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 2002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2년 1월호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백조인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알지 못한채,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낙망하다가 언젠가 백조가 된다는 동화이다. 어릴적, 이 동화를 읽으며 미운 오리새끼가 스스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들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수년간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주위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 천사와 같이 보이기 십상이다. 도무지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는 끓어오르는 거룩에의 열망을 가졌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 잘 모르는 탓에 좌충우돌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따라하면서 ‘크리스천 문화’와 ‘교회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성품과 삶의 기준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삶의 기준이나 성품의 기준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들은 깊은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 보통 이들이 듣게 되는 ‘충고’는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받지 말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진정으로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충고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각종 수뢰,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연루된 것으로 나오는 집사, 장로들. 자신 부부의 포르노 테이프를 판매하다가 적발된 목사 부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승계하는 제왕적 ‘당회장’들.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목사들의 성적 부정 문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서도 전혀 비복음적인 대내외 정책을 펴는 미국의 정치인들.
지나치게 먼 곳(?)에서 예를 들어 피부와 와 닿질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포르노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어느 성경공부 조장, 매일 아침 QT를 하면서도 직장, 승진, 성공 등 개인의 이익(interest)이 걸린 일이라면 복음과 무관하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어느 집사님, 매일 아침 ‘주여, 주여’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지만 자신 자녀의 음악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입시 담당관 교수에서 돈 봉투를 내미는 한 권사님, 자기 자녀의 결혼 상대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 안정성을 복음적 가치보다 우선에 두며 심지어는 택일을 위해 점집에 찾아가는 장로님.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저 ‘사람의 연약함’에만 탓을 할 것인가. “남들도 다 그러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수 없지” “우리교회 장로님들도 그러는데” 라며 초신자들에게 한수 가르칠 것인가.
분명 성경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example)라면 충분히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합당한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삶의 기준을 삼는 사람들을 찾기가 의외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의 예를 찾아보자.
박해가 아주 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시대.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며, 부서져 너덜거리는 육체가 영과 분리되려 하는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받는 일이 어디 있으랴!’ 라며 당당하게 순교하였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명문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젊은 나이에 에쿠아도르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짐 엘리옷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잠깐의 타협으로 신앙의 양심을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와 같이 한국말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들 양아들로 삼은 ‘새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들을 편만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정을 저지르는 직장의 사업 방침에 반대하다가 왕따를 당한 회사원, 자신의 연구업적을 부풀리지 않고 정직하게 이야기했다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포스트 닥(post-doc), 미국 최고의 학교에서 입학허가(admission)을 받고도 비자 서류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가 비자를 거부당해 유학을 포기한 학생 등등…
언제까지 우리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그저 하늘을 나는 멋진 백조를 바라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가 끊을 수 있는 죄의 고리들을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핑계 뒤에 감추어두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하신 명백한 명령을 언제까지 ‘아직은 부족합니다’는 거짓된 겸손으로 가려둘 것인가.
Dec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12월호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의 삶의 관심은 분명히 달라졌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았던 삶으로부터 돌이켜, 이제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고 섬기시기 원하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적지 않은 숫자의 Tele-Evangelist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 때문에 종종 비난을 받아왔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비판들 중의 하나는, 설교가들의 메시지들이 가끔 매우 치우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삶이란 많은 경우에 고통과 좌절일 수 있고 잘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지향적인 가치관과 그러한 삶의 태도를 비판하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비판적인 소리들이 나오게 된 뒷 배경에는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입장들이 충돌하고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 한 편의 소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편의 소리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지위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드러나므로 그 사람이 처한 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이다. 어찌 되었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서로 공감을 하지만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심각한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 조직 내에서 리더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상반되는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리더십은 그 사람의 조직 내에서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positional” leadership이며 둘째로는 지위에 상관 없이 영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influential” 혹은 “functional” leadership 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다른 견해의 충돌은 이 각각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의 정황을 둘러보면 리더십이 행사되는 데에 있어서 이 각 양상이 부정적으로 표출되는 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건전한 영향력은 고사하고 조직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치는 사람이 리더의 자리(position)에 앉아 있는 경우나, 혹은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단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위치(position)에 서지 못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소위 구조적인 모순이 극대화된 경우가 그 구체적인 예들이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이러한 “functional leader”가 그의 “positional leadership”의 위치에 서는 경우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은, 이 각각 다른 견해들의 기본 전제로서의 세속에서의 조직의 모습, 즉 “leader”들과 “leadee”들로 구성된 보편적인 공동체의 모습 자체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부터 매우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세속 조직의 사명의 기본 목표는 어떤 “목표”나 “일”을 성취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 조직의 사명을 가장 잘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을 리더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사람들의 역량을 비교와 경쟁을 통해 평가하여 리더를 결정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는 조직 내의 사람들의 ‘관계’보다는 ‘사명의 성취’를 극단적으로 중요시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현재의 조직의 사람들과는 전혀 친밀함의 관계가 없던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로 “모셔오기”도 서슴치 않는다. 이와 같은 행태들은 많은 경우 조직 내에 심각한 갈등들을 초래하게 된다.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사명의 성취’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나머지, 공동체 안의 ‘관계지향’적인 노력들이 무시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의 리더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신명기 17장 14절-2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권 국가의 기반을 닦을 때에 필요한 지침들을 지도자 모세를 통해 주신다. 주목할 것은, 그 “왕”을 세우려는 생각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의 조직을 보고 배운 것에 근거한다는 것이다(14절). 하나님은 정말로 백성에게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 오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세속 조직의 요구 대한 요청을 들어 주시리라는 허락과 함께, 주의할 일, 즉, 왕을 세우는 방법과 그 왕이 어떠한 삶의 기본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가에 대한 지침을 주고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십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리더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공동체 안에서의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관계는 마치 피를 나눈 가족 형제와 같은 “하나됨”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리더는 공동체 지체들의 모든 삶의 정황들, 고통과 아픔과 기쁨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즉, 네 형제 가운데에서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15절). 그렇다면 리더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결코 “저들을 위해….”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 대해 가졌던 기본 자세이며(예: 이사야53:6)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던 중보자의 자세인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리더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대한 기본 원리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된 자가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16절). 이 말씀에는 다분히, 리더는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의지할 것이지 결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경계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끝에 굳이 병마를 많이 구하기 위해 애굽땅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강조하신다. 더불어서,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전에 이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 즉 애굽땅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결정들은 더 큰 기본 원리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리더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안목으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안목은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 절대적 가치 기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 가치 기준이란 말씀의 원리인 동시에 기도를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셋째로 볼 수 있는 원리는, 리더는 죄의 예방에 대한 전술이 탁월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미혹하는 요소들을 미리, 체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된 자는 “많은 아내를 두지 말 것”과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17절).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마음이 미혹되어진다고 경계하신다.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유혹의 자리를 피하고, 유혹의 시간을 갖지 않고, 유혹의 대상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어야한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도 이 예방의 전략에 철저하지 않을 때에 너무도 쉽게 넘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넷째 원리는, 리더는 말씀을 일생동안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왕이 된 자는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명령하신다(18-19절).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율법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제사장앞에서 왕은 자기 손으로 필사해야한다(18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손으로 한 자 한 자 필사해가는, 말씀앞에서 낮아진 리더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여주시는 원리는, 리더는 행동과 더불어 중심으로 섬기는 자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비록 겸손하게 되지 않더라도 그 겉으로 표현하는 태도가 겸손해야 한다는 정도의 겸손이 아니다. 그의 마음 자체가 그 형제위에 교만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that his “heart” may not be lifted up above his countrymen that his heart may not be lifted up above his countrymen 20절). 다시 말하면, 겉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속마음까지도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되려면 섬기는 리더의 내면에서 혁명이 일어나야한다. 바로 이 말씀이 지적하시듯이, 그 내적 혁명은 살아있는 말씀과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혁명으로서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9-20절).
우리 모두가 공감하다시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그의 공생애동안 섬기는 리더로서의 완전한 모범을 사시었다. 사실 주님의 세상에 오셔서 섬기신 모습은 “positional leadership”도, “influential leadership”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유력한 지도자의 “지위”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속적 조직력”을 갖고 섬기시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주님은 자신의 “비천한” 사회적 신분을 인정하시면서 단순히 “영향력”만을 행사하신 분도 아니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능욕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범죄한 세상을 위해 다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된 삶의 정황가운데에 들어오셨던, “leadership of living-together”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것은 세속의 어떠한 위치로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어떤 영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섬김의 모습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목숨까지 주시는 사랑, 즉 가장 낮아지신 섬김의 자리, 그 섬기셔야 할 사람들의 상황안에 오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섬김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주님은 더 낮은 자리에 서시는 그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주님의 그 수많은 섬김의 모습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마를 향한 섬김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주님을 보지 못했던 그는 나중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며칠후, 주님께서 이 도마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도마가 말한 그대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영광의 몸이 될 것을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다. 그러기에 모든 연약함과 눈물이 없는 영광의 몸이 될 것을 우리는 감격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몸은 다르다. 그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있다. 그 몸에 그 상처들을 그대로 갖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도마의 연약한 믿음을 세우시기 위해서였다고 믿는다.
험악하고 사랑이 식어진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가나안의 정복되지 않은 나라들속에 섞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같다. 그러나 오래 전, 한 백성공동체를 택하셔서 가나안 땅의 족속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죽음으로 내어주신 이 세상의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기위해 그리고 그들이 더 성숙한 자리로 들어가도록 하기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섬기는 리더들이 구름과같이 일어나기를 소원하며, 나 또한 그렇게 되기를 훈련하며 또한 행동할 때이다.
Nov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11월호
글을 시작하면서
쑥스럽지만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함으로써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내게는 현재 아들이 하나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미래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짓게 될 이름을 미리 생각해 놓았었다. 딸일지 아들일지를 그 당시로서는 모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별에 관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이다. 내 아이에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us)라는 개념을 심어 주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그 아기가 자라서 지금은 일곱 살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를 잘 섬기고 있다. 현재 내 아내는 뱃 속에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데, 아내와 고심 끝에 이번에는 이런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딸이면 “하나”(1)로, 아들이면 “원”(one)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과는 많이 동떨어진 현대의 이기적, 개인적 사회를 살면서 조금이라도 주님 뜻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심정을 여러분께서 알아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다.
유언은 귀중한 것
유언이란 언제나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유언에 해당하는 말씀이 무엇일까?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이다. 그런데 이 기도 중 마지막 부분이야말로 유언 중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내용이 구분된다.
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믿는 무리들이 하나가 되어야 함.
2) 성도가 하나가 될 때 하나님 안에 있게 됨.
3) 그런 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됨.
하나되신 삼위일체 하나님
위와 같은 기도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점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됨”이며, 이를 가리켜 우리는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하실 때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계신다(창1:26, 창3:22, 창11:7 등등).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실 때는 “우리”라는 복수적 연합(plural unity)의 표현을 많이 하시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중요한 구절이 된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라고 표현하심으로 공동체, 하나됨의 모습을 전달해 주신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됨, 연합을 좋아하는 분이시다.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다른 무리들을 그냥 무리 지음이 아닌, 진정한 연합, 즉 갈등과 차이를 극복하고 소화해 냄으로 진정한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참조. 로마서5:1, 8).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됨은 통합이나 균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각각 다른 역할이 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 사역 후 성령 하나님이 인도와 보호의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내가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요16:7)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는 실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연합(Unity in Variety)이라는 진정한 하나됨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됨을 이룬 공동체 안에 있는 각 개체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 자아에 대해서도 소중한 자아관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그 개체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됨을 이룩”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안”이라는 말은 “in”과 “among”, 둘 다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의 심령 안에 천국이 있기도 하지만, 믿는 성도 개개인이 모여서 하나됨의 공동체를 이룩할 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표로는 내적, 외적인 두 가지의 길이 있다. 곧, 구원받은 성도는 내적으로는 “평안”을 이루어야 하며, 외적으로는 “하나됨의 공동체”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관계적으로 하나됨이 부족할 때 구원의 감격과 능력은 약해진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개교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보편교회(Universal Church) 개념에 헌신하지 않게 되면, 참다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맛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구원의 감격을 많이 상실한, 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전도의 문을 막지 말라
반대로 성도가 하나됨을 이룩하고 개 교회가 모여 보편교회의 하나됨을 이룩하게 될 때,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되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쉽게 떠나는 이유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민 목회를 연구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이민 가정에서 자라난 2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을 들어가면서 그들의 90퍼센트 이상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에 남았던 나머지 10퍼센트마저도,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에 들어가면서 그들 중의 90퍼센트가 또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교회 내에서 분열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고, 1세와 2세의 갈등과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됨을 이룩하지 못할 때 교회 자체가 전도의 문을 막게 된다는 심각한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곧 하나됨의 공동체를 통해 천국을 보게 될 때이기 때문이다.
시너지(synergy) 효과라는 말이 있다. 말 한 필과 또 다른 말 한 필로 하여금 함께 물건을 끌게 하면, 두 필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네 필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도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한다고 했고, 두 사람이 함께 누울 때 더 따뜻해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하나됨의 명령과 능력을 의지하면서 내가 섬기고 있는 지역인 앤아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합 운동을 살펴 보면서, 연합에 대한 몇가지 실제적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참된 연합은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이룩되는 것
주민 1천명, 학생 7백여 명으로 한인 인구가 대략 1,70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 앤아버 지역에는 10여 개의 한인교회와 약 300여 개의 미국 교회가 있다.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이 있는 대학도시 지역이므로, 비교적 각 교회마다 청년의 숫자가 타 지역에 비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3년 전, 몇몇 청년들의 제안으로 각 교회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갖기로 했다. 격주로 토요일마다 오전 9시에 모여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찬양과 기도 시간으로 가졌다. 처음에는 다른 교회 사람들과의 만남을 어색해 하는 모습도 있었고, 또 약간의 경쟁심(?)같은 것도 있었고, 모임이 잘 되니까 더 많은 연합 행사와 발전적 프로그램을 갖자는 제안도 나왔다. 그리고 찬양과 기도보다는 그 시간 후 잠시 갖는 토론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듯 하기도 했다. 결국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하나됨 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자랑, 주장에 더 많이 마음을 쓰는 쪽으로 기울게 됐고, 당연히 처음에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이 금방 식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 때, 몇 명의 신실하게 섬기는 분들이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의 모임은 찬양과 기도”만” 하는 모임으로 하자고. 찬양과 기도로 뜨거워진 마음들을 함께 모아 각자의 교회에 가서 잘 섬기도록 하자고. 이 제안 이후로 토론과 회의도 짧게, 다른 교회 사람들이 몇 명 나오는가 등에 신경을 쓰지 않고, 1시간 이상을 찬양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다 나오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묶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3년 전에 시작된 이 연합 찬양기도(Unity Praise and Prayer) 모임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하나됨이 있게 되자, 그 결과가 풍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일년에 2-3차례, 앤아버 전(全) 한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합 찬양과 기도 집회를 열 수 있게 되었으며, 해마다 9월이 되면 신입생들이 많이 오는 앤아버 지역에 각 교회를 소개하는 연합 안내지를 함께 내게도 되었다. 또 이러한 연합의 불길은 인근 지역인 디트로이트 지역에도 일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앤아버와 디트로이트 지역이 다양성과 연합이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모여서 찬양과 기도하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자세일 것 같지만, 가장 “큰” 일을 낳게 된다. 하나님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희생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하나됨
외적으로 보기에 하나됨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고, 힘을 합하기에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그냥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화해하시고 우리와 부모-자녀의 관계, 즉 가족과 같은 하나됨을 이룩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감행하셨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희생 없이는 결코 하나됨이 이룩될 수 없다.
앤아버 지역에서는 부흥 집회나 특별 세미나, 수련회 등이 각 교회 별로 열릴 때, 타 교회 교인들이나 청년들도 많이 참석하곤 한다. 타 교회에 교인을 빼앗길까봐 이웃 교회 부흥회 광고도 잘 안 하는 이민 교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앤아버의 상황은 다르다.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힘껏 돕는 모습이 많다. 예를 들어, 찬양팀이 약한 교회는 찬양팀이 좀더 안정된 교회에서 나와 찬양팀 봉사를 하기도 하고, 포스터나 팜플렛을 제작하는 것과도 같은 재능 봉사를 하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경우는 타 교회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몸으로 봉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희생은 서로에게 감동과 교육(교훈)을 주게 되었고, 결국은 지역 전체로 변화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나됨이란 그냥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됨 만큼 귀한 것도 없다. 그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내가 희생할 때, 나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천국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됨 =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 삶의 기초 법칙
뉴튼의 만유인력에 관한 법칙 발견은 떨어진 사과를 손에 갖게 된 기쁨만을 준 것이 아니라 그 법칙 하나로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가져 오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의 “연합” 혹은 “하나됨”에 대한 법칙은 엄청난 결과를 낳게 하는 삶의 기초 법칙이 된다. 즉, 그 속에 놀라운 보화의 잠재력이 담긴 보물 지도와도 같은 것이 바로 하나됨의 법칙인 것이다.
앤아버 지역에서 청년 연합이 찬양과 기도로 이루어진 후의 각 교회 청년회를 살펴 보았다. 놀라운 것은 각 교회마다 청년들의 모임이 훨씬 더 활발해졌고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진리를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 하나됨은 기초 법칙이므로 다른 다양성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능력이 있다. 곧, 한인 청년들의 하나됨은 각 교회 안에서 1세와 2세, 한어권과 영어권의 하나됨의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청소년들의 연합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한인교회와 미국교회 간의 하나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 한인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건물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하나됨의 발전적 적용 차원으로 미국교회 목사님들의 기도 모임을 참석하다가 기도 제목을 나누던 중 미국교회 건물을 기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그 교회는 건물을 함께 사용할 뿐만 아니라, 형제교회처럼 한미(韓美) 간에 연합예배도 자주 드리고, 성경공부 프로그램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됨은 앤아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연합운동으로 발전하여 인종, 언어에 구별없이 2001년 4월에는 종려주일 저녁에 대학의 컨벤션 센터(convention center)를 빌려서 약 2천 5백여명이 함께 모여서 연합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이후 지역 목회자들의 계속적인 연합 기도를 통해 언젠가는 미식축구로 유명한 미시간 대학의 Stadium(1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학 축구 경기장으로는 가장 최대의 규모)에서 앤아버 전 크리스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찬양과 기도를 함께 드리는 그 날을 “같은” 비전으로 공유하고 있다. 나는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찬양과 기도하는 한, 이 비전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을.
글을 마치면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Contagious Christian)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성도는 소금과 빛이고, 이 두 가지의 속성을 볼 때 소금과 빛된 성도가 갖는 의미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도 개개인은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각 성도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야 비로소 세상은 그 성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성도가 서로 따로 떨어져서 이러한 변화를 이루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어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사역하셨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됨으로 사역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약 4천 개 이상의 이민 교회가 있다. 각 주마다 있는 대학도시 교회들에는 수 많은 유학생 교회가 있다. 나는 코스탄들의 이 시대적 사명 중의 하나는 바로 각 코스탄들이 섬기는 교회 현장, 사역 현장에서 이 하나됨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각 주마다, 대학 도시마다 코스탄들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서 이런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그 자체가 진정한 전도, 진정한 천국 건설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청개구리도 어머니 개구리의 마지막 유언에만은 순종했다. 청개구리보다 못한 성도가 되기 보다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고 희생으로 헌신함으로 하나됨의 천국 맛을 보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됨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때 그 결과가 놀라웁게 역사하리라 믿는다. 하나됨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이다.
Oct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10월호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현재는 ‘초등학교’라 해야 맞는 표현이지만, 동민이가 어릴땐 ‘국민학교’였으므로 이 명칭을 그냥 쓰도록 한다.) 동민이는 하얀색 모시 한복을 입고 시민회관에 모인 많은 청중 앞에 섰다. ‘전국어린이 반공 웅변대회’에 출전한 것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웅변을 했는지, 6.25 전쟁 당시 북괴군을 도운 소련을 성토할 때와 우리 자유대한을 도운 미군을 높일 때엔 눈물도 찔끔 났다. 많은 박수를 받은 동민이는 결국 최우수상을 받았고,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반공 어린이’로 칭찬을 받았다. 동민이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하루빨리 커서 북괴를 물리치고 빨리 우리 나라를 미국과 같은 잘사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중고등학교 때에도 동민이는 유난히 미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왠지 영어는 더 재미있었고, 미국의 50개나 되는 주 이름을 다 외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자랑거리였다. 뭐든지 미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친구들은 동민이에게 물어보곤 했다. 학교에서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동민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는 꿈을 꾸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동민이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우수대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을 시작하면서 우연히 만난 어느 여학생의 권고로 학교 내 성경공부 동아리에 가입했고, 동민이는 두달여의 성경공부 끝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내내 공부만 알던 동민이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동민이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비로소 ‘세상’에 대한 진지한 사랑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민이에겐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사회 정의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친구들의 ‘정의로운’ 목소리에는 언제나 ‘반미(反美)’ 구호가 끊이질 않는 것을 보았다. 여태껏 자신이 알고 있는 미국과는 너무 다른 얼굴을 한 미국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미국이 진정한 미국이란 말인가. 자유와 평화와 풍요의 나라, 그리고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복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 나라. 그 미국은 과연 우리 민중의 적이란 말인가.
대학교를 마칠 무렵,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동민이는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동민이가 공부하고 있는 무선 통신 분야는 미국의 연구가 많이 앞서 있는데다 어려서부터의 꿈인 미국 유학을 꼭 이루고 싶다는 욕심도 이 결정을 하는데 큰 동인이었다.
미국 유학 생활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 쫓기는 실험 스케줄과 지도교수로부터의 압력, 경제적 압박, 장래에 대한 불안 등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가 언제나 동민이를 사로잡았다. 그나마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겨우 자기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곤 했다. 이런 힘든 환경은 동민이를 현실로 자꾸만 몰아세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에 와서 동민이는 미국에 대해 어려서부터 가졌던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과연 미국은 유학생들에게 무엇인가?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기회의 나라이자, 신앙의 나라인가? 아니면 제3세계 빈곤을 만드는, 이기적인 거인인가?
미국에 대해 생각하면서 몇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미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자세이다. 미국의 모든 것은 앞서있고, 미국의 모든 것은 선하고, 미국의 모든 것은 신앙적이라는 입장들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모든 것은 그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도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과연 미국은 기독교적 기반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선한’ 나라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미국을 초기에 형성한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미국 사회 곳곳에 기독교적 문화가 적어도 한국에 비하면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의 국가 운영이나 사회 전반에 흐르는 사상의 조류나 문화, 그리고/또는 경제적 체제 등이 성경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 운영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미국의 많은 부분은 성경적 기반 위에서 형성/운영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인본주의적인 기반 위에서 형성/운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의 인본주의적인 흐름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로부터 비롯된 실수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미국을 선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이 이번 WTC 테러 공격에 대해 보일 반응을 생각해 보면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선’인 미국에 대해 ‘악’인 이슬람이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 ‘악’인 이슬람 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은 성전이 된다. 그러나 미국이 취해온 대외 정책과 반미의식의 원인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무차별하게 기독교 = 미국= 좋은 나라, 이슬람 = 나쁜 나라의 공식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반대의 극단은 절대적인 반미(反美)의 입장이다. 제3세계 대부분의 빈곤은 미국의 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에 기인한 것이고, 미국의 패권주의는 힘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전히 민중의 적인 자본주의의 총 본산으로서의 미국은 타도 혹은 극복의 대상이라는 좌파적 생각이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있겠다. 이런 입장은 자주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미국에 대한 증오가 큰 나머지, 미국의 모든 것을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지난 WTC 테러 공격 이후 일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반응 가운데에는 통쾌하다, 잘됐다, 속 시원하다는 식의 내용들이 있었는데 어찌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한 생각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통쾌해 할 수 있는 것은 어찌보면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느 개인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주신 은사와 특징이 있듯이 민족 혹은 족속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미국의 모든 것이 ‘선’ 혹은 ‘악’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미국의 장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우리 민족의 은사와 특징을 잘 계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과 같이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사회 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비교, 분석하여 발견하기 어려우나,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 속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은 이러한 일은 하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가 될 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슈일 것이다.
미국은 기독교 문화가 널리 깔려 있는 나라, 그러나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은 나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의 탁월한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도 미국에게 있어 다시 돌아갈 ‘Golden Age’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미국에 대해 혹은 서구 문화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1901년 태어나 1945년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김교신이라는 신앙의 선배를 생각해본다. 김교신은 암울했던 시기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울 꿈을 꾸었던 신앙적, 민족적 선각자였다. 그는 그 당시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강국(强國) 일본에 유학했던 유학생이었다. 그가 <성서조선>을 통해 나누었던, 그리고 그의 일기를 통해 비추어졌던 그의 사상은 그를 ‘100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고, 무교회운동의 창시자이자 반군국주의자였던 우찌무라 간조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문집을 보면 많은 일본사람들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우리 민족과 일본 민족을 비교하면서 우리 민족의 부족한 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도 잘 나타나 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들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모습이다. 그러나 또한 ‘박물학자’였던 김교신은 <조선 지리 소고>와 같은 글에서 우리 지리를 고찰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노력을 하는 등 민족적인 자존심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성서적 입장에서 일본이 반드시 망할 것과 조선이 반드시 독립할 것을 이야기 하였고, 이는 일본 경찰들도 혀를 내두른 점이었다. 194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 함흥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돌보다가 세상을 떠난 진정으로 ‘낮아져서 섬긴’ 유학생이었다. 우리 나라와 일본, 그리고 세계 많은 나라에 대한 ‘성서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서적’ 입장에서 각 나라와 민족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던 선각자였다.
어쩌면 매우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유학생인 동민이와 (그리고 내 자신과), 우리 신앙의 선배인 김교신을 비교하며 몹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이제, 21세기 ‘강국’인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우리 역시 편향된 반미 혹은 친미가 아닌 ‘성서적’ 시각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치우치지 않은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운 여름날 냉수 한 사발 같이 시원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Oct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10월호
들어가는 말
9월 11일 아침 CNN News를 통하여 뉴욕 맨하탄 세계무역센터(WTC)의 쌍둥이 빌딩이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의 공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지금 착각의 환영을 보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일상처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이 테러 공격으로 곧 죽게 될 줄을 누군들 알 수 있었을까? 이미 무너진 빌딩 더미 밑에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걸고, 무너진 잿더미 주위를 서성거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애타게 찾던 수많은 사람들의 애절한 상황은 차마 눈물 없이 볼 수가 없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경제적 힘의 상징같은 세계무역센터와 군사력의 힘을 자랑하는 미 국방성 본부 (Pentagon)에 대한 극적인 테러 공격에, 미국의 조직적이던 정치와 경제가 잠시 멈춘 듯이 보였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민족, 종교, 국가와 정치의 이해 관계로 바쁘게 움직인 몇주 간이었다.
이미 지난 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과 세계의 부산한 움직임을 이미 본터이지만, 특히 금번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조직적인 테러와 미국의 대응을 보는 나의 마음은 심히 착잡하다. 테러 공격 이후에 제일 먼저 모든 미국민(정치인이나 종교인 할 것 없이)들이 보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의 모습이었다. 모든 공영방송에서조차 “God Bless America”를 수 없이 보여주며, 미국과 세계를 위하여 함께 기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미 교회마다 예배와 기도회의 참석 인원이 테러 이전의 참석 인원의 3-5배로 증가하였다고 보도되고 있다.
많은 아랍계 모슬렘인 및 아랍계 유학생들이 본 테러에 가담되었다고 보도되면서, 유색 이민자를 보는 미국의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물론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 공격시에 일본계 미국 이민자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감금하였던 과거의 실수와 아픔을 되살리며, 선량한 아랍계 이민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수 많은 목소리와 캠페인이 있긴 하다. 하지만 최근 은연 중에 아랍계를 향한 적대적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많은 인종차별사건이 보도되고 있어서 걱정이다.
나는 미국의 이민자로서 내 자녀와 후손이 길이 살아야 할 이 미국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이 넘치기를 누구보다도 간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일 금번 테러사건이 동양계 테러조직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동양계 이민자나 또는 유학생도 지금 아랍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비슷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것이 바로 이민자의 고뇌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계 유학생을 보는 눈들이 틀림 없이 곱지 않았을 것이며, 실제적인 불이익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학업 중단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동양인이 백인 중심의 이질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가정은, 바로 “세계 속의 한국인”을 정의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유학생이 반수 이상인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기에, 섬기는 교회는 아직 자체 예배당 건물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된 미국의 형제자매들이 세운 예배당을 함께 사용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한국 음식 냄새가 좋다고 넉살을 떠는 미국 형제자매들의 깊고 넓은 사랑의 마음은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니, 감사하기가 그지 없다. 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어울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주 안에서 형제자매의 참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본 컬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한국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 (Identity)”을 잘 정의해 줄 수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보는 한국인
세계는 좁아졌다. 어떤 민족이든 혼자서만 고립되어 살 수 없게 되었다.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은 누구인가의 질문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정의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최근에 미국테러의 주범이요, 국제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조직을 조종하고 있다고 보는 ‘우사마 빈 라든'(Usama Bin Laden)을 숨겨주고 테러를 지원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동의 “아프칸”이라는 나라는 세계 속에서 한 민족과 국가의 실체와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아프칸 국민은 그들의 이슬람 형제국에서 조차 인준 받지 못하고 있는 ‘탈리반'(Taliban)이라는 정권의 지도하에 산악을 누비며 구소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어찌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저들은 미국의 전쟁의 선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데, 실은 이제 더 파괴될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국가의 형편이니, 미사일 공격을 할테면 하라고 도리어 엄포를 놓고 있다. 또 미국과 다국적군이 지상군을 파견한다고 해도 소련을 물리친 게릴라 산악전에 그들은 상당히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프칸을 침공하였던 구소련군 사령관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특수 훈련과 인내로 특별히 훈련된 군인이 아니면 결코 산악 게릴라전에 달인이 된 아프칸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실제로 월남전을 거울 삼는 미국은, 어려운 산악 게릴라전에 빠져 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 아마도 아프칸인이 보는 아프칸인의 정체성은 이슬람 종교로 무장된 “전쟁과 투쟁의 민족”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인이 보는 한국인의 특징적인 정체성은 한반도에서 오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한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실제 현대의 한국인에게서 “은근과 끈기”라는 덕목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도리어 “신속과 성급함”이 모든 한국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 많은 나라와 민족이 명멸하는 세계사 속에서 토끼 모양의 한반도에 한국민족이 그렇게 오래도록 보존되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 속에서의 “은근과 끈기있게 살아남은 민족”이라고 자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람의 개인 성향과 현재의 문화가 어떠하든, 또 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성이 어떻든 간에, “은근과 끈기로 살아남음”의 역사성은 지속되어 왔고, 또 유구히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유난히 이 역사성 속에서의 “은근과 끈기”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자랑이요 또 자랑할 만한 정체성이다.
세계가 보는 한국인
한편으론 아프칸인이 아프칸을 보는 정체성이 아닌, 세계가 보는 아프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끊임 없는 내전, 종교 전쟁, 구 소련과의 지루한 전쟁, 테러로 인한 세계와의 전쟁 등으로, 오직 종교의 극단주의로 달려가는 호전적인 민족으로 비춰지고 있다. 아프칸 부족간의 내전으로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고, 전쟁 난민이 접경국에 몰려들며, 끝 없는 피난민 텐트촌에서 서방 연합국이 보내주는 식량 원조로 생활을 연명하는 비참한 민족이라고 비춰지고 있다. 천막 속에서 땟국이 흐르는 모습으로 빵 덩어리를 씹고 있는 천진스런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어찌 보면,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살아온 우리 세대들이 이미 잊어버렸을 법한 1950년 한국전쟁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미국에서 방영되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한 “Mash”를 보면서, 한국전쟁에서 보여주는 한국인의 참혹한 모습에 때론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는 느낌은 나만이 갖는 아픈 느낌일까? 지금도 우리의 동족인 북한은 세계인의 눈에 가장 폐쇄적인 독재국가로 지목되고 있다. 가끔 미국친구들이 내가 북한에서 왔는지 또는 남한에서 왔는지를 질문 하면, 당혹스럽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다. 저들이 보기에는 내가 그저 한반도에서 온 한국계 이민자일 따름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나이 많으신 미국인들을 만나면, 대게 언제 한국이 통일될 것이냐고 묻는다.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동족이 분단된 국가라는 불명예를 지워버릴 수 없음에 때론 부끄럽고 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세계의 사람들이 보는 한국사람의 이미지는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민족, 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제부강의 기적을 이룬 민족, 그러나 성질이 급한 민족, 분리를 좋아하는 민족, 그리고 준법정신이 다소 결여된 민족 등 복합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미국에서 한국계 이민자를 보는 눈도 위에 말한 한국사람의 이미지와 별 차이 없이 평가되고 있다. 세계가 한마당으로 좁혀지는 이 시대에 이러한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환경에 “은근과 끈기”로 가장 잘 적응하는 데에는 한국사람이 “최우수”라고 한다. 각국 이민자들의 통계를 보면, 오랜 이민 역사를 갖은 중국이 제일 많은 이민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많은 나라에 이민자가 분포되어 살고 있는 것은 한국사람이 세계에서 단연 수위라고 한다. 구 한말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에서부터 시작된 짧은 이민역사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의 가장 추운 곳에서부터 아프리카와 남미의 가장 더운 곳에까지, 한국은 이민자가 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한국사람의 신체구조는 무려 화씨 170도, 곧 화씨 영하 50도에서 영상 120까지 달하는 온도 변화에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유일한 민족인 듯 싶다. 극심한 자연 환경에 적응하며, 돈을 버는 것은 한국인이 단연 세계 최고일 것이다. 열사의 아랍국가들의 사막을 누비며 건축 사업을 성공시킨 것도 한국인이요, 또 빙해인 북해의 해저 유전을 뚫고 있는 것도 의지의 한국인이다.
문제는 돈 버는 데에는 으뜸이지만, 이민자로서 그곳의 “문화”에 적응하며 사는 것에는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 문화에 훈련이 안된 탓이다. “더불어 삶”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이 극복해야 할 숙제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각 대학의 평가는 퍽 고무적이다. 거의 모든 교수들이 한국 유학생들을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정직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질의 문화 속에 살면서 자신의 문화를 다시 바르게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는 유학생들은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정의하고, 세워야 할 주인공인 셈이다.
그리스도안에서의 한국인
한국인이 보는 한국인과 세계가 보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국인은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한국민족의 역사를 보면,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 남을 만한 역사의 주역을 감당한 기록이 별로 많지 않다. 구라파에서 한창 종교 개혁이 진행되고 근세 문명이 싹트고 있을 무렵에도, 조선 반도는 이조 왕조의 개국 이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에 바쁜 즈음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사람은 거의 이조 왕조의 말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의 들을 수도 또 들어 본적도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셨겠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 무려 1900년 가까이나 구원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에 대한 아쉬움과 연민을 지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국을 통하여 조선 말기에 한국에 전파되고, 이제 100년이 넘어 흘렀다. 100년 전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펜젤러”가 한국에 처음 도착한 후에 기록한 기도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 “주님, 지금은 조선땅 어디를 보아도 어둠과 절망 뿐이오나, 언젠가 이들이 저희들처럼 당신을 구주로 고백하는 날이 올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나이다.” 조선의 복음화를 위하여 목숨을 던졌던 수 많은 선교사들이 절망 속에서도 믿음으로 드렸던 기도는 이제 분명히 응답이 된 셈이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에 한국은 변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와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한국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사상 유례 없이 적극적이도록 자극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심을 우매한 우리로서는 측량할 길이 없다. 어떠한 경로를 거쳤든 간에, 남한 인구의 30-40%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꼽을 수 있는 가장 큰 변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복음의 전파와 이에 따른 의식의 변화는 한민족이 세계 역사 속에 주인공으로 떠오르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근세 한국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복음의 축복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부강하여졌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 온 열방에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고 본다. 한국이 당장 해결해야 할 수 많은 경제, 정치, 종교적인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크리스천은 세계 복음 전파의 소명을 맡은 자랑스런 민족이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언제 중국이 한국인에게 배워보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었으며, 원방에서 한국사람의 경제 원리와 신앙의 열심을 배워보겠다고 열방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가?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미국에 와 있지만,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민족은 오직 한국사람들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수 많은 유학생들이 아시아, 중동, 남미 및 유럽에서 미국에 와 있지만, 모이면 성경 공부하고 예배드리면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마치는 유학생들은 오직 한국 유학생들 뿐 아닌가?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민족이 바로 하나님 역사에 주인이 되는 것처럼, 나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믿음 안에서 살기로 오늘도 애쓰고 힘쓰는 크리스천 한국 유학생들이 세계 속의 역사의 주인이 되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이름도 잘 기억할 수 없는 수 많은 국가에 한국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나가있다. 특별히 복음의 불모지인 모슬렘 국가 및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한국 선교사들의 복음사역의 열매는 세계 선교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하다. 보라. 5000년의 한국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제 세계사에 남을 만한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의 주역으로 한국인이 떠오르지 않고 있는가?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때문이 아니겠는가?
19세기 중엽에 미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과 결과로 19세기 말에 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하며,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때 바로 한국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들의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이 지금 한국 땅과 세계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을 세계 복음화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부르고 계시며, 이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진정한 예수 안에서의 한국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바로 확립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한국사람을 세계의 가장 많은 나라에 이민자와 유학생으로 흩어 놓으셨으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예배케 하셨다고 본다. 이 사명을 바로 보고 감당할 때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역할과 정체성을 바로 확립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가졌던 것과 같은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요, 민족 사랑의 참 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미국에 유학온 유능한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자기의 인생만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역사의 바퀴 속에서 한국민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며,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
이민 생활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이민자로서 살아야하는 동기와 목적이 있다. 요사이는 한국의 좁은 취업문과 자녀 교육 때문에 미국에 이민자로 남기로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개인의 이민 동기와 목적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민자로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곧 이민 생활은 실패하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국제적인 미아로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특별히 한국 이민자들의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의 결여는 이미 세계 도처에서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미 남미의 여러 국가에서 수 많은 한국이민자들이 열심히 일한 탓에 사업과 교육에서는 성공적이지만, 돈을 벌면 돈 가지고 떠나는 철새 이민자라는 불명예스런 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들 거의 모두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애당초 이민의 목적이나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탓만은 분명하다. 결국 이민하여 사는 땅이 하나님 아버지의 땅이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따라 별처럼 많은 후손에게 물려줄 약속된 땅이라는 아브라함의 이민 철학과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결여된 탓이다.
미국에서 사는 이민자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대학에서 평생을 봉직하면서 가르친 한국계 미국대학 교수도 이러한 이민자의 정체성의 결여로 고민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았다. 이리하여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이민자로서 미국에 무엇을 기여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이민 양심의 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USA Today 와 NY Times 같은 미국 주요 신문은 별로 읽지 않으면서, 한국에서 발행되어 미국에 늦게 배달되는 한국신문들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다. 이래서 한국 대통령이 지금 누구와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또 차기 개각은 언제쯤일 거라는 한국소식에는 정통하지만, 정작 본인과 그의 자손이 살게 될 미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계 이민자의 가게에 왜 번번히 강도들이 출현하여 총질을 해 대는지, 이 땅의 주인이 될 이민 2세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또 관심도 없다. 이러하니 LA 폭동 사태 같은 경우에도 바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 상처와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 유학생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이민자의 정체성의 결여는 평신도만의 문제가 아니요, 한인 이민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많은 한인 목회자에게도 공통된 현상이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천 신문과 Webzine에 설교를 보내고 컬럼을 쓰는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자기들 양떼인 이민자들의 아픔은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며, 또 이민자들이 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이민 신학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이 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1-2)는 말씀을 좇아서 이민을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이민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민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이니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면 어느 곳이든 당당히 누리고 살 권리가 있지 않은가? 다만, 내가 사는 땅이 어느 곳이든 그곳을 복음의 영광이 가득 차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내심을 입은 자요 또 흩어진 자들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니,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그 땅(이민자가 사는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라고 나는 본다. 세계 복음화의 교두보에 한민족을 세우시고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민을 재촉하셨고, 또 우리를 세계 각국에 흩으셨다면, 또한 이것이 바로 한국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될 것이다.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런 점에서 선교사의 정체성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으며, 또 혼동이 없기 바란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 이런 크리스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간다면, 이미 주님의 인도하에 미국 유학생활의 시작을 통하여 이민생활의 첫발을 잘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크리스천 이민자로서 본 나의 생각과 정체성이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사랑하는 형제자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시 한번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의 칼럼의 주제가 “미국이나 제 3국 이민을 고려하거나 또는 해외 취업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다음 칼럼에서는 미국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에게 유학생활 중에 필요한 준비와 훈련에 대하여 쓰기로 하겠다.
* 원래 이 글은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컬럼에 실리는 글이지만, 이달의 초점 주제에 부합하는 글이어서 자리를 옮겨 게재합니다.
Sep 1, 2001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1년 9월호
학제가 한국과 다른 미국에서의 9월은 새로운 Academic Year가 시작되는 달이다. 그새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의 곳곳에 흩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대부분 태평양을 건널 때는 두려움도 있지만 그 보다는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무언가 해 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으리라 생각된다. 십년 전에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김포 공항을 이륙하던 날 하늘에서 신기하기도 하고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조마 조마함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유학 생활을 주께 의탁하면서 나름대로의 각오를 몇 페이지 정도의 글로 정리해 보기도 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편집부에서 이 달 초점의 방향이 학업 시작에 맞추어 어떤 관점으로 유학 생활 및 학업을 바라보고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전을 주는 메시지이니 맞춰서 원고를 써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써야 할 글의 주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터라 감히 어떤 도전의 메시지를 줄 자신이 도무지 나지 않아 고민하다가, 도전의 메시지는 되지 않아도 실패의 경험담을 나눠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부족한 경험과 생각들이 유학 생활 새내기들이나 나와 같이 유학 생활 중에 힘들어 하고 방황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혹시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부끄러운 실패의 고백은 한국에서의 대학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선택한 동기와 대학 시절에 경험한 편협하고 부끄러운 방황에 대해서는 이코스타 2001년 1월호에 실린 졸고, ‘지성소로 지성소로’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군대 문제와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장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와 DCF라는 선교 단체에서의 힘든 제자 훈련과 개인적으로 하는 양육의 빡빡한 스케줄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 갈 때는 환경이라는 화두를 잡고 막연히 출발을 했으나 막상 들어가서는 도시 계획을 공부하게 되었고 마땅히 환경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 더욱 공부에서는 좀 멀어지고 막 뜨거워지고 있던 제자 훈련과 개인 양육에 흠뻑 빠져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서도 뇌리를 떠나지 않고 늘 소화되지 않은 것 같이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처음 예수 믿을 때에 내심 다짐하고 희구해 오던 전임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부담감은 물론 학부 시절 경험했던 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막연한 책임감이 발동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는 군대도 아직 마치지 않은 상황(!)이어서 군대를 마치기 위해 석사 장교라는 제도에 목을 매고 있던 터라 함부로 공부를 그만 두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방황하며 분주히 대학원 1학기를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광화문에 있는 말씀사에서 작은 책자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겉 표지에는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고 제목은 김교신 평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 인물의 인상이 곧고 강직함에 마음이 끌리어 책을 사서 몇 줄 읽다가 얼마나 감동이 되던지 그 날 밤 내내 그 책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일개 중학교 선생으로서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 나타나는 삶의 역정은 그 당시 방황하던 젊은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순수한 속죄의 복음에 사로 잡혀 펼쳐 내던 그의 성경 공부와 교육과 진실한 삶을 통한 전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이후 그의 저작과 우찌무라 간조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나름 대로 그 때까지 하던 질문과 방황들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성경에 대한 폭 넓고 심도 깊은 이해, 발견된 진리를 삶으로 옮겨내는 실천력, 박물학(지금은 지리학) 교사로서의 전문적인 지식과 깊은 연구, 영혼은 울리는 살아 있는 교육, 소화된 만인 사제의 정신, 교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복음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동지들과의 생명을 주는 교제, 타락한 세상을 향한 냉철하고 뜨거운 예언, 그리고 억눌린 백성들(특히 소록도의 나환자들)을 향한 애끓는 사랑 등이 그 당시 여름 방학 내내 받았던 감동의 편린들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전임 목회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다소 누그러지고 무엇보다 만인 제사장의 정신에 입각하여 생활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발견된 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생활 예배를 드리는 부분에 깊이 매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워낙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위와 같은 것은 생각으로의 동의일 뿐 대학원 기간 동안 예전과 비슷한 생활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 봉사와 양육과 제자 훈련을 겸하면서. 주께서 베푸신 긍휼에 힘입어 부족한 대로 대학원을 졸업한 후 6개월의 군대 훈련을 마치고 나서 다시금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대학원에 가게 되었던 주된 이유였던 환경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에서는 환경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었던 때라 좀 더 잘 공부해서 피폐해져 가는 환경을 살리는 전문인이 되어보자는 생각에서, 학부 시절 영향을 받은 ‘Design With Nature’라는 책의 저자가 있는 학교로 유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고 1년 반이라는 준비를 거쳐 박사 과정의 입학 허가를 얻게 되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내심 유학을 하게 되면 가능하면 한국인 교회를 다니지 않고 미국인 교회에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과 함께 성경에 기반을 둔 환경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과는 달리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던 첫날 저녁, 마중 나온 후배를 따라 한국인 교회의 청년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이후 9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충실히 교회와 청년회의 일에 다시 몰두하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유학 생활은 경제 문제 해결이라는 초미의 관심사와 맞물리면서 교회 안에서 운영하는 한글 학교에 매이게 되었고 이후 한글 학교의 실제적인 운영의 책임을 맡으면서 유학 생활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삐걱대기 시작했다. 이후 한글 학교와 교회 청년회와 성가대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공부에 대한 절대 시간을 확보해 내지 못하게 되고 공부는 어쩌면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가끔씩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으나 교회에서 자의 반 타의 반 맡겨진 일들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과 반성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이라는 절대 명제 하에서 유학 생활을 종교적으로 몰고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 미국 사회와 한인 사회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공부와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자격들을 갖추어 가긴 했으나 늘 허덕이고 끌려가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논문 자격 시험을 앞 두고 수양회와 부흥회를 참석하고 나서의 일이다. 이제까지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임 목회자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밀고 올라왔다. 유학을 결정하고 올 때는 분명히 기독교인 환경 전문가로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정신에 맞게 일하며 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목표였었는데…. 기도하면서 처음 유학을 결정할 때를 떠 올리며 곰곰 생각해 보니 이것은 아마도 전공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자신감과 흥미를 잃은 데서 온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 당시 생각에는 어쩌면 전임 목회자가 되면 맘대로 시간의 구애 없이 성경도 공부하고 기도도 맘껏 하고 전도도 지치지 않을 만큼 하고 찬양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이 합리화의 근거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 때 습관적으로 읽던 성경과 방 한 구석에 쌓아 두었던 세계관에 관한 책들과 김교신 저작들을 다시 심각하게 읽고, 또 주님께 회개 및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코스타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시금 방향을 정리하게 되었고 주께서 허락하셨던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간 밀린 공부들을 따라 잡느라 힘은 들었지만 주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한두 가지 정말 불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바쁜 생활들을 대부분 유지하면서도 논문도 무사히 쓰고 전공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책임감도 깨달으면서 유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황 덕분에 졸업이 늦어지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청소년기와 대학 생활 동안 뇌리에 박혀 있던 점검되지 않은 가치관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해야 할 방향을 얻게 되었다는 데서 주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혹시 있을 지 모르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한두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이러한 방황과 실패는 철저히 나 개인의 불신과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 한편 교회에서 했던 봉사나 섬김이 모두 다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총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일에 너무 치우쳤었고, 교회 또한 바람직한 대안들을 청년들에게 제시하지 않고 열심있는 청년들을 교회의 일에 묶어 두는 경향이 있음을 아픈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 뿐이다.
독자에 따라 느낀 바가 다 다르겠지만 나 나름대로 유학 생활을 이렇게 방황하면서 보낸 주된 이유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 싶다. 첫번 째는 바로 (지난 1월 호에서도 밝힌 바 있는) 내가 경험한 한국 교회 안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이원론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즉 성(聖)과 속(俗)의 그릇된 구분에서 비롯되는 교회당 중심적인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와 관계되거나 선교라는 이름과 연결되는 것이면 지극히 거룩하고 선한 것이기에 그것은 공부보다도 중요하고 가족보다도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받고, 또한 가르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바로 나같은 극단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함께 교회에 다니는 형제 자매들 중에 열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번 씩은 목사가 될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고, 이제 막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선교사나 전임 목회자로 나가야만 주님께 가장 충성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간혹 본다. 어떤 형제는 자신의 공부는 제쳐두고 교회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본다. 나중에 뭐가 되려고 하는가 물어보면 목사가 되어서 선교사가 되려고 한다고 대답하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물론 훌륭한 각오이고 칭찬할 만한 용기이지만 가까이서 지켜 보는 형제는 어쩐지 전공 과목 공부는 소홀히 하고 있고 학점 따기에 바쁘다. 한 때 그는 지금 공부가 좋아서 유학을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직인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서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고 담담하게 그의 소신을 피력하기도 한다. 정말로 세상의 일들은 썩어질 것들이라서 가치가 없고 전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영원한 것이라서 그 일에 전념하는 것만이 더 없이 성스럽고 복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둘째는 ‘하나님 나라’라는 세계관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말을 대학원 시절에 처음 접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죽으면 가는 곳, 그것도 어떤 장소라는 개념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품고 있는 내용은 장소성을 뛰어 넘어서 통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넓어진다는 것을 우리의 생각과 주권에 관한 것으로 보고 우리의 현실 생활 전반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의 행동 양식은 좀 더 균형 잡히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고 있는 일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구체적인 현장이자 나의 신앙을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공부에 대한 관심도 많이 달라져야 한다.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마지 못해 하는 밥벌이의 수단 정도로 치부해 온 우리의 공부나 일터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가 더욱 요청된다. 요즘, 몇몇 시민 단체와 연결을 맺으면서 그 내부의 구성 인원들을 파악하며 내심 놀란 것이 있다. 약 40여 명이나 되는 구성원 중에 기독교인은 두 명이고 그 중에 한 명은 그나마 예전에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참고로 그 단체의 전임 운동가들의 월급이 약 오십 여 만원이라고 한다. 급여 때문에 기피하기도 하겠으나,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조금 색깔있는 것은 지나치게 세상적으로 여기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예전에 운동권에서 핵심 멤버로 일하던 분이 기독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던지 참으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지금의 굵직 굵직한 교회의 중심 멤버들 중에는 많은 수가 국회의원이고 정부요직과 재계의 인사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타락한 모습이나 정계나 재계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들 속에 들어 있는 두 얼굴의 정체들을 보면서 뭐라 할 말을 잃는다. 나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이 있음을 부끄러워 한다.
셋째는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참 신앙의 Role Model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나의 경험이 부족하고 시각이 열리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안 된 소리이지만 기존의 조직 교회 안에 균형 잡힌 신앙을 소유하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삶 속에서 실천해 내는 본보기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참 정신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 속에 참된 신앙 싸움을 싸워가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신앙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 속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이 너무나 드물고 간혹 있다 해도 숨어 있어서 찾아 보기가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비근한 예로 교회에서 가장 높은 권위로 큰 목소리를 내는 목사부터 현실적인 삶에 뿌리를 두지 않고 있어 실제적인 경험이 없고 대부분의 생활을 교회당이라고 하는 담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머리로써만, 입으로써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외치고 있으니 기존의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전통 속에서 그러한 모델이 여과 없이 성도들의 뇌리에 박히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암암리에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을 지고지선의 하나님의 일로 포장하고 있는 것도 젊은이들이 삶의 지표를 설정할 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또는 “죄 많은 세상은 내 집 아니네”와 같은 복음성가들이 자칫하면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의도와는 반대로 세상을 떠나, 아니 마지 못해 살아가면서 보다 선한 일을 위해 나머지의 인생을 바치겠다는 쪽으로 젊은이들을 몰고 가기도 하는 것을 종종 본다. 각종 부흥회나 청년 집회에 가보면 마치 선교사 모집 대회를 방불케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정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 형제에게 심각한 고민이 있다기에 들어 보니 지금까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많이 놀랐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사귀는 아가씨와 그 어머니가 다짜고짜로 선교에 헌신하는 것을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한참을 이야기 하면서 힘들어 하는 형제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삶을 나누며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져 나갔다는 사도행전의 기사를 읽을 때는 늘 마음에 통쾌함을 경험하곤 한다. 천막쟁이 (Tentmaker)이자 전도자로서 바울이 살아가던 삶의 모본, 정치가이면서 멋지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던 느헤미야, 팔려간 노예의 신분을 극복하면서 결국 애굽의 총리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냈던 요셉, 농부의 신분으로서 예언 활동에 나섰던 아모스, 자주 장사 루디아 그 외 무수히 많은 성경의 인물들의 정신과 삶을 본받으려는 진지한 노력이 그립다. 초대 교회에 그 많던 노예들이 그들의 노예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들의 일에 열심을 냈을 때 훗날 로마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대단한 세력으로 변해 있었던 예를 역사 속에서 찾아 보고 그 진정한 힘을 배워야 한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철저히 만인제사장의 정신을 실천하고 교회에서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십자가를 지는 정신이 살아 나도록 서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넷째는 신앙의 공동체성의 부족이다. 신앙이 다분히 개인적인 체험을 우선한다는 것은 한편 좋은 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독단적이고 무모함을 지니게 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토레이 신부의 지적처럼, 교회는 가르침만을 위해 모인 모임이 아니라 (가르칠 교(敎) 모을 회(會)) 나눔을 위한 모임(사귈 교(交) 모을 회(會))이 될 때 권면과 가르침과 용납함과 서로 존경함이 어우러지게 되고 함께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단계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적인 교제를 인도하시고 그런 중에 생겨나는 참 교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람이 성숙하고 세상을 이길 힘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이민 교회를 포함하여 지금의 교회는 특히나 성도간의 교제가 지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면이 있다. 교제 자체도 사교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어른들은 사업의 목적과 인간 관계를 넓히려는 잘 계산된 면이 없지 않고 젊은이들은 이성과의 교제나 외로움을 달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정말로 공동체가 살아있다면 잘은 모르겠으나 청년기에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눈에 뜨이면 민감하게 눈치를 채고 조언과 도움을 주려고 발버둥을 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마치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대하면서 그 부족함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듯이. 돌아보면 그래도 나는 교회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과 유학 시기에 교회의 어른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만일 공동체가 사상적으로 신앙적으로 무장한 상태였다면 나와 같은 방황과 고민은 최소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로서 교회에 대한 이상과 꿈을 꾸게 된다면 이러한 성경적인 공동체를 이뤄가면서 그 속에서 개인도 공동체도 성숙해 갈 수 있었으면 한다. 성도간의 진정한 교제를 통해서..
실패자의 용기를 가지고 주제 넘기는 하지만 처음 유학 생활을 시작하거나 나처럼 방황하시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싶다. 위에서 다 한 말들을 순서적으로 이해가 편하도록 정리하면 제언들이 될 듯 하다. 첫째는 유학 생활 동안의 시간 배분에 있어서 교회 생활과 학업과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쌓는 데에 지혜가 있어야 할 듯하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하는 깊이 있는 성경 공부에 시간의 삼분의 일 정도를 썼으면 한다. 그 삼분의 일 속에 첨부하고 싶은 것은 깊이 있는 신앙 서적과 함께 인문학 및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는 것도 포함하고 싶다. 그리고 성경의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작은 그룹이 형성되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면 한다. 번역된 성경을 읽는 것도 좋은 일이나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근본을 성경의 정신에 둔다면 우리 각자가 성경을 나름대로 원어에 충실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 목사나 성경 번역가들의 몫으로 돌려서는 안 될, 나름 대로 학문적인 영역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심 써야 하는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나머지 삼분의 이는 전공 공부와 같은 전공을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넓혀가는 데에 썼으면 한다. 또 한편 전공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으로 소화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 없이 성서를 통해 묻고 성서를 통해 답을 찾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과거 나는 삼분의 이는 교회에 관계된 일들에 삼분의 일은 전공은 물론 관계를 쌓는데 사용했었다. 이를 위해 각 지역 교회에서는 교회 청년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장차 한국의 일꾼들을 키워낸다는 사명감으로 좋은 본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랑의 교제의 대상으로 여겨 주었으면 한다.
둘째는 사회 봉사 활동을 포함한 폭 넓은 경험을 했으면 한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명분에 매이지 않고 사회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기회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공학을 하는 사람도, 이학을 하는 사람도,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 더욱, 순수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을 좀 더 잘 알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교회에서 비전 트립이라고 하면서 해외 선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 내만 하더라도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배울 것이 많이 있는지 모른다. 문화와 사회 체제, 가정 운영, 빈민 대책, 정치 운영, 외교 정책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배우고 점검하면서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우리의 것들을 확립시켜 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작업은 장차 우리가 책임있는 자리에 들어 갔을 때 사람과 사회를 바람직하게 섬기기 위해서 해야 하는 필수적인 일이라고 본다. 지역 교회에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젊은이들에게 도전하고 그들을 바람직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시켜 주었으면 한다.
셋째는 여가 선용에 대한 것이다.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테니스 라켓도 잡아보고 실내 수영장에도 들어가 보았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경험하게 된 복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테니스도 아직은 미숙하고 수영은 거의 개헤엄의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스트레스가 쌓이고 힘들 때 동료들과 함께 하는 다양한 운동은 너무나 개운하고 보람 있는 여가 선용이라고 생각한다.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귈 수 있으니.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하고 싶은 것은 계획을 잡고 하는 여행이다. 도시 뿐만 아니라 광활한 미국의 산야를 누비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스스로 공부해서 발로 다니는 여행 속에서 얻는 체험은 평생을 통해 깊이 간직할 수 있는 재산이 된다. 혼자 하는 외로운 여행도, 몇이 짝을 지어 하는 그룹 여행도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영역이라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해외 여행도 권하고 싶다. 지역 교회에서 선교 훈련의 일환으로 여름이나 겨울에 가는 선교 여행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꼭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타 문화를 이해하며 사람들을 접하고 배울 수 있다는 면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리스도 안의 식구들과 오랫동안 함께 머물면서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모르는 백성들도 보고 그들에게 배우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나누어 주고….
넷째는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우리 개인의 하루 하루의 삶은 그냥 무가치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신앙과 종말적인 신앙으로 하루 하루를 영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루 하루를 의미 있게 정리하고 되돌아 보게 될 것이다. 또 허락하실 내일을 위해서. 따라서 하루 일과는 물론 성경 묵상과 책 읽은 소감들을 정리하는 일기를 매일 조금씩 적어갈 것을 권하고 싶다. 예전에 김교신 전집을 읽으면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나의 경우 부족하지만 그 새 몇 권의 노트에 하루 일과, 고민, 회개, 소감 및 묵상 등이 적혀 있다. 게을러서 빼먹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너무 괴로워서 한 달 이상 손을 대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신앙 싸움의 역사로 남아서 개인을 하나님의 역사 하심 앞에 무릎 꿇게 하며 겸손하게 하고 또한 그 사랑 때문에 담대하게 하는 좋은 자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기를 쓸 것을 권하고 싶다. 매일 글을 쓰면 나중에 논문을 쓸 때도 글 쓰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 조금은 더 정리된 글 솜씨로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섯째는 실제적인 시간관리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에서 물론 언급이 된 것이긴 하나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How)에 대한 면에 초점을 두어 말하고자 한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예전에 코스타에서 장평훈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15분 아니면 30분 마다 끊어서 시간을 계획하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면 실제적으로 짜임새 있는 시간 운영을 할 수 있다”고 배우고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아직도 시간 관리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도 이 방법을 권해 보고 싶다. 그리고 우선 순위를 반드시 정해서 급한 것 중심이 아니라 중요한 것부터 우선적으로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 묵상이라든지 매일 드리는 기도라든지 일기 정리라든지 하는 빼 놓을 수 없는 것들을 아침 저녁에 정확히 확보하고 나서 일과 시간에는 전적으로 공부와 일에만 몰두 할 수 있도록 하는 구분된 시간 운영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섬김과 여가 시간에 대한 확보도 중요하다. 실제로 시간을 짜고 계획하다 보면 상당한 시행 착오를 경험하면서 주께서 주시는 지혜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주께서 허락하신 젊은 시간의 유학 생활이 주님을 위해서 개인을 위해서 보다 더 준비되고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 나기를 바란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주 안에서 꾸고 있는 나의 작은 꿈을 소개하고 싶다. 기나긴 유학 생활의 고민과 방황을 통해 주께서 심어 주신 작은 꿈들이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주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지금은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너무 부족해서 좀더 훈련시키시면서 최소한의 준비가 되면 주께서 허락하실 것으로 믿는다. 이제부터라도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공부를 틈틈이 하려고 한다. 책도 읽고 물어도 보면서….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초의 공동체이자 사회 구성의 핵심이기에, 가정이야말로 제사장으로서 희생의 산 제물을 드릴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경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주께서 허락하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지나치게 종교화, 제도화, 의식화되지 않고, 살아 있는 신앙의 생명과 십자가의 사랑에 구성원들이 매여서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의 격려가 끊이지 않는 그런 교회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이 키워지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구체적인 대안들이 모색되는 공동체이다. 셋째로는 전공 영역인 도시, 환경 계획, 환경 정책 분야에서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소화된 일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학문의 작업을 통해서 그리고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코스타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tmKOSTA의 환경 분야 네트워킹과 개인적으로 기존의 환경 단체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 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환경 정의의 세상에 대한 꿈이 있다. 국내 뿐만 아니라 개발 도상국과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환경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안들을 찾아서 제시하고 싶은 욕심도 있으나 아직 좀 나이 많은 햇병아리 주제인지라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2001년 가을, 기회의 땅 미국에 건너와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꿈꾸는 코스탄들과 유학생들 각자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유학 생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긍휼하심이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졸고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