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성]유학생 사역과 찬양

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이 곳 워싱턴 디씨 지역에서 유학생 사역(Korean Bible Study(KBS))으로 섬긴지 약 2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항상 동행하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역은 금요일에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며, 모임에 참석하는 지체들을 말씀 위에 스스로 서서 참 제자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깊게 연구하는 것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찬양 사역 또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씀 사역과 병행되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로는 금요일 성경 공부 모임에서, 크게는 매 년 두 차례 모이는 지역별, 전체 수양회에서 찬양팀을 통해, 또는 각 모임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학생 사역 안에서 바라보는 찬양 사역에 대해 짧게 다루고자 합니다. 시중에 이미 나와 있는 전문적인 서적들과 비길 수는 없겠지만, 말씀 연구 위주의 사역 안에서 찬양 사역을 꿈꾸는 지체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끔씩 함께 지내는 지체들 속에서 쉽게 쓰는 말로 ‘feel’이 꽂힐 때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찬양드릴 마음이 생겨야만 찬양하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나의 마음이 깊은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찬양은 생각하기 힘든 옵션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모임 전에 기타에 맞춰 부를 찬양들이 마음에 불평을 불러일으킵니다(한 번쯤 소그룹에서 찬양을 인도해보신 분이라면, 저 뒤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팔짱을 낀 채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친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편해도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 찬양을 하게 될까요? 뭔가 내 자신 안에 ‘쥐어짜는 듯한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것이 있거나, 마음으로 담아내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만 찬양다운 찬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곡조가 담긴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박수 치면서 부르는 찬양은 정말 곤욕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경박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잠시 떠올리면서 찬양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찬양을 본 듯 합니다. 그는 시편 33:1통해 말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찬양은 의인들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의인됨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됨을 의미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라는 단어는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여기서 쓰인 ‘마땅히’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뜻의 ‘나베’라는 히브리어가 쓰였습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becoming’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습니다.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찬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 어울리는 것이라면, 찬양은 정말 선택적인 것입니까? 개역한글의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의미상으로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을 하지 않을 경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움의 반대인 ‘추함’을 입게 됩니다. 추함이라는 강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떨까요? 어떤 분들은 썩 좋아보이지 않아도 편하게 있으면 그만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저의 개인적 성향을 잠시 무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정장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마태복음에 왕의 잔치에 초대 되었던 한 사람을 기억하십니까(마태복음 22:11 13)? 왕의 혼인 잔치에 오려는 사람이 없자 사거리 길에서까지 사람들을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도 불려 왔습니다. 추리닝 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아주 편한 차림으로…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불러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불러드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잔칫상의 진수성찬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이 사람은 쫓겨나서 아주 서럽게 울었다지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왕이 있었던 시대에는 왕의 행차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왕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편 29:2)’ 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what’s becoming) 옷을 입고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우리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지 않다고 해서 그분께서 우리를 바로 죽음으로 내모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천국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구원에 대한 깊은 감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왕 되신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항상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찬양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이십니까?


학생의 때는 감정이 가장 민감한 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과 사건에 따라서 바뀌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 그 안에서 찬양은 언제나 합당한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찬양은 사람의 감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에서 야기되는 감정을 뛰어넘는 찬양을 드리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 더 아름답게 찬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편 63:3-7)


시편은 다윗의 찬양하는 삶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시편 63편은 다윗의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표현된 시 중에 하나입니다. 입술로 찬양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며, 또한 기뻐합니다. 잠을 청할 때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묵상하고 찬양합니다. 다윗은 정말 찬양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이 시가 쓰여진 당시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광야로 도망치던 중에 이 시를 썼습니다. 왕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골수와 기름진 음식…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인해 그는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억지로 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즐거이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찬양했던 제목들이 그의 눈 앞에 있었습니까? 도망치는 자에게 어떤 인자하심과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기름진 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행렬에 욕을 하고 돌을 던졌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아도, 다윗의 행렬이 얼마나 급하고 초라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찬양합니다. 진실과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에게 ‘찬양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의 앞에 모든 것이 초라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보았기에 그는 즐거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이 실상을 고백으로 끌어내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있는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모든 일에 주관자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합당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의 기복을 뛰어 넘는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담긴 찬양을 하나님은 흡족하게 받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12:6).


이제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을 어떻게 소그룹 안으로 가져 올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그룹 안에서는 대개 한 명이 기타나 다른 악기를 가지고 찬양을 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게는 한 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지체들이 함께 할지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는 스타일이나 가창력, 또는 악기 연주 실력에는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의 내용이며,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선, 찬양은 그 날 나눌 말씀을 반영할 수 있는 곡을 생각하며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찬양의 본질적인 목적은 앞에서 나눈 것과 같이 왕 되신 주님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공부 전에 드려지는 찬양은 다른 부차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함께 있는 지체들의 마음으로 말씀을 향해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이제 그 안에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차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찬양이 사람에게 맞춰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맞춰진다’는 것은 찬양의 템포나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준비하는 인도자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준비하되, 찬양의 드려짐을 통해 사람 안에 역사하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그날의 말씀과 찬양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곡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찬양의 흐름에 따라 찬양곡을 선별하는 것은 인도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인도자로 세움을 받으시는 분들은 찬양 가운데 생활하시기를 권면합니다. 가급적이면 항상 찬양을 들으시고, 마음으로 깊이 배우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가사들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또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시지만, 이제 찬양으로도 그렇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 찬양 속에 깊이 들어가 있으시길 권면합니다. 몇몇 소그룹이나 수양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룹 멤버들이나 회중을 같은 열정으로 찬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이 큰 회중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혼자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 그 어색함을 상상하고 계신가요? 궁극적으로 ‘찬양’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지체들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몇 번의 감성적 노래 부르기는 가능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가시적인 요소만으로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인도자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찬양의 영성으로만 함께 찬양하는 이들을 권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깊은 영성의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channel로 사용하셔서 잠들어 있는 지체들의 영혼을 깨우실 것입니다. 지체들이 변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인도자가 지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사람을 보지 말고, 찬양의 대상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도자로써 온전한 channel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찬양하는 지체들을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십시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항상 그분께서 함께 있으리라 하셨기에 항상 왕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찬양을 불러야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항상 불러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운전할 때에도, 잠이 들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항상 부르십시오. 환란 가운데서도, 처절한 슬픔 가운데서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믿음으로 부르십시오.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삶으로 부르십시오. 항상 아름답게 드려질 믿음으로 예배, 곧 예배의 삶으로 부르십시오.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께 아름다운 제사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그것이 영감 있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흡족히 여기시는 노래입니다.


교실 한 구석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제 혹 자매가 보이십니까? 그 지체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예복을 입혀줍시다. 이제 예수님께서 곧 행차하신다고 합니다.

[조근상] 영어찬양과 한국어 찬양사이에서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1970년대 당시에 인기 있었던 통기타 그룹은 단연 ‘트윈폴리오’였다. 아직도 이 분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송창식, 김세환, 그리고 윤형주로 구성되었던 이 팀은 당시에 미국의 인기 있던 팝송들을 번역해 불러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을 불렀었다. 전통 트로트가 아닌 통기타의 선율을 가지고, 더군다나 번역된 곡을 노래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아시겠지만 한국의 찬양은 대 부분 번역 곡이 많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부르던 노래를 종합해보면, 거의 70-80퍼센트이상이 번역된 곡들, 특히 미국에서 불려지던 찬양이 한국에 들어와서 번역되어 진 것이 많다. 예수 전도단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던 1990년도 당시에 호산나 인티그리티 앨범을 한국에서 구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종로2가와 교보문고를 지나, 새 문안교회옆에 있던 ‘카리스’ 라는 크리스천 수입전문 음반판매점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때 쉽게 구하지 못했던 미국의 앨범들을 그 곳에서 비싼 값을 주면서 흥분해 하던 기억들이 생생하리라 생각된다. 당시 한국의 테잎들이 1500원정도 하던 시절, 카리스에서는 수입 음반이고, 게다가 크롬테잎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4000원씩 주고 그것을 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 나는 하나님에 미쳐 있었고, 예배와 찬양 곡이라면 없는 돈이라도 아낌없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100여 개의 테잎을(복사본을 포함해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셔서 다른 형제에게 줄 때는 마음이 꽤 아팠었다.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곡들을 외우다시피 해서 내게 테잎을 듣는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다만 외국 곡을 어떻게 번역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게는 큰 관심이었다.


결국 훈련을 마치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예수 전도단에서 찬양인도를 오랫동안 했었던 나에게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생겼다. 92년도 겨울 3개월동안 사무실에서 처 박혀서 ‘예수전도단 송북3집’을 만들었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유월절 어린 양의 보혈’을 번역할 때, 한 곡을 번역하기 위해서 한 달여 동안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난 후 결국 송북에 집어넣을 수 있었고, 또 ‘우리 함께 기뻐해’라는 찬양은 악보를 받은 지 10분만에 번역을 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같이 있던 간사들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번역문제로 복잡하던 90년도 중반에 영국의 그레함 켄드릭목사님의 비서와 우연하게 연락이 되어서 몇 곡의 번역을 의뢰 받았었다. 그 때 그레함 켄드릭목사님께서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의 조건을 팩스로 보내주셨는데. 첫 번째는 번역하는 사람이 번역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즉 영어를 능통하게 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번역하는 사람이 뮤지션인가, 즉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과,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사람이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96년도에 ‘You are my all in all’, ‘주 나의 모든 것’도 처음 번역할 때는 약할 때 ‘강함 되시네’ 가 아니라, ‘강함 주시네’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중에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공식적으로 모든 분들에게 사과하고 ‘강함 되시네’ 로 바꿔야 했다. 한 글자의 표현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느냐가 달라지기 때문에 번역을 잘못했다는 창피함에도 불구하고, 바꿔야 했다. 이 각 각의 기능을 가진 사람이 함께 모여서 번역을 하기를 원하셨다. 사실 그 전까지 번역할 때, 주로 혼자서 성경의 구절을 짜 맞추기 해 왔는데, 팩스를 받고 보니 번역하는 것이 더욱 구체적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기고 나중에 번역할 대는 혼자서 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같이 나누어서 번역을 함께 했다. 결국 처음에 번역했던 것들과 나중에 번역했던 곡들, ‘로마서 16:19’,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를 보면 후에 번역한 것들이 음악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서 더 깨끗하게 정리됨을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 오면서 사실 나는 번역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을 떠나면서 다시는 번역을 안 하겠다고 말한 이유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번역이 가지는 한계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요즘 한국에서 번역한 곡들을 보게 되면 많은 오류를 보게 된다. 내가 오류를 안 범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은 오류를 범했기에 더 더욱 번역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꺼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정말, 번역된 한국 찬양은 내 나름대로의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번역한 곡들을 보면 표현이나 내용면에서 열심히 하고 수고를 한다는 것은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음반을 내는 제작자들이 먼저 음반을 내려고 빨리 번역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 나 역시 번역을 안 하는 상태이기에 그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번역 곡들 사이에서 정말 중요한 가사의 내용은 사라진 채,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이려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단체가 번역한 곡들을 몇 글자만 바꾸어서 새로 곡을 출판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바이링글로 진행되는 코스타에는 특히나, 올해 처음 LA에서 열린 CKOSTA에서는 번역된 곡들보다는 원래 영어 곡들을 많이 부르게 되었다. 물론 깊이 있는 예배로 들어갈 때는 역시 우리 말로 지어진 찬양이 힘이 있고, 또한 우리의 정서에 맞기 때문에, 한국말로 된 찬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설프게 번역된 영어 찬양을 부를 때는, 이미 원곡을 듣고 알고 있는 학생들에게 부르라고 하기에는 나 역시 적응하기 힘든 것을 인정하게 된다.


최근 몇 년간 코스타의 모임에서 찬양 안에 기름 부으신 ‘shout to the Lord’, ‘Above all’이라든지, ‘Here I am to worship’의 번역 곡들은 아무래도 회중에게 같이 하자고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트윈폴리오의 노래들이 히트 된 이후로 가요계에서는 한국인들이 부른 가요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단지 번역 곡만이 아닌, 창조적인 노력으로 말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바람이 있다면, 한국인들 스스로 지은 찬양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되도록이면 영어의 원곡들은 억지로 번역하지 말고, 그대로 부르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2001년도 코스타 주제 찬양이었던 박성호 목사님이 지으신 ‘낮아지신 예수’라는 곡을 좋아한다. 가사를 보면, 끊임없는 묵상이 흘러나오고 깊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곡들이 우리 한국인들 안에서 많이 발견되어지면 좋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다.

[박성호]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찬양을 이야기 하자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2003년 코스타가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2002년 7월, 위튼 칼리지 에드만 채플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의 벅찬 함성 소리와 도전적인 메시지들의 파릇파릇함, 채플을 가득 채우며 수많은 이들에게 찾아가 만지시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감동이 나의 영혼 깊숙이 또 다시 이번 코스타를 기다려지게 한다.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겠지만, 바쁜 매일 매일의 수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면서 보내는 나로서는 코스타와 같은 집회는 지친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재 충전시키시며 억수로 쏟아 붓는 폭포수와도 같은 시간들이다. 찬양 사역을 맡게 된 지난 3년 동안은 아무래도 받을 은혜보다는 해야 할 일과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기회를 많이 놓치긴 했지만, 어쨌든 코스타를 통해서 내 영혼에 채워진 감동과 결심들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붙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도 햇수로 7년째가 되어가면서 집회에 참석하는 나의 마음 자세도 많이 타성에 젖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늘 다시 기억하고 다짐하는 것은 코스타를 처음 경험하면서 내 영혼에 채워졌던 숨 막힐 듯한 그 감동의 시간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또 수많은 새내기 코스탄들에게 새겨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살던 얼마 전 나는 무작정 웹 서핑을 하던 중에 어느 한국에 있는 교회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보기도 게시판에서 ‘우리 딸이 이번 여름에 시카고 코스타에 참석하는데 거기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제목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 등뒤에 흐르던 소름 끼치는 듯한 감동과 한줄기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을 기도의 제목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말씀이 좋은 사역자들과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찬양 팀을 구성해서 집회를 진행하기 때문에 집회에 감동이 있는 것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어머니와 같은 이들의 땀과 눈물의 범벅으로 드려진 기도들이 하늘의 보좌를 열며 집회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원천적인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삶으로 인정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참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코스타의 찬양 팀을 기획하고 팀을 구성하는 것도 어찌 보면 권력이요 특권이다. 코스타라는 집회의 성격이 전국에서 모이는 각 지역교회에 속한 학생들의 수련회이기 때문에, 그 집회의 찬양팀을 맡게 된다는 사실은 일종의 ‘국가대표 선수단’이라는 헛된 환상을 심어 줄 사탄의 공격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집회 시간 중에서 자주 눈에 띄고 조명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사역이다. 자연히 우리의 영원한 ‘자칼 형사’인 사탄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유혹과 달콤한 무기를 가지고 찬양 사역자들의 영혼을 삼켜버릴 심정으로 덤벼들고 있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찬양 사역 팀에서 3년째 이름을 드러내고 사역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이름 석자가 알려지게 되고, 또 그렇게 알려지는 것을 즐기게 되고,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과 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코스타의 ‘꽃봉오리’와도 같은 이 사역에서 물러나서 어디론 가 옮겨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올해 역시 ‘이번 코스타에서 찬양 팀으로 같이 섬기고 싶다’는 적잖은 형제/자매들의 연락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순수한 이들의 마음 마저도 괜스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냥 낫 놓고 ‘아 그게 기역자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첫해 2001년 찬양 팀의 기억들과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주제와 어우러졌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 속에 경험했던 섬김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다시금 첫 마음으로, 새해 첫날 찬물로 세수하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음악성과 인기와 그 모든 아지랑이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기로 작정했던 내 삶의 그 모든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소담한 마음으로 다시금 찬양을 준비하며 그 분께 올려 드릴 때 흥건히 받아주실 아버지의 품을 다시금 기대하며.

[박성호]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이코스타 2003년 6/7월호

2003년 코스타가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2002년 7월, 위튼 칼리지 에드만 채플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의 벅찬 함성 소리와 도전적인 메시지들의 파릇파릇함, 채플을 가득 채우며 수많은 이들에게 찾아가 만지시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감동이 나의 영혼 깊숙이 또 다시 이번 코스타를 기다려지게 한다.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겠지만, 바쁜 매일 매일의 수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면서 보내는 나로서는 코스타와 같은 집회는 지친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재 충전시키시며 억수로 쏟아 붓는 폭포수와도 같은 시간들이다. 찬양 사역을 맡게 된 지난 3년 동안은 아무래도 받을 은혜보다는 해야 할 일과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기회를 많이 놓치긴 했지만, 어쨌든 코스타를 통해서 내 영혼에 채워진 감동과 결심들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붙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도 햇수로 7년째가 되어가면서 집회에 참석하는 나의 마음 자세도 많이 타성에 젖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늘 다시 기억하고 다짐하는 것은 코스타를 처음 경험하면서 내 영혼에 채워졌던 숨 막힐 듯한 그 감동의 시간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또 수많은 새내기 코스탄들에게 새겨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살던 얼마 전 나는 무작정 웹 서핑을 하던 중에 어느 한국에 있는 교회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보기도 게시판에서 ‘우리 딸이 이번 여름에 시카고 코스타에 참석하는데 거기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제목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 등뒤에 흐르던 소름 끼치는 듯한 감동과 한줄기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을 기도의 제목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말씀이 좋은 사역자들과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찬양 팀을 구성해서 집회를 진행하기 때문에 집회에 감동이 있는 것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어머니와 같은 이들의 땀과 눈물의 범벅으로 드려진 기도들이 하늘의 보좌를 열며 집회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원천적인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삶으로 인정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참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코스타의 찬양 팀을 기획하고 팀을 구성하는 것도 어찌 보면 권력이요 특권이다. 코스타라는 집회의 성격이 전국에서 모이는 각 지역교회에 속한 학생들의 수련회이기 때문에, 그 집회의 찬양팀을 맡게 된다는 사실은 일종의 ‘국가대표 선수단’이라는 헛된 환상을 심어 줄 사탄의 공격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집회 시간 중에서 자주 눈에 띄고 조명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사역이다. 자연히 우리의 영원한 ‘자칼 형사’인 사탄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유혹과 달콤한 무기를 가지고 찬양 사역자들의 영혼을 삼켜버릴 심정으로 덤벼들고 있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찬양 사역 팀에서 3년째 이름을 드러내고 사역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이름 석자가 알려지게 되고, 또 그렇게 알려지는 것을 즐기게 되고,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과 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코스타의 ‘꽃봉오리’와도 같은 이 사역에서 물러나서 어디론 가 옮겨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올해 역시 ‘이번 코스타에서 찬양 팀으로 같이 섬기고 싶다’는 적잖은 형제/자매들의 연락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순수한 이들의 마음 마저도 괜스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냥 낫 놓고 ‘아 그게 기역자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첫해 2001년 찬양 팀의 기억들과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주제와 어우러졌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 속에 경험했던 섬김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다시금 첫 마음으로, 새해 첫날 찬물로 세수하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음악성과 인기와 그 모든 아지랑이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기로 작정했던 내 삶의 그 모든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소담한 마음으로 다시금 찬양을 준비하며 그 분께 올려 드릴 때 흥건히 받아주실 아버지의 품을 다시금 기대하며.

[박성호]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찬양을 이야기 하자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편 46편)


3월17일 저녁 8시,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最後通牒) 연설이 전세계에 방송됨과 동시에 그동안 우리 모두가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전쟁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후통첩으로 던져준 시간이 72시간에서 48시간으로 줄었다는 것만 예상과 달랐지 사실 모든 내용은 언론이 예상했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번 전쟁은 나의 마음을 참으로 무겁게 한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게 되어 내가 사역하고 있는 대학부에 소속된 3명의 젊은이들은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파병되어 지금 쿠웨이트에서 전쟁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의 양들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가서 외로이 떨고 있는데 안타까워 하지 않는 목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목자일 것이다. 그중의 한 형제는 얼마 전 싱가폴의 어느 해안을 배로 지나가고 있다며 ‘바그다드의 지상군으로는 아마도 최초로 투입되는 부대의 소대장으로서 자신이 부대원들을 두려움 없이 잘 인도할 수 있도록, 또 생화학 무기가 사용되지 않도록 제발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때를 잘못 만난 까닭에 이제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하는 수많은 젊은 군인들, 가공할 만한 최첨단의 무기와 폭탄에 의해 희생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수많은 이라크의 민간인들, 바그다드 인구의 반 정도가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라는 어느 기사를 읽은 나의 마음은 더더욱 아프다. 과연 전쟁을 불가피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게 동시에 오버랩 되는 이라크의 정유 탱크들의 모습과 정치인들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연설문 속에 담긴 꿍꿍이속을 짐작하는 나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9.11사태 이후 딕 체니 부통령이 가장 많이 읽고 연구했던 분야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지금 부시 행정부가 밀고 나가는 모든 대외적인 추진력의 향방은 과연 아메리카 제국이 계속해서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열강으로 커나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 속에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2001년의 국정연설에서 이미 이번 전쟁의 서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라크에 대해 걸고 넘어졌던 알 카에다와의 관련성 이야기는 전쟁을 시작하는 지금 쑥 들어가고 없는 것이 내게는 신기할 뿐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또한 이번 전쟁이 어쨌든 끝나고 나면 지금 북한에 대해 걸고 있는 정치적인 시비가 다시금 링 한가운데로 올려져서 이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격전장으로 치닫게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한다.


매일 아침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주도한다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이야기는 혹시나 아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사악한 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이 시작하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비추어 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계속될 중동과의 분쟁을 통해서 13억 모슬렘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왜곡되고 복음의 문이 더더욱 닫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벌어진 상처의 골이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깊게 남아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으로 요즘 마음이 매우 무겁다.


사담 후세인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도 결코 편한 것들은 아니다. 생화학무기가 없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라 치더라도, 바그다드의 병원과 학교 등의 민간인 시설에 민간복을 입은 군인들을 배치하여 끝까지 결사항전 하겠다는 이라크 측의 성명은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으론 쿠르드족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본다. 얼마 전 교회에서 있었던 선교대회에서 우리가 입양했던 종족이 바로 이 쿠르드족이었기 때문에 내게 더더욱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 이라크 지역에만 5백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는데 이들이야 말로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자신들에게도 그토록 목이 마르도록 기다렸던 민족 해방과 새로운 쿠르드 국가의 건설이 꽃피게 되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고 있는 민족도 있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터키 정부에게 눌려서 살던 쿠르드 족들까지도 다들 북 이라크 지역으로 이주해 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꿈에 젖어 있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란과 이라크와의 분쟁 속에서 미국과 서방이 개입해 왔던 중동의 80년대 정치사를 공부해 보려다 그냥 덮어 버렸던 것도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였다.


“이방이 훤화(喧譁)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6절) 본문은 딱 요즘의 중동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 하나님이 언제 소리를 발하셨다고 지금 시편 46편의 기자는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이방과 왕국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만을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인 부시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나라’에 속한 아랍 국가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8-10절)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고? 이라크 군이 들고 있는 초라한 장총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의 무기들- 스텔스 비행기와 각종 신형 폭탄들, 지하벙커를 뚫고 지나가서 통신기기들만을 감지해서 폭파시키고 통신수단을 두절시키는 폭탄과 무인정찰기, 목표물의 범위가 10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최첨단 폭탄 등-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깊이 드는 것은 잘못된 착각일까.


과연 하나님은 이 광기(光氣)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일까. 이런 상황에 노래는 무슨 노래? 무슨 찬양은 찬양? 어떻게 시편의 기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10절)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지나왔던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수백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십자군전쟁이 비 서구인들에게 준 아픔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서구 기독교 백인들이 외치는 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만을 편애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중동의 모슬렘 국가들을 쳐 죽여야 할 사탄의 무리들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시편 46편의 고백처럼 활과 창과 수레의 힘만을 믿고 까불대는 모든 바벨탑의 후예들에게 참된 메시지를 던지며 다만 하나님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이 주시는 참된 평화의 소식을 고대하는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나타내시고 드러내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은 미국 편도 아랍국가 편도 아니시다. 대한민국 편도 북한 편도 아니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이 모든 정치, 사회, 경제학적인 이념과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모든 열방이 주를 보며 주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분이시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어찌해 볼 수 있다는 헛된 자만심이 꺽이는 그날이 오면 이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모든 열방들이 주를 알게 되는 그날이 어서 오기까지 이 찬양의 메시지를 외치며 불러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