, 그리고 이것은 모르고 한 일이고 아무 해도 없고 안전한 것이라는 합리화, 나뿐만 아니라 지도교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등의 핑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방법이 떠 올랐다.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며 동의와 허가사인을 받는다면, 내 책임을 교수한테 어느정도 떠 넘겨서 회피할 수 있고, 또 그러면 나 자신과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서류들을 날짜를 바꾸어서 준비를 해서 교수를 찾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영악하다 못해 사악하기까지 한 도무지 가능성 없고 구제불능인 내 자신의 모습임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런 나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책망도 없이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고 권면 하셨다. 바로 교수를 찾아가려던 그 날에 사전에 예고도 없이 지도교수가 여행을 떠나셨는데, 그것도 해외로 15일씩이나 가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이쯤 되면 두 손들고 기쁘게 순종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막상 정직하게 허가 신청을 할 생각을 하니 근심과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만약 허가를 못 받으면 졸업이 늦춰지고, 학회 발표도 취소가 될 텐데, 또 만약 학교 기관에 사실대로 알렸다가 무슨 부당한 처분은 받지 않을까? 그리고 또 더불어 지도교수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까? 등등의 염려가 몰려오기 시작해서 이번만은 그냥 계획대로 실험 날짜를 바꾸어서 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날짜를 바꾸어서 논문 하나를 더 내고 싶다는 욕심이 강하게 들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피할 수 있고 간단하고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이유로 들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얼마나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며, 편리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세상방법을 좇고 하나님 방법을 택하지 않는지를 어찌 이보다 더 여실히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몸서리 쳐지게 자기합리화와 자기 본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참 좋은 하나님은 이런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그런 다음날 말씀을 묵상하는데, 본문이 신명기 28장 1-14 이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복을 주시며 심지어 자손에게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마주 대하게 되었다. 정말로 하나님은 나에게 순종을 원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게 되며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받을 복이 세상방법을 포기했을 때 잃어버릴 손해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대의 손실 이래봤자 졸업 조금 늦어지는 것, 최악의 경우 학회 발표 하나를 못하고 논문 1개를 더 쓸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잃게 된다는 간단한 산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몰려오는 염려와 두려움 없이 기도하면서 심지어는 기대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정직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교 담당자를 만나서 솔직하게 상황을 얘기하였고, 상담을 하니 그래서는 안되지만 즉흥적인 실험이었고 알지 못하고 한 일이기에, 한번만은 실험 후에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결국에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올해 초에 드디어 거짓없이 정당한 방법으로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0년에 가깝게 ‘정직훈련’을 해 나오면서 쉽게 빠졌었던 두 가지 오류들을 지적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님께 이렇게 정직 훈련을 하게 되면서 나보다 더 정직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너무 쉽게 교만해지고 우월해지기 쉽고, 그래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갖추고 타인을 판단하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잘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정직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그리고 아직도 많은 부분들을 잘 하고 있지 못하면서도 자기 의가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쩌면 이것은 부정직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모습일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짜피 완벽할 수 없으니까, 쉽게 포기하고 도전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으며 은혜의 하나님만을 얘기하는 모습이다. 특별히 나를 비롯한 한국 교회의 많은 기독신자들은 이런 모습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나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과 실수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없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의 깊은 죄성과 한계에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열심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각자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편집부] 미운오리새끼 신드롬에 걸린 그리스도인

이달의 초점


미운오리새끼 신드롬에 걸린 그리스도인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백조인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알지 못한채,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낙망하다가 언젠가 백조가 된다는 동화이다. 어릴적, 이 동화를 읽으며 미운 오리새끼가 스스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들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수년간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주위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 천사와 같이 보이기 십상이다. 도무지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는 끓어오르는 거룩에의 열망을 가졌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 잘 모르는 탓에 좌충우돌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따라하면서 ‘크리스천 문화’와 ‘교회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성품과 삶의 기준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삶의 기준이나 성품의 기준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들은 깊은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 보통 이들이 듣게 되는 ‘충고’는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받지 말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진정으로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충고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각종 수뢰,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연루된 것으로 나오는 집사, 장로들. 자신 부부의 포르노 테이프를 판매하다가 적발된 목사 부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승계하는 제왕적 ‘당회장’들.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목사들의 성적 부정 문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서도 전혀 비복음적인 대내외 정책을 펴는 미국의 정치인들.


지나치게 먼 곳(?)에서 예를 들어 피부와 와 닿질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포르노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어느 성경공부 조장, 매일 아침 QT를 하면서도 직장, 승진, 성공 등 개인의 이익(interest)이 걸린 일이라면 복음과 무관하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어느 집사님, 매일 아침 ‘주여, 주여’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지만 자신 자녀의 음악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입시 담당관 교수에서 돈 봉투를 내미는 한 권사님, 자기 자녀의 결혼 상대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 안정성을 복음적 가치보다 우선에 두며 심지어는 택일을 위해 점집에 찾아가는 장로님.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저 ‘사람의 연약함’에만 탓을 할 것인가. “남들도 다 그러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수 없지” “우리교회 장로님들도 그러는데” 라며 초신자들에게 한수 가르칠 것인가.


분명 성경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example)라면 충분히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합당한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삶의 기준을 삼는 사람들을 찾기가 의외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의 예를 찾아보자.


박해가 아주 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시대.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며, 부서져 너덜거리는 육체가 영과 분리되려 하는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받는 일이 어디 있으랴!’ 라며 당당하게 순교하였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명문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젊은 나이에 에쿠아도르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짐 엘리옷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잠깐의 타협으로 신앙의 양심을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와 같이 한국말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들 양아들로 삼은 ‘새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들을 편만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정을 저지르는 직장의 사업 방침에 반대하다가 왕따를 당한 회사원, 자신의 연구업적을 부풀리지 않고 정직하게 이야기했다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포스트 닥(post-doc), 미국 최고의 학교에서 입학허가(admission)을 받고도 비자 서류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가 비자를 거부당해 유학을 포기한 학생 등등…


언제까지 우리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그저 하늘을 나는 멋진 백조를 바라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가 끊을 수 있는 죄의 고리들을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핑계 뒤에 감추어두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하신 명백한 명령을 언제까지 ‘아직은 부족합니다’는 거짓된 겸손으로 가려둘 것인가.

[무명의 형제] 정직훈련

이달의 초점


정직훈련


하나님은 ‘정직훈련’으로 나를 초대하시는데, 두 분의 신앙선배들을 사용하셨다.


그 당시 신학 대학원을 다니고 계셨던 한 전도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나는 이 ‘정직훈련’에 대한 첫 초청장을 받은 셈이다. 그 분이 한 대기업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예수님을 영접한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던 중에 정직할 것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얼마나 거짓말을 자주 하고 정직하지 못한지를 생각해 본 후에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즉, 다음날부터 어떤 상황에서든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건 간에, 거짓말을 한 바로 그 순간 말을 멈추고 기도하기로 결심을 했다. 거기에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거짓말, 소위 말하는 하얀 거짓말, 그리고 필요치 않은데도 심히 과장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기로 했다. 여러분 같으면 하루에 얼마나 멈추어야만 할 것 같은가? 그 분은 자기가 순간적으로 거짓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다음날 25 번 대화를 중단하고 기도했어야만 했다고 한다. 수치감과 당혹감,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인해, 때로는 대화 중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어야 했고, 때로는 북받쳐 오는 분노와 절망으로 인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화장실로 도망쳐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 다음날도 동일하게 하기로 했다. 여러분 같으면 그 다음날에 몇 번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는 그 다음날에도 23번이나 대화를 멈추고 기도했어야만 했다고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첫날의 25번의 거짓말이 아니라 바로 두 번째 날에 겨우 2번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순수하게 기도하며 순종하기로 결심을 했다면, 그리고 그런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단을 했다면, 나는 그 다음날에는 거짓말 하는 횟수를 최소한 반 이하로 줄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2번을 줄였다니 ! 지금도 그렇지만 그 얘기를 들었던 당시 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한 죄성에 대해 참으로 피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에 2번 밖에 줄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충격을 받았던 것 갔다. 지금은 나라도 그렇게 많이 줄이지는 못했을 것을 인정한다. 어쨌든 그 분이 자연스럽게(?) 정직할 수 있게 된 데는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습관적으로, 상습적으로 해 오던 거짓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죄성이 우리 자신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일례라고 생각한다.


그 분의 간증과 나눔을 통해서, 나 자신의 본성인 죄를 이기고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이든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나도 “정직훈련”을 시작했다. 뭐 그 분처럼 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고 나름대로 가능하면 정직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내가 자주 거짓말을 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직접 하루동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분에 조금도 뒤지지 않게 거짓이 몸에 베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의 도전은 비슷한 시기에 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였다. 그 목사님이 신학공부를 하면서 성품 훈련을 할 때,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의 못된 성품이 표출될 때마다 한끼씩 굶기로 했었는데, 처음에는 수도 없이 굶어야만 했었다고 설교 말씀 중에 본인의 경험을 나누며 청년들에게 도전을 하셨다. 그리고 최근의 예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불법으로 복사해서 쓰고 있었는데, 매번 등록하라는 창을 읽다가는 요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삭제했다는 경험을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는 충격이었던 것이 문제 의식이나 죄책감 없이 누구나 책 복사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복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분들을 통해서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두 분의 경험과 도전을 통해서 “정직훈련”으로 초대되어 훈련받기 시작한지가 지금은 벌써 8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다시 한번 이 훈련을 받게 되었고 -물론 평생을 거쳐 받을 훈련이지만- 이 경험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나는 의공학용 초음파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지난해 여름에 예상치도 기대치도 못하고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좋은 초음파 장비를 빌려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몇 사람이 주어진 예산안에서 그보다 훨씬 못한 장비라도 빌리려고 2년 동안 시도하다가 경비와 안전규율 등의 문제로 작년 봄 이후로 포기하고 있었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지도교수를 통해 35만불이나 되는 아주 좋은 장비를 무료로 2주 동안 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했다. 장학생(長學生 not 奬學生)을 졸업시키고, 부족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인도하심이라고 본인은 확신한다. 어쨌든 촉박하게 결정된 일이라 급하게 실험준비를 하고는 그 장비를 2주 동안 최대한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보통은 돼지 피를 사용해서 실험을 하는데, 실험 결과가 아주 예상한 것 이상으로 좋았다. 몇 년 전에 우리 실험실 석사 학생이 관찰을 했었으나 아직 학회에 보고되지도 않았고, 그때도 역시 짧은 기간에 비교적 좋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때 한번 관찰한 이후로 장비의 한계로 관찰할 수 없었던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변수를 바꿔가며 실험을 해서 그 현상을 어느정도 까지는 해석하고 그 원인까지도 분석할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혹시나 하면서 본인의 목 부근의 동맥을 관찰을 해 보았는데, 아주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흥분이 되었고,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과 실험실 몇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받아 두었다. 그리고 나서 한 달 동안 기초 자료 분석을 한 후에 학술 발표에 요약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지도교수가 갑자기 사람 관련된 실험을 학회에 발표하려면 학교 쪽에 안전 허가를 받아야 될 것 같으니 알아보라는 것이다. 의공학용 초음파 장비는 이미 안전규율에 따라 제작되고 있고 일반 병원에서도 진단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장 안전한 방법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기에,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비서류들을 준비하여 허가를 받으려고 자료를 찾아 읽어보니, 모든 사람 관련된 실험은 심지어 설문조사까지도 “반드시” 실험 전에 학교측에서 안전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몇몇 실험실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서 그냥 실험 날짜만 바꾸어 앞으로 할 실험인양 꾸며서 허가를 받고, 그 후에 학회발표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서류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낌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워낙 안전한 방법이기에 아무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와 실험실 사람들은 상관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생각과 계획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그것을 깨달았는지 그 과정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그 주에 영국에서 유학온 한 크리스찬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자신의 삶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전 주 토요일 교회의 한 집회에서 도전을 받아서 운전을 할 때 속도 위반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도 분명 안전을 생각하면 통상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다른 차들을 따라서 대략 최고 속도보다 시속 5마일 정도 빨리 달려야 되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이것은 안전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비록 덜 안전하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를 하였다. 참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결심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생각이나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날 하루 종일 그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운전과는 상관 없는 내 자신의 안전허가 계획과 연관이 지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그 연관성을 억지로 부인하며 합리화시키고 그냥 묻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더불어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정직훈련’이 다시 생각나는 것이다. 전에 말씀드렸던 그 두 분의 도전을 받은 얼마 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거나, 책을 읽을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정직’이라는 단어가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어 피할 수 없이 직면했어야 되었다. 그 때 당시 성경에는 온통 ‘정직’이란 말만 가득 써 있는 듯이 느꼈었는데, 최근에 한번 서치 엔진을 사용해서 세어 보았었는데, 실제로는 170여 번에 걸쳐 정직이란 단어가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내가 처음으로 통과해야 했던 정직 훈련의 큰 관문은 바로 인생을 건 일이었다. 그때 다니던 대기업 회사에 사표를 내고 미국의 한 명문 사립대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었는데, 비자 신청을 준비하던 중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무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여러 가지 사인을 통해서 결국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방법대로 통장에 돈을 빌려서 잔고 증명서를 준비해서 제출하는 임시방편이 거짓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래서 부모님과 형제들만이 최악의 경우에 보태줄 수 있는 최대한도의 약속된 액수만큼 만을 잔고 증명에 넣어서 서류준비를 했다. 그때 당시 총 마련할 수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통장에 있는 액수를 다 합쳐 보니 충분치는 않았지만 1년 학비와 생활비 정도가 되었고 그러면 될 줄 알았었는데, 여지없이 재정부족으로 비자 거부를 받았다. 그래서 결국은 1년을 기다렸어야 되었는데, 경제적으로 나아진 상황은 없고, 또 회사는 이미 그만둔 상태여서 돌아갈 수도 없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던 상황처럼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서, 다른 소망없이 유학갈 것에 대한 분명한 사인을 보내 주셨던 주님만을 기대하며 마치 홍해가 갈라졌던 것처럼 유학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1년이 늦춰지기는 했지만 다시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이렇게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다리던 1년 동안 하나님이 참으로 많은 축복을 해 주셨다. 철저히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고, 어머님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고, 두 분 형님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는데 함께 옆에 있어줄 수 있었고, 그리고 또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국비 장학금까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유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을 걸었던 ‘정직 훈련’을 거쳤던 기억과 그리고 그 과정이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얼마나 큰 유익들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복들이 있었는지를 다시 아주 생생하게 기억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한편으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때는 그때고 이번에는 다른 상황이며, 그리고 이것은 모르고 한 일이고 아무 해도 없고 안전한 것이라는 합리화, 나뿐만 아니라 지도교수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등의 핑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방법이 떠 올랐다.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며 동의와 허가사인을 받는다면, 내 책임을 교수한테 어느정도 떠 넘겨서 회피할 수 있고, 또 그러면 나 자신과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서류들을 날짜를 바꾸어서 준비를 해서 교수를 찾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영악하다 못해 사악하기까지 한 도무지 가능성 없고 구제불능인 내 자신의 모습임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런 나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책망도 없이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고 권면 하셨다. 바로 교수를 찾아가려던 그 날에 사전에 예고도 없이 지도교수가 여행을 떠나셨는데, 그것도 해외로 15일씩이나 가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이쯤 되면 두 손들고 기쁘게 순종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막상 정직하게 허가 신청을 할 생각을 하니 근심과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만약 허가를 못 받으면 졸업이 늦춰지고, 학회 발표도 취소가 될 텐데, 또 만약 학교 기관에 사실대로 알렸다가 무슨 부당한 처분은 받지 않을까? 그리고 또 더불어 지도교수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까? 등등의 염려가 몰려오기 시작해서 이번만은 그냥 계획대로 실험 날짜를 바꾸어서 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날짜를 바꾸어서 논문 하나를 더 내고 싶다는 욕심이 강하게 들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피할 수 있고 간단하고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이유로 들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얼마나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며, 편리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세상방법을 좇고 하나님 방법을 택하지 않는지를 어찌 이보다 더 여실히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몸서리 쳐지게 자기합리화와 자기 본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참 좋은 하나님은 이런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그런 다음날 말씀을 묵상하는데, 본문이 신명기 28장 1-14 이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복을 주시며 심지어 자손에게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마주 대하게 되었다. 정말로 하나님은 나에게 순종을 원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게 되며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받을 복이 세상방법을 포기했을 때 잃어버릴 손해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대의 손실 이래봤자 졸업 조금 늦어지는 것, 최악의 경우 학회 발표 하나를 못하고 논문 1개를 더 쓸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순종하지 않을 때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잃게 된다는 간단한 산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몰려오는 염려와 두려움 없이 기도하면서 심지어는 기대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정직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교 담당자를 만나서 솔직하게 상황을 얘기하였고, 상담을 하니 그래서는 안되지만 즉흥적인 실험이었고 알지 못하고 한 일이기에, 한번만은 실험 후에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결국에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올해 초에 드디어 거짓없이 정당한 방법으로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0년에 가깝게 ‘정직훈련’을 해 나오면서 쉽게 빠졌었던 두 가지 오류들을 지적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님께 이렇게 정직 훈련을 하게 되면서 나보다 더 정직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너무 쉽게 교만해지고 우월해지기 쉽고, 그래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갖추고 타인을 판단하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잘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정직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그리고 아직도 많은 부분들을 잘 하고 있지 못하면서도 자기 의가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쩌면 이것은 부정직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모습일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짜피 완벽할 수 없으니까, 쉽게 포기하고 도전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으며 은혜의 하나님만을 얘기하는 모습이다. 특별히 나를 비롯한 한국 교회의 많은 기독신자들은 이런 모습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나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과 실수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없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의 깊은 죄성과 한계에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열심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각자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영적 성장을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무명의 형제
96년부터 코스타에 참석해 왔으며 현재 펜실베니아 주에서 아내와 함께 쌍둥이 딸을 키우며 공부하고 있다. 원고 마감 직전, 무명으로 이 글을 편집부에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