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희] 교직생활 첫해를 돌아보며

이코스타 2003년 1월호



언젠가 이코스타 에 “다양성에 대한 이해”라는 글을 투고 한 적이 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갖는 편견 의식과 이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다루었다. 우리 사회에 소외 되는 이웃들이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한국 사람들의 삶에 뿌리 내린 유교 적인 문화와 전통 때문에 서양 사람들 보다 그 이해가 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다고 본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고 학업에 열중하다 보니 흔히 소외된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는 일에 게을러 지기가 쉬울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소외 된 이웃들을 주제로 한 글을 연재하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장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어느덧 5 년 째,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교육학에서 배운 내용만을 가지고 현실에 뛰어든 나의 교사 생활 첫 해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공부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생 실습을 통해서 미국의 공립 학교가 어떠한 곳이고 또 장애 아이들이 있는 특수 학급이 어떤 곳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내가 실습을 나가면 언제나 담당 교사가 함께 나와 있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는 없었고 모든 학생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졸업 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이다.


처음 내가 맡은 학급은 주로 4 학년과 5 학년의 학습, 정서, 그리고 정신 지체를 가진 학생들이었다. 서양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비록 4, 5 학년 아이들이지만 키도 나 보다 크고 덩치도 크며 장애가 있는 지라 성격들도 일반 4, 5 학년 아이들에 비해 많이 달랐다. 더군다나 동양인 교사이기 때문에 얼른 아이들과 친해지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 아이들을 처음 만나서 수업을 하는데, 세상에! 혼자서 그 아이들을 다루는 데는 내가 너무 부족했다. 첫째,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나로 써는 문화와 관습에서 오는 차이 때문에 대부분의 미국 학생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들은 자기 주장이 강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이에 상관 없이 이야기 했으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좋고 나쁜 행동을 해서라도 행동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어린이들은 아니 요즘은 많이 달라 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어른 공경이 우선 인지라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때와 장소를 가렸으며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줄로 알았는데,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그렇지 못 했다.


학부 과정에서 특수 교육의 정신 지체를 공부한 나는 학습 및 정서 장애에 대한 기본 적인 지식 외에 전문 지식이 부족 했기 때문에 그들을 지도할 때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이해와 교육 방법이 부족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업이나 부모님들과의 상담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정신 지체 학생들에게 맞는 교육 방법이 학습 장애나 정서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적용 했을 때 아무리 특수 교육의 일부라도 효과적이지 못 할 때가 많이 있었다. 자기의 능력에 맞게 효과적인 교육 효과를 보지 못 한 아이들은 학습 능률이 오르지 않았고 집중력이 약해서 딴 짓만 했으며 다른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심지어는 수업 까지 방해를 놓을 정도 일 때도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의욕 보다는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기를 좋아했으며 노력 보다는 공짜로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곤 했다. 그래서 학습 장애와 정서 장에에 대한 공부를 해서 다시 라이센스를 받았다. (참고: 조지아에서 교사 자격증 취득 시 자기가 전공하지 않는 분야를 가르치게 될 경우 3년 안에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라이센스를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장애가 다르듯이 그들의 학부모님들 역시 한국 부모님들에 비해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서 한 번도 가정 문제나 불화를 겪어 보지 않고 자란 나로 써는 나의 학생들의 부모님들과 그들의 가정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극심해 져가는 미국의 가정 문제들을 배우고자 Family service (family therapy)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 학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성장 및 발달 과정을 비롯해서 현대 가정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책,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무조건 공부만 마치면 내가 일 하고 있는 분야에서 잘 할 것이라고 착각에만 빠져서 헤 메이고 있던 나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나의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보여 주셨고 그 현실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결책까지 가르쳐 주셨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나 힘든 순간들이 많았던 쳣 해는 그렇게 지나갔고 해가 갈수록 일은 수월해 졌고 요령도 생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침으로 특히 소외된 이웃들을 섬긴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에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었다. 비록 부족한 아이들이지만 그 부족함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 자신이 더욱 더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얻고 결국 소외된 이웃들을 섬긴다는 그 자체가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행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셈이다.

[이시훈]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이코스타 2003년 1월호

2002년 한 해 동안 매달 집계되는 도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지속적으로 높은 순위에 오르는 책 중에 탁닛한 스님의 ‘화( anger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그렇게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보니,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라는 부제가 눈을 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내적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인생에 아주 커다란 장애로 삼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첫 장의 소제목 ” 눈을 돌리면 화나는 것 투성이다.”라는 문장은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퍽이나 공감이 가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작고 사소한 일들의 어긋남에서 오는 짜증에서부터 삶 자체를 흔들 정도의 분노를 느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화나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살펴보면 우리의 생활 반경을 둘러싼 모든 것이 삶의 도전을 요구하며 극복해야할 벽으로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달콤한 아침잠을 방해하는 밖의 소음, 출근길의 정체된 차량, 일터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 가족 간의 갈등, 세대 차, 사회에서 느끼는 불평등, 범죄에 대한 불안, 경제적 압박감, 불투명한 미래, 환경 오염, 건강의 악화, 신문을 가득 채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비리….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를 화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 투성이인 것 같아 특정한 대상도 없이 증오심과 적개심을 마음 한 구석에 키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탁닛한 스님은 시기, 절망, 미움, 두려움은 모두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독이며 이 모든 것들을 합친 것이 ‘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화를 마음에서 제거하기 위해 호흡법, 보행법, 내면과의 대화등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이것을 폭발하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걸으면서 분을 삭히는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원인을 살피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점검하는 실제적인 방법이 무척 효과적이고 유용할 것 같다는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화를 참고 삭히면 마음의 병으로 남고 그 상처는 육체의 건강마저 위협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진심으로 화해하지 않은 분노는 마음의 가시로 남아 자신과 남을 날카롭게 상처 입히고 마는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젠가 더 심하게 곪게 마련이니까요.


저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화를 이끌어 안고 제거하는 훌륭한 방법들과 그것으로 인해 인격의 변화와 관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적인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서 화를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가 성내고 분노하는 많은 이유가 인간의 권력의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식, 내 뜻 때로 순종하고 따라주지 않는 하급자나 자녀, 세상이 나를 인정하고 내 위주로 변화되어지면 좋으련만 세상은 나를 보고 변하라하니 화가 나는 것이지요. 동료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강한 의지만이 내게 중요하게 느껴지고 나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세상은 정말 짜증나고 답답한 곳이 되어 버립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나의 유익을 빼앗으려는 적인 것만 같이 느껴지지요.


현대 영화들을 보면 많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가치관을 가지고 논리적인 개연성이 없이 행동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계획이나 감정을 건드리는 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나의 존재만이 절대 가치라는 듯한 유아독존의 주인공이 가혹하게 화를 발산할수록,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지경이니 비판적인 반성의 여지가 없겠지요. 타인의 인격과 존재에 대한 관심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게 스러지는 엑스트라에 대한 기억만큼 미미한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포함된 아주 작은 범주 외의 타인들을 마치 정물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까지 분석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왠지 서글픈 느낌마저 드는군요.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까 염려하거나 폐를 끼칠까 조심하는 등의 배려심은 훈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촌이 잘되니 기뻐서 미소가 번지는 마음이라면 질투에서 시작된 미움과 화를 염려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타인의 갖고 있는 관심사나 목적이 나와 상반되는 것일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면, 나와 다르다는 것, 나의 유익이나 편리에 장애가 된다는 것 때문에 불쾌하고 좌절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녀가 갖고 있는 장래 희망이 내가 꿈꾸는 것과 너무 다르다거나, 지금 보여주는 성과가 나의 기대와 너무 동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저 자신 얼마나 자주 분개하고 성을 내는지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이의 마음 속에 있는 소박한 꿈을 귀하게 여기며 개성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 범위에 눈 높이를 맞추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아이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할 때만 그 일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화를 내거나 품는 일은 우리의 욕망, 권력의지,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힘과 질서가 있으며 어떤 목적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해서 조급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기다리며 지혜를 구하는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무질서와 오염으로 뒤덮인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곳임을 발견하는 순간 이곳은 아름다움 정원이 되는 것이지요. 나의 시각과 행동과 마음이 어떤 수행으로 변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깊숙한 곳에라도 뛰어들고 싶습니다. 타인을 위해 내 유익을 포기하고 마음이 더 아플 수 있다면, 하루라도 분을 내지 않고 공감과 연민의 감정으로 남을 이해할 수 있다면 …..


주님께서 내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불 속에 던지라고 하신 말씀은 거짓되고 상한 부분을 완전히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나와 너와 그리고 그들이 세상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성스러운 속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형상인 사랑의 능력을 깨달을 때 내가 변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저는 경험하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모든 것을 치유하고 감싸며 모든 것을 이루며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무한한 힘인 것입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린도 전서 13 : 4,5 )


이미 우리 손에 모든 해답이 주어진 것 같군요. 서로 사랑합시다.!!