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예배의 정점은 항복이다

예배의 정점은 항복이다
‘오직 주 만이’ 작곡 배경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저에게서 나는도다.” 시 62:1
 
1987년 6월은 나의 대학생활 중 가장 시끄러운 달이었다.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하던 이한열 학우가 전경 측에서 쏜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결국 생명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도화선에 불붙듯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더욱 거세진 데모로 나라전체가 술렁였다. 당시 한국교회 안에도 좌우의 대립양상이 극에 달했다. 경배와 찬양 모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한 쪽에서는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 못하는 하나님’, ‘입 없는 하나님’이라는 독설적인 표현까지 터져 나왔다.
복음주의 진영의 공식입장은 데모 참여를 금했지만, 내가 속했던 IVF 학생선교단체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참여할 수 있도록 선을 그어주었다. 나는 젊은 혈기에 못 이겨 그 데모 대열에 뛰어 들었다.
데모 이후 내 마음은 항상 불편했다. 군중 속에 섞여 뛰고, 돌도 던지고, 도망하는 폭력적 태도를 내 이성은 합리화했지만 마음은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학업 이성, 졸업 후 진로에 시국문제까지 맞물려 심적으로 가장 복잡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한 번 즈음은 통과해야 할 내면의 전쟁, 즉 바울 사도가 로마서 7:19,24에서 고백했듯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내적 갈등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었으니 당시 나의 내면세계는 한마디로 전시상황이었다. 어느 날 아침 말씀을 묵상하려고 그날 본문을 폈다. 다윗이 쓴 시편 62편이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시 62:1 상반절)
1절에서부터 마치 케이오 펀치를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그랬다. 내 영혼은 잠잠하기는커녕 폭풍 속에 요동하고 있었다.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환영을 기대하고 있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영은 무너져 내렸다. 문득 하나님 외의 너무 많은 곳에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군요.’ 말씀 앞에 무릎 꿇었다. 이 시편 62편은 그저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며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흘러나온 고백이 아니었다. 숱한 고민과 두려움은 물론 죽음의 위협까지 받고 있던 청년 다윗이 자기 자신을 향한 선언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지 수년이 지났다. 그를 향한 백성의 인기도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의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나님마저 인정한 왕권, 그 고지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아른 한데, 승기는 사울 왕의 손에 아직도 굳게 쥐어져 있다. 그 갑갑한 현실을 다윗은 묵묵히 참아내야만 했다. 험난한 엔디게 사막에서의 끝 모를 도피생활은 다윗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시편 62편은 처절하게 무너진 삶의 돌무덤을 뚫고 피어난 한 송이 백합화이다.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추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 해주는 축복이 속으로는 저주로구나.(셀라)” (시 62:3,4) 코앞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터져 나온 영혼을 향한 절대 선언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명령하는 다윗의 고백이 그 어떤 해답보다 강력하게 내 영혼을 뒤 흔들었다. 그 말씀 앞에 무릎으로 항복했다.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불과 10여분 만에 ‘오직 주 만이’라는 곡이 탄생했다. 
당시 송정미, 김지현과 종종 모여 자신이 창작한 곡을 나누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정미에게 전화가 왔다. 시편 62편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곡으로 극동방송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나가려고 하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허락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결국 정미는 본선에 올라 대상과 함께 작곡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정미는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의 능력’을 담대히 선포하는 여 전사가 되었다.
2009년 한국 방문 시 만난 송정미 사모가 당시 상황에 대해 처음 말문을 열었다. 복잡한 시국상황을 수년 경험하면서 고민이 많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시편 62편이 해답으로 다가왔단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 결코 무능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단지 ‘말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구원 나의 영광’이 내 의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으며, 그래서 현실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힘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감사한 것은 말씀 앞에 항복하고 작곡한 ‘오직 주 만이’가 지난 20여 년 동안 예배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불리고 있는 예배곡이 되었다는 점이다. 항복은 순종의 최고 단계요, 예배의 심장 heart of worship이다. 자아의 끝에서 하나님이 시작한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는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그의 항복의 크기이다.” 그래서 항복은 예배의 정점이다. 

[이유정] 속도보다 방향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을 잃었다. 김남준 목사가 말한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이 불붙는 진리의 선포를 상실한 강단과 공모하여 민방위 교육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예배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 인구 천만의 한국사회가 이럴 수가 없다. 크리스천의 삶이 이렇게 무능력할 수가 없다. 물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복음 전하는 삶은 원래 미움 받는 것이다.

예수는 신자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눅 21:17)이라 말씀하셨고, 바울은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도전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그 도를 넘는다. 사회로부터 듣는 개독교 운운은 그 자정능력을 잃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장이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회중 예배의 거룩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주 몇 번씩 만나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신과 뜻을 사회에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으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을 매주 만나는데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감화 감동하시는 성령 앞에 어떻게 순종하지 않고 내 기분, 내 감정, 내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존재로 살수 있단 말인가?

신앙의 진정한 힘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출발한다. 오늘 교회가 이 예배의 능력을 상실했다. 예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한 번 만나면 해결될 것을 각종 훈련과 세미나, 교육과 학교에서 해결하려니 힘들고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신도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봉사와 훈련의 짐이 너무 과하다. 
 
그 많은 예배 외에도 서너 가지는 기본인 봉사에 각종 위원회 회의, 행사 준비, 리더 훈련까지 받으니 매 주일마다 초죽음 아닌가? 그러니 막상 세상에 나가서 희생하고, 핍박을 견디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단과 싸워야 할 에너지는 바닥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과 동화되는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하고 만다. 
왜 오늘 교회가 이처럼 바빠졌는가? 왜 교인들은 목사들이 바빠야 안심하는가? 예수님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이는 컨퍼런스도 없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12명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균형이 무너졌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인간의 소통에 무게중심이 옮겨졌다는 뜻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표준새번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십자가에는 두 축이 있다. 수직축은 하나님과의 만남, 수평축은 신자, 비신자, 세상과의 소통을 상징한다. 이 두 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우선순위priority는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이다. 
 
이 우선순위에 예배의 본질이 있다. 이를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다른 것도 다 무너진다. 하나님사랑 없이 이웃사랑도 없다. 하나님께 사랑의 힘을 공급 받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은 없다. 예배가 죽었을 때 그 외의 봉사와 교육, 훈련과 교제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지엽적인 문제 몇 가지 해결하기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본질과 핵심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바쁜 것, 비본질적인 것,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자.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잠시 미루자. 
 
“빨리 빨리”를 추구하는 한국병을 거절하고 여백의 미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적 감수성을 살리자. 속도보다 방향에 목숨 걸자. 교회의 체질을 이벤트, 일 중심에서 예배 중심으로 바꾸자.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유정] 일꾼과 예배자

작년에 한빛지구촌교회 예배사역 7년 만에 4개월 안식을 가졌다. 지쳤던 심신도 회복하고 지난 사역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예배 공부를 위해 도미한지 10년, 한 분야에서 10년 집중하면 맥이 뚫린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예배의 맥이 보였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진행될수록 예배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눈이 뜨였다. 예배공부 4년에 전임 예배목사 7년 된 자가 예배에 무지하다면 문제 아닌가? 그러나 예배를 몰라서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도 아니다.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예배의 본질에 목숨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반성했다. 예배보다 예배드리는 일에 더 열심을 냈다. 비본질적인 것에 바빴다. 일 때문에 가정도 희생시켰다. 아내가 수없이 지적했는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완벽주의, 일중독이란 말도 들었다. 뒤늦게라도 깨달은 것을 감사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예배 행위자체를 예배로 착각한다. 예배 세미나에서 만난 찬양팀원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주일 날 찬양 봉사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하나 때문에 교회 나올 때가 많아요.” “찬양하고 단에서 내려오면 예배에서 내 역할은 끝났다, 내 할 일 다 했다는 안도감만 남아요.” 일반 성도들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죠.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거룩한 기대감보다는 솔직히 집사로서 마땅히 성수주일 해야 하는 의무감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찾으신다. 예수님께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랑의 열병에 빠진 자를 찾으신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눅 10:2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는 행위로 끝내고,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다. 하나님을 배제한 사랑은 우상숭배로 빠진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적 사랑이 넘쳐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이것이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즉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가 예배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는 이 순서가 뒤바뀌었다. A. W. 토저의 말처럼 ‘예배자보다 일꾼이 많은 시대’이다. 하나님을 ‘일손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공사판의 감독’[footnote]A. 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 (서울: 규장, 2006), p. 66.[/footnote]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일한다. 심각한 착각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원한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삶의 현장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성경공부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자꾸 예배라는 것을 어떤 행위로 규정하려고 한다. 예배는 행위 이전의 문제이다. 마음의 문제요 본질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예배행위는 껍데기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것이다.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는 주부, 직장에서 커피를 타는 사무원, 길거리의 청소부 등 어떤 직종,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행하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평범한 주방 일을 하면서 당대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로렌스 형제(Br. Lawrence)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좋은 모델을 보여준다. ‘주방성자’로 불리는 로렌스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반복되는 연습을 통한 삶의 습관이라고 했다. 즉 임재란 하나님이 언제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만 영혼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footnote]로렌스 형제, 하나님의 임재연습 (서울: 좋은씨앗, 2008), p. 18.[/footnote].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없이 ‘내’가 팔팔하게 살아있다. 내 관심사가 하나님보다 우선한다. 교육도, 훈련도, 전도도, 선교도, 심지어 예배조차도 하나님 임재 없이 ‘일’로 행해진다. 예배자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 하는 사람은 나무, 풀, 짚을 쌓아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로 심판할 때 다 타버릴 것들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최영기]설교 듣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대학시절, 주일날 설교 직전에 예배당에 들어가서 축도 끝나기 전에 살짝 도망쳐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면서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예배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를 위한 장식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는 목적은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설교만 놓치지 않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옛날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옵니다.


설교가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의 결과입니다. 로마 카톨릭 예배에서는 예식과 성례가 예배의 전부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이 말씀에 무지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말씀에 관한 성도들의 무지를 깨려다보니 말씀 선포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와 더불어 기도, 찬송, 찬양, 헌금 등이 다 중요합니다. 설교만이 아니라 모든 순서가 다 예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외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나 액세서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에는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 정성을 담아야합니다. 찬송할 때에는 진심으로 해야하고, 기도할 때에는 믿음으로 해야하며, 헌금할 때에는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합니다.


저는 주일 새벽이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광고를 포함한 예배 순서 하나 하나를 꼽아가며 기도합니다. 예배 순서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이 같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는 약 50명의 기도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배 10-20분전에 본당에 나와서 예배 순서를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예배가 은혜롭다고 평가해 주십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기 원하면 교회당에 일찍 나와서 마음 준비를 하고 임해야합니다. 이때에 예배 순서를 꼽아가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예배를 은혜롭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예배에 은혜를 받게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