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0, 2011 | 코스타 사역/tmKOSTA
2011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있었던, 신자은 교수의 “Justice: What Can Christianity Do About It?” 세미나를 두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Justice: What Can Christianity Do About It?
과학기술의 발전, 물질문명의 고도화, 범세계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로 특징되는 이 시대는 ‘인류 역사의 한계없는 진화’라는 신화로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과 국면에서 심화되고 있는 ‘injustice’의 문제로 인해, 도덕과 윤리의 창조적인 재정립의 노력과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의 제시가 시급하다.
본 TM세미나는, 크게는 21세기, 좁게는 일상의 삶이라는 context에서 (1) ‘정의’의 시대적 relevance를 먼저 타진해보고, (2)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의’는 무엇인지를 규명한 뒤, (3) 어떻게 ‘정의’를 구현해낼 것인지를 함께 고민할 것이다. ‘정의’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명해주는지, 우리의 신앙과 학문/전공영역에서의 활동은 이를 위해 어떻게 헌신되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정해보기 원한다.
포스트모던시대의 Justice: 시대적 적실성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교수인 Michael J. Sandel의 책 ‘Justice’는 미국을 물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인문사회서적이다. 좀처럼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기 어려운 인문사회서가, 그것도 ‘정의’라는 딱딱하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룬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출판계의 화제거리였다. 이 묵직한 주제를, 빌 게이츠와 마이클 타이슨의 부wealth, 장기organs 거래, 대리모, 안락사, 동성결혼의 문제등 일상 생활에서 경험되고 논의되는 친숙한 사례들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접근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민하고 논했던 정의, 도덕, 자유의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이 시대의 삶의 모습을 빚어내는 수많은 의사결정의 근거가 되는 핵심가치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정의’와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정의’의 문제의 중요성,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가까운지를 환기하고 함께 고민하기를 ‘초청’하는 이 책에 대한 열정적인 반응은, 첨단 과학과 경제적 풍요로 특징되는 이 시대에도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질문이 역사 어느 때보다도 적실하고 긴요함을 반증해준다.
이성과 과학적 증거, 합리적인 사고와 논증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가치 판단, 즉 what is right,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의 답을 찾는 일에 우리는 매우 익숙하고 또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의사결정에 적용하는 ‘정의’의 기준은 종종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며 다원적이다. [인문학 콘서트]라는 책에서, 서울대 철학과의 황경식교수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에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를 살아가는 지혜이자 윤리라고 말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그의 상황극이다:
1841년 미국 리버풀에서 필라델피아로 항해하던 윌리엄 브라운 호가 난파의 위기에 처한다. 승객들은 모두 구명보트에 올라 탔다. 그런데 인원이 초과되어 또다시 구명보트가 침몰할 상황이 되었다. 몇 명이 희생하여 나머지 승객들이 살아남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함께 전멸할 것인지. 선장의 도덕적 딜레마다.
생명이 귀하다는 가치를 적용할 때, 전멸보다는 일부라도 생존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누가 희생해야 하는가? 승객 전체의 이익(전멸하지 않고 일부라도 생환하는)을 위해서 개인(희생된)의 이익이 포기되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승객 개개인의 ‘생명’의 가치와 ‘생존’의 권리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형평’의 가치를 적용할 때, 답은 안타깝게도 전멸이다. 무엇이 ‘옳은’ 결정인가? ‘생명’이라는 가치와, ‘형평’이라는 가치사이의 최선의 중간지점은 어디인가?
최근 한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고있는 무상복지 문제를 생각해보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라는 두 가지 관점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다음 대선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 변수가 되고 있다. 무상복지라는 문제에 개입되어 있는 도덕적 가치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금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성장과 분배’, ‘개인과 사회’, ‘시장과 규제’, ‘효율과 형평’, ‘자유와 평등’ ‘개발과 보존’ ‘사유와 공유’ ‘경쟁과 협동’. 모두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다원화된 사회,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이렇게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가를 물어온다.
2011년 코스타의 본 TM세미나에 참석한 코스탄들은 자신의 일상과 친밀한 친구와 이웃간의 관계로부터 국제질서와 같은 거시적 구조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면에서 제기되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의 질문, 왜 불의가 이렇듯 prevalent한가, 또 불의라고 판단되는 사안에 대해서 어떤 태도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 정의라고 말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나누었다. 한진 중공업 사태, 동성애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지지하는 서명을 요청하는 친구를 대할 때, 힘으로 지배되는 국제정치사회에 과연 하나님의 법이 정의로운 규칙으로 작용할 수있을 것인가, 또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큰 수익을 올릴 수있는 업계의 용인된 영업방식에 대한 고민, 저개발국을 지원하는 정의로운 접근 방식은 무엇일지, 불투명한 교회재정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이슈들을 나누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서, 옳고 그름의 판단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우리의 삶을 align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소명이지만, 또한 우리 힘과 지혜, 능력, 의로움으로 감당할 수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의 key는 무엇일까? (다음편에 계속)
Jul 27, 2011 | 주제

2011 시카고 컨퍼런스를 주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한 마음으로 모여주신 참석자 여러분들과,
또 겸손의 모습으로 섬겨주신 강사님 그리고 자원봉사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계속 해서 홈페이지를 통해 여러분들께 코스타 운동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 해 드리겠습니다.
– 공지사항
온라인 스토어를 오픈했습니다.
코스타를 참석하시지 않으셨던 분들도 회원 가입 후 전체집회 및 세미나 MP3 를 구입하시고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코스타 기간 중 받으셨던 은혜와 감격을 삶의 현장에서도 계속 누려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Jul 18,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전편에서 계속)
세상의 진리에서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은 이야기 한다.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나님은 이야기한다. 공부해서 남 주라고. 어느 것이 더 감동을 주는 삶인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성경 속의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하는 이유는 일군들에게 월급 주기 위함이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포도원의 일군은 포도 생산의 수단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포도원의 일군은 내가 껴 앉고 사랑으로 섬겨야 할 인격체이다. 누가 왜 공부하냐고, 왜 일하냐고, 묻거든, 남 주기 위해 한다고 대답하자.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나의 공부와 나의 재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자.
세상은 돌 다리도 두드려보라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발등 찍히더라도 믿고 품으라고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이 사랑이다. 세상은 ‘때문에의 사랑(love because)’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love nevertheless)’을 말한다. 세상은 가치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가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우리가 먼저 가치를 부여하라고 말한다. 자식이 아무리 버릇 없고, 탈선 하고, 집을 나가도 믿고 끝까지 기다리며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에서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법칙에서 하나님의 법칙으로
세상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 (give & take)’를 이야기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위주로 social network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수 많은 self-help book들이 대인관계의 기술을 이야기한다. 꾸준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놓으라 말한다. 언제 어떤 도움이 필요하게 될 지 모르는 것이 오늘날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관계에 과감히 투자하라고 한다. 인생 최고의 투자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라고 최고의 경영서들이 말한다. 이 투자의 리턴은 물론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 인맥이다. 하지만, 성경은 보물을 이 땅 썩어질 창고에 쌓지 말고 썪지 않을 천국에 쌓아 두라고 말한다. 선행을 베풀되, 절대로 나에게 되갚을 수 없을 것 같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외국인 나그네 같은 사람들에게 정성으로 베풀라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로 보기에는 매우 미련한 일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지혜가 모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한 바 되시고, 우리에게 다시 넘치게 채우신다는 진리이다. 내 친구 중에 서울 구로구 외국인 노동자 진료소에서 3년간 그들을 돌보며 진료한 정형외과 의사가 있다. 중국어도 잘 하는 그 친구는 중국 노동자들에게는 중국말로 친절히 그들을 돌봐주곤 했다. 나는 지금도 내 친구가 그 때 천국에 쌓았을 보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디즈니 영화 알라딘의 주제곡처럼, 정말 a whole new world가 펼쳐질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에 투자하기 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자.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 노력하는 Kingdom Builder가 되자. 인간 관계를 보면,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 복음을 전해,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나와 이 세상뿐 만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 할 수도 영원(eternity)이란 시간을 함께 할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highway의 rest area 같은 곳이다. Rest area에 더 좋은 가구와 장식품을 사려고 돈을 쓰지 않는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들을 우리의 이웃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자. 이 땅에 재물을 쌓기 보다, 하나님 나라에 보화를 쌓자. 영원히 남을 것에 투자하자. 영원의 인간관계에 투자하자. 우리의 섬김으로 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누리게 하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짐이 하나님의 꿈이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 전에 내 삶에 목적은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좋은 학교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몰고, 내가 하는 일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세상이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내 자신을 보니, 나는 회개할 것이 수없이 많은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거저 주신 인생이었다. 예전에는 내 자랑이자 목표였던 좋은 학교, 좋은 직장도, 주님이 주시면 감사, 아니어도 감사였다. 좋은 집도 차도 주시면 감사, 없어도 감사였다. 고난을 통해 연단을 주심을, 연단을 통해 나를 성숙하게 하심을, 기도의 자리로 더욱 이끌어주심을, 그 은혜를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미국 땅까지 보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지 당신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따름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내 안에 품게 하신 하나님이 참 감사했다. 이제 깨달았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곧 하나님의 꿈이구나.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하나님의 가슴 아파하실 것들을 보면서 같이 슬퍼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일들을 주님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 가족부터 시작해서, 직장 동료, 환자, 보호자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내 관심이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 나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었던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렸다. 미국에 오기 전 대학부 수련회 때 눈물로 드린 기도와 같은 찬양 ‘I offer my life’에 주님이 응답하고 계셨다. 찬양 중에 나는 가사 그대로 ‘내 모든 소망, 계획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리니 주 영광을 위해 사용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자 내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리라’는 말씀이 믿어졌다. 내게 필요한 것이면 주님이 공급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생기자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다. 오히려, 내가 품고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께서 이 자격 없는 사람을 존스 홉킨스 보건 대학원 크리스천 펠우쉽(Public Health Christian Fellowship) 회장으로 들어 쓰시고, 시카고 코스타 의료 세미나 코디(coordinator)로 사용하여 주셨다. 절대 내게 능력(ability)이 있어서 섬긴 것이 아니요, 모두 자원(availability)으로 섬긴 것이었다. 섬길 능력은 오직 주께서 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되어 갔다. 이제 내가 더 이상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정진할 때, 내가 아닌 주께서 일하심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 하고 저 사람과 친분을 두텁게 하려고 노력하고, 이 부탁하고 저 부탁하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었다. 하나님께 만남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사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주께서 친히 내 인간 관계도 주장해주시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불러가며 기도하고 있다. 내가 받은 이 사랑과 기쁨을 그들도 누리게 해달라고. 주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의 꿈,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될 때,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붙들자. 이미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응답이 약속되어 있는 이 꿈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
우리가 서 있는 이 곳, 땅끝에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로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그런데 과연 ‘땅 끝’은 어디일까? ‘예루살렘’이 우리의 가족이고 ‘유대’가 우리의 친척과 친지라면 ‘사마리아’는 한 때 우리의 일부였던 우리 원수이다. 하지만 ‘땅 끝’은 말 그대로 땅 끝이다.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가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죽을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다니지 않았으면 평생 우리와 아무 상관 없을 사람들을 만나고 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캠퍼스, 직장은 분명 우리의 땅 끝이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면,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곧 땅 끝이다. 특별히 이 미국 땅은 전세계 민족과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수많은 나라의 학생들이 이 곳으로 공부를 하러, 직장을 구하러 모여든다.
선교적인 삶
내가 만나는 친구들과 선후배, 선생님과 제자, 동료들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을 소개해주고 싶은가?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소개해준 적이 있는가? 말로 소개한 적이 없더라도,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한 적이 있는가? 아니, 아직 말을 꺼낸 적은 없더라도, 마음 속에 품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선교적 삶’을 살고 있다. 아프리카로 떠나야만 선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환자 중에 심한 심장병과 말기 신부전증 (end stage renal disease)로 지금은 돌아 가신 분이 계시다. 환자가 호스피스 기관으로 퇴원하기로 되어 있을 즈음 내가 그 환자를 주치의로서 돌보고 있었다. 퇴원은 해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호스피스 시설에 자리가 나지 않아서 계속 병실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병동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그 환자와 나는 격리 핼액 투석실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셨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내 인턴은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서라도 기도를 받기를 원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지금 정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이 내가 병동에서 환자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 드렸다. 환자도 괜찮다고 했다. 난 하나님이 환자 분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말했고, 환자분을 알게 되고 환자 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어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은 주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고난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승리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다 같이 이 일시적인 육체를 벗고 새 육체로 천국에서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함께 멋지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그 기도를 드리면서 나도 울고 환자도 울었다. 참 불평도 많고 정말 힘들어했던 흑인 아저씨 환자였는데, 어느새 그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이 두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졌다. 내가 오늘 너의 기도를, 내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다렸다고.
하나님의 도구됨
나는 늘 기도 드린다. 부족한 저를 오늘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하고. 한번은 밤 근무 중에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로 내원하신 폐암 말기 환자를 입원시킨 적이 있었다. 매우 야윈 백인 할아버지이셨는데, 문진(history taking)과 검진(physical exam)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에게 종종 찾아가 증세에 차도는 있으신지 물으며, 근무 중에 짬이 날 때마다 찾아가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드리려 노력했다. 할아버지께 먼저 나는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라고 믿는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도 그 말에 동의하신단다. 본인은 교회는 가보지 않았지만, 불교 서적은 많이 보았다고 했다. 밤새 여러 번 할아버지 병실을 찾아갔다. 이 할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앞으로 몇 달 사시지 못할 생각을 하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부어졌다. 할아버지, 이 세상 다음에 영원한 삶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그 영원한 삶을 천국에서 누릴 수 있답니다 하며 용기를 가지고 우리 예수님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시한부 자기 인생을 잘 알고 있는 듯 내가 이야기하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경청해 주셨다. 복음에 대해 설명해드리고, 할아버지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할아버지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놀랍게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어떻게 하면 영접할 수 있냐고 물으셨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으신 하나님의 기쁨이 내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할아버지께 제가 하는 영접 기도를 따라 하시면 됩니다 하며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어찌나 기쁘던지.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지금 천국에서는 할아버지 때문에 큰 잔치가 벌어졌어요.
지금 이 때를 위함
에스더 4장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른 자신의 사촌 에스더 왕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왕후의 位(status)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에 에스더는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로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지금 하필 이 곳 미국 땅에서 특정 동네에서 사고 있으며, 특정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특정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 속의 작은 만남 하나 하나를 위함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한번은 응급실에서 두 명의 환자를 내과로 입원시키고 있는데, 두 환자 모두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이 이 분들을 참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미국의사고시 시험을 보게 하시고 어쩌면 이 미국 땅 필라델피아로 부르셔서 이 분들을 모국어로 돌볼 수 있게끔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나는 내가 되기 원하는 의사상을 그리며 정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심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생각이 참 단순해졌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제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직 바라옵기는 오직 한가지 우리 주님께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했다. 내 꿈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이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Living out His Dream
쇼 야노군이 한 말 “I am living out my dream.”을 기억하는가? 나에게는 그가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고, 자기가 꿈꾸는 그런 삶을 살아도, 하나도 부럽지 않은 놀라운 비밀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꿈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I am living out His Dream).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강물처럼 흘러 넘칠 때, My Dream은 God’s Dream으로 바뀐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감사와 기쁨이 그 꿈 안에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위로와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은혜가 그 꿈 안에 있다. 내 꿈이 하나님 꿈이 될 때, 구하는 대로 주시는 놀라운 응답의 약속이 그 꿈 안에 있다. 내가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살아 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우리가 낮은 곳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섬기며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전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랑’으로 온 세상 위에 높이실 것이다. 당신이 모르던 달란트와 은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영역에서 십분 발휘하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고백해보자. “I am living out His Dream now.”
Jul 16, 2011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최근 대중음악 프로듀서인 친구가 파리에서 개최되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그룹 공연 차 함께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획사 스태프도 아닌 그가 함께 동행한 이유는 K-POP 시장에 자신의 곡을 계약 하려는 유럽 작곡자들과 퍼블리셔들을 위한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괜찮은 작곡자들을 픽업하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세상이다. 자존심 강한 유럽의 팝 시장이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손을 벌리는 시대가 도래 했다. 풍부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지로 타 문화에 배타적인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K-팝 신드롬이다.
지난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이틀 간 열린 SM타운 콘서트가 14,000석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샤이니, f(x) 등 SM 소속 아이돌 그룹의 공항 입국부터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현지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열광은 상상을 초월했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태극마크 머리띠를 두르고, 한글 셔츠를 입고, 한글 랩 가사를 따라 불렀다. 노래, 춤, 외국어로 무장한 K팝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열광케 하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행사가 끝나자 마자 르 피가로와 르 몽드 같은 현지 유력 언론지 들은 이번 공연을 ‘한류, 파리 제니트 공연장 강타’ ‘유럽을 덮친 한류’ 등으로 표현했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도 K-팝을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하나의 운동”으로 해석했다.
홍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유럽에 일어나는 한류 돌풍의 원인을 파리의 이상언 특파원이 5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첫째, K팝이 사랑, 우정, 이별 등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경쾌한 멜로디로 현대화 한 것이 적중했다. 둘째, 국경을 초월한 인터넷 문화(YouTube, SNS 등)가 주요 동력이다. 셋째, 한국영화가 K팝 확산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넷째, SM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대형 기획사들의 매니지먼트 전략도 한류 붐을 일으키는 힘이다. 다섯째, 다른 유럽 국가보다 프랑스에서 한류 열성팬이 많은 것은 팬들이 조직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문화 동호회 ‘코리안 커넥션’ 정회원은 3300여 명이다. 이들이 한국 가요와 드라마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같은 K팝 열풍이 유럽을 넘어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미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류의 실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지만 전후 60년 만에 한국은 경제, 스포츠,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이 작은 나라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무시했던 선진국들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60년 만에 이룬 한류를 주시하고 있다.
관련 기사 가운데 K-팝 가수들의 곡이 인터넷상에서 1억 회 유료 다운로드 되는 때가 올 것이라는 문구에 눈이 멎었다. 영어도 아닌 한국어 노래에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한다는 사실… 과거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다. 하지만 꿈꾸는 자에게 이 기적이 실현될 것이다.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가 하나 된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문화적 코드의 주도권을 거머쥘 날이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천 음악인들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 날을 대비해야 한다. 언어적 장벽이라는 핑계는 더 이상 안 통한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어 찬양을 주목할 날이 올 것이다. 이제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은 탁월한 노래를 준비해야 한다. 한 곡이 1억 회 조회 수와 수천만 회 다운로드를 기록할 날이 오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날을 꿈꾸고 지금부터 10년을 준비하자. 그때 대한민국의 CCM(기독교 대중음악)이 제2의 전성시대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90년대 찬양 열풍은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울타리와 mp3 등으로 참담하게 무너졌지만 2020년의 부흥은 차원이 다른 글로벌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즉 세계화된 음악성, 세대를 포용하는 예술성, 유통의 혁명은 물론 탄탄한 신학적 기초, 통합적 영성과 복음적 삶, 교회와의 긴밀한 상생의 토양, 그리고 선교단체와의 유기적인 연합을 바탕으로 강력한 영적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도시선교는 물론 세계 선교를 앞당길 수 있는 새로운 영적 무브먼트를 주도할 그 날을 꿈꿔본다.
Jun 13, 2011 | 코스타 사역/코스타 컨퍼런스

4반세기를 넘어서 올해로 26번째를 맞이하게 되는 미국 코스타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한국 복음주의 학생운동으로서의 그 역할을 감당해왔다. 특히 미국 코스타 컨퍼런스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믿음이 자라나며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도 많이 있을 만큼 그 열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코스타를 거쳐가고 섬겼던 사람들이 한국과 미국, 그리고 제 3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2011년은 나에게 10번째 코스타를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코스타와 함께 했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코스타 운동을 통해서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고민을 하게 되었고,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의 한 사람으로 미국 안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참석자로, 자원봉사자로 코스타 컨퍼런스를 섬기면서 매년 나를 일깨워주고 영적인 성숙으로 인도했던 다양한 주제들이 있었다.
‘성장’, ‘성숙’, 혹은 ‘성화’ 를 다루게 될 올해의 주제는 예년에 비해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약 2000여명이 모이는 시카고와 스크랜턴 컨퍼런스에서 하나님이 인도해가실 깨달음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우리는 흔히 ‘영적 성숙은 교회에 잘 다니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패러다임에 묶여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성화되어 간다는 의미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나 반복적인 행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또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모델은 진정 어떤 것일까? 우리가 성숙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과연 예수님께서 살아내셨던 삶을 살아 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번 주제는 우리에게 back to the basics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고민해야 함을 도전한다. 특별히 내면을 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내면의 변혁이 없이는 예수님의 삶을 경험할 수 없고 우리가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코스타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모든 코스탄들이 하나님께서 Growing up into Christ라는 올해의 주제를 통해 도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KOSTA/USA
총무간사 김동민
Jun 5, 2011 | 책이야기

진정한 교회의 모습과 역할, 그리고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변화, 그러한 변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 시대의 고민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교회에게 제기하는 엄중한 물음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세계라는 시대적 환경에 대한 민감성과 성경적 원칙들이 갖는 절대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의 균형을 이루는,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들을 고찰하고 있다. 먼저 교회의 본질을, 배움, 돌봄, 예배, 그리고 전도라는 4가지 요소로 제시한 후, 이 비젼을 7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풀어나간다: 예배, 전도, 사역, 교제, 설교, 연보, 그리고 영향력.
전통적인 교회의 핵심요소들의 중요성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예배, 회중예배, 지역교회를 통한 전도, 목사와 감독의 역할, 그리고 강해 설교)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이머징 교회들의 특성들 (영적 초월성과 올바른 삶이 수반되는 예배, 세상 속으로의 침투, 교회중심 활동 탈피, 소모임의 중요성, 성속의 분리 거부, 설교의 호소적 감성적 요소)이 교회에서 균형을 이루어가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교회가 실제로 교회 자신만을 위해, 즉 자신의 생존과 편의 그리고 특권 유지를 위해 조직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니님과 사회를 섬기기 위해 조직되어 있는가? 교회를 지역 사회로부터 불필요하게 분리시키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교회의 건물, 예배 의식, 조직, 프로그램, 그리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점검하기를 촉구한다.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가운데 ‘시각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화석화되고 시대와의 소통에 닫혀있으며 그래서 교회 자신을 섬기는 교회에 대한 냉엄한 비판이자, 포스트 모더니즘적 요구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적실성에 대한 촉구이다. 교회가 지녀야 할 문화적 민감성에 성경적 원칙을 결합한 탁월함이 엿보인다.
제 8장에서, 저자는 소금과 빛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므로, 세상과 다르되 세상으로 스며들어서, 비기독교 세상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이 부패를 막고,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만약 사회가 부패하고 어둡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완전함을 목표로 하지 않고(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만 가능하므로), 개선에 머무르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가 헌신할 만한 목표이며 또한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변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무기고를 열어보인다. 중보 기도, 복음 전도(사회적 양심을 개발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비젼과 용기를 얻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이므로), 모범, 고난(인기가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도덕적 기준들을 위해 기꺼이 받는)과 같은 전통적인 무기에, 논쟁과 행동이라는 법제적 정치적 방법이 더해졌다. 법과 정치를 통한 사회변화는 통상 진보적인 성향을 띠며 종종 기도나 복음 전도에 중점을 두는 진영과 긴장을 이루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성향을 한데로 묶어서 서로의 보완성과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기도나 고난의 영향력에 대한 저자의 확신이 견고한 만큼이나 법과 정치를 통한 사회변화의 방법의 한계에 대한 저자의 보수적인 관점도 확고해 보인다.
사회변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급진성은, 우리가 기독교적 독특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우리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사회 속으로 침투할 뿐 아니라 사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기준, 그리고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64쪽).
200쪽에 조금 모자란 작은 책에 살아있는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길 것을 기대할 수는 없고, 많은 부분은 독자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채워가야 할 여백으로 남겨진 것이겠지만, 그래도 가려운 곳이 없지는 않다. 저자의 교단적 배경에서 비롯된, 교회력에 상응하는 성구집인 일과표를 매 주일 예배 마다 읽는 것에 대한 언급은 조금 낯설게 다가오고, 기독교의 연보가 균등화에 기여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다른 사람들과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차 환대하는” 삶의 기준으로서의 균등화)은 적용에서 자의적일 수 있다는 면에서 아쉽다. 또 기독교적 독특성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논증과 설명이 좀 더 깊이있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저자가 90세에 이르러, 이 시대와 교회를 바라보며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담긴 아래의 두 토막 글을 적어본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무엇인가 할 수있다.
내가 할 수있는 것을, 나는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할 것이다” (Edward Everett Hale의 글, 167쪽)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온 영국 성공회 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 순수성을 좇아 탈퇴하거나, 하나됨을 위해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는 포괄성’을 선택함. (문제가 많고 불완전한) 교회안에 머물면서 진리를 지키는 영속적인 긴장상태 가운데 살아왔음에 대한 그의 고백은 곧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에게 저자가 보내는 초청장인 듯.
(p.s.) 부록 II를 꼭 읽어볼 것. 1974년에 쓰여진, 존 스토트의 ‘살아있는 교회에 대한 꿈’인데 2011년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Jun 5, 2011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지난 주, 멕시코 휴양지인 캔쿤 인근의 리비에라 마야를 다녀왔다. 섬기는 교회의 평신도 워십리더들과 후배 가족이 9년 동안 수고했다며 모든 비용을 지원해서 함께 휴가로 다녀온 것이다. 10여년 만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시계도 없이 4박 5일을 지냈다.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지만 차츰 이 원시적인(?) 삶에 익숙해졌다. 핸드폰이 없으니 오히려 상대방을 더 생각하고 미리 챙기고 묵묵히 기다리기도 한다. 인터넷이 없으니 세상사는 어둡지만 눈앞의 사람과 관계에 더 집중한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루가 더 여유롭다.
돌이켜보면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빠른 정보소통은 없어도 느긋한 여유로움에 사는 맛이 있었다. 그러 요즘은 이 편안함이 문명의 편리함에 의해 제거 당하고 있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한켠에 자녀들이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은 흔한 일이다. 저녁 식사 마치고 가족이 함께 대화할 시간에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인터넷 서칭과 페이스북 하는 모습은 일상사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 방에서는 TV, 컴퓨터를 아예 못쓰도록 못 박았다.
최근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게임 그리고 텍스팅(texting) 같이 점차 그 양이 늘어나는 테크놀로지의 자극이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테크놀로지 세대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멀티족(multi-tasker)이다. 이들은 노트북에서 영화를 보며 공부하고, 인터넷 서치하며 커피를 마시고 텍스팅 하는 등 동시에 두세 가지 행동에 능숙하다. 요즘 청소년, 젊은 세대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멀티태스커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이 자료에 의하면 멀티태스커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산만한 사람들”이었다. 즉 멀티태스킹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주위가 산만하고 맡겨진 일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가설을 뒤엎는 충격적인 결과이다.
UC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한 연구 결과도 멀티태스킹의 해악성을 지적했다. 스마트폰이나 쇼셜 네트워크에 의한 주의산만이 두뇌활동과 장, 단기기억(long-term, short-term memory)에 장애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빈번한 자극과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두뇌를 손상시키며, 더 나아가 다양한 최신 테크놀로지의 유혹에 저항할 힘을 잃게 만든다. 그 결과는 테크놀로지 중독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테크놀로지 다이어트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휴가 마지막 날 이른 아침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몸은 피곤했지만 내 발걸음은 바닷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밑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소리도 귀에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박한 문명에 짜든 영혼에 안식을 주었다. 그 자연의 소리들이 내 심장에 그림을 그렸다. 이때 떠오른 시상이다.
“이른 아침 넘실대는 파도 소리 / 지저귀는 열대 새소리 / 귓가에 오가는 바람의 여유로움 /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 / 파라솔에 홀로 누워 / 흐르는 소리에 심취한다 / 아무런 조직도 프로그램도 / 편곡 악보도 없이 / 다양한 피조물이 저마다 노래하지만 / 불협화음 하나 없는 자연의 향연 / 그 신비에 묻어있는 / 창조의 DNA가 보이듯 하다 / 그 노래에 실려 있는 / 태초의 소리가 들리듯 하다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훌륭한 시는 아니더라도 등 떠밀려 떠난 이번 휴가의 가장 값진 깨달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리까지 들었으니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4일의 효과가 대단하다. 제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테크놀로지가 진화해도 인간의 행복은 결국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친밀함에 있다. 올 여름, 휴가를 계획할 때 ‘테크놀로지 다이어트’ 해봄 직하지 않겠는가? 혹 휴가를 꿈꿀 처지가 못 되더라도 이 새로운 다이어트로 단절된 가족 간의 대화를 회복해보길 강력 추천한다.
– 이유정 목사
May 14, 2011 | 기독교적 세계관/이인엽의 예수의 국제정치학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2
앞의 글에서는 빈 라덴의 죽음을 계기로, 과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진행된 미국의 비밀 작전의 역사와 영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역사의 의미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함의의 살펴보려고 합니다. 냉전기 미국의 개입과 그 결과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라는 정치학자의 ‘블로우백(Blowback)’입니다. 블로우백은 원래 CIA 내부 용어로, 비밀 작전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해로운 결과가 아군에게 미치는 것을 설명하는 단어였습니다. 찰머스 존슨은 이 개념을 통해, 비밀리에 진행된 CIA 작전이 결국 9.11테러와 탈레반, 알카에다의 형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합니다. 즉, CIA가 미국의 필요에 따라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아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이 결국 9.11테러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는 일종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입니다.[i]

찰머스 존슨과 그의 책 ‘블로우백’
9.11테러가 발생한 후, 당시 부시 대통령은 “그들은 왜 우리를 증오하는가 (Why do they hate us)?”라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증오한다 (They hated our freedom)”이라고 스스로 대답을 했습니다. 즉, 9.11테러 공격은 선을 상징하는 미국이 누리는 번영과 자유를 시기한 악의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며, 테러와의 전쟁은 선악간의 투쟁이라는 말이지요. 이에 대해 찰머스 존슨은 앞에서 소개한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를 증오하느냐구요?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파월, 아미티지, 즉 1980년대에 아프간에서 역사상 최대의 비밀 작전을 수행했던 그들이 아주 자세하게 답해줄수 있을 겁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노리에가나 후세인 처럼 한때 미국의 가까운 협조자로 있다가 이제 공공의 적이 된 인물들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ii]
모션캡쳐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베오울프(2007)’를 보면, 영웅 베오울프는 괴물을 물리쳐 왕의 자리에 오르고, 외적과 괴물로 부터 왕궁을 지키는데, 결국 왕국을 위협한 최후의 괴물은 전쟁의 과정에서 베오울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를 비유로 사용한다면, 소련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죽이기 위해 미국은 작은 괴물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이제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과거 범죄조직의 일원이었다가 손을 씻은 후,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과거의 인물들이 찾아오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폭력을 사용해 악당들과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은연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성이 전염되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역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 읽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베오울프(2007)’
영화 ‘폭력의 역사(2005)’
물론 테러의 원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책임이 미국에게만 있다는 주장도 당연히 지나친 생각이겠습니다. 미국의 정책과 상관없이도 반미감정을 내세우고 테러를 일삼는 집단이 나타날 수도 있겠고, 헌팅턴이 주장 했듯이 지하드와 같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영향도 중요한 요소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테러와 반미감정의 일정부분은 과거 미국이 냉전기에 뿌린 씨앗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국의 한 복음주의 목사님이, 기독인으로서 누군가가 죽은 것을 기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만,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빈 라덴은 자신이 뿌린 악의 씨앗의 열매를 거둔 것이며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빈 라덴이 수천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9.11 테러의 주범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는 미국에도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미국이 경험하고 있는 국제관계상의 문제들, 특히 테러와 반미감정은 상당부분 냉전기에 미국이 뿌린 씨앗의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는지 몰랐을 지라도 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할 때의 일인데, 같은 사무실에 있던 나이가 많으신 미군 특무상사 (Sergeant Major) 한분이, 9.11테러 이후 아프간 전쟁이 한창이던 2002년 경 제대를 해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분과 우연히 함께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분은 자신이 80년대에 아프간에서 스팅어미사일 교관으로 무자헤딘을 훈련시켰었다고 하면서, 그 무기로 지금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미군을 공격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럴수가 있냐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그럼 극단주의 무슬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후에, 소련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손떼고 떠난 미국의 정책은 잘한 것인가 묻고 싶었죠.
물론 이런 비판은 미국안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고, 까딱하면 반미주의자나 극단주의자, 혹은 비미국적인 발언으로 공격받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내부 경선 주자 중 한명이었던 하원의원 론 폴(Ron Paul)은 미국 내에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몇 안되는 정치인중 하나인데, 미국의 무분별한 해외 개입을 중단해야한다는 입장에서, 위에서 말한 찰머스 존슨의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아프간전과 이라크 전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뉴욕시장이었던 루디 줄리아니를 비롯해서 다른 후보들은 “그렇다면 9.11 테러의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냐”며 “그런 발언은 비미국적이고 용납할수 없다”고 펄펄 뛰며 론 폴에게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iii]
조지 부시를 비롯해서 미국 보수인사들이 보이는 중요한 특성이, 반성적 사고가 부재하고, 쉽게 미국 스스로를 ‘선’으로 미국의 적을 ‘악’으로 등치시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기독교적인 수사들을 들으면 언뜻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지만, 결국은 성경적인 생각도 아닐 뿐더러, 복음전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가져옵니다. 사실 성경은, 외적으로 행해지는 악도 있지만, 내적 반성이 없이 스스로 선을 자처하며 문제를 외부로 돌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하라고 하는 태도 자체가. 더 심각한 ‘악’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절한 비판을 보면 이를 잘 알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미국 남부에서 상당수의 보수 기독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미국 역사의 어두운 면들 – 인디언 학살, 흑인 노예제와 인종 차별, 베트남 전쟁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 등등 – 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알아도 반성적 사고가 없이 무조건 미국은 옳았다라는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서 깊은 실망감을 느낀적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과 반성적 사고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 테러리즘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결정에 결정적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결국 테러리즘을 포함한 국제 갈등의 원인을 문화와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서, 이슬람 문화와 종교의 폭력성에 테러의 근본 원인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반드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중요한 요소들인 과거 미국의 외교정책에 오점들, 즉,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원의 문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패권정책, 중동국가들의 비민주성과 그러한 독재정부와 미국의 유착관계 등을 간과하는 것이 상황을 심각하게 오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경우 단순화는 쉬운 답을 제공하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화된 사고와 신학이 끼치는 폐해들을 우리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

헌팅턴 교수의 책 ‘문명의 충돌’
그동안 중동에서의 미국의 정책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목표들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석유를 확보해야 하고, 또한 미국의 최우선순위인 이스라엘의 이익과 안보를 보장해야 하고, 이러다 보니, 실제로는 수많은 독재정부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 미국의 가치(민주주의, 인권, 경제발전)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미국의 이익(냉전에서의 승리, 석유이익확보, 이스라엘 지지, 테러와의 전쟁)이 더 중요했고, 이러한 괴리는 아랍인들에게 심각한 환멸과 반미감정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부시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알카에다와의 연계가 발견되지 않자, 후세인이 독재정부이기 때문에 침공이 합리화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미국은 자신의 다른 동맹국들 –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 이집트, 요르단, 쿠웨이트 등등도 침공해 민주화를 시켜야 했겠죠. 앞에서 말한대로, 파키스탄은 최근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긴 했지만, 군부와 ISI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재국가에 가깝고 테러와의 전쟁 내내 쿠테타로 집권한 무샤라프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최악에 가깝고 일종의 중세시대에 가까운 상황인데, 정당이나 헌법조차 없을 뿐더러, 여성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개종을 하게 되면 국가가 목을 베거나 국외로 추방할 권리가 있을 정도 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많은 기독인들이 이제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라크 전쟁은 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우디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우디가 최대의 산유국이고, 유가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석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기로 합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은 중동의 안정과 이스라엘의 안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의 독재정부를 지지해 왔습니다. 이집트에서 시민들이 무바라크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을 일으켰을 때 미국이 이를 선뜻 지지하지 못한 이유이지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한 점령정책과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함으로서 아랍인들의 공분을 사 왔습니다. 결국,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근본 원인이라는 헌팅턴의 주장은 단순한 설명을 원하는 미국인들에게 쉽게 지지를 받고, 과거의 정책에 대한 불편한 양심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테러리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듭니다.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일종의 거짓선지자인 셈이지요.
사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조직이 중동의 시민들의 삶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가 뭐가 있습니까? 말 그대로 공포(Terror)와 분쟁만을 안겨주었을 뿐이고, 아랍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고, 진정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가로막은 역할 밖에 한 것이 없지요. 예를 들어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중동에서도 시민혁명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테러리즘은 힘과 지지를 잃어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상당히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iv]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즘이 이제까지 지속 되어 온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내재한 모순으로 인한 반미감정이 워낙 극심하고, 그것이 테러리즘에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왜 그러한 반미감정이 일어나는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청난 무기와 첩보전을 통해서도 테러리즘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빈 라덴이 사살 된 후, 미국 언론에서 진행된 또 하나의 논쟁은 바로 고문의 효용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특히 폭스 뉴스를 비롯한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오바마가 정치적으로 유리해진 상황을 못견디고, 이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는데, 특히 과거 부시정부의 인사들을 불러다가 고문을 허용했던 것이 빈 라덴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전 부통령 체니, 전 국방부장관 럼스펠드, 그리고 법무부에서 일하면서 고문과 관련해 법률조언을 했던 버클리대 법과 교수 존 유 (John Yoo)등을 불러다가 인터뷰를 했는데, 특히 존 유 교수는 아부그레이브와 관타나모 기지에서 고문이 허용되도록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테러리스트에게는 제네바 협정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최근 폭스 뉴스의 마이크 허커비 쇼에 출연한 그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비난을 받았지만, 고문의 효과가 빈 라덴의 사살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했고, 호스트인 허커비도 고문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인 존 유 교수가 고문이라는 국제법에도 위반되고 인권을 유린하는 정책을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안타깝고, 아무리 보수인사라지만 남침례교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인 허커비가 자신도 고문의 중요성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v] 같은 보수 정치인이긴 하지만, 베트남 참전시 포로가 되어 5년동안 잡혀서 고문을 경험했던 존 메케인은 다행히도 고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습니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유교수의 사진

존 유 교수를 전쟁범죄로 기소해야한다고 비난하는 시위자들의 모습
고문이 빈 라덴의 위치 파악에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고문이 도움이 되었다면, 부시 정부는 두번의 임기가 끝나도록 왜 빈 라덴을 잡지 못했고, 이라크 침공을 비롯해 왜 그렇게 처참한 정보의 실패를 거듭했는가에 대답을 해야하겠죠. 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주었더라도 그런 방식을 통해 과연 테러리즘을 해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엄청난 군사력에도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라크전쟁에서도 수렁에 빠저 헤어나오지 못하고 제2의 베트남전이 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모두가 정당성(legitimacy)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소련과 구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진 것을 보면, 고문과 도청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정당성이 없는 싸움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잘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정당한 목적과 더불어 정당한 수단이 도입되어야 장기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을 보면 이스라엘 특수조직이 검은 구월단의 테러에 보복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의 지도자들을 역시 테러를 통해 암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결국 테러는 테러를 낳을 뿐이며, 암살된 테러 조직의 지도자들은 더욱 악독한 인물들로 교체되고, 테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뮌헨(2005)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이 오늘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된 것을 살펴보면, 손쉬운 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한 불법적인 수단들은 결국 언젠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냉전기에 공산주의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정당성이 있었지만, 그 목적이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고, 오늘도 테러리즘을 저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니체는 “괴물과 싸울때는 당신이 괴물과 닮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사단의 시험도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정당성을 이야기 하면 현실주의자들은 순진한 이상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책이나 전쟁이라도 정당성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당성이 국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담보하고, 국제적으로 동맹국들의 지지를 담보하며, 분쟁 지역에서 현지인들의 지지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전 이후 미국인들도 “winning hearts and minds”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배우게 되었죠. 이러한 정당성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정치와 관련된 논의를 들어보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요, 많은 미국의 기독인들도 하나님이 아닌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우상으로 섬긴다는 것은 번영과 안보가 궁극적 가치가 되어 다른 가치들과 충돌할때 최우선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문도 괜찮고 도청이나 납치, 암살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정의보다 국가 안보가 중요하다는 말외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다소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하면, 기독인들 중에서는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꽤 있으실 줄 압니다. 흔히 미국에 대한 입장은 친미냐 반미냐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갈라지는데, 저는 ‘미국이 하는 것은 언제나 옳고 정의로우며 미국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친미’도, 그리고 ‘미국이 곧 모든 악의 근원이며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반미’도 기독인의 입장이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한다면, 벌써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지요. 기독인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거리를 두고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에서 지지할 것은 지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일치한다면 좋은 일이겠는데, 그 두가지가 충돌할 때, 우리가 국가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아닌 ‘국익’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절대화를 상징하는 금신상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 처럼, 모두가 옳다고 믿는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인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도해 봅니다. 설령 단기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목적과 수단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 정의와 생명, 평화의 길이라는 것이 성경과 역사가 말하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나오며
빈 라덴이 사살된 것으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빈 라덴의 죽음 자체에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은 것은, 이제는 빈 라덴 개인이나 그의 죽음 자체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빈 라덴이 더 이상 테러를 계획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기독인으로서 한 개인의 불행한 죽음을 축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의 그를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로 즉결 사살 한 방식에도 문제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 이후 공포심을 이용해, 정당성 없는 이라크전쟁을 밀어부친 부시 정부가 거짓말로 점철된 임기를 보냈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빈 라덴을 추적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오바마가 상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바 대로, 드러난 현상인 테러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과거 정책을 반성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비롯한 중동의 평화와 민주화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테러리즘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i]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25
May 13, 2011 | 기독교적 세계관/이인엽의 예수의 국제정치학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이번학기에 박사과정 종합시험이 있어서 연재를 한참 쉬다가 오랫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이번에는 최근에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빈 라덴 사살과 관련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1
지난 5월 1일 오바마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했고, 뉴스에서 연일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백악관 앞에서는 수백명이 “U.S.A.”를 외치는 등, 많은 미국인들이 이에 대해 환호를 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2001년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 테러로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D.C.의 펜타곤 등이 공격당하고 약 3천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들의 이러한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과연 빈 라덴의 죽음과 지난 10년간 진행되어 온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이고, 답하기 힘든 질문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일지라도, 기독인의 입장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리고 체포후 법정에 세워서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닌, 당시 비무장이었던 그를 일종의 암살에 가까운 방법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이었나, 또한 근본적으로 미국은 선이고, 테러리스트 혹은 이슬람을 악이라고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 테러리즘의 원인은 무엇이고 현재의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과연 테러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이슬람권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인가 등등의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질문에 다 답하기는 불가능 하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빈 라덴이라는 인물의 과거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서,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빈 라덴 사살을 발표하는 오바마 대통령
빈 라덴 사살을 다룬 타임지 표지 사진

빈 라덴 사살 발표이후 백악관 앞에 모여 환호하는 미국 시민들 (연합뉴스)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입차원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두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빈 라덴을 포함해 9.11에 가담한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90%이상)의 국적이 어디냐는 질문이고, 두번째는, 빈 라덴이 살해된 지역이 어디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문제의 답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비교적 쉬운 질문이지만, 미국에서 진행된 설문조사 (Program on International Policy Attitudes Survey)에 따르면 불과 설문자의 27%만이 답을 맞췄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중 하나이며, 미군이 엄청난 규모로 주둔해 있는 국가인데, 9.11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이 이라크나 이란, 아프가니스탄 같은 반미 국가, 혹은 소위 불량국가 출신이 아닌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라는 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번째 질문의 답인 빈 라덴이 발견되고 살해된 지역은, 최근 뉴스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산간지역이 아닌,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불과 38마일 떨어져있고 파키스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아보타바드(Abbottabad)라는 부유한 교외지역이었습니다. 파키스탄 역시 미국의 동맹국으로,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중요성 등으로 인해, 미국에서 해마다 10억 달러 이상씩의 엄청난 원조를 받아왔는데, 이 사건 이후, 자기네 수도 근처에 빈 라덴이 살고 있는 것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요, 빈 라덴을 숨겨주거나 묵인해 왔다면 동맹관계를 배신한 행위라며, 미국은 파키스탄을 엄청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CIA 국장 레온 파네타는 최근 미 하원에서 빈 라덴의 은거지 위치로 볼 때, 파키스탄이 “정말 무능하거나 아니면 빈 라덴에 연루되어 있다(either incompetent or involved)”고 볼 수 밖에 없고, 둘 중에 어떤 경우든 심각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어떻게 빈 라덴은 파키스탄의 수도 근방에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하는 가를 살펴봐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를 소련이 아프간을 통과해 중동의 석유에 접근하고 부동항(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을 확보하고자 하는 ‘팽창 전략’으로 해석하여, 당시 카터 대통령은 유명한 ‘카터독트린(외부세력이 페르시아만을 통제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필요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막겠다는)’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소련을 약화시키고 아프간에서 철수하게 하기 위해 79년부터 3천만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사이클론 작전(Operation Cyclone)’을 시작하였고, 1985년 3월 후임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 결정 명령166호에 서명하여 지원액을 2억5천만달러로 늘렸고, 2년 뒤인 1987년엔 6억3천만달러까지 증액하여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지원이 총 10년간 지속됩니다. 그 기본 전략은 파키스탄 정보국인 Inter-Services Intelligence(ISI)를 통해 근본주의 이슬람세력인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해 소련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대통령 카터(오른쪽)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운데), 그리고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왼쪽)

전 대통령 레이건(왼쪽)과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 (오른쪽)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초청해 백악관에서 대화하는 전 대통령 레이건
이에 따라 1986과 1992년 사이 10만명이 넘는 이슬람 전사들이 CIA와 MI6(영국 첩보부)의 감독하에 파키스탄에서 훈련받았고 영국 특수부대 SAS는 미래의 알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쳤으며, 무자헤딘 고위 지도자들은 버지니아에 있는 CIA캠프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우디에서 온 빈 라덴을 포함, 전세계 43개국에서 온 3만5천명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아프간 무자헤딘과 함께 싸웠고, 수만명의 새로운 자원자들이 ISI와 CIA가 후원하는 파키스탄의 마드레사(이슬람학교)에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재정과 스팅어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들이 지원되어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았는데, 예를 들어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스팅어미사일을 쏠 때마다 거의 70%의 확률로 소련 헬기와 비행기들을 격추시켰고, 한발에 6~7만달러 하는 스팅어 미사일로 소련군에 거의 2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결국 소련은 14,427명의 군인, 118대의 전투기, 333대의 헬기와 다른 엄청난 손실을 입고 아프간에서 철수하였고, 이는 소련의 붕괴에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카터정부의 국가안전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1998년 프랑스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에서 수행한 미국의 비밀작전은, 소련을 미국의 베트남전에 비견되는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 뛰어난 아이디어였다”고 자랑한 바 있습니다. [i]




대 소련 투쟁 당시 무자헤딘 게릴라들
미국이 지원한 스팅어 미사일을 사용하는 장면
당시 미국의 최우선순위는 냉전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에, 소련을 약화시키고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이었던 무자헤딘은 미국 언론에서 아주 호의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은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서 외부 침략자들에 저항해온 용맹한 전사들로 그려지고, 반면 소련군은 엄청난 무력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저항세력을 토벌하는 잔인한 침략자로 묘사됩니다. 한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실베스타 스탤론의 영화 ‘람보III(1988)’는 베트남전에서 활약했던 람보가 아프간에 가서 무자헤딘을 도와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심지어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영화를 용감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바칩니다(This Film is dedicated to the gallant people of Afghanistan)’라는 헌사가 나올 정도입니다. 오락영화이긴 하지만, 당시 아프간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2007년에 나온 영화 ‘찰리윌슨의 전쟁(Charlie Wilson’s War)’을 보면, 플레이보이면서 냉전의 전사였던 하원의원 찰리 윌슨이 어떻게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적 국제적 수단들을 동원해 활약하는지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CIA는 무자헤딘 게릴라의 사기를 진작을 위해 코란 수천권을 인쇄해서 배포할 정도였습니다.[ii] 지금의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인데, 쉽게 말해 소련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작전은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미국 국민들 대부분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됩니다.



영화 람보III (상), 영화 찰리윌슨의 전쟁 (중),
무자헤딘들과 함께 촬영한 하원의원 찰리윌슨의 실제 사진 (하)
문제는 이러한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과격파 이슬람으로서의 무자헤딘 게릴라의 성격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파키스탄의 ISI를 대리인으로 사용하면서 ISI가 다른 목적을 위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무자헤딘 지도자 중, 굴부딘 헤크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 같은 인물은 유명한 6개의 헤로인 공장을 소유한 마약거래상이자 가장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이슬람 군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하원의원 찰리윌슨과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 등이 ISI에 수억달러의 지원을 보낼 때, 그 지원금의 거의 절반을 받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CIA의 윌리엄 케이시는, 전쟁을 아프간을 넘어 소련까지 확대시키고자 하는 헤크마티아르의 극단적 성향으로 인해, 그를 특별히 선호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iii]
전 CIA 부국장 리차드 커(오른족)와 함께 한 헤크마티아르(왼족). 1988년 이슬라마바드
이러한 미국의 비밀 작전에서 마약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는데,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재정지원과 더불어, 상당량의 자금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CIA가 정부로 부터 받는 예산은 의회에 감사와 보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불법적이거나 비밀리에 수행되는 작전들에 사용할 수 없고, 따라서 외부 예산을 확보하는데, 여기에 마약이 중요한 재정공급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베트남전 당시 Air America 항공을 통해 마약을 해외로 운송했는데, 이는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2007)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습니다. CIA 작전이 시작된 지 2년 안에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역은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지역이 돼 미국내 수요의 60%를 공급했고, 파키스탄에서 헤로인 중독자는 1979년 사실상 전무했으나 1985년에 12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무자헤딘이 승리했던 1986년경 아프간은 전세계 헤로인의 40%가까이를 생산하고 있었고, 1999년에는 80%를 생산할 정도였습니다. 1995년에 전직 CIA 아프간 담당자 찰스 코건(Charles Cogan)은 마약거래가 소련을 철수하는 주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부산물로 어쩔수 없이 나타났다고 합리화 했는데, 결국 마약 자금이 CIA작전에 중요하게 사용되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iv]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파트너로 선택한 북부동맹의 군벌들 역시 마약왕들이었고, 2009년 경에는 전세계 아편의 93%가 아프간에서 생산되었고, 현재 아프간 정부 내 정치인들과 고위층들도 공공연히 마약거래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현 대통령 카르자이(Karzai)의 친동생인 아흐메드 왈리가 바로 칸다하르를 지배하는 통치자이며 아프가니스탄의 ‘마약왕’이며 CIA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CIA와 ISI의 지원을 받은 헤크마티아르는 또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아주 가까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v] 오사마 빈 라덴이 CIA에서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느냐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결국 그도 미국의 지원 하에 치러진 아프간전쟁의 와중에 성장하고 적어도 간접적 지원을 받은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빈 라덴 개인도 중요하지만, 파키스탄의 ISI, 탈레반, 알 카에다의 동맹 관계가 결국 냉전기 미국 패권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 주목해야할 사실입니다.
미국이 직접 지원이 아닌, 파키스탄의 ISI를 중개자로 해서 비밀리에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은 소련의 파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는데, 여기서도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파키스탄은 이 비밀작전에서 얻은 자원과 경험을 자신의 적대국인 인도와 싸우는데 이용했고, 카슈미르 등의 분쟁지역에서 아프간전쟁에서 체득한 게릴라 전술을 활용했습니다. 또한 파키스탄 군부와 ISI는 무자헤딘을 교육하면서 이슬람을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으로 가르치고, 무신론자인 소련 정부에 맞서 지하드를 일으키며 소련의 해체와 구소련 국가들에서의 무슬림 공화국 건설까지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교육했습니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아프간 전쟁 이후에도 소련의 해체와 중앙아시아 지역 6개 무슬림 국가 건설을 지원하고 개입한 바 있습니다. 파키스탄 내부에서도 CIA와 ISI의 관계는 지아 울 하크 장군(Zia Ul Haq)이 부토 총리를 쿠테타로 축출하고 세운 군사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결국 파키스탄 내에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권력집단이 된 ISI와 파키스탄 군부는, 현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과 민간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실질적인 파키스탄의 실세가 되어있고 핵무기도 이들의 통제하에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80년대에 미국의 지원하에 무자헤딘 네트워크와 극단주의 이슬람운동이 급속히 성장하자, 파키스탄의 전 총리였던 부토 여사는 미국을 방문했던 1989년 당시,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에게 “당신들은 지금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경고할 정도 였습니다.[vi] 다시말하지만, 냉전기 미국의 비밀작전을 진행하면서 형성된 파키스탄 ISI와 탈레반, 알카에다간의 견고한 동맹관계는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네트워크가 되어 버렸고, 오늘 미국이 골치를 않는 테러조직의 뿌리가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vii]
아프간과 관련된 또하나의 정책 실패는, 소련이 철수하자 마자 미국이 아프간에서 즉각적으로 관심을 잃고 손을 떼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무자헤딘과 아프간을 소련을 패배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아프간의 미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련의 지배는 60만에서 2백만에 가까운 아프간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갔고, 5백만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습니다. 89년 소련이 철수하자 놀라운 승리를 자축했지만, 미국은 전쟁으로 찢겨진 아프간에 대해서는 이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무자헤딘에 대한 재정지원과 파키스탄의 난민 지원을 바로 끊어버렸고, 아프간 사회의 재건을 위한 진지한 지원은 전무했습니다. 1992년 마침내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책임을 넘기고 아프간에대한 모든 개입을 종료했습니다. 아프간이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와 관심에서 사라진 후, 아프간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소련이 떠나고 난 후, 통합된 리더쉽의 부재는 다양한 무자헤딘 파벌간의 권력쟁탈전을 낳았고 군벌들의 난립과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예로 1994년에만 수도 카불에서 만명 이상의 인명이 사망했고, 마침내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극단적 이슬람 세력인 탈레반(Taliban)이 카불을 장악하고 근본주의 이슬람국가를 설립해 200년에 95%의 국토를 장악하게 됩니다. 탈레반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단 세나라중의 하나가 파키스탄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겠지요.
알카에다(Al-Qaeda)는 빈 라덴과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이 파키스탄 페샤와르(Peshawar)에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외국인 출신의 무자헤딘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Maktab al-Khidamat)에서 유래합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후 미국에 의해 소위 ‘자유의 투사’라고 불리었던 이들은, 1991년 사우디의 이슬람성지인 메카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사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미국의 중동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이제 서방세계를 향해 테러를 시작합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에 폭탄 테러를 하고 CIA 요원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93년 이들의 폭탄 테러에는 과거 무자헤딘 게릴라들을 위해 쓰여졌던 CIA의 폭파 교본이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viii]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이지요. 여론이 악화되자 알카에다 본부를 제공하고 있던 수단은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알카에다는 마침내 과거 대소련 투쟁의 동지였던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본부를 옮기게 됩니다. 1998년 8월 7일 알카에다는 동아프리카의 미대사관을 공격하고, 2001년 마침내 9.11 테러가 발생합니다.
2001년 9.11 테러
9.11을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테러가 일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적으로 달라지는데, 소련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영웅적 전사들에서, 인권을 유린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마약거래를 일삼는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미국이 이들을 지원하던 80년대에부터 동일하게 존재했던 문제들이고, 단지 냉전하에서 소련과 싸우는 미국의 필요에 의해 감춰져왔을 뿐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유명한 노암 촘스키는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가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온갖 범죄행위들을 눈감아주다가, 독자노선을 가기 시작하고 파나마 운하에서 미국의 이익에 위협을 가하자, 바로 그를 깡패이자 마약장사꾼으로 비난하고 결국 침공해서 체포했다는 것을 예로 드는데, 사실상 그는 CIA 고용되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담 후세인도 이라크 전쟁시는 악당중의 악당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 80년대에 이란-이라크 전쟁시, 이란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미국은 후세인을 지지해 무기를 지원했었는데,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후세인은, 전쟁 후에 석유기업을 민영화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시작한 후부터, 비난 받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 가르시아(Somoza Garcia)에 대해 했다는 다음의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 합니다. “He may be an S.O.B., but he’s Our S.O.B.” 외국의 지도자가 독재자냐 아니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미국의 이익에 합치하느냐라는 것이지요. 결국 미국 외교정책의 가치판단과 윤리는 상당부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쉽게 조작될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1983년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과 악수하는 젊은 시절의 럼스펠드. 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시 미국은 이란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라크를 지지하고 무기를 판매하였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빈 라덴이 파키스탄 수도에서 가깝고 군부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아보타바드에서 발견된 것에 대해, 최근 미국 정치인들과 언론은 엄청나게 분개하면서, 파키스탄내에 빈 라덴을 지원한 세력이 있다며 파키스탄 때리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군부대까지 있는 파키스탄 수도 근처에서 빈 라덴이 5년이상 은거하고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는 파키스탄 내의 지원세력이 있다는 것(아마도 군부와 ISI내에 협력세력)이 거의 분명하겠지요. 이전에도 빈 라덴 이외에 상당수의 알 카에다 고위 지도자들이 파키스탄 영토 내에서 체포 된 바가 있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아흐마드 슈자 파샤 (오른쪽 끝) ISI 부장과
마이크 멀린 (왼쪽 끝) 미 합창의장 (사진: 한국일보)

결국 9.11테러의 주범인 빈 라덴을 동맹국인 파키스탄의 어떤 세력이 숨겨주었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이제까지 살펴본 80년대 미국의 비밀작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파키스탄 ISI를 통해 80년대에 무자헤딘을 훈련하고 무장시킨 것은 사실 미국이라는 것, 그리고 무자헤딘의 후신으로 나타난 것이 알카에다와 탈레반이라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지금와서 그 관계가 깨끗하게 청산되었기를 바란다는 것이 오히려 우습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다 보면, 미국인들은 상당히 ‘선택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미국의 개입에 대한 과거 역사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과거 아프간에 대한 미국 개입의 역사를 설명했다면, 다음 글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
[i] Le Nouvel Observateur, Paris, Jan, 1998
[ii] Steave Coll ‘Anatomy of a Victory: CIA’s Covert Afghan War,’ a article in the Washington Post, on July 19, 1992
[iii] Robert Dreyfuss, Devil’s Game: How the United States Helped Unleash undamentalist Islam, New Work: Metropolitan books, 2005, p.268
[iv] Alfred McCoy, Drug fallout: the CIA’s Forty Year Complicity in the Narcotics Trade. The Progressive; 1 August 1997.
[v] Steave Coll, Ghost War,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4. p.119.
[vi] Evan Thomas, ‘The Road to Sept. 11,’ Newsweek, October 1, 2001.
[vii] Steve Coll’s interview at the University of Berkeley (the Conversation with History) on March 15, 2005.
[viii] Michael Powelson, ‘U.S. support for anti-Soviet and anti-Russian guerrilla movements and the undermining of democracy,’ Demokratizatsiya, Spring 2003
May 11, 2011 | 책이야기/eKOSTA 서평
<십자가와 칼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by Gregory A. Boyd

<십자가와 칼>이라는 제목은, ‘칼의 힘’ 즉 ‘위에 서는 힘’ ‘세상 나라’와 ‘십자가’ ‘아래에서 섬기는 힘’간의 contrast를 강조해준다. 통상, 이 두 가지 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잘 융합해서 균형있게 사용할까인 것 같다. ‘칼’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칼’을 허락하시고 ‘십자가’를 위해서 사용하시는가의 원리를 찾아서, 세상 권세에 빼았겼던 ‘칼’을 ‘십자가’로 되찾아 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합리적인(?) 접근을 철저히 비판한다. 저자의 세계관에서, ‘칼’과 ‘십자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칼’은 ‘십자가’를 위한 도구일 수 없고, 도구여서도 안 된다. ‘칼’은 이 세상과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의 권한은 현재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부여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국가와 정부에게 권위를 주어서 – 악한 왕과 나라를 통해서도 – 선한 가치들을 이 땅에 구현하는데 이용하신다는 것, 세상 국가나 정부의 선기능을 성경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판단하기에 상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한 나라와 정부와 통치자라 하더라도 사탄의 강력한 권세와 근원적인 죄의 문제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 나라는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될 수 없다. 악한 나라와 사람들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지 않고, 자신의 나라(좀 더 선한 나라)를 ‘하나님의 군사’로 삼으셔서 ‘칼’의 힘을 쥐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악한 나라를 심판하게 하신다, 이것이 좀 더 선한 나라, 혹은 교회, 혹은 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나라의 힘을 맡기신 이유이다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이 세상 나라의 힘과 권력, 세상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 땅에 이루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고 세상 나라의 도덕적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에 대하여, 저자는 단호하게 “NO”라고 외친다.
이 “NO”의 근거는, 첫번째, 역사에서 발견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화되어서 국가 권력과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과 손잡을 때 나타났던 폭력과 억압,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국가및 종교 이기주의,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방해를 받았는지의 사례는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 시작해서 2005년의 미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저자는 ‘십자가를 앞세운(혹은 그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을 myth라고 부른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발 성전Holy War이 이슬람발 성전과 한판 승부를 벌이던 2004년 무렵이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기 위한 전쟁은, ‘미국을 하나님께 되돌려 바친다’라는 기독교적 슬로건 아래 보수적인 기독교 그룹으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렇게 미국 vs미국에 대적하는 세력을 하나님 vs 사탄, 빛 vs 어둠, 선 vs 악으로 양분하면서 미국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군사력과 힘’으로 이 적대세력을 심판하는 일이 정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과의 전쟁에서 피해자가 된 국가와 사람들은 미국을 적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종교와 미국을 수호하는 신, 곧 기독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적으로 여기게 됨으로 세계 선교에 회복불가능한 해를 입혔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개종시키는 것이 성스러운 소명이기에, 폭력도 마다하지 않은 Christian Nation의 역사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바치겠다는 명목 아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었다” (116p)
이 “NO”의 또 다른 더 핵심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인간 세상의 문제가 더이상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사안들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들의 옳은 답이 무엇인지, pragmatic solution을 주시는데 관심이 없으셨고, 더우기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취하실 수있는 정치적 군사적 힘과 세상에서의 그 분의 왕국을 세움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시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셨다. 분명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은, 세상이 생각할 수있는 여러가지 해법중 하나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철저하게 세상의 방식과 차원이 다른 궁극적인 어떤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eg. 돌이냐 기도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중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답, 이혼과 낙태, 동성애를 어떻게 법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답을 주시지 않았다(그랬다면 오늘날 교회와 신학자들의 고민을 많이 덜었을텐데 말이다). 대신, 그 분은 곧 배신할 자의 발을 씻기시고, 세상 나라에서 소외된 그리고 세상 나라가 보살필 생각도 준비도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명 하나만을 남기셨다.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엄청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무조건적 사랑을 하라는 계명.
빠른 해법의 유혹
세상 나라의 방식, ‘위에 서는 힘’이 불완전함, 그 부정적 파급력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이 방식에 매료되고 어떻게든 이 방식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어쨋든 ‘위에 서는 힘’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룰 수있는 선이 상당하지 않는가라며 –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속담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What did Jesus do?
공생애 시작전 광야에서 예수님께 나타난 사탄은 천하 만국과 모든 영광을 주겠다며,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사탄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쥐고 있는 자이고 예수님은 천하 만국과 영광을 하나님께 되돌려 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예수님께서 소기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는 쉽고 빠른 (= 효율적, 효과적, 합리적) 방법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고난과 죽음 없이도 예수님은 손쉽게 온 세상 나라를 취하실 수 있었다.
저자는 사탄의 제안이 선한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유혹이나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는 쉽고 빠른 해법의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이 유혹을 뿌리치신 예수님께서 대안으로 선택하신 방식은, 느리고 무기력하며 매우 ineffective해보이고 그래서 이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방식, 자신의 힘과 권력의 포기(하나님의 아들로서)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본으로 행하셨고 우리에게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이 사랑의 방식은,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과 정면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적 특성이며,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고 완성되는, 궁극적인 승리로 반드시 귀결될 방식,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다.
Following Christ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imitate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모방해야 할까? ‘아래에서 섬기는 힘’ 즉 세상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살되, 그것이 윤리적 행동강령 준수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헛갈릴 수가 없고, 적어도 4권(복음서)의 메뉴얼마저 제공된 이 부르심앞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세상의 방식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일까?
첫째,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세상 나라의 힘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봉할 힘은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나, 기독교 국가로서의 통치 권력이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있는 세상에 대한 희생적인 섬김의 행위다(167p).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했느냐 안 했는냐에 달려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랴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168p).”라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동의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현재화’하는데 ‘아래에서 섬기는 힘’ ‘무조건적인 희생적인 사랑’ 그리고 ‘기도’를 사용하자는 생각이 너무 순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세상 나라의 힘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면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힘을 기독교가 취해서 이 세상을 ‘맞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가자라고 열정을 불태울 수도 있다.
법과 제도로 권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를 명문화하고 상벌을 규정해 두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한 국가(보통 내가 속한 나라다)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에 다른 나라보다 더 가깝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덜 가깝다’고 판단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위에 서는 힘’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이 힘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상관없는 혹은 반하는 어떤 국가적인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한 나라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정당화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방법을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한 국가뿐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세상 나라의 힘을 업은 기독교가 그 힘으로 복음을 강요하고 도덕을 수호하고자 할 때, 정작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으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권리를 위해서 죄인들과 싸웠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정복한다’는 논리는, 세상의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이 없이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둘째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궁극적인 해답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선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이루려는 동기는 이기적인 속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의 성취와 그로 인한 혜택의 가운데 자신이 서 있고 싶은 욕구(기여를 하든, 혜택을 받든, 혹은 역사적 증인이 되든)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초라하고 치욕적인 것이었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그 이후의 세계와 시대는 영원히 달라졌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라보셨고 그래서 빠른 해법의 유혹과 자신이 발휘할 수있는 힘을 포기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과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셨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빠른 해법에 매달릴 수 밖게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에 대한 영원의 관점과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조급함없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음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신 희생의 길을 갈 수있다.
세째로는, 세상 나라와 권력자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일부를 떠넘김으로써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을 경감시키는 편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필요할 것이고, 지금의 우리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부가 저소득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행동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저자는 묻고 또 묻는다.
우리가 기독교를 국가에 접붙이는데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넘겨버리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영적 요구’만 걱정하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사람들을 돌보고 정의로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일은 분명 선하지만, 세상의 희망이 정부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선하고 합리적인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보이는 나라와 정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따라야 할 ‘사랑’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결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의 권세를 가진 위치로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게 행동하고 또 자신의 권세아래 있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최선은,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뤄가는 희생적인 사랑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의 명령에 예외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없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사랑’의 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힘과 권위의 차등성에 구애받지 않는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저자는, 제한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세상 나라의 선택사항을 받아들여 투쟁을 일삼기 보다는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지구상 유일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음의 질문을 항상 기억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물리적으로 강해지고 커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믿는 것과 하는 일의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의 신적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의 resources가 집중되고 축적되는 기독교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개인과 교회의 이런 모습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정반대의 것이어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짜라고 생각하던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짜, 심지어 둘 다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개인과 교회로부터 resources가 무조건적으로 한계없이 대량 방출될 때이다(그래서 본인들은 죽을 정도로). 그래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우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지?’라는 의구심을 들게 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를 본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런 비세상적인 모습을 비난하고 이를 갈며 죽이려고 달려들면, 우리는 목숨을 내주면 된다. 나의 죽음을 비웃고 기뻐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들은 우리가 행했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부흥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태도는 ‘위에 서는 힘’을 신봉하여 승리하느니 순진한 갈보리 언덕의 방식을 따라 패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적용할 수있는 무엇이 아니라 믿음이다”(265p)
이렇게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미 당면한 현재 안에서 보여”주어야 한다(98p).
이 책의 context는 미국이지만,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만큼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떠안고 가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넘치고 있는 것인지, 문제의 본질과 근원적인 해답에 대한 고민에 clue가 되어준다. 책장을 덮을 때에, 모든 생각과 글이 다 사라지고 질문 하나만이 떠올라 맴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바로 여기서!”. 무척 긴 리스트가 될 것같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