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영] (American Psycho) 우리들 안의 Matrix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우리들 안의 Matrix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 Mary Harron

개봉연도 2000년
MPAA 등급 R 등급
 

주요 등장 인물

Patrick Bateman
형사 Donald Kimball
Paul Allen
약혼녀 Evelyn
정부 Courtney
비서 Jean


Christian Bale
Willem Dafoe
Jared Leto
Reese Witherspoon
Samantha Mathis
Chloe Sevigny


얼마 전 우연하게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으로 유력했던 Leonardo DiCaprio의 비싼 몸값 덕분에 대타로 뽑힌 Christian Bale. 평소 ‘연기 잘 하고 잘 생긴’ Bale의 팬임을 자처하던 터라, 그리고 Willem Dafoe나 Samantha Mathis, Reese Witherspoon이나 Chloe Sevigny 같은 연기파 배우들의 호화 캐스팅에 일단 관심이 생긴 터라 여타 매체의 평론에 귀가 솔깃하면서도, 감히 영화관 가까이에 갈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이 영화의 장르가 ‘Gore/Slasher’라는 것이었습니다. Bret Easton Ellis의 원작 소설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 ‘피가 낭자하게 사람을 난도질해 죽이는’ 잔혹하고 불쾌한 묘사로 가득합니다. 영화 시사회에서의 인터뷰를 봐도 “우째, Christian Bale이…,” “저 사람이 내가 아는 Christian Bale 맞아요?”,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여가 흐른 뒤, 어쩌다 채널을 고정하게 된 HBO에서 이 영화가 나오자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매력 만점, 연기력 만점의 Christian Bale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 때문이었지요. (영화의 배경이 미국이어서, 그의 매력적인 영국식 영어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영화의 주제를 반영하듯) 아름답고 고급스런 영상이었습니다. 백색의 화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붉디 붉은 핏방울과, 섬뜩하게 번쩍거리는 은빛 칼. 역시 영화가 영화라서 그런지 시작부터 다르군. 그래도 빛깔 한 번 곱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칼은 고깃덩이를 무지막지하게 내려치고, 이어지는 화면은 손님에게 내갈 고급 요리가 담겨 있는 접시…. 핏방울인 줄 알았던 것은 케첩이었고 번뜩이던 칼은 요리용이었습니다. 이 첫 장면이 시사하듯, 영화의 시종일관 화면은 매우 아름답고 선명하며 스타일은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Gore/Slasher 영화에 웬 영상미에 코미디 타령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화려한 겉포장에 연연하는 등장 인물(들)의 끝갈 데 없는 허영을 조롱하는 영화의 주제를 생각해 본다면 Harron 감독의 이러한 연출 기법은 오히려 박수감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 30 여분 동안 진행되는 영화 앞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원거리로 잡은 행려자(homelss) 살해 장면 등 몇몇을 제외하면 직접적인 살인은 대부분 화면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고난도의 연출 기법으로 인해 장면 하나 하나가 그대로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뿐만 아니라 비릿한 피냄새가 코 끝에 질퍽하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왔다 갔다 채널을 돌리던 끝에, 다음 번 방송분을 찾아 일단 녹화를 해 놓고 끔찍한 장면은 Fast-forward로 지나가기로 했습니다. (“봐야 한다면 비디오로” – 이것은 <사이코>나 <양들의 침묵>같이 세간에 자자한 입방아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포 영화들을 보는 제 나름대로의 방법인데, 이렇게 끔찍한 장면들을 Fast-forward를 해서 보면 전혀 무섭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만 합니다. 그게 무슨 맛이냐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영화를 끝내고 나니, 애초에 NC-17 등급 판정을 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R 등급을 받으려고 여러 문제 장면을 삭제했다고는 하지만, 영화 전편에 담겨 있는 폭력적이고 잔학한,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 방법과 엽기적인 살인 도구들, 불쾌할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성적 묘사와 장면 등등…. 영화를 보고 도덕적으로 저속하다거나 역하다는 느낌을 받은 관객이 상당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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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난 개인적인 느낌은 먼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Christian Bale의 연기가 빛난다는 점입니다. 자신만만한 듯하나 위태롭고, 오만한 듯하나 열등감 덩어리고, 꽉 차 있는 듯하나 공허하고, 다 가진 듯하나 아무 것도 쥔 것이 없고, 함께 있는 듯하나 항상 혼자인 인물. 모순 투성이의 그 Patrick Bateman을 다른 누가 그렇게 연기할 수 있었을까요? (What’s Eating Gilbert Grape(1993년), This Boy’s Life(1993년), Total Eclipse(1995년) 등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DiCaprio도 연기파 배우임을 인정하지만, 이 영화의 Patrick은 오로지 Bale을 위해 만들어진 역할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위해 상당한 감량을 한 듯 보이는 그의 마른 얼굴과 그에 걸맞는 분장은 메마르고 잔인하며 야비한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맛을 더해 줍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세간에서 이야기 하듯, ‘헛된 세상 것을 추구하는 까닭에,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 특별히 ‘남성들의 (드러나는) 허세·허욕과 (감춰진) 폭력성’을, 1980년대의 미국 Wall Street를 무대로 그린 영화가 바로 <아메리칸 사이코>인 것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심도 깊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지막 반전이야말로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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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Gore/Slasher 영화의 하나로 그저 단순하게 넘겨 버리기에는 아까운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는 해도, “그렇다면 이 영화를 기꺼이 추천하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끔찍한 장면에 선천적으로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나 심약(心弱)하신 분들, 또는 영화의 숨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청소년들은 아예 처음부터 보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평소 전쟁 영화도 제대로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아직껏 <라이언 이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도 보지 못했습니다)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왕이면 생각할 만한 주제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를, 그게 어려우면 그 표현 방법이나 수단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지 않은 영화를 골라보는게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좋은 (숨은) 영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비슷한 교훈을 얻자고 굳이 비위가 상할 정도로 엽기적인 영화나 선정적인 영화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캐나다의 한 연쇄 강간살인범이 Ellis의 원작 소설을 읽고 그런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품게 됐노라고 자백했듯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는 그 그릇을 먼저 보고 그것을 모방하는데 발 빠른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요 –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파트에 틀어박혀 보는 비디오란 것이 모두 Porn이나 Gore/Slasher 영화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영화를 골라 글을 쓰는가?”라고 물으신다면, “특별히 Gore/Slasher 영화를 즐기시는 분들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또 저같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런 영화를 보게 된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심심풀이로 넘겨버리기보다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Patrick Bateman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넘치도록 갖춘 것만 같습니다. Harvard 졸업에 Wall Street에서 내노라 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합병·매수(mergers & acquisitions)를 맡아하고 있는 그는, 회사의 절친한 다른 부사장 친구들 사이에서 “이성의 목소리”(He’s the voice of reason), “(이웃처럼) 친근한 놈”(the boy nextdoor)라고 불리울 정도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일단 자신의 겉모습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아침 독백을 듣다 보면, 여자인 저도 알지 못하는 심오한 미용 비법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니까요. 날마다 이대로 하려면 참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예뻐지고 싶은 분들은 다음을 읽어 보시고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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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Patrick Bateman. I’m 27 years old. I believe in taking care of myself, in a balanced diet, in a rigorous exercise routine. In the morning, if my face is a little puffy, I’ll put on an ice pack while doing my stomach crunches. I can do a thousand now…. After I remove the ice pack, I use a deep pore cleanser lotion. In the shower, I use a water activated gel cleanser. Then a honey almond body scrub. And on the face, an exfoliating gel scrub. Then I apply an herb mint facial masque, which I leave on for 10 minutes while I prepare the rest of my routine. I always use an aftershave lotion with little or no alcohol, because alcohol dries your face out and makes you look older. Then moisturizer, then an anti-aging eye balm, followed by a final moisturizing protective l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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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는 피부 마사지와 손톱 가꾸기, 살갗 곱게 태우기에도 열심을 내며 미용 살론에 드나듭니다. 그리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할까에 불안해 하며 전전긍긍하고는 합니다. 약혼자 Evelyn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며 Patrick은 걱정을 합니다 – “I’m on the verge of tears by the time we arrive at Espace, since I’m positive we won’t have a decent table. But we do, and relief washes over me in an awesome wave.” 그리고는 “메뉴가 메탈에 점자(點字)로 새겨져 있네”(The menu’s in braille)하고 Evelyn의 사촌이 건네 주는 메뉴판에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을 물론(!)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겉모습 치장에 연연하기는 그의 다른 친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Valentino Couture 양복과, 부티나는 Oliver Peoples 안경, 최신 스타일의 헤어컷, 고급스런 명함 등으로 경쟁하듯 자신을 두르고, 서너 명이 먹은 식사가 한 번에 570불이나 (그것도 80년대에) 하는 최고급 식당을 “거, 나쁘지 않구만”(Speaking of reasonable, only 570 dollars. That’s not bad)하고 다니는 허세를 부립니다 – 당시 최고의 식당으로 여겨지는 Dorsia란 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처럼, 모두 다 거기에 자리를 예약하는데 목숨을 걸고 있는 듯 보입니다. 80년대 댄스 클럽 복장과 전혀 안 어울리게 튀는 고급 양복을 입은 채로, 클럽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무시하고 돈으로 새치기를 하며 특권층인양 으시댑니다.

이런 무리들과 어울려 한 몫을 하고자 Patrick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는, Robert Palmer의 신곡 “Simply Irresistible”이 들리는 헤드폰 속 자기 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그에게 앵앵거리는 약혼자를 귀찮아하며 그가 내뱉는 한 마디, “Because I want to fit in!”에서 알 수 있습니다. Christian Bale은 인터뷰에서, (앞서 말한) Patrick의 아침마다의 정성어린 자기 가꾸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배우가 연기를 위해 촬영 직전 분장을 하듯, 세상과 어울리기 위한 연기를 하기 위해 Patrick도 분장을 하는 것이라고. 피부 Masque를 벗기면서 Patrick은 말합니다 – “There is an idea of ‘a Patrick Bateman’. Some kind of abstraction, but there is no real me. Only an entity – something illusory. And though I can hide my cold gaze, and you can shake my hand and feel flesh gripping yours, and maybe you can even sense our lifestyles are probably comparable, I simply am not there.”

그러나 그런 가상한 노력은 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에서 우리는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쟤 Paul Allen 아냐? 아니, 그건 Reed Robinson이구, Paul Allen은 저기 있잖아…. 같은 회사에서 몇 년을 부사장으로 함께 있으면서 그들은 아직까지 얼굴을 헷갈려합니다. 그런데 같은 부사장이긴 하지만 남들 눈에 유난히 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인공 Patrick입니다. 특히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부사장으로 묘사되고 있는 Paul Allen은 언제나 Patrick을 다른 부사장인 Marcus Halberstram이라고 생각하는데, Patrick은 그것을 당연하다(logical)고 합리화합니다 – “Allen has mistaken me for this d***head, Marcus Halberstram. It seems logical because Marcus also works at Pierce & Pierce, and in fact does the same exact thing I do. He also has a penchant for Valentino suits and Oliver Peoples glasses. Marcus and I even go to the same barber, although I have a slightly better haircut.” Evelyn의 말로 미루어 보아(Your father practically owns the company. You can do anything you like, Silly.), Patrick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자란 인물처럼 보이며 어쩌면 Harvard도 집안 배경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낙하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교적이지 못한 그의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능력있는 (Yale 출신의) Paul Allen에게 항상 무시를 당하는 Patrick은 마음 속에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Paul에 대한 불같은 경쟁심은 (그 유명한) 명함 장면에서 잘 나타납니다. 자기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예약도 못하고 조롱만 당한 Dorsia에 (그것도) 금요일 밤 자리를 얻었다는 Paul의 자랑에 열이 받을 대로 받아있는 터에, 어제 새로 뽑아 자부심이 대단하던 자기 명함을 무색하게 하는 Paul의 점잖고 품위있는 명함을 보고 Patrick은 이성을 잃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거리의 행려자를 죽입니다. 그 장면에 놀라는 옆의 강아지까지도.

그리고 얼마 안 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여전히 자기를 Marcus로 생각하는 Paul과 저녁 약속을 한 Patrick은, 역시 Dorsia에 갔었어야 했다는 둥, 자기라면 거기 예약을 할 수 있었다는 둥 불평을 하는 Paul에게 슬슬 비위가 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동료의 불편한 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오만을 드러내던 Paul은 결국, 자기가 Marcus라고 알고 있는 상대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Paul 그런데 (네 애인) Cecilia는 어때? 지금 어딨는데? (And uh- Cecilia. How is she? where is she tonight?)
Patrick Cecilia! 어…, 음…., 내 생각엔, 음……, Evelyn Williams하고 저녁 먹고 있을걸. (Cecilia! Uh…, well…, I think she’s having dinner with, ummmm, Evelyn Williams.)
Paul 엉덩이 이쁜 Evelyn 말야? 그 멍청이 Patrick Bateman의 애인이지. 그런 얼간이 놈! (Evelyn? Great ass. Goes out with that loser Patrick Bateman. What a dork!)
Patrick (열 받아서) 마티니 한 잔 더 할래, Paul? (Another Martini,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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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이 오를 대로 오른 Patrick은 만취한 Paul을 자기 아파트로 끌어들여 결국 살해하고 맙니다. 값비싼 양복을 보호하기 위해 우비를 두르고 Huey Lewis and the News의 노래에 맞춰 Moonwalking을 하는 등 코믹한 모습으로 묘사되고는 있지만, 그간 마음에 품어왔던 온갖 분노를 한꺼번에 용솟음치듯 내뿜으며 잔인한 “도끼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는 소리칩니다 – “Try getting a reservation at Dorsia now, you f****** stupid bastard!” 앉아서 cigar를 피우며 처참해진 Paul을 바라보던 그는 곧 시신을 Jean-Paul Gaultier 슬리핑 백에 담아 끌고 나갑니다. Paul의 사망 사실을 당분간 위장하기 위해 그의 아파트에 들른 Patrick은 여행 가방을 챙겨 그가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꾸밉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는 Paul과 자기 아파트의 전망을 비교하며 시기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 “When I get to Paul Allen’s place, I use the keys I took from his pocket before disposing of the body. There is a moment of sheer panic when I realize that Paul’s apartment overlooks the park, and is obviously more expensive than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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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서 암시되는 바로, Patrick이 이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주 훨씬 이전부터임을 알 수 있지만, 어쨌든 화면상으로는 이렇게 Paul을 살해한 이후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살인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살인 도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상천외하고 다양하며 그 방법 또한 매우 잔인한데,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 대상이 주로 여자라는 점입니다. Paul과, 우스꽝스런 이유로 살인에 실패한 Luis를 제외하고는, 행려자나 여자들과 같은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분노와 좌절감을 터뜨리며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도입 부분, 여러 사람들과 어울린 식당 테이블에서 행려자나 여성, 황금만능주의 등에 대한 그의 현학적인 일장연설을 기억한다면, Patrick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입으로는 인권이니 여권(女權)이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면서, 그리고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에게는 힘도 못 쓰면서, 그 울분이나 스트레스를 약자를 상대로 풀고, 그들을 상대로 잘난 체를 하는 이중인격자를(다른 평론에서는 ‘남자들’이랍니다. 형제님들, 죄송합니다.) 대표하는 것입니다. Patrick은 순진한 비서 Jean의 외모를 놓고 함부로 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여자를 비하하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며, 클럽에서 만난 여자 모델을 대놓고 무시하고 약혼녀 Evelyn에게 절교를 선언할 때도 냉혈한이긴 매 한가지입니다. 거리의 여자들을 아파트에 데려다 놓고는, 스스로를 능력있는 Paul로 위장하여 으시대며 평소에 받지 못하던 인정을 얻고자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Patrick 내가 뭐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 (Don’t you wanna know what I do?)
여자들 아뇨. 아니 별로요. (No. No, not really.)
Patrick (무시하고) 거 뭐냐, 난 Wall Street의 Pierce & Pierce란 회사에서 일하는데, 들어본 적 있나? (Well, I work on Wall Street for Pierce & Pierce. Have you heard of it?)
여자들 (전혀 관심없다는 반응)
Patrick (실망한다)
여자들 (집안을 두리번거린다)
Christie 와, 집 좋네요, Paul. 얼마나 주고 산 거에요? (You have a really nice place here, Paul. How much did you pay for it?)
Patrick 사실, 니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싸지는 않았다고 말해줄 순 있지. (Well, actually, that’s none of your business, Christie. But I can assure you, it certainly wasn’t cheap.)

어쨌든 계속되는 엽기적 살인행각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게 된 Patrick은 길에서 고양이를 죽이고, 그걸 보고 뭐라고 하는 할머니를 죽이고, 그걸 보고 추격하는 경찰들을 죽이고, 아파트 수위와 청소부까지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 장면의 묘사가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만화 같기만 한데,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 연출임을 나중에 알 수 있게 됩니다.) 회사 자기 사무실에 쫓기듯 들어온 그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관객도 몰랐던) 살인행각 모두를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는 메시지를 자동응답기에 남깁니다.

다음날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찾아간 Paul Allen의 아파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그런데 그곳은 알고 보니 남의 집이었습니다. 혼란함에 휩싸인 Patrick은 평소 그를 연모하던 자기의 비서 Jean에게 전화를 겁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다시 변호사를 찾아 Harry’s Bar로 나서지만 슬프게도 자기 변호사조차 그를 Davis라는 다른 인물로 착각하는게 아닙니까. 어제 응답기의 메시지를 기막힌 농담으로 받아들인 변호사는 그에게 말합니다 – “Davis, 내가 누굴 험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야, 뭐, 농담이 끝내 주긴 했지만, 그래도 … 자넨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그런 얼간이 Bateman을 두고 그런 농담을 하다니. 얼마나 따분하고 줏대없고 시시한 인간인데….” (Davis, I’m not one to bad-mouth anyone. Your joke was amusing. But … you had one fatal flaw. Bateman is such a dork. Such a boring, spineless lightweight….) 그게 아니라고, 자기가 바로 Bateman이고 Allen을 죽인게 사실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Patrick에게 변호사는 급기야 화를 내며 말합니다 – “하지만 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이런 농담 더 이상 유쾌하지도 않군…. 그건 불과 10일전 내가 Paul Allen과 런던에서 두 번이나 저녁을 먹었기 때문이야.” (But that’s simply not possible, and I don’t find this funny anymore…. Because I had dinner with Paul Allen twice in London just 10 days ago.)

이제까지의 엽기적인 모든 살인 행각이 사실은 그의 머릿 속, 그만의 Matrix에서 일어난 환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Patrick이 Paul Allen의 피가 배어 나오는 슬리핑 백을 질질 끌고 나가도 아파트 수위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아파트 밖의 장면에서 이제까지 보이던 바닥의 핏자국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대로) 충격적인 길거리의 연쇄 살인(특히 경찰차가 권총 한발에 폭발하는 장면)이 너무나 만화처럼 그려진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열쇠는 영화의 도입 부분에 나타납니다. 댄스 클럽의 바에서 크레딧카드를 내미는 Patrick에게 여자 바텐더가 여기선 현찰만 받는다고 면박을 주자, 그녀의 등에다 대고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 “You’re f****** ugly b*t*h! I wanna stab you to death and play around with your blood!” 하지만 바텐더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그에게 술잔을 건네고, 그는 태연히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무시무시한 독설을 그녀가 듣지 못한 것은 클럽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망신을 당한 그 순간 바텐더에 대해 품은 Patrick의 악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런 결말을 두고 ‘비겁하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5장 21-22절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머릿 속에 품는 형제에 대한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살의 등을 이 영화의 실제적인 살인 장면과 다른 것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는 머리로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명하시는데, 어떤 사람더러 바보라고 생각만 해도 그것은 살인이라 말씀하시는데, 이 영화의 끔찍한 장면만을 살인이라고 말할 사람이 감히 있겠는지요? 우리들 머릿 속, 우리들 안의 Matrix 속에서 우리는 오늘 또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지요? –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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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Patrick 안의 또 다른 Matrix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Paul Allen의 행방을 추적하던 형사 Kimball 또한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실제 인물이 아니라면, Kimball이란 인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한 관객에게 안쓰러운 느낌을 줄 정도로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 설레는 마음으로 Patrick을 연모하고, 그의 살인 일기를 읽으며 눈물을 떨구던 비서 Jean. 흉악한 Patrick 조차 죽일 수 없었던 인물 Jean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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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Kimball은 이미 죽은 듯한 그의 ‘양심’을, Jean은 참된 ‘사랑’에 대한 그의 갈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화에서 행려자를 죽이고 난 후, Patrick은 다음과 같이 독백을 합니다 – “살과 피, 피부와 머리카락, 인간임을 나타내 주는 모든 특질들을 나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단 하나의 (인간의) 감정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과 혐오 밖에는.” (I have all the characteristics of a human being – flesh, blood, skin, hair, but not a single, clear, identifiable emotion, except for greed and disgust.) 비록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양심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기에, Kimball의 집요한 추적에 식은 땀을 흘린 것이었을 겁니다. 혐오감 밖에 남은 건 없다고 아무리 우겨대도 그 역시 참된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기에 그 사랑을 차마 죽여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Patrick은 탐욕과 혐오가 넘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약한 육신의 슬픈 자화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우리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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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안] 한국 유학생 사역의 현황 (Big Ten 지역의 Case를 중심으로)

유학생 사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현황
(Big Ten 지역의 Case를 중심으로)


* 아래의 내용은 중서부의 Big Ten 학교 주변에 소재한 9개 지역의 29개의 한인 교회와 미국교회 (한국 유학생 사역이 있는 교회)를 직접 방문과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설문 조사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를 싣고 다음 호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를 싣고자 합니다.


1. 지역, 학생 현황


1) 대상 지역 Penn State와 North Western을 제외한 9개 지역 29개 교회
*Penn State는 지역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Northwestern은 한국 교회가 200개 넘는 대도시에 소재 했기에 설문 대상 지역에서 제외되었음


2) 도시 성격



a. 이민자 중심의 도시: 미네소타 (U of M), 콜롬부스 (OSU)


b. 유학생 중심의 도시 (불루밍턴, 어바나 샴페인, 렌싱, 아이오와 시티, 라피엣, 메디슨)


c. 중간 형태 (Both): 앤아버


3) 한국 유학생 수 (International office에서 나온 자료가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은 지역도 있음): 평균 400-500명, 배우자 포함 600-750명
Illinois (600), Indiana (600), Iowa (300), Michigan (700), Michigan State(600, 학부 200명 포함), Perdue (350), Minnesota (450), Ohio State (800), Wisconsin (500)


4) 학생 구성 (다수):



a. 전체 비율: 대학원 married > 대학원 single > 학부


b. 지역별 특이점:


– 렌싱, 콜롬부스: 대학원 숫자가 많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학부생의 숫자가 많은편


– 어바나 샴페인: 2세 숫자 많음, 대 규모 영어권 사역 (CFC)



2. 교회, 교단, 사역자 현황


1) 교회, 교단



a. 대학 도시에는 평균 3-4개 정도의 한국 교회 존재 그외 지역에서는 유학생이 많이 모이는 교회 선별: 미네소타 3 개, 콜롬부스 5개, 앤아버 5개.


b. 교회 내 유학생 숫자 (평균 출석 인원)
151 이상(2), 126-150 (4), 101-125 (2), 76-100 (5), 51-75(7), 26-50 (7), 1-25 (1) 미파악 (1)


c. 유학생 비율: 전체 교인과의 비율 (평균 출석 인원)
100% (2), 90% (4), 80% (7), 70% (4), 50-60% (2), 30-40% (5), 30%미만 (4), 미파악 (1)
* 특이사항: 교환 교수, 의사들, 단기 연수 공무원이 출석교인의 10% 정도


c. 교단별 현황: 감리교>장로교>침례교>독립 교단
-퍼듀와 위스칸신을 제외한 7개 지역에 UMC (Unitend Methodist Church)교회
– 앤아버, 렌싱, 아이오와를 제외한 6개 지역에 PCUSA (Presbyterian Church of USA)교회
* 이유: UMC, PCUSA, 남침례교의 교단적 차원에서 교회들을 개척하고 경제적도 지원했 기 때문. 그리고 UMC와 PCUSA의 교단 내에 학원 사역 협의회가 있음 (Campus Ministry Committee)


d. 교회 성격: 출석수의 다수에 따라 교회의 성격을 구분
– 이민자 교회: 미네소타(3/3), 콜롬부스 (3/5), 앤아버 (2/5)
* 이 세 지역은 유학생이 20명 이상 있는 교회만 설문 조사를 함
– 유학생 교회: 그 외 모든 지역
* 특이점: 유학생이 다수 이지만 사역의 초점이 이민자 중심의 교회들도 많이 있다.
– 영어권 2세 독립 교회: 어바나 샴페인, 앤아버


2) 사역자



a. 연령: 30대 중반 (1), 30대 후반 40대 초반(7), 40대 중반(6), 40대 후반 50대 초반 (1), 50대 중반(9), 50대 후반 60대 초반(2), 60대 중반(2), 미확인 (1)


b. 배경: 공통적인 것은 거의 다 미국 유학 경험 (1분 선교사 경험, 다른 나라 이민 목회 1명)을 갖고 있고, 이민 목회 혹은 유학생 사역 경험이 있음. 그리고 1.5세 사역자 (중고등학교나 대학을 미국에서 마친 분)도 3명 있음


c. 부 교역자


– 유학생 (청년부) 사역을 위한 부 교역자: 미네소타(4), 인디아나 (1), 일리노이 (1) : 전체 6명이고 100% part timer.
* 이유: 대부분 그 지역에 신학교가 없고, 재정적인 문제로 유학생 사역을 위한 부교역자를 두고 있지 못함 : 대안- 간사 제도, 부장 제도, Coordinator.


– 영어권 부 교역자: 앤아버(4), 미네소타 (3), 아이오와 (1), 콜롬부스 (1), 인디애나 (1), 렌싱 (1), 위스칸신 (1): 전체 12명 (독립된 2세 교회 제외)이고 그 중 4명이 full timer.
* 이유: 한국어권 유학생은 담임 목사님이 직접 맡으시고 영어권 부 교역자를 따로 두는 형태 or 1세와 영어권 사역에 비해 유학생 사역이 우선 순위에서 떨어짐.


3. 사역의 Focus (다수 A>B>C)


1) 구성원에 따라 (majority)



Type A: 유학생 교회/ Type B: 이민 교회 / Type C: 중간 형태


2) 목회자와 리더십의 사역 철학



Type A: 유학생 사역 중점/ Type B: 이민자 사역 중점/ Type C: 구분 없이


3) 실제적 양상: 사역 구조, 내용, 행정



Type A: 전통적 한국 교회 스타일, 교회를 manage 하는데 focus. 맹목상 유학생 사역, 청년부라는 하나의 부서에 제한된 형태
Type B : 유학생 전도 제자훈련 양육 파송에 focus




4. 유학생 사역의 구조 (다수 A>B>C>D)


1) Type A: Single 과 Married로 나눔:부서 임원 리더의 이원체제 (청년부/ 청장년부)



A-1: Single 과 Married 모임 따로 (싱글: 청년회, 성경공부/ Married: 청장년부, 유학생끼리 소그룹, 속회, 구역, 목장)
A-2: Single 과 Married로 나누고 Married는 이민자와 함께 구역으로 편성
A-3: Single과 Married로 나누고 Married를 신혼(무자녀)과 구혼 (유자녀)로 나눔.


2) Type B: Under와 Graduate로 나눔



B-1: 학부와 대학원만 분리
B-2: 학부/ 대학원 single /대학원 married로 분리


3) Type C: Single 과 Married 같이: 일원체제 (부서, 임원, 리더)



C-1: Single 과 Married 전체모임 같이, 소그룹도 섞어서.
C-2: Single 과 Married 전체 모임 같이, 소그룹만 따로


4) Type D: 구분 없이 이민자와 함께 목장/속회/ 구역에 소속



5. 유학생 사역의 내용 (다수 A>B>C>D)


1) 소그룹:



a. 소그룹 형태
Type A: 성경 공부 중심- 소그룹 성경 공부
Type B: 교제 중심 – 구역/ 속회
Type C: 교회 봉사와 관리를 위한 행정 구조 중심
Type D: sharing 중심- 목장


b. 소그룹 인도
Type A: 학생 리더
Type B: 부장 (집사, 이민자, 유학생 출신, 교환 교수)
Type C: 교역자가 직접 (목사, 전도사)


c. 성경 공부 형태
Type A: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Type B: 전체로 같이


d. 모임 횟수
Single: 매주/ Married: 매주> 격주> 월별


2) 경배와 찬양: 주로 sinlge들 모임 (청년회)의 중심 역할 :찬양 team


3) 기도회: 새벽, 전교인, 캠퍼스, 아줌마, 중보 기도 team.


4) 구역장/ 속장/ 인도자 모임


5) 조장훈련/ 제자 훈련: 양육과 제자 훈련 중심의 교회에만 한정
* 실제 현황: 유학생 사역의 구조와 내용은 목회자의 사역 철학, 구성 인원, 훈련된 리더 숫자, 담당 부서 사역자의 유무, 교회의 현실적 상황, 학생들의 need 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Quality는 교회 전체의 건강도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6. 교회 전체 사역과 유학생 사역 (다수 A>B)


1) 교회 행정과 유학생 사역



a. Type A: 교회 행정과 의사 결정은 이민자 중심/ 유학생 사역 내용은 유학생 자치적
b. Type B: 교회 행정과 의사 결정 구조에 유학생 참여 비율 높음
* 대학촌의 유학생 교회일수록 Type B가 많음
* 대학촌의 유학생 교회들은 당회나 제직회 보다 실제적으로 목회 협력 위원회, 임원회, 운영 위원회를 중심으로 행정과 의사가 결정됨
* UMC 교회일수록 행정과 의사 결정에 유학생의 참여도가 높음 (But 사역 내용과는 무관)


2) 교회 전체 사역에 유학생 참여도



a. 주로 성가대원, 주일 학교 교사, 식사 당번으로 봉사. cf. 관리, 청소
b. 위의 Type B의 교회에서 임원회, 목회 협력 위원회, 운영 위원회 제직회에 참여




7. 다른 형태의 유학생 사역


1) 미국 교회 내의 한국 유학생 사역부 (아이오와, 미네소타)


2) 캠퍼스 모임 (인디애나: 경배와 찬양, 기도회 중심)




8. 지역내 다른 교회와의 관계, 협력과 연합


1) 현황: 지역에 따라 다양함



a. 거의 관계를 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갈등도 없는 지역
b. 갈등이 심한 지역
c. 표면상으로 협력 하는 지역
d. 협력과 연합이 잘되는 지역


2) 협력과 연합의 유형



a. 학생들 차원 b. 목회자 차원 c. 교회 차원


3) 협력과 연합의 유형



a. 신입생 contact 연합으로 (미시간, 어바나 샴페인, 미네소타)
b. 연합 기도회, 찬양 모임, 체육대회
c. 개강예배, 신입생 환영회, 부흥 사경회, 유학생 전도 집회
d. 부활절 새벽예배, 성탄절 찬양 집회
e. 목회자들의 정기적 교제, 강단 교류

[안종혁]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본 칼럼의 제목은 장래 진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마음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에 가고 싶으나 마땅한 직장이 없다. 별수 없이 미국에 남아서 살고 싶기도 하지만, 미국 이민 생활에 자신이 없고 두렵다. 결국 IMF 경제한파가 유학생들의 진로 결정에 진퇴양난을 몰고 온 셈이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일찍이 예고하고, 나는 KOSTA 2000에서 “미국을 점령하는 유학 생활”이라는 다소 이상한 세미나 제목으로, IMF 경제 한파 뒤에 유학생들이 진로 결정을 하게 될 때 예견되는 혼란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미국을 점령하는 유학 생활”에서 내가 주장하였던 논제의 근본을 유지하며, 이를 다시 글로 써서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크리스천의 직업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논할 의사는 전혀 없다. 이미 크리스천 직업관에 관하여서는 이코스타의 여러 필진에 의해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본다. 또한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지가 거의 15년이 지났으니, 한국에서 취업을 어떻게 하고 또 어떤 방법을 써야 되며,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지는 유학생들이 나보다 더 밝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은 좁고”의 논제는 유학생 여러분에게 맡겨두는 편이 더욱 좋다고 생각되며, 도리어 내가 좀더 경험했고 또 자신있는 “미국은 두렵다”의 논제에 주요 관점을 두고 본 칼럼을 쓰고자 한다. 아니 차라리 “미국에서 직장을 얻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되나요?” 또는 “미국 생활에서 겪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어떻게 두려움 없이 극복하며 살 수 있나요?” 라는, 수 많은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질문에 나의 경험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고 싶다.


K형제의 고민


지금 학위취득을 앞에 둔 유학생 K형제의 고민을 들어보자.


“최근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학위 논문 심사를 몇 달 앞에 남겨 둔 K형제의 (학위 취득 후) 취업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수년 동안의 힘든 학위 과정을 이제 거의 마쳐가고 있지만, 앞으로의 취업과 진로 문제를 생각하면, 학위 취득의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형편이다. IMF 경제 한파 이후에 고국에서 보내 주시던 향토 장학금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생활고에 지친 아내의 불평을 감내하는데도 이제 힘에 겨워지고 있다. 최근 학위 취득 후에 취업이 늦어지면서, 유학생 부부들의 가정 불화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통계는 여간 불안한 소식이 아니다. 이에 더하여, 최근에 실직하신 부모님께서는 학위 취득 후 빨리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얻어서, 부족한 가계를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눈치이시다.


게다가 최근에 공부를 마친 선배들이 고국에서 직장 찾기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취업의 문이 참 좁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행히 미국이 경제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직장을 얻기에는 한국보다는 나은 형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가 쉽지도 않지만, 또 얻는다 해도 어떻게 미국에서 계속 살아 남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려우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 자신감이 없다.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 여쭈어 보지만, 주님의 응답은 더디기만 한 것 같다. ‘주님, 한국입니까, 아니면 미국입니까?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K형제는 요사이 주님께서 한국에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에 살아야 하는지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K형제의 고민은 현재 거의 모든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공통된 고민이요, 또 기도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의 상황과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10여 년 전에 유학생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 미국에 남게 된 나의 경험담은 여러분의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학위를 마칠 때까지 꿈 속에서조차도 생각지 않았던 나의 미국 이민 생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꿈도 꾸지 않았던 미국 이민 생활


내가 학위를 취득하던 90년대 초만해도 미국의 경제는 극히 나쁜 상황이었다. 일본의 경제력이 너무 막강하여서 미국이 이제 망해가고 있다는 패배감이 팽배할 때였다. 따라서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학위 취득 후에 한국에 돌아가길 원했다. 또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직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절이라서, 나의 유학 동료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도 물론 학위 취득이 가까워지자,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하여 몇몇 대학에 지원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고무적이지 못하였다. 특히 서른이 훨씬 넘어 늦게 유학을 와서, 동료들 보다 학위 취득에 시간이 더 많이 걸렸고, 나이가 마흔이 가까워서 학위를 취득하게 된 탓도 있었다.


그런데 학위를 마쳐 갈 즈음에 크리스천으로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만한 도전이 있었다. 유학 생활 동안 나의 믿음의 본이 되었으며, 또 믿음의 동역자로 같은 교회에서 유학생을 섬겼던 믿음의 동지인 P형제가 학위 취득 후에 가족과 함께 M국에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섬기던 교회에서 P형제를 M국 선교사로 파송할 때, 나는 그 교회에 선교부장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 당시는 M국의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았고, 대단히 위험한 시기였다. 그때 주님은 나에게 M국에 나간 P선교사의 사역을 지원할 독립적인 선교회를 미국에 세울 것을 요구하셨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어찌 말씀하시든지 한국에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국제 바울선교회(PIM)를 조직하고, 미국 정부에 비영리 선교회로 등록까지 마쳤다. 나는 총무 간사로서 M국 선교 지원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사실 나는 속히 한국에 돌아가기 위하여 가능하면 빨리 국제 바울 선교회의 재정적인 자립을 이루고, 또 장기적인 P선교사의 선교 지원 교두보를 미국에 확보해 두고 싶었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 후에 나는 귀향하는 군인처럼, 선교 사역의 부담을 던져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계속 내 마음에 부담을 주시며, 미국에 남아서 국제 바울 선교회를 섬기며 M국 선교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셨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그때까지 학위 취득 후에 미국에 남아서 직장을 잡고 살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꿈에서 조차 없던 터였다. 물론 수년 동안 주님께 한국에 돌아가서 대학 교수로 젊은이들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 오고는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저 유학 생활이 끝나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 생활의 압박을 다시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 없는 영어 실력을 가지고 미국사회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까에 도통 자신이 없었다. 이때에 주님은 몇 년 전 내가 유학 생활이 힘들어 눈물 흘릴 때에 그 눈물을 닦아주시던 주님의 은혜에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께 드린 나의 신앙 고백을 생각나게 하셨다 – “주님! 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하고,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미국에 남기로 작정하였다. 내가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 많은 기존연 구원들을 계속 해고하고 있던 IBM Watson 연구소에서 나를 박사후 연구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꿈도 꾸지 않았던 나의 미국 생활(이민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미국에 남기로 한 후에 가장 먼저 나를 괴롭게 한 것은 한국 유학생으로서 미국에 온 나의 정체성(Identity)이었다. 미국에 사는 나는 한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인가? 나는 어차피 두 문화에 접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이민 1세이지만, 나의 자녀와 후손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 결국 내 후손들의 피부는 나와 같이 계속 동양인의 모습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인종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인가? 꼬리를 무는 수 없는 질문들로 날을 지새웠다. 아마 지금도 미국에 남아 살기로 작정한 유학생들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고민하고 있을 것이 틀림 없다.


재미있는 미국 생활


내가 지금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초임 조교수로 부임해 온지도 이제 7년이 되었다. 새로운 대학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숨가쁘게 바쁜 나날들이었다. 열심히 연구하고, 또 가르쳤다. 또한 주님의 사역 때문에 대학에서 일하는 만큼의 또 다른 바쁜 스케줄 속에 보낸 날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총무 간사로서 바울 국제 선교회를 섬기고 있다. 주님은 바울 국제 선교회를 축복하셨고, 본 선교회를 통하여 M국 선교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 바울 국제 선교회는 작은 사람들이 섬기는 구멍 가게 같은 선교회지만, 결코 작은 선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나의 연구 프로그램은 이미 대학 내에서 뿐만 아니라 내 연구의 전문 분야에서도 영향을 크게 끼치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하였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세계 각국에서 내 연구실을 견학하고자 하는 방문객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대학에서 견학오신 교수들을 만나게 되면, 거의 어김 없이 언제쯤 한국 대학으로 들어올 계획이냐고 묻는다. 아마 그분들이 보시기에는 한국 대학의 교수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 내가 근무하는 미국 대학에서 훈련을 잘 받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모양이다. 또 실제로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하여 미국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는 젊은 교수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질문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상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마치 백인 미국 교수에게 가서 한국 대학으로 언제 들어올 거냐고 물을 때, 백인 미국 교수가 느끼는 당혹스런 감정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거의 비슷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처럼 주님께서 명하시고, 허락하신 땅이면 내가 살 땅이라고 믿고 산다. 그래서 나는 한국은 고국으로 믿고 살고, 미국은 내 땅이라고 믿고 산다.


요사이 미국에서는 이민 신학이라는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다. 하나님이 명하시고 허락하신 땅이면, 내가 살 땅이라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이민 신학에 근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은 저들의 조상이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던 이방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명하시니,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고, 또 그들의 자손이 거기서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배우며 산다. 또 내 평생에 고칠 가망이 전혀 없는 영어의 엑센트를 여전히 유창하게 쓰면서, 오늘도 자유롭게 미국 땅을 누비고 다닌다. 다민족이 어울려 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미국 생활이 나는 참 재미있다. 내가 미국에 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수 많은 주님의 사역에 참여해 오면서, 왜 주님이 나를 미국에 남겨 두시기를 원하셨는지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한때는 나도 K형제처럼 “주님!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라고 두려움 가운데서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 이민 생활이 자유로워져서 “한국 대학의 교수로 언제 들어올 계획입니까?”라는 질문이 이상한 질문으로 들린다. 그래도 나는 언제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어느 곳으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움직이는 이민 생활의 참 자유를 맛보고 있다. 결국 한국입니까, 미국입니까를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고민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물어야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크리스천은 결코 진로를 결정하는데 향방 없이 나아가지 않는다.


다음 회에서는 미국에서 전문직을 가지고 이민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위하여,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민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주명수]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 한계

복음과 법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 한계


대법원은 지난 7월 13일 시민 단체 등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의 한계를 정하는 판결(98다51091)을 하나 내렸다. 그 판결 요지는 시민 단체 등의 공익목적수행을 위한 활동은 바람직하고 장려되어야 할 것이나 그러한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이라 하더라도 법령에 의한 제한이나 그러한 활동의 자유에 내재하는 제한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결은 곧 비록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민 단체등의 활동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다는 내용인 것이다. 지난 1996년 10월 당시 미국인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이 내한하여 공연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반대하던 시민 단체가 내한 공연을 개최한 공연 기획사와 공연입장권 판매 계약을 맺은 은행들에 대해 공연 협력을 중지하지 않으면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대법원은 이 시민 운동을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과 관련한 공연 기획사(원고)의 채권등을 침해한 것으로 위법하며 그 목적에 공공성이 있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시민 단체들의 활동을 약간 살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을 반대하던 시민 단체들은 위 공연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다수의 시민 단체 회원을 동원하여 문화 체육부 장관실, 문화 체육부 공연 예술과, 한국 관광공사 사장실 및 업계 지원부 국장실, 서울방송 문화 사업부 등을 상대로 위 공연 개최에 대한 항의 전화 걸기를 하고, 주식회사 금강기획과 현대그룹 본사 앞으로 위 회사가 공연 기획사와 위 공연에 공동 주관사로 참여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에 항의하여 위 공연에 대한 후원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위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문화 체육부는 조건을 붙여 공연을 허가하였고 시민 단체들은 계속하여 공연 허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위 공연의 중계가 예상되는 방송사에 대해 항의하고 시청 거부 운동을 벌이겠다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으며, 위와 같이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을 체결한 은행들에 대해 입장권 판매를 즉각 취하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장권 판매를 계속할 경우 전 국민 차원에서 은행의 전 상품 불매 운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서한을 은행 측에 보냈다. 이와 같은 시민 단체들의 서한을 받은 은행 측에서는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을 취소하였고 공연 기획사는 임시 직원을 직접 고용하는 등으로 입장권을 판매함으로써 공연은 예정 대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공연 이후 기획사는 시민 단체의 위와 같은 행위로 손해를 보았다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원래 이 사건에 대하여 고등법원은 원고 패소의 판결을 내려 시민 단체의 그러한 운동이 위법성을 띠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즉, 시민 단체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통상 시민 단체가 취할 수 있는 전형적인 운동 방법의 하나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불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위 각 은행의 의사 결정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침해 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 허용될 수 있으며, 이는 시민 단체의 행위 범위 안에 속하거나 적어도 상대방의 수인 범위 안에 속하므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고등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위 각 은행이 공연 기획사와의 계약을 취소하기로 한 것은 시민 단체들이 보낸 서한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이었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영업 판단에 따라 선택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즉, 스스로 입장권 판매 대행에 의한 이익과 시민 단체의 불매 운동으로 인한 영업 손실을 비교 교량하여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를 뒤엎고 위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영업적 판단을 한 것인지 시민 단체로부터 서한을 받고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한 것인지 심리를 더 하라며 고동법원으로 돌려 보낸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위 각 은행이 시민 단체가 보낸 서한에 따라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다면 시민 단체의 행위는 위법하다는 판단이다. 생각컨대, 대법원은 각 은행이 시민 단체로부터 불매 운동을 할 것이라는 서한을 받은 후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 같다. 위 각 은행들이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건 자발적으로 내렸던 간에,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공익을 위한 것이라도 시민 단체의 행동에서 위법성이 인정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판결로 말미암아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활동도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통상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은 불매 운동, 시청 거부 운동, 항의 서한 발송, 항의 전화걸기, 항의 이메일 보내기 등 비폭력, 불복종의 방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고 이와 같은 행위는 일반적으로 위법하지 않은 행동으로 용인되어 왔다. 기독교인들도 이 정도의 행동은 불의에 대해 항의하는 최소한의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판시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행동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위법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시민 단체등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면 건전한 공익 목적 수행의 운동이 위축될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근래에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는 건전한 시민 단체들의 공익 활동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시민 단체들의 활동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자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건전치 못한 시민 단체를 만들어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런 경우까지 그들의 활동을 보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건전한 시민 단체로 보편적으로 평가받은 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법적인 보장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건전한 시민 단체들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들이 크게 위축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더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사회 참여의 방법으로 시민 단체에 참여하여 공익적 활동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 판결을 주의 깊게 숙지하여 공익적 활동을 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 하도록 지혜롭게 행동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1. 문화(culture)와 세계관(worldview)


인류학(anthropology)에서는 ‘사람이 살아나가는 삶의 총체’를 가리켜서 ‘문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람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사회에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험한 세상에서 생존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과 그 결과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문화’라고 말한다. 따라서 집단을 이루고 사는 모든 인간 사회는 문화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문화가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또한 그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정신 및 물질 세계를 다 포함한다. 문화를 장기 게임에 비교해 보자. 장기를 두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장기라고 하는 게임의 내용들, 그리고 이 게임에 부수되는 모든 것들을 문화의 내용들이라고 말한다면, 이 장기 게임의 규칙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규칙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키며 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삶의 규칙은 문화권들마다 다르고 또 세분하면 사회마다 다른데, 그 이유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민족 혹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같은 말을 사용하고 같은 관습 속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며 살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정신적인 힘과 그 구조를 가리켜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관의 내용들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이해’란 ‘세계관의 이해’와 다름 아닌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요, 한 문화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의 내용과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또 서로 다른 문화권의 세계관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해할 것인가? 본 소고가 계속 다루고자 하는 주요 관심이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다. 세계관의 개념이 비록 전문적이고 기술적이기는 하지만, 이 개념에 익숙해지게 되면 다양한 문화권에 노출되어 살며 사역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인간의 다름과 다양함이 문화적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데에 큰 힘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의 이해를 추구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서이다. 참 인간애(人間愛, the loving of people)는 진정한 인간 이해(人間理解, the understanding of people)에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의 절정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닿아 있음을 잘 증명해 주는 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러한 삶이 기독교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사랑과 선교의 실천을 위하여서 그리스도인들은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2. 세계관이란?


세계관이란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실재(reality)에 대한 인식(perception)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철학이나 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지성인들이 고민하면서 얻어낸 그러한 종류의 철학적 세계관과 다른 개념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구태여 증명하고자 하지 않고, 늘 믿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이해들을 가리킨다.


Piaget나 그의 영향을 받고 세계관의 개념을 발전시킨 Kearney와 같은 학자들은 세계관을 형성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환경을 꼽는다. 이에 대하여 나 자신도 실제 사역과 현장 연구 등을 통하여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은 환경이라고 하는 실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변 환경을 통하여 자기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면서 형성된 믿음의 전제들(assumptions)과 가치들(values)과 감정들(emotions)을 포함하는 사고의 구조를 세계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환경은 특별히 물리적인 환경과 사회적 환경과 정신적(혹은 영적) 환경의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리적 환경은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환경, 즉 지형이나 기후 및 동식물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환경은 어느 한 집단이 계속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른 집단들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 역시 사회적 환경에 포함된다. 따라서 정치적 내지 외교적 기술을 필요로 하는 환경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환경에 대하여서 일반 문화인류학자들은 거의 동의한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의 정신적 혹은 영적 환경은 많은 경우에 무시되거나 간과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진화론에 입각하거나 실증주의와 이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정신적 혹은 영적 세계는 사람들의 환경이기보다는 하나의 내면의 현상 혹은 자연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서구 세계에 속한 대다수의 사회는 영적 세계와 여기에 속한 영적인 존재들을 자신들의 주변 환경으로 믿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역하고 또 현장 리서치를 하였던 아프리카 동해안의 스와힐리(Swahili) 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진(jinn)이라고 하는 영들과 또 아프리카 전통인 미지무(mizimu) 영들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며 이 영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온갖 종교 의식들을 만들어낸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이처럼 영들을 다루는 종교 의식들을 발달시킨 것은 이들의 세계관 때문이다. 이들이 역사 속에서 계속 경험하여 온 영적 환경에 대한 인식이 이들의 세계관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세계관은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은 물리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라고 하는 환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우주 및 영적 환경에 대한 이해들로 구성되어 있다. Redfield나 Kearney 등의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보편적인 인간의 인식 범주들이다 – 이에 대하여서는 차후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환경들을 어느 한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들과의 만남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문화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든 문화의 부산물들과 제도 및 관습들은, 주위 환경들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그 문화권 사람들의 세계관의 반영이기 때문에, 문화적 형식들을 깊이 연구하게 되면 그들의 세계관이 보이게 된다.


문화 충격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세계관의 충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문화 충격을 훨씬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의 기술도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더 진실하게 사랑하기를 원한다.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힘은 진실한 인간 이해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러한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기 위하여서 많은 독자들이 세계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다음 호에서는 한 개인의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하여, 즉 문화화(文化化) 과정이라고 하는 enculturation에 대하여, 그리고 그 결과 형성된 세계관의 구조와 기능들에 대하여, 예를 통해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