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OSTA 추천도서] 십자가와 칼, 십자가와 구원


2010
KOSTA/USA-Chicago 컨퍼런스
후,
시애틀
지역 참가자 후기 모임이 7월
17일
토요일 아침에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코스타 컨퍼런스 기간 중에,
또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코스타를 통해 하신 일들과 하실
일들을 함께 나누고,
특히
컨퍼런스 기간 중 각자 맡은 다른 사역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모여 그 은혜를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고민해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방문중이신
김도현 교수님 (Colorado
Christian University, Denver)과
시카고 컨퍼런스에서 JJ
멘토
및 세미나 강사로 섬겨주신 김동록 멘토님,
그리고
올 해 첫 참가자인 유다혜,
공혜진,
윤성혜
자매님,
2010 컨퍼런스에는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지난 코스타 컨퍼런스에 참석하셨던
한상윤 형제님,
이동훈/정현지
커플,
그리고
김다연,
이금영
자매가 함께 했습니다.
올
해 처음으로 시카고 컨퍼런스에 참석한 유다혜,
공혜진,
윤성혜
자매님들의 소감을 정리해봤습니다.
유다혜:
코스타를
통해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한 조에서 만난 지체들이 이제까지는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고민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정진호
교수님과의 그룹 만남을 통해 ‘선교’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고,
두
명이 선교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성혜:
이번
코스타 주제가 원래 관심이 있었던 주제여서 생소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저를 KOSTA에
보내주셨는지 이유를 알게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북한
선교’를 향한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대한 confirm을
받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오는
미션 코스타에도 참가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공혜진:
처음
코스타 주제를 접하고,
기대를
많이 하고 왔는데,
전체적으로
집회의 focus가
‘통일’이나 ‘북한’에만 맞춰지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북한을 위한 금식 및 기도시간 이전에 현 북한의 상황이나
우리가 왜 북한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사로
참석하셨던 김도현 교수님,
김동록
멘토님은 다음과 같은 생각 및 의견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김도현: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를 처음 접했을 때,
로마서
말씀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
집회에서 다룬 주제가 로마서와는 달랐지만,
민족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전세계에 흩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다른 민족을 섬기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고,
우리
세대에 세워진 많은 교회들이 늦어도 다음 세대에는
다민족 교회로서 쓰임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주제가 그러한 방향으로 구현되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동록:
통일이
민주주의 정치적 체제의 단일화를 의미한다면 성경적
의미로서의 동기가 약화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정치적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과의 절대적인
연관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신
통일을 “분단된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에
들어감 (즉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됨)”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분단된
이스라엘,
포로시기를
거치면서 사라져버린 10족속,
포로귀환
뒤 2족속만
남았지만 여전히 12족속으로
표현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등을 생각해 보면 마치
분단되고 흩어진 우리 민족도 포로기에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방언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구속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이
포로기에서 회복되는 것도 그 필연적인 과정중 하나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통일이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은 통일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면 별 만남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같은
지역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런 만남을 통해서,
내가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함께
중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은 전 미국을, 아니 온 세계를 충격과 슬픔 속에 몰아넣었다.하지만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조승희 사건 같은 대형사건 외에도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자식이, 친한 친구들이 서로 때리고 죽이고 자살하는 끔찍한 일들이 곳곳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이제 미국은 사회단체와 학교, 병원이 힘을 모아 사람의 내면에 쌓여 있는 분노와슬픔이 얼마나 심각한 살상무기로 변할 수 있는지 인정하고, 예방과 치유와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실행하기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의 내면을 세심하게 돌보는 일은 많은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하기 어렵다. 소그룹 모임에서, 특히 소그룹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 각 개인의 마음이 열리고,용납받고, 상처가 치유되고, 돌봄을 받아 건강한자아상을 회복하는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최근 각 분야에서 소그룹 안에서 일어날 수있는 놀라운 역사들을 인식하면서 많은 한국 교회와 기업들이 소그룹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도입하고 있고, 가정 사역도 더욱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모든 리더가 소그룹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교육을 통해서 영혼 구원과 전인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작은 교회로서의 소그룹을이끌어 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소그룹 전문 사역자로 미국의 여러 교회와유수한 기업체의 소그룹 리더들을 훈련하고 멘토하시는 데이비드 스탁(David Stark) 목사님으로부터, 소그룹의 원리와사람들이 소그룹을 통해 어떻게 단계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었다. 막연히‘소그룹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어야 한다’ 정도만 알고 있다가 구체적인 원리들을 배우고,또 그 원리들을 실제 소그룹 활동을 통해 확인하면서 소그룹에 대한 세계관을 더욱 견고히 정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소그룹의 주요 원리가 숨어 있는단계들을 거치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삶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먼저 후원과 소속감으로 소그룹의 일원이 되는 기본적인 단계를 거친다.그리고 함께 공부하면서 혼자 할 때보다 더 엄청난 학습효과를 실감하게 된다. 그 후, 삶에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또, 변화되는 삶을 위한 서로의 결심과 노력을 존중하고 도와주는 상호 책임의식은자신 없고 두렵지만 새로운 삶과 습관을 시도해 보려는 모험을 가능케 하고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한다. 이 모든 단계를 거쳐 결단하고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리더십의 단계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을 후원하고 소속감을 주며 양육할 수 있는새로운 리더가 탄생하게 된다. 이 모든 단계들이 어우러져서 성공적인 소그룹의 반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더들은 이 보이지 않는 원리가 건강하게유지되고 있는지 관찰할 수 있는 시각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소그룹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소그룹을 편안하면서도 건강한 유기체로 성장시킬 수 있다.
(커피브레이크
소그룹 인도자 워크숍 강의안 10쪽)
소그룹이 주는 후원과 소속감
소그룹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영적 변화의 단계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는 후원과 소속감의 원리는 소그룹 사역자와 리더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장 소홀히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든 개인적으로, 또 영적으로 개발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어딘가에 반드시 소속되어야 하는 간절한 필요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 후 홀로 있음을 보고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 관계의 하나님께서 우리도 관계를 열망하고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만드셨기에, 우리는 관계에서 아픔을 겪고 난 후에도 또 다른 관계를 열망하며 끊임없이 어딘가에, 또 누구에겐가
소속되기를 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에도 갱단 조직이 많다. 슬픈 것은 그 갱단 중에 한국 청년들로 구성된 조직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청년들 중에는 의외로 이민생활에 성공하여 기반도 든든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가정의 자녀들이
많다고 한다. 그 아이들에게 좋은 집을 두고 왜 이렇게 길에 나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사느냐고 물으면 “I
belong here!”(난 이곳에서 소속감을 느껴요!)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가족과 집에서
느끼지 못한 소속감을 갱단의 친구들에게서 느끼게 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사랑과 구원을 부르짖는 가정과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것일까?
결혼하고 나서 약 15년을 남편의 연구소가 있는 미국 남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며 주일학교와 새신자 소그룹을 맡게 되었다. 인근 대학교에서 한인 학생 성경공부 인도도 함께 하고 있었지만, 학생 사역은 학생들의 섬김으로
오히려 큰 힘이 되었다. 주일학교도 몸이 힘들긴 해도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서 나름대로 즐겁게 할 수 있었는데,
가장 어려운 사역이 새신자 그룹 인도였다.
처음 새신자반 소그룹을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좀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 사역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돌보아야 할 사역 대상자들이
거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예전에 잠시 믿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사람들이었으나
그들 모두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소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그룹의 구성원은 거의 대부분 국제결혼을
하신 분들이었다. 국제결혼도
여러 가지 케이스가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적부터 공부하며 미국인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만나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온 분들도 있다. 그때 그 소그룹 구성원들은 거의 두 번째 케이스로 남편을 따라와서 낯선 곳에서 살고 계신 분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한 탓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과 비교하여 설명할 수도 없었다.
소그룹 사역을 향한 나의 비전과 헌신, 대학교 때부터의 경험과 훈련 같은 것들은
그분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었다.
그분들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토해 냈다. 요리책을 보고 열심히 김치를 만들어 가져다
드리면 “이렇게 맛없는 김치는 찌개를 해도 맛이 없어”라고 하셨고, “내가 그쪽같이 좋은 부모 만나 공부하고 결혼 잘 해 잘 살면
나도 당신이 믿는 그 하나님 믿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찾아갈 때마다 거부감을 표현하는 거침없는 말들 앞에 목까지 올라오는 눈물을 삼킨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꽤 늦은 밤에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자신을 늘 부정적으로 말하며 가장 험악하게 거절하던 자매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손목을 그었다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너무 이상한 것은 정신이 들자마자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절박한 순간이 오니 하나님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그분이 병원에 있는 동안 곁에 있던 내게 마음을 여시더니 두 살 때 길에 버려진 이후
기구했던 자신의 삶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도 그동안 내게 찾아온 힘든 나날들, 병약했던 어린 시절들을 나누게 되었고,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친해지게 되었다.
병문안 온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삶을 포기하려고 손목을 그은 그
자매를 눕혀 놓고,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서글픈 자신들의 삶을 서슴없이 나누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방인처럼 나를 대하고 무섭게 거절하던 분들까지 만삭의 몸으로 하루 종일 병원에 있는 것에 감동하셨다며 귀하게 여겨 주시고
돌봐 주기까지 하셨다.
그분이 퇴원한 후 우리 소그룹은 수가 두
배로 늘었다. 그분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공감대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좋아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면 모두 가면을 벗고 서로의 아픔과 연약함, 슬픔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것 같았다. 소외되고 외롭던 그들에게 소속감을 준 소그룹 모임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의 밭이 부드러워지고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이 재미있다며 동네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의 삶이 회복되도록 서로를 돕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손목을 그었다가 퇴원한 자매가 몸을 회복하기까지 모두들 함께 도왔고, 몸과 마음을 회복하도록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다. 골수암에 걸린 자매가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을 때에도 돌아가며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해다 주며 다시 일어설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도 모두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오셔서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소그룹 모임을 인도할 때나 다른 교회
일을 해야 할 때는 차례로 우리 아이들을 업고 안고 돌보아 주시기도 했다.
우리 소그룹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기 시작했고, 함께 울고 웃으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이 아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후원해 주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지만 어딘가에
속하고 싶고 누군가로부터 도움과 후원을 받고 싶었던 그들은, 교회보다 먼저 소그룹에서 하나님을 어렴풋이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같은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후원을 주고받는 것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들의 마음이 소그룹의
돌봄과 사랑으로 부서지고 부드러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풍요롭게 준비되어 갔다. 그리고 그들은 기쁨으로 교회에 등록했고,
성가대와 아기방에서 봉사하고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며 말씀 가운데 삶이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 새신자 소그룹은 어려웠던 개척교회를 잘 섬기고 부흥시킬 일꾼의 산실이자 요람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서 빨리 그
사역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지난 25년간의 소그룹 사역 중에서 가장 많이 기억나고 그리운 소그룹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 얻은 소중한 경험은 이후의 소그룹 사역을 풍성하게 해주는 보석 같은 재산이 되었다.
먼저, 사람을 개발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소속감과 후원임을 많은 사례를 통해 체험하게 되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 소속감을 얻고 힘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 바로 소그룹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를 후원하는 아름다운 소그룹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리더부터 힘빼기를 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몸에 힘을 빼야 물 위에 뜰 수 있는 것처럼, 리더라는
위치로 누르거나 지배하려는 힘을 온전히 뺄 때, 하나님께서 리더에게 영적인 권위를 주어 띄워 주시는 것이다.
그런 소그룹은 사람들의 연약함과 실수를 받아주고
용납해 주고 안아 주는 그런 공동체이다. 리더가 자신의 연약함을 투명하게 나누면 그때부터 힘빼기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리더
앞에 자신들도 투명해지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안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들이 연약함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리더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함이 자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시듯, 그들이 마음을 열 때까지 재촉하거나 협박하지
말고 곁에서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소그룹원과 리더의 역할이다. 강요로는 마음을 열고 나누는
일을 결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상처와 절망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의 가정이, 큐티방이,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그들을 안아 주어야 한다. 그들의 내면의 고통을 이해해 주고, 도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소속감과 기쁨을 누리며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소그룹이 되어 주어야 한다.
도움을 받고 싶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느끼고 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인도할 친밀한 소그룹이 먼저 필요하다. 친밀한 사람들끼리는 나눔이 자연스럽다. 나눔은 내면의 회복을 준다. Depress(눌림)의 반대말은
express(표현)이다. 자신을 표현하기에
안전하고 편안한 소그룹은 치유와 회복을 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시켜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소속감을 주고 그들의 필요를 후원해 주는 친밀한 소그룹이야말로 하나님을 모르거나 떠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강력하고 소중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과
소그룹 모임들이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안내하는 세상의 소망으로 곳곳에 우뚝우뚝 푸르게 심어져야 하겠다.
‘하나님의 뜻에 관한 전통적 접근’은 우리 대부분이 가진 통념이라 너무나 익숙한데, 저자는 이 전통적 접근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미래에 관한 어려운 선택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소명을 찾는데 집착하여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놓치는 허송세월을 살게 될거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내가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룰 것인지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이 오늘 하루동안의 나의 삶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차분하고 정돈된 고요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게 되어 정말 기쁘다. 비록 지금 내가 직장도 없이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어도 말이다.
나를 자녀삼으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습하며 배우는 중이다. 고통과 어려움이 계속되고, 힘든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음엔 쉽지 않지만, 점점 쉬워진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상황에 따라 슬픔과 아픔은 느껴질지라도 두렵지는 않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또한 바라며 매순간 그분께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이것만을 나의 본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꼭 붙들며 살아가길 소원한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이제,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크리스천 의료인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세상은 크리스천 의료인에게 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실력 있고 인간다운 의료인을 원한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지식과 실력,
그리고 고도의 직업 윤리 의식을 갖춘 사람이 바로 이상적인 의료인상이다. 실력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 크리스천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믿음은 좋지만 수술 못하는 외과의사보다 믿음은 부족해도 수술 잘 하는 외과의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의료인의 직업윤리를
Medical Professionalism이라고 한다. 미국 내과의사 협회 (American
College of Physicians)에서 지적한 Medical Professionalism의 덕목은
겸손
(Humility), 정직
(Honesty), 이타성
(Altruism), 공감능력
(Compassion), 그리고 예의 바름
(Courtesy)이다. 의료인이 이 사회 배출되는 데 있어서,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가 의탁한 면세 교육 기관을 제공했다.
예비 의료인은 사회의 공인 하에 시체를 해부할 수 있다.
환자는 의료인과 교육 중인 예비 의료인에게 자신의 치부를 노출시키며 자신의 비밀과 걱정을 떨어놓는다. 그리고 환자는 의료인의 선한 의도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는 의료인의 행위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왜 의료현장에 고도의 윤리성이 요구되는지 말해준다.
EBM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Evidence-based
Medicine 근거 중심 의학을 주로 지칭하지만,
Etiquette-based Medicine을 칭하기도 한다. 후자는 2008년 Dr. Kahn이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이라는
저널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아무리 최신 의학정보를 바탕으로 진료를 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가 사라진 오늘날의 의료 현장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에티켓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입원환자를 진료할 경우,
최소한 노크부터 하고,
들어가도 되는지 묻고,
웃는 얼굴로 자기 이름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하는 의료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세상은 이런 기본적인 에티켓을 잃지 않는 의료인을 원한다.
나아가 우는 환자에게 휴지를 손에 쥐어주며 등을 토닥여 줄 알며,
환자가 누워서 잃어나 앉을 수 없다면 무릎을 꿇어 환자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할 줄 아는 그런 의료인을 원한다.
크리스천 의료인과 하나님의 기대
사실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는 의료인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심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기대는 더 크시다.
먼저, 하나님은 실력을 넘어 정성을 요구하신다.
마태복음 5장 16절은 우리 착한 행실을
사람들이 보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한다.
골로새서 3장 23절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참으로 엄청난 권면이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42절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자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으며,
나아가 25장 40절에서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 자신께 한 것이라고 하셨다.
같은 맥락으로 마태복음
25장 35절 역시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 우리가 이웃을 돌본 것이 곧 주님을 돌본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발언인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 크리스천 의료인은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섬긴다기 보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성경적일 수 있다.
설대위 (David
Seel) 전 예수병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연 나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내게 환자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하나님은 직업 윤리의식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말씀하신다. 우리는직업(occupation)이 아닌 소명(vocation)으로 우리 의료인을 부르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하신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선포한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의료를 우리의 생계 유지 수단이 아니라,
당신께서 예비하신 우리 각자의 십자가로 보길 원하신다.
십자가란 쉽게 말해,
‘자원해서 감당하는고난’이다. 따라서 의료란 우리가
자원하여 감당하는 사명이자 자발적인 섬김이어야 한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주께서
물으실 것은,
의료인으로서 우리의 십자가를 얼마나 충실히 감당했는가 일 것이다.
내 문제가 아닌 우리 이웃의 문제,
우리들의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인들의 문제를 얼마나 성실히 풀다가 왔는지 주님이 제일 먼저 물으실 것이다.
우리가 ‘의료계’라는 선교지의 ‘중보기도자’로서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의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왔는지 주님은 알고 계신다.
과연 우리가 가슴으로 품고 기도하는 환자와 동료 의료인의 수가 몇 명이나 될까?
내외적 장애물 극복하기
크리스천 의료인을 향한 세상의
기대, 나아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으로 살아보지만 현실은 참 만만치 않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말 그대로 산 너머 산이다.
외적으로 불합리한 의료 제도,
부족한 의료 자원,
힘든 근무 시간,
종교 다원주의 등의 장애물이 있다면,
내적으로는 의료인의 태만,
권태감, 자조감, 그리고
명예와 권력에 대한 탐욕 등의 장애물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환자가 인격체로 보이지 않고 일의 하나로만 보이는 경우이다.
환자나 보호자가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인 경우,
환자나 보호자는 의료인들 사이에서 소위 서로 ‘씹는’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믿기지 않겠지만,
의료인들의 대표적인 대화 주제는 누가 더 ‘짱돌 환자’를 많이 보게 되어 누가 더 ‘재수가
없는가’
이다. 스스로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 연민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보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더 힘들어졌는지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슬프게도, 어떤 의료인들에게 환자는
자기 논문을 위한 케이스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기도 한다.
또 어떤 의료인들에게는 환자 한 명을 더 보는 것은 더 많은 금액의 리베이트를 위해 머리 수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크리스천 의료인으로서 다시 한번 이러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능력을 구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부모님 또한 나를 부르지 못하신다. 부모님은 선천적 청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고, 아버지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특수 목회를 하신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온전치 못하고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나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쓴 뿌리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심한 열등감을 자주 느꼈고, 누군가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전혀 오고 싶지 않았던 미국에 오고 나서 나의 고통은 더 깊어졌다. 고난은 각자에게 그 크기 이상의 절대 값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이런 집안의 아이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미국에 왔을까?” 그때 당시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항의했고, 분노와 원망을 쏟아냈다.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결국에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성공하는 것이었다. 더 강해지고 싶었고, 더 좋은 것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향해 방황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거라 착각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왜 사는지도 모른 체 상처만 더 깊어져 가고 있을 때,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 코스타에서만큼은 그토록 내가 원했던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랬고, 참석하기 전부터 기도로 준비했다.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특별히 저녁집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교만함을 보이셨고,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릎 꿇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는 것 같은 마음의 평화를 느꼈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아파할 때 하나님도 나와 함께 아파하셨고, 내가 울고 있을 때 하나님도 나와 함께 울고 계셨기에 그분은 침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르짖음에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나와 항상 함께 계심으로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제 내 삶의 의문은 하나님이 어디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로 바뀌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의 한인 이민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관점으로 다른 이웃의 심정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모두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소망을 가졌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웃은 단지 같은 민족인 한국인으로 국한되어있지 않고 다른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제 나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존재하고 생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선한 이웃으로서 존재하고, 이 세상과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생존하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실패하셨지만 진정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성공이 실패가 될 수도 있고, 실패가 성공이 될 수가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는 인생을 꿈꾼다. 물론 앞으로의 길에도 고난과 아픔이 많겠지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를 기대하고 기뻐하련다.
* 김상수 형제는 7월 말부터 아프리카의 G국으로 missionKOSTA 를 통해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리고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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