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4, 2011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
모 신학교 교수가 한국교회 성장의 하향곡선의 원인을 열린예배로 단정하며 새로운 예배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글을 잡지에서 우연히 보았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찬양운동이 시작된 이래 한국교회 안에서 열린예배를 제대로 드린 교회는 거의 없다. 아마도 열린예배라는 명칭을 그 본래 뜻인 구도자예배가 아닌 ‘문화적으로 전통예배에 비해 열린’의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본다.

실재로 한국교회는 현대예배와 열린예배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찬양운동 4반세기가 흐른 시점에 아직 용어조차 정의되지 않고 사용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열린예배는 시카고 인근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한국적으로 해석, 번역한 이름이다. 즉 비신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의도된 예배형식의 집회이다. 이에 비해 성가대 대신 찬양팀이 인도하는 예배의 바른 명칭은 ‘현대예배’(contemporary worship)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동시대적 예배라는 의미의 ‘현대적 예배’이지만 전통예배와 대비되는 명칭으로 ‘현대예배’가 더 일반화되어 있다.
여전히 남는 의문점은 이 글에서 주장한 교회성장 하향곡선의 주범이 ‘열린예배’라는 관점이다. 글쓴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주범’의 범주에 연루된 대상은 찬양운동을 온 몸으로 주도해 온 386세대이다. 과연 그럴까? 80년대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찬양운동 열풍의 결과는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으로 씁쓸하게 그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찬양운동의 부작용도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 무엇보다 이 운동을 통해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거룩한 예배의 열망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으며, 그 가운데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헌신의 열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중고등부 사역이 얼마나 힘들어졌는가? 주일에 학생들이 교회보다 학원에서 산다. 대학가의 학생선교단체들마다 젊은이 전도가 예전 같지 않아 위기감이 돈다. 그러나 찬양운동이 한반도를 뒤덮을 당시 교회마다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CCM 찬양집회, 화요찬양, 목요찬양 같은 찬양모임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때 기름 부음 받은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곡들이 한국교회 안에 흘러들어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그 결과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직종, 새로운 산업, 새로운 예배, 새로운 찬양 등 한국교회와 기독교 산업 전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지난 10여 년간 교회, 미디어, 방송, 음반 산업, 선교지, 심지어는 소셜 네트웍(SNS) 온라인 현장에서도 당시 찬양을 통해 만난 하나님 때문의 자신의 삶과 목표가 바뀌고, 직업이 결정되고, 하나님께 헌신해온 수많은 청장년들을 만났다. 나이 40이 넘도록 거친 야전에서 예배회복과 부흥에 목숨 걸고 한반도, 동남아시아, 미국은 물론 북한, 중국, 실크로드를 가슴에 품고 뛰는 중견 찬양사역자, 예배인도자, 선교사들이 곳곳에 살아있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이 부흥의 현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미국 60년대에 일어난 독특한 부흥운동이 있다. 히피문화에 젖어있던 젊은이들이 예수를 만난 뒤 자신에게 익숙한 록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때 수많은 젊은이가 하나님께 돌아왔다. 미국교계는 이 젊은이 부흥운동을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 명명했고, 미국 근대 기독교 부흥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교회 80년대에 일어난 이 독특한 부흥 현상도 단순한 찬양운동을 넘는 ‘젊은이 부흥운동’, 또는 ‘예배회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난 사반세기 넘도록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이 운동에 대한 교회사적, 예배학적 자리 매김을 하루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그럴 때 음악 양식에 대한 진부한 논쟁에 마침표를 찍고 부흥을 향한 다음 단계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
May 4, 2011 | 책이야기/eKOSTA 서평
서평 Part 1
<그리스도인의 미덕 > 톰 라이트
<After You Believe: Why Christian Character Matters> N. T. Wright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자백해야 겠다. 우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지식으로서 톰 라이트의 신학사상에 대하여 무척 무지한 상황에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의 우연한 일치에 힘입어 이 책을 만나고 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톰 라이트의 심중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나의 책읽기가 그가 제시하는 큰 그림의 핵심을 용케 비껴가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근거하여 편식하고 있음에 불편해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수준에서 쉽게, 바로 적용가능한 단답형으로 찾아내는데 몰입되어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미성숙의 소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집중력이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쓸 자격이 없는 자가 용감하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냉면 요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맛난 냉면 한 그릇의 행복을 나눌 수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마음에서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문제 제기 – James의 고민
James는 20대의 청년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고, ‘요한복음3장16절’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배웠다. 기도와 예배의 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는다. 이전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잘 하지는 못하고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What am I here for now? What happens after I believe?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 – 즉 전임목회자, 선교사, 교사나 의사와 같이 특정한 Christian service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James는 computer science의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이고 앞으로의 진로 또한 전도유망하지만, 위에 나열된 career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도대체, after we believe 와 before we finally die and go to heaven사이의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저 시간을 보내며 “죽어서 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릴 뿐인가? 컴퓨터 공학자로서 James의 지식과 삶의 기회들은 이러한 “영적인” 문제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What being a Christian is all about?)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1장에서 밝히고 있다.
James의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있는가라는 질문으로 rephrase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후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있는가?
Christian Character, the Transformation
Faith와 final salvation사이의 bridge, 그리스도인됨(being a Christian)의 의미를 규명해줄 이 bridge를 저자는 character라고 제시한다. Christian character를 핵심개념으로 붙잡고 character란 무엇이며, 어떻게 character가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Aristotle의 접근법과 비교대조하면서 저자는 논증을 진행해나간다. Aristotle이 인간의 character의 이상, 목표와 구현에 대해서 무엇을 설파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틀을 이해하는데에 약간의 노동이 필요했고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마저 불가능하다. 그러나, Aristotle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건너뛰어도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So, let’s continue.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do와 don’t를 분별할 수있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우리는 통상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도덕률(rules)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spontaneous self-discovery)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일련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칙들은 우리가 속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규칙들에 각자의 신앙과 가정배경, 개인의 양심에 따라 더하거나 감해지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 규칙들은 많은 부분 context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공간과 개인의 uniqueness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후자의 ‘True to yourself’식의 접근법이 우리 시대에 매우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기 마음에 원하고 좋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되는 이 자기 중심적 사고는, 사회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잠식되고 객체화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자못 바람직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의 guidelines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방종마저 허용되는 문화와 체계를 형성하는게 기여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부여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어떤 rules를 지키도록 권면을 받는 일에 불편해한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내쳐두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붙잡고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새 계명에 따라 산다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가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떻게 이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있는지를 잘 모르는 무지함 가운데 있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위의 두 가지 접근법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통합 완성하는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주는데, 그것이 바로 Christian virtues(그리스도인의 미덕)를 습득함을 통한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인격의 변화)인 것이다.
저자는 “믿은 이후after you believe” 그리스도인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인격(character)에 회복reflect하고 worship과 mission을 감당하는 authentic/genuine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의 핵심은 the transformation of character라고 말한다. 죄로 물든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새롭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선택과 연습/훈련practice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자리잡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골프선수에게는 골프근육이 발달하고, violinist는 악기연주를 위한 최적의 체형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Christian virtues가 편안하게 자신 안에서 발현되도록 지속적인 옳은 선택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일이 무척 ‘부자연’스럽고 ‘나답지’않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연습이 반복되다보면 이러한 미덕이 ‘나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철야기도와 오랜 고민과 이를 악무는 결단이 없이도 새 계명에 합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겸손과 온유, 평강과 희락, 자비과 긍휼, 오래 참음과 절제, 충성이 죄된 품성을 밀어내고 대신 나의 character가 되는 일, 그것이 being a Christian의 의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감의 의미인 것이다.
Anticipating the Kingdom of God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Christian character를 develop한다는 것은, 이미 임했고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language와 그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미리 배우고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anticipate”이란, 일어날 일에 대하여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외야수가 공이 어디로 날아올 지를 “예상”하고 공이 떨어질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처럼 말이다. 외야수의 예상은 틀릴 수 있다. 공이 다른 곳에 떨어질 수도 있고 본인이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anticipate”하는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임하고 반드시 우리에게 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이 가까왔다”로 시작하여 “나를 따르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이다. (chapter 2)
A Royal Priesthood, rulers and priests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우리가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관점, 즉 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으로 조명해볼 때 단순히 개인적인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소명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receiver에 그치지 않고 agent로 부르심을 받았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창조세계와의 관계가운데서 “a royal priesthood”로 정의한다. 하나님 나라된 백성의 vocation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광과 통치를 모든 창조세계에 exercise/reflect하고(“rulers”), 온 창조세계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priests”) 것이다. 저자는 worship과 stewardship을,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소명으로 요약한 뒤,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이 소명의 현재적인 구현은 거룩holiness과 기도prayer라고 제시한다. (chapter 3)
Jesus’s Call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을 풀어내어도, 여전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의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일관되게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How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follow me였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있는가에 대한 시작이요 완성이면서 또한 확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대신 다른 어떤 계명을 우리에게 얹어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완전한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moral example이 되신다고 하면, 통상적으로 이해하듯 타이거 우즈의 스윙 비디오를 보고 초보자도 그렇게 따라할 수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새로운 morality를 제시해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fullness of human life는 그 전까지의 율법과 도덕의 세계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new creation을 개시하심으로써 인간이 본래의 창조의 모습, 즉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창조세계 가운데 royal priesthood로서의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존재와 삶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Christian virtue를 practice함을 통해서 우리의 second nature로 만들어나갈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될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chapter 4).
저자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찰하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moral effort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강조해준다. 즉, 옷장에서 적절한 옷을 골라서 입는 일이 mind를 통한 “through thinking”에 의한 것인 것처럼 (옷이 저절로 옷장에서 튀어나와 내 몸에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sinful character를 벗고(put off), Christian character를 입는(put on)하는 것은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혹은 자동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 반면, 구원 이후의 삶, 예수 그리스도같은 완전한 존재로 지어져가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책임이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하는 소명적 여정인 것이다. (chapter 5)
소결
완성될 그리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오늘 연습하고 나의 second nature로 빚어가는 moral effort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새 창조 새 언약, 새 생명의 증거sign라는 관점은, 은혜로 얻은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reward나 payment”를 받으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rules of conduct”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줌으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혼란, 결국 예수님의 새 계명은 또다른 율법이 아닌가라는 부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거룩함사이의 도덕적 긴장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보다 실제적인 연관 질문들을 고민할 차례다. 이와 같이 Christian virtue를 생각함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 혹은 ‘gifts of Spirit’의 자리는 무엇일까? 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연습/획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context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울은 왜 수많은 미덕중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나의 인격이 될 수있는가라는 점에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라는 점과, 성령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6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평 Part 2에 계속)
Apr 26, 2011 | 찬양과 예배/박성호의 찬양을 이야기하자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 안에 수년에 걸쳐 뜨거운 감자와도 같이 논의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한다. Open Theism, 이른바 열린 신론으로 불리우는 신학적인 주장이다. Facebook에 존재하는 열린 신론을 논의하는 이들의 페이지에 가보면(http://www.facebook.com/group.php?gid=2257680371&v=wall) 다음과 같이 열린 신론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1) God and creatures enjoy mutually-influencing relations
2) the future is partly open and God does not fully know or settle it
3) love is uniquely exemplified by God and is the human ethical imperative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많은 이에게 논쟁의 물꼬를 터준 것은 2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
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시고 미래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사의 미래를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미래의 결과가 결정될 수 있도록 미래의 결과를 아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이제껏 이해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새로운 주장이었기에 많은 신학자들의 반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의 D.A. Carson 교수가 쓴 “What does God know and When does He know it?”이란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까지 열린 신론은 우리가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각도에서 편의를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주의와 경계를 띄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의 논쟁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각기 나름의 성경적 밑바탕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 각각의 주장과 성경적인 예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양쪽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교리적인 틀에 갇힌 하나님에 대해 암기하는 수준으로 살다가, 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저는 열린 신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난 3월11일에 일본 동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현장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은 거대한 재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열린 신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그렉 보이드라는 사람이 쓴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 저에게는 복음 전도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신학자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이 29번 동안 서신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http://www.yes24.com/24/goods/2142711?scode=032&OzSrank=1)
오늘은 그 책에서 한 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질문을 접근하는 아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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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 게냐?
그렉에게
너와 무슬림 학자와의 토론회가 잘 끝났다니 매우 기쁘구나. 할 수 있으면 테입을 하나 구해 보내주렴. 비디오테입을 보내주면 더 좋겠다. 꼭 보고 싶구나.
너의 지난번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여러번 읽어야 했단다.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톨릭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운 많은 것과 반대되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는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성경의 권위자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아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느냐? 네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인정하마. 그 전통적 견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너의 견해가 그저 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구나.
어쨌든 너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지 않도록 미리 보장할 수 없는지 상당히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자유에 대한 너의 견해로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견해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또다른 심각한 난점이 있다. 어떤 악들은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결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직접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왜 기근, 지진, 산사태, 에이즈, 기형아 등등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시지? 분명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에도–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외하고는– 비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라면, 자신의 피조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1989년 5월11일
너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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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께
지난번 편지에 늦게 답장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곳 베델대학에서 학기말을 지내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었답니다. 먼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께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결정하는 미래의 일과 행동에 대해 모르신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며,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사람들이 내릴 자유로운 결정들에 대해 미리 알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들에 의해서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해서건 미래의 어떤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자유로운 행동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공개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창조에는 감수해야 할 모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견해가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이 견해는 매우 성경적이에요. 세세한 것들을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따분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는 성경속에서 하나님이 미래를 어느 정도 개방적인 것으로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미래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심지어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합니다(출32:14; 삼상 15:11; 렘 18:7-10; 26:19를 보세요). 하나님이 미리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계셨다면 물론 이런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인 견해는 보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미래 전체를 알고 통제하는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제가 판단하기로는 성경적인 것이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재해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재앙들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세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첫째로,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과 고난은 자연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 인한 결과이며, 심지어 대부분의 자연 재해들로 인해 일어난 고통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최소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근에 대해 생각해 보지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굶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필요한 양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의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는 것뿐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인들은 세계 인구의 7%밖에 안되지만 세계 자원의 절반 이상을 소비합니다. 평균적으로 후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덜 소비하는 반면, 선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더 소비한다고 합니다.
또 정치적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연적’ 악이 예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세요(이디오피아의 비극은 분명 예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군비 경쟁이 없었다면, 세계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 돈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투자할 만큼 충분히 마음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방글라데시의 홍수들조차 환경과 복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저는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많은 것이 언제나 자연적인 악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악한 마음들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가지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어 보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를 받쳐주는 바위는 발끝이 채여 넘어질 정도로 단단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우리가 그것을 뚫고 떨어질 정도로 얇아야 하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물은 그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유지되게끔 되어있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그러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실로, 어떤 피조물의 긍정적인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실재가 지니는 한계들은 실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것을 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매사가 그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물의 제한되고 독특한 특성과도 아주 조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조된 세상의 제한적인 특징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게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듯이 보이는 몇몇 자연적 악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예를 들어, 기형아들은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유신론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제 세번째 사항을 살펴볼께요.
아버지!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될 거에요.
이런 존재들을 성경에서는 ‘천사들’ 혹은 ‘마귀들’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흰옷을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날개 달린 존재나 붉은 뿔이 달리고 쇠스랑을 들고 있는 괴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에는 그런 바보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답니다. 그들은 또한 ‘정사’와‘권세’라고도 불리지요. 그 말은 구체적인 실체이기 보다는 ‘영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어쨌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이해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자유로우며,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유를 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영적 세력들, 굳이 말한다면 ‘마귀들’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것에 대적하는 전쟁 상태에 있으며, 지구는(아마 다른 곳에서도 역시) 그들의 전쟁터입니다. 성경에는 이들의 사랑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인간의 잠재력을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여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 역시 훨씬 더 컸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사단은 한 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루시퍼’였습니다. 그 말은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희석되지 않은 악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규모의 히틀러입니다! 그의 영향과 또다른 ‘마귀들’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견해로 보면, 세상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문자 그대로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셈이죠. 오늘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전한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더이상 창조주만이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한 편으로는 그처럼 아름답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점차 더 악몽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선과 악의 충돌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무관심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냥 아름다워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선한 계획을 좇는 한 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작전처럼 사탄의 일제공세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재적인 무기가 되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됩니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롬8장).
저는 이러한 마귀적 세력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왜곡시키고 압박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진상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필연적인 한계들 또한 사람들이 악한 의지에 호소함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악은 이와 같은 존재들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인 셈이지요.
아마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 다소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저도 분명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에게는 성경이 참이라고 생각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영의 세력만 봐도 오직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자연적 악’이 함께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저에게는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답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질문들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사항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할께요.
1989년 5월29일
소망을 가지고, 그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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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5, 2011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예배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예배에 실패해서 망했다. 14세기 종교개혁은 그 핵인 예배개혁(returning worship to the people)을 통해 중세 암흑기에서 탈출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서구교회의 세속화와 더불어 예배의 강단을 무참히 훼파시켰지만 1960년대부터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예배갱신(worship renewal) 운동으로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았다. 한국교회도 지난 20여 년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찬양운동으로 예배갱신의 불이 점화되었다. 덕분에 화석화 된 예배에 생명이 흘러들어 역동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본질보다 형식과 트렌드에 매몰된 타락의 조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하기 힘든 것처럼 요즘 예배는 많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열정에 불붙는 예배가 부족하다. 예배의 위기는 좋은 악기, 최첨단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창한 설교, 뛰어난 성가대, 실력 있는 찬양팀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며, 성령의 감동이 살아있고,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며, 존재의 혁명을 가져오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결과 우리의 눈과 행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전쟁과 기근에 고통 받는 나라와 미전도 족속들을 향해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급한 때이다. 알렉산더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표현들이 궁극적 ‘준거’를 부여받고 그것들의 최고 깊은 의미가 계시되는 것은 다음 아닌 예배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이다. 예배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범의 위치이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질 때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엽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복음에 전율하며, 삶의 관점이 바뀌고, 차가운 지성이 불타오르며, 구체적인 결단이 일어나는 그런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에는 과거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던 현상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지구 한 쪽에서 부르는 찬양이 지구 반대편에서 동시에 불리고 있다. 한 지역교회의 메시지가 인터넷과 글로벌 위성 시스템, 스마트폰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각 나라의 크리스천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았어도 예루살렘 회복의 열망이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이루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로컬(local)과 글로벌(global)의 경계가 사라진 글로컬(glocal)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말세에 일어날 대부흥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인프라일지도 모른다.
세기 마다 일어났던 과거의 부흥과는 차원이 다른 지속적이고 글로벌한 부흥, 역사상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대한 부흥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이다. 이 부흥의 쓰나미 현장에 쓰임 받으려면 김종필 목사의 언급처럼 “내가 서있는 그곳이 부흥의 진원지가 되어야 한다.” 대부흥은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을 깨뜨린 영적 거인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부흥을 꿈꾸고 준비하는 교회와 성도들마다 선행될 부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배 본질의 회복’이다.
이것은 전통예배, 현대예배, 열린예배(seeker service), 블렌디드(blended) 예배, 이머징(emerging) 예배와 같은 형식의 논쟁을 불식시킨다. 세대와 문화에 따라 형식이 중요한 매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형식이라도 본질의 중요성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 본질의 회복은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와 능력의 재발견이고, 예배의 우주적, 교회론적 차원과 내용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죽은 전통과 관습을 포기하되 그 안에 있는 참된 본질을 시시때때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예배 회복은 제2의 종교개혁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Apr 18, 2011 | 코스타 사역/gpKOSTA
홍진성
2011년 3월 24일부터 26일까지 애틀란타에서 gpKOSTA가 열렸습니다. 2박3일간 30여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나님 나라와 제자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소화하고, 고민하면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년 시카고 코스타 엑스포에서 gpKOSTA 개최를 희망하며 애틀란타 지역에 압정을 꽃아던게 엊그제 같은데 그 작은 바램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몇몇 지체들과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큰 기대와 동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각자의 삶 때문에 간간히 모임을 준비하면서 점점 처음 원동력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기쁘게 했지만 점점 어떻게 해야될지 잘 모르겠고, 기도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gpKOSTA 시작하는 날 큰 기대가 없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준비도 부족하고, 인원도 적고, 심지어 어떤 모임인지 오해하고 온 지체들도 있었지만 첫 시간부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큰 은혜였습니다. 찬양, 강의, 예배, 조모임, 식사 등 모든 시간이 너무 자연스럽고 문제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점점 참석한 지체들이 기쁨으로 하나가 되어 예배하고 배우고 나누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진행하셨습니다.
강의로 하나님의 나라와 제자도를 배우고, 조별 모임을 통해 각자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나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실제적인 배움은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각자 현실에서 맡고 있는 제자의 삶을 옆에서 볼수 있는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확신하신다는 한 믿음의 선배의 고백과 삶의 이야기는 제 기억에 앞으로 여운으로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도 계속 만났던 분들과 연락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사람들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정신없이 강의 듣고, 예배하고, 조모임하면서 친해져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마 우리는 각 지체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이루어갈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강사님들과 간사님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만난 형제자매들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Apr 15, 2011 | 코스타 사역/gpKOSTA
gpKOSTA에서 행복한 기억
먼저 다른 좋은 간증과 후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소한 후기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gpKOSTA에게 감사 드린다.

이곳 Atlanta에 온지도 6개월이 다 되어간다. 한국에서는 지체들과 함께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내게 익숙했고, 예배의 자리는 늘 찾기 쉬웠다. 오히려 많은 예배와 모임으로 인해 치여서 불평할 때도 있었다. 항상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서 난 하나님을 찬양했고, 반주했었다. 기대함은 있지만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은 없었다. 사실 몰랐었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그러나 gpKOSTA에서 처음으로,‘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이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고, 찬양 한 곡으로도 서로 모르는 지체들간의 마음을 열게 하였으며,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gpKOSTA를 기대하면서, 마음 속으로 바랬던 것 중 한 가지는 이곳에서 좋은 지체들,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주를 향한 열정을 가진 지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나의 조금은 피상적인 나의 기도를, 예배를 통해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 안의 고민들을 나눔으로써, 각 사람의‘고민과 갈등, 그리고 중심’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다. 늘 그렇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넘치게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럽게 섬기게 된 반주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갈망했었고, 그 감격과 열정이 너무 벅차서 찬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찬양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정말 중요한 보물을 되찾은 것 같아서 너무 감사했다.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도 주님을 찬양하는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간이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나를 향한 진실되고 값진 고백들이,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닌, 나의 영혼을 위로했고 그래서 더 감사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컨퍼런스와 다르게, 이곳에서 내가 가장 기억이 남는 이유 중 하나는‘혼란스러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기 전부터‘소명’ 책을 읽게 하시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셨던, 바로 내 인생의‘소명, 혹은 비전’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무역회사에서 일에 재미를 붙였던 나는, 영어공부를 더 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희망하는 바람과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반주자가 필요하다는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어떤 100%의 확실한 목적은 없었지만, 나름 괜찮은 이유를 가지고 왔는데, 역시나 그러한 나의 인간적인 생각들은 점점 거품이 되기 시작했고, 정말로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그때 주신 것에 감사하며,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지, 나 자신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하고 계획해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고민과 함께, 강동인 집사님의 말씀을 통해, 소명은 단순히 직업관이 아닌, 그것을 휠씬 뛰어넘는 예수그리스도만이 비전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세상에서의 숫자논리에 가려진 잘못된 세계관에 관해서 확실하게 꼬집어 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내 삶 가운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그 세계관 역시 조목조목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들을 하는 작업을 통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또한 그러한 잘못된 세계관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등등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졌고, 이곳에 괜히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첫째 날 들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사님께서는 그 혼란스러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옳다고 말씀해주셨고, 그 강의를 이어서 안상현 목사님을 통해서,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떠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다.‘에덴동산’그것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바로 하나님과의‘관계’의 회복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좇아 기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힘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질의응답 시간에, 정말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계신 문상호 교수님을 통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주 앞에서 서 있는 그 모습이, 내게 어떤 것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향력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 그 분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분과 같은 삶을 살고자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나의 중심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그 혼란스러움은 점점 정리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그 시간들을 통해서 나의 허상과 또한 미혹될 만한 것에서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다른 말씀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내 머릿속에 들어오셔서 하나하나씩 정리해나가시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주시고, 위로가 필요한 부분 또한 놓치지 않고 일하셨다.
지금까지 Atlanta에서의 시간들이, 어쩌면 세상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듯한 경험이었고, 앞으로의 예배에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 하는지도 돌아보게 되었으며, 이전에 몰랐던 예배의 더 깊은 가치를 알게 하셨고, 그럴 때에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는 지 또한 경험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없어 봐야, 그 마음이 가난해 봐야 늘 있던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또한 마지막으로 세심하게 프로그램과 광고, 무엇보다도 너무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주신 gpKOSTA 동안 섬겨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Apr 12, 2011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1865년 런던의 여름은 무덥고 음습했다. 중국 선교에 전념하던 중 과중한 업무로 병을 얻은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6년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동안 의료 선교사 자격증도 획득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으로 편안한 영국에서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수만, 수십만의 중국 영혼이 죽어가는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급기야 건강에 다시 이상 신호가 왔다.
이를 알게 된 오랜 친구 죠지 피어스가 브라이턴에 있는 해변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는 바닷가를 거닐면서 하나님과의 단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 마침 그날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로 인해 감격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독하고 안타까웠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광활한 중국 대륙의 죽어가는 영혼들과 비교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아침을 이렇게 회상했다.
“1865년 6월 25일 주일, 상심하여 축 늘어진 영혼을 붙들고 모래사장으로 나가 이리저리 홀로 거닐고 있었다. 주님은 그 곳에 찾아 오사 나의 불신을 압도하셨다. 나는 중국선교를 위해 내 한 몸 온전히 드리겠노라고 주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께 모든 문제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내려놓겠다고 말씀 드렸다. 나의 몫은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것뿐이었다.
나와 나의 동역자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다. 수고로이 짐 지고 곤한 심령 속으로 평화가 밀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가 없는 11개 내륙 지방에 각각 선교사 2명과 몽고 선교사 2명, 모두 24명을 동역자로 달라고 기도했다.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 귀퉁이에 이 기도 제목을 적어 두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평안한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이 흘렀다.”

이 청년은 1849년 열일곱 살 나이에 중국선교사로 헌신한 허드슨 테일러이다. 투병 중이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를 통해 그는 중국에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다시 한 번 회복했다. 바로 그때 앞날에 대한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재헌신했다. 아울러 아직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내륙 지방에 대한 선교전략도 세웠다. 바로 이때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태동되는 순간이었고, 그 작은 사건이 그의 선교사역에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16명의 선교동역자들과 함께 중국선교 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를 통해 중국 내지에 100여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캠브리지 7인도 있고 그 중 한 명인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가 나중에 그를 대신해서 CIM을 섬기게 된다. 그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중국을 알리는 선교회를 조직하는 등 보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감당했고, 이후 중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허드슨 테일러, 그를 통해 중국을 뒤덮은 복음의 발원지는 바로 예배의 현장이었다. 테일러가 예배 중에 본 것은 회심에 대한 천국 잔치뿐 아니라 그 기쁨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잃어버린 영혼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는 현장이 있는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너무 집중하느라 이웃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틈이 없지는 않은가? 마크 래버튼이 말한 것처럼 “예배드리다가 이웃을 잊어버리는 것,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품지만 그 열정으로 자기만족이나 자기 유익을 구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이 참된 예배이다. 예배드리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무너진 가정과 사회, 국가를 품게 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땅, 족속과 방언들을 향한 비전을 갖고 위대한 꿈을 꾸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Mar 17, 2011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지구가 미쳤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환태평양 지진대 인근 나라들에서 지진, 태풍, 쓰나미로 수천 명에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 재앙이 이어지고 있다. 발생하는 빈도도 점차 높아진다. 3월 11일, 일본 동부는 강도 9.0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 불과 몇 분에서 수십 분 만에 들이닥친 최대 20여m 높이의 쓰나미로 동네가 떠내려가고, 땅이 갈라지고, 숲이 사라지고, 물이 치솟고, 육지가 바다로 뒤바뀌는 등 전후 최악의 자연재앙을 만났다. 그 결과 인구 수 만 명의 해안 소도시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되었다. 마을은 자동차와 배, 건물들이 처참하게 뒤 엉킨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돌변했다. 원자력발전소의 균열과 폭발로 일본열도는 물론 인근국가들이 최악의 방사능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동일본 쓰나미는 실시간 TV 뉴스를 통해 웬만한 영화 CG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참혹한 장면을 접할 때마다 ‘설마, 이것이 실제 상황일까?’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거대한 쓰나미가 평온했던 마을을 거침없는 속도로 집어 삼키는 처참한 장면은 잊지 못할 충격이다.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죽음과 사투했을 수 만 명의 절규가 머리에 스쳤고, 집과 가족을 잃고 배고픔과 추위, 슬픔으로 망연자실한 오십만 명이 넘는 수재민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시간이 없다. 나라와 종교, 정치와 이념을 초월해서 비난의 화살을 멈추고 상생의 손을 잡아야한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제발 말을 아꼈으면 좋겠다. 지금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말보다 행동할 때이다.
311 대지진은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인류 전체의 재난이다. 환경생물학의 대가이자 자신의 책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그의 최근작 《문명의 붕괴》에서 인류 문명의 공통분모를 환경파괴라고 경고했다. 과학의 발달과 전쟁 등을 통한 각종 첨단 무기들로 인해 자연계가 파괴되어 갈수록 문명은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의 대규모 자연재해들을 통해 우리는 지구문명의 한계를 어렴풋이 보고 있다. 최첨단, 초고속으로 자신만만하던 인간의 대단한 성과들이 외소하게만 느껴진다.
이번 재난이 인공구조물들의 엄청난 압력에 짓눌려 있는 지구의 지지력을 혹사하고 대자연의 인내심을 뒤흔들어 화를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세상의 종말을 예시하는 전조라는 극단론도 등장한다. 인간 문명 전체의 한계와 그 임계점을 드러낸 것으로 본 이어령의 언급은 우리 시대를 향한 묵시록처럼 들린다. 대지진이 일어난 날,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지원 의사를 적극 표명하면서 가슴에 남는 말을 했다. “오늘 사건은 우리네 인생의 토대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초라하다. 이런 때일수록 최첨단 문명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던 삶을 잠시 뒤로하고 겸허하게 인생의 궁극과 목적을 상고할 기회이다.
지난 월요일 아침, 한 교우의 부친이 소천해서 하관예배에 참석했다.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슬픔이 가득해야 할 장례예식 내내 위로, 소망, 부활, 생명이라는 단어가 끊이질 않았다. 예수 믿고 돌아가신 고인의 주검 앞에 유가족은 물론 조문객들도 뼈에 사무친 사별의 통곡 대신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신 고인의 삶을 기리는 차분함과 자제된 슬픔, 그리고 천국 소망으로 가슴이 채워졌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힘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영생이 시작되는 관문이다. 천재지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질서 있게 대처하는 일본의 시민정신도 훌륭하지만, 그 땅에 부활의 믿음이 창궐하여 세기말 재앙을 극복하는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해본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Mar 13, 2011 | 코스타 사역/코스타 컨퍼런스

Mar 5,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전편에서 계속)
외적 비교를 거부하자.
이제 ‘외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이는 남을 나의 기준에 비교하여 내가 남을 정죄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잣대를 남들에게 들이대는 것이다. 학생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데, 저 친구는 완전 불량하구나. 절대 상종해서는 안될 부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적어도 예배와 봉사는 필수 인데, 저 사람은 어떻게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자기만 알고 변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깃들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미 교만해진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나니아 연대기(Chronicles of Narnia) 저자 C.S. Lewis가 지적했듯이, 사단의 최고급 전략이다. 이러한 비교는 가장 효과적으로 은혜를 빼앗아 간다. 천사를 타락하게 하여 사단이 되게 끔 한 원인이 바로 교만이다. 내 기준이 정답이고, 나의 길이 왕도가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액세서리가 된다.
나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을 많이 괴롭혔다. 나는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획도 열심히 세우고, 시험 전에는 나름대로 계획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여동생을 위해, 손수 공부 시간표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동생이 공부하는 것은 내 눈에 안찼다. 나의 줄기찬 지적 때문에 동생과 사이도 안 좋아졌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부 겨울 연합수련회를 다녀오고, 내 눈의 들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태도 때문에, 동생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말을 하기 전에, 기도부터 하게 되었다. 내 기준으로 동생을 평가하지 않게 된 것이 내가 받은 그 겨울 수련회의 가장 구체적인 은혜였다. 물론 동생과의 사이도 더 좋아지게 되었다.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쏟아 버리는 가장 빠른 길은 말씀을 내가 아닌 남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누구보다 우리 아빠가 들어야 하는데, 내 친구 누구누구가 들어서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영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나는 괜찮으니 이 말씀은 내 양심을 비껴가도 좋다는 자만은 더 이상 은혜를 구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 우리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만큼, 우리의 은혜는 줄어든다. 언행일치가 부족한 장로, 권사, 목사 부모님을 보면서 실망한 자녀들이 있다. 그런데 기억하자. 주님께서 판단은 내 몫이 아니라 하신다. 우리의 몫은 오직 긍휼히 여김과 기도뿐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우리를 판단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 내 주위 사람들은 변화된 나를 보고 변화될 것이다. 나의 기도를 통해 변화될 것이다.
교만의 위력
교만이 있다면, 사실 어떠한 희생도 가능하다.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런 표현이 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는데, 내 물질을 다 팔아 구제하고, 또 어떻게 내 몸을 다 내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간단하다. 교만이 있으면 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이 한 몸 희생해서 한 사람을, 아니 세상을 살린다는 신념이 있으면 된다. 내 것을 다 내어줄 때, 돌아올 남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대수롭지 않다. 나의 헌신으로 내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손해볼 수 있다. ‘내’가 받을 영광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될 때, 우리 주님이 거할 곳이 없어진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도, 구제와 봉사가 가능한 까닭이 여기 있다. CSR (Coope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말이 유행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이윤이 존재의 근간이 되는 기업은 CSR이 기업 이미지 홍보 전략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사회 봉사를 하는 기업을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은혜로 교만을 넘어서자.
기억하자. 우리 주님은 우리 중심을 보신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쁘게 하랴 주님께 기쁘게 하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잊지 말자.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흘려 보내는 생명의 통로, ‘Life Line’이다. 그 사랑을 공급받아, 하나님 주신 힘으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온전히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앞에서 나는 내 안에 선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내 안에는 나를 높일 것이 없다. 은혜의 토양에서는 교만이 싹틀 수 없다. 은혜의 십자가 앞에서는 판단과 정죄가 없다.
비교의 영의 배후, 자기 사랑
지금까지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비교의 배후에는 ‘자기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질 때, 나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우월감과 교만함을 느낄 때 공통적으로 우리의 초첨은 ‘나’에게 있다. 내 기준에 의해 남이 나보다 잘났고, 나보다 못난 것이기에 그렇다.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의해 내가 나를,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우울한 것은 내가 이 정도는 대접받아야 하는데,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 기대치가 충족되지 못해서 그렇다. 내가 우쭐한 것은 내 기준으로 볼 때, 내가 남보다 특정한 부분에서 낫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 스스로 대견해서 그렇다. 내가 남을 부러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내 기준으로 나보다 낫고, 내 기준으로 나보다 못하기에 그렇다. 이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세운 기준은 내 안의 ‘자기 사랑’, ‘자기애(自己愛)’에서 나온다. 나 정도 되면,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는 생각, 세상은 나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나는 남들에게 이 정도 사랑은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고생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 등등,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자기애적인 틀 안에서 살고 있다. 사실 친구들끼리의 다툼, 부부싸움도 내 ‘자기애’가 상처 입고 느끼는 서운함에서 생길 경우가 많다. 내가 너에게 잘 해준 게 얼마인데, 나보고 더 이상 어쩌라고, 너는 내가 어떨지 생각해보았냐고, 그렇게 외치면서 우리는 싸운다. 이 문장들 속에서 ‘나’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나’만 중요하다. 주님이 없다. 내가 상처 입으면, 내가 운다. 내가 치켜져 올라가면, 내가 웃는다. 내가 짓밟히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손해보고 살 수가 없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자기 사랑’이 내 삶을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보자.
자기 사랑의 죄와 내 안의 그리스도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Self-Idolatry 이다. 주 앞에서 나아가 이 죄를 내려 놓아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만 내가 온전한 크리스천이 된다. 작은 예수가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첫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다른 이들이 나를 비방할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래서 내 자아가 살아서 꿈틀거릴 때, 이 구절을 떠올리자. 시체는 흥분하지 않는다. 시체는 상처받지 않는다. 성경은 앞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한다고 증거한다. 내가 중요해질수록 예수님의 자리가 없어진다. 예수님이 초라해진다. 질그릇 안에 보화, 그리스도의 빛이 사라진다.
‘나’에서 ‘그리스도’로의 초점 이동
이제는 ‘나’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I- centered Life가 아닌 Christ-centered Life로 돌아가자. Is it all about me? Is there a place for Jesus?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의 꿈이 설 자리는 없다. 내 상처를 묵상하면, 남는 것은 우울증과 홧병이다. 나의 문제에 골몰하지 말고, 그럴수록 남의 문제 풀기에 앞장 서자. 내가 코가 석자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내가 공부할 것 다하고, 돈 벌 것 다 벌고, 봉사하겠다는 사람치고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삶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속한 가정, 학교, 직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 상처를 확대에서 보기 시작하면,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자매, ‘Hug: Life without limits’의 저자 닉 부이치치도 각자 전신 화상과, 선천성 사지말단증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 하나로 감사히 오늘을 살고 있음을 또한 고백하고 있다. 내가 받은 고난이 나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상처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다.
더 이상 자기연민(self-pity)을 거부하자. 냉소주의 (cynicism)도 거부하자. 깨어진 마음을 붙잡고 일어나자 (Stand up with a broken heart). 사람을 의지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자.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자. 빛 공해(light pollution)이라는 말이 있다. 도시에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많아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안에, spot light들이 내가 받은 여러 가지 모양의 상처들을 비추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spotlight없이도 빛 나아야 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포도원 이야기에서 얻은 깨달음
해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다.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비유가 있다. 바로 천국을 포도원에 비유한 예화이다. 마가복음 6장 9-10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을 찾으러 다녔다. 주인은 일군들을 계속 찾으면서 데려와서는 하루 종일 일한 자와 한 시간 일한 자 모두 같은 하루 품삯 돈을 주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써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는가?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이 천국이라면, 가기 꺼림직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자격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나서부터, 하루 종일 일한 자 역시 주인의 은혜가 아니면, 일할 기회도, 품삯도 주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은혜인데, 나 같이 부족한 인간은 또 비교를 통해 은혜를 불만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구나 생각했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 나 스스로를 하루 종일 일한 자와 당연시 하고 있었다. 내가 막판에 한 시간 일한 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영적 교만’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가? 내 친구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면 속이 쓰린가? 예수님은 자기 옆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회개를 듣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같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불편한가? 인육을 먹고 살인의지를 다졌다는 지존파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천국에 갔다고 하면 그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나의 마음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 속의 형의 마음과 같다. 아버지 재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가 버린 둘째 불효자식이 다 망하여 집에 돌아오자 얼싸 앉고 춤을 추며 기뻐하는 아버지를 첫째 형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형은 아버지 옆을 지키며 집안 일을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아버지가 둘째 때문에 오버하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에게는 첫째,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없었고 둘째,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했기에 쉽게 비교의 덫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귀환을 기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내 영적 상태가 이 형의 상황과 같지는 않은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해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런데 또 한번의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부모님의 자녀 사랑이라고 했다. 만약,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아버지이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아들이거나 딸이었다면, 불평이 나올 수 없다. 오히려 주인에게 한 없이 감사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아버지의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게 되고 감사히 여기게 되겠구나. 비교의 영이 스며들 틈이 없겠구나. 바울은 우리 안에, 이 아버지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말한다. 이 깨달음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포도원의 이야기를 주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 보았다. 하루는 지나가는데, 일군을 한 명이라도 더 부르기 위해, 거리로 급히 뛰어나가신 그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셔서 해가지지 전에 동일한 품삯을 줄 테니 포도원으로 같이 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포도원은 포도를 생산해서 팔 아서 이윤을 얻기 위한 곳이 아니구나.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기 위한 곳,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기 위한 곳이구나.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 일터에서, 이웃을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포도원 주인의 마음으로 섬겨야겠구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음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