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한 영혼 이야기

이코스타 2006년 9월호

자매님,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한 자매님이 다른 자매님께 다가가며 숙소와 이름을 확인하고 가방을 함께 들며 인사를 나눕니다.
“ 네..에, 안녕..하세요? … 일찍.. 오셨네요?”
“ 조장님들은 하루 일찍 와서 조장수련회를 하고 이렇게 조원님들 맞이하는 거라고 배웠어요. 저도 처음이라서 아는 게 없답니다, 호호호! 아, 그런데 얼굴이 많이 피곤해보이시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고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된 두 자매님은 침대에 걸터 앉습니다. 조장 자매님이 다른 자매님의 무거운 어깨를 잡아주며 얘기가 계속되자 이 자매님은 벌써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못 참고 힘든 말문을 열어 마음을 나눕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는 아픔과 분노와 갈등이 자매님을 괴롭히고 있었고, 결혼하고 겪는 이런저런 현실과 예수님을 잘 모르는 양가 가족들 사이에서 이제 막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새댁의 자리는 그 자매를 충분히 혼란스럽고 지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현실을 안고 – 아직 딛고 일어서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작정하고 한번 여쭈어 보려고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착한 첫 날, 처음 만난 조장언니가 한국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환하게 맞아 주어서 긴장했던 마음이 확 풀리고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졌다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쉽게 얘기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마음에 걸었던 빗장을 이렇게 빨리 연것이 참 신기하다고 하며 눈물을 닦고 이제서야 작은 웃음을 보입니다.


2004년 코스타 화요일 저녁 집회에서 이 자매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청에 결단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인정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말씀 속에서 날마다 계속되고 기쁨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참으로 살아계시고 선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매님은 하나님이 주신 아이와 남편과 모든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는 신실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읽으시면서 이미 아셨겠지만 그 조장이란 사람이 부끄럽게도 바로 저랍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한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장수련회 마치고 숙소에 가서 조원님들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앞세워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가장 먼저 오신 그 자매님을 맞이한 것 뿐이었습니다. 제 얼굴이 그 자매님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후에 결혼식 사진을 보았지요, 참 미인이셨어요), 어머니처럼 나이를 지긋이 먹은 사람도 아니고요 (제가 비록 세파에 시달려 좀 주름이 가긴 했지만요), 뭐든 말하세요 다 들어 드릴께요 – 그렇게 감히 말씀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제 자신 또한 그 자매님과 하나 다른 바 없는 답답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첫 문을 두드린 코스타 였으니까요.


처음 등록한 코스타에서 기혼조 싱글( 결혼하신 상태이고 이번 코스타에는 혼자서 오시게 된 분) 자매님들 조의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물론 조장신청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라고 이끌어 주셔서 조장이 되었답니다. 그때는 참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당시 저에게 열심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셨던 간사님께 이제야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오타를 연발하고 backspace를 눌렀지만 남은 흔적은 피할 수 없는 아픔이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믿음 밖에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스스로를 차갑고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내버려 두었고 하나님은 그런 저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히브리서 11장 6절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음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믿음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선포하고 영혼의 파멸을 차처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씀으로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하고 수면위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신 일이 바로 처음 코스타 조장을 감당하면서 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자신없고 부끄럽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를 먼저 말씀 앞에 드러내며 만나게 하시는 조원들과 나의 연약함을 나누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것을 보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참여하게 되는 은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강하신 능력이 모두에게 임하는 통로로 사용하심을 감사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쉬니 참 좋더군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햇살을 다시 마주하며 흉터는 남아도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감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통해 받아 마신 한 바가지의 생수는 저를 살리셨고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생수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처럼 남들의 시선을 피해 한낮에 물 길러 나온 저에게 생명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의 고통 앞에서 세 번이나 주를 부인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결국 그는 그렇게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가 회개할 때, 주님을 사랑한다고 다시 고백할 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누가 뭐래도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벧전4:8).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멘 젖 나는 어미소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것처럼 저에게 충성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삼상 6). 나에게 허락하신 분깃에 감사하며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강한 용사로 훈련시키시는 대장되신 예수만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오클라호마 gp코스타에서 귀납적 성경묵상을 시작하게 되고, 2005년 어린이 코스타에서는 아들 영광이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며 위로하시고 자유함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시애틀 gp 코스타에서 follow-up 할 자매를 연결시켜주시고 한 영혼을 품으시는 아버지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Korean Bible Study에 조인하게 하시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원투원 제자양육할 자매를 만나게 하셔서 처음 원투원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하나님께 원투원 제자양육을 받습니다. 아리조나 gp 코스타에도 성령님의 섭리하심으로 잠깐 다녀오게 하시고, 2006년 코스타에서 3지역 코디로 기도하는 자리에 이끄셨습니다. 온라인 조장훈련과 조장코스타를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저를 향하신 그 시선에 참 많이 황송하면서도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나를 회복시키셔서 존귀한 자로 다시 일으켜 세워시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동역자로 여겨주심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에 묵묵히 서로를 받치고 서 있는 지체들을 허락하신 것은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부르심을 알고 있었지만 응답하지 않았고 나를 사용해달라고 하면서도 훈련은 거절하는 교만과 불순종의 시간들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고 하기보다 내 눈에 선한 것을 더 앞서 취해버리는 그런 믿음 없는 삶 속에서 메마른 진통을 겪으며 텅 빈 영혼과 마음과 육신이 소름끼치도록 싫어서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저를 찾아오신 주님은 저를 먹이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힘주시고 사랑磯鳴?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코스타는 저의 로뎀나무가 되었고 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는 처음과 마지막 이유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토록 나를 참아주시고 오래 기다려주신 주님과 절대 손을 놓치 않고 날마다 동행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학생 신앙운동의 나눔터에 미주 학생 사역의 현장 보고를 생생하게 나눌 내용이 제게는 없습니다. 이곳에 감히 부탁 받을 자격도 없는 제가 원고부탁을 받고 순종은 했지만 사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이렇게 저희 가족이 이 산골마을 샤이엔 와이오밍에 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 떼쓰며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캠퍼스 개척을 위해 보내주실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한가지 깨닫게 하시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주님을 닮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목마른 제 영혼에 한 바가지의 생수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저도 한 영혼에게 그분이 주신 한 바가지의 물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른 펌프에 힘을 실어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게 되는 그 시작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 한 영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 가처럼 버려진, 고집 부리 듯 깊이 박힌 돌덩이 가득한, 손길이 멈춰진 땅에 덤비듯 솟아있는 가지덤불 같은 이 황량한 땅, 한 영혼에게 다함이 없는 사랑과 자비로 인내하신 주님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영혼임이 참으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믿음 주신 일도 감사 드립니다. 한 영혼과 씨름하는 그 현장에 바로 주님이 오신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한 영혼의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10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

[이정실]코스타와 지도 읽기

이코스타 2005년 12월호

2005년 코스타에 참석한지 이미 반년이 지나가는 지금, 비록 그 당시의 뜨거웠던 체험의 열기는 식었을지 모르지만, 이 나눔을 통해 지난 몇 년 동안의 저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있어서 코스타를 통한 지속적인 훈련의 시간들이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1999년 유학생활을 시작한 후 Korean Bible Study를 만나 말씀 훈련을 받고 캠퍼스에서 전도하며 영혼들을 섬기던 중에, 제가 코스타를 알게 되고 그 사역에 미약하게나마 동참하게 된 것은 2002년 jjKOSTA 의 2지역 (현재 Southern California, Arizona, New Mexico) 코디 및 조장으로서 섬기면서부터 입니다. 마침 동부의 Maryland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가을부터는 서부의UCLA로 옮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지의 새로운 땅의 영혼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나아갈 때도 이러했으리라 상상하며, 미국의 지도를 펼쳐놓고 jjKOSTA 준비팀과 함께 전략을 세워갈 때만 해도 동부에서 본 서부는 시차도 세 시간이나 되는 까마득히 먼 동네였고, 저는 사막지대에 홀로 파병되는 비장한 각오의 군인 같았습니다. 그 해 여름에 코스타에서 만난 2지역의 조장들과 섬기던 조원들을 통해 지역 교회를 소개받았고, 새로운 캠퍼스의 지도를 펴놓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기도하던 중에, 그 교회를 통해서 캠퍼스를 향해 한 마음을 품은 동역자를 만나게 되어 개강과 동시에 매주 금요일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다시 2지역 코디로 섬기며 참석하게 된 2005년 코스타는 2002년 코스타를 통해 보냄 받은 UCLA 캠퍼스 사역의 첫 단계를 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년 동안 캠퍼스 사역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에 대해서 여기서 다 풀어 쓰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동부의 동역자들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가지고 캠퍼스를 개척하는 저를 홀로 두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적절하신 때에 신실하고 훈련된 동역자들을 보내주셨으며, 누구를 믿고 사는지 애매모호했던 어린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히 선포하게 하셨고, 말씀 공부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2003년과 2004년의 코스타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그 기간 동안 2지역 코디로서 제대로 섬기지도 못했지만, 인터넷 조장 훈련을 통해 알게 된 조장님들 중에 UCLA 가까이에 사시는 분들도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영혼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성경공부에 찾아왔고, 모이는 영혼들 사이에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저를 비롯한 말씀 인도자들은 하나님을 선장으로 모신 이 배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렴풋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배 안의 사공들 챙기고, 갑판 청소하고, 시설 정비하느라 바빴습니다. 배 안의 구조도면 읽는 것에 바빠서 큰 항해 지도를 읽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5년 코스타에도 또 참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들을 코스타에 갈 수 있게끔 그리고 그 예비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게끔 정리하셨습니다. 이미 코스타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던 동역자 부부와 한 형제님이 조장으로 자원하였고, 아직 크리스천 수양회 문화에 익숙지 않은 한 자매님도 저를 따라 가본다며 용기를 내어 따라 나섰습니다. 잠시 이 동네에 머물면서 캠퍼스 성경공부에 참여하신 타 지역 조장님과, 코스타 준비팀의 간사님도 가세하여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2005년 봄 학기 후반부는 코스타 참석과 섬김을 위한 준비와 중보의 시간들이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에 바쁘고 지쳐있었던 저에게 2005년 코스타 참석은 영적인 회복과 쉼에 갈급하여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코스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저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깊은 교제의 시간을 통해 양 어깨 위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위로 받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고, 2지역 조장들과 맡겨주신 조원들을 섬길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3년 만에 그리운 동역자들의 얼굴을 마주하여 볼 수 있다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코스타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제가 기대했던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히 만족 시키셨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코스타 주제, “흩어진 나그네 선택받은 백성”의 출처인 베드로 전서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철저한 순종을 이끌어내셨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잘 해야 한다는 교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던 제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시고 계시며, 모든 악한 것에서 떠나 더욱 정결하고 거룩한 그릇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든 죽든 저 없이도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이루어 질것인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저를 당신의 일에 써주시기 위해 부르셨고,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난을 묵상하게 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그러한 개인적인 만남과 교훈은 코스타 기간 중에 2지역 조장들과 우리 조 조원들의 체험을 통해 뚜렷이 확증되었습니다. 코디로서 또한 조장으로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책임져야 하고 인도해야 하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제가 낮아지고 조용해지고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인하여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엎드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은 저를 쓰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영혼들에 대한 온전한 섬김은 주님에 대한 섬김이 온전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다시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그렇게도 보고 싶던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의 손길과 위로를 넉넉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처럼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만나 격려하고 도전하고 또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각자의 가야 할 땅으로 흩어지는 순종의 장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동부의 동역자들과, UCLA 성경공부를 통해 형성된 동역자들 간에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서로 공유하게 하시는 가운데, 새로운 동역의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언니가 이제껏 저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고 계셨더군요.” 1년째 성경공부를 함께 해오던 자매님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던진 이 한마디에 저는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그것을 캠퍼스 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는데, 바로 그 세미나 강사님은 동부에서 저를 제자로 훈련시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로서 또 다른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과정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주님의 명령이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캠퍼스 사역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2005년 코스타를 통하여, 외로움과 분주함과 스트레스로 제가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잊어가고 있을 때, 저의 인생과 이 땅에서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지도를 다시 보게 하시고, 제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하시고, 어디로 가야 할지 초점을 다시 맞추게 하셨습니다. 2005년 코스타 이후 저의 개인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이제 3년간의 개척기를 지나서 성장의 단계에 접어든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도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꾸준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관계 중심의 전도를 통한 복음 선포 위주의 개척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말씀묵상 훈련을 통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는 제자로 세우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초점 맞추기는 이번 코스타 참석을 통하여 한 마음이 된 동역자들의 민감한 영성의 회복을 통해 영적 지도를 함께 읽어감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이 캠퍼스에 있을지 잘 모르고, 하나님께서 다시 어디로 보내실지 아직 알 수 없으며, 언제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실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동안 제가 어디에 머물던지 하나님은 저에게 거룩함과 겸손함과 순종함을 원하신다는 것과, 비록 흩어져 있지만 곳곳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한 마음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계속하여 세우시고 성령의 끈으로 연결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도전할 힘과 동역의 기쁨과 헌신의 결단을 이루는 일에, 코스타 집회와 준비과정과 이어지는 지원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저를 포함한 모든 코스탄들이 좋은 훈련의 도구로 쓰이기를 기대합니다.

[손호준]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하나님의 자녀에게 낯선 땅에서의 유학생활은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의 시간인 거 같습니다. 매일의 치열한 삶의 터전에서 지치고 상한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까지도, 어쩌면 평생 계속될 지도 모르는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심’ 이란 단어로 요약될 듯 합니다. 힘들고 바쁘다 보면 이 단어가 희미해 지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에 관계없이 항상 나를 향한 그 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부르심’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 같아요. 나를 향한 부르심이 어떠한지 깨닫는 것과 어떻게 그 부르심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에게 한결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Texas에서 이 곳 Virginia로 옮겨오는 가운데 있었던 작년 여름의 코스타는 새로운 곳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곳곳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제자의 삶’ 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도록 그 분께서는 코스타 기간 내내 역사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곧 내가 어떤 환경에 누구와 함께 있던지, 그 말씀에 내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이고, 이는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모습으로 표현됨을 그 분께서 다시 확인시키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보내신 캠퍼스의 현실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제가 처음 느꼈던 것은 당황스러움과 답답함 이었습니다. Texas의 제가 있던 곳은 전형적인 한국 대학원 유학생들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자연스레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로운 캠퍼스에서의 한국 대학원생 유학생들은 정말 소수였고, 함께 제자 삼는 비전을 품을 동역자는 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저를 향한 기대 (참 감사하지만..) 역시 ‘어, 이건 아닌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요.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부르심에 대한 회의’와 싸우는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바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의지할 그 무엇이나 누구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은 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셨고, ‘하나님.. 한 명만 주세요..’라는 절박함이 기도가 되어 지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 기도에 그 분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보내 주셔서 일단(?)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또 다른 ‘고민’ 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저와 살아온 문화나 현재의 고민들까지도 비슷한, 그래서 제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저와 ‘참 다르다’고 느낄 만한 지체들과 함께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여기 학부생들이고 어릴 때 이민 왔거나 미국에 온 지 최소한 몇년씩 된 지체들이었으며, 나이 차도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나는, 대부분이 자매들인 지체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한국에서 대학시절까지 보내고 미국 온 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된 대학원 유학생 형제인 저에게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임은 일단 은혜로 시작되었고 꾸준히 지속되는데, 저와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 속의 영적 갈증들을 파악하는 것은 참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나와 다르더라도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영혼이란 점은 나랑 똑같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의 영적 갈증은 무엇일까. 이런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참 오랫동안 씨름 했었습니다. 여러 동역자들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여러 접근법들도 시도하면서 나름대로는 몸부림을 쳤지요. 그러는 가운데 제 속에서 또 계속되는 영적 전쟁은 ‘거봐. 넌 여기에 적합지 않다니깐! 어떻게 저 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겠어?’하는 부르심에 대한 도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증가하는 박사 공부의 부담들도 저를 압박했지요. 이렇게 한 학기 정도를 제 안과 밖에서 씨름하면서 보냈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제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깨닫게 된 진리는 새삼스럽게도 ‘본질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나 이들 역시 똑같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죄인’ 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영적 본질이었습니다. 환경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지만,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죄인들이고, 그래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2:2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본질’ 은 저나 이들이나 동일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요한복음을 한장씩 보면서 집중하려고 몸부림쳤던 영적 부담감은 요한이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그 말씀 –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사람의 지혜’에 대한 유혹들도 참 집요(?)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5)’ 이 말씀은 ‘진짜’였습니다! 영적 본질에의 집중은 곧 영혼에 대한 담대함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한명 한명의 마음 깊숙한 상처와 눈물과 갈증들을 서서히 보게끔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이들을 향한 당신의 타는 듯한 사랑이 어떠한지, 한명 한명이 그분에게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 조금씩 느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이 한 명 한 명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타는 듯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질 때마다, 그런데 내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과 행동’ 들로 표현되는 죄성을 여전히 보게 되고 이런 죄와 연약함 속에 있는 ‘그 때에’ 이미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 값없이 누리도록 주셨음을 깨달을 때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이었던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한 응답 역시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사랑하면 되는구나’하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가 사실 그리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이것은 곧 적어도 4가지 –시간, 물질, 관심, 그리고 기도- 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자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 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내게 있는 것 –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과 관심과 기도로 사랑할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가 섬긴다고 했던) 이들을 통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고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만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제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거 같습니다. 시험 기간에 지쳐서 힘들어 할 때, 저희 그룹 한 지체가 여기서 차로 2시간 가량 떨어진 Washington D.C. 에서 한국 음식을 사서 제가 있는 곳 까지 직접 운전해 와서 힘내라면서 내미는 모습 속에서 저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서 동역하는 귀한 지체들의 섬김과 기도가 정말 큰 감사제목입니다. 제가 속한 KBS 라는 공동체는 지리적으로 Washington D.C. 를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 매번 D.C. 까지 오가며 교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한 없던 모임을 새로 시작하는 거라서 섬기는 저부터 쉽게 지치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정말 ‘아무도 없다’ 는 느낌이 가장 힘든 시험 중에 하나인데, 늘 기도와 격려로 함께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매주 기도제목을 업데이트 해 주는 지체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저희 그룹 지체들 이름을 매주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분들, 가끔씩 D.C.를 갈 때마다 저와 저희 그룹 지체들을 가족같이 반갑게 챙겨주고 섬기는 분들까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모두가 한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임을 너무나 귀한 동역자들로부터 참 많이 도전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이 곳으로, 제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들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제자의 삶’ 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삶은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 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신 현장에서 주신 사람들 속에서 ‘제자의 삶’ 으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제자 삼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어떻게 내가 순종할 것인가?’라는 말과 같은 뜻임을 이 곳에서 더 깊이 느낍니다. 매일 말씀 앞에 나를 죽이고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제자됨임을.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에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보내시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날마다 죽는 삶이라는 것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3:16 )


[우종학] 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이코스타 2001년 8월호

내가 본 한국 교회, 내가 본 코스타


To generalize is to be an idiot. – William Blake


1.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


어떤 분께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을때, 그것이 윤리의 문제이든, 문화의 문제이든, 가치의 문제이든, 그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목소리를 낼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cf. 김연종 ‘흔들리는 한국 교회’). 나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반기독교적 흐름을 상대할 기독교적 파워가 없다는 게임의 논리에서도 그렇지만 ‘아군’이라고 분류하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이 가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잘 모른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관측적 사실은 한국 교회의 성장 또는 그 규모와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 사이에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안점식, ‘한국 교회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 이러한 현상은 교회 성장주의, 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주의(박성호, ‘한국 교회 그렇다면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등과 감성적, 개인적 성향에 맞춘 교회의 목회 전략, 사회에 대한 교회의 침묵(권오승, ‘세상으로 복음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등, 쉽게 관측되는 요인들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요인들 위에, 혹은 이런 요인들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며, 위에서 지적된 요인들을 극복하는 교회 개혁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현장의 기독교인’의 부재이다. 반문화(counter-culture)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경향이 많은 한국 교회 안에 짙게 깔려 있음으로 인해 교회의 안과 밖을 철저히 나누고 교회의 벽을 높이 쌓는 이원론적 경향이 팽배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장의 기독교인’들을 사라지게 만든 근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cf. 정진호, ‘부흥을 가로막는 장벽들, 이원론의 문제를 진단한다-(2)’). 1920년대 미국에서 세속 문화에 대한 대항으로 일어났던 근본주의운동의 경향이 복음주의권 안에도 깊이 들어와 미국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은 90년대의 미국 복음주의권에서도 넓게 논의되었던 이슈 중 하나였다 (Mark Noll, ‘The Scandal of the Evengelical Mind’).


나는 ‘신병 교육대와 전투지’의 비유가 ‘왜 현장에 그리스도인이 없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강제 징집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들의 삶에서 치열하게 시작될 영적 (지적·감성적·의지적)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교회는 그들을 ‘신병 훈련’으로 돕는다.


이제 신병 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가끔씩 (한 주에 한 번이든 세 번이든) 후방으로 돌아와 쉼을 얻기도 하고 사기의 재충전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들은 전방, 전투지에서 그들의 대부분의 삶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기본적인 신병 훈련 외에 실전에서 사용될 전투 훈련을 받은 적이 없이 홀로 전투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정과 미움, 하나님의 질서를 반하는 어그러짐으로 물들어 있는 직장, 인간 관계, 사회 구조, 문화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공격은 그들의 삶이, 우리의 일이 예배가 되지 못하게 한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가는 것만해도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들이 배치될 전선의 부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보다 먼저 전선에 들어와 실전을 통해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각 분야의 그리스도인 전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게 전선의 상황을 알려 주고 공격 목표를 주지해 주며 전술을 가르치고 함께 작전을 펼치는 소대장, 병장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제한된 판단으로는 현장에 대한 부르심에 뜨겁게 헌신한 소수의 정예들은 고전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전사들은 혼자서 살아남는 일에 급급하여 숨어 있으며 그나마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전사들은 도로 신병 교육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상 일에는 흥미를 잃은 반면에(김연종 ‘예수 이름으로 가진 병’) 신병을 모으고 교육하는 일이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채워 줄 수 있으니까. 전선의 병력이 정예 부대여야 하고 다수여야 하는데, 내 눈에는 몸집 큰 신병 교육대만 보인다고 하면 과언일까? 신교대는 커진 몸집을 굴리느라 더 많은 교관을 필요로 하고 그러다 보면 전선으로 나오는 전사들은 당연히 적어진다.


나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커지는 만큼 전선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병 교육대만 커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교대인가? 교회가 커지는데 사회가 그대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사회 속의 그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를 되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일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고 각양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주님의 가르침 대로 하나님의 질서 대로 살고 있는데도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 가는 우를 범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현재의 내 좁은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만은 않는다.


나는 또한 현장의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으로 교회의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목회 전문가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자랄 수 있도록 도우며 교회 공동체와 예배를 통해 끊임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 재충전 시켜주는 일이며 이것은 타락된 창조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투는 실전 경험을 통해 전선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신교대에서 해 줄 수 있는 훈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현장의 문제들이 교회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지의 그리스도인들의 전투 경험이 신병교육 훈련의 내용에 보다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문제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다루고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캠퍼스 선교 단체에서 학부 시절 뜨겁게 헌신하던 리더들이 졸업 이후에는 대형 교회의 대예배 좌석에 숨어 버리는 일도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영혼의 성장을 돕던 리더십이 부정과 악이 팽배한 직장에서 통전적인(wholistic)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전사들을 소총으로 무장시켜 개인적으로 전선에 내보내는 무책임함을 넘어서 이들이 현장의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도록 구조적으로 도우며 전선의 전력 증가를 위해 신교대에 투자하는 이상의 노력과 자금을 현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플과 교목실을 두는 정도로 구색을 맞추는, 이름 뿐인 기독교 대학이 아니라 학생들이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돕는 커리큘럼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 생명의료 윤리, 개별 대중문화 등, 사회와 문화의 문제들을 사안 별로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낳아 교회 교육에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연구 단체나 프로젝트 등에 지원하는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더라도,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한 사역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 봉사의 순번제 같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상황에 따라 헌신된 성도들 중에서 20~50%는 2-3년을 주기로 주일 학교나 성가대등 교회 봉사를 쉬게 하고, 대신 직업과 현장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교회 ‘운영’에 지장이 있을 거라는 우려가 있겠지만 이들이 2-3년 후에 다시 교회 섬김으로 돌아올 때는 교회 자체가 새로운 공급을 맛 볼 것이며 또한 끊임없이 현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보냄으로써 전선은 점진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수요 예배 가지 않는 대신에, 주일 학교 봉사하지 않는 대신에 같은 시간과 노력으로 직장에서의 삶과 신앙이 부딪히는 문제, 청소년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에 매달려 기도하고, 배우고, 연구하고, 나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목회 전문 목회자가 현장의 전문가들과 함께 팀사역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들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 생활(?)이 믿음의 잣대가 되는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고는 세상은 그리스도 없음의 축복(?)과 축제를 계속 만끽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특별한 한계 상황이 아닌 이상, 신교대가 신병 교육을 제쳐두고 전투지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은 전투 부대가 세워지는 일이다.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해야 한다. 물론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속단하건대)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많은 경우, 또 다시 신병 교육대의 역할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간과한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전투지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워 하지 않는 복으므이 능력이 각 현장에서 면면히 드러나도록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져야 한다. 각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내게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각 현장의 상황에 맞게 연합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원론 외에는. 그리고 나 자신도 나의 현장의 문제에서 답을 찾는 묵묵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코스타를 이런 시각으로 본다. 지역 교회가 할 수 없는 일, 신병 교육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 현장의 그리스도인들을 키우는 일, 이것을 코스타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통하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은 ‘제자를 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까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다시 이루는 데까지, 그의 나라가 타락된 온 창조계에서 회복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정진호, ‘두 집 내기’).


2. 내가 보는 코스타 (미주 코스타)


최근의 통계를 볼 때, 코스타의 참석자 중 매년 70% 정도가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이다.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코스타를 접하고 간다는 면에서 코스타를 매우 효과적인 사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면에 한 번 온 사람들 중 70%가 다시 코스타에 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되는 셈이다. 이 통계 자료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평가 자료나 의견(feedback)들을 참조하여 이것을 해석해 보면 코스타는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 혹은 ‘매 년 똑 같은 수양회’ 라는 얘기로도 볼 수 있다.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결론을 이 자체만으로는 내릴 수 없다. 당연히 코스타 수양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준하여 이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결단케 하는 것이라면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라는 것이 부정적 평가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두 번 영접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화된 유학생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립하게 하는 것이라면 약 4박5일의 수양회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이 얼마나 확립될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보아야 한다. 코스타의 목표가 유학생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 연구와 신앙 생활을 격려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의 현장에서 선교적인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이라면 일주일의 수양회를 통해서 이 목표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평가해야만 한다. 사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모두는 코스타의 사명이자 핵심 정신(core value)이다 (미주코스타, ‘코스타란?’).


독자들 스스로 평가를 내리겠지만, 복음화의 목표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수양회를 통해서 나머지 목표들을 성취한다는 것은 턱도 없다. 일주일 내내 ‘여러분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외쳐대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성보다는 지성, 설교보다는 강의에 촛점을 두고 교육을 위주로 하는 수양회로 완전 탈바꿈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수양회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이다. 나는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라는 복음주의의 기본 입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코스타가 복음전도 집회만을 하는 수양회라면 나는 한 번 이상 가지는 않겠다. 내가 복음을 모르는 영혼들을 섬기겠다는 결정을 하여 섬기는 이로 가지 않는 이상. 나는 수양회에 2번 이상 참석하는 30%의 사람들중에는 이렇게 섬김의 마음으로 와서 헌신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섬김을 통해서 배우는 제자도는 매우 귀중한 배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 번 이상 오지 않는 수양회’가 된 것은 한국 교회의 신병 교육대적인 성격이 최근의 코스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복음 전도하는 것 이외에는 별 내용이 없는, 교회에서도 들을 수 있는 복음의 진수를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다시 듣는 것 이외에는, 어떤 참석자들의 보다 신랄한 표현을 빌리면, ‘화끈한 영적 샤워’로 끝나 버리는, 혹은 어느 정도 현장의 문제를 담긴 하지만 한 번 수양회 참석으로도 다 소화해 낼 수 있는 내용의 수양회… 코스타의 시작부터 세워졌던 목표들은 좋지만 지금 코스타의 모습은 처음의 그 목표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3.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양회


복음화된 대학원생 유학생들을 돕는 가장 중요한 안건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전공 속에서 혹은 전공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라는 안건이고 둘째는 “캠퍼스와 지역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며 섬길 것일까” 라는 안건이다. 코스타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병행하여 이 두 가지 실제적인 안건을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오전은 강의 중심으로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다루고 저녁은 설교 중심으로 복음과 좁은 의미의 제자도를 다룰 수 있다. 오후의 세미나 트랙의 경우도 ‘구도자의 트랙’, ‘제자도의 트랙’, 그리고 ‘전공과 현장의 트랙’으로 분류 상 세 단계로 나누고 각 트랙에서도 내용의 깊이에 따라 레벨화하는 등 커리큘럼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강사에 따라 내용이 바뀌기 보다는 ‘체계화된 내용에 따라 강사를 선정해야’ 한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란 말이 나의 전공영역에서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생각하도록 돕고 답을 찾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 사역을 이해하고 유학생들의 상황·현실에 따라 코스타 전체 프로그램 구조와 세미나의 커리큘럼을 짜기 위한 연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연구팀을 구성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커리큘럼이 체계화된다고 가정하고 단순화된 예를 들어 보면, (편의상의 구분에 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복음을 모른던 학생이 첫 해에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며, 둘째 해에는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 셋째 해 이후부터는 자기의 전공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목표로 코스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학생이라면 최소 두 번 이상 참석하여, 한 번은 제자로서의 헌신의 문제를, 그리고 두번째 해부터는 전공과 직업의 문제를 고민하고 돌아갈 수 있다. 또한 보다 헌신된 학생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전공과 현장의 문제들을 목표로 하여 동역자들을 만나고 현장의 삶을 함께 준비하는 코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두번째로, 강사로부터 학생으로 주입되는 일방통행(one-way)의 설교·강의 흐름에서 학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상호적(interactive)인 흐름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부생들과 달리 대학원생들은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발표하고 그룹 토론에도 참여한다.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학생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직업이다. 즉, 대학원생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에 맞는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들을 학부생들처럼 일방적으로 앉혀 놓고 듣게 하는 것은 코스타에서 다뤄지는 내용과 참여자들의 질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설교를 제외하고 전체 강의를 포함한 모든 강의에서 학생들의 질문과 토의 시간을 10-30분 정도 배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관중의 열기나 웃음 소리만으로, 혹은 구매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강의 테잎의 판매량으로 강의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되새길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채 쉴새 없이 쏟아붓는 것은 교육적 효과면에서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장의 문제를 다룰 때 각 현장의 문제를 어느 정도 겪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과 고민은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이런 고민들이 던져질 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원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의 문제들, 각론에 대한 해답을 끌어낼 수 있으며 최소한 학생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학생 때부터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누고 함께 찾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막상 현장에 나갔을 때, 그 고민이 지속되고 연합이 지속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넓어져야 한다.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전공에 속한, 혹은 전공을 통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결과물들을 발표하고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공과 관련된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를 연구한 논문 혹은 포스터 발표라든가, 전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팀 프로젝트라든가, 예술 작품이라든가, 문화 현상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는 보고서라든가, 각 전공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적인 참여가 가능하리라 본다. 기독교적 색깔이 전혀 없더라도, 학문의 논리에 충실한 결과물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참여를 격려하는 것이 학생들을 현장의 그리스도인으로 구체적으로 준비 시키는 전투 훈련이 아닐까.


셋째로, 보다 연구하는 코스타가 되어야 한다. “아니 학업에 지친 몸을 좀 쉬러 왔는데 기독교 모임에서까지 왠 골치 아픈 소리요” 라고 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전공마다 다르겠지만, 대학원생의 삶의 가장 기본은 연구하는 자세인데 왜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가” 라고 되묻고 싶다. 조용한 방청객으로 남아있기 보다, 밤을 새우는 토론과 나눔으로 현장의 문제를 건드리는 초기의 코스타 분위기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대학원생 모임은 자기 비판을 통한 자정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런데 코스타에 대해서는 건설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뜨거워 할 말을 잊은 것일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 운동은 아니다’ 라고 다 떠난 것일까? 나는 각각 자기의 전투지에서 고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코스타가 전도 집회만이 아니고 또한 선교동원 운동만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유학생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강사와 참여자, 그리고 내용의 폭을 봤을 때 아직 지엽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코스타가 미국 유학생이란 커다란 사역 대상을 폭 넓게 품기 위해서는, 캠퍼스선교 운동과 선교동원 운동을 넘어서는 도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 년에 걸친 체계적인 연구와 모델링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대할수 없는 일이다. 미주 내에 캠퍼스와 지역 교회의 사역을 파악하려고 막 시작되고 있는 코스타의 HOC 프로젝트는 이러한 노력의 아주 좋은 예이다. 뿐만 아니라 코스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위원 혹은 연구 간사와 같은 장치도 꼭 필요하리라 본다.


수련회를 평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진행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체계적인 평가자료를 개발하여 참석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 자료를 토대로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불어 이 자료를 공개하여, 코스타라는 이름보다는 코스타에서 담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양회 참석을 유도하고 코스타의 현재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4. 맺으며


나는 코스타를 잘 모르면서 편파적인 얘기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다들 아는 얘기를 장황하게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동료 대학원생들과 함께 고민했던 몇 년의 시간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던, 삶과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한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에 대해 그저 스스럼 없이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를 중요하게 보는 한 사람의 대학원생으로서의 관찰과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관찰과 생각들은 많은 일반화와, 때로는 기도보다 앞서는 운동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가 어떤 ‘Monument’가 아니라 하나의 ‘Movement’라면, 나는 이 운동을 현재의 나의 삶에 주요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가르침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