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현재를 삶의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사는 사람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정답게 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는 저녁 때가 되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얘, 하루살이야. 오늘은 이만 놀고 내일 또 놀자!”고 제안을 했다. 하루살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 메뚜기야. 내일이라는 것이 뭐니?”하고 물었다. 메뚜기는 열심히 내일에 대해 하루살이에게 설명을 했다. “내일이라는 것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동녘으로부터 밝은 빛이 나오고 그 밝은 빛이 나오면 찬란한 아침이 있는 그 때가 내일이지.”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하루살이는 하루만이 그의 생명이지, 그 다음 날을 살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메꾸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너하고 다시는 안논다.”하며 가버렸다. 메뚜기는 “내일이란 틀림없이 있는데….”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메뚜기가 이번에는 개구리와 친구가 되었다. 며칠을 신나게 놀았다. 그러자 어느날 개구리가 말했다. “메뚜기야, 이제 차차 날씨가 추워오는구나. 우리 이제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놀랬다. “개구리야, 내년이라는 것이 뭐니?” 메뚜기는 일년생이라 한번도 그 다음 해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내년이라는 것은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겨울이 지나면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를 할 때, 저 산 넘어서 아지랑이가 올 때를 말한단다. 그 때를 우리는 봄이라고 하고 그것이 바로 내년이야.”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메뚜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개구리가 자기를 업신여겨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토라져 “다시는 너하고 안 놀아” 하고 가버렸다. “내년이란 틀림없이 있는데…” 개구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을 대할 때에 어떤 관점에서 사건과 사물을 보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도자와 추종자의 차이는 관점(perspective)을 살아가는가의 차이이고, 평범한 지도자와 위대한 지도자의 차이는 좋은 관점(better perspective)을 가졌는가의 차이다”라고 하였다. 지도자들은 바른 관점, 크고 넓은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삶을 전체의 관점(Life-long Perspective)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here and now)를 그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의 일부로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끝을 마음 속에 두고 시작한다.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실행하게 했던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다. 하얀 종이에 묘비를 그리고 자신의 묘비에 무엇이 쓰여지기를 원하는지를 작성하도록 하게 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우리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오늘 하루 하루의 삶이 모여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을 마지막 평가를 의식하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둘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현재를 일생에 걸친 삶의 개발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오늘 경험한 실패가 처한 그 상황에서는 좌절의 이유이지만 긴 안목으로 삶을 보는 관점에서 발전의 기회요 성공의 예비 단계일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시야를 넓힐 때, 문제는 전혀 새롭게 다가옴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작은 성공에 교만하지않고 작은 실패에 좌절하여 넘어지기보다는 도리어 그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는 자세를 가진다. 나는 십 여년 전에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에 왔었다. 그런데 소위 말해서 실패를 경험하고, 1년 뒤에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로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방에 꼭 쳐들어 박혀 지내고 있을 때, 아버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 방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조용히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때 아버님께서 주신 “애야! 인생은 긴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다시 준비해라. 오늘의 아픔이 앞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두고두고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 결국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음이 나의 삶을 통해 입증되어, 그때는 실패요 좌절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목적하였던 것보다도 더 귀한 일들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욱 깊은 교제 속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며 충성, 순종, 인격 형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귀중한 것,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고 그로 인하여 맺어지는 인격의 성숙이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넷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우선 순위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적을 인식하고 자신의 은사에 맞는 역할을 고르고 그 일에 집중한다. 인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그 제한성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집중하는 지혜를 갖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눈앞에 펼쳐지는 일을 전부로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관점인가 아니면 삶을 전체적인 관점(Life-long Perspective)에서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관점이 변하면 삶의 자세가 바뀐다.


* 예화는 이용삼 목사님의 “가나안의 명상”에서 인용

[이시훈] 찬양의 의미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바이올린 경연대회를 하루 앞둔 딸아이가 열심히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특한 마음에 음료수를 들고 방에 들어가니 딸아이는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고등부 찬양팀에 가입한 이후로 우리 집에는 늘 그 애가 연주하는 찬양이 흐르고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율에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긴장했거나 예민했던 신경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자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바로 대회 전날이라서 저는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출전곡을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딸아이는 주일날 연주할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저는 그날 딸아이와 모처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와 편협한 사고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많은 크리스쳔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라고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대한 감사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좋은 것, 귀한 것을 구했을 때, 남들 보다 앞서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소중함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선뜻 동감할 수 없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과연 우리가 빛나는 자리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다지 뛰어난 점도 없어서 남의 주목을 받기는커녕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지 없는지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모든 것이 평균적인 기준에 못 미쳐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 병들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무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존재들인 걸까요? 하나님의 전존재가 영광 그 자체임이 확실하다면, 아름답고 뛰어난 존재만이 그 영광의 한 부분을 반사하고 있는 걸까요?

주변의 모든 부모님들이나 제 자신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오거나 무언가 재능을 발휘해서 상을 받거나 남들에게 칭찬 받을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자랑스러움과 기대감으로 벅차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 경우 가장 행복하고 오래가는 기쁨은 아이들의 사랑을 확신하고 교감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비록 아이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말썽을 부릴지라도, 남들에게 칭찬 받지 못할지라도 자식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어서 생활을 힘들게 할지라도 다만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존재가 귀한 것이 모든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식 앞에서 모든 부모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강함과 한없이 양보하고 용서하는 약함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 모든 힘은 ‘나의 피와 살을 나눈 나의 존재의 일부!’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할 때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도 칭찬받을 것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 얼굴을 바라볼 때 내게 반사되는 빛이야말로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습, 내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오묘함과 살아가는 일들의 질서와 모든 관계와 모든 느낌들의 총체적인 주권이 내게도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느낄 때,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찬양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 그 영광을 나누는 감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상황과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기에 어느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려하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주어진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충만하려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음의 모든 행위와 느낌들이 우리의 찬양이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찬송가를 연주하는 것 만이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곡을 연주하던, 그 연주 실력의 깊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연주는 모두 찬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에 활짝 핀 꽃들 만이 아니라 발에 밟히는 잡초들도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며 자기 몫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 성과의 크고 작음을 견주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의 사랑을 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목소리에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공평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합니다.

[이인표]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고 2002년 5월에 가족이 있는 북버지니아로 왔습니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되는 직장생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하게 될 나를 보면서 긴장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제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은 조만간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출퇴근이 너무 오래 걸렸고, 일 하는 나의 노력에 비해서 월급은 너무 조금 나왔고, 특히 나의 동료들의 95%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큰 부담으로, 불평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부담은 이어 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상시 2세 교포 친구들과 주고 받는 농담을 던졌더라면 크게 상처받을 제 동료를 생각하면서, 저는 말 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 뱉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부담감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나의 일상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 부담감에 잘 적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부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년 9월에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4000 명이 넘게 오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애나하임에서 열려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남자 직장 동료가 저에게 다가 와서는 제가 그의 직장동료가 아니었다면 저와 사귀자고 물어봤을 것이라며, 제가 어떤 방에서 묵고있는지, 그날 밤에 뭘 하는지 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녁에 제 방으로 놀거리를 보내겠노라 하며 노골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눈치가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제 동료는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저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필요했던건 나의 심정을 들어 줄 수있는 친구였고, 감사하게도 애나하임 부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그 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누고 기도 부탁을 하고, 또 위로를 얻을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런 일이 매달 일어나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나를 위축시키고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물어 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입니다. 회의적인 질문도, 반항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서 내뱉는 나의 솔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저를 왜 이 직장으로 보내셨는지 이유가 명백해 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게 주시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내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13년째 되어 갑니다. 저는 한 인종을 또는 한 그룹을 더 선호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면, 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건, 제가 게이나 레스비언에 대한 편견이 – 심한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손수 빚어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모든 영혼을 사랑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나의 편견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동성연애가 막중한 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하고 편견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명백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2년간 격어온 갈등, 부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체험한 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한 마디의 대꾸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 18). 순종하는 모습을, 죽임에까지도 순종하는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새계명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듯 싶어서 이 모든 것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이시훈] 암흑

이코스타 2004년 4월호

06년 6월 6일 밤에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는 핵폭탄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핵미사일이 태양의 중심을 타격했다. 지구는 완전한 어둠과 추위 속에 빠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까미유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가 어둠 속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검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괴물들이 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까미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며 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괴물들을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는 자신을 지켜갔다. 어느 날 아침 몇 명의 강도들이 그를 공격해서 난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는 납치당하여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테르 냄새를 풍기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삼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도 지지 않았으며 다만 까미유가 시력을 잃었을 뿐임을.


그가 싸웠던 괴물들은 그가 차에 치거나 건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도우려는 손길들이었으며


그의 검은 양로원에서 준 지팡이였음을 설명해준다.


위의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암흑’이라는 짧은 소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내용 속에 함축된 의미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까미유는 아마도 늘 핵전쟁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했고, 그가 시력을 잃은 밤, 꿈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환상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은 그에게 세상은 암흑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을 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때로 그 걱정, 근심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우리를 덮치고 스스로 만든 그물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을 지워버린 것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고 공포에 떠는 모습.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만나는 괴물의 실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포와 죄의 형상일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내면의 등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지, 오해와 편견 때문에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가 휘두르는 검은 자신을 지키기 보다는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강한 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명예의 검, 권력의 검, 물질의 검을 구하여 휘두를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빛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려 우리는 빛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곤 합니다. 내 안에 환한 불이 켜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정의로움, 선함과 그릇됨, 진실과 미혹의 분별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식견도 눈과 마음이 밝고 맑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따스하고 밝은 불빛은 다른 사람들과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근심보다는 희망을, 불안보다는 평강을, 다툼보다는 이해와 화해를, 인내와 온유의 밝은 빛이 넓게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환한 등불 하나를 켜주는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밝은 햇살 앞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우리 안의 부정한 것들도 빛의 씻김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투명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안에 빛을 가진 자는 타인의 내부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모습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성품을 알아갈 수록 그 빛은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빛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난의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처음 빛을 바라볼 때 느끼는 통증과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눈은 서서히 빛에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이제는 감출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단단히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검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어둠을, 불의함을, 거짓됨을 잘라내는 검을 꼭 잡고 이 거칠고 오염된 세상을 걸을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오직 사랑해야 할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내민 손길이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하나]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코스타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7년이 되었습니다. 12년의 유학생활동안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코스타가 제겐 얼마나 감사함으로 늘 고백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으로 코스타를 쫒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며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대답은 코스타 현장에 직접가면 알수 있다는 대답밖에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를 통해 확실한건 새로운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계속 찾아가고 있고 지금까지도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코스타를 통해 변해가고 있는 저의 작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아회복


첫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자아와 자존감을 회복 했습니다. 십이년전 중학교때 ‘조기 유학’의 섭인관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려고 제 자신과 싸우며 제 자신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에 입학할때쯤 제 자신이 어디에 속한지 몰라 고민이 되어 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민 사회와 교회에 섞여 제 자신의 정체와 유학의 목표를 잊고 살가갈때쯤 하나님께서 1998년 코스타로 불러주셨습니다. 코스타에서 새롭게 만난 하나님께 다시한번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며 내 자신조차도 몰랐던 유학생활의 아픔과 상처들이 발견되고 그 고통을 치유해주시며 새로운 자아상과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유학이 특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특권이 사명감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제가 할 공부와 신앙을 어떻게 연결 시켜야 하는지 가치관을 확실하게 정할수 있었습니다.


비전


두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의 시야가 넓어져 세계를 바라보고 제 가슴에 품을수 있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처음엔 선교는 저 같은 사람은 할수 없다며 늘 고개만 절레 흔들며 멀게도 어렵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지역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라와 세계를 바라 볼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 선교의 비전과 소망들이 자리잡아 가게 되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때에 저의 삶을 다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국가가 멸망하고 포로된 자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언약을 잊지 않으심을 기억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하며 나의 역활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스타가 아니였더라면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제 자신밖에 바라보지 못할뻔 한 삶인데, 코스타 덕분에 많은 세계구경을 하고 간접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의 삶


마지막으로 코스타에서 조장으로써 섬김을 통해 제자의 삶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코스타의 또 다른 매력 JJkosta 수양회로 영혼을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수 있도록 성령님의 힘을 얻는 방법을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속한 6지역의 코디님과 환경을 극복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작했던 원투원으로 말씀과 씨름하며 말씀에 인도되어지는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작년부터 원투원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할지 몰랐고, 때로는 부끄러워서 생각처럼 행하지 못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시간이 흘르수록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기쁨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곳은 영적으로 훈련받고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엔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의 외로움도 제게는 홀로있는 훈련이자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만날수 있었음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시고 함께하시는 시간들이 외로움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과장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우리 코스탄들의 믿음이 연단되어 지는 값진 시간들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많은 시험을 받았듯이, 많은 유혹과 영적 위기에 빠지기 쉽지만 동시에 영적인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합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아픔도 많고 시련과 좌절도 많은 광야같은 우리 삶의 현장들이 아름다운 동산이 되길 소망합니다. 광야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 광야가 고난의 모습을 가장한 축복의 장소임을 저에 부족하고 모자란 삶가운데 깨닫게 해준 최대의 선물이자 은혜임을 마지막으로 고백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