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광] Healthcare as a Mission – 1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서 리포트를 실고자 합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초록

의료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주님이 하셨듯이 병든 자들을 치료함은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의료 사역의 본질이다의료 공급자로서의 실력을 갖춘다면  사역은어렵지 않게 행할  있다그러나 육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사역은 힘들다눈물의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없다.  환자들    명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영육 통합적 의료 사역은시작된다세상의 의료 공급자와 Christian 의료 공급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볼 때이다우리는 의료 분야에서 어떻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의료를 단순한 직업 아닌 사역으로 업그레이드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섬에서
3년간 공중보건의사로 일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선데이 크리스천에서  벗어날 있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하나님께서 새벽기도와 소그룹 공동체 속의 나눔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셨다.
미국 볼티모어 존스홉킨스 대학교
(Johns Hopkins University) 에서 공중보건학, 의료경영학, 기초의학(종양학) 등을 연구하다가 지금은
필라델피아 알버트 아인쉬타인 병원
(Albert Einstein Medical Center) 내과 전공의로 일하고
있다. 내년에는 전공 전임의로 휴스톤의 엠디 엔더슨 암센터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 근무하게 예정이다. 매일매일 환자와 보호자,
동료 의사들,
간호사들과 만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살아갈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크리스천 의료인이란

크리스천 의료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환자를
돌봄에 있어서 비크리스천 의료인과 어떤 점이 본질적으로 다를까?
경과에 차도가 없는 중환자와 보호자와의 대화를 통해 궁극적인 치료 방침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앙의 유무가 치료의 경과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환자를 단지 잘못된 의료 전달 체계의 희생양으로 볼지,
보호자를 가망 없는 몰상식한 사람들로 몰아세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상황을 파악하는 의료인의 눈이다.
소위 짱돌
보호자 때문에 응급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없이 계속 해야 하는 피곤한 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료인 가치관이다.

신앙은 의료인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을
정의하는 렌즈이자 프리즘이다.  모든 상황에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할 있는 능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다.
환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라고 생각하기에 앞서서,
  환자는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 생각할
있는 힘이다.
보호자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각하기 전에 보호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손과 발이 있을까?’ 고민할
있는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신앙은 내가 처한 피곤한
상황 묵상하기보다, ‘나는 환자와
보호자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고 품으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길 원하는가?’
묵상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 의료인에게는 세상의 의료인에게는 없는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그리고 나의 숨은 동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인내와 착한 행실을 통해 영광 돌리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는다.
하나는 모든 중요한 일을 기도로써 시작한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 일에 개입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해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리식염수 (Normal Saline
Solution)


생리식염수는 크리스천 의료인을 상징한다.  멸균 생리식염수는 우리 혈관에
직접 주입 가능하다.
물론 먹을 수도 있고,
소금의 원래 특성인 맛과 부패 방지 기능이 있다.
수액이므로 갈증을 해소하고 탈수를 방지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속에 녹아 없어진 소금이 삼투압현상 (Osmotic
Phenomenon) 통해 혈관 내에서 부피를 그대로 유지하여서 출혈이나 패혈성 쇼크로 혈압이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혈압을 다시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리 식염수
공급은 의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소생술
(volume resuscitation)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 탈수로
우리 삶의 혈압이 급강하할 ,
크리스천 의료인은 생명을 살리는 생리식염수가 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소금이라면,
썩어 없어진 밀알이 생명의 싹을 만들어 내듯이,
수액에 녹아 없어진 소금으로 삼투압의 에너지를 창출해내어 생명을 살려야 한다. 

소금이 소금으로 존재하지 않고 녹아 없어질
에너지가 창출됨은 의미심장하다.
과학의 법칙 모두 우리 주님의 작품임을 생각할 더욱 그렇다.
이는 빛의 물리학을 상기시킨다.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외곽을 도는 전자가 안쪽 궤도의 낮은 에너지를 갖는 위치로 떨어질 빛이라는 형태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가장 높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골고다 언덕 저주의 십자가로 친히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구원의 빛을 본다.
자신의 육체를 썩어지는 밀알처럼 십자가에,
로마 군병의 창칼에 내어 친히 사망의 상태에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소금이 생명을 살려내는 기적을 우리는 목격한다.

 

은혜의 혈관 
(Vessel of Grace)


크리스천 의료인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에게 모두 전달하는 은혜의 혈관이다. 요한복음 15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의학적으로 의역하면 주님은 골수요,
혈액이요, 심장이며, 우리는
혈관이라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크리스천 의료인들을 통해 역사한다.
피가 많이 역동적으로 흐를수록 혈관이 튼튼하듯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넘치도록 흐를 우리 역시 건강할 있다.
많이 베풀고 나눌 생명의 ,
보혈의 피가 환자,
보호자, 동료에게 전해질 것이다.
혈류가 멈추면,
혈관은 퇴화되어 이상 생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고혈압, 당뇨, 콜레스테롤의 침착,
혈관 석회화 진행으로 혈관이 망가지듯이,  영적 노폐물이 우리들
혈관에 축적될 이상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들 혈관에 흐를 없게 된다.
혈관은 막히고 우리 스스로 영적으로 사망에 이를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수많은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에게도 동일한 영적 사망을 전염시키게 된다.

최근 내가 입원시킨 환자 중에 심내막염 환자가 다시 중풍으로 내원했다.
패혈성 색전증(septic
embolism) 중풍의 원인임이 밝혀졌다.
심장 판막에 있던 박테리아가 뇌혈관 곳곳으로 날아가 혈관을 막아 중풍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심장 판막에 박테리아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로 인해 오히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심각한 영적 색전증으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혈관은 영어로 vessel인데 성경에서 그릇 역시
vessel 번역되어 사용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으로 보시지 않고 깨끗한 그릇,
더러운 그릇으로만 보신다.
더러운 그릇은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혈관이 얼마나 깨끗한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깨끗한 혈관이면,
주님은 자신의 생명의 보혈을 우리 크리스천 의료인 혈관을 통해 마음껏 흘려 보내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
퇴화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있을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흔적만 있는 퇴화된 혈관,
배꼽 동맥처럼 무늬만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전혀 은혜의
혈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유정] 속도보다 방향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을 잃었다. 김남준 목사가 말한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이 불붙는 진리의 선포를 상실한 강단과 공모하여 민방위 교육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예배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 인구 천만의 한국사회가 이럴 수가 없다. 크리스천의 삶이 이렇게 무능력할 수가 없다. 물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복음 전하는 삶은 원래 미움 받는 것이다.

예수는 신자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눅 21:17)이라 말씀하셨고, 바울은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도전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그 도를 넘는다. 사회로부터 듣는 개독교 운운은 그 자정능력을 잃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장이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회중 예배의 거룩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주 몇 번씩 만나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신과 뜻을 사회에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으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을 매주 만나는데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감화 감동하시는 성령 앞에 어떻게 순종하지 않고 내 기분, 내 감정, 내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존재로 살수 있단 말인가?

신앙의 진정한 힘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출발한다. 오늘 교회가 이 예배의 능력을 상실했다. 예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한 번 만나면 해결될 것을 각종 훈련과 세미나, 교육과 학교에서 해결하려니 힘들고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신도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봉사와 훈련의 짐이 너무 과하다. 
 
그 많은 예배 외에도 서너 가지는 기본인 봉사에 각종 위원회 회의, 행사 준비, 리더 훈련까지 받으니 매 주일마다 초죽음 아닌가? 그러니 막상 세상에 나가서 희생하고, 핍박을 견디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단과 싸워야 할 에너지는 바닥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과 동화되는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하고 만다. 
왜 오늘 교회가 이처럼 바빠졌는가? 왜 교인들은 목사들이 바빠야 안심하는가? 예수님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이는 컨퍼런스도 없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12명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균형이 무너졌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인간의 소통에 무게중심이 옮겨졌다는 뜻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표준새번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십자가에는 두 축이 있다. 수직축은 하나님과의 만남, 수평축은 신자, 비신자, 세상과의 소통을 상징한다. 이 두 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우선순위priority는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이다. 
 
이 우선순위에 예배의 본질이 있다. 이를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다른 것도 다 무너진다. 하나님사랑 없이 이웃사랑도 없다. 하나님께 사랑의 힘을 공급 받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은 없다. 예배가 죽었을 때 그 외의 봉사와 교육, 훈련과 교제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지엽적인 문제 몇 가지 해결하기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본질과 핵심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바쁜 것, 비본질적인 것,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자.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잠시 미루자. 
 
“빨리 빨리”를 추구하는 한국병을 거절하고 여백의 미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적 감수성을 살리자. 속도보다 방향에 목숨 걸자. 교회의 체질을 이벤트, 일 중심에서 예배 중심으로 바꾸자.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인터뷰 – 황병구 편집장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황병구 편집장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코스탄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전 올해로는 네 번째 시카고 코스타에 왔습니다. 지역교회 예배 사역에 대해서 두 번 강의했었고, 시간경영에 대한 강의는 2007년에 이어서 이번이 두번째네요. 현재 제가 하고있는 일은 비영리 컨설팅입니다. 조직, 경영, 재무 이런 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고, The Bright Foundation (한빛누리) 선교 재단의 실무책임자로 있습니다. 하나 추가하자면, 월간 복음과 상황의 편집 위원장도 겸하고 있습니다.
제어계측 공학을 전공하시고, 공연 연출, 컨퍼런스 운영, 이벤트 기획, 글쓰기, 노래 짓기, 프로듀서 일, 컨설팅 등 정말 많은 일을 해 오셨고, 흔히 말하는 career를 여러 번 바꾸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하셨는지요?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코스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진로문제로 상담요청하는 분이 꽤 있었어요. 제가 롤모델이 되기에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고 심지어는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진로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충분히 기도하고 계획한 대로 성실하게 하나님 뜻을 따라가는 케이스가 있는 반면, 저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 같습니다. 전공과는 관계없는 첫 직업을 가졌었고, 코보의 사전조사에는 빠졌었지만, 한때는 노동조합 사무국장으로도 일했었는데요, 기독교인으로서 노동조합 사무국장 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지요? 제가 택했던 진로들은 대부분 저의 본성과 반하는 선택이었는데, 그것은 마음에 약간의 부담을 주신 바를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선택지를 주셨을 때, 이를테면 나의 본성에 반하는 선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는 부담으로 쉽지 않은 선택들을 반복해왔던 것 같습니다. 저의 케이스를 따라 하지는 마시고 그 정신을 존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자주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고 긴 호흡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분들도 있어야겠고 나의 원함보다는 나의 본성에 이끌리기보다는 그 반대의 선택을 고려해서 기도해보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 혹은 일과 신앙의 통합은 크리스천들이 끊임없이 고민하는 주제이고, 매일 당면하는 문제입니다. 본부장님의 이력을 보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기독교 서클안에 계시다가 점점 비기독교 서클과의 접점을 넓혀 나가고 계시다는 느낌이 듭니다. 코스탄들의 대부분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career를 시작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일과 신앙의 통합” 을 미리 고민하셨던 신앙의 선배로서 조언을 부탁합니다.
우리들의 일과 신앙을 통합하는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해보아야 하는 부분인데 그것은 마치 우리의 성화의 과정과 비슷하게 ‘늘 이루어가는 중’이라고 보는 것이 정직한 답변이 아닐까 합니다. 도성과 도성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때, 인위적인 통합보다는 통역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에 대해 다른 도성에 사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나님의 도성에 거하기만 한 사람들도 다른 도성에서 일하는 이들에 비해 언어체계, 사고체계, 인적관계망이 서로 달라서, 그 가교를 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bilingual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그들의 언어로 설명해주면 좋겠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궁금증들을 우리의 언어로 이해해 주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이를테면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는 형제, 자매와 같은 우리만의 언어체계가 있는데, 비단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인문학, 철학, 과학, 경영학적인 모든 언어에 있어서 우리의 가치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신앙서적, 성경을 비롯한 인문학, 철학, 과학 서적 등 여러 서적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킨스가 하는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반박하기 위해 자연과학과 사회적 진화론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처럼요. 기독교인이면서 철학자이신 한 교수님의 증언 속에서도, 어떤 이슈를 놓고 자신의 학생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때면 은근히 크리스천들의 논리가 빈약한데 특히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통하는 언어로 논쟁을 벌일 때 안쓰러웠다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 감격과 선포가 있어야 하지만 전략적인 bilingual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시간관리에 대한 세미나를 맡으셨습니다. 90년대에 크리스천 사이에서, 시간관리라는 주제가 특히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세대가 바뀌었으니, 시간 관리를 말하는 context도 달라졌을 텐데요. 혹 차이가 있다면 시간관리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세미나를 듣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세미나 소개도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세미나를 처음 시작할 때 늘 참석자들에게 일종의 양해를 구합니다. 세미나 제목만 보고 낚여서 오신 분들은 힘드실지 모른다고요. ‘그리스도인들의 시간관리’라는 타이틀을 보고 ‘난 공부도 하고 신앙생활도 해야 하는데 한정된 시간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오신 분들은 다 낚였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난 왜 이렇게 형제, 자매 돌보는 일에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내 앞가림도 잘 못하나’ 또는 ‘남들처럼 꼼꼼하게 플래너를 정리하고 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닌데’ 오히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은 약간의 해방감을 얻으실 수 있는 강의입니다. 90년대 이전 ‘7 habits’가 모든 사람의 표준이 될 때 우리에게는 일종의 자성이 필요했었습니다. ‘7 habits’는 귀한 가르침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의 동기는 바로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앞서 갈까였는데 남들보다 앞서 가는 또 하나의 동기는 일종의 승리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겨야 한다, 승진해야 한다, 학위를 따도 좀 먼저 따자, 취업해도 고액연봉이 좋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목적과 동기에 있어서 약간의 윤색만 됐을 뿐 동일함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패러다임은 조금 달라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동기의 문제를 다룹니다. 왜 시간을 다루려고 하느냐는 거지요. 제 강의는 시간강의의 탈을 쓴 ‘제자도 강의’이고 자기계발을 빙자한 ‘자기 부인’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제가 관계중심 시간경영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시간관리는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도 나홀로 인생살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관리에 있어서 인격적인 부분에 좋은 기록을 남기고, 인생을 가꾸어 나가는 내용을 책과 강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기꺼이 낚이실 분들만 오시길 바랍니다.
코스타의 지난 24년간의 동력을 꼽자면, 복음, 민족, 선교, 삶과 신앙의 통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대에 코스타가 잃어서는 안 될 것과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을 주셨네요.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을 이야기하자면, 코스타의 귀한 전통 중 하나가 대단히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자발성이 신앙 선각자들의 기여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유학생들의 자각과 젊은이들의 자기인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끌고 온 동력이나 에너지도 학생들의 자발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코스타가, 우리가 가서 은혜 받고 공급을 받는 곳, 가서 기댈 곳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코스타 참석하시는 분들이, 코스타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라는 인식과 우리가 일구어나가야 할 다음 과제를 바로 우리가 직접 여쭈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영양가 있는 연합수련회로 안착할 가능성이 있어서 조금 더 ‘젊은 세대들의 자발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40-50대 리더쉽들이 대외방향성 있는 정신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20-30대의 목소리 또한 반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잃어서는 안 될 것은 ‘빚진 마음’입니다. 유학할 수 있는 지적능력도 주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먼저 맛볼 수 있는 여건과 기회도 허락하시고 TOP까지는 아니더라도 저희가 적어도 중간리더쉽까지는 할 수 있는 목표와 능력을 주셨잖아요. 빚진 마음을 잃지 말고 혹 리더가 된다면 홍정길 목사님 말씀처럼 섬기는 리더쉽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두번째 세번째 포지션에 머물 수도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우리가 상위 2-5%권에 들지 않고 다른 95%의 삶과 비슷해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빚진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유일하게 이어 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빚진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