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 2001 | 코스타 사역/obKOSTA
post KOSTA
post KOSTA 신드롬 극복하는 법
1. post-KOSTA syndromes
2001년 7월 9일 월요일 아침, 창밖이 환하게 밝아있다. 아직도 코스타에서의 열띤 찬양과 기도소리는 귓가에 쟁쟁한데, 희미하고 몽롱한 정신으로 감지되는 햇빛, 그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각도와 강도를 보아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앗! 시간은 아홉 시 삼십 오 분, 여섯 시로 맞추어 놓은 알람 시계의 snooze 단추가 눌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 아침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 큐티를 하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늦었다! 코스타에 가려고 지도 교수님에게 눈치밥 먹으며 겨우 휴가를 받아 냈었는데… 오늘은 월요일, 지도 교수님이 실험실에 나오시기 전에 먼저 갔어야 했는데… 후다닥! 일어나 옷은 주섬 주섬, 아침 식사는 대충 건너 뛰고, 자동차 시동을 걸고 학교 실험실을 향해 마구 밟아댄다…. 어느덧 하루의 일과가 정신 없이 대충대충 지나가고…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피곤함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다.
왜 이렇게 공부와 연구는 재미 없는 것일까? 코스타의 열기는 내 마음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매일 코스타 같은 집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공부 다 때려치고 신학교에나 갈까? 그러면 매일 성경보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할 수 있을텐데… 아님, 이번 가을에 확 선교사로 나가서 일생을 선교지에서 살다 그렇게 그냥 죽어 버려? 왜 이렇게 공부가 재미 없지? 논문을 쓰려면 아직도 2년은 더 실험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학위 마치고 나서 나는 어디로 가지? 한국에 Job 사정도 어렵다는데… 그리고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과 나의 인생에서 내가 가야 할 길들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자, 나는 이제 마치 각개 전투를 하는 군인처럼 느껴지는 냉혹하고 고독한 현실 가운데로 돌아온 것일까? 나는 이제 또 한 해를 날마다 순간마다 그 수 많은 결정들을 홀로 내리면서 살아야 한다. 마치 두 갈래 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 서게 되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Savior)으로 모시면 그 분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Lord)이 되신다던데, 도대체 나는 이 “홀로 서기”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란 말인가?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구약의 지혜서인 잠언 3장 5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복된 삶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서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는 말씀은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 이상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실 때에는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그리고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돋우어 평탄하게 만들어 주시는 동행하심의 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발 앞서 가시면서 가야 할 길을 “예비해 주심”의 의미가 더 강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동행함”의 축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면에서 주님께 의지적인 순종을 해야 함을 이 말씀은 아울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나의 “감성, 지성, 의지”의 모든 면을 다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적인 면이 별로 성숙되어있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인격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초청에 응답하는 일, 즉, “의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기대감”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기대감을 갖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기를 원하는 그 초청의 은혜를 기대하는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그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의 지적인 활동을 통해 알아가게 되기를 기대하는 모든 지식적인 “탐구(연구)활동”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적인 활동은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전공분야에서 나에게 주신 지적 활동의 수행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참고: 본지에 계속 연재된 “이일형”의 글을 참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내가 “순종”할 의지적인 결단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매우 괜찮아 보이는 일들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에 놓게 되고, 성경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삶”(예레미야 17:5)을 살게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삶의 기저에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신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의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면 결국에는 나의 생각과 삶의 방식들이 하나님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매우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인식은 결국, 다음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처험하게되는 진정한 축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셋째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범사”란 나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의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이란 나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자원과 기회들이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기꺼이(감성) 탐구하며(지성), 그 알게 되고 느껴진 것들을 하나 하나 적용하며(의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은, 이 “범사”의 개념은 나 한 개인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이 때에 내가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게 모르게 관련된 다양한 공동체들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스타 기간 동안 열광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번 뒤집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력한 감성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의 삶이 하나님 없이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무기력 속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지성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의 성숙을 위해 나의 삶을 점검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대로 사는 법을 말씀 속에서 탐구해 나가고 내게 주어진 학문 활동을 진지하게 수행하며, 지식으로 알게 된 말씀의 원리에 나의 삶을 복종시키는 작업을 해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의 정황에 주어진 작고 큰 공동체의 모습들도 동일한 원리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데이트, 가정, 연구실, 캠퍼스 소그룹, 교회, 그리고 한민족 등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각오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삶의 점검과 성숙은 강력한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자아가 뒤집어지게(?) 열광한 것보다도 더 강력한 강도의 헌신을 요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마십시다. 이 길은 매우 즐겁고 흥분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나의 인생의 여정에 앞서 가시는 주님의 흔적을 기적과 같이 날마다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독 유학생의 열 두 가지 다짐을 위한 기도 제목
우리는 코스타의 마지막 날 밤에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헌신의 기도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이 기도 제목들은 “헌신”의 시간을 위한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사실은 앞서 언급한 잠언의 약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축복”의 기도 제목들입니다. 이 잠언에 약속된, 주님의 앞서 가시는 동행하심의 축복은 이 기도들이 나의 삶 가운데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체험의 폭이 넓어짐과 더불어 지식의 자라감과 의지적 순종이 다음 일년 동안 우리의 삶에 경험되어지기를 바라십시다. 이를 위해 이제 다음의 다짐들이 날 마다 나의 삶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한 해의 경주를, 기도하며 같이 시작하십시다.
1) 주 되심(Lordship)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적인 구주(Savior)일뿐 아니라 내 삶의 주인(Lord)이신 것을 고백한다. 또한 그분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인 것을 고백하며 살 것을 다짐한다.
2) 경건의 시간(Quiet Time) … 우리는 매일 일정 시간(30분 이상)을 떼어 놓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갖기로 다짐한다.
3) 중보 기도(Prayer) …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조국, 교회, 민족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수행할 것을 다짐한다.
4) 성경 연구(Bible Study) … 우리는 성경 말씀을 우리 삶의 좌표로 삼고 순종하기 위하여 매 주 일정 시간을 떼어 놓고 성경 연구에 투자할 것을 다짐한다.
5) 가정(Family) … 우리는 가정을 허락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할 뿐 아니라 이미 주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6) 교회(Church/Community) … 우리는 매 주일 정기적으로 캠퍼스 혹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7) 학문과 신앙(Study and Faith) … 우리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성을 훈련하며,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다짐한다.
8) 복음 전도(Evangelism) … 우리는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인식하고 매 학기 1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여 크리스천 공동체로 인도할 것을 다짐한다.
9) 해외 선교(Mission) …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문인 선교사 혹은 보내는 자로서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10) 이웃 사랑(Social Action) …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사회의 불의한 분야를 밝히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11) 통일 한국(Unification) … 우리는 곧 현실화될 통일 한국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공 분야에서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12)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 … 우리는 섬기는 리더십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알고, 캠퍼스와 앞으로 진출할 사회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Aug 1, 2001 | 삶과 신앙/최원영의 살며 생각하며
살며 생각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
야베스의 기도(Prayer of Jabez)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지난 해부터 미국의 기독교 서점 베스트셀러로 올라선 뒤, 올해에는 USA Today나 Wall Street Journal과 같은 일반 매체의 베스트셀러가 되더니만,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이미 한국 기독 서점의 No.1 베스트셀러(7월 28일 현재 kbook.com No.1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Bruce Willkinson은 그가 신학교 시절, 교목인 Richard Seume 박사의 설교를 통해 역대상에 등장하는 야베스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이 ‘야베스의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야베스의 기도는 계속 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이 책은 축복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그가 해온 30년 간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그가 받은 축복(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경을 넓혀야 할 사역자가 받아 누려야 할 축복)과 깨달음을 간결한 필치로, 하지만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책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Amazon.com에 가보면 이 책에 관한 평을 볼 수 있는데 (7월 28일 현재 268개의 서평이 올라와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만큼 호평과 혹평으로 극하게 갈라진 경우를 나는 본적이 없다. 잠시 여기서 이 책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시선을 보도록 하자.
“Dangerous little book” (one star out of five) by Albert Cerussi
….However, the author goes way too far. He seems to indicate that if you pray this prayer then God will bless you. This sort of cosmic santa claus stuff is one step ahead of the infamous “name-it-and-claim-it” gospel. The author places way too much emphasis on this prayer and the words inside of it. The “Prayer of Jabez” is a classic case of over-reading into the Scriptures. Believers in Jesus who read this book should view it with caution…..
“A powerful book” (five stars out of five) by Doug Keating
…..One concern I had about the book was the issue of praying for abundance. Luckily, the author “hit the nail on the head” with this topic by focusing on what God wants to bless us with instead of what we want from God. After all, if we put our faith in God, shouldn’t we trust his judgement when it comes to his blessing our lives. I think that prosperity is one of the most misunderstood topics in the Christian community today, and hopefully this book will help solve that problem……
두 사람은 동일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다. Albert는 ‘위험한 책'(dangerous little book)으로, Doug은 ‘위력적인 책'(powerful book)으로 묘사한다 – 나는 Doug의 의견을 지지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축복을 받아 들이는 입장은 Doug과 Albert의 경우처럼 천차만별이다.
미국에서 “name it and claim it” gospel이 성행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한때 기복 신앙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기복 신앙의 눈에 보이는 해악은 하나님을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사다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퍼져 있는 일종의 “하나님의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다 – 이는 위의 Albert의 글 행간에서도 언뜻 언뜻 비친다. 잘못된 기복 신앙으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거부감이야말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약화시키는 해악이 아닐까 한다.
아니 축복에 왠 거부감?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다. 이것을 만일 기도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나에게 세상적인 축복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평생 하나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참 훌륭한 신앙 고백이지만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신앙 고백에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내 주세요, 내 앞길을 열어 주세요.” 우리가 간구해야 할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맏겨진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이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간구의 내용을 막는다는 사실이다.
축복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한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여기서 한참을 헤매었다. 일단 무슨 설교를 듣던지, 아니면 책을 읽던지, ‘축복’이나 ‘성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내 마음에는 Alarm이 울린다. ‘이거 뭐 또 기복신앙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귀를 쫑긋이 세우거나, 눈을 부릅뜨게 되었다.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의 세상적인 필요를 아뢰는 기도를 드릴때는 좀 창피한 생각도 들기도 하고 묵상 기도나 다른 기도가 수준 높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런 일종의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생각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뒤다. 강준민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또한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간구도 우리가 소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꿈꾸는 자가 알아야 할 21가지 믿음의 법칙, 78쪽)
우리의 간구가 씨앗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확을 거두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뿌려야 할 것이다.
Aug 1, 2001 | 기독교인의 문화 탐구/김연종 교수의 문화탐구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언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시적이고 표피적인 외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이고 개인적인 내포적 의미이다. 가령 ‘개’라고 말할 때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개는 네 다리가 달린 짐승을 말하지만 개인에게 새겨지는 의미는 ‘냠냠’에서부터 ‘자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험이나 이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앞의 의미를 객관적인 의미, 뒤의 것을 주관적인 의미라고 한다. 뉴스나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 의미를 달리 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의 의미를 따져보게 되는 까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에 난 기사도 믿을 수 없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다 보니 정말로 나의 사고나 판단조차도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헤아려 보게 된다.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가 있고 난 뒤, 조선일보 같은 신문은 아예 정부에 대한 저항을 선언하고, 언론탄압 음모에 맞서 의연히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이번 일을 저질렀으며 조선일보는 얼마나 억울한 지를 여러 기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언론개혁에 초지일관 앞장 서 온 한겨레신문은 이러한 조선의 행위를 부끄러움도 잊은 후안무치적 행위라고 비난한다. 한 사건을 두고도 이토록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언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 대로 편집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기 식으로 세상을 조립하는 방법은 대개 뉴스 거리의 선택, 축소 또는 확대,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서이다. 즉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하거나, 확대하고, 불리한 정보는 축소함으로써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조선과 한겨레 두 개 신문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왜곡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지루한 싸움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궁금해진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부의 의도와 계획이 없었을 리 없고, 반대로 언론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한 것도 사실이고 보면 언론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정부의 조처가 합당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 언론의 자사 이기주의는 해도 너무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찌 국민을 담보로 신문을 사유화하고 지면을 제 멋대로 자사의 이해를 위해서 함부로 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이 보여주는 폭력적 행태를 보면 권력의 전횡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주제는 언론의 전횡이 아니다. 요점은 이러한 전쟁이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정부는 언론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여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길목에서 언론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적인 이유로 나는 언론개혁이 정말 순수하게 언론개혁으로 마무리될 것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 정말로 순수한 개혁이 있었으며 그것이 성실하게 매듭 지어졌는지, 이에 대한 기억 조차 없다는 것도 나의 생각을 뒷받침 한다. 짐작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게 될 지 모른다. 서로의 이해를 위해서 지금도 어는 곳에선가 물밑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고.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이러한 기만 행위에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문기사 한 토막에 흥분하고 분노하며 안위하는 내 스스로가 웃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모르면서 흥분하고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면서 절규한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학교도, 교회도 고개 들어 어느 곳 하나 기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한다.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도 언론이 궁극적으로 개혁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점에 더 답답함이 있고 절망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도 우리의 눈을 가린 채 권력의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야합과 담합과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언론은 민중의 편이며 검찰은 과연 중립이며, 판사는 과연 법의 공정한 심판자일까.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답게 아픈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인류의 선행자일까. 교수는 정말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헌신할까.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대로 바로 서 있으며 목사는 과연 그 삶이 우리의 생각 만큼 투명하고 맑을까. 혹 교회에도 내가 모르는 일이 목사님들이나, 교회 간이나, 총회 간에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담합이 판을 만들고, 자신의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이 조작되는 한, 오늘 세상을 사는 일은 정신 차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알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정보는 흐르는 길이 따로 있고, 그것에 소외되면 끝 없이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일에도 수 많은 루머와 가십과 뒷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이 있을까.
불신이 싹트는 사회에서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교사의 말에 신빙성이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 목사님이 불신을 받으면 말씀에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결국은 인간 관계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말의 번지르르 함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라도 상대방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말부터 행동하고 믿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나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의 말을 다시 한 번 곰씹어 보고 뒤집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사람은 각자가 영민해서 누군가 자기를 속이려 하면 자신도 머리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머리 쓰지 말고 말하고 머리 쓰지 말고 믿어 보자. 지금 우리가 이 사회를, 이러한 인간 관계를 치유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Aug 1, 2001 | 기독교인의 문화 탐구/영화 속의 숨은그림 찾기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라쇼몽>(羅生門, Rashomon)
승려와 나무꾼
|
감독 쿠로사와 아키라(黑澤 明, Akira Kurosawa) |
개봉연도 1950년(일본)/1951년(미국) |
등급 등급무(無) – 폭력, 성인용 주제 |
원작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
각본 쿠로사와 아키라, 하시모토 시노부 |
촬영 미야카와 카주오 |
주요 등장 인물 |
산적 타조마루 무사 남편 타케히로 아내 마사고 나무꾼 승려 행인 무당
|
미후네 토시로 모시 마사유키 마치코 교 타카시 시무라 미노루 치아키 키치지로 우에다 후미코 혼마 |
지난 1998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한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Rashomon)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서구에 일본의 영화을 알리는 전기를 마련한 작품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의 국가대표 감독, 쿠로사와의 절제된 영상과 언어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폭의 수묵화나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쓸데 없는 대사나 군더더기 장면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른한 오후, 나무 아래 산적 하나가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 몇 조각.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흔듭니다. 산적의 얼굴 위에 살랑댑니다. 그 바람은, 지나가는 말 위의 신부가 쓰고 있던 베일 한 끝을 살짝 제칩니다. 순간 스쳐 지나는 신부의 얼굴. 아까까지 늘쩡거리던 사내의 눈에 반짝 기운이 돕니다. 그후, 남편이 산적과 사라진 후, 물가를 찾아 살포시 내려서는 여인의 발. 물과 희롱하는 여인의 조용한 흰 손. 서로 주고 받는 대사 몇 마디 없이, 이렇게 이야기는 그림을 따라 흐릅니다.
이처럼 아련한 여백의 미와 시적인 언어로 옷을 입힌 쿠로사와의 이야기가 서양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영상도 영상이지만, 당대의 서양 지성들에게 “진리는 없다”며 진리의 상대성을 제기하는 동양의 ‘신선한'(?) 철학이 효과를 본 것입니다. 참고로 <라쇼몽>은 일본 내의 흥행에서 실패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 영화의 베니스 그랑프리 수상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국내 흥행에 실패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작년 칸느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의 기록과 어쩐지 비슷합니다. 서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수상을 했고, 다른 하나는 못 했다는 점. 상을 받은 후에도 <라쇼몽>은 자국 비평가들에게 여전히 찬밥 신세였지만, 초청을 받은 후 <춘향>은 국내 비평가들의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는 명작으로 갑자기 승격됐다는 점. 일본의 정서에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두 번째의 이유를 논한다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지만, 쿠로사와가 수상한 이유는 알 것도 같습니다.
(지난 5월호 ‘사족’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국(異國)만의 전통성을 내세워 국제 무대에 선 영화는 일단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유리할 수는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 ‘보편성’을 결여한 주제를 강요한다면 그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모으는 것으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빈틈 없고 계산 빠른’ 쿠로사와는 시각적으로 일본의 전통을 수용한 그림에다 보편성을 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선천적인 죄성, 자기 중심적 본성, 이기심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동양 (불교)의 ‘자비’를 통해 휴머니티의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를 했을 뿐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변모한 여성의 위상을 재조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사와가 그리고 있는 여성상은 전후 20세기의 여성입니다. 영화의 처음, 나약하고 순종적이던 ‘안개꽃’ 신부는 산적에게 육체를 유린 당한 후, (은장도를 꺼내 할복자살을 시도하리라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결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산적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까지 복수를 할 만큼 당돌하고 능동적인 ‘억새풀’ 여성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주제가 1950년대 당시의 시대 흐름과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1980년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적으로 ‘대리모’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의 상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배경 음악에 있어서도 국제적인 감각에 일본의 고유한 맛을 곁들일 것을 이미 계산에 넣은 쿠로사와는, 라벨(Ravel)의 (그 유명한) <볼레로>(Bolero)를 일본풍으로 변주하여 중세 일본을 담은 그림을 따라 리듬감 있게 흐르게 함으로써, ‘친숙’하면서도 왠지 ‘낯선’듯한, 독특한 느낌의 스타일로 세계의 관객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요절한 일본의 대표적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1915년 문단 데뷔작 <라쇼몽>에서 영화의 제목과 소재, 그리고 배경을 따오고 그의 1921년작 <숲속>의 내용을 함께 엮어 쿠로사와 아키라와 하시모토 시노부가 각색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나무꾼은 원래 류노스케의 <숲속>에는 없던 인물인데, 극적 효과를 위해 쿠로사와가 새로 만들어 넣었다고 합니다. 비록 나중에 첨가된 인물이긴 하지만 영화의 나무꾼은 ‘목격자’ 및 ‘문제 제기자’, 그리고 ‘제4의 진술자’로 ‘맹활약’을 하며, ‘자비’,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영화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비 내리는 라쇼몽에 쭈그리고 앉아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되뇌는 나무꾼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의 곁에는 똑같이 심각하고 혼란스런 표정의 승려가 앉아있고 지나가던 행인이 여기에 가세하는데, 나무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느 화창한 오후, 한 무사와 그의 신부가 숲을 지나다 산적을 만나게 되고, 나무꾼이 무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얼마 후 말에서 팽개쳐져 바닷가에 기절해 있던 산적이 잡혀 오게 되고, 절에 숨어 있던 신부가 끌려 나오고, 이어서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 남편의 영혼까지 불려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산적이 무사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것과 무사가 죽었다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만 빼놓고는, 이들 세 사람의 진술이 모두 엇갈립니다. 게다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산적과 신부는 자기가 무사를 죽였다고 하고, 무사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
|
대부분 예상되는 살인 사건 용의자들의 증언이란 것이 “난 안 죽였다”일텐데, 서로 자기가 죽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잡힌 이상, 어쨌든 곧 죽게 될 산적의 몸인데 사나이 기개나 세우고 죽자….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지켜야지. 게다가 저 가증스런 남편을 한껏 욕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내가 명색이 무사인데 명예롭지 못한, 비굴한 내 죽음이 밝혀지면 이 무슨 망신인가…. 이 모든 진술들이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안 죽였다’고 하며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보다 더 수준 높은, 아니 아주 무서운 거짓말입니다. 그런 수준 있는 엇갈린 증언들을 놓고, 승려는 “더 이상 인간을 믿을 수 없단 말인가!”하며 또한 수준 있는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나무꾼의 증언은 이와는 또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무사를 발견한 것 뿐이라고 진술했지만, 사실은 신부가 강간을 당한 직후부터의 사건을 전부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서로 안 갖겠다고’ 미루는 남편과 산적의 비굴함에 기가 막혀 하던 아내는, 남자의 허세를 교묘히 이용해 둘이 칼로 승부를 겨루도록 몰아 갑니다. 결국 산적의 칼에 남편이 죽고, 여자는 도망가고, 여자를 놓친 산적은 무사의 말을 타고 가다 말등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미스테리의 진상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그다지 별 볼일이 없어 보입니다. 법정에서는 왜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는 행인의 추궁에 나무꾼은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 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처럼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다시 되뇌는 나무꾼.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하며 고뇌하는 승려. 둘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비가 그칠 때만 기다리고 있는 행인. 이 셋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비 내리는 라쇼몽에 갑자기 버려진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낼름 아이의 입은 것을 벗겨내고 지닌 것을 취하려는 행인의 파렴치한 행동에 나무꾼은 분노하지만, 행인은 ‘아이를 버린 부모나 또 나무꾼 너나, 다 나와 마찬가지로 파렴치한이 아닌가’라며 나무꾼을 조롱합니다. 약삭빠른 행인은 여인이 떨어뜨린 값진 은장도를 슬쩍한 것이 나무꾼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무꾼은 그 은장도 때문에 시치미를 떼었던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의 타고난 죄성이라고 믿고 있던 쿠로사와는, 이처럼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4명의 인물들의 입으로 4번 반복해서 듣게 된 ‘서로 엇갈리는 강간과 살인의 진술’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인간들 각각의 이기적인 시각이나 소욕에 의해 왜곡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낭패감과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무꾼을 한껏 조롱하고 행인이 유유히 사라진 후,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어느새 빗줄기는 잦아 들고 나무꾼이 아이를 안으려고 하는데,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승려는 화들짝 놀라 그를 책망합니다. 애를 들어다 버리려는 줄로 안 것입니다. 하지만 승려는 아이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겠다는 나무꾼의 말에 감격을 금치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소.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됐소.” 이미 폐허가 된 라쇼몽이 상징하듯, 타고난 이기심에 의해 무너져 버린 인간의 도덕성이 아이에게 자비를 베푼 나무꾼을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흔히들 말하기를 영화 <라쇼몽>의 이야기는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세상에 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해자인 산적의 말도, 피해자인 신부의 말도, 그 남편인 죽은 무사의 말도, 심지어는 나무꾼의 말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해 왜곡된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 뿐인 세상에서도 각 개인의 의지(意志)만 꿋꿋하다면 인간의 존재는 가치있다고, 믿을 만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라쇼몽>을 미국에 유학 와서 드디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내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꽤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Humanism과 Christianity의 차이가 뭔지 분간 못할 만큼 제대로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무조건 예수 믿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다 되는 줄 알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개과천선을 했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하던 그때, 제가 감정이입을 했던 대상은 바로 한탄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무꾼’의 심정이 되어 이 영화를 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승려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이를 받아 안고 서 있던.
적어도 나무꾼은 자기의 죄성을 절절히 깨달은 자입니다. 그랬기에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휴머니즘을 운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스로는 의로운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봅니다. 나도 이 정도로 쓸 만한데 설마 나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나아가 ‘자기 의’라는 것까지 갖추고 있다면 영화의 승려처럼 세상을 한탄하겠지요. “(나만 빼고) 이 세상은 왜 이런가?” 의아해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교만한 죄성이나 이기적인 소욕에 따라 왜곡된다는 이 영화의 주제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서 달라 보이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절절한 깨달음으로 바라보는 세상. 각 개인의 의지(意志)가 아무리 꿋꿋하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존재는 무가치하다는,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는 믿을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세상. 그것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므로 진리는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진리는 있으며 진리는 오직 하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우리는 다 양(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1-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며칠 전 한겨레 신문에 실린 어떤 가수의 인터뷰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고 웃음이 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래 잘하는 줄 알던 아마추어였는데, 지금은 노래 못하는 프로이다.” 나의 죄인됨을 철저히 회개하지 못하고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착각하던, 그리고 여전히 (너무 자주) 그렇게 착각하는,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가수도 크리스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승려보다는 나무꾼이 좋습니다. 어설픈 아마추어보다는 성실한 프로가 되고 싶습니다. 죄인된 내 모습에 날마다 절망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Aug 1, 2001 | 유학생 사역/코스탄 현장 이야기
코스탄 현장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1994년 8월 4일 오후 5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 공항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시골 역사를 방불케하는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 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 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렘으로 젖어 왔다. 잔뜩 긴장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낯선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내와 볼에 홍조를 띤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옆모습을 틈틈이 훔쳐보았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그 분만을 의뢰하리라 하는 강한 기도가 저절로 입 속을 맴돌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길 양편에 오물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언덕받이로 한참 올라가다 보니, 세로로 길게 붙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라는 흰색 나무팻말이 나타났다. 그러자 교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우뚝 세워진 연둣빛 건물이 와락 눈앞에 다가왔다. 건물 앞으로 연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평선에는 황홀하게 타오르는 눈부신 저녁 노을이 붉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 건물 뒤편의 확 터진 벌판을 한 번 둘러보던 나는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월의 모진 풍상을 뚫고 건너와 살던 만주 벌판의 바로 그 중국 땅이라는 사실이 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느낌에 싸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 임시로 짐을 풀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감개와 두려움과 설렘에 젖어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 여름인데도 오싹하는 한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기숙사 어디선가 은은한 하모니카의 선율을 타고 찬송가가 고즈넉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꿈결로 빠져들었다.
숙사(宿舍)에서의 첫 2주일 간은 마치 우리 가족이 꿈 속에서 어느 이상한 나라로 별안간 날아온 듯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여러 가지 여름 행사로 분주한 학교 안팎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기숙사 식당의 정해진 식사시간만 기다리며 세 식구가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내와 아이의 감추어진 표정 속에서 행여 어떤 절망이라도 나타날까봐 노심 초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 안은 온통 진흙 창이 되어서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숙사 안에서 창 밖을 달리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축축이 젖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났다. 맥이 없어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내를 두고서 아들 다니엘의 손을 잡고 산보라도 할 심산으로 기숙사 현관 앞에 나가 보았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질퍽거리는 진흙땅을 어이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저것 좀 봐. 참 아름답다. 그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기설기 보기 싫게 헝클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전깃줄 사이로 맺혀진 이슬이 환한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비추이며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줄기 부끄러운 생각이 샘솟듯 스며 나와 아이를 향해 흘러 내렸다. “그렇다. 아들아!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 복되다.”
한국서 부친 콘테이너가 도착하자 우리는 뻬이따라는 동네에 셋집을 얻어 학생 숙사에서 내려왔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우리의 그 많던 이삿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안성맞춤의 층집(아파트)을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이곳서는 애인 동무로 불린다)는 도시 전체를 맴돌고 있는 먼지와 악취를 가장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살아왔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치 못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함께 회개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적응하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비밀된 방법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맑은 날, 5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전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지평선을 너머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그 벌판 가운데 내가 홀로 서 있는 기분은 복잡한 한국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선 거리에는 텅 빈 심령들의 찌들은 모습들과 쓰레기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소가 끄는 달구지와 인력거, 자전거의 홍수, 매연을 뿜어 대는 구 소련제 라다 택시, 더러는 값비싼 그랜저나 벤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뜨인다.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밤톨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폭우가 내려 삽시간에 온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걱정이 되어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발코니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물동이로 퍼서 밖으로 퍼내느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서 새까만 구정물로 잠긴 도시에 긴 장화를 신고 더러는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쥐고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내 나이 서른 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90년 KOSTA에 참가한 이후,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타임머신은 마침내 작동하고 말았다. (1994.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