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아바의 지팡이

코스탄 현장 이야기


아바의 지팡이


한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지로 떠날 때까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은 첩첩이 싸인 고개를 넘는 산행이며, 한편으로는 가로 막힌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기적의 체험이기도 하다. 부르신 이가 친히 인도하신다는 믿음 없이는 견디기 힘든 고비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하기에, 어려운 산행을 위해 반드시 든든한 지팡이가 필요하듯이, 그 지팡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지팡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1)


영혼을 사랑하는 훈련을 통하여 새벽에 매달려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은 광활한 만주 벌판이었다. 날마다 중국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게 하셨고, 만주에 지어진다는 대학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도가 달아 올랐다. 그러나, 중국… 그곳은 여전히 나에게는 오르기가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태산처럼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주위 환경, 전혀 믿지 않는 가족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내가 중국으로 갈수 있을 만한 조건들이 없는 것만 같았다.


새벽 제단을 통하여 중국을 향한 부르심의 음성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내가 넘어야할 고개로 처음 떠오른 것은 아내였다. 그 무렵 아내는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로, 대학의 강사로 활약하며 한창 전문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추구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 시키고 무작정 중국으로 떠나자고 말을 꺼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에 반 농담 삼아 중국에서 한번 살아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속셈을 감추고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떠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무슨 낌새라도 맡았는지 펄쩍 뛰면서 아예 말도 꺼내지 못 하도록 가로 막는 그녀의 태도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말문이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1993년 2월 아내는 서울의 세종 문화회관에서 기대 이상의 성황리에 파이프 오르간 독주회를 마쳤다. 어쩌면 조만간 자신의 전공인 오르간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할 그녀를 위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은 배려이셨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아내는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전공인 오르간을 최고조로 만끽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아내의 심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최소한 오르간 독주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채 기도로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독주회가 끝나고 서울서 다시 포항으로 내려온 후 아내가 약간의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나는 기회를 타서 마침내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내었다. 비로소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내는 긴장하여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그 같은 반응을 바라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리 서로가 사랑하는 부부지간이라 할 지라도 이 일은 설득하거나 강요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움직이시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다가왔던 것이다. 더불어 만일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분이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


그 시절 곧바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소설 ‘아바’를 쓰도록 밀어 붙이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설득하는 일을 지속하지 않고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4월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K일보의 문학상 공모가 출근길 내 발에 밟혔다. 그러자 지난 날 학창 시절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던 글쓰기에 대한 내면의 욕구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면서 그날 저녁 컴퓨터를 마주하고 첫 문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 역시 글 쓰는 일이 중국행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도 모른 채 시작한 작업이었다. 내가 더 이상 중국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아내는 내가 중국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 나의 글쓰기 작업에 대해 희망을 품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글이 중반의 고비를 넘기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의 윤곽이 잡혀가자 나는 곧 이 일이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하신 계획 속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고된 하루의 일과 후에 시작되었던 한밤의 깊은 대화 속에서 주님은 어김 없이 나를 만나러 찾아 오셨고,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이 컴퓨터의 단말기 속을 헤매면서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 분의 자애로운 눈길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고야 마는 지난 날의 추한 단상들을 생각하며 매일 밤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직도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모르겠느냐?” 글쓰기를 시작한 후 하루에 평균 4시간의 수면을 취하면서도 내가 새벽마다 일어나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도 곧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 기도 시간에 모세 오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곧바로 나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 곧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아바’가 바로 모세가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께 받았던 그 지팡이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하고 반문하는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하고 말씀하심으로 나에게 말씀의 징표를 주시기 시작하셨다. 장남으로서 퇴직하신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 등 현실을 돌이켜 보며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싸인 채 “주여, 정말 이것이 당신의 뜻이 분명합니까?” 라고 재삼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는 장면 앞에서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라는 말씀을 통하여 내게 주신 지팡이가 무엇인지 우리 가족이 건너야 할 바다와 육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살펴보게 하셨다.


그 시절, 나의 질문 섞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강렬하였던지 나는 새벽마다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기쁨과 황홀감이 파도처럼 몰려와서 내 심령과 온 방안을 가득 채우는 체험을 하곤 하였다. 또한 그 당시보다 내가 깊고 넓은 중보기도를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직장 동료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새벽마다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눈물로 매달리는 중보 기도를 하였다.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결국은 그 기도의 열매들을 거두시고야 마는 하나님을 후일 경험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오히려 그 분에게 “당신의 뜻일진데…, 이러이러한 것을 해 주십시오” 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요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미리 받았던 확실한 기도 응답 중 두 가지가 부모님들의 구원과 약속의 자녀로서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둘째 아이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아내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쓰고 있는 소설 ‘아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책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내에게 보여 줄 분명한 징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성령님의 반응은 너무나도 즉각적이고 확실하여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기쁨과 확신으로서 그 요구를 들어 주시겠노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3)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한 가지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강형수라는 한 젊은이를 통하여 마치 나의 지난 날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갈등과 방황 속에서 아바 아버지를 발견하기 위한 긴 여로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려 가는 동안, 나는 가능한 한 신앙적 메시지의 무절제한 표출로 인하여 믿지 않는 독자들의 반발 심리를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작품의 문학성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흔히 신앙적 메시지를 앞세우다 보면 작품성이 떨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신앙 소설들을 읽어 오면서 평소에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형수가 천신만고의 고통 가운데 회심하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과연 구원의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여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지닌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의미를 생각할 때, 복음을 과감하게 선포하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이끌림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K일보사의 기독교 신앙적 배경을 생각할 때 그와 같은 점이 크게 문제시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마침내 문학성을 약간 양보하더라도 복음의 메시지를 직접 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 같은 생각 가운데에는 K일보사의 문학상 공모라면 복음 선포가 하등 문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은 K 일보의 문학상 공모는 종교부가 아니라 문화부에서 주관한 행사로서 기독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출애굽기가 끝나고 소설이 완성되자 나는 당선을 확신하며 그 원고를 프린터로 뽑아서 K일보사로 보내었다. 6개월간 신들린(?) 듯이 써 내려가던 원고지 2,600매 분량의 장편 소설을 탈고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성령님께 약속 받은 글이었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원고가 내 손을 떠나고 더 이상의 숨 가쁜 집필 작업이 없어지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이전과 같은 기쁨과 확신에 찬 성령님의 응답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히려 머릿 속에는 자꾸만 소설 당선의 상금이 오락 가락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잡념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먼저 응당 십일조부터 해야 할 것이고, 분명 하나님께서 부모님들도 책임지신다 하셨으니 부모님 부양비로 얼마를 떼어 놓자. 그리고 아내가 이전부터 말해 오던 대로 좋은 전자 오르간을 한 대 사서 중국으로 가지고 가자. 그러면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위로 받겠지. 그래 틀림 없이 약속을 하셨으니, 아마 당선금을 통하여 내가 당면한 여러 가지 현실적 난관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것이다 등등….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생각들이 한 번 머릿 속을 스치기 시작하자 불붙었던 중보 기도의 문이 막히기 시작하였고, 기쁨도 점차 사라지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며칠간을 그와 같은 상태로 보내던 중 나는 출애굽기에 연이어 읽기 시작한 레위기 말씀을 통하여 내가 쓴 소설 ‘아바’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지팡이일 뿐 아니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레위기 2장에서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라는 대목에서 문득 내가 드린 제물 속에 어느새 누룩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매일 아침 레위기를 읽을 때마다 등장하는 흠 없는 수컷, 흠 없는 수양, 흠 없는 수송아지…들을 태워서 바치는 제사를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길이 얼마나 순결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다.


레위기 10장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려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멸망을 당하는 장면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는 제사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11장에 이르러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내시는 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무슨 특별한 사명을 감당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 가운데 건지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시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고 엄숙하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묵직하게 내 심령에 다가오자 결국 우리가 떠나는 이 길이야말로 내가 거룩하게 되기 위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레위기 20장을 통과하면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는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우리를 구별하여 불러내신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날은 그와 같은 상념 가운데 휩싸이며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당치 못 하는 심정을 토해 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굽어 보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사장의 세족(1993년 11월 25일 아침 QT)


주여 저의 발을 씻겨 주옵소서
저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내어 주옵소서
주의 성소를 밟아 더럽힐까 두렵사오니
주여 저를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내 마음은 주가 거하는 성소
먼지 묻은 발자국으로 얼룩이 질 때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예수님 수건을 두르시고 다가 오시네


그가 물을 받아 내 발을 씻기시네
주여 내 발을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여 그리 하오면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느니라


나는 다시 성소로 들어가네
휘장을 젖히고 지성소로 들어가네
기다리시던 주님과 마주치네
보고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네


그 순간, 내 눈가엔 기쁨의 이슬
주님의 입가엔 수정 같은 웃음
주가 내 눈물을 닦아 주시면
내 입가에도 환한 웃음


(4)


내가 다시금 회개의 기도를 통해 회복되고 정결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후, ‘아바’를 통한 증거를 보고서 중국행을 결정짓겠다고 하던 아내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아내 역시 매일 아침 기도로 매달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 차리고 있었다. 아내의 힘들어하는 모습 속에서 그저 중보로써 말 없이 도우며 지나던 어느 날, 퇴근 후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모습이 환하게 빛나며 광채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 느닷 없이 아내가 웃으며 다가 앉더니 내게 줄 좋은 선물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하며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 확실한 증거를 받았다며 중국으로 떠날 것을 순순히 제의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물론 그 이후에도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계속 힘들어하였지만, 한 번도 중국으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철회하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만큼 하나님은 아내에게도 철저히 역사하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기도 가운데 같은 날 동시에 <믿음의 글들>을 출판하는 홍성사를 떠올려 주셨고 그것이 바로 소설 ‘아바’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아내의 결단으로 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 부부는 이제 중국으로 떠나는 것을 기정 사실처럼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 다음 넘어야 할 고개인 교회와 부모님들을 향해 기도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승낙을 받아 내기 위해서 한 달 이상을 기도로 준비한 후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반주자로서 고등부 반사로 제각기 한 몫을 담당하던 일꾼들을 놓치는 아쉬움으로 목사님과 당회에서는 절대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꼭 기독교 교육이 받은 소명이라면 곧 포항 근교에 개교하는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학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며 당장 한동대학의 지원서를 써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부부의 결심과 그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 때마침 소설 ‘아바’의 출간 소식 등과 더불어 결국 우리 부부의 중국행이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 차리고, 교회에서도 결국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짧은 양가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내가 미국서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후, 거의 강제로 이끌다시피 하여 얼떨결에 교회 생활을 시작하신 본가의 부모님도 그럴 것이었지만, 더욱이 처가의 부모님은 아직 교회도 나가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그 같은 결정을 양가에서 절대 받아 들이지 않으리라는 걱정이 앞섰고, 아마도 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는 설득과 투쟁을 동반한 장기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구정을 기하여 단단히 마음의 무장을 하고 찾아간 양가의 부모님은 너무나 뜻밖에도 단번에 우리의 중국행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를 몰고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오히려 어리둥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함께 자리를 같이 했던 동생들을 통하여 나중에 들어 알게 된 사실은, 양가의 부모님이 모두 내가 마치 그 동안의 닦아 왔던 전공을 모두 포기하고 신학으로 다시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선전 포고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싸인 추측들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국 대학으로 간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안도하는 착각(?)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미국서 돌아온 이후 내가 너무 교회 일에 빠진다고 내심 거리껴하던 그분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자세한 진상을 파악하고 섣불리 허락한 것을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아무튼 부모님들의 눈을 살짝 감겨주신 일 조차도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이요 그 동안 우리 부부의 끈질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깊이 깨닫고 있다.


(5)


중국행을 결정하고 난 후, 비로소 사역지의 상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고려하신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였다. 한국의 60년대에 해당한다는 말을 듣고 최소한 공해 없고 물 맑은 시골이 아니겠는가 하고 막연히 추측하던 중, 현지에서 잠시 귀국한 분의 보고를 들어보니 웬 걸…, 여름철에는 수시로 수돗물이 끊어져 고생하고 그나마 나오는 물은 뻘건 흙탕물이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겨울철에는 섭씨 영하 25도의 맹추위와 온 도시를 자욱이 덮는 유연탄의 매연으로 시야를 가린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곳에서 고생할 아내와 아이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솜뭉치로 틀어막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함께 떠나기로 결단한 아내야 어차피 자신의 믿음으로 극복해 나간다 치더라도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 나서야 하는 아이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한단 말인가? 막 학교에 입학하여 아름답게 단장된 아파트 단지를 누비며 활기 찬 생활을 하고 있는 철 모르는 7살짜리 아이에게 과연 부모의 이 같은 결정이 받아 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후로 아이에게 가능한 한 중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넣어주기 위하여 만리 장성이 그려진 그림 화보를 보여 주기도 하고,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대하여 동경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에게 최대한의 과장된(?) 설명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평소에 쾌활하고 말이 많던 아이가 중국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일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충격을 줄까 보아 중국행에 관한 일은 일체 비밀로 붙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우리 부부 사이의 대화들을 조금씩 엿들어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미루어 짐작컨대 그 무렵 부모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통하여 어느 정도 눈치를 채어 가고 있던 아이는 혼자만의 두려움과 고민에 싸여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주일 예배가 끝난 후, 교회의 담당 장로님이 다가오면서 마침내 우리 가족의 중국행을 둘러싼 이야기를 했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정말 우리 중국으로 가는 거야? 난 안 갈래….” 하며 얼굴이 하얗게 되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아서서 찻길을 향해 막무가내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아이를 붙잡으려고 내쳐 달려가 손목을 낚아챘다. 울먹이는 아이를 겨우 끌고 와서 차에 밀어 넣고 무작정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살아온 동안 그때처럼 당황했던 적이 없었다고 회고될 만큼 그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아이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히 우리 아이가 평소에 아빠인 나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감을 보여 왔으며 한 번도 그 아이가 내게서 도망치는 것을 상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운전을 하는 동안 줄곧 입술이 바싹 말라 오고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뒤를 힐끗 돌아보니 아이는 물기 있는 눈을 껌뻑이며 달리는 차창 밖의 거리를 처량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침대 머리에 앉혀 놓았다. 어떻게든 잘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훌쩍이는 아이는 완강히 고개를 내저으며 좀체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무작정 아이의 손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시작했다. 내가 무엇이라 기도했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지만 그저 성령께서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만을 눈물로써 매달려 간구했던 것 같다. 아멘, 하고 기도를 마치자 아이가 따라서 작은 목소리로 아멘을 하였다. 한참 만에 눈을 떠보니 아이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평안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도하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는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침묵이 잠시 흐른 후에 아이가 말했다. “아빠, 그럼 우리 꼭 다시 돌아올 거지?” 나는 아이를 품 속에 깊이 껴 안았다. 그 순간 위로의 성령께서 우리 두 사람을 어디론가 사정 없이 휘몰아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허락하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이 임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의 불씨로서 자식을 고대하게 한 이후로 자식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향한 통로가 되어왔다. 자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식이 받는 고통을 바라보는 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치밀하게 계획하신 것이며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그 절정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실 때 겪게 하신 이 모든 일들조차도 처음부터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일이었다고 지금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이 체험과 믿음이 우리를 중국 생활의 어려운 고비 고비에서 지켜 주었다. 직장 선후배들의 반대와 교회 어른들의 반대들(대부분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지만….), 더러는 믿는 분들 가운데도 “아니 당신 나이가 몇인데, 지금 직장을 그만 둔단 말이야? 노후 대책을 생각해야지?”하며 극구 말리던 분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생각하면 할 수록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고,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비록 우리는 연약했지만 우리 가족의 걸음 걸음을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준비해 주신 아바의 지팡이가 있었던 것이다.

[정진호] 부르심의 현장에 다시 서서….

코스탄 현장 이야기


부르심의 현장에 다시 서서….


내가 갑자기 <코스탄 현장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은 사실 돌발적인 결정이나 다름 없었다. 지난 1년 간 <지성과 영성> 컬럼을 연재하면서 숨가쁜 현장 생활 속에서 한달에 한번씩 무언가 생각하는 글을 떠올려 보낸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을 뿐 아니라, 이론적(?)인 이야기로만 채우기에는 무언가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코스타에 참석하는 후배들을 위하여 지난 90년 코스타 이후로 내 인생 속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간섭하셨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고민했는지에 대한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면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던 것이다. 사실은 지나간 일들을 엮어서 쓰는 일이 머리 속에서 생각을 짜내는 일보다는 훨씬 쉽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또 과거의 글을 쓰려하니, 또 다른 고민이 다가왔다. 만일 단순히 과거의 정체된 이야기만을 나열한다면 잠시 동안의 흥미를 일으키는 감상거리나 감추어진 자랑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죽은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는 이 시대를 짊어질 고민하는 코스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1년 동안 이코스타와 함께 달려가며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논하였고 <문화와 복음>의 통전성을 역설했건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해답을 주느라고 애쓰고 있는데 여전히 그들은 같은 궤도를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느낀 괴리감은 어쩌면 진리의 역사성(?)을 도외시한 데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타락한 이성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단순한 원리와도 맥을 같이하는…. 다시 말해,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문화와 복음의 관계가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적 담론으로는 결코 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더러는 이론적으로, 머릿속으로는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지라도 그 글이 나타내게된 배경과 그 글을 쓴 정진호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간과하고서는 체험적 깨달음에 동참하기는 거의 힘들다는 말이다.


성경의 진리가 철학적 담론이나 논증의 형식을 띠지 아니하고 반드시 역사성을 띠고 기술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이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하던 불제자나 철학자들이 아니라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해 가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현재의 나는 10년 전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던 시절의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지닌 문화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급진적(radical)이라고 오해받을 만큼 달라진 것도 (사실은 문화와 유리되어 이원화된 복음의 올바른 자리 매김에 대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지난 10년의 궤적 속에서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갔던 그만한 역사가 있었기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10년 전 내가 고민하던 문제로 싸매고 있는 코스탄들에게 현재의 나를 바로 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적 언어를 역사적 언어로 바꾸어 기술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에서 복음의 전달 매체로서 간증(testimony)라는 독특한 형식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여기까지 쓰다보니, 내가 이제부터 지적 논증을 가급적 피하고 역사적 논증 즉, 간증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겠다는 서두를 매우 지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셈이다. 나 원 참! 아마도 추측컨데, 새로운 시도가 될른 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가 뒤섞인 <퓨전 논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역사를 회고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에 있듯이, 과거의 사건들 속에서 역사하신 그분의 손길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 당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 버렸던 것들을 반성하며, 그 일들을 통해 오늘 나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을 생각함으로 장차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가정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도 직접적인 유익이 될 뿐 아니라, 현재 비슷한 고민들을 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고 있는 기독 지성인들과 코스탄들에게 좀 더 생생한 목소리로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아무튼 종종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일들을 벌이게 하시고 더러는 우리를 코너에 몰아 넣으셔서 그 가운데서 당신의 음성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 또한 그 분이 시키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


성경 안에 흐르고 있는 성령의 역사는 끊임 없는 역동성을 띠고 있어서, 2천년 전에 발생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지금도 우리에게 수시로 흰 파도처럼 밀려와 미래 지향적인 산 비전을 제시해 준다. 내가 만난 기독교, 아니 그 속에 살아 계신 예수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내 인생의 역동성의 회복을 위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대학 시절, 진리의 끝자락을 찾아 헤매던 그 무렵, 잡다한 철학 사상과 오히려 더 사변적인 듯이 여겨져서 매료되었던 노자와 불교, 인도 철학에 빠져 있었고, 지혜를 구한다 하며 오히려 어리석은 인생으로 치닫던 나에게, 예수의 발견, 아니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진 내 인생은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진리를 따르는 통전적 삶”에 대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많은 생각하는(?) 코스탄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바, 예수 안에서 깨달아지고 회복되어진 지성과 영성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풀어헤쳐 나갈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 질문이 그 당시 나에게도 있었다. 그 간절한 기도와 소원이 나를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90년 코스타에 참석하기 얼마 전, 나는 새벽에 기도하는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서원한 일이 있었다. 어리석었던 학창 시절의 방황을 되새기며 아파하고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은, 지금도 너와 같이 갈등하며 힘들어 하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있으니 그들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복음으로 일으켜 세우라는 분명한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국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라는 선교적 명령이라고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비록 주님의 지상 명령이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나는 코스탄들이 모두 해외 선교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으려니와 각자에게 구별되어 부르시는 부르심의 영역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주님의 선교적 삶을 향한 부르심이 제한적’이라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타문화권 해외 선교로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임할 아브라함의 축복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열려 있지만, 부르심의 방법이나 방향을 정하시는 것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선교적 삶에 대한 부르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소하고 두렵기 조차 한 것이었다. 연변 과기대에서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동역자 임형식 형제의 간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있다. 예수를 믿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핀 결과,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따르라” 라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말씀하실 것을 기다리며 어딘가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러울 만큼 너무나도 명쾌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와 같은 단순한 믿음은 없었던 것 같다. 90년 코스타에서 중국으로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때 나는 충격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항상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이었으며, 최소한 다른 나라로, 그것도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공산주의 죽(竹의) 장막으로 들어가 삶의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는 선교적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 하면, 그 무렵의 나는 늦게 믿은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불붙는 열정에 이미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양육을 받았던 보스톤의 Gate Bible Study의 리더가 되어 새로 유학 오는 후배들을 거두어 섬기며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중이었고, 한시 바삐 고국에 돌아가 부모 형제 뿐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알고 지내던 술 친구들과 대학 선후배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안고 있었다 – 최소한 나에게는 술 좌석에서 사귄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간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의 실체를 정직히 돌이켜 본다면, 그것은 낮아짐 혹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복음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되었지만, 현실 속에서는 여전히 육신의 정욕으로 남아 있는 부분들…, 다시 말해 높아지기 위해 치달아 왔던 지난 세월들을 한꺼번에 송두리째 빼앗길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고 외면하는 방법으로, 나는 선교지에 나가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각시킴과 동시에(모세형),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다른 곳에서 채우겠다는 자기 회피적 생각으로(요나형)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보스톤에서의 그 무렵 나는, 무중력 상태 우주 공간에서의 재료의 성질을 연구하는 NASA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고, 그 연구 결과가 신기하리만큼 잘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 교수는 내가 계속 남아서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몹시 원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균형 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영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가 그토록 잘 나왔던 것은 성령께서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갖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아들이듯 한창 말씀의 젖꼭지를 물고 성장하고 있는 나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였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조용히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서 자신이 영주권을 내줄 터이니 학교에 계속 남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J1 비자는 반드시 귀국을 하도록 되어 있는 비자였기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에 말에 의하면 프로젝트의 중요성에 비추어 미국 정부(?)에 특별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호의적인 제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바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당황하며 이유를 묻는 그에게 나는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당당하게(?) 붙였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대부분의 늦게 믿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복음에 대한 열정과 치기 어린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어린 신앙을 세상의 핍박과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였다. 주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학생들이나 박사후 과정들(Post-Doc)과 연구에 관한 토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지도 교수는 항상 주일에 수시로 우리를 불러내곤 하였는데, 내가 그 앞에서 그와 같은 신앙 선언을 한 이후로는 최소한 나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귀국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나의 소명 조차 잠시 잊은 채, 서둘러 포항 제철에서 세운 RIST 연구소의 Strip Casting Project Team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연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곳이 나의 마음을 끌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MIT에서 함께 지내던 두 사람의 대학 선배 뿐만이 아니라 대학 시절 동기, 그리고 내가 과거에 인간적으로(?) 가장 아끼던 후배가 줄줄이 한 팀에 소속되어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황금 어장과 같은 곳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3년 동안, 나는 마치 요나가 사흘 낮 사흘 밤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었던 것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싸우며 내 자신의 감추어진 교만과 무능을 체험하였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 보내기 위해 철저한 훈련과 준비를 시키시는 기간을 갖게 되었다. 그곳은 나에게는, 모세가 갑자기 변해버린 자기 정체성에 너무 놀라 왕궁을 뛰쳐나간 후 40년 간 방황하며 낮아짐의 훈련을 받았던 미디안 광야와 같은, 아니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이후에 그의 율법주의와 각종 헬라 사상을 복음 안에서 용해하기 위해 필요했던 3년 간의 용광로 길… 아라비아 사막길과 같은 곳이었다. (계속)

[정진호] 타임머신을 타고

코스탄 현장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1994년 8월 4일 오후 5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 공항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시골 역사를 방불케하는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 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 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렘으로 젖어 왔다. 잔뜩 긴장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낯선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내와 볼에 홍조를 띤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옆모습을 틈틈이 훔쳐보았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그 분만을 의뢰하리라 하는 강한 기도가 저절로 입 속을 맴돌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길 양편에 오물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언덕받이로 한참 올라가다 보니, 세로로 길게 붙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라는 흰색 나무팻말이 나타났다. 그러자 교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우뚝 세워진 연둣빛 건물이 와락 눈앞에 다가왔다. 건물 앞으로 연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평선에는 황홀하게 타오르는 눈부신 저녁 노을이 붉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 건물 뒤편의 확 터진 벌판을 한 번 둘러보던 나는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월의 모진 풍상을 뚫고 건너와 살던 만주 벌판의 바로 그 중국 땅이라는 사실이 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느낌에 싸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 임시로 짐을 풀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감개와 두려움과 설렘에 젖어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 여름인데도 오싹하는 한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기숙사 어디선가 은은한 하모니카의 선율을 타고 찬송가가 고즈넉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꿈결로 빠져들었다.


숙사(宿舍)에서의 첫 2주일 간은 마치 우리 가족이 꿈 속에서 어느 이상한 나라로 별안간 날아온 듯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여러 가지 여름 행사로 분주한 학교 안팎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기숙사 식당의 정해진 식사시간만 기다리며 세 식구가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내와 아이의 감추어진 표정 속에서 행여 어떤 절망이라도 나타날까봐 노심 초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 안은 온통 진흙 창이 되어서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숙사 안에서 창 밖을 달리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축축이 젖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났다. 맥이 없어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내를 두고서 아들 다니엘의 손을 잡고 산보라도 할 심산으로 기숙사 현관 앞에 나가 보았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질퍽거리는 진흙땅을 어이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저것 좀 봐. 참 아름답다. 그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기설기 보기 싫게 헝클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전깃줄 사이로 맺혀진 이슬이 환한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비추이며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줄기 부끄러운 생각이 샘솟듯 스며 나와 아이를 향해 흘러 내렸다. “그렇다. 아들아!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 복되다.”


한국서 부친 콘테이너가 도착하자 우리는 뻬이따라는 동네에 셋집을 얻어 학생 숙사에서 내려왔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우리의 그 많던 이삿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안성맞춤의 층집(아파트)을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이곳서는 애인 동무로 불린다)는 도시 전체를 맴돌고 있는 먼지와 악취를 가장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살아왔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치 못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함께 회개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적응하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비밀된 방법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맑은 날, 5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전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지평선을 너머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그 벌판 가운데 내가 홀로 서 있는 기분은 복잡한 한국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선 거리에는 텅 빈 심령들의 찌들은 모습들과 쓰레기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소가 끄는 달구지와 인력거, 자전거의 홍수, 매연을 뿜어 대는 구 소련제 라다 택시, 더러는 값비싼 그랜저나 벤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뜨인다.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밤톨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폭우가 내려 삽시간에 온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걱정이 되어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발코니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물동이로 퍼서 밖으로 퍼내느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서 새까만 구정물로 잠긴 도시에 긴 장화를 신고 더러는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쥐고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내 나이 서른 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90년 KOSTA에 참가한 이후,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타임머신은 마침내 작동하고 말았다. (1994.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