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 2001 | 기독교인의 문화 탐구/영화 속의 숨은그림 찾기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우리들 안의 Mat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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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Mary Harron |
개봉연도 2000년 |
MPAA 등급 R 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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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 인물 |
Patrick Bateman 형사 Donald Kimball Paul Allen 약혼녀 Evelyn 정부 Courtney 비서 Jean |
Christian Bale Willem Dafoe Jared Leto Reese Witherspoon Samantha Mathis Chloe Sevigny |
얼마 전 우연하게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으로 유력했던 Leonardo DiCaprio의 비싼 몸값 덕분에 대타로 뽑힌 Christian Bale. 평소 ‘연기 잘 하고 잘 생긴’ Bale의 팬임을 자처하던 터라, 그리고 Willem Dafoe나 Samantha Mathis, Reese Witherspoon이나 Chloe Sevigny 같은 연기파 배우들의 호화 캐스팅에 일단 관심이 생긴 터라 여타 매체의 평론에 귀가 솔깃하면서도, 감히 영화관 가까이에 갈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이 영화의 장르가 ‘Gore/Slasher’라는 것이었습니다. Bret Easton Ellis의 원작 소설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 ‘피가 낭자하게 사람을 난도질해 죽이는’ 잔혹하고 불쾌한 묘사로 가득합니다. 영화 시사회에서의 인터뷰를 봐도 “우째, Christian Bale이…,” “저 사람이 내가 아는 Christian Bale 맞아요?”,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여가 흐른 뒤, 어쩌다 채널을 고정하게 된 HBO에서 이 영화가 나오자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매력 만점, 연기력 만점의 Christian Bale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 때문이었지요. (영화의 배경이 미국이어서, 그의 매력적인 영국식 영어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영화의 주제를 반영하듯) 아름답고 고급스런 영상이었습니다. 백색의 화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붉디 붉은 핏방울과, 섬뜩하게 번쩍거리는 은빛 칼. 역시 영화가 영화라서 그런지 시작부터 다르군. 그래도 빛깔 한 번 곱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칼은 고깃덩이를 무지막지하게 내려치고, 이어지는 화면은 손님에게 내갈 고급 요리가 담겨 있는 접시…. 핏방울인 줄 알았던 것은 케첩이었고 번뜩이던 칼은 요리용이었습니다. 이 첫 장면이 시사하듯, 영화의 시종일관 화면은 매우 아름답고 선명하며 스타일은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Gore/Slasher 영화에 웬 영상미에 코미디 타령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화려한 겉포장에 연연하는 등장 인물(들)의 끝갈 데 없는 허영을 조롱하는 영화의 주제를 생각해 본다면 Harron 감독의 이러한 연출 기법은 오히려 박수감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 30 여분 동안 진행되는 영화 앞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원거리로 잡은 행려자(homelss) 살해 장면 등 몇몇을 제외하면 직접적인 살인은 대부분 화면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고난도의 연출 기법으로 인해 장면 하나 하나가 그대로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뿐만 아니라 비릿한 피냄새가 코 끝에 질퍽하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왔다 갔다 채널을 돌리던 끝에, 다음 번 방송분을 찾아 일단 녹화를 해 놓고 끔찍한 장면은 Fast-forward로 지나가기로 했습니다. (“봐야 한다면 비디오로” – 이것은 <사이코>나 <양들의 침묵>같이 세간에 자자한 입방아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포 영화들을 보는 제 나름대로의 방법인데, 이렇게 끔찍한 장면들을 Fast-forward를 해서 보면 전혀 무섭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만 합니다. 그게 무슨 맛이냐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영화를 끝내고 나니, 애초에 NC-17 등급 판정을 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R 등급을 받으려고 여러 문제 장면을 삭제했다고는 하지만, 영화 전편에 담겨 있는 폭력적이고 잔학한,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 방법과 엽기적인 살인 도구들, 불쾌할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성적 묘사와 장면 등등…. 영화를 보고 도덕적으로 저속하다거나 역하다는 느낌을 받은 관객이 상당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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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난 개인적인 느낌은 먼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Christian Bale의 연기가 빛난다는 점입니다. 자신만만한 듯하나 위태롭고, 오만한 듯하나 열등감 덩어리고, 꽉 차 있는 듯하나 공허하고, 다 가진 듯하나 아무 것도 쥔 것이 없고, 함께 있는 듯하나 항상 혼자인 인물. 모순 투성이의 그 Patrick Bateman을 다른 누가 그렇게 연기할 수 있었을까요? (What’s Eating Gilbert Grape(1993년), This Boy’s Life(1993년), Total Eclipse(1995년) 등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DiCaprio도 연기파 배우임을 인정하지만, 이 영화의 Patrick은 오로지 Bale을 위해 만들어진 역할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위해 상당한 감량을 한 듯 보이는 그의 마른 얼굴과 그에 걸맞는 분장은 메마르고 잔인하며 야비한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맛을 더해 줍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세간에서 이야기 하듯, ‘헛된 세상 것을 추구하는 까닭에,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 특별히 ‘남성들의 (드러나는) 허세·허욕과 (감춰진) 폭력성’을, 1980년대의 미국 Wall Street를 무대로 그린 영화가 바로 <아메리칸 사이코>인 것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심도 깊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지막 반전이야말로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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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Gore/Slasher 영화의 하나로 그저 단순하게 넘겨 버리기에는 아까운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는 해도, “그렇다면 이 영화를 기꺼이 추천하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끔찍한 장면에 선천적으로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나 심약(心弱)하신 분들, 또는 영화의 숨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청소년들은 아예 처음부터 보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평소 전쟁 영화도 제대로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아직껏 <라이언 이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도 보지 못했습니다)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왕이면 생각할 만한 주제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를, 그게 어려우면 그 표현 방법이나 수단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지 않은 영화를 골라보는게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좋은 (숨은) 영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비슷한 교훈을 얻자고 굳이 비위가 상할 정도로 엽기적인 영화나 선정적인 영화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캐나다의 한 연쇄 강간살인범이 Ellis의 원작 소설을 읽고 그런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품게 됐노라고 자백했듯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는 그 그릇을 먼저 보고 그것을 모방하는데 발 빠른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요 –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파트에 틀어박혀 보는 비디오란 것이 모두 Porn이나 Gore/Slasher 영화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영화를 골라 글을 쓰는가?”라고 물으신다면, “특별히 Gore/Slasher 영화를 즐기시는 분들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또 저같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런 영화를 보게 된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심심풀이로 넘겨버리기보다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Patrick Bateman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넘치도록 갖춘 것만 같습니다. Harvard 졸업에 Wall Street에서 내노라 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합병·매수(mergers & acquisitions)를 맡아하고 있는 그는, 회사의 절친한 다른 부사장 친구들 사이에서 “이성의 목소리”(He’s the voice of reason), “(이웃처럼) 친근한 놈”(the boy nextdoor)라고 불리울 정도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일단 자신의 겉모습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아침 독백을 듣다 보면, 여자인 저도 알지 못하는 심오한 미용 비법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니까요. 날마다 이대로 하려면 참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예뻐지고 싶은 분들은 다음을 읽어 보시고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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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Patrick Bateman. I’m 27 years old. I believe in taking care of myself, in a balanced diet, in a rigorous exercise routine. In the morning, if my face is a little puffy, I’ll put on an ice pack while doing my stomach crunches. I can do a thousand now…. After I remove the ice pack, I use a deep pore cleanser lotion. In the shower, I use a water activated gel cleanser. Then a honey almond body scrub. And on the face, an exfoliating gel scrub. Then I apply an herb mint facial masque, which I leave on for 10 minutes while I prepare the rest of my routine. I always use an aftershave lotion with little or no alcohol, because alcohol dries your face out and makes you look older. Then moisturizer, then an anti-aging eye balm, followed by a final moisturizing protective lo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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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그는 피부 마사지와 손톱 가꾸기, 살갗 곱게 태우기에도 열심을 내며 미용 살론에 드나듭니다. 그리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할까에 불안해 하며 전전긍긍하고는 합니다. 약혼자 Evelyn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며 Patrick은 걱정을 합니다 – “I’m on the verge of tears by the time we arrive at Espace, since I’m positive we won’t have a decent table. But we do, and relief washes over me in an awesome wave.” 그리고는 “메뉴가 메탈에 점자(點字)로 새겨져 있네”(The menu’s in braille)하고 Evelyn의 사촌이 건네 주는 메뉴판에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을 물론(!)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겉모습 치장에 연연하기는 그의 다른 친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Valentino Couture 양복과, 부티나는 Oliver Peoples 안경, 최신 스타일의 헤어컷, 고급스런 명함 등으로 경쟁하듯 자신을 두르고, 서너 명이 먹은 식사가 한 번에 570불이나 (그것도 80년대에) 하는 최고급 식당을 “거, 나쁘지 않구만”(Speaking of reasonable, only 570 dollars. That’s not bad)하고 다니는 허세를 부립니다 – 당시 최고의 식당으로 여겨지는 Dorsia란 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처럼, 모두 다 거기에 자리를 예약하는데 목숨을 걸고 있는 듯 보입니다. 80년대 댄스 클럽 복장과 전혀 안 어울리게 튀는 고급 양복을 입은 채로, 클럽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무시하고 돈으로 새치기를 하며 특권층인양 으시댑니다.
이런 무리들과 어울려 한 몫을 하고자 Patrick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는, Robert Palmer의 신곡 “Simply Irresistible”이 들리는 헤드폰 속 자기 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그에게 앵앵거리는 약혼자를 귀찮아하며 그가 내뱉는 한 마디, “Because I want to fit in!”에서 알 수 있습니다. Christian Bale은 인터뷰에서, (앞서 말한) Patrick의 아침마다의 정성어린 자기 가꾸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위해 촬영 직전 분장을 하듯, 세상과 어울리기 위한 연기를 하기 위해 Patrick도 분장을 하는 것이라고. 피부 Masque를 벗기면서 Patrick은 말합니다 – “There is an idea of ‘a Patrick Bateman’. Some kind of abstraction, but there is no real me. Only an entity – something illusory. And though I can hide my cold gaze, and you can shake my hand and feel flesh gripping yours, and maybe you can even sense our lifestyles are probably comparable, I simply am not there.”
그러나 그런 가상한 노력은 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에서 우리는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쟤 Paul Allen 아냐? 아니, 그건 Reed Robinson이구, Paul Allen은 저기 있잖아…. 같은 회사에서 몇 년을 부사장으로 함께 있으면서 그들은 아직까지 얼굴을 헷갈려합니다. 그런데 같은 부사장이긴 하지만 남들 눈에 유난히 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인공 Patrick입니다. 특히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부사장으로 묘사되고 있는 Paul Allen은 언제나 Patrick을 다른 부사장인 Marcus Halberstram이라고 생각하는데, Patrick은 그것을 당연하다(logical)고 합리화합니다 – “Allen has mistaken me for this d***head, Marcus Halberstram. It seems logical because Marcus also works at Pierce & Pierce, and in fact does the same exact thing I do. He also has a penchant for Valentino suits and Oliver Peoples glasses. Marcus and I even go to the same barber, although I have a slightly better haircut.” Evelyn의 말로 미루어 보아(Your father practically owns the company. You can do anything you like, Silly.), Patrick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자란 인물처럼 보이며 어쩌면 Harvard도 집안 배경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낙하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사교적이지 못한 그의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능력있는 (Yale 출신의) Paul Allen에게 항상 무시를 당하는 Patrick은 마음 속에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Paul에 대한 불같은 경쟁심은 (그 유명한) 명함 장면에서 잘 나타납니다. 자기는 예약도 못하고 조롱만 당한 Dorsia에 (그것도) 금요일 밤 자리를 얻었다는 Paul의 자랑에 열이 받을 대로 받아있는 터에, 어제 새로 뽑아 자부심이 대단하던 자기 명함을 무색하게 하는 Paul의 점잖고 품위있는 명함을 보고 Patrick은 이성을 잃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거리의 행려자를 죽입니다. 그 장면에 놀라는 옆의 강아지까지도.
그리고 얼마 안 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여전히 자기를 Marcus로 생각하는 Paul과 저녁 약속을 한 Patrick은, 역시 Dorsia에 갔었어야 했다는 둥, 자기라면 거기 예약을 할 수 있었다는 둥 불평을 하는 Paul에게 슬슬 비위가 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동료의 불편한 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오만을 드러내던 Paul은 결국, 자기가 Marcus라고 알고 있는 상대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Paul |
그런데 (네 애인) Cecilia는 어때? 지금 어딨는데? (And uh- Cecilia. How is she? where is she tonight?) |
Patrick |
Cecilia! 어…, 음…., 내 생각엔, 음……, Evelyn Williams하고 저녁 먹고 있을걸. (Cecilia! Uh…, well…, I think she’s having dinner with, ummmm, Evelyn Williams.) |
Paul |
엉덩이 이쁜 Evelyn 말야? 그 멍청이 Patrick Bateman의 애인이지. 그런 얼간이 놈! (Evelyn? Great ass. Goes out with that loser Patrick Bateman. What a dork!) |
Patrick |
(열 받아서) 마티니 한 잔 더 할래, Paul? (Another Martini, Paul?) |
영화 후반부에서 암시되는 바로, Patrick이 이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은 아주 훨씬 이전부터임을 알 수 있지만, 어쨌든 화면상으로는 이렇게 Paul을 살해한 이후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살인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살인 도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상천외하고 다양하며 그 방법 또한 매우 잔인한데,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 대상이 주로 여자라는 점입니다. Paul과, 우스꽝스런 이유로 살인에 실패한 Luis를 제외하고는, 행려자나 여자들과 같은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분노와 좌절감을 터뜨리며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도입 부분, 여러 사람들과 어울린 식당 테이블에서 행려자나 여성, 황금만능주의 등에 대한 그의 현학적인 일장연설을 기억한다면, Patrick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입으로는 인권이니 여권(女權)이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면서, 그리고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에게는 힘도 못 쓰면서, 그 울분이나 스트레스를 약자를 상대로 풀고, 그들을 상대로 잘난 체를 하는 이중인격자를(다른 평론에서는 ‘남자들’이랍니다. 형제님들, 죄송합니다.) 대표하는 것입니다. Patrick은 순진한 비서 Jean의 외모를 놓고 함부로 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여자를 비하하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며, 클럽에서 만난 여자 모델을 대놓고 무시하고 약혼녀 Evelyn에게 절교를 선언할 때도 냉혈한이긴 매 한가지입니다. 거리의 여자들을 아파트에 데려다 놓고는, 스스로를 능력있는 Paul로 위장하여 으시대며 평소에 받지 못하던 인정을 얻고자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Patrick |
내가 뭐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 (Don’t you wanna know what I do?) |
여자들 |
아뇨. 아니 별로요. (No. No, not really.) |
Patrick |
(무시하고) 거 뭐냐, 난 Wall Street의 Pierce & Pierce란 회사에서 일하는데, 들어본 적 있나? (Well, I work on Wall Street for Pierce & Pierce. Have you heard of it?) |
여자들 |
(전혀 관심없다는 반응) |
Patrick |
(실망한다) |
여자들 |
(집안을 두리번거린다) |
Christie |
와, 집 좋네요, Paul. 얼마나 주고 산 거에요? (You have a really nice place here, Paul. How much did you pay for it?) |
Patrick |
사실, 니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싸지는 않았다고 말해줄 순 있지. (Well, actually, that’s none of your business, Christie. But I can assure you, it certainly wasn’t cheap.) |
어쨌든 계속되는 엽기적 살인행각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게 된 Patrick은 길에서 고양이를 죽이고, 그걸 보고 뭐라고 하는 할머니를 죽이고, 그걸 보고 추격하는 경찰들을 죽이고, 아파트 수위와 청소부까지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 장면의 묘사가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만화 같기만 한데,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 연출임을 나중에 알 수 있게 됩니다.) 회사 자기 사무실에 쫓기듯 들어온 그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관객도 몰랐던) 살인행각 모두를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는 메시지를 자동응답기에 남깁니다.
다음날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찾아간 Paul Allen의 아파트. 그런데 그곳은 알고 보니 남의 집이었습니다. 혼란함에 휩싸인 Patrick은 평소 그를 연모하던 자기의 비서 Jean에게 전화를 겁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다시 변호사를 찾아 Harry’s Bar로 나서지만 슬프게도 자기 변호사조차 그를 Davis라는 다른 인물로 착각하는게 아닙니까. 어제 응답기의 메시지를 기막힌 농담으로 받아들인 변호사는 그에게 말합니다 – “Davis, 내가 누굴 험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야, 뭐, 농담이 끝내 주긴 했지만, 그래도 … 자넨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그런 얼간이 Bateman을 두고 그런 농담을 하다니. 얼마나 따분하고 줏대없고 시시한 인간인데….” (Davis, I’m not one to bad-mouth anyone. Your joke was amusing. But … you had one fatal flaw. Bateman is such a dork. Such a boring, spineless lightweight….) 그게 아니라고, 자기가 바로 Bateman이고 Allen을 죽인게 사실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Patrick에게 변호사는 급기야 화를 내며 말합니다 – “하지만 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이런 농담 더 이상 유쾌하지도 않군…. 그건 불과 10일전 내가 Paul Allen과 런던에서 두 번이나 저녁을 먹었기 때문이야.” (But that’s simply not possible, and I don’t find this funny anymore…. Because I had dinner with Paul Allen twice in London just 10 days ago.)
이제까지의 엽기적인 모든 살인 행각이 사실은 그의 머릿 속, 그만의 Matrix에서 일어난 환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Patrick이 Paul Allen의 피가 배어 나오는 슬리핑 백을 질질 끌고 나가도 아파트 수위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아파트 밖의 장면에서 이제까지 보이던 바닥의 핏자국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대로) 충격적인 길거리의 연쇄 살인(특히 경찰차가 권총 한발에 폭발하는 장면)이 너무나 만화처럼 그려진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열쇠는 영화의 도입 부분에 나타납니다. 댄스 클럽의 바에서 크레딧카드를 내미는 Patrick에게 여자 바텐더가 여기선 현찰만 받는다고 면박을 주자, 그녀의 등에다 대고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 “You’re f****** ugly b*t*h! I wanna stab you to death and play around with your blood!” 하지만 바텐더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그에게 술잔을 건네고, 그는 태연히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무시무시한 독설을 그녀가 듣지 못한 것은 클럽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망신을 당한 그 순간 바텐더에 대해 품은 Patrick의 악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런 결말을 두고 ‘비겁하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5장 21-22절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머릿 속에 품는 형제에 대한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살의 등을 이 영화의 실제적인 살인 장면과 다른 것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는 머리로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명하시는데, 어떤 사람더러 바보라고 생각만 해도 그것은 살인이라 말씀하시는데, 이 영화의 끔찍한 장면만을 살인이라고 말할 사람이 감히 있겠는지요? 우리들 머릿 속, 우리들 안의 Matrix 속에서 우리는 오늘 또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지요? –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어쩌면 Kimball은 이미 죽은 듯한 그의 ‘양심’을, Jean은 참된 ‘사랑’에 대한 그의 갈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화에서 행려자를 죽이고 난 후, Patrick은 다음과 같이 독백을 합니다 – “살과 피, 피부와 머리카락, 인간임을 나타내 주는 모든 특질들을 나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단 하나의 (인간의) 감정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과 혐오 밖에는.” (I have all the characteristics of a human being – flesh, blood, skin, hair, but not a single, clear, identifiable emotion, except for greed and disgust.) 비록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양심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기에, Kimball의 집요한 추적에 식은 땀을 흘린 것이었을 겁니다. 혐오감 밖에 남은 건 없다고 아무리 우겨대도 그 역시 참된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기에 그 사랑을 차마 죽여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Patrick은 탐욕과 혐오가 넘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약한 육신의 슬픈 자화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우리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이 아닌지요.
Sep 1, 2001 | 유학생 사역
유학생 사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현황
(Big Ten 지역의 Case를 중심으로)
* 아래의 내용은 중서부의 Big Ten 학교 주변에 소재한 9개 지역의 29개의 한인 교회와 미국교회 (한국 유학생 사역이 있는 교회)를 직접 방문과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설문 조사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를 싣고 다음 호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를 싣고자 합니다.
1. 지역, 학생 현황
1) 대상 지역 Penn State와 North Western을 제외한 9개 지역 29개 교회
*Penn State는 지역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Northwestern은 한국 교회가 200개 넘는 대도시에 소재 했기에 설문 대상 지역에서 제외되었음
2) 도시 성격
a. 이민자 중심의 도시: 미네소타 (U of M), 콜롬부스 (OSU)
b. 유학생 중심의 도시 (불루밍턴, 어바나 샴페인, 렌싱, 아이오와 시티, 라피엣, 메디슨)
c. 중간 형태 (Both): 앤아버
3) 한국 유학생 수 (International office에서 나온 자료가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은 지역도 있음): 평균 400-500명, 배우자 포함 600-750명
Illinois (600), Indiana (600), Iowa (300), Michigan (700), Michigan State(600, 학부 200명 포함), Perdue (350), Minnesota (450), Ohio State (800), Wisconsin (500)
4) 학생 구성 (다수):
a. 전체 비율: 대학원 married > 대학원 single > 학부
b. 지역별 특이점:
– 렌싱, 콜롬부스: 대학원 숫자가 많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학부생의 숫자가 많은편
– 어바나 샴페인: 2세 숫자 많음, 대 규모 영어권 사역 (CFC)
2. 교회, 교단, 사역자 현황
1) 교회, 교단
a. 대학 도시에는 평균 3-4개 정도의 한국 교회 존재 그외 지역에서는 유학생이 많이 모이는 교회 선별: 미네소타 3 개, 콜롬부스 5개, 앤아버 5개.
b. 교회 내 유학생 숫자 (평균 출석 인원)
151 이상(2), 126-150 (4), 101-125 (2), 76-100 (5), 51-75(7), 26-50 (7), 1-25 (1) 미파악 (1)
c. 유학생 비율: 전체 교인과의 비율 (평균 출석 인원)
100% (2), 90% (4), 80% (7), 70% (4), 50-60% (2), 30-40% (5), 30%미만 (4), 미파악 (1)
* 특이사항: 교환 교수, 의사들, 단기 연수 공무원이 출석교인의 10% 정도
c. 교단별 현황: 감리교>장로교>침례교>독립 교단
-퍼듀와 위스칸신을 제외한 7개 지역에 UMC (Unitend Methodist Church)교회
– 앤아버, 렌싱, 아이오와를 제외한 6개 지역에 PCUSA (Presbyterian Church of USA)교회
* 이유: UMC, PCUSA, 남침례교의 교단적 차원에서 교회들을 개척하고 경제적도 지원했 기 때문. 그리고 UMC와 PCUSA의 교단 내에 학원 사역 협의회가 있음 (Campus Ministry Committee)
d. 교회 성격: 출석수의 다수에 따라 교회의 성격을 구분
– 이민자 교회: 미네소타(3/3), 콜롬부스 (3/5), 앤아버 (2/5)
* 이 세 지역은 유학생이 20명 이상 있는 교회만 설문 조사를 함
– 유학생 교회: 그 외 모든 지역
* 특이점: 유학생이 다수 이지만 사역의 초점이 이민자 중심의 교회들도 많이 있다.
– 영어권 2세 독립 교회: 어바나 샴페인, 앤아버
2) 사역자
a. 연령: 30대 중반 (1), 30대 후반 40대 초반(7), 40대 중반(6), 40대 후반 50대 초반 (1), 50대 중반(9), 50대 후반 60대 초반(2), 60대 중반(2), 미확인 (1)
b. 배경: 공통적인 것은 거의 다 미국 유학 경험 (1분 선교사 경험, 다른 나라 이민 목회 1명)을 갖고 있고, 이민 목회 혹은 유학생 사역 경험이 있음. 그리고 1.5세 사역자 (중고등학교나 대학을 미국에서 마친 분)도 3명 있음
c. 부 교역자
– 유학생 (청년부) 사역을 위한 부 교역자: 미네소타(4), 인디아나 (1), 일리노이 (1) : 전체 6명이고 100% part timer.
* 이유: 대부분 그 지역에 신학교가 없고, 재정적인 문제로 유학생 사역을 위한 부교역자를 두고 있지 못함 : 대안- 간사 제도, 부장 제도, Coordinator.
– 영어권 부 교역자: 앤아버(4), 미네소타 (3), 아이오와 (1), 콜롬부스 (1), 인디애나 (1), 렌싱 (1), 위스칸신 (1): 전체 12명 (독립된 2세 교회 제외)이고 그 중 4명이 full timer.
* 이유: 한국어권 유학생은 담임 목사님이 직접 맡으시고 영어권 부 교역자를 따로 두는 형태 or 1세와 영어권 사역에 비해 유학생 사역이 우선 순위에서 떨어짐.
3. 사역의 Focus (다수 A>B>C)
1) 구성원에 따라 (majority)
Type A: 유학생 교회/ Type B: 이민 교회 / Type C: 중간 형태
2) 목회자와 리더십의 사역 철학
Type A: 유학생 사역 중점/ Type B: 이민자 사역 중점/ Type C: 구분 없이
3) 실제적 양상: 사역 구조, 내용, 행정
Type A: 전통적 한국 교회 스타일, 교회를 manage 하는데 focus. 맹목상 유학생 사역, 청년부라는 하나의 부서에 제한된 형태
Type B : 유학생 전도 제자훈련 양육 파송에 focus
4. 유학생 사역의 구조 (다수 A>B>C>D)
1) Type A: Single 과 Married로 나눔:부서 임원 리더의 이원체제 (청년부/ 청장년부)
A-1: Single 과 Married 모임 따로 (싱글: 청년회, 성경공부/ Married: 청장년부, 유학생끼리 소그룹, 속회, 구역, 목장)
A-2: Single 과 Married로 나누고 Married는 이민자와 함께 구역으로 편성
A-3: Single과 Married로 나누고 Married를 신혼(무자녀)과 구혼 (유자녀)로 나눔.
2) Type B: Under와 Graduate로 나눔
B-1: 학부와 대학원만 분리
B-2: 학부/ 대학원 single /대학원 married로 분리
3) Type C: Single 과 Married 같이: 일원체제 (부서, 임원, 리더)
C-1: Single 과 Married 전체모임 같이, 소그룹도 섞어서.
C-2: Single 과 Married 전체 모임 같이, 소그룹만 따로
4) Type D: 구분 없이 이민자와 함께 목장/속회/ 구역에 소속
5. 유학생 사역의 내용 (다수 A>B>C>D)
1) 소그룹:
a. 소그룹 형태
Type A: 성경 공부 중심- 소그룹 성경 공부
Type B: 교제 중심 – 구역/ 속회
Type C: 교회 봉사와 관리를 위한 행정 구조 중심
Type D: sharing 중심- 목장
b. 소그룹 인도
Type A: 학생 리더
Type B: 부장 (집사, 이민자, 유학생 출신, 교환 교수)
Type C: 교역자가 직접 (목사, 전도사)
c. 성경 공부 형태
Type A: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Type B: 전체로 같이
d. 모임 횟수
Single: 매주/ Married: 매주> 격주> 월별
2) 경배와 찬양: 주로 sinlge들 모임 (청년회)의 중심 역할 :찬양 team
3) 기도회: 새벽, 전교인, 캠퍼스, 아줌마, 중보 기도 team.
4) 구역장/ 속장/ 인도자 모임
5) 조장훈련/ 제자 훈련: 양육과 제자 훈련 중심의 교회에만 한정
* 실제 현황: 유학생 사역의 구조와 내용은 목회자의 사역 철학, 구성 인원, 훈련된 리더 숫자, 담당 부서 사역자의 유무, 교회의 현실적 상황, 학생들의 need 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Quality는 교회 전체의 건강도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6. 교회 전체 사역과 유학생 사역 (다수 A>B)
1) 교회 행정과 유학생 사역
a. Type A: 교회 행정과 의사 결정은 이민자 중심/ 유학생 사역 내용은 유학생 자치적
b. Type B: 교회 행정과 의사 결정 구조에 유학생 참여 비율 높음
* 대학촌의 유학생 교회일수록 Type B가 많음
* 대학촌의 유학생 교회들은 당회나 제직회 보다 실제적으로 목회 협력 위원회, 임원회, 운영 위원회를 중심으로 행정과 의사가 결정됨
* UMC 교회일수록 행정과 의사 결정에 유학생의 참여도가 높음 (But 사역 내용과는 무관)
2) 교회 전체 사역에 유학생 참여도
a. 주로 성가대원, 주일 학교 교사, 식사 당번으로 봉사. cf. 관리, 청소
b. 위의 Type B의 교회에서 임원회, 목회 협력 위원회, 운영 위원회 제직회에 참여
7. 다른 형태의 유학생 사역
1) 미국 교회 내의 한국 유학생 사역부 (아이오와, 미네소타)
2) 캠퍼스 모임 (인디애나: 경배와 찬양, 기도회 중심)
8. 지역내 다른 교회와의 관계, 협력과 연합
1) 현황: 지역에 따라 다양함
a. 거의 관계를 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갈등도 없는 지역
b. 갈등이 심한 지역
c. 표면상으로 협력 하는 지역
d. 협력과 연합이 잘되는 지역
2) 협력과 연합의 유형
a. 학생들 차원 b. 목회자 차원 c. 교회 차원
3) 협력과 연합의 유형
a. 신입생 contact 연합으로 (미시간, 어바나 샴페인, 미네소타)
b. 연합 기도회, 찬양 모임, 체육대회
c. 개강예배, 신입생 환영회, 부흥 사경회, 유학생 전도 집회
d. 부활절 새벽예배, 성탄절 찬양 집회
e. 목회자들의 정기적 교제, 강단 교류
Sep 1, 2001 | 기독교적 세계관
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1. 문화(culture)와 세계관(worldview)
인류학(anthropology)에서는 ‘사람이 살아나가는 삶의 총체’를 가리켜서 ‘문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람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사회에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험한 세상에서 생존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과 그 결과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문화’라고 말한다. 따라서 집단을 이루고 사는 모든 인간 사회는 문화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문화가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또한 그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정신 및 물질 세계를 다 포함한다. 문화를 장기 게임에 비교해 보자. 장기를 두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장기라고 하는 게임의 내용들, 그리고 이 게임에 부수되는 모든 것들을 문화의 내용들이라고 말한다면, 이 장기 게임의 규칙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규칙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키며 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삶의 규칙은 문화권들마다 다르고 또 세분하면 사회마다 다른데, 그 이유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민족 혹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같은 말을 사용하고 같은 관습 속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며 살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정신적인 힘과 그 구조를 가리켜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관의 내용들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이해’란 ‘세계관의 이해’와 다름 아닌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요, 한 문화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의 내용과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또 서로 다른 문화권의 세계관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해할 것인가? 본 소고가 계속 다루고자 하는 주요 관심이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다. 세계관의 개념이 비록 전문적이고 기술적이기는 하지만, 이 개념에 익숙해지게 되면 다양한 문화권에 노출되어 살며 사역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인간의 다름과 다양함이 문화적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데에 큰 힘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의 이해를 추구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서이다. 참 인간애(人間愛, the loving of people)는 진정한 인간 이해(人間理解, the understanding of people)에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의 절정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닿아 있음을 잘 증명해 주는 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러한 삶이 기독교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사랑과 선교의 실천을 위하여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2. 세계관이란?
세계관이란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실재(reality)에 대한 인식(perception)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철학이나 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지성인들이 고민하면서 얻어낸 그러한 종류의 철학적 세계관과 다른 개념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구태여 증명하고자 하지 않고, 늘 믿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이해들을 가리킨다.
Piaget나 그의 영향을 받고 세계관의 개념을 발전시킨 Kearney와 같은 학자들은 세계관을 형성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환경을 꼽는다. 이에 대하여 나 자신도 실제 사역과 현장 연구 등을 통하여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은 환경이라고 하는 실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변 환경을 통하여 자기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면서 형성된 믿음의 전제들(assumptions)과 가치들(values)과 감정들(emotions)을 포함하는 사고의 구조를 세계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환경은 특별히 물리적인 환경과 사회적 환경과 정신적(혹은 영적) 환경의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리적 환경은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환경, 즉 지형이나 기후 및 동식물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환경은 어느 한 집단이 계속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른 집단들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 역시 사회적 환경에 포함된다. 따라서 정치적 내지 외교적 기술을 필요로 하는 환경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환경에 대하여서 일반 문화인류학자들은 거의 동의한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의 정신적 혹은 영적 환경은 많은 경우에 무시되거나 간과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진화론에 입각하거나 실증주의와 이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정신적 혹은 영적 세계는 사람들의 환경이기보다는 하나의 내면의 현상 혹은 자연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서구 세계에 속한 대다수의 사회는 영적 세계와 여기에 속한 영적인 존재들을 자신들의 주변 환경으로 믿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역하고 또 현장 리서치를 하였던 아프리카 동해안의 스와힐리(Swahili) 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진(jinn)이라고 하는 영들과 또 아프리카 전통인 미지무(mizimu) 영들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며 이 영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온갖 종교 의식들을 만들어낸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이처럼 영들을 다루는 종교 의식들을 발달시킨 것은 이들의 세계관 때문이다. 이들이 역사 속에서 계속 경험하여 온 영적 환경에 대한 인식이 이들의 세계관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세계관은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은 물리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라고 하는 환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우주 및 영적 환경에 대한 이해들로 구성되어 있다. Redfield나 Kearney 등의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보편적인 인간의 인식 범주들이다 – 이에 대하여서는 차후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환경들을 어느 한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들과의 만남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문화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든 문화의 부산물들과 제도 및 관습들은, 주위 환경들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그 문화권 사람들의 세계관의 반영이기 때문에, 문화적 형식들을 깊이 연구하게 되면 그들의 세계관이 보이게 된다.
문화 충격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세계관의 충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문화 충격을 훨씬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의 기술도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더 진실하게 사랑하기를 원한다.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힘은 진실한 인간 이해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러한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기 위하여서 많은 독자들이 세계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다음 호에서는 한 개인의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하여, 즉 문화화(文化化) 과정이라고 하는 enculturation에 대하여, 그리고 그 결과 형성된 세계관의 구조와 기능들에 대하여, 예를 통해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Sep 1, 2001 | 기독교적 세계관/세계관 대담
세계관 대담
VIEW 양승훈 교수와의 대담
eKOSTA 교수님께서는 언제 어떤 계기로 코스타를 참석하게 되셨고, 첫 느낌은 어떠하셨는지요?
양승훈 1990년 7월 위스콘신 매디슨에서 과학사 석사 과정에 있을 때 메디슨 한인 장로교회 청년부원들과 함께 볼티모어에서 열린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라 자세한 기억은 없는데, 그 때 주 강사가 임영수 목사님(당시 영락교회 담임)이었고, 성경 강해가 참 좋았습니다. 그 때의 장소는 St.메리대학(Saint Mary College)던가 그랬는데 위튼대학(Wheaton College)와 비교해보면 시설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4번 정도 미국 코스타에 참석했으며 밴쿠버 코스타에 3번 참석했습니다. 밴쿠버 코스타는 3년 전에 시작했으며 사이몬 프레이져 대학(Simon Fraser University)과 제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Trinity Western University)에서 모이고 한 해는 역내 한인교회에서 Youth 코스타만 참석했습니다.
eKOSTA 코스타에서 많은 강사님과 학생들을 만났을 텐데, 특별히 기억이 나는 만남이 있거나 코스타 이후 지속된 만남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죠.
양승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쁨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 함께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던 분들을 코스타에서 재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KOSTA 코스타가 올해(2001년)로 16회가 되었는데, 코스탄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력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양승훈 코스타가 현재 국내의 지도층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은 가시적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횟수로 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길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학생 운동에는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생각됩니다. 그 예로 작년에 있었던 SM2000 같은 운동을 들 수 있겠지요. 그 외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전공별 모임, 예를 들면 교사들 모임인 기독교사회 같은 모임도 코스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대학 기독 단체도 영향을 받았고 또 많은 코스탄들이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장평훈, 박건식 교수님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학생이 교수가 되어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또 객원교수 등으로 오셔서 코스타에 참석 후 변화되어 가신 분들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eKOSTA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구체적인 힘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힘으로서의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겠군요. 코스탄들이 한국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코스탄 출신들의 모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한데 교수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양승훈 코스타가 지금까지는 일년에 한번씩 모이는 단회적인 모임이었기에 계속적인 관계(fellwoship)로 발전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eKOSTA, tmKOSTA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의견들(feedback)을 수렴하여 코스탄들 간의 관계가 강화되고, 그런 다음에야 어떤 사역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작년 코스타 이후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eKOSTA나, tmKOSTA 등의 코스타 사역들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코스타의 감동을 일년 내내 누리면서 주어진 환경과 선교, 전공 분야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앞으로 eKOSTA와 tmKOSTA의 방향과 예상되는 한계가 있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양승훈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홈 페이지를 만드는 이 외에 이메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홈페이지를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이메일을 보냄으로서 관심을 능동적으로 유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실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내용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 좋은 내용들, 유용한 정보들이 있을 때, 자주 찾고 읽게 됩니다. 가치가 있어야 읽게 되거든요.
eKOSTA 고맙습니다. 지금까지는 전반적인 코스타에 대한 의견을 여쭈어 봤는데요, 이제는 화제를 바꾸어서 교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양승훈 VIEW는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의 약자입니다. 대학원이라고 하니까 독자적인 건물과 기관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Trinity Western University(TWU)라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기독교대학의 신학대학원의 한 학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학위도 TWU 학위이며, ATS(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의 학위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잘 셋업된 기독교 대학의 신대원에 세계관 대학원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들어가서 VIEW에서 운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ATS 학위인정을 받는 대학원을 만들리면 하드웨어와 더불어 일정 수준의 도서관이나 교수진(faculty)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해도 서양 사람들이 우리가 부족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 우리에게도 서양 사람들에게 부족한 장점이 있으니까, 우리가 서양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함께 일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하고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기독교 세계관의 훈련,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성경적인 관점(perspective)에서 조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독특한 교과과정(커리큘럼)을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과과정은 크게 (1) 신학적, 성경적 기초(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리더십)를 다루는 필수과목(Core Course) 12학점, 또한 (2) 철학적, 인류학적 신학적인 측면에서 세계관의 기초(Worldview Foundation)를 다루는 12학점, 다음에는 (3) 인문/사회/예술 영역과 이학/공학/의학 영역 등 두 영역으로 나누어 각 영역에서 성경적인 조망의 훈련을 하는 선택 영역의 12학점, 그리고 (4)졸업 논문(3학점)와 도서관 및 연구 논문 작성 훈련(2학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과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학생들이 자기 분야에 대한 제사장적 소명과 훈련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eKOSTA 그러니까 이 기독교 세계관 과정은 사역이나 전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하며 자기 전공을 성경적으로 더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교육 과정이란 말씀이신가요?
양승훈 바로 그렇습니다. 세계관 공부를 하더라도 목회자들은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목회를 계속하고, 또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연구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어떤 자격증(licence)을 주는 학위라기보다도 성경적 조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니까 다른 학위와는 다릅니다. 기독교 대학원 교양교육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졸업 후 학생들의 대중적 사역을 도와주기 위해 세계관, 가정사역, 창조론 등의 영역에서 강사 자격증을 주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세계관 훈련의 원래 목적은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에서 가르치고 공부하고, 자기 직장 생활에서 일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데 있습니다.
eKOSTA VIEW의 모체가 되는 기독학술교육동역회(Disciples with Evangelical Worldview, 구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의 목적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까?
양승훈 그렇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기독교대학을 만들기가 어려운 이유가 먼저 준비된 교수가 부족하고 실제로 가르칠 때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르칠 수 있는 자료와 교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DEW에서는 교수나 교사들을 양육하고, 그들이 가르칠 수 있는 자료를 개발하는 작업을 해 온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통합 연구> 같은 학술 잡지를 만들고 CUP를 통해 책도 출판해 왔습니다. 1989년에 시작된 <통합 연구>는 지난 12년간 많은 내용이 축적되어서 이미 VIEW의 강의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을 때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기독교 대학이나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유치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eKOSTA 그렇다면 VIEW가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와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떻게 서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양승훈 우선 VIEW는 대학원 과정이며 대학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기독교 대학을 운영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저희 과정을 ‘교수 훈련’의 한 프로그램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천덕 신부님 등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원래 DEW를 통해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한동대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DEW에서는 현재 VIEW 사역, 즉 대학원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한국에서도 VIEW와 같은 형태의 KIEW를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훌륭한 기독교 대학이 되려면 먼저 이들을 이끌고 갈 수 있는 훌륭한 교수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DEW에서는 아직 독자적으로 대학을 세울만한 역량이 안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현 상황에서는 VIEW가 한동대를 포함하여 훌륭한 기독교대학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국의 여러 기독교 대학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교수들이나 소프트웨어와 더불어 훌륭한 기독교 대학을 설립,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안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동대의 최근 어려움도 따지고 보면 재정적인 압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동대 규모의 학생수로는 현재 갖고 있는 부채를 제외하고, 대학 운영만도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대학이 제대로 되려면 이 대학을 지원하는 한국 교계의 성숙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지원을 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은 한국 교회가 제대로 된 기독교대학 하나를 운영할 정도도 성숙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 상태로는 DEW가 또 다른 독자적인 학부를 만드는 것보다는 지금 세워진 한동대 등의 기독교 대학들을 열심히 돕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의 외적 규모만을 본다면 적어도 제대로 된 기독교 대학이 열 개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DEW에서는 더 많은 훌륭한 기독교대학들이 생길 수 있도록 기독교 대학들을 위한 각종 자료와 책, 교과 과정, 운영 모델 등의 소프트 웨어들을 개발하고 교수들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동대 뿐 아니라 (물론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독교 대학이라고 하는 곳이 한국에 서른 개가 넘습니다. 그런 대학과 교수들에도 도움을 주려는 것이지요. 실제로 저희가 발간하고 있는 학술지 <통합 연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신학교나 신학대학원에서 발간하는 신학 부문의 잡지는 많지만 일반 분야를 성경적 관점으로 조망하기 위한 잡지는 <통합 연구>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대학의 많은 교수들이 <통합연구>를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eKOSTA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하면 그 대상이 대부분 교사라든가 교수 같은 지성인들일 것입니다. 그럼 현재 한국 사회와 교계에 기독교 지성인의 역할과 사명은 무엇이며, 기독 지성인들이 가질 수 있는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양승훈 정치인들은 권력이 있고 기업인들은 돈이 있지만 돈도, 조직도, 권력도 별로 가진 것이 없으면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지성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성인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기성 세대화, 다시 말해 수구 세력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기독 지성인들은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다시 말해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 전쟁을 잘 하려면 몸이 가벼워져야 됩니다.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F=ma)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같은 힘을 가지고도 큰 가속도가 나오려면 질량이 작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 지성인들이 너무 부자가 되어 몸집이 커지니까 잘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성인이 일반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또는 강의나 책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지만,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로 ‘자기가 본이 되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고 기독 지성인들도 그렇습니다. 일단 기독 지성인들이 기득권 세력화 되었다고 여겨지면 지성인으로서의 영향력은 사라집니다. 기독 지성인들이 이 땅에 영원히 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 지성인들이 너무 많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처럼 기독 지성인들의 영향력이 감소한 데는 스스로의 잘못도 있지만 외부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로부터 오는 한계입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자원(resource)을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거의 교회가 독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 자원들이 교회라는 제도 바깥으로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있습니다. 자원은 유통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썩게 되어 해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IMF 사태란 것도 결국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돌지를 않아서, 즉 유동성의 문제가 생겨서 일어난 것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은 흘러가야만 하는 데 잘 흐르지를 않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재원과 인적 자원들이 아이디어와 만나 가동(activate)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6년 전에 저는 TWU의 ACTS에 VIEW를 세우기 위해 교과과정과 아이디어를 담은 종이 쪽지 몇 장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ACTS 지도자들을 만나 이런 대학원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때 TWU와 ACTS에는 제가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니 밴쿠버라는 도시 전체에 제가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ACTS에서 VIEW 아이디어를 “출자”로 생각하고 이 제안을 수용해주었습니다 (물론 수많은 회의를 거친 후지만).
이것을 한국 상황에 적용해봅시다. 한국에서 학교 총장이나 재단 이사장도 아닌, 일개 교수가 종이 쪽지 몇 장 들고 이런 프로그램을 하자고 제안한다면 어느 대학이 그 제안을 받아주겠습니까? 좋은 게 있다면 ‘자기가 직접’ 하지요. 이것은 기독교 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국인의 공통적인 병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존중해 주지 않는 것은 우리의 큰 약점입니다.
그런데 유목민족들의 후예여서 그런지 서양인들은 그것을 인정해 줍니다. 하나도 아쉬운 것이 없고 잘 운영되고 있는 TWU에 태평양을 건너온, 영어도 시원찮은 외국인 교수가 종이 몇 장 들고 와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명하며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도움이 되고 그것을 위해 이렇게 준비해 왔다고 하니까 받아주었던 겁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대학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참신한 아이디어를 건물이나 돈처럼 귀중한 것으로 인정하고 함께 협력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계약사회 속에 살아온 서양인들의 무서운 점이며 대영제국을 가능하게 했던 자세입니다.
물론 VIEW는 ACTS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ACTS도 VIEW의 덕을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ATS는 북미주 신학대학의 학위 인정기관으로는 가장 권위 있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아는 프린스턴, 풀러, 트리니티, 웨스터민스터, 댈러스 등 중요한 신학교들이 이곳으로부터 학위인정을 받는데 VIEW의 기독교 세계관 문학석사 프로그램도 이곳으로부터 학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ACTS가 ATS의 정례 심사를 받는 중에 ACTS 대표로 가신 교수님이 심사위원으로부터 VIEW 프로그램에 대해 “당신 학교에서 어떻게 이렇게 혁신적인(innovative)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대표로 가신 교수님은 후에 학교 교수회의에서 보고를 하면서 이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솔직히 자기도 그것을 자세히 모르는데 저보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양 사람들의 강점 중의 하나는 바로 아이디어를 “재산”으로 인정해 주고 사람을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문서를 보고, 다시 말해 계약 관계를 통해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이디어가 참으로 많은데 (물론 개중에는 황당무개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런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자원과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못해서 “유동성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물이 흘러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원이 돌아야 생산도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아이디어가 없고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일이 되질 않는 겁니다. 물론 학계 뿐 아니라 목회자들 중에도 참신하고 뜻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아이디어들은 실현되어야 교회도 살고 사회도 밝아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교회만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평신도 한 명 한 명의 수준이 곧 교회의 수준이고 그 수준 속에서 그 정도의 지도자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해야 됩니다.
eKOSTA 정리를 하자면 기독 지성인이 권력과 부를 가지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가져서 문제가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이번 2001년 코스타 주제인 ‘낮아지신 예수님, 섬기는 그리스도인”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개 교회 중심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군요.
양승훈 거기에 더해서 교회 지도자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지도력이 부족한 문제인데 이를 위해 우리 지성인들이 해야 할 역할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회의 자원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eKOSTA 예,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알기로는 물리학 박사도 하시고 또 신학도 하시고 기독교 세계관도 공부하셨는데, 어떤 계기나 동기, 혹은 비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또 그 여정은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양승훈 긴 얘기가 되겠지만 저를 학교에서 “쫓아내어” 밴쿠버로 오게 한 사람은 바로 Wesley Wentworth (한국이름 원이삼) 선교사님입니다. 그 분은 한국에 파송된 평신도 선교사로서 대천덕 신부님과 더불어 제가 스스로 멘토(mentor)라고 생각하는 분입니다. 한국 선교사로 36년을 섬기신 분인데 이 분의 사역은 보통 선교사들과는 다릅니다. 이 분은 주로 대학원생이나 교수 등 기독 지성인들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세계관 관련 자료를 공급하고 격려해주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30대 초반에 한국에 오셔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삼십 수년이란 긴 세월을 그것만을 위해서 헌신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그물에 걸려들었던 여러 물고기 중의 한 마리가 바로 저입니다. 저는 1979년에 그 분을 처음 만났고, ’80 세계복음화대성회와 더불어 탄생한 한국창조과학회가 1981년 1월 31일에 창립 총회를 할 때를 즈음해서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저를 만날 때마다 영어로 된 논문이나 소책자 같은 많은 자료들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박사 과정 학생으로서 반도체 물리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논문도 다 못 읽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돈도 받지 않고 그냥 갖다 주는 것이 많은 부담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새 자료를 갖다 줄 때마다 잊지도 않고 꼭 지난 번 자료들을 읽어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늘 안 읽어 봤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죄송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복사비나 책값도 싸지 않았을 때였으니까요. 사실 그때 저는 그 분이 갖다주는 세계관 관련 자료들에 대해 관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 12월에 제가 박사 학위 논문 디펜스를 마쳤는데, 어떻게 알고 그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는 마음에 부담도 되고 더 이상 핑계 댈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혜 갚을 요량으로 몇 사람과 함께 연구회를 하며 그 분이 준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읽은 책은 네덜란드의 리센(Hendrik van Riessen) 교수가 쓴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이라는 소책자였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치 저의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때까지 과학에 대해서 제가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냥 저의 전공인 반도체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며, 주일에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만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할 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저의 연구를 성경적으로 조망하는, 세계관적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이전에도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부분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그 때서야 비로소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로서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가 공부한 과학을 성경적인 안목으로 조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젊은 교수들을 모아 연구회를 해 나가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가 경북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인 1984년에는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현 DEW)라는 단체를 만들었으며 1988년도에는 <통합 연구>라는 학술잡지를 창간하게 되었고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출판부(CUP)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시카고대학에서 한국과학재단 포스트닥을(1987년), 위스칸신대학에서 과학사 석사를(1991년), 위튼대학에서 신학 석사(1992년)를 하였고 이러한 해외에서의 훈련을 통해 저의 시야가 좀 더 넓어졌습니다.
이러한 넓어진 시야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1992년도였습니다. 저는 1992년도 8월에 2년간의 미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그 해 말에 기독대학설립동역회 실행위원회가 대덕에서 모였습니다. 그때 해외에서의 제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대학을 해외에서 설립해보자는 제안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설립할 경우 돈이 많이 들고 자원의 소스(source)가 한국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많은 실행위원들이 저의 의견에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 미국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시던 한 목사님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하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고 미국에서 미국 사람이 시작해도 힘든 일을 한국 사람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으로 반대를 하셨습니다. 미국에 수십 년 사신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바람에 갑자기 실행위원회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추친하지 말고 좀 더 준비를 해서 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저는 좀 섭섭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도에 현재와 같은 VIEW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위한 제안서를 만들어 실행 위원회에 다시 상정하였습니다. 그전에는 해외에서 학부 대학을 하자는 제안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너무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학원 중심의 학교를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것도 새로운 대학원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대학들 중에 좋은 파트너를 골라 그 학교 내에 기독교세계관 분야의 석사과정을 설립하자는, 훨씬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대부분의 실행위원들이 동의했습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 어느 학교와 더불어 일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제가 공부했던 미국 중서부(Midwest) 지역을 생각했습니다. 시카고 지역은 제가 아는 사람도 많았고, 영적 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한인 교포들도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연 여행 명분으로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여러 지역(워싱톤DC,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을 두 차례에 걸쳐 돌았습니다.
두 차례 여행을 하면서 미국은 여러 가지 여건이 다 좋은데 비자 문제와 안전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대도시로 가면 자원은 많은데 안전하지가 않고 또한 물가가 비쌌습니다. 그래서 VIEW를 시작하기 위한 장소의 10여 가지 조건을 놓고 기도하고 있던 중에 마침 화천에서 아바 샬롬 공동체를 경영하시던 이윤식 목사님으로부터 미국만 생각하지 말고 캐나다도 고려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뿐 아니라 호주와 캐나다, 영국 등 영어권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최종적으로 밴쿠버가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밴쿠버는 일단 한국과 가깝고, 자연환경과 기후가 좋으며, 안전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시설이나 자원은 미국 수준이면서도 학비와 생활비가 싸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구가 200만 명으로 북미주에서는 적지 않은 도시이며, 한인들의 숫자도 3만 여명(지금은 5만 여명)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자원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곧 바로 밴쿠버가 있는 BC주정부에 편지를 하여 우리의 계획을 설명하고 BC주와 밴쿠버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리전트대학과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리전트는 순수한 독립 신학교로서 일반 학문 분야에 대한 자체 교수 요원들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작은 건물에 6백 명 이상의 학생들이 재학하다보니 실제적인 공간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에 알려진 주요한 리전트 교수님들은 이미 대부분 연세가 많아 은퇴하였으며 밴쿠버를 떠나셨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 리전트와의 접촉은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리전트 옆에 있는 VST(Vancouver School of Theology)와 접촉을 하기도 했으나 VST는 우리가 수용하기에는 신학적으로 너무 리버럴하다는 문제가 있어서 역시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 학교를 물색하던 중 밴쿠버 외곽에 있는 현재의 Trinity Western University(TWU)와 TWU의 신학대학원인 ACTS(Associated Canadian Theological Schools)를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Evangelical Free Church 소속의 TWU는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기독교 대학일 뿐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노선이 확실하였습니다. 그 후 TWU와 일을 하면서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전공”(specialties)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과 ‘크리스천 리더십’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VIEW 사역을 위한 맞춤 학교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실 TWU처럼 기독교 세계관에 헌신되어 있는 학교는 북미주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리전트대학이나 제가 공부했던 위튼대학도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VIEW가 TWU의 ACTS에서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났습니다. 1995년 말에 처음 제안서를 제출했고 이 프로그램을 ACTS에서 개설하기로 최종적인 협정을 맺은 것이 1998년 11월 3일, 첫 강의를 시작한 것이 1999년 7월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학교를 시작하는데 4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셈입니다. 이제 개강한지 2년이 지났고 VIEW의 교과 과정에 있는 모든 강의들을 개설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VIEW를 운영하면 할수록 TWU를 잘 선정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 이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는 2년이 지나서 평가를 한 후 계속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만 이제 5년 동안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직 교과 과정 등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학생들의 배경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또 좋은 강사들과도 연결이 되면서 강의의 수준도 급속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현재 28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는데(2001년 8월 기준) 내년 봄학기가 되면 40여명으로 늘어날 전망입니다. 사실 단일 대학원의 한 프로그램(학과)으로서는, 그것도 불과 개강한지 2년이 갓 지난 대학원 프로그램으로서는 적지 않은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 대학원 프로그램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훈련은 공부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들 중에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부실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VIEW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인들도 얼마나 알찬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외국인들과 동일한 많은 돈을 내면서 공부도,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놀다만 가서야 되겠습니까? 화장실에서도 못쓰는 종이 한 장 받아가기 위해 그 많은 돈을 갖다준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힘들지만 제대로 공부하고 훈련받고 제대로 준비되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저는 어떤 분으로부터 VIEW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세계관 대학원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인들의 자존감이 높아지기를 기대합니다. 현재 저희 프로그램에서는 캐나다인 교수들이 절반 정도, 한국인 교수들이 절반 정도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인 교수들은 영어로, 한국인 교수들은 한국어로 강의합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한국인들 중에는 영어 강의만이 아닌, 한국어 강의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어로 강의하면(영어는 늘지 않겠지만) 정보 전달이 몇 배나 효과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 즉 영어 콤플렉스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언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신학과 역사 교육을 미국에서 받았습니다만 외국어로 강의를 듣고 논문을 작성하며 토론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전공에 대한 성경적 조망이라는 영역에서는 가장 강의를 잘 하는 분들을 한국이나 미국, 유럽 등지에서 모셔다가 강의를 하는데도 단순히 영어로 강의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낮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큰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1999년 7월에 제1기로 입학한 학생들이 26명인데 현재 그들 중 4명이 졸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칙”을 고수하다보니 몇몇 학생들은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고 몇몇 학생들은 졸업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VIEW의 운영이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VIEW는 전형적인 캐나다 사람들의 학교에서 개설하고 있는 한국인 프로그램입니다. 이것을 통해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축적한 세계관 관련 내용들을 체계화하고 또한 서양 사람들로부터 세계관과 더불어 복음주의 신학과 생활, 그리고 나아가서 학교 경영의 노하우 등을 배우러 온 것입니다. 특히 좁은 나라에서 살아오면서 분열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들로는 세계 제국을 만든 이들로부터, 그리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이민들을 잘 수용하면서 복합문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아이덴티티도 잘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양 사람들의 좋은 관습들과 기독교 문화, 그리고 이들이 서로 연계(networking)하며 협력하는 모습 등은 꼭 배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서구인들의 강점에 한국인들의 강점을 접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절대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도 세계를 섬기는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VIEW 프로그램을 통해 정말 소수라도 한국을 변화시키는 다음 세대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고 싶습니다. 저는 이것이 어렵지만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다음 세대 지도자 뿐 아니라 현재의 지도자에게도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토플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밴쿠버에서 4-8개월을 머물면서 집중적인 세계관 훈련을 받는 세계관 디플로마 프로그램이 그것입니다. 캐나다는 학생 신분(status)이 아니고는 의료보험이나 자녀교육 등의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안식년 등을 가족들과 더불어 캐나다에서 보내려고 하는 분들이 머물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년 여름부터 시작되는 디플로마 과정은 이런 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말씀을 듣다 보니, 저도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막 드는데요.
양승훈 예, 정말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말이 좀 우습지만 저 자신도 이 프로그램을 매우 좋아합니다. 사실 제가 강의하는 것은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 창조론 등 3-4 과목 과목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계관의 여러 강좌들이나 사회과학, 가정사역, 신학 등의 여러 강의는 다른 분들이 강의하는데 대부분의 강의들은 녹음을 해서 제가 듣습니다. 강의에 대한 모니터링이나 평가, 강의 내용의 조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저도 배운다는 목적이 큽니다. 이를 통해 저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원장으로서 누리는 특권이지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세계 곳곳에서 훌륭한 학자들이 와서 가르치는데 저는 그 축복의 가운데 서 있는 셈입니다.
eKOSTA 요즈음 인터넷의 발달로 인터넷 학교 등도 운영하고 있는데, 그런 쪽으로는 계획이 없으신지요?
양승훈 물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강의들이 더 안정되고 표준화되어야 합니다. 돈을 받고 온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팔려면 흠 없이 제대로 만들어야 하듯이 강의 내용에도 표준화와 질적인 제고가 있어야 합니다. VIEW의 강의들은 좀 더 실제적이고 삶에 근접한 우리의 전공, 직업,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강의들을 새로 개발해야 합니다. 기존의 코어과목에 있는 몇몇 신학 강의들을 뺀 나머지 대부분의 강의들은 새로 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의를 통해 교수들을 훈련시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수들이 강의계획서를 만들 때 “북미주 표준”에 맞추도록 엄격하게 몇 번씩 개정을 하게 합니다. 어느 교수가 가르치더라도 같은 강의는 큰 차이가 없도록 표준화된 강의, 수준 있는 강의가 될 수 있게 말입니다.
강의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에도 합당한 것입니다. 저는 수준(quality)을 우상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은사를 생각하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강의를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두 해에 걸쳐 이루어진 강의들의 강의계획서와 강의록을 조금 더 수정하게 되면 10여 개의 강의는 금명간에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선배 유학생으로서 이제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신앙인으로서 타문화권에서 학문적인 성취 뿐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을 지 말씀해 주십시오.
양승훈 유학생은 배우러 온 사람입니다. 학교에서 논문 쓰면서 전공 공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일단은 그것을 위해서 유학 온 것이니까요. 이에 더해 북미주에 유학 온 유학생으로서는 앵글로 섹슨이 설립했던 나라, 문화 그리고 교회를 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느리고 둔하고 악착같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연간 휴가를 한 달 씩 찾아먹으면서도, 오후 네 시 반만 되면 주차장에 차가 남아있지 않는 이들이 어떻게 선진국을 유지할 수 있을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저들과 더불어 일하면서 저는 우리가 저 사람들로부터 중요한 몇 가지 일하는 작업윤리를 본 받지 않고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도저히 저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밴쿠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일간지 <밴쿠버썬>지(誌)(The Vancouver Sun)에 커다란 제목으로 “South Koreans, the World’s Workholics”라는 기사가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뉴욕의 어느 회사에서 낸 통계를 다룬 내용으로,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주간 노동 시간이 가장 많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주당 노동 시간이 약 55시간, 프랑스인은 가장 적은 약 40시간, 미국은 약 42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55시간을 일하는데도 삶의 질이 프랑스인들이나 미국인들보다 낮을까요? 저는 유학생활 하면서 이런 문제에 관해서 우리의 부족한 점과 서구인들의 강점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인들의 협력하고 연계하는 문화, 기록하고 남기는 문화, 그리고 저들의 합리성인 계획과 업무수행 등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제가 호산나넷에 칼럼을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www.hosanna.net/new/society/의 ‘교육선교’ 칼럼에서 ‘협력과 기록 그리고 합리’라는 제목의 글.
eKOSTA 이제 마지막으로 특별히 학문과 신앙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저희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으신 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양승훈 아무래도 한국말로 된 책이 읽기가 편할 것 같으므로 한국인이 쓰거나 한국어로 번역된 몇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우선 세계관 분야의 기초적인 책으로는 전광식 교수의 <학문의 숲길을 걷는 기쁨>(CUP), Middleton & Walsh의 <그리스도인의 비전>(IVP), 안점식 목사의 <세계관을 분별하라>(죠인선교회), 저의 책 <기독교적 세계관>(CUP)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다른 분야의 책들을 제가 많이 알지를 못하니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성경적인 조망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R. Hooykaas 교수의 <근대과학의 발흥과 기독교>(정음사), Charles Hummel이 쓴 <갈릴레오 사건> (IVP), 몬스마 외, <책임있는 과학기술>(CUP)를 권해 드립니다.
Sep 1, 2001 | 교회와 공동체/성경강해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종으로 오신 하나님
빌립보서 1:27-2:16
편집 주
지난 8월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 강해를 연재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빌립보서 2장 읽기
여는 말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어느 날 자기의 스튜디오에서 새 작품을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캔바스(Canvas)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그림의 대상을 선택하고 구도를 잡고 윤곽을 그려 넣어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열심히 그리다가, 아직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멈추고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불러 “이 그림을 완성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제자는 “저는 이런 걸작에 손을 대서 완성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대로 끝낼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다 빈치는 이 한 마디로 그 제자를 완전히 침묵시켰다. “그래도, 내가 시작한 이 그림을 보면, 넌 이 그림의 완성을 위해 네가 지닌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갖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다 빈치가 그림을 시작했듯이,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어떤 작품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고난을 통해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 더러 완성하라고 하신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본보기를 보여 주는데,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빌립보 교회의 배경
지난 8월호에서도 말한 것 같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교회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이 교회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이끌던 두 명의 리더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그 주위에 파당이 조성될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자세한 내막을 에바브로디도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두면 이 교회가 파국에 처할 수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빌4:2). 바울은 유오디아에게 권하고, 순두게에게 무언가 호소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예 이름을 들어가며 호소할 정도로 이 불화는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직접적으로 대놓고 호소하기 전에, 그는 2장에서 먼저 그 기초가 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보면, 1장 27절-2장 16절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첫번째의 권면을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1) 1장 27절-1장 30절, (2) 2장 1절-11절, (3) 2장 12절-18절. 이 세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려면 먼저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살펴야 한다. 1장 2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2장 12절에서도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다.
1장 27절 |
2장 12절 |
(1) 하나되는 삶 |
(1) 화합하는 삶 |
(2) 각자가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것 |
(2)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삶 |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
즉, 서로 사랑하며, 신앙 인격이 예수님을 닳아 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로 결국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두 번째 부분인 2장 1절-11절이 나타나는데, 이런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은 먼저 ‘하나 됨’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신앙 인격의 성장’은 3장에서 다루어진다. 하나 됨과 신앙 인격의 성장, 이 두 가지가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보았던)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먼저 안부를 통하여 자연스레 실례를 보여줬고 이제는 그 원리를 가르치고 호소하고 있다. 마치 당대의 피아니스트 Arthur Rubinstein이 제자들 앞에서 기막힌 연주를 한 다음, 그 원리와 방법을 가르치고, 그대로 실행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호에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세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그런 사랑을 가지게 되느냐’고 궁금해할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빌립보서 2장에서 여러분은 그 단서를 얻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절-11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4절은 하나 됨(Oneness)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이고, 5절-11절은 하나되는 데 꼭 필요한 자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 됨(Oneness)
이제 하나 됨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을 살펴 보자. 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이라며 그들에게 주어진 네 가지의 엄청난 특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무슨 말인가? 첫째로 ‘그리스도 안의 격려’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받는 큰 격려와 용기’를 말한다. 둘째로 ‘사랑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에서 확증된(demonstrate)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셋째로 ‘성령의 교제’란 일차적으로는 ‘성령님과 나와의 교제’를 말하고 나아가 ‘성령님을 통한 우리들 사이의 교제’를 일컫는다. 넷째로 ‘긍휼이나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가지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 네 가지는 정말 엄청난 것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 중에는 빌립보 교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루디아와 간수장이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거듭난 사람들만이 보이는 이 특징을 그들 가운데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그때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의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이나 자비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 말한다. “여러분,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완전해 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로 2절의 내용인 것이다.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보자. 신혼 부부들을 보고 있자면 (낯간지러운 소리를 대담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자기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주로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이야기들이다. 즉, “정말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벗은 양말은 반드시 빨래통 안에 넣어줘요” 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대해 행동을, 어떤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2절을 보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 등의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빌립보 교회가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되라’는 바울의 요구는 좀 더 “delicate”한 차원에서 받아 들여야 한다. 먼저 ‘아닌’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떠벌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교회를 간다면서 넌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느냐?” 그 친구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나야 물론 우리 교회가 믿는 것들을 믿지.” 그는 다시 묻는다. “그래, 그러면,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냐?” 교회 다니는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거야, 우리 교회는 내가 믿는 것을 믿는다.” 그러자 또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와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교회 다니는 친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뚜렷한 대상이 없는, 일치를 위한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찬성률 100%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개성도 다르고, 의견도 다를 수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성가대가 합창을 할 때,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멜로디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소리를 내더라도 그것이 기막힌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이때 각자가 멜로디에 맞추려는 최선의 ‘자세’와 최선의 ‘태도’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에 해당한다. 결국 바울은 2장 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풍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일깨워 주고는, 2절에서, 서로 생각과 개성은 다르더라도 어떤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공유하라, 그래서 하나됨을 이루라고 호소한다. 4장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했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도 바로 이런 자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3절에서 나타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 중 하나인 ‘겸손’이다. 바울은 그런 겸손의 최상의 예를 5절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빌2:3-5).
겸손
‘겸손’이란 교회 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다. 그런데도 사실 가장 발견하기 힘든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평균 5분마다 한 번 꼴로 섬긴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섬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보기를 원하시는 덕목이지만 어쩐 이유 때문인지 가장 안 되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교만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잘못된 시각의 문제, 곧 ‘허영’인데, 영어로 “I am somebody” 라고 말하는 태도를 말한다. 소위 말하는 공주병이나 왕자병의 증상과 비슷하다. 둘째는 그런 허영의 시각으로 자기 권리나 주장을 내세우는 자세, 곧 ‘다툼’인데, 영어로 “Me first!” 라고 소리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요즘 들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당신, 어째 기도가 좀 부족한 것 같아” 라는 말을 한다면, 대부분은 언짢게 생각할 것이다. 왜 그런가? 나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존 의식이 누군가에 의해 손상 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허영의 문제이다. “그래 좋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 하느냐? 당신 QT 해? 나는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다툼의 문제가 된다. 이런 다툼이 더 진행되면, “너 나이 몇 살이냐?” 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문화는 호칭에 민감한 문화로 교수, 교수님, 박사, 박사님이 서로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좋아한다. 만일 제자가 나보고 Mr. 장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싸우자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건 격식(protocol)이라는 것을 유난히 따지는 문화가 아닌가.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지 혹은 교만한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리트머스 시험을 해 보라. 첫째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했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하는가’하는 시험으로, 이를 통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곧 이 시험을 통해 내가 스스로에 대한 ‘허영’에 빠져 있는지 아닌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장기(長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며 화제를 독점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시험이다. 이때 만일 속으로 부글부글 한다면, 나도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 시험 결과는 곧 허영심을 못 이겨 이제 ‘다툼’을 하고자 하는 나의 본질을 드러낸다. 교회가 분열되는 곳을 잘 보라. 그곳에는 반드시 허영과 다툼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속한 성경 공부 그룹 안에 긴장과 불화가 있는가? 틀림 없이 허영과 다툼이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겸손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2:3-4) 이 구절은 겸손도 (교만과 비슷하게) 두 가지 자세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는 것이 첫째 자세이고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둘째 자세이다.
명백하게,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허영심(“I am somebody”)과는 대조되는 자세이며,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다툼(“What is best for me”)과 대조되는 “What is best for you”의 자세다. 결국 ‘겸손’이란 (허영 대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내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툼 대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자세는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른 사람보다 (물리적인 힘이든, 권력이든) 더 강해지는 것, 무지막지하게라도 지배하는 것이었다. 소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가졌던 유일한 부류는 ‘노예’들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세를 최상의 미덕으로 들고 나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도 힘의 논리가 앞서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앞에 돈키호테 같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종’의 논리로 낮아져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 됨을 누리고 싶은가? 개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천국의 하모니를 이루고 싶은가? 겸손하라. 물론 겸손이 힘들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 최상의 예를 보인 분을 보면서 겸손하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최상의 예로 들고 있다(빌2:5-11). 아브라함을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모세를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다윗을 예로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시는 그 분이 어디까지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준다 –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본문은 초대 교회의 찬송가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리스어에 능통한 사람들의 말을 빌면, 원문은 라임(rhyme)과 미터(meter)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산문이 아니라 운문, 운문 중에도 노래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초대 교회들이 불렀던 찬송가이고, 빌립보 교인들도 잘 아는, 어쩌면 그들이 바울과 함께 불렀을 지도 모르는 찬송가라면, 서로 잘 아는 찬송가의 가사를 가지고 그들에게 호소를 하는 셈이 된다. 두 번째 특징은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말할 수 없이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높아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때 ‘낮아짐’과 ‘높아짐’의 하나 하나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자.
7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분을 하나님 자신이었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 곧 ‘Three persons in one Godhead’이다.) 그리고는 그분의 낮아지심을 소위 점층법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비워 종이 되셨다.
↓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
죽기까지 섬기셨다·죽임을 당하셨다.
↓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20년 전, 12·12 사태 후에 있었던 일로 육군 참모총장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 아마 우리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고 사령관이 다시 머리 깎고 훈련소에 입대해서 군가 부르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그것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으로 오시되, 왕이나 장군이나 학자로 오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분은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 그분이 태어난 곳은 쥐나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외양간이었다. 목수로 출발해서 한때 랍비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분의 삶을 돌이켜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종(servant)이었고, 인간들의 종이었다. 그분의 삶은 인간들의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부분을 씻어 주려고 자신을 바친 종의 삶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몸을 던져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반역자들이나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사형 도구로, 곧 ‘치욕’의 상징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었다 –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마디로 ‘치욕’과 ‘저주’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치욕과 저주를 한 몸에 지닌 채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아예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고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유대인 꼬마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남자아이로 아주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두뇌로 그 학교 사상 전무후무한 문제아가 되었는데, 갖은 기합을 다 받고 벌이란 벌은 다 받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학교 생긴 이래, 3학년으로서 최초로 퇴학을 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꼬마가 원래 다니던 학교는 유대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였는데, 부모들이 공립학교로 전학을 시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3개월을 못 버티고 또 퇴학을 당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는 유대인들이 잘 안 다니는 카톨릭 사립학교로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를 옮긴 그 다음 날부터 그 꼬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해도 180도로 변한 것이다. 그 부모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그 꼬마에게 묻는다. 도대체 너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그 꼬마가 실토를 하기를, 등교 첫날 신부님 방에 인사하러 갔다가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꼬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 신부님이 이제는 장난을 그만 치라고 타이르는데 말 같지도 않아서 대답도 잘 안 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뒤를 썩 돌아보더란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봤더니 벽에 십자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잘 보니까 어떤 아저씨가 매달려서 벌을 서고 있는데 반쯤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 머리털 나고 그렇게 몰상식한 기합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신부님이 다시 자기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짓는데 소름이 확 끼치더라며, 그리고는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어떤가? 철 없는 아이지만, 십자가의 본질을 제대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 십자가에 자기가 매달릴 것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와 치욕을 당해야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와 여러분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이 그곳에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가? 바로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오신 그 거리만큼이나 크고 크신 사랑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저 저주의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마땅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기 자존심 내세워서 형제들에게 상처나 주고 있지는 않은가? 자존심 좀 상했다고 형제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이 종이 되어 죽음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뭐가 되어야 마땅한가? 우리가 포기 못할 다툼이 어디에 있으며, 포기 못할 허영심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용납 못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제는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가는 길에는 이미 먼저 간 발자국이 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낮은 곳에 가서 형제들의 더러운 곳을 씻어 주며, 그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랑을 알았던 바울은 그 주님을 평생 사랑하며 따랐다. 그 사랑으로 환경의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죽음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먼저 돌아보셨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본이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도저히 주님이 갔던 길을 갈 수 없다. 정말 두렵고 힘들 것 같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존심에, 내 성깔에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분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9절부터 나타난다. 이제 9절부터 그리스도의 높아짐이 나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께서 는 그분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시고 스스로 낮아지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그 영적인 원리는 구약에서부터 많이 보아온 것이며, 주님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좀더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보좌는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이며, 이제 그분 앞에서 만물이 무릎을 꿇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8-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만물을 발 아래 두신 이가 바로 우리 주님이실진대, 그 어찌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이제 우리로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분의 능력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낮아짐을 감당하게 하신다. 우리는 도저히 스스로는 낮아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 고난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이 부활의 능력으로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2:12)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하나됨을 이루고, 주님 닮은 모습으로 자라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위에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
맺는 말
이번 호의 본문, 빌1:27-2:16절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 혹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인 ‘하나되어 서로 사랑하는 삶’에 관해서 함께 살펴봤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서, 우리도 낮아져서 섬길 때,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고,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초대교회 시절 어떤 믿지 않는 역사학자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반드시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결국 실현되었다. 주님 십자가 때문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그들의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폭발했을 때, 결국엔 전 로마 제국을 뒤집어 놓지 않았는가!
우리가 이런 섬김과 사랑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해야만 한다. 이 일에 KOSTAN들이 앞장서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끓어서 밖으로 폭발하여, 한국을 뒤집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주님께서 2000년 전에 먼저 시작하신 낮아지심과 섬김, 그것은 우리 대에, 우리가 감당할 몫을 남기고 있다. 이 일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는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