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지도자와 적응력

물론 고난 자체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지도자들은 고난에 대한 바른 반응을 한다. 바른 자세로 임할 때에 고난도 유익이 될 수 있다. 반응이 중요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도자들은 고난을 통과하였고 지도자를 만드는 차이는 그들의 자세에 있다. 그는 강조하기를 “리더들은 다른 사람들을 좌절케 하는 사건과 관계로부터 도리어 의미를 창출한다. 심지어 혹독한 시련에 휘둘릴 때에도 리더들은 자신을 무기력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능력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상황과 마주쳐도 그것을 뭔가 유용한 과정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워렌 베니스는 그의 책에서 인생의 단련기를 거친 좋은 사례로 시드니 리튼버그의 사례를 들고 있다. 리튼버그는 1949년 모택동 정부에서 함께 일했던 예전의 친구들에 의하여 스파이 혐의를 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총 16년을 보내었다. 첫 1년에는 심문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어둠뿐인 독방에서 나머지 15년은 하루종일 환하게 전등이 켜져있는 곳에서 생활했다. 그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그의 마음 속에는 불현듯 어린 시절에 읽었던 네 줄의 시가 떠 올랐다고 한다.


“그들은 나를 가두는 원을 그렸다. 이교도, 반역자, 경멸할 자식이라 소리치며, 그러나 나는 사랑과 승리의 정신을 가졌다.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원을 그렸다.”


이 시 구절이 리튼 버그에게 생존의 열쇄였다. 고난이 주어졌을 때에 그것에 의하여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통하여 의미를 창출해 내는 능력이 탁월한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다. 리튼 버그는 고난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도리어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미국 기업인들이 중국의 비즈니스에 도움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컨설팅 회사 (리튼버그 어소시에이트)를 창립하고 운영하였다. 마치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수들을 더 큰 사랑으로 품어버리는 일을 한 것이다. 그들은 리튼 버그를 구속하기 위하여 원을 그었지만 리튼 버그는 그들을 다 포함하고 사랑하기 위한 큰 원을 그린 것이다.


풀러 신학교의 지도자학 교수인 로버트 클린톤 교수도 지도자들이 겪는 고난의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고있다. 그는 지도자들이 겪게 되는 이런 시간을 “깊이있는 과정(Deep Processing)”이라고 이름하였다. 지도자들이 이런 어려움의 시간을 지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깊이 있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두 가지의 반응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종류는 그런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지도자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깊은 과정을 지나가면서 좌절하고 포기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깊이 나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비젼을 품게되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늘 어떤 깊이있는 가정을 지나고 있는가?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미래에 대한 불확실에서 오는 두려움, 삶의 위기, 사업과 인생에서의 실패,… 이런 모든 시련들을 통하여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 지고 한 지도자로써 역량이 커지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베니스는 “지도자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로운 단련기”를 보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고난이란 지도자가 되기위한 필수 과목인지 모른다.



[신선묵]“지도자와 휴식”

요사이 수영을 배우면서 느낀 것이 있다. 수영을 하는데 있어서 숨쉬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하여도 숨쉬기를 잘 할 수가 없다면 우리가 멀리 수영하여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수영을 하러 가면 다른 사람들이 수영하는 것을 관심 있게 본다. 한 건장하게 생긴 청년이 몸에는 많은 문신을 새기고 수영을 한다. 너무 힘이 좋아서 무척 잘 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그는 멀리 수영하지 못한다. 근육질의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멀리 나갈 수가 없다. 곧 지쳐버린다. 그런데 연약하게 생긴 아주머니 한 분이 수영을 하는데 힘이 없어 보이는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은 지속적으로 수영을 잘한다. 그 차이는 한 사람은 숨쉬기를 잘하고 다른 사람은 숨쉬기를 잘 못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도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쉼표에서 잘 쉴 줄 알아야 하고 아름다운 동양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여백을 남길 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연설가가 되기 위해서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침묵의 시간 말이 없는 순간을 통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깊이 있는 곳으로 생각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으로 暈遠岵隔?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 가운데 휴식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신앙적으로도 휴식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안식의 시간을 가졌고 그의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으로써 율법을 주실 때 안식을 명하셨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까지도 안식을 갖도록 명하셨다.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그의 삶과 사역가운데 수시로 안식의 시간을 가졌고 우리를 그의 안식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가 주시는 안식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약속해 주셨다.


그러면 바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삶 가운데 어떻게 휴식을 가질 수가 있을까?


첫째, 휴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휴식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할일 없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일들은 우리 앞에 수없이 많이 놓여있고 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을 다하고 쉬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쉴 수가 없을 것이다. 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 삶의 스케줄에서 휴식을 위한 시간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 우리 삶 가운데 틈틈히 휴식의 시간을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학교에서 행정을 하면서 교수를 하고 있다. 그런데 행정을 하면서 교수를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다가 보니까 행정 일을 꽉 채워서 하고 강의시간이 되면 허겁지겁 강의실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한번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노 교수님이 행정가이시면서 교수인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셨다. “여러분! 강의 전에는 반드시 10분-15분 정도 휴식을 반드시 취하십시오. 행정 일을 하다가 강의 시간이 되어서 달려가면 효과적인 강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10분 가량은 쉬면서 강의를 위하여 숨을 조절해야 합니다.” 참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또 어떤 사람이 조언하기를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는 꼭 10분 가량 휴식을 취하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지쳐서 집에 돌아가면 배우자에게 짐이 되기가 쉽다. 그러면 서로에게 지쳐서 도움을 바라게 되고 둘 사이가 좋지 않게 될 수 있다. 그러지 말고 10분 가량 숨을 고르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 삶 가운데 가끔은 절대 휴식이 필요하다. 자주는 할 수 없지만 가끔은 우리의 몸과 영혼과 정신을 푹 휴식가운데 잠기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절대 휴식”이라고 부른다. 마치 무덤 속에 누워있는 죽은 자처럼 모든 생각과 걱정과 근심과 창조성까지도 모두 포기하고 푹 쉬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삶에 스트레스로 피곤할 때에 가끔 묘지를 찾아가서 미리 사둔 묘자리에 누워본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고 한다. “곧 이렇게 누울텐데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을 내고 바쁘고 힘들게 사는가” 생각하면서 삶을 바로 잡는다고 한다. 우리는 가끔 삶의 속도를 줄이고 이렇게 깊이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람마다 휴식을 취하는 방식과 패턴이 다양하다. 방법에 있어서 율법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나는 그까짓 휴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초인 의식은 버려야 한다. 네째, 우리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휴식과 안식의 차원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에서의 안식이 필요하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무거운 짐, 욕망이라는 짐, 그리고 걱정이라는 짐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식을 취하여도 영적인 차원에서의 안식이 없다면 우리는 피곤하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깊은 영적인 안식으로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오직 예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는 깊은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승리롭게 살아갈 힘이 있다.


앞에 수영이야기를 하였었는데 수영을 배우면서 어떻게 하면 숨쉬기를 잘 할 수가 있을까 연구를 하였다. 팔을 잘 휘젓고 다리를 열심히 구르는 등 열심히 배워서 최선을 다해도 숨쉬기가 힘이 들고 곧 지쳐 버렸다. 근본적으로 나는 내가 물위에 떠있어야 숨쉬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열심히 수영을 연습하다가 한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숨쉬기를 잘하려면 물로부터 열심히 도망쳐서 숨쉬기를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물에다가 내 몸을 맡겨야 한다. 물에서 내 힘으로 뜨려고 하지말고 물에 내 몸을 맡겨 물이 나를 뜨게 해야 되겠다 생각하였다. 힘을 빼고 물에 내 몸을 맡겼다. 그리고 머리까지 푹 물에 담갔다. 그랬더니 내 몸이 물에 뜨는 것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속력도 붙고 물의 띄워주는 힘 때문에 숨쉬기도 쉬워지고 많이 수영을 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자기의 힘으로 물에 떠 있으려고 하면 사람은 물위에 오랫동안 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없고 연약하여도 물에다가 내 몸을 맡기고 머리를 넣으면 물이 나를 띄워 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면 머리가 좋고 힘이 좋아도 곧 지친다. 인생은 아무리 강한 자라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나의 삶을 맡기면 평안과 안식이 있고 우리가 성공적으로 지속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닐까? 주님께 나아가서 그에게 나의 죄의 짐과 욕심과 염려를 다 맡기고 힘을 얻어서 하루하루를 승리롭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신선묵]지도자의 삶의 목적

한번은 해마가 돈을 벌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천천히 헤엄쳐서 가고 있는데 그가 많이 가지 않아서 장어를 만났다. “여봐 친구야 어디 가냐?”하고 물었다. 해마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돈을 벌려고…” 장어는 말하기를 “너 참 행운아다 나를 만났으니. 여기 지느러미같이 생긴 발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그것 참 좋은데…”하면서 해마는 돈을 지불하고 지느러미를 사서 발에 끼고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한참을 가다가 해면을 만났다. “어이 친구야 어디를 가냐?” 라고 물었다. 해마는 대답하기를 “돈을 벌려고 가는 중이야.” 해면이 말하기를 “너는 참 행운아다.” 내가 싸게 프로펠러 달린 스쿠터를 너에게 팔게. 네가 휠씬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해마는 남은 돈으로 스쿠터를 사고는 이제는 다섯 배나 빠르게 달릴 수가 있었다. 그는 상어를 또 만났다. 상어가 “친구야 어디를 가니?”라고 물었다. 해마는 대답하기를”돈을 벌려고 가고 있어.” “상어가 대답하기를 “너 참 행운아다. 내가 지름길을 알려 줄께” 상어는 자기의 입을 가리키며 “이곳으로 가면 시간을 훨씬 절약할 수 있지.”라고 말하자 해마는 “고마워”하면서 상어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삼켜져 버렸다. 이 우화의 교훈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 이르게 되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분명한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지 않을 때에 우리가 하는 일들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해 보면 분명한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문의 목적을 정하는 일이다. 분명한 목적이 먼저 설정되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질문이 만들어지고 자료도 모아지고 연구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분명한 목적을 설정하지도 않고 논문을 다 써오는 경우가 있다.아무리 좋은 말과 통찰력들이 들어있어서 하나의 목적으로 묶어지지 않은 것은 논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분명한 목적이 없는 논문은 마치 대들보 없는 집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집을 세울 때에는 먼저 대들보는 든든히 세우고 그 대들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가야지 대들보가 없거나 부실하면 아무리 아름답게 집을 장식하여도 위험한 건물에 불과한 것이다.


지도자란 분명한 목적과 방향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조직체를 위한 목적을 바로 인식하고 그 목적의 방향으로 집중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지도자는 남들을 이끌기 이전에 자신의 삶에서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자기의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이 우화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인생을 살게 되고 그렇게 살고있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인격도 중요하고 또 기술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의 관점에서 목적의식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이름 한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에는 모든 기독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 있고 우리 각 개인에게 독특하게 부여된 삶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을 독특하게 지으셨고 독특한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삶의 목적을 바로 파악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모범이 되신다. 우리 주님께서도 세상에 거하실 때에 많은 선한 일들을 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셨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모든 병자를 다 고치셨는가? 우리 주님에서 가난한 자를 다 먹이셨는가? 유대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셨는가? 아니다. 그는 당시의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의미로는 다 이루지 못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다 이루셨다. 즉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이루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고 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다하려고 덤벼드는 것보다는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고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삶의 목적을 다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삶의 목적에 있어서 남의 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나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사명 즉 삶의 목적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신의 집에 손님이 오면 자랑하는 세가지 물품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집의 현관에 있는 은으로 만든 풍향계이고 둘째는 집안에 거실에 있는 금으로 만든 온도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구리로 만든 나침반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그는 구리로 만들었지만 이 나침반을 가장 소중히 다루고 자랑하였다. 그래서 손님들이 왜 이 나침반을 소중히 여기는가 묻고는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풍향계는 은으로 만들어졌지만 바람이 불면 이리 저리로 움직이고 온도계는 금으로 만들어졌지만 주면 환경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러나 나침반은 비록 구리로 만들어졌지만 어디에 어떻게 놓던지 한 방향을 향하여 바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이끄는데 있어서 나침판과 같은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있다. 어디에 서있던지 주님을 향하고 또 주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위하여 집중하여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붙잡고 살아가는 지도자는 아름답다.

[신선묵]지도자와 시간

시간관리에 관하여 나에게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었던 이야기를 두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시간관리에 관하여 강의를 하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그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하나씩 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 차자 그는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네” 그러자 그는 “정말일까요?”라고 되묻고는 조그만 자갈들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 넣고 깊숙히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흔들었습니다. 주먹만한 돌 사이에 자갈이 가득 차자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찾습니까?” 눈이 동그래진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좋습니다”하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물을 한 주전자 꺼내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바빠 스케쥴이 가득 찼더라도 정말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그 사이에 추가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시간관리 전문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것도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내가 이 실험을 통하여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간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꼭꼭 채워 바쁘게 사느냐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먼저 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로 인하여 그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고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일을 하는 것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 “성공하는 자의 7가지 법칙”에서 다음의 네 가지 종류의 일들 중에서 어떤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할지 묻고 있습니다. 첫째, 중요하고도 급한 일, 둘째,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 셋째,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 넷째,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


여러분들도 한번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중요하고도 급한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코비는 예상외로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제일 먼저 하라고 제안합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에는 다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왜 급한 일 보다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가 설명하는 이유는 “둘 다 중요하지만 급한 일을 먼저 하면 사람이 그 일을 하면서 지쳐 버리게 되나 급하지 않은 일을 하면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경험적으로 이 주장에 상당히 동감을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로 하루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 주에 강의할 내용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쏟고 하루 하루를 채워가다가 다음 학기가 되면 또 그때 강의 준비를 하루하루 해 나아가는 것으로 급급해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쁘게 그러나 간신히 강의를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비의 법칙을 내 삶 가운데 적용해 보았습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는 법칙을 사용하여 하루의 시간을 보낼 때에 우선 다음 학기 강의할 내용을 연구하고 공부하는데 일정 시간을 항상 배분하였습니다. 오늘의 강의도 중요하지만 다음 학기 강의도 동일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 준비하지 않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즉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음학기 강의 준비에 우선적으로 일정 시간을 배분함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유익을 경험하였습니다. 첫째, 다음 학기 강의를 미리 준비할 때에 이번 주 강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습니다. 둘째, 오늘 준비한 다음 학기 강의 준비가 쌓여서 다음 학기가 되었을 때에 강의 부담을 많이 줄여 나의 삶에 지속적으로 여유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셋째,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학기 강의를 미리 준비할 때에 당장 강의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보다 보다 더 연구하고 깊이 생각해서 나에게 먼저 적용할 수가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가르치기 위한 수준의 공부를 넘어 나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연구도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어느 때보다도 바쁜 세대입니다. 마치 시간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 속에서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삶 가운데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또 그 중에서도 급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시간 관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선묵]당신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 당신 자신에게 적절한 관심을 주고 있는가?

옛날 어느 마을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가진 농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 하루 낳아주는 황금알로 그 농부와 가족들은 비교적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그 농부의 마음에 욕심과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저 거위를 잡아 그 속에 든 황금 알들을 팔아 사업을 시작하면 한꺼번에 큰 돈을 벌 수가 있을 꺼야!” 하고는 그 거위의 목을 비틀고 배를 갈랐다. 하지만 거위의 배속에 황금 알은 없었다. 이제는 황금 알을 낳아주던 거위가 없어져 그 농부는 전보다도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우리 크리스찬 지도자들은 성공적인 사역을 원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리석은 농부처럼 사역의 결과에만 집중하는 마음이 앞서 사역에 비정상적으로 매달리게 되어 사역의 주체가 되는 자신을 바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사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바로 잘 관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역은 우리의 존재(Being)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역의 열매가 마치 거위가 난 황금알과 같다면 우리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즉각적인 결과만을 위하여 자신을 바로 돌보는데 소흘히 한다면 이 우화 속의 농부와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역의 주체가 되는 지도자인 자신을 바로 건강하게 보존하는 일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사역의 성취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결과(열매)는 나무, 즉 지도자 자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존재를 잘 가꾸는 것이다. 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는가가 좋은 지도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조급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도자 자신이 건강하고 늘 발전하면서 성장해간다면 그 열매는 반드시 맺혀지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 자신을 건강하게 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한 지도자의 존재(BEING)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고 관리해야 한다.


첫째, 지도자는 자신의 인격(Character)을 계속하여 다듬고 성숙시켜야 한다. 성령의 열매들을 우리의 인격 속에 맺어갈 때 하나님의 선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맺어질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도자 자신이 성령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인격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첫걸음缺?종착역이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남에게 전하고 나는 멸망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간구가 우리 크리스찬 지도자들 모두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 지도자는 자신의 개성/기질(Personality)을 건강하게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독특하게 지으셨다. 우리는 각 사람이 지닌 개성을 크레 분류할 때 어떤 타입들이 있으며 또 어떻게 그 개성들을 조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사역을 보면 때로는 좋은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개성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오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개성은 타고난 성격으로서 어떤 Type이 더 좋고 나쁘고 문제라기 보다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개성을 잘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지도자는 가치관(Value)을 정립해 가야 한다. 소위 말해서 철학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를 정립하고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사역에 있어서 “나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확실히 철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지도력이란 남을 다루는 기술 이전에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다.


넷째,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혹은 은사를 바로 이해하고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지를 헤아리는 지혜로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또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일에서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은사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사역은 지도자의 존재로부터 나온다(Leadership flows out of being.)”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스러운 일들을 이루신다. 다시 말해서 사역자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도구, 당신 자신에게 적절한 관심을 주고 있는가? 지도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