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규]인간 관계 갈등 다루기 지도 & Spiritual Transformation

 

Q: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일을 처리할 수 있죠참 덕이 안 되요. 어떡하면 우리 그룹에 있어서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보고/해결할 수 있나요



A: 신앙 공동체 모임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의 영적 성장은 어른처럼 성장하였음에도 불구라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인격적 차원의 영적 성장이 균형 있게 양육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룹 내에서 인간 갈등을 다루는 지도를 사용해 보세요. 그룹 내에서 인격적 차원의 영적 훈련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성숙하게 됨(spiritual transformation)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영적 관계와 더불어 그룹 멤버들과의 관계성(relationship) 문제 역시 우리의 성숙한 믿음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랜 시간동안의 신앙의 경험을 가진 사람조차도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좋지 않거나, 관계가 껄끄러워 지면, 그 공동체의 모임이 재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모임이 행사나 혹은 그 모임 자체까지도 무의미해 짐을 경험한다. 성경 공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리더와 관계성이 좋으면 리더가 성경을 조금 잘 못 가르쳐도, 말을 좀 더듬거려도 참 은혜스러워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리더와 관계성이 좋지 않으면 그 리더가 아무리 성경을 잘 가르쳐도, ‘말만 잘해‘, ‘너나 잘해하며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함을 경험하게 된다. 비단 이것은 가정 혹은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큐티를 하기로 해서 며칠을 하다가, 어느 날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더 이상 큐티를 하고 싶지 않거나, 큐티를 해도 그 내용 나눔에 있어서 겉도는 적이 많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차원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성숙(spiritual transformation)에 있어서 더불어 함께 하고 있는 이웃 공동체와 나와의 관계도 매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계명 중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말씀하시며(22:34-40/ 12:28-34) 이 두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으리라(10: 25)고 하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한 안내서로 주신 십계명도 그 내용을 보면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자세이고 나머지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하는 우리들의 자세, 즉 공동체, 이웃과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 만큼 우리 신앙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의 일대일 관계 영성과, 이웃/공동체와의 관계적 차원의 영성, 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차원의 영성과 나와 이웃/공동체와의 관계적 영성관계는 분리 될 수 없음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무 나와 하나님과 수직적인 측면에만 강조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2:27) 말씀을 하시며, 율법만 중시하고 이웃/공동체를 돌아보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책망 하셨다. 요한 14장에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1 4:7),’라고 했고,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1 4:20) 하며 이웃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풍성해 짐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 모두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영성뿐 아니라 이웃/공동체와의 관계 영성에 대해 균형의 중요성을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 모임과 그 커리큘럼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성경 공부와 기도 등, 개인적 영성 훈련 부분에 일방적으로 너무 많이 치우쳐 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이웃/공동체와의 관계성의 대한 양육과 훈련에 관해서는 개인의 성격이나 신앙의 깊이, 혹은 개인적 판단의 일로 생각을 하고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다. 심한 경우는 아예 그와 같은 인격적 훈련은 생각하지도 않고 커리큘럼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그룹 모임에 있어서 공동체 구성원 서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룹 내에선 깊이 고민하거나, 다루지 않고 그저 상대의 고민을 듣고, 안됐다 생각하여 안타까워하다 끝나지, 그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접근 방법이나 해결 방법을 함께 실제적으로 모색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경 공부나 기도, 혹은 그룹에서의 삶의 나눔을 통해 어른처럼 많이 성장하였지만, 공동체내에서의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 차원에서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해 여전히 유아기 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신앙의 연수는 길어도 여전히 인격적 성장과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오늘 우리들의 하루 하루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삶의 문제,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판단, 그리고 우리의 결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삶의 문제가 무엇인가모두 공동체, 혹은 인간 관계와 연관되어 있는 일들이다. 매 순간, 우리들은 주어진 일들과 문제들을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결단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에 공동체와의 관계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혼자 독처 하는 그의 모습을 좋지 않게 여기셨다. 그래서 아담을 하와와 짝 지어 주셨다. 바로 공동체를 만들어 관계성을 가지고 살도록 하셨다. 창조의 법칙이 그러하기에 아무리 우리들이 개인적인 영역에 혼자 머무르려해도 공동체와 인간 관계성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 혼자서 살수 없다. 외롭다. 고독하다.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나 관계가 나쁘면 괴롭다.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기가 쉽지 않다. 혹 우리들은 현실의 문제에 지쳐 혼자 있기를 원할 때도 있으나 그것은 잠깐이다. 다시 사람을 그리워한다. 심지어 사람에게 상처받아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또한 위로 받기를 원한다. 속세를 떠나 산 속에 들어가도 산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끼리 다시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 영화를 보니 E.T.조차도 지구를 떠나 다른 E.T.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본다. 특별한 은사 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과의 관계, 공동체에서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가 공동체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성으로 되어있기에 십계명도, 예수님도, 성경 말씀도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개인과 이웃의 관계 모두가 영적으로 다 연결해 하나임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룹의 신앙교육은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만남에 대한 영성 훈련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웃/공동체를 향한 나의 영성 역시 성숙되어지도록 함께 교육되어지고 훈련되어져야 한다. 어른과 같은 인격적 영성 교육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그룹 안에서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공동체의 균형 있는 영성 훈련과 양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까? 어떤 모델이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70인 제자 양육 모델이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영적인 측면과 인격적인 측면을 불균형하도록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70인의 제자를 양육하셨을 때 개인의 영적인 성숙과 더불어 공동체/이웃 관계에서 인격적인 차원의 영적 성숙을 함께 가르치셨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양육하시는 교육 모습은 필경 우리의 그룹 모임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는 제자 양육의 참된 교육 모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앙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70인 제자 양육 모델은 무엇인가?



누가 복음 928절부터 1020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 공동체 교육의 대표적 본문들 중 하나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파송 (sending out) 하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그 바로 앞과 뒷 부분의 장면들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70인 공동체 제자화 과정을 보면,



첫 단계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경험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시고, 옷이 희어지면서 광채가 나는 신적 경험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튿날에는 산에서 내려와 귀신들린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제자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영적인 체험과 확신을 갖게 된다.(9:28-45) 그런데 예수님을 그 제자들을 그대로 파송하지 않으셨다.



둘째 단계로, 예수님은 공동체에서 인격적 영성 차원의 처신 문제를 가르치신다.(46-56)



오히려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숨어 있던 공동체 내에서의 우열의 문제, ‘누가 높고, 낮은지?의 문제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이가 큰 자니라(9:48). 더 나아가 공동체내에서 내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응분의 보복을 생각하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처신을 책망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러 왔노라?(9:55) 하시며, 공동체에 대한 처신 과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치신다. 또한 제자들에게 파송되어 나갔을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 처신 방법까지 알려 주셨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하라?(10:5).



셋째 단계로,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들을 파송 하셨다.(10:1)



그 결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매를 맺고 돌아온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17)?



넷째 단계로, 그랬더니 예수님은 돌아온 제자들을 다시 교육 시키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예수님의 제자화 과정은 개인적인 영성 차원에서의 종교적 경험에 더하여 공동체/ 이웃에 대한 인격적 영성 차원의 훈련을 하신 후 제자들의 파송 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후의 인격적 차원의 재교육까지 포함되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격적 차원의 영성을 가르치시지 않고 제자들을 파송 하셨다면, 제자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복음의 열매/결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실력과 능력에 대한 자랑과 우열의 자리다툼이 일어났을 것이 본문의 상황 상 자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공동체에서 자리다툼의 교만 문제를 접하였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서로의 관계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더 나아가 반대하는 이들을 만났을 때 생겨지는 상처와 분한 감정의 처리방법, 그리고 만나는 이들을 향한 자세와 언어까지 가르치셨다. 그러했기에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가지고 기뻐하며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육은 열매를 맺는데서 멈추지 않으신다. 오히려 열매 뒤에 생길 수 있는 문제까지도 바라보시면서 지속적인 인격적 교육을 행하셨다.



결국 예수님의 70인 제자양육은 이처럼 개인의 영적인 경험과 더불어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겪어지게 될 인격적 차원의 관계성 문제를 가르치시고, 어떻게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할지 훈련시키신 통전적(Wholeness) 교육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제자 양육 교육 모델이 오늘 우리의 교회의 신앙 교육, 혹은 우리의 작은 신앙 공동체 모임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개인의 영성 교육뿐 아니라 동시에 이웃/공동체 속에서의 인격적 차원의 영성 교육이 균형 있게 이루어 져야 한다. 이를 통해 인격적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이 성숙되게 양육되어 오늘 우리들이 접하게 되는 문제를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어른스럽게 다룸으로서 개인적으로도, 더 나아가 소속한 공동체, 혹은 문제를 가져온 공동체와 그 관계를 성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그룹에서 인격적인 차원의 영성을 훈련시킬 수 있는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성숙시켜 나가게 할 수 있는 도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접하게된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성서 가르침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물론 많이 있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틀 하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의 사용이다 (1)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엡 4: 15, 25)



사람들의 감정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이해 시키라 (롬 12: 15/ 고전 12: 26)



덕을 세우며 은혜롭게 행하라 (엡 4: 29-32)



진실된 감정을 표현하되 죄는 범하지 말라 (엡 4: 26-27)



개인적인 이견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라 (마 18: 15-17)



잘못한 것들의 기록을 보관하지 말라 (고전 13: 5)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 (잠 15: 23, 28)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 (벧전 3: 8-9)



갈등시 동기를 확인하라 (약 4: 1-2/ 잠 13: 10)



인간관계에서 화평과 덕을 추구하라 (롬 14: 19)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라 (잠 20: 3, 딤후 2: 24)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그룹 지체들의 유익도 기억하라 (빌 2: 4)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의 삶은 관계성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의 영성 역시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개인적 영성이 성숙하다 할 지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에는 영성이 침체 되게 된다. 주일에 말씀과 찬양, 기도를 통해 은혜가 충만해도 어느 누군가와 관계가 어그러지면 그 날 은혜는 ??이 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경험한다. 어느 공동체에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곳에서 내 마음이 얼어붙음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성 문제의 바른 처리는 우리의 개인적 영적 성숙 차원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여기서 제시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는 공동체 가운데서 우리의 인격적 차원의 영성을 개발하는 좋은 도구이다.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 속에서 주어진 관계성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접근을 통해 해결하도록 돕는 다리(bridge) 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를 사용할 것인가?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사용법



첫째: 우리 그룹원들에게 이 지도를 나누어 주라. 그리고 개인이 삶의 문제 해결에 있어 제일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나누라.



둘째: 우리 공동체에서 이 지도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 두 개를 리더가 선택하라. 그리고 그룹 성장 계획서(그룹 성장 계획 세우기 글을 참조하라) 의 상단 혹은 하단에 기록하라. 그룹이 모일 때 마나 이 구절을 놓고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인격적 차원의 성숙을 위해 기도하라.



셋째: 그룹원들로 하여금 개인의 책상 위에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를 붙이거나 놓으라.



넷째: 관계성이 문제가 있을 때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벌라.



다섯째: 이 지도를 묵상하라.



여섯째: 묵상 후엔 성령이 인도하시는 구절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어떻게 그 문제를 접근해서 해결해야 할 지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



일곱째: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하면서 담대하게 결단하라.


위에서 제시된 방법은 이 지도를 사용하는 방법중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이 방법을 기초로 해서 상황에 맞게 적절히 응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다음의 스토리는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가 어떻게 적용되었었는지에 대한 한 예 이다.



언젠가, 우리 집 첫째 아이, 하일(Ha Il)이가 2 학년 때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학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하나를 쑥 내밀었다. 편지 내용은 그 날 하일이가 학교에서 오줌을 싼 내용의 경위 설명이었다. 선생님의 편지를 요약하면 3가지 내용이었다. 하나는 하일이가 그 날 오전 휴식 시간(recess) 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너 참을 수 있니?? 하고 물어 보니까, 하일이가 ?? 했는데, 그만 참지 못해 오줌을 샀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선생님이 하일이가 화장실 갈 수 있냐고 물어보았을 때 운동장에서 120명의 노는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가 자신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게 물어 봤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는 하일이에게 여분의 반바지가 없어서 속옷만 갈아 입히고, 겉의 반바지는 갈아 입히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후, 하일이에게 ?어떻게 된 거야, 오줌을 다 싸고? 하면서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일이는 선생님이 참을 수 있냐고 묻지 않고 ?갈 수 없어?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혼자 아이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다른 선생님 2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하일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거짓말에 머리에는 김이 나기 시작했고,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을 더욱 화가 나게 한 것은 하일이의 그 다음 이야기였다. 속옷을 갈아입고 오줌싼 바지를 갈아입지 않아, 친구들이 ?야키? 하다며 놀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비열하거나 야비한 아이들은 매번 친구들 가운데서 ?하일이는 오줌싸게? 하는 식으로 놀려 하일이를 바보로 만들거나, 일명 ?왕따?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아내와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주변의 한인 2, 1.5세 자녀를 가지고 미국 교육 환경을 잘 아는 여러 가정에 전화로 상담을 하였다. 답변은 모두 한결같이 그 선생님의 보스와 교장을 통해 담임 선생님을 혼내주어야 하고, 하일이의 경우는 반을 바꾸어 주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한 하일이의 선생님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야할지 우리의 생각을 페이퍼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선생님에게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결혼식 참여 선약으로 면담이 하루 미루어지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그 날 하일이가 학교에 가서 어제 오줌싼 것 때문에 부끄러워 할 것을 생각하니 화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날밤까지도 역시 내일 선생님을 만나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고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밤이 깊어 아내는 잠자리로 갔고, 나는 책을 보기 위해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에 하나 떠오르는 지도가 있었다.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이었다. 그래서 책상에서 일어나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를 찾게 되었고, 그 지도를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에 두 가지 말씀이 내 마음에 딱 걸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화평과 덕을 추구하라? (14: 19), 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그룹 지체들의 유익도 기억하라? (2: 4)였다. 너무나 고민이 되는 말씀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화평도, 덕도, 그리고 하일이의 유익도 그리고 그 선생님의 유익도? 다르게 이야기하면 하일이도 살리고, 선생님도 살리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가능한가? 너무 갈등이 되었다. 좀처럼 생각에 해결이 없었다.



아침이 되어 선생님과 면담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지난 밤 내게 부딪혔던 ?갈등해결을 위한 지도? 이야기와 나의 마음에 든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아내도 그 지도를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지혜를 주세요.? 라고 흐르는 기도 뿐 이었다. 선생님과 무슨 말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서 문제를 풀어갈지 정리도 못한 채, 단지 하일이 선생님의 보스와 교장은 대동하지 않을 것을 의논한 후 일단 선생님만 만나게 되었다.



그 날 오후 선생님과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편지 고맙다고, 그리고 하일이가 오줌을 싸서 놀랬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4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이었다. 우리 한국 문화 중 좋은 것 하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부모와 임금이 하는 이야기와 똑같이 존경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하일이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아마 하일이가 선생님이 ?참을 수 있니?? 라고 물어 보았을 때 가능한 한 참아 보려고 노력 했을 거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하일이에게 꼭 2-3번은 ? 너 정말 참을 수 있어?? 하고 물어 봐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이 ?안 돼? 라고 했던 거짓말 때문인지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운동장 휴식 시간에 120명을 혼자서 보고 있었다는 선생님의 거짓말에 대해, 혼자서’ 120명을 보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하면서 혼자서 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리고는 ?제가 일주일에 두 번 밖에 수업이 없으니까 그 나머지 시간은 언제든지 발런티어로 아이들의 안전을 돌보는 것을 도울 수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했다.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어서, 하일이가 오줌을 싼 후 속옷만 갈아입고, 겉 반바지가 없어 갈아입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가 실수했다고, 여분의 겉옷이 학교에 있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 하고는, ?집이 학교에서 4분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그런 경우는 꼭 긴급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일이에게 친구들 중 누군가가 ?야키?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일이의 학교 적응과 친구들의 놀림에 대한 선생님의 각별한 관심을 부탁하였다.



우리가 선생님께 이야기하는 동안 선생님의 태도는 매우 미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마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면담이 있은 지 며칠 후부터 선생님이 하일이의 기분과 교실 안에서의 하일이 위상을 띄워 주기 위해서 그 사건이 있은 지 바로 다음 주에 ?그 주간의 스타? 로 하일이를 선정해 하일이의 모든 좋은 점들, 장점, 한국의 문화 등등을 전시하고 하일이이 좋은 이미지를 친구들 가운데 가지도록 하여 신나는 2학년 생활을 지나게 하였다. 더 나아가 하일이를 그 학년 전체에서 2명밖에 뽑히지 않은 고급 Reading & Math 반에 추천해 주어서 별도의 고급 교육을 받도록 해 주었고, 이 고급 교육은 결국 하일이로 하여금 영재 학교에 들어가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하일이의 이야기가 자녀를 자랑하는 ?푼수 부모?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그러한 푼수 부모의 오해 위험을 무릅쓰고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가 내가 접한 문제에, 내 개인의 분한 마음과 자녀의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다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믿음의 축복된 도구였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은 선생님, 하일이, 모두가 깨질 수 있고, 상처날 수 있는 상황을 바꾸어 둘 다 살리고, 오줌싸게 에서 영재 교육이라는 변화, 화를 복으로 변화시킨 능력의 도구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도 하일이에게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때 사건은 생각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력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는 분한 마음으로 기도의 영이 막혀 있던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를 다시 세워 문제를 바라보게 한, 막힌 영성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도구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로 하여금 문제 처리과정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차원의 영성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차원의 영성이 내 삶 속에서 이원론처럼 분리되지 않게 만들어 주었던 다리(bridge) 이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 그룹은 어떠한가? 커리큘럼에 나와 하나님의 관계 성숙을 위한 영성 훈련 뿐 아니라 나와 이웃/공동체의 관계의 인격적 성숙을 위한 영성 훈련 커리큘럼이 있는가? 비록 작은 도구일지라도 우리 그룹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와 같은 커리큘럼은 실제적으로 그룹 멤버들의 개인 영성을 더욱 성숙하게 이끌게 된다. 구체적으로 묶여진 매듭들이 풀어지고 화가 복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더욱 새로운 영적인 경험을 하게 만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오늘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 연결시키는 다리(bridge)역할을 한다. 나와 이웃/공동체와의 원만하고 성숙한 관계를 갖게 함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영성을 더욱 성숙하게 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를 성숙하게 하는 역할까지도 감당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옆에서 바라보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덕을 드러내게 되고 영적인 호기심과 믿음에 관한 갈증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자리로 초대하게 되는 소중한 사역까지 이루게 한다.



개인의 영적인 성숙(spiritual transformation)?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갈등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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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로우크릭 소그룹 이야기(도서출판 디모데,1997)에는 이것을 ?갈등 해소를 위한 중요한 성경 구절(150)? 이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을 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로 번역을 해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갈등의 문제들에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하게 하시는 지에 초점을 두었다: Bill Donahue, Leading Life Changing Small Group,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1996, p. 121)

[최영기] 화목을 깨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기

이코스타 2001년 3월호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갈등이 있다. 거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욕구와 화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두 욕구 간의 갈등이다. 거룩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비판을 하여야만 하는데 비판은 분열을 가져오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싸우는 인상을 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화목하기 위하여서는 서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부정과 부조리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부패를 가져올 것은 같은 두려움이 있다. 이 두가지 갈등 안에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하지 말라”는 계명(마7:1)과 “형제가 잘못하거든 바로 잡아주라”는 계명(갈6:1)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된다. 나도 목회하는 목사로서, 또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는 성도로서 이러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발견한 몇개의 커다란 해결원칙을 (편집자의 부탁을 받아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우리는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갈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숙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유대인과부와 이방인과부 사이에 구호문제로 인한 갈등이 생겼을 때에 이것을 계기로 ‘기도하고 말씀사역에 전념하는’ 사도들의 역할이 정립되었고 훌륭한 집사들을 선출하게도 되었다. 구약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사이에 생긴 안디옥교회의 갈등은 예루살렘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를 통하여 복음이 좀 더 분명하게 정의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가 ‘건강’하기 위하여서는 갈등이 필요하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문제를 쉬쉬하고 감추어서는 안된다. 갈등을 인정하고 노출하여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차원에서도 갈등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닮게 되는가? 이는 ‘갈등을 통하여서’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우리기 변화 받아야할 부분을 먼저 지적해 주신다. 그런데 이렇게 지적해 주시는 방법이 바로 갈등이다. 예를 들어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교만한 사람을 붙여주신다.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교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상대방의 모습을 통하여 교만이 얼마나 추한지를 보여주신다. 이 교만한 이웃과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우리는 비로소 교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교만한 이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아니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갈등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갈등의 대상이 믿음의 형제자매인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대부분의 갈등이 해결되기 보다 투쟁으로 확산되는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를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을 적으로 생각하면서 감정적인 요소가 개재(介在)되기 시작한다.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증오감으로 불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있는 한 갈등이 건설적으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자신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상대방이 비록 의견은 틀리더라도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이단시비가 붙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 쟁점이란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계에 잘 알려진 순복음교회의 C목사님이 이단시비에 몰릴 때에도 그랬다. 신앙적으로 그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 스스로가 보기에는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지엽적인 것이지 기독교 신앙 본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혹하게 이단으로 몰아치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만 인정했어도 아름다운 신학적 토론으로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이단으로 몰고보는 바람에 의미있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나의 형제요 자매이라는 것만 의식해도 노골적인 적대행위나 원색적인 비난을 삼갈 수가 있을 것이다. 갈등이 외부에까지 노출되어서 사단과 세상의 웃음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투쟁과 분열로 극대화되는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공격하는 수가 많은데, 이럴 때 억울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는 상대방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며 결과적으로 갈등은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요즈음 큰 교회 목사님의 대물림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대물림’이라는 용어 자체가 상당히 감정적인 단어가 아닌가. 목사의 아들이 목회자로서 자질도 없고 목회능력을 검증받지도 않았는데 당회장의 아들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후임목사로 추대받았다면 이것은 대물림이다. 그러나 담임목사의 아들이 신학훈련도 받았고 목회능력도 검증 받았으며 많은 후보 중의 하나로 고려되었다면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상투적인 문구를 사용하거나 비난을 퍼붓기 때문에 갈등이 건설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투쟁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부부끼리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 않기 때문에 갈등이 확산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반찬이 왜 맨날 이 모양이야!” 저녁 늦게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저녁밥상을 내려다보며 불평을 한다. 자기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만든 반찬인데. 아내는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는 가져다 주는 쥐꼬리만한 생활비로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아요!” 아내는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 이에 남편은 곧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 정성들여 차린 음식은 외롭게 밥상 위에서 식어간다. 남편이 반찬을 갖고 투정을 했을 때에 아내가 이렇게만 물었어도 상황이 틀려졌을 지 모른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 남편은 과장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일을 쏟아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남편 신경질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과장에게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좋은 말로 위로하여 식탁에 마주 앉은 시간이, 위로와 격려의 시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넷째로 우리는 불완전한 해결 안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에서 겪는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대개는 복잡하다. 갈등을 겪을 때에 한사람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그른 법은 없다. 둘 다 옳은 점이 있고 그른 점이 있다. 그러므로 양쪽이 다 만족할 만한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고 보는 것이 낫다. 완전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소속되어있는 남침례회는 현재 보수파와 중도파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다. 보수파는 성경을 절대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침례교회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중도파는 양심에 기초한 개인신앙의 자유가 침례교회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수파인 보수진영에서 최근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여성목회자는 허락이 안된다’는 조항을 “침례교도의 믿음과 신조 (Baptist Faith and Message)”에 첨가하였다. 성경의 원칙에 벗어나 현실에 영합하는 사조를 막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파인 중도진영은 이러한 총회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 대한 특정해석일 뿐인데 이것을 신조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양심의 자유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두 주장이 다 일리가 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다보니 골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중도파들의 교단탈퇴는 이제 시간문제인 것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불완전한 해결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성숙했다는 의미이다. 어떤 분이 성숙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애매함 가운데 살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live with ambiguity). 멋진 정의라고 생각한다. 교회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하여서 갈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 가운데에서 애매한 상태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평안해 할 수 있는 능력을 또한 키워야만 한다. 흑백논리에 기초하여 ‘이것 아니면 저것’, ‘너 아니면 나’ 하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갈등의 해소는 결국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방법을 몰라서 갈등을 해소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해결방법을 지속성있게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도 에너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들은 음성에 절대 순종할 것을 결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주시는 힘과 사랑에 의지하여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없이 진정한 갈등해소는 불가능하다.

[박수경] 우리 주변의 갈등

이코스타 2001년 3월호

‘갈등’이라는 단어 앞의 수식어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흔히 고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여야 간의 갈등, 혹은 얼마 전에 떠들썩했던 의·약분업시 의·약 갈등 등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의 종류를 그 ‘원인’에 따라서가 아니라 갈등구조를 보이는 ‘대상’에 따라 구분한다는 것으로 봐도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공통적으로 쌍방 간의 이권의 대립이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대상에 따라 무엇을 이권이라 정의하는가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대상으로 갈등을 정의한다면 과연 그 대상은 누구이며 문제되고 있는 ‘이권’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세상사 갈등의 주요소인 금전적 이해관계가 이권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없진 않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내의 이권은 뭐니뭐니해도 영적 권위, 곧 ‘영권’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은 초신자들이 아닌 영적관심사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중견급(?) 성도들, 혹은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에 목회자와 성도, 목회자와 부목회자, 그리고 성도와 성도 간의 갈등은 어느 교회나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기 마련이고, 여기서 그러한 사례 만을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그친다면 또 하나의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약함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갈등에 대해 갈등의 대립구조 선상에 있는 성도들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쁘게 역사하심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그 안에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제시되는 사례를 통해 서로 대립되는 갈등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보기로 하자.


미국 A주의 학원도시 B에 위치한 C교회는 한인교인 총 120명 남짓의, 교인의 40%가 유학생인 유학생교회이다. 교회성도의 평균연령이 40세로 비교적 젊은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B지역의 영어권 한국학생들 및 2세들의 기독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돕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것을 목적으로 영어예배를 한국어예배와 함께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영어예배 담당목회자의 잦은 전출로 장기적 비전수립에 난항을 거듭하던 중, 1995년 인근교회의 외국인 목사님을 영어예배를 담당하시도록 청빙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어예배를 드리던 성도의 자녀들 중 중·고등부에 등록된 아이들은 한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에, 영어예배 목사님을 청빙하는데 있어서 지역 내의, 특별히 한국계 영어권 유학생과 교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비전에 합당한 청빙인가에 대한 철저한 검증문제가 성도들 간에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지 못했고, 은혜 가운데 인사를 단행한다는 명목 아래 공식적인 절차들을 제대로 밟지도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목사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어예배의 구성원이 점점 특정 외국인종(人種) 중심으로 변해가고, 목사님이 한국어를 하실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한국어권 중·고등부 학생들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부재(不在)케 되었으며, 그 구성원과 사용언어 측면에 있어서 영어예배와 한국어예배가 융화하는데 어려움이 쌓여가는 등, 문제점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도들의 중·고등부 자녀의 수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받고 있는 영적 양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비례하면서, 자녀들에게 한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영어예배가 한국계 영어권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영어예배의 기본 취지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한국계 목사님의 청빙에 관한 안건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영어예배에서 목회하던 목사님과 성도들의 입지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외국인 목사님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영어예배 구성원들 사이에서 인종을 초월한 복음 안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개의 대립구도 상에 있던 집단에서 각자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했던 하나님의 말씀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1장 8절, “…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이었다. 한국계 교포 중심의 목회비전을 제시하는 그룹은 먼저 ‘예루살렘과 유대’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계 영어권 학생들과 2세들을 복음 안에서 먼저 양육하는 것이 현존하는 한인교회의 우선순위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기존의 영어예배에서 양육받아 온 그룹들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다국적 성도들에 의한 예배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구조를 악화시킨 것은 두 그룹 모두 말씀과 기도에 근거하여 각기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과 메시지로 인해 인도받았다고 주장하며 모두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영적 분별력과 권위에 대해 서로 도전을 한 것인데, 이는 대립구도를 ‘상대방에 대한 감정’으로 몰고가는 계기가 되었다. 목회자의 목회·설교내용이 서로를 겨냥한 메시지로 해석되고 이로 인해 상처와 도전을 주고 받게 되면서, 영어예배를 시작할 때의 처음 목회비전을 두 그룹이 함께 되짚어 가며 상대방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 해결점을 모색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방어자적 입장이 너무 굳어지게 되었다. 이 사례의 경우 피상적으로는 서로가 공유하지 못한 비전에 대한 갈등의 구도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갈등을 가속화한 것은 기존 구도에서 만족을 얻고 있는 그룹과 변화를 모색하여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영적 이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룹 간의 ‘영권을 둔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하나님 안에서 너무 견고히 서 있음’으로 인해 상대방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적이고 훈계자적인 태도를 고집했다는 점이다.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다.


몇 개월 간에 걸친 대립구도 끝에 외국인 목사님께서 섬기시던 영어예배는 거처를 옮겨서 다국적 학생을 복음화한다는 비전으로 새로이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기존의 한인교회는 목회비전에 합한 한인 1.5세 목회자를 1년 여에 걸친 기도 끝에 청빙하여 한국계 영어권 유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을 수반한 변화구도에서 다행스러웠던 점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아름답지 못한 이 모든 모습을 합력시키심으로 선을 이루셨다는 것인데, 상황이 악화되어 갈수록 교회 내에 ‘꿇는 무릎’이 증가하고 교회의 위기에 대한 관심과 회개와 중보의 운동에 불을 붙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왔던 교회 내 부서에 대한 무관심을 회개하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른 영혼들과 상처를 주고 받았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치유하심에 대한 간구, 교회의 목회비전에 합한 목회자를 찾는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기도들, 자신의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 또 국적을 초월한 외국유학생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목회활동….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어려움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C교회에 이루신 선한 선물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한 존재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말씀 안에 바로 서 있느냐에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특히나 자신이 하나님의 반석 위에 너무도 든든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영적 입지를 자신이 서 있는것과 같은 수준의 반석 위에 놓는데 인색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고 성장을 거듭하는 성도로서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렇게 강한 영적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된 자들과의 그것과 이견을 두고 대립할 때 “..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서로에게 덕이 되는 해결방안(方案)을 사랑 안에서 찾아가야 한다는, 너무도 원론적인, 그러나 행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