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훈]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능력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능력
빌립보서 1:12-26



편집 주
이번 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를 가지고 이코스타의 독자 여러분과 함께 큰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여는 말


대전에 가면 서대전 사거리라는 곳에 새서울 내과라는 병원이 있다. 그곳에는 주로 대덕 연구 단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는 한다. 특별히 연구 단지로 새로 부임한 사람들이 많고 그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상당수로, 찾아오는 사람마다 증세가 거의 똑같다고 한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소화가 안되고, 약간의 통증이 있는 그런 증세인데,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처방해 주는 알약이 누구에게나 같다. 빨간색 한 알, 초록색 두 알, 흰색 세 알. 이 병의 이름은 신경성 위염, 흔히 속병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주로 심적인 압박(pressure)을 많이 받고 신경을 많이 쓸 때 발생하는 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인 압박감은 왜 느끼게 될까? ‘환경적인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장래에 대한 불안감’, 대충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진단할 수 있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어려움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아닌가?


먼저 환경적인 어려움을 보자. 환율도, 학비도, 아파트세(rent)도 모두 오르는데 딱 하나, 생활비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결혼한 자매들을 보면, 아이들은 지겹게 달려드는데 남편은 그야말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연구실에 박혀 있는 학생들은 또 어떤가. 해도 해도 안 나오는 것이 연구(research) 결과요, 그나마 열심히 해서 학술 잡지(journal)에 보낸 논문은 실격(reject)이 되어 돌아 오곤 한다. 인간 관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자꾸 천적(天敵)들만 늘어가는 것 같다. 장래에 대한 불안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고생해 봐야 졸업하고 나서 과연 백수나 면할 수 있을까? 미혼 남학생들은 이렇게 결혼이 늦어지다 연로해져서 결국 장가도 못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그래도 교회 안에서는 성경 공부다 기도 모임이다 찬양 모임이다 하여 열심을 내 보기도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걱정하다 비참해지고, 그러다 성질까지 내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의 행동은 과연 무관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역동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이제 성경의 한 인물을 클로즈업(close-up) 해 보자. 그도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도는 훨씬 심했던 것 같다. 그는 바로, 빌립보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곧 서신서이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로 사도행전 16장에 그 탄생이 잘 나타나 있다 – 바울이 환상을 본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환상을 보고 바울은 빌립보로 간다. 이후, 염색업을 하는 루디아와 그 가족이 주님께 돌아오고 지하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과 그 가족들도 주님께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빌립보 교회인 것이다. 출발부터 그래서였는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특별히 사랑하고 아꼈던 교회처럼 보인다. 글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어조(tone)라고 말한다. 나는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마치 친정 어머니가 출가해서 반듯하게 살고 있는 딸을 사랑스러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친구 같아진 딸을 대견스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1장 3-11절).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아낌 없이, 꾸준히 돕던 교회였다. 이번에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에바브로디도라는 신실한 형제 편으로 선교 헌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노약한 바울을 그에게 직접 시중들게 하였다. 아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에바브로디도로부터 들어 잘 알게 된 것 같다. 나중에,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함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이다. 그 편지에다,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안부를 전하고, 보내 준 도움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참에, 그 교회의 문제점을 두고 호소하고 촉구하는 권면의 말까지 전하려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의 본문은 바울이 자기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의 비밀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평범한 이야기들이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것 못지 않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 가지 어려움을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환경: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 사실을 여러 분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곧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 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가운데 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 겁없이 더욱 담대하 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1장 12절-14절)




  • 인간 관계: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 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 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 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 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5절-18절)




  • 삶과 죽음: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 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 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 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 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9절-26절).

내가 바라기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바울은 어떤 태도로 극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이 본문을 통해서 함께 보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하는 은혜를 누렸으면 한다.


환경의 어려움


먼저 환경의 어려움에 대한 바울의 자세를 보자. 13절에 ‘나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울이 감방에 있다는 말이다. 감방이란 어떤 환경인가? 한 번 가정을 해 보자. 직장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퇴직금으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빚 잔치를 하게 된다. 집 팔고, 사글세를 들게 되고, 하는 일마다 안 되어서 전락을 거듭하던 끝에, 맨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바로 달동네의 단칸방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밑바닥 인생이 바로 감옥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죄되고 격리된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호적 등본에 빨간 줄 가고 나면,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속된 말로 막 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귀다툼하는 곳이 바로 감방이다. 그래서 감방에 한 번 있어 봤던 사람들은 다시는 안 가려고 기를 쓴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그냥 투옥만 된 것이 아니라, 24시간 4교대로 붙여지는 감시병과 함께 사슬에 묶인 채로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신세 타령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 정도로 간단히 말하고 넘어간다. 그는 오히려 다른 일로 신이 나 있고 흥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에 그토록 흥분했던 것일까? 그는 12절에서 자기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이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이어지는 13절(믿지 않는 사람에게 준 영향)과 14절(믿는 사람에게 준 영향)에 나타난다.


13절을 좀더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믿지 않는 ‘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감시병들과 24시간 함께 묶여 있다 보니 바울의 생활이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시병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는 바로 나사렛 예수를 전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고, 그러면서 ‘도대체 예수가 누구 길래, 이런 사람이 그 인생을 송두리째 던졌을까?’ 궁금해졌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그분에 대해서 알고들 싶어하게 되자, 그것을 보고 흥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믿는 사람들에게 준 영향’이 어떤 것인지는 14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갇힌 것 때문에 믿는 자들이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지 않는가? 우리도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변화를 보고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전해진다는 사실에 오히려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본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의 고통은 아예 말할 가치 조차 없다는 듯,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는 통쾌한 KO승을 거두고 있다.


환경의 어려움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경제적으로 유난히 힘든 상황이어서 늘 돈이 없다보니 은행 잔고는 항상 한 자리 수와 마이너스(minus)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당시 12년 된 스테이션 왜건(Station wagon)을 몰았는데, 차 천장의 비닐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솜 같은 단열재가 눈송이 같이 내리던 차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창피하다고 학교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달라며 사정하곤 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라이드(ride)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약간은 창피스럽기도 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뒷자리에 둔 (야외요리용) 숯(charcoal)이 흘러 나와서 볼썽 사납게 바닥에 널려 있는 게 아닌가. 몇 달 뒤에 한국에서부터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농담도 섞여 있었지만) 우리가 몰고 다니는 차가 석탄차라는…. 학교 생활도 참 힘들었다. 숙제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박사자격) 종합시험(General Exam)도 어려웠고, 연구에 대한 부담(pressure)도 대단했다. 왜 심적인 부담을 많이 받으면 체질이 산성이 되어 딸을 많이 낳는다는 학설이 있지 않은가. 그 당시 한국인 부부들이 19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 중에 딸이 17명, 아들이 2명으로, 그 학설이 잘 맞는다고 모두가 ‘호!’, ‘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그리스도 없이 지날 때, 사람이 망가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처음 보스톤(Boston)에 도착해서 먼저 왔던 선배에게 인사를 하러 기숙사로 찾아 갔는데, 나는 사람이 바뀐 줄로만 알았다. 선배는 살벌한 표정에 흉칙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주 중에 스트레스(stress)를 엄청 받고 나면 금요일 저녁 차이나 타운(China Town)으로 달려가 쿵푸(Kung-Fu) 영화 보고, 거나하게 취해서 있는 대로 지도 교수 욕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밤새 카드로 지새우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주일에 연구실로 나가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사람이 완전히 황폐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절을 예수님과 함께 보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MIT 학생들이 중심이 된 Gate Bible Study(GBS)라는 모임이 있다. 금요일 저녁, 믿지 않는 학생들이 차이나 타운으로 달려갈 때, 우리들은 GBS에서 함께 모여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GBS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들이 모두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신수가 훤해지고, 아줌마들은 (원래 약간 젊기도 했었지만) 피부가 고와지고 얼굴이 달덩이같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모두에게나 다 똑같은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을 누가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여러분, 지금 처한 형편이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자.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열정이 나를 사로잡도록 하자. 그러면, 환경이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


인간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은 때로는 그 어떤 어려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바울에게는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본문을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빌1:15-18)


본문의 뉘앙스를 보면, 다른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이 투옥의 어려움 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감옥의 어려움은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간 것에 비해 인간 관계의 어려움은 15절과 17절에 걸쳐 두 번씩 이야기하고 있다. 하물며 ‘시기’와 ‘다투는 마음'(15절)을 언급하며 갈등의 동기까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투는 마음(경쟁심)과 시기심으로,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17절) 전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고약한 것은 17절에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고의적으로 고통을 가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별 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말을 흘리고, 자기들의 추종자를 만들어서 그런 평판을 퍼뜨리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뜨거운 것에 데어 진물이 흐르는 부위에다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잔인한 짓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열심이 있어 보이고 영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정말 야비하고 악질적이며 가장 비성서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나 시험받는 부분은 밖에서 오는 박해나 불이익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악의적 수근거림인 경우가 많다. 기도 제목 낸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설교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공공연히 건드리는 예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바로 내 안에 그런 성향을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자. 높아지고 싶어하고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DNA 안에 이런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 어느 문화에 가도 우리는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적인 정서는 이런 경향이 좀 더 심한 것 같다. 유난히 비교 의식이 강하고, 오기가 많은 한국 문화를 흔히들 ‘게’ 문화라고 한다. 장독 안에 게들을 넣어 놓으면, 혼자 힘으로 너끈히 기어 나올 수 있는데도 나오지를 못 한다. 나오려고 하면, 다른 게들이 밑으로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날 속담처럼, 남 잘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인정 안 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거 보라고, 그럴 줄 알았다’고 고소해한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상대방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렇지만 어떠냐?”고, “그게 무슨 문제냐?”(What does it matter?)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쓰라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The important thing is) 저들이 시기심으로라도 전도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라”며 기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로 그냥 끝내지 않고,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으로 뿐만 아니라, 의지적·감정적으로 그것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힘든 문제인 인간 관계의 문제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매가 하나 있다. 그런데 가끔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당하거나, 왜곡된 소문(rumor)에 시달리고는 한다. 주로 주위의 시기심과 경쟁 의식의 결과이다. 그런데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밝은 얼굴로, 그 아픔을 줬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게 된다. 속이 없는 여자같이 보인다. 그 비결을 물어 봤더니, 자기는 견디기 힘들 때는 혼자 방에 들어 앉아 몇 시간이고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되씹고 되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격이 가슴을 가득 채워서, 이런 고백이 나온단다. “나의 자존심과 긍지, 정말 중요해.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있어.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어.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바로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관계의 문제는 다음 9월호에서 좀 더 깊이 살펴 보도록 하겠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말한 환경의 문제나 인간 관계의 어려움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아마도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26절에서 그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빌1:19-26)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갇힌 것에서 결국 풀려 나는데(19절), 그의 간절한 기대와 바램은 “내 몸을 통해서, 살아있을 때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고 죽음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20절). 바울은 여기서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해서 26절까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그의 평소 속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가 죽음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나, 그가 살았던 이유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아직도 나와는 멀다고 생각되는가? 실감이 나지를 않는가? 그러나 죽음은 정말 멀지 않았다. 초등학교의 1년과 요즘의 1년은 다르다. 점점 가속이 붙어서는, 사십대 말의 1년은 정말 바람이 지나가듯 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물론 육십대의 어른들은 그냥 웃으시곤 한다. 얼마 전 정년 퇴임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즈음은 죽음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벽을 향해서, 마치 열차가 봉우리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무섭게 질주하는 것 같다고. 전에는 봉우리 반대편에 있어서 그것이 안 보였던 것 뿐이라고.


혹시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는가? 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깨려고 하는 것. 바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당장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TV의 건강프로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실직을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진 이런 두려움을 히브리서 2장 15절이 잘 말해 주고 있다 –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5).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죽기 싫어서 질질 끌려 사는 삶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끌려서 살아가는 삶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삼십대에 이 문제의 해답을 얻은 사람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요, 더 나아가서 이 해답에 부합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1절). 말이 좀 어렵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맥 가운데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는 것이 어떻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 –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23절).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죽음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공포가 간단히 해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Powerful’하게 극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죽음이 기다려진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에게 죽음에 대한 입장이 분명한 만큼, 그의 삶의 이유도 분명해졌다 –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1:24-25).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24절), 그들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 산다고(25-26절) 말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빨리 귀국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충분히 공부를 해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보자. 바울이 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막상 죽자니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분 때문에 죽는 것이 훨씬 기다려지지만, 그분이 맏긴 소명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자세로 하루를 살 때 그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못할 일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맡기신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앞의 두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이기게 한 능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감옥의 문제였을 때는 “지금 힘들지만, 곧 주님을 볼 거야. 그때까지 그분을 열심히 전하자” 라며, 그것이 인간 관계의 문제였을 때는 “힘들지만, 이까짓 것 뭐 중요해. 그분 맡기신 사명을 마치고 주님을 만나 뵙자” 라며 그는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었다.


그리스도와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인 것이다.


맺는 말


이번 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안부의 글을 통해 그의 삶의 모습(lifestyle)과 비결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처해 있던 어려움은 정말 힘든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문제를 능히 극복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인간 관계의 아픔을 전혀 문제도 안 되는 것으로 이겨내게 만들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교회는 나가지만 예수님을 오늘 본문과 같은 수준에서 만난 적이 없는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 체계가 아니며, 교회 생활이 곧 기독교도 아니다. 기독교란 바로 한 분과의 사랑의 관계이며, 그분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이 분을 만나서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큰 감격인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는다고 하는 분들도 함께 다짐했으면 한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먼저 죽음의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이유와 동기를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하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 생활에서 환경의 문제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능히 이길 것을 확신한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확신과 능력의 삶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다시 확인하였다(1장). 앞으로 9월호를 통해서는 복음 안에서 서로 섬기고 하나되는 것을 우리가 회복했으면 한다(2장). 10월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신앙 인격의 성장에 대해서 방향성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3장).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이 사회를 향해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팽동국]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eKOSTA 서평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코스타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앙 양서를 소개하여 유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코스타 집회 기간 동안 받았던 은혜들을 일년 내내 감동으로 간직하며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했던 1996년의 코스타에서 “언어의 마술사”, “황금의 입술”이라고도 알려진 이동원 목사의 그 감동적인 추천의 말들을 듣고 그분이 소개해 주신 책의 상당수를 구입하기도 했고, 또 기회가 되면 읽으려고 그 추천도서 목록을 기록해 놓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코스타 이후 그 감동을 기억하며 읽어보려고 했으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밀려드는 숙제와 시험, 그리고 연구 등으로 인해 샀던 책도 다 읽지 못 할 뿐 아니라 책 제목 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곤 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양서 소개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코스타 이후 나의 신앙 생활 전반에 걸쳐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있어 왔다. 나는 이에 대한 대안 중 하나가 바로 ‘연중 코스타’를 기치로 하고 있는 이코스타(eKOSTA)와 티엠코스타(tmKOSTA)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 이코스타에 양서 추천코너를 두어 좋은 책들을 소개하여 함께 읽어나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께 도움을 드렸으면 한다. 이 추천의 글이 여러분들께 충분한 동기 부여와 도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첫번째 책으로 이번 2001년 코스타를 통해 <복음과 상황>지의 서재석 부장이 추천해 주신 존 스토트 목사(이하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선정해 보았다. 저자인 존 스토트는 사실 거의 전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20세기를 거쳐 현재에까지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영적 거장이며, 성경 강해자, 저술가, 학자 등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1974년 로잔 언약의 입안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로마서 강해는 로잔 언약에서도 참고서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 시대 대표적인 기독 지성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산 것으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의 책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1958년 영국의 IVP를 통해 출판되었고, 한국 내에서는 1962년도에 처음으로 발행되어 2000년 1월까지 3판 19쇄 발행에 이르기까지 십여 만부가 발행된 스테디 셀러이자 이제는 기독교 고전으로까지 꼽히는 책이다.


존 스토트는 본서를 통해 ‘정직한 사람이 지적 자살을 행하지 않고도 동의할 수 있는’ 예수님의 역사성과 그 분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부터 시작해서, 그 분의 인격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서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내려고 하고 있다.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차차 머리가 커져 비판 능력이 생기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면서, 신앙 자체를 버리는 편이 신앙의 증거를 찾기 보다 쉬워지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또한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 한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존 스토트는 기독교의 가장 본질인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신 세 가지 영역 중, ‘창조’하신 하나님 외에도,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글을 시작하고 있는데, 독자들에게 부지런하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찾을 것을 촉구하며 구도자의 올바른 접근을 제시한다.


제1부에서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증거들을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과 그 분의 인격과 부활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고 있다. 여러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고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와, 죄와 생명과 진리와 세상의 심판에 대한 주장을 통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 그리고 기적과 표적들을 통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라는 역사적 인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사실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나가고 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 편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을 역시 예수님 자신의 견해와, 제자와 친구들의 견해, 그리고 예수님의 대적들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며, 더불어 우리 스스로도 이기심과 죄가 없으셨던 예수님, 즉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거를 검토함에 있어서, 시체가 사라지고 수의가 헝클어지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경험했던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다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부활을 증거했던 극적인 변화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졌다는 사실들을 조목 조목 들어가며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존 스토트는 신약성경 부분에서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그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근간으로 한 제2부에서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소극적 의미의 죄인 ‘결함’과 적극적 의미의 죄인 ‘위반’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을 ‘죄인’으로 단정하며 그 이유들을 십계명의 항목들을 검토하며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스토트는 이렇게 죄의 보편성과 성격을 살펴본 후에, 이러한 죄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과 분리, 죄의 내적 부패를 통한 노예화, 즉 자기에의 속박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타인과의 갈등이 야기되었을을 이야기하며,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본성의 근본적 변화 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죄를 폭로한 까닭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우리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기 위함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십자가의 중심성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있어, 우리의 본(本)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 죄를 담당하며 죽으신 그리스도를 마치 빠뜨려진 조각을 찾아 맞추듯 (베드로 전서를 중심으로) 잘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죄 사함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구원, 즉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속죄를 얻고 하나님과 화목된 우리를 더 나아가 성령을 통해서 자기 중심이라는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며, 교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사랑의 교제로 연합하게 하는 구원의 측면들을 종합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이 해야할 일을 다루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이란 비록 진정으로 할지라도, 단순히 일련의 제안에 대해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 그를 우리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야 되는 실제적 의미와 구체적 설명을 살펴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데, 이는 죄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 살고자 하는 동기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를 위한 동기 이어야 함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와 그 분이 하신 일에 대한 어떤 사실을 믿는 ‘지적인 믿음’이 ‘신뢰의 행동’으로 옮겨지고 ‘지적인 확신’이 ‘인격적인 의탁’으로 바뀌어져야 함을 지적하며, 각자가 예수님을 개인의 주님과 구주로 초청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을 행동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존 스토트는 이렇게 분명하고 개인적이며 의지적이고, 긴급하고 불가피한 ‘행동’을 마음으로 결정하고, 진정한 기도로 주의 약속을 신뢰하며 할 것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삶의 문을 예수님께로 열어 드린 사람들을 위해, 친밀하고 확실하며 안전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자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만의 특권’이라고 말하며, 이 특권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때의 책임과 의무란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제 자매로서의 교제를 바탕으로 한 ‘교회’에 대한 의무,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세상’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데, 스토트는 독자들에게 이를 잊지 말 것을 덧붙이며 이 책을 맺고 있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될 사람들은 이번 코스타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과 섭리하심으로 이번 코스타에서 예수님을 개인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신 분들이 이 책을 꼭 읽으셔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알고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논리적으로 복음을 잘 설명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도 본서는 아주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조장으로 섬기셨던 분이나 섬기시기를 원하시는 분들, 아니면 지역 교회나 대학 캠퍼스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시거나 준비하시는 분들 중에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필독하시기를 권한다. 나 개인적으로도 오래 전부터 이 책의 명성은 듣고 있었지만 읽을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지난 해에야 비로소 이 책을 읽고는 얼마나 후회했었는지 모른다. 미리 읽어 두지 못해, 전도할 때나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 잘 활용하지 못한 것과,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에게 권하거나 선물하지 못한 것을 말이다.


이 책과 함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서로 손꼽히고 있는 책을 소개하자면,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 지성인인 C. S 루이스가 쓴 <Mere Christianity>이다. 우리 나라에는 1949년에 처음으로 <내가 믿는 基督敎(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김주병 목사가 번역하여 대한기독교서회(大韓基督敎書會)에서 발간했으며, 그 이후 1991년과 2001에 각각 은성사과 홍성사에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 외 존 스토트의 대표적인 다른 저서들은 <로마서 강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등이 있습니다. 참고로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바탕으로 존 스토트가 쓴 성경공부 교재가 <Christian Basics Bible studies >라는 제목으로 미국 IVP에서 발간되었는데, 한국 IVP에서 편역해 <베이직 시리즈 1 – 그리스도>로 출판했음을 알려 드린다. 이 책을 읽어가며 구도자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면 복음 전도나 양육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함철훈] 우리들의 자화상

[함철훈] 우리들의 자화상

eKOSTA 갤러리


우리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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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다 태평양을 건너온 씨앗의 뿌리 내리기는 남의 얘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풀들이 무엇을 남겨야 한다면 씨앗입니다.
그런데 그 풀들이 씨앗 속에 담겨진 지울 수 없는 꿈을 터뜨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꿈이 바로 우리들에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꿈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KOSTAN들이 이루어낼 그 꿈들을 기대합니다.

[황지성] post KOSTA 신드롬 극복하는 법

post KOSTA

post KOSTA 신드롬 극복하는 법

1. post-KOSTA syndromes

2001년 7월 9일 월요일 아침, 창밖이 환하게 밝아있다. 아직도 코스타에서의 열띤 찬양과 기도소리는 귓가에 쟁쟁한데, 희미하고 몽롱한 정신으로 감지되는 햇빛, 그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각도와 강도를 보아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앗! 시간은 아홉 시 삼십 오 분, 여섯 시로 맞추어 놓은 알람 시계의 snooze 단추가 눌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 아침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 큐티를 하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늦었다! 코스타에 가려고 지도 교수님에게 눈치밥 먹으며 겨우 휴가를 받아 냈었는데… 오늘은 월요일, 지도 교수님이 실험실에 나오시기 전에 먼저 갔어야 했는데… 후다닥! 일어나 옷은 주섬 주섬, 아침 식사는 대충 건너 뛰고, 자동차 시동을 걸고 학교 실험실을 향해 마구 밟아댄다…. 어느덧 하루의 일과가 정신 없이 대충대충 지나가고…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피곤함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다.

왜 이렇게 공부와 연구는 재미 없는 것일까? 코스타의 열기는 내 마음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매일 코스타 같은 집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공부 다 때려치고 신학교에나 갈까? 그러면 매일 성경보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할 수 있을텐데… 아님, 이번 가을에 확 선교사로 나가서 일생을 선교지에서 살다 그렇게 그냥 죽어 버려? 왜 이렇게 공부가 재미 없지? 논문을 쓰려면 아직도 2년은 더 실험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학위 마치고 나서 나는 어디로 가지? 한국에 Job 사정도 어렵다는데… 그리고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과 나의 인생에서 내가 가야 할 길들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자, 나는 이제 마치 각개 전투를 하는 군인처럼 느껴지는 냉혹하고 고독한 현실 가운데로 돌아온 것일까? 나는 이제 또 한 해를 날마다 순간마다 그 수 많은 결정들을 홀로 내리면서 살아야 한다. 마치 두 갈래 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 서게 되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Savior)으로 모시면 그 분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Lord)이 되신다던데, 도대체 나는 이 “홀로 서기”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란 말인가?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구약의 지혜서인 잠언 3장 5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복된 삶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서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는 말씀은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 이상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실 때에는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그리고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돋우어 평탄하게 만들어 주시는 동행하심의 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발 앞서 가시면서 가야 할 길을 “예비해 주심”의 의미가 더 강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동행함”의 축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면에서 주님께 의지적인 순종을 해야 함을 이 말씀은 아울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나의 “감성, 지성, 의지”의 모든 면을 다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적인 면이 별로 성숙되어있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인격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초청에 응답하는 일, 즉, “의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기대감”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기대감을 갖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기를 원하는 그 초청의 은혜를 기대하는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그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의 지적인 활동을 통해 알아가게 되기를 기대하는 모든 지식적인 “탐구(연구)활동”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적인 활동은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전공분야에서 나에게 주신 지적 활동의 수행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참고: 본지에 계속 연재된 “이일형”의 글을 참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내가 “순종”할 의지적인 결단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매우 괜찮아 보이는 일들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에 놓게 되고, 성경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삶”(예레미야 17:5)을 살게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삶의 기저에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신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의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면 결국에는 나의 생각과 삶의 방식들이 하나님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매우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인식은 결국, 다음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처험하게되는 진정한 축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셋째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범사”란 나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의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이란 나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자원과 기회들이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기꺼이(감성) 탐구하며(지성), 그 알게 되고 느껴진 것들을 하나 하나 적용하며(의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은, 이 “범사”의 개념은 나 한 개인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이 때에 내가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게 모르게 관련된 다양한 공동체들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스타 기간 동안 열광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번 뒤집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력한 감성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의 삶이 하나님 없이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무기력 속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지성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의 성숙을 위해 나의 삶을 점검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대로 사는 법을 말씀 속에서 탐구해 나가고 내게 주어진 학문 활동을 진지하게 수행하며, 지식으로 알게 된 말씀의 원리에 나의 삶을 복종시키는 작업을 해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의 정황에 주어진 작고 큰 공동체의 모습들도 동일한 원리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데이트, 가정, 연구실, 캠퍼스 소그룹, 교회, 그리고 한민족 등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각오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삶의 점검과 성숙은 강력한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자아가 뒤집어지게(?) 열광한 것보다도 더 강력한 강도의 헌신을 요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마십시다. 이 길은 매우 즐겁고 흥분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나의 인생의 여정에 앞서 가시는 주님의 흔적을 기적과 같이 날마다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독 유학생의 열 두 가지 다짐을 위한 기도 제목

우리는 코스타의 마지막 날 밤에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헌신의 기도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이 기도 제목들은 “헌신”의 시간을 위한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사실은 앞서 언급한 잠언의 약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축복”의 기도 제목들입니다. 이 잠언에 약속된, 주님의 앞서 가시는 동행하심의 축복은 이 기도들이 나의 삶 가운데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체험의 폭이 넓어짐과 더불어 지식의 자라감과 의지적 순종이 다음 일년 동안 우리의 삶에 경험되어지기를 바라십시다. 이를 위해 이제 다음의 다짐들이 날 마다 나의 삶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한 해의 경주를, 기도하며 같이 시작하십시다.

1) 주 되심(Lordship)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적인 구주(Savior)일뿐 아니라 내 삶의 주인(Lord)이신 것을 고백한다. 또한 그분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인 것을 고백하며 살 것을 다짐한다.

2) 경건의 시간(Quiet Time) … 우리는 매일 일정 시간(30분 이상)을 떼어 놓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갖기로 다짐한다.

3) 중보 기도(Prayer) …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조국, 교회, 민족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수행할 것을 다짐한다.

4) 성경 연구(Bible Study) … 우리는 성경 말씀을 우리 삶의 좌표로 삼고 순종하기 위하여 매 주 일정 시간을 떼어 놓고 성경 연구에 투자할 것을 다짐한다.

5) 가정(Family) … 우리는 가정을 허락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할 뿐 아니라 이미 주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6) 교회(Church/Community) … 우리는 매 주일 정기적으로 캠퍼스 혹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7) 학문과 신앙(Study and Faith) … 우리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성을 훈련하며,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다짐한다.

8) 복음 전도(Evangelism) … 우리는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인식하고 매 학기 1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여 크리스천 공동체로 인도할 것을 다짐한다.

9) 해외 선교(Mission) …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문인 선교사 혹은 보내는 자로서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10) 이웃 사랑(Social Action) …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사회의 불의한 분야를 밝히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11) 통일 한국(Unification) … 우리는 곧 현실화될 통일 한국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공 분야에서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12)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 … 우리는 섬기는 리더십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알고, 캠퍼스와 앞으로 진출할 사회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최원영]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

살며 생각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


야베스의 기도(Prayer of Jabez)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지난 해부터 미국의 기독교 서점 베스트셀러로 올라선 뒤, 올해에는 USA Today나 Wall Street Journal과 같은 일반 매체의 베스트셀러가 되더니만,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이미 한국 기독 서점의 No.1 베스트셀러(7월 28일 현재 kbook.com No.1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Bruce Willkinson은 그가 신학교 시절, 교목인 Richard Seume 박사의 설교를 통해 역대상에 등장하는 야베스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이 ‘야베스의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야베스의 기도는 계속 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이 책은 축복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그가 해온 30년 간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그가 받은 축복(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경을 넓혀야 할 사역자가 받아 누려야 할 축복)과 깨달음을 간결한 필치로, 하지만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책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Amazon.com에 가보면 이 책에 관한 평을 볼 수 있는데 (7월 28일 현재 268개의 서평이 올라와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만큼 호평과 혹평으로 극하게 갈라진 경우를 나는 본적이 없다. 잠시 여기서 이 책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시선을 보도록 하자.


“Dangerous little book” (one star out of five) by Albert Cerussi
….However, the author goes way too far. He seems to indicate that if you pray this prayer then God will bless you. This sort of cosmic santa claus stuff is one step ahead of the infamous “name-it-and-claim-it” gospel. The author places way too much emphasis on this prayer and the words inside of it. The “Prayer of Jabez” is a classic case of over-reading into the Scriptures. Believers in Jesus who read this book should view it with caution…..


“A powerful book” (five stars out of five) by Doug Keating
…..One concern I had about the book was the issue of praying for abundance. Luckily, the author “hit the nail on the head” with this topic by focusing on what God wants to bless us with instead of what we want from God. After all, if we put our faith in God, shouldn’t we trust his judgement when it comes to his blessing our lives. I think that prosperity is one of the most misunderstood topics in the Christian community today, and hopefully this book will help solve that problem……


두 사람은 동일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다. Albert는 ‘위험한 책'(dangerous little book)으로, Doug은 ‘위력적인 책'(powerful book)으로 묘사한다 – 나는 Doug의 의견을 지지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축복을 받아 들이는 입장은 Doug과 Albert의 경우처럼 천차만별이다.


미국에서 “name it and claim it” gospel이 성행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한때 기복 신앙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기복 신앙의 눈에 보이는 해악은 하나님을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사다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퍼져 있는 일종의 “하나님의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다 – 이는 위의 Albert의 글 행간에서도 언뜻 언뜻 비친다. 잘못된 기복 신앙으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거부감이야말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약화시키는 해악이 아닐까 한다.


아니 축복에 왠 거부감?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다. 이것을 만일 기도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나에게 세상적인 축복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평생 하나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참 훌륭한 신앙 고백이지만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신앙 고백에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내 주세요, 내 앞길을 열어 주세요.” 우리가 간구해야 할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맏겨진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이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간구의 내용을 막는다는 사실이다.


축복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한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여기서 한참을 헤매었다. 일단 무슨 설교를 듣던지, 아니면 책을 읽던지, ‘축복’이나 ‘성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내 마음에는 Alarm이 울린다. ‘이거 뭐 또 기복신앙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귀를 쫑긋이 세우거나, 눈을 부릅뜨게 되었다.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의 세상적인 필요를 아뢰는 기도를 드릴때는 좀 창피한 생각도 들기도 하고 묵상 기도나 다른 기도가 수준 높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런 일종의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생각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뒤다. 강준민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또한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간구도 우리가 소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꿈꾸는 자가 알아야 할 21가지 믿음의 법칙, 78쪽)


우리의 간구가 씨앗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확을 거두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