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OSTA: 이렇게 좌담회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략히 자신의 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김동록: 저는 김동록입니다. 코스타와 관계를 맺게 된 지는 약 6년째인데 코스타에서 서북미지역 멘토로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씨애틀 근교에 살면서 조그만한 영상처리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윤여재: 안녕하세요. 저는 윤여재라고 합니다. 코스타는 2003년에서부터 참석하고 있습니다. 현재 데이튼, 오하이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인석: 안녕하세요, 저는 최인석 입니다. 코스타는 2006년부터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동부 DC부근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반갑습니다.
eKOSTA: 일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본인이나 혹은 함께 교제하시는 분들이,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보통 어떤 모습으로 연결하시나요?
윤여재: 지난 성경공부의 도입부분에서 세가지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첫째 하늘은 우리가 땅의 딛고 있는 이 세상이며,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이야기하면서 마치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곳처럼 묘사하면서, 물론 교재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물리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마치 먼 하늘나라 저 편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것 같고, 저 또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기 보다는 눈과 귀로 쉽게 접하게 되는 세상의 삶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동록: 사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땅이 아니라 통치권이라는 말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현장에 함께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통치권이라는 말 자체가 추상적이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영적인 영역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내 하루 생활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 (QT), 기도, 또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내가 결정해야할 것들 등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다는 것들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실때, 이런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영역을 넘어선 어떤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라는 말 자체가 집단이라는 성격이 들어가 있는 단어이니까요. 어떻게 보자면 통치권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하기보다는 “통치하시는 집단적 영역”이라는 말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고 했을때 같은 그룹에서 당황해 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아기자기한 기도는 드리지 말아야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있었구요.
최인석: 저는 요즘에 마태복음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 지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에 초점을 맞추는 세미나가 여러번 있어서 대부분 현재적 의미의 천국도 많이 고려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제가 변화되면서 느꼈던 사소한 일에서의 충만함, 그리고 왠지모를 자유감 등이 지상에서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의 속성 혹은 맛이라면, 그러한 경험을 통해 천국에 대한 모습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되고 또 그것을 사모하게 된다고 자주 나눕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면, 확장되어 나갈 천국에 대한 모습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eKOSTA: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는 숨겨져 있다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 즉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데요, 생각나시는 비유라든지, 혹은 성경 내용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더 와 닿았던 내용이 있으신가요?
윤여재: 오늘 아침 저의 큐티 본문이 요한복음 18장 후반부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빌라도의 관정까지 끌여오게 되고,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저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의 한 면을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즉 하나님의 뜻, 계획하심 아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내가 왕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아침 말씀에서 저는 다시 한번 내가 섬기는 왕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김동록: 비유는 아니지만, 최근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 광야에서 사단이 돌더러 떡이 되게하라고 유혹한 그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보니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인해 기대되는 정치적 인기를 완전히 묵사발로 만드시더군요. 이로 인해 오히려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 버렸다고 나오고요. 또 이 일 이후로 단호하게 십자가의 길로 향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가 사회경제적 정치적 성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단호하게 보이시면서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택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 인생의 방향성이 다시한번 크게 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봅니다. 실패한 듯 보이는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중심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심으로 인해 그분이 그렇게 원하고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또 하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만드신 제자공동체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모임이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실 씨를 뿌리신 것입니다.
최인석: 저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보물이 숨겨진 밭에 대한 비유가 와 닿았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귀함을 알 수 없기에,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eKOSTA: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미 드러나 있지만, 또한 숨겨져 있다는 이러한 속성이 본인의 삶의 방식이나 사역에 어떤 영향을 주시나요? 예가 있으시면 함께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윤여재: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성경에서는 권속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도전을 감당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가 저와 제 주위에 있고 임하였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이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격려를 주고받으며, 함께 영원한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중요한 것 같고 교회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공동체와 교회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속에서 때론 상처를 받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현재적 삶 속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한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저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김동록: 제가 언급한 현재적 소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강의를 하고 나서도 너무 현재적인 면만 강조를 했나 싶은 의아심과 함께 신앙의 열린 미래성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 하는 궁금증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히브리서를 공부하다가 우리가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고, 또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고 있다는 관점은 저 자신의 궁금점을 많이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삶이라는 의미도 깨닫고 나니 더욱 심각해지더군요. 제자들의 공동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에 대한 의미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최인석: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 때문에 전도를 할 때에 천국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때론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곤 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eKOSTA: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 나라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으시고 비밀스럽게, 다른 표현으로는 신비롭게 (mysteriously)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을까요? 그 의도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윤여재: 원죄 이후에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예수 이전에는 아주 제한되었고, 예수님이 오심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임하고 있으며 오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을 나타내지만, 그 경험하지 못하였던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그렇고 밭에 숨겨진 보물이 그러한 예인 것 같습니다.
김동록: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또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어느 한 두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직접 하나님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실 경우 오히려 명문화된 하나님 나라의 설명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기보다는 제한해 버리고, 또한 사람들이 율법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최인석: 김동록 멘토님과 윤여재 형제님께서 잘 말씀해주신 것과 같이 우리의 인식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도 이유가 될 것 같구요. 또한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그 속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청중에게 익숙한 삶의 특정 부분에서 얻을 수 있는 직관력과 연결시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고수의 방법 아닌가 합니다.
eKOSTA: 이제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이미 임하였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조금 옮겨가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말씀, 특히 산상수훈과 같은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윤리가 발견되는데요. 그런 가르침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을 또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을까요?
윤여재: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하나 하나 따라가기가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그것에 따라 가려고 하면 때론 억울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즉, 내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속옷까지 주라, 십리까지 가라, 육체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절단해 버리는 것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말씀이 절망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이 진리임을 알고 계속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길을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심령이 가난하게 될 것이고 박해를 받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이 복있다고 말씀하시며 천국이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청량제와 같이 제 마음을 확 씻겨 내립니다.
김동록: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 고차원적인 것이라서 (왼뺨까지 내어준다든지, 겉옷까지 준다든지, 원수를 용서한다든지) 실천하기가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보다는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것은 혼자서 하기는 힘이 드는데, 같이하면 좀 나을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철저한 이해와 믿음이 있을때 적용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공동체에서 같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면 성령님께서 아주 큰 능력으로 그 공동체에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인석: 이런 어려움이 있는 데에는 지금 죄가 들어오고 왜곡된 상황에서 우리의 죄성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천국에서의 모습이 목표라고 한다면, 우리가 삶 속에서 변화를 받아서 회복되어져 가는 경험을 하는 것도 천국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천국의 확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천국에 대한 경험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걸림돌이 되는 부분들을 쳐서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고, 또 그와 함께 내 의가 높아지고 자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체화해나가는 과정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등을 통해서 또한 더 많이 변화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eKOSTA: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강조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킨다’ 혹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라는 표현을 주위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데, 이 표현을 사용하실 때 혹은 들으실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떠올리시나요?
최인석: 복음이 더 많이 전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한 천국을 알게 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한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들이 이 지상에서도 부분이나마 이루어지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확장이 아닐까요?
윤여재: 저는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부분과 사도행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저희들에게 명령하신 것이지요. “가라”, “이르러”, ‘제자를 삼고 증인이 되라’하신 말씀에 힘입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 눌리고 억눌린 자의 고난에 함께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구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성령 안에서 온전하게 거듭남이 있어야 겠지요. 한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함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깐요.
김동록: 질적 양적 팽창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가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질적인 변화를 통해 양적인 확장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 개인의 이해가 깊어지고 삶이 깊어질 때, 즉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 주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누룩의 비유가 그렇다고 할까요. 질적 변화가 있을 때 전염성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eKOSTA: 이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의 관계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보겠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현재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삶을 살려고 하는 모습일텐데요. 지난해 주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와 연결시켜볼 때에, 이러한 모습은 세상의 삶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날까요?
최인석: 저는 공부하는 학생이다 보니, 다른 문화와 믿음 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또래 학생들과 그 동기에서 다른 부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신의 성공과 다시 말해 부와 명예를 위해서 제가 보기에는 맹목적으로 보일 정도로 치닫는 학생들을 보게 되면 저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저도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생각이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갈수록 제게 주어진 상황에서 부끄럽지 않게 성실히 해야 하고, 이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윤여재: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기독인과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비기독인의 삶의 차이는 비기독인이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나야한다고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니깐요. 세상이 나를 기이히 여기지 않고 잘 섞여 살아간다면 그것을 이상히 여기라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의 삶이 세상과 아무런 마찰없이 잘 지낼 때에 더욱 두렵습니다.
김동록: 우리가 전공이나 직장을 정할때나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순수한 학문적인 또는 인문적인 관심만으로 정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위대한 학자”, 성실하고 성공적인 사회인이 되기를 꿈꾸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궁극적인 뜻이었다면 자신의 삶과 미래를 꿈꿀때 생각하는 내용이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허용해 주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 마음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려는 태도라면 성공적인 사회인을 목표로 하지는 않겠지요. 또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는분들도 많은데 설사 실패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믿고 나갈 소망 안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소위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낮은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닮아가는 것이 힘이 듭니다.
eKOSTA: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균형이 깨어질 때에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나요? 혹시 생각나시는 예가 있으시면 함께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동록: 미래적으로 극단인 예인 것 같은데,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서 다들 느끼셨겠지만, 교인들이 너무 착실하다는 것입니다. 착실하다 못해 전혀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또는 전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섬뜩한 것은 교인들과 제 모습에서 별 차이를 못느끼고 답답해 하던 저의 모습입니다.
또 현재적으로의 극단이라면 마치 고지론이라고 알려져 왔던 그런 신앙의 태도가 생각이 나는군요.
윤여재: 하나님 나라는 정말 특이한 것 같아요. 예수님도 처음에 말씀하실 때, 천국이 가까와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꼭 미래에 올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한 긴장감은 좋은, 유익한 긴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긴장감이 깨어질 때는 좀 극단적인 성향이 드러나지 않는가 싶습니다. 예를 드러,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게 되면 예수님 시대의 열심당원들과 초기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는 봐와 같이 이 땅에서 물리적인 무엇을 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구요. 지금 우리에게도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함으로써 우리 안에 기복적인 성향을 강화시키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여 그쪽으로 치달으면 우리가 많은 들어 왔던 극단적인 이단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가 싶습니다. 즉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벗어나기 쉬움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 둘의 긴장이 중요하지 않는 가 생각합니다.
최인석: 균형이 깨어졌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묘사나 속성에 대한 설명 혹은 상상등이 치우쳤다고 발전시키신 형제님들의 말씀에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처음 입교식을 할 때였습니다. 전도사님께 솔직히 천국에 대해서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전도사님께서는 온화하게 웃으시면서 “천국은 너~~~무 좋은 곳이예요”라는 말씀만 반복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의미로서의 천국보다 다가올 천국에 대한 것만 너무 강조하게 되면, 이렇게 공감하기 힘든 천국의 이미지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KOSTA: 2008년 코스타의 주제가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이번 코스타의 주제를 통해 기대하시는 바를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윤여재: 저는 개인적으로 올해의 코스타 주제를 너무 좋아합니다. “이 시대에 바른 길로” – 이 시대, 이 세대의 가치관을 휘어잡고 있는 물질주의적, 자기 중심적, 이기적 세계관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화평의 세계관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푯대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원하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코스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모습이, 사도바울이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이야기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김동록: 2007년도 주제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였었는데, 어느정도 부정에 의한 진리찾기라면, 올해는 더 발전해서, 이 시대에 가야할 진리의 길이 저희들에게 보여지기를 기대합니다. 처음에는 주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서 약간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핵심개념이 참석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서 좋은 신앙갖기를 넘어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인석: 저도 개인적으로 이번 코스타의 주제문구가 참 마음에 듭니다. 작년에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라는 주제로 이 세대의 가치과 세계관 등과 성경적인 가치와 세계관에 대한 구분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과 생각등을 남겼다면, 올해는 그렇다면 “바른 길”은 무엇인지 조금더 나아간 적용을 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2008년 코스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입니다.
이 시대에 바른길로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The Way to Live Thy Kingdom Come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개역개정판)
이 세대는 세계화, 포스트 모더니즘, 뉴에이지 등의 영향 아래서 절대적인 기준점을 잃어버린 채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극단적으로 상대화시킨 이 세상은 개인의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지만, 우리는 오히려 불안과 욕망의 노예로 우리 자신들을 전락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물신주의는 돈으로 모든 가치를 집결시켜 마치 바벨탑을 쌓았던 시대처럼 모든 사람들을 그 영향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이제 돈과 물질은 삶의 안정을 약속하는 신앙이 되어버렸다. 돈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여져서 그 자체가 선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은 쉽게 정당화되었다. 조국의 현실도,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은 안정된 직장을 갖으려는 방편으로 전락해 버렸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피교육자의 인격도, 인간, 사회, 자연, 역사에 대한 책임도,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도, 그에 따른 삶의 의미도,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돈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로운 삶을 쟁취하고 지키는 것이 ‘그 길(The Way to Live)’이 되어버렸다. 성공과 생존을 위한 모든 노력이 정당화되고 칭송되었고, 현실을 극복해내는 이상과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어 버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고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참된 길을 가지 못하는 세대가 지금 이 세대가 아닐까?
이러한 세속화와는 반대로, 이원론(dualism)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기독교를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로 변질시켜 버리는 일들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종교활동을 제외한 세상 속에서의 모든 활동을 ‘속된 것’으로 규정하며 세상과 분리된 종교활동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 안에 발견되는 또 다른 극단의 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이원론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현실의 도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러한 삶의 자세를 이용하기도 한다. 경건함과 거룩함을 내세우며 종교생활에 매달리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그 길’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에 실패하고 그저 격리와 회피의 삶을 사는 비복음적 삶의 자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로부터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세대는 목말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세대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면 갈수록 진정한 ‘그 길’을 갈망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세계적인 추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영혼 내부의 외침이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현실은 목말라 하는 이 세대가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를 기대했던 기독교로부터 받은 ‘배신감’의 표현이다. 목마른 이 세대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대부분 기독교인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현실을 등지고 예배당 안에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구축하느라 바쁜 나머지 예배당 밖에서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세상의 모습을 본받아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성공과 정복의 이념으로 삶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세속화와 이원론, 이 두 가지 극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습으로서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보다 더 효과적으로 세상의 길을 추구하는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돌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시고 또 ‘그 길’을 살아내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삶이었다. 그 안에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통합이 있었고 그의 삶에는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의 통합이 있었다. 오직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다.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는 생명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새로움 패러다임이었다. 세속화나 세상과의 분리가 아닌, 초월적 가치와 치열한 삶을 통합시키는 가치였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또 그런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KOSTA 2008을 통하여 바르게 삶을 살아갈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음을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아니고는 ‘그 길’을 추구할 기초가 우리에게 없음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그 성령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함을 보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서 이 땅에 살면서도 영원을 추구하고, 초월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땅의 삶에 충실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그리고 세상이 목말라 하는 ‘그 길’임을 깨닫기 원한다. 이 세상과 대적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는 눈이 열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자 이 세상을 거슬러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름과 같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 길’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이러한하나님나라의현재성과미래성은때로는모순처럼느껴지기도합니다. 그래서오랜시간동안많은신학자들이이두가지중에하나만을인정하였습니다. Albert Schweitzer, Johannes Weiss, Rudolph Bultmann, Norman Perrin 등과같은사람은하나님나라가비록매우임박했다고는하지만전적으로미래적인관점에서쓰여졌다고주장하였고, 반대로 C. H. Dodd 등의신학자는하나님의나라가예수의가르침과사역가운데에서완전히드러났다고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최근들어서이두가지의개념이서로모순되지않고통합될수있다는견해를발전시키려는노력이계속되고있습니다. 간단하게는‘already, but not yet’이라는문구로서이두가지의긴장을표현하려는노력이바로그것인데, 이러한진영에는 Joachim Jeremias, Oscar Cullmann, H. N. Ridderbos, G. E. Ladd 등의학자들이있습니다. 특히 Cullmann의경우는노르망디상륙작전을예로들면서, 예수의초림을 D-Day, 재림을 V-Day로비유합니다. 즉예수의초림은노르망디상륙작전이그러했듯이결과적으로이미전쟁에서승리를가져온사건이고, 예수의재림은전쟁을비로소결정짓는종전선포와같이하나님의나라가완전하게도래하는사건이라고비교적명쾌하게설명합니다. 그러나이러한설명은예수의초림이승리자체가아닌가능성정도로남는다는한계를가지고있고, 그러한이유로 Ridderbos나 Ladd 같은학자는하나님나라의현재성과미래성의관계가아주체계적으로설명될수는없고역동적으로발견되어야함을주장하기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